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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ㅣ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 책의 소제목 "글쓰기"에서 표현의 욕구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과 진부한 것을 늘어놓는 것 사이에서 흔들린다고 했다. 무언가 말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 같고, 또 너무 많은 것을 말하는 것 같았던 걸까. 롤랑 바르트는 꼭 맞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지적인 겸손을 부린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말로 표현되어 있는 이 책을 보면 롤랑 바르트는 지적인 오만을 부리는지도 모르겠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동안 그 사랑하는 주체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문형들을 제시하고, 각 문형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잠들어 있던 문장들을 끄집어낸다. 사랑에 대해 의식 속에 머물러 있던 것을 글로 깊이 파헤쳐 표현한다.
그래서 이 문장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품는 온갖 불가해한 감정들에 대해 정의를 내려준다고 할까. 한창 연애중인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들켜버린 것처럼 가슴에 와닿을 수 있고,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들도 오래전 연애의 감정을 되새기며 자신의 사랑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수 있다. 현실의 사랑과 글로 표현된 사랑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사랑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이런거구나.. 글로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서 롤랑 바르트의 글은 매혹적이다.
이 책은 80가지의 사랑의 단상을 소제목으로 하고, 소제목 바로 아래에 간결한 문장으로 본문을 요약하는데, 이 요약줄만 읽어도 좋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를 사랑의 주체로 하면서,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의 한 단상을 끄집어 낸다. 그 단상과 관련된 다양한 책들에서 인용된 짧게는 한줄의 파편과 롤랑 바르트만의 글쓰기가 이어진다. 한줄의 파편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저자의 글과 융합되는지, 저자의 엄청한 독서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글로 옮겨진 롤랑 바르트만의 사유 체계는 범속한 나에게는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공감가는 부분이 없지 않아 읽을만 하다며 위안을 해봤다. 나를 사로잡은 몇 문장들은 그 문장만으로도 명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본문 전체를 읽어 가야만 문장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몇번을 곱씹어 읽어야 한다. 80개의 단상으로 구성되어 있어 호흡이 짧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몇개의 단상이라도 온전히 내것이 된다면 사랑 이야기 안의 존재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사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실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지만, 사랑 안에 있는 나는 그것의 실존은 보지만 본질은 보지 못한다.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첫번째 고백을 하고 난 후의 '난 널 사랑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텅 빈 것처럼 보이기에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과거의 메시지를(어쩌면 똑같은 말로 전달되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사람으로부터 갑자기 나를 건드리러(매혹시키러) 오는 것은 때로 목소리이기도 하고, 때로는 처진 어깨, 가냘픈 몸매, 따뜻한 손, 미소지을 때의 모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미학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무엇인가가 내 욕망에 정확하게 부합되었으므로(내가 전혀 모르는) 스타일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첫번째 단계는 즉각적인 사로잡힘의 단계이다. 이어서 일련의 만남이 그뒤를 따른다. 이 만남 동안에 나는 사랑하는 이의 완벽함을, 다시 말하면 내 욕망과 대상 사이의 의외로운 조화를 미칠 듯이 '탐색한다'. .... 이 행복한 시간은 다음 단계와 대립하는 것으로서 그 정체성(그 닫힘)을 갖게된다. 그런데 다음 단계란 고통, 상처, 고뇌, 비탄, 원한, 절망, 당혹, 함정의 긴 행렬로서, ...
지금 내 마음속에서 울리는 것은 내가 내 몸으로 알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뭔가 미세하고 뾰족한 것이 이제껏 일반적인 상황의 합리적인 지식 속에서 졸고 있던 내 몸을 갑자기 깨어나게 한다.
울림의 공간은 몸이다. 이 상상적인 몸은 너무도 긴밀히 결합되어 (유착되어) 있어 나는 그것을 일종의 일반화된 동요로밖에는 달리 체험할 수 없다.
이상적인 대화자 혹은 친구란 당신 주위에 가장 커다란 울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우정을 완벽한 음향의 공간으로 정의할 수는 없을까?
무의미한 언쟁은 그렇지만 그 무의미함과 싸우기도 한다. 언쟁의 모든 파트너들은 각자 자신이 결정적인 말을 할 수 있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