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말시티 4
강경옥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쇄상태 마음에 안든다고 불평하면서도 기다리며 사고 마는 노말시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러드 오스 - 피의 맹세 스토리콜렉터 5
크리스토퍼 판즈워스 지음, 이미정 옮김 / 북로드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최근 들어 붐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 될 정도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책이 나왔다. 하지만 <트와일라잇> 시리즈나 미국 드라마 '트루블러드'로 유명한 '수키 스택 하우스' 시리즈에서 뱀파이어와 인간의 로맨스를 다룬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뱀파이어가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것과 미국 대통령과 계약을 맺고(제목인 블러드 오스는 피의 맹세,서약 등의 의미다) 명령 없이는 자국내 국민을 살생하지 않는 다는 조건을 달고서 말이다. 비하하듯 표현하면 미대통령의 애완동물이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을 그린 책은 많이 봤으나, 뱀파이어가 영웅으로 등장하는 책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할리우드 영화 한편을 보듯 펼쳐지는 책 전개와 구성 덕분에 기존에 나왔던 할리우드 영웅 영화들을 연상하게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케이드는 뱀파이어며,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서 그 점이 신선했다. 무엇보다 인간을 가축이하로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 가축을 살생하지 않는 금욕적인 면과 그 가축과 계약을 맺고 가축의 집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이 독특했다. 하지만 인간을 가축이라 생각하면서도 관계를 맺고 애정을 가지는 모습을 아주 간간히 엿볼 수 있었는데, 이 점이 케이드가 인간성마저 지닌 뱀파이어임을 보여주었다.  

 빠른 전개와 여러 시점에서 진행되며 나아가는 사건에 긴장감 늦출 사이 없이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CIA비밀 요원같은 뱀파이어가 운멘쉬졸다텐이라는 시체들의 여러부분을 이어붙여 만들어진 살인 병기를 헤치우고 대통령과 그의 가족들을 무사히 구해낸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나 감칠나게 써내다니! 분명 필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손으로 물리치는 건 좀 아니었다. 허무하다 못해 이상하게 느껴질정도였고 왜 뜬금없이 세례 요한의 손이 등장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기독교적인 사상은 도대체 이해 불가능이다. 게다가 부통령인 와이먼은 정말이지 인간 이하에 품위도 없이 그려졌는데, 왜 부통령만 항상 부패하고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지 않은가? <2012>라는 영화가 추석 특집에 하길래 킬링 타임용으로 보고 있자니, 이 영화가 막 개봉했을 때 보고 느꼈던 감상들이 점점 붉어졌다. 10억 유로를 주고 티켓을 파는 것에 동의를 해 놓고 나중에서야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 한 목숨 희생한다해서 수만명의 티켓 구하지 못한 서민들의 목숨은 보상 받을 수 있는가?(목숨에 보상이라는 말을 써야하다니!) 위선적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통령은 항상 고귀하고 올바른 이미지로 그려내는 미국 여러 매체들에 염증을 느낀다. 본 책에서는 대통령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가족을 생각하는 인간적인 모습과 그리프의 누명을 간파하지 못하는 우둔함을 보여주는 정도의, 별 다른 역할은 없었지만 말이다.(후속작에서 과연 와이먼이 배신자라는 것을 가려낼지 의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의 생사 확인을 위해 군인들을 살인병기 앞으로 내모는 모습이란! 대통령 가족의 목숨은 존귀하고 군인들의 목숨은 그렇지 아니한가? 의무나 임무로 덮어버리기엔 운멘쉬졸다텐의 존재는 너무 강력하다. 

 액션이 난무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표현들과 묘사들이 넘치고 또 잔인한 부분도 많다. 과연 이걸 영화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개인적으로 굉장히 운멘쉬졸다텐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게다가 콘라트 박사가 생체액을 뽑아내 자신을 젊게 만들어주는 약을 만드는 과정과 기계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미성년자관람 불가가 되겠지만.  

 운멘쉬졸다텐으로 만들어진 한 군인, 가르시아는 자신의 머리가 몸통에 붙여지고 일부분 의식이 있었는데, 이 점이 정말 안타까웠다. 감정이입을 할 정도로 안타까운 것은 아니었지만, 유린당하는 생명의 가치와 생명 경시가 느껴져서 콘라트가 얼마나 잔인한지 더 부각시켜주었다.  

 개인적으로 끝이 정말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매력적인 인물인 케이드와 잭은 다른 이야기를 통해서 만나볼 의향도 있지만, 이 이야기는 이 이야기내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차기작을 위해서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건 책이라는 매체에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무슨 영화 끝부분도 아니고 말이다. 차라리 열린결말이면 말도 안 하겠다. 물론 이런 점이 차기작을 더 궁금하게 하고, 후속작 판매량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 없지만 이 책 한 권만 보고 이야기를 맺고 싶은 사람에게는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이런 결말은 장단점이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싫었다. 역시 한 이야기는 한 이야기로 끝이 나는 편이 좋다.  

 헐리우드 액션이 살아 숨쉬는 하드 뱀파이어 영웅물, 블러드 오스. 잔인하고 빠른 전개에 유동적이면서도 반전 없는 헐리우드 판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께 추천하고 싶다. 또 무더운날 머리 식히며 집중하고 싶으신 분들께도 추천하고 싶다.  

 (개인적인 예측이지만, <점프>도 재밌게 보고 <2012>도 재밌다고 말한 내 남동생은 분명 이 이야기 좋아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jy 2011-09-1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프도 보다자다-_-; 2012은 땡기지도 않았지만, 트와일라잇도 좋았고, 수키시리즈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어제 책이 도착했는데 말입니다~ 뱀파이어이야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저한테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2011-09-18 19:54   좋아요 0 | URL
전 트와일라잇이랑 뉴문은 영화로 보고 책은 원서 두권모두 부분 부분 봤는데, 번역판은 읽어 본 적이 없네요. 동생이 영화보다 책이 재밌다며 강추하긴 했는데, 이상하게 손이 안 가네요. 수키스택하우스 시리즈 좋아합니다. 지금 원서로 1권 읽고 있는데, 얼른 읽고 2번째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네요. 트루블러드도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수키스택하우스는 책도 드라마도 각기 매력을 가진 것 같아요.
점퍼나 2012는 사실 킬링타임용 영화죠. 영화관 가서 제 돈 주고 보긴 아까운 영화랄까.(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책을 사보는게 나을지도. )
이 책 도착하셨군요! 음~ 전 기대만큼은 아니어서 실망했는데, 가독성면에선 괜찮죠. 재미도 나름있고. 하지맘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이 꽤 있어서 차마 추천하기는 그렇네요. 저야 제 동생 취향을 아니, 이거 재밌어하겠다 싶지만서도... 헐리우드식 영화같은 소설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좋아하실거라 생각되요.
 
최유기 외전 신장판 2
미네쿠라 카즈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외전은 끝이 아닌 이야기다. 외전을 보지 않고 최유기를 말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링크 : 나와 너의 사이 - 뉴 루비코믹스 1023
카타세 와카 지음 / 현대지능개발사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전체적인 스토리는 간단하다. 새 하숙집에 들어오게 된 미츠는 술자리에서 필름이 끊긴다. 자고 일어나니 둔부에 알 수 없는 격통(!)이 느껴진 것이다. (웃음) 게다가 옆에는 같은 하숙집에 사는 남자 료씨였던 것! 필름이 끊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자신의 소심함때문에 물어보지 못한다. 이 후 료씨와 같이 잤다고 생각한 미츠는 이 점에 대해서 마음에 자꾸 걸려하면서 대학과 하숙집을 오가며 생활한다.  

 이야기 라인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평범한 주인공에 평범한 일상 이야기들, 그리고 그 사이에 살며시 스며든 비엘정도라고 할까.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훈훈'하다. 치유계랄까.  

 개인적으로 이 만화에 별 다섯개 이상을 주고 싶은 건, 물론 '비엘'만화로써도 좋지만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이 나를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도, 소심한 것도, 남의 눈을 신경 쓰는 것도, 전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조금씩 섞어 놓은 모습이었다. 입만 열면 딱히 뜻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떠오르는 생각만을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불평불만한 하는 친구들도 싫었다. 같이 시간 보내는게 아깝고 한시라도 그 자리 뜨고 싶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건지 그 이유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바라는 걸까. 짜증이 나지만 웃는 얼굴로 속인다. 그저 '그래?', '와, 정말?' 이라는 상투적인 감탄사를 연발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주는 척 한다. 나중엔 자신도 진짜 그런 반응에 속아, 스스로가 열심히 듣고 있다고, 이 화제를 즐기고 있다고 착각해버린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세뇌시켜간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런 걸 싫어한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입밖으론 내지 않는다. 낼 수가 없다. 내지 못하는 것이다. 껄끄러워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서 부탁받으면 거절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 거절도 못하고 그저 웃으며 들을 뿐인 상황이 싫지만, 어쩔 수 없다며 타협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타협하는 자신은 점점 더 싫어지게 된다. 그저 자신이 신경질적이고 예민한거라며,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다독일뿐이다. 인간관계라는 건 그런게 아니냐며, 서로가 서로를 맞춰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며, 분명 남도 나에게 맞춰주고 참고 있을 거라며 생각한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짜증이 날까. 어째서 나만 이렇게 참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하지만 똑같다. 나도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다. 불평불만에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면서 그런 주제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남들의 눈이 신경 쓰여서 할 말도 제대로 못할 뿐이다. 소심하고 비겁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자신을 다른 그 누구보다 싫어한다.  

 지금도 자신이 싫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자신은 없다. 반대로 좋냐고 물으면 또 그렇다고 답할 자신도 없다. 스스로가 충분히 모순적인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분명 스스로를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이 함께 뒤섞여 있을 거라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도, 감정도, 한 데 뒤섞여 있다. 완전히 다른, 모순되는 것을 같이 지향해버린다. 그런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런 것이 싫어서, 답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싫어서, 이유를 만들어낸다. 좋아하는 것에, 싫어하는 것에 이유를 붙인다. 하지만 이유를 붙이면 붙일수록 더 생각은 꼬여간다. 중첩되어서 나중엔 정말 좋아하는건지 싫어하는 건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어째서 이런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인간관계는 분명 필연적인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피할 수 없는 그 '무언가'다. 살아있는 이상, 그 어떤 관계를 맺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해도, 관계는 필연적이다.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문제는 그러한 관계 속에는 언제나 틈이 존재해서 그 틈에서 끊임없이 무언가 발생한다. 외로움이라 불리는 감정을 달래줄 만한 무언가가 발생하기도 하고, 역으로 발생시키기도 한다. 소외감이라는 단어가 발생한 건, 그런 인간관계때문이 아니었던가. 고독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언젠가부터 사람 사귀는 것에 지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새로운 장소에 가도 필사적으로 친구를 만들려고 하지 않게 된다. 필사적이지 않은 건, 분명 먼저 다가가는 게 어렵기도 하고, 먼저 다가갔다가 거절 당할까봐 무서워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확실히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간사하게도 필요에 의하면 얼마든지 사람을 사귈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거기에 속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이젠 그런 이유보다는 그저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무언가들을 피하고 싶어서 사귀지 않게 된다. 거리를 두고, 선을 긋고, 살짝 웃으며 질문에 성실히 답한다. 왜 성실히 답하냐고?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내 성격상 무시 할 순 없고, 그래서 예전엔 내가 나서서까지 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건 피곤하다. 내가 지치고 나만 상처받는다. 그래서 선을 확실히 긋고 그들이 내게 원하는 정보를 주며 그것에 한해서만 응한다. 그러면 난 착하지만 다가가기 힘든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타인에게 자신에 대한 것을 숨기면서도 한편으론 드러내고 싶어서,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끊임없이 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후회하고 만다. 그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드러내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는 순간 후회하고 만다. 어째서 얘기한 걸까.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왜 얘기해서 매번 후회하는 걸까. 이런 자신이 싫다. 말했으면 그걸로 그냥 끝내면 안 되는 거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면 차라리 내 감정에서 후회라는 걸 지워버리면? 난 모든 일에 후회를 하지 않는다. 후회 하지 않는다. 후회 하지 않는다.  

 늘 그렇다. 후회 할 일이 생기면, 후회..라는 감정이 들기도 전에 후회 하지 않는다며 끊임없이 생각한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라고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후회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위화감을 없앨 수가 없다. 스스로를 싫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되뇌는 거짓말로 나는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그렇지만 솔직해지면 스스로가 싫어져서 힘들어진다.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힘들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허우적되는 것도 싫지만, 거기에 너무 빠져서 현실을 못 보게 되는 것도, 살고 싶지 않다고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도 바라진 않는다. 그래서 힘들다. 솔직해지는 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솔직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확실하게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소심하고 비겁하고 약한 사람은 언제나 도망갈 길을 먼저 찾는다.

 분명 료씨가 말한대로, 나도 민감함에 틀림없다. 그게 사람의 상처가 되었든 어찌되었든 무딘 사람은 아닌 것이다. 예전에 학생 때 담임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이 아니냐며, 신경과민이라고. 굉장히 분했다.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스스로가 그렇다는 걸. 하지만 그걸 어떻게해도 스스로가 통제를 할 수가 없다. 생리적인 반응과 직결된다. 나도 고치고 싶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하지만 말처럼 그게 쉽사리 될성 싶은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 점을 타인에게 지적 당할 때면 분하고 화가 나고 슬퍼진다. 그리고 스스로가 한심해지고 싫어진다. 언제나 이런 상태일까봐 두려워진다.  

 종종 나오곤 하지만 자유롭다던가, 솔직하다던가, 그런거 사실 거의 이상에 가깝다. 나는 그런 것의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면서도 매번 답을 찾지 못하는 건, 답을 내리고 싶어하면서도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을 배우고 싶은 이유도, 현재의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애매모해서다. 기준 비스무리한 것이 절대적이지 않아서, 신뢰할 수가 없다.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철학책을 들춰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매번 그렇다. 위로받을려고 하면, 머리로 생각해버린다. 이건 어차피 책이라며, 영화라며, 이야기라며 단념해버린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말도 변해버린다. 귀까지 닿았을 땐 그 따스함에 감동하면서도 귀를 통해 뇌에 입력되어 버리고 걸러지는 순간 변질된다.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인간(人間)이라고 본 책에서 얘기했듯이, 난 뭘 해도 그 거리감을 가장 먼저 느끼고 만다. 물리적이든 정서적이든 존재해버린다. 그리고 그 거리감은 어쨌든 결과적으론 정서적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고 만다. 변질은 거기서 시작된다. 거리감을 두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너무 가까우면 두렵다. 어쨌든 모두들 자기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두고 있지 않은가? 사적이고 개인적인 공간 말이다. 물리적이지 않더라도 분명 그런 것이 존재할 것이다. 나는 단지 그런 것을 더 소중히 여기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뭐,  여기서 쓰이는 이 거리감이란건 그 의미가 여러가지라서, 딱히 어느 것 하나만으로 이야기 하긴 힘들다. 여기서 명확히 하면 더 길어지겠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필사적이지만 잘 하지 못하는 나로썬(잘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모두들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게 아닐까라며 착각하기도 한다. 누구나가 같은 문제에 대해서, 같은 가치와 중요성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나랑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가구나라고 느끼는게 아닐까. 나는 사람을 사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그런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를 따라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그것을 알고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며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마음이 그 사람과 사귀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금방 소원해지는 관계는 분명 그런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고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사이를 채우는 건 어색함. 아아. 생각만해도 싫다. 하지만 이것도 의식할때나 생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지 않으면, 완전히 별개의 타인이라고, 관계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이런 어색함도 생기지 않는다. 나는 실제로 그랬다. 이런 경험이 많다. 누가 버스나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옆에 있는 처음 보는 사람이 어색해서 몸둘바를 모르는가? 그냥 당연한거다. 말 그대로 '모르는 사람', '낯선이', '이방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색하지 않다. 그 자리를 그저 메꾸고 있는 풍경과 같을 뿐이다. 단지 나와 같은 생물학적 개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걸 믿고 이런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 나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 사람들은 어쩌면 나의 이런 모습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걸 존중해주기 때문에 지금까지 연락이 닿아있을 수 있다고, 계속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걸 그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게 여길거라 바라진 않지만, 적정선은 다들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너도, 서로가, 모두가 그렇게 지키면서 살아간다. 의외로 사람이란 굉장히 예의바른지도 모른다.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말이다. 푸하핫 :)

 인간과 관련된 궤변은 인간이란 사람 사이에 하나뿐이기 때문에 더하지 빼지도 또 나눌 수도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두 사람 이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혼자서는 인간이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이 되기 위해선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하며,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인간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결국 본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인간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게 어떠한 사랑의 형태든 상관없었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그런 걸 꽤 책 한권에 잘 담았다고 생각한다. 나랑 닮아서 현실적이다라고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내게 있어선 무척이나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 평범하다면 평범했다. 이런 이야기 정말 싫지 않다. 좋다. 게다가 가끔 주인공의 행동이 귀여워서, 웃고 만다. 대사라던가, 그런 것들이 참 귀엽달까. 푸핫. 엉뚱하기도 하고. 대학 친구랑 투닥거리는 것도 귀엽다.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면 그 이중성에 놀라기도(!). 무엇보다 료씨, 귀엽다. 아저씨수도 좋지만, 아저씨공도 환영이다! (푸핫) 이 하숙집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더 보고 싶은데, 시리즈 있을까. 작가의 두번째 단행본이라고 하는데, 첫번째는 어떨지 모르겠다. 어쩐지 다른 작품은 이 작품과 그 풍이 완전히 다를 것 같은 느낌도 살짝 드는데, 그건 역시 봐야 알 것 같다. 기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문: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729114459

 

서평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조지 오웰을 떠올린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야겠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아이돌 그룹도 아닌 서평 따위를 생각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파국처럼 도래한 마감이 임박한 새벽이면, 어떤 종류의 불안과 함께 나도 몰래 조지 오웰을 떠올린다. 아니, 차라리 바라본다는 표현이 맞겠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그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가련한 서평자의 모습을, 마치 거울을 보듯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담배꽁초와 반쯤 비운 찻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거실에서 좀먹은 가운을 걸친 채 영양실조와 숙취, 좌절된 야망, 무엇보다 임박한 마감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그 신랄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약속으로 나를 격려한다. 오웰은 이렇게 썼다.

"그런데도 그의 원고는 자못 신기하게도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할 것이다. 어떻게든 항상 정시까지 도착하는 것이다. 저녁 9시쯤 되면 정신이 비교적 맑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오밤중이 되도록 방에 앉아 (점점 추워지고 담배 연기는 점점 자욱해진다) 능숙한 솜씨로 책을 한 권씩 훑은 다음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걸 책이라고!' 소리를 덧붙일 것이다. 아침이면 퀭한 눈에 면도 안 한 얼굴로 고약한 표정을 짓고서 빈 종이를 한두 시간 바라보고만 있다가, 시곗바늘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갑자기 타자기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한다. 온갖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들이 ('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자석을 따라 움직이는 쇳가루처럼 척척 제자리로 뛰어든다. 그리고 서평자는 원고를 들고 나서야 할 때를 3분쯤 남겨두고 정확한 분량으로 마친다. 그리고 그사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시시한 책들이 우편으로 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같은 일은 또 반복된다. 하지만 이렇게 심신을 고문당하고 짓밟히는 이도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 일을 시작했다."


▲ <나는 왜 쓰는가>(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type=text/javascript src="/books/common/js/book/bookcp.js">

>aladinOrderButtonWrite('8984314234');
btn
바로 여기에 서평에 관한 모종진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 관한 진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신세가 된 좌절한 인간들에 대한 진실이다. 그들은 오웰의 글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느끼는 대신 "그런데도 그의 원고는 자못 신기하게도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할 것"이라는 구절에서 위안을 얻는 자들이다. 그들 서평의 최대 미덕은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그러니 이미 마감 시간을 훌쩍 넘긴 이 글에서 미덕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소설가나 시인들이 실제로는 서로를 의식하고 종종 시기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마감과, 마감과 마감 사이를 채우는 숙취에 시달리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책 말고 다른 것을 할 시간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나만의 이야기일 뿐인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오웰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당연시하는 한, 어떤 문제도 해결되기 어렵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서평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책을 돈 주고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와 안내를 원하며, 어떤 식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의 문제가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리어 왕>은 좋은 희곡이고 <4인의 의인>(<The Four Just Men>(1905). 영국 작가 에드가 월러스(Edgar Wallace)의 탐정 소설)은 좋은 스릴러라고 말한다면 '좋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서평자라면 누구나 이런 유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결국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돈이 연관된 모든 것이 그렇듯, 직업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저자는 책을 쓰고 출판사는 책을 내며 서점은 책을 판다.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서평자의 몫이다. 요즘에는 통 볼 책이 없다고 불평하며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독자의 사치를 직업적인 서평자는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마음에 차지 않는 책들을 읽어야 하고, 그에 대한 글을 써야 하며, 될 수 있는 한 판매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방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의 직업은 그가 평하는 책을 팔아 수익을 올리는 출판사와 그 출판사의 광고를 통해 서평란을 운영하는 매체의 이해관계 속에서만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 사이의 부스러기와도 같은 얼마간의 돈이 필요하다.

서평은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작가의 안녕과 출판사의 이익과 서평자의 가계를 위한 글인 것이다. 그것은 물론 매문(賣文)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다른 직업인들이 그런 것처럼 그들 또한 글이라는 형태의 노동을 파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적성에 맞는 일이다. '이 거룩한 속물들'이라는 글에서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우선 나는 지금 매문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이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따라서 서평자들에 관한 진정 놀랄 만한 사실은 결코 충분한 돈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평을 써서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그들 대부분은 언젠가 자신만의 글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당장의 생계를 위해 서평 쓰기를 택했지만 어느덧 생계가 된 서평에 목을 졸리는 생활인이다. 비싼 책으로 서재를 채우고 디자이너의 옷을 입는 고급속물조차 될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근본적인 소외감이 있다. 애초에 다른 무엇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는 책에 '대한' 글을 써야만 하는 이중의 거리감. 그리하여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 일을 시작했"던 많은 이들은 다른 직업을 찾거나 진정한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단호하게 서평 쓰기를 그만둔다. 그만둘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다른 생계 수단을 찾으려 노력하겠지. 오직 게으르고 주변머리 없는 소수만이 고상한 포부를 버린 채 타성에 젖어 "'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같은 문장들과 씨름하며 담배 연기 가득한 비좁은 방에서 오늘도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영리하게 전법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다. 일찍이 미국의 비평가들이 "아주 간략하고도 단정적으로 열광하는 문장, 가령 '선풍적인'(<뉴욕 타임스>), '지난 10년 동안 가장 멋진 책'(<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진짜 즐거움이었다'(<버라이어티>) 같은 문장"을 자신의 서평에 집어넣으면 광고에 언급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움베르토 에코의 짧은 에세이 '혹평이 줄어든 이유'), 달콤한 주례사 비평이 신랑 신부는 물론 출판사와 저자, 독자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가짜 희망을 스스로 믿는 사람들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더욱 진취적인 오늘날의 이들은 한 발 나아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출판사의 격려 속에 서평과 자기 계발서를 결합한 일종의 독서 가이드를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판해야 할까? 나는 그저 그들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사실 이 자리는 "좋은 서평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의 자리다. 그런데 나는 직업적인 서평자의 고뇌며 비루함을 토로하고 있다. 좋은 서평을 찾기 힘든 현실에 대한, 업계 종사자로서의 변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그들이 쓰는 모든 서평이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가끔씩은 읽는 순간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장바구니에 책을 담게 만드는 글이 있고, 드물지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글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 자체의 힘이고 서평자 개인의 능력이며 둘의 우연적인 만남에 불과하다.

자연 혹은 시장 선택에 의해 살아남은 그들의 서평에서는 이제 단순한 정보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단순한 정보로서의 서평은 가치를 잃었다. 참고했음에 분명한 보도 자료 원문을 인터넷 서점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관심사를 자랑하는 '파워북로거'들의 등장도 한 몫 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 말고도 책에 대해 쓰는 사람이, 그것도 무척이나 잘 쓰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광고와 다름없는 텅 빈 글을 누가 읽는단 말인가? 출판사와 저자와 저자의 동료와 저자의 적과 서점 관계자들을 제외한다면.

영리한 서평자라면 호평을 하는 동시에 몇 마디 아쉬운 말을 넣어 출판사와 독자 사이의 균형 감각을 유지할 수도 있다. 실은 수박에 소금을 뿌리듯, 몇 마디 아쉬운 말로 호평을 더욱 달콤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려한 글 솜씨는 언제나 유리하다. 책의 내용과 관계없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나열함으로써, 자신도 믿지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책을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모두가 원하지 않는(너무 티 나게 상업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도 독자의 신뢰를 얻기에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들이 열광적으로 제시하는 '2011년 당신의 마음을 흔들 책'들의 리스트는 오늘도 길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찾아 읽을 생각을 하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출판 관계자들이나 (책장을 만드는) 가구업 종사자들은 부자가 되었겠지. 나도 몇 번 쯤은 공짜 술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 거다. 개인적으로는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파워북로거'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다. 사실 그 둘의 경계는 희미하다. 책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어느 순간 '북로거'에게 물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순간이 찾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블로그 마케팅의 위력을 뒤늦게 깨달은 출판사들에서 먼저 책을 보내기도 하고, 반대로 출판사에 책을 요구하기도 하며 종종 책 이상의 대가를 받기도 한다는 기사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나는 사실 그 액수가 무척이나 궁금하며 여차하면 '파워북로거' 양성 학원에 등록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직업적인 서평자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낫다. 건조한 저널리즘의 형식을 벗어난 블로그 글쓰기는 그들 이웃에게 훨씬 친근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부수입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한은 계속해서 출판사와 저자를 찬양하며 직업적인 서평자의 안 그래도 곤란한 생계를 위협하게 되는 셈이다. (경쟁 도서에 혹평을 쓰는 식의 역-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 나의 숨겨진 재능은 그런 쪽에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생각 있는 출판사에서는 연락주기 바란다. 내 메일은 blur1…….)

어쩌면 우리는 서평이라는 글의 형식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에 의무적으로 써야 했던 독후감과 현란한 이론들이 난무하는 교수님들의 평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끼인, 고작해야 출판사의 마케팅 도구로 한 번 제대로 읽히지도 못한 채 버려지는 전단지 신세가 된 이 가련한 글의 형식을. 나는 일단 묻고 싶다. 왜 당신은 아직까지 서평을 읽는가(심지어 이런 글까지)? 도대체 서평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앞서 말했듯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새로 나온 책은 무엇인지, 읽을 만한 책은 없는지 찾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터넷 서점의 신간 소식을 RSS로 받아볼 것을 추천한다. 훨씬 빠르고 다양하며 가끔씩은 매력적인 이벤트 소식을 접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마음에 드는 신간을 발견했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지 궁금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당신이 찾을 수 있는 서평은 대부분 찬양일색이거나 적어도 호의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당신의 마음은 이미 구매 쪽으로 기울어 있게 마련이다. 당신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설령 한 두 편의 혹평을 본다 해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할 테니까. 나는 당신의 선택을 지지한다. 항상 성공하지는 못할지라도, 어차피 한 권의 책일 뿐이다. 읽지 않는 것보다는 언제나 읽는 것이 더 낫다.

마지막은 책을 읽는 대신 서평을 읽는 것으로 문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는 부류다. 저자의 이름과 제목, 대략의 줄거리를 섭취함으로써 소개팅 자리나 SNS에 몇 줄 인용함으로써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사람들. 책을 그렇게나 교양 있는 매체로 평가해주다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인터넷 시대의 서평의 진정한 효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와 도서 취향이 닮은 이웃 블로거의 지나간 책에 대한 서평, 내가 미처 알지 못했고 그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책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매체들이 속보 경쟁을 하며 알맹이 없는 서평 기사를 내보내고 아직 몇 권 팔리지 않은 신간 도서에 '파워북로거'의 매끈한 서평이 수십 개씩 달릴 때, 그들의 호들갑 떨지 않는 담담한 서평은 공허한 단어들의 잔치에 지친 우리들에게 다시금 읽고 쓰는 행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부하고 상투적이며 오그라들기까지 하는 문장들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원고는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고, 나는 이미 마감 시간을 훌쩍 넘겼다.)

다른 하나는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다. 누군가는 김애란의 첫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사랑하고(이를테면 신형철), 누군가는 싫어한다(대개는 조영일).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떤 환상과 오해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들 사이의 대화를 듣고 싶다(단순히 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다는 게 아니다. 무척이나 흥미진진할 것임은 분명하지만…).

인터넷 시대의 소통의 대표적인 사례일 '빠가 까를 부르고' 다시 '까가 빠를 부르는' 소모적인 논쟁의 무한 반복을 바라는 게 아니다. 나름의 이유와 논리와 충만한 감정을 가지고 그들이 진검 승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온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픈 책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진심어린 각자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역사적인 발명 이후 그 어느 시대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자유로워진 오늘이다. 더 이상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혀 비슷비슷한 책들을 비슷비슷한 시각으로만 읽어 내려갈 필요는 없단 말이다. 뭐, 그게 더 좋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결국 내가 좋은 서평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정직함이다. 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정직할 것. 좋아하는 책에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책에 불평하기를 망설이지 않으며 쓸데없이 공정한 체하지 않는 것(누구도 서평자에게 공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출판사 관계자를 제외한다면). 특히 내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은 그의 혹평이다. 원래 이 글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따라 이렇게 시작하려고 했다.

서평에 관한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혹평이다. 책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서평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작가의 남성/여성 편력이 어떤가, 띠지의 디자인이 표지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는가 반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만약 조지 오웰이 주장했듯이, 어떤 서평자가 존중받는 존재가 되려면 마땅히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책을 존중하고, 출판사가 손해를 입기를 바라지 않으며, 저자의 안녕을 바란다. 그래서 대부분, 굳이 위에서 열거한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쁜 말을 하기를 꺼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책의 뒤에 화려한 추천사를 써준 명사를 의심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길을 택한다.

혹자는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만 말하기에도 시간이 짧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는 일은 조금 비겁하다. 무엇보다 달콤한 케이크처럼 쉽게 질린다. 반대로 누군가 혹평만을 늘어놓는다면 나는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을 골라보는 그의 식견을 의심할 것이다. (단, 테리 이글턴은 예외다. 그의 서평 모음인 <반대자의 초상>은 혹평의 완벽한 예이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꼭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따분한 플롯의 책에 대해서는 따분한 서평을,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책이라면 마찬가지의 서평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 책이라면 폭력적인 서평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면 그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는 서평 말이다.

나는 그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books'의 요청에 따라 그간 내가 이곳에 썼던 서평들을 예로 들자면 차례대로 <좀비들>,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베아트리스와 버질> 그리고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와 <옷의 시간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과 나 우리 모두를 위해 굳이 찾아보지는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는 아직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대답은 너무 뻔하다.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 스승의 책에 부친 카뮈의 글이,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같은 문장이 그러하듯이. 다른 대답은 찾지 못했다. 이제 당신이 물을 차례다. "그렇다면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내가 만약 그 대답을 알았다면 이런 글로 당신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도 마감을 넘긴 것에 감사할 뿐이다. 미안하다.

 



/금정연 활자유랑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