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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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기담집




성해나의 신작 소설집 『인비인』을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기담집'이라는 타이틀이 달렸다. 기담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 이번에 명확한 의미를 찾아보았다. 당연히 괴담과 비슷한 결을 지닌 무섭고 기이한 이야기일 줄 알았으나 의외로 이상야릇하고 재밌는 이야기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기담1 奇談/奇譚


명사

1.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표준국어대사전




어제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9)

인비인(人非人) (27)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53)


오늘

매일(買日) (95)

프랭크 오자와 (121)

윤회 (당한) 자들 (139)


내일

아미고 (207)

#유령 (235)

고(蠱) (251)



그래서인지 총 9편의 작품이 실린 『인비인』도 괴담집은 아니다. 앞에 실린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인비인」은 괴담에 가깝긴 하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괴담이라기보다 신기한 이야기 정도의 느낌이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옛날 우리 설화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설화의 구조가 현대의 시점에서, 한국과 미국 등의 공간으로 펼쳐져 있는 것 같다.


9편의 기담은 3개의 분류로 나뉘어져 있다. 어제, 오늘, 내일이다. 어제에 실린 3편은 모두 일제강점기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까지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일들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오는지에 대해 담고 있다.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은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우선 근래 시끄러운 여배우 때문이다. 친일파 조상의 행적에 대해서 무지했던 여배우가 그들이 누렸던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다가 결국 그들이 친일파였음이 낱낱히 밝혀진 사건이다.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현실의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문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이를 부정하다가 죽기 직전에는 부끄러워한다. 이 모습이 겹치면서 지금 여배우는 어떤 심정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은 성해나 작가의 첫 소설집인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단편소설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의 초안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선 친일 행적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는 가족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나의 소설이 어떤 형식으로 변해가는지를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어제"에 실린 3편의 소설이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성해나 작가가 다루는 일본(식민지 시절)의 이야기가 내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빛을 걷으면 빛』에 실린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 「오즈」에도 일제 강점기 시절의 피해자 할머니가 등장한다. 이때부터 성해나 작가는 이런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다.





오늘 섹션에 실린 글들은 기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많았다. 누군가의 인생을 경매로 사고 파는 이야기나 윤회를 믿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일 섹션에 실린 글들은 현재도 무섭게 발전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를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윤회 (당한) 자들」, 「고(蠱)」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특히 「고(蠱)」는 「혼모노」를 떠올리게 한다.


「혼모노」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가짜가 진짜를 이기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진짜 가짜는 누구고 가짜 진짜는 누가 되는가?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이 소설의 결말에서 흐릿해져버린다.



「고(蠱)」는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종사해야 할 고가 주인의 주인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주인에게 종사하는 이야기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하이데거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고(蠱)」는 한층 더 나아가 아예 우로보로스처럼 머리가 꼬리를 물어버려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이렇듯 본질의 경계를 흐려버리는 성해나의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다.




이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은 성해나 작가는 확실히 순문학 작가 중에선 장르소설 쪽으로 나아가려는 힘이 강한 작가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순문학과 장르소설 사이에 어떤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장르소설은 소설이란 형식이 지니고 있던 본연의 서사성, 이야기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순문학은 의미나 서정성을 더 강화한 쪽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성해나와 김기태 같은 작가가 순문학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서사성과 이야기의 즐거움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으로 그 생각은 더 단단해졌다. (김초엽 작가나 천선란 작가, 정세랑 작가도 그런 편에 속하는 것 같은데, 직접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다.)


또한 『인비인』에는 작품마다 작가의 후기가 달려 있어서 좋았다.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해당 작품을 썼는지를 읽어보는 것은 평론가들의 해설 지면과 다른 솔직한 창작관을 엿볼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성해나 작가의 관심폭이 상당히 넓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양한 장르나 소재를 다루면서 적재적소에 필요한 어휘와 지식을 담을 수 있는 재능이 부러웠다. 성해나 작가의 다음 작품들도 기대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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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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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없다. 그러나 





근래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강의를 듣고 있다. 그렇다보니,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GV빌런 고태경』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얼마 전에 읽은 『아코디언』의 천명관 작가는 오랫동안 영화 감독을 꿈꿔왔으나 소설가로 먼저 세상에 알려지고, 영화 감독이 되었다. 정대건 감독은 그 반대인데, <투 올드 힙합 키드>로 먼저 감독을 데뷔한 후 소설가로도 이름을 알리게 된 케이스다. 나는 <투 올드 힙합 키드>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당시에는 힙합에 경도되어 있었고, 실제 래퍼들의 삶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야 『급류』의 작가 정대건이 그 감독이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고 반가웠었다. 정확히 찾아서 따져본 것은 아니지만, 정대건 작가 이후로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 일하던 작가나 감독들이 소설을 출판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괴물, 용혜』나 『무덤까지 비밀이야』 같은 작품의 작가들도 비슷한 출신을 가지고 있다.





* * *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작가가 쓴 화제작인 『급류』를 일 년 전쯤에 읽었다. 나는 대체로 읽었던 모든 책에 대해서 짧게라도 감상평을 남기려고 하는 편인데, 『급류』는 실패했다. 서평을 쓸 때, 장점만을 언급하는 주례사 비평은 나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가능하면 내가 느낀 장점과 단점 모두를 적으려고 한다. 다만, 『급류』에선 어느 장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책의 서평에 쓸 수 있는 말은 온통 부정적인 것밖에 없었다. 아주 가끔 그런 책들을 만나게 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서평 적기를 생략한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이 각고의 노력을 들여서 만든 작품에 대해 쉽게 험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GV빌런 고태경』에 대한 관심도 조금은 식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이 환기된 것은 영화 리뷰 쓰기 강의도 있지만, 올해 재밌게 보았던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동안 영화 감독 입봉을 준비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점차 진상이 되어간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모자무싸>의 결말보다는 『GV빌런 고태경』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모자무싸>는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동만의 성공을 보여주지만, 『GV빌런 고태경』에선 고태경이 작중 스스로 지향했던 것처럼, '그는 여전히 도전하고 있다.'라는 결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GV빌런 고태경』이 『급류』보다 좋았다. 내가 느낀 『급류』의 유일한 덕목은 잘 읽힌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의 연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천명관도 그렇고, 앞의 두 작품 작가들도 그렇고, 영화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글은 쉽고 이미지화가 잘된다는 장점을 공유한다. 『GV빌런 고태경』 역시 그런 장점이 잘 묻어난 데다가, 작가가 오래 몸담았던 업계의 일이다 보니 자전적이어서 좀 더 솔직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아래와 같은 문장은 쉬워보이고 당연해보이는 문장이지만, 업계에서 살펴보지 않는 한 쓸 수 없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통제다. 위대한 영화 감독들은 대부분 통제광들이다.


『GV빌런 고태경』, 50쪽


아무리 세상에 동기부여되는 말이 많이 있다지만 '나도 하겠는데?'만큼 효과적인 동력은 없다. 그래, 쟤도 했는데 내가 왜 못해. 나는 남은 맥주를 원샷으로 비웠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나 감독이지.


『GV빌런 고태경』, 55쪽


말하다보니 어쩐지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요약하는 것만 같았다. 노 굿(NG)을 오케이하면서 살아온 인생, 변명 같은 인생. 관객들은 그런 사정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영화로 말하는 것이다.


『GV빌런 고태경』, 77쪽



유머 역시 재밌었다. 관심의 공산주의나, 잃어버린 자아가 인도가 아닌 아이슬란드에 있다는 점 등이 그러했다.



관심의 공산주의가 필요하다. 관심의 재분배, 최소 생계 유지처럼 최소 관심 유지가 되는 사회.


『GV빌런 고태경』, 66쪽



예전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인도에 갔는데 요즘에는 잃어버린 자아가 아이슬란드에 가 있잖아.


『GV빌런 고태경』, 124-125쪽




감독은 선택의 프로




감독이 똑바로 잘해야 하는 한 가지라면 역시 선택이겠지.

『GV빌런 고태경』, 151쪽


작중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사안은, 감독은 선택을 하는 직업이란 사실이다. 여러 컷들 중에서 최고의 컷을 골라내고 이어붙이고. 감독이 편집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강의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들었다. 영화는 이처럼 편집의 예술인데, 한국이 유독 특이한 환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영화 감독은 편집과 촬영에 모두 전적인 권한을 갖는데, 미국의 할리우드에서는 촬영은 감독이 하되, 편집권은 스튜디오가 갖는다고 한다. 수백 억이 투자된 영화의 흥행을 결정짓는 것이 편집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주는 듯하다. (재밌는 점은 예고편만 전문적으로 편집하는 감독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고편과 본편의 내용이 전혀 다른 '예고편 사기', '터저 사기' 같은 헤프닝이 생기기도 한다.)


『GV빌런 고태경』의 주인공인 조혜나는 이 선택의 문제 앞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감독으로써 영화를 편집할 때, 늘 선택의 기로 앞에서 고뇌하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선택의 문제 앞에서 고뇌하기도 한다. 예컨대, 가장 중요한 영화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정을 끝내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조헤나는 영화에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만두어야 하는가. 아주 가끔은 재능이 아니라 일에 대한 사랑이 그 자리에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떤 것에 대한 사랑보다는 조롱과 냉소가 더 쉬우니까.


『GV빌런 고태경』, 126쪽


나는 극장을 정말 사랑해. 나는 영화를 정말 사랑해.


『GV빌런 고태경』, 133쪽



고태경이란 문제적 인물





"선생님, 한때 영화인이기도 하셨잖아요. 과거에 영화인이셨던 분들이 현장을 떠나서도 어떻게 영화와 극장을 사랑하며 지내는지 담고 싶-"

"나 아직 영화인이요."


『GV빌런 고태경』, 64쪽


『GV빌런 고태경』은 고전적인 소설의 형태를 차용한다. 이를테면, 근대 소설이 발화하던 시기에 많은 작품들은 소설 주인공 이름을 제목으로 쓴다.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리나』처럼. 『GV빌런 고태경』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플롯도 전통을 잘 따른다. 주인공이 문제적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 인물과 가까워지다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 구조다. 전형적이고, 전형적인 만큼 보편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플롯이다.


어떤 의미에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같기도 하다. 현대에 영화를 찍는 감독이 고전 영화의 기법들을 모두 교과서적으로 차용해 적용해 만든 영화 같이 『GV빌런 고태경』은 근대소설의 교과서적 문법을 착실하게 따른다.



어김없이 극장 맨 뒤에 앉아 대학노트를 펼친 고태경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영화를 뒤에 앉아서 보세요?"

"나는 내용에 몰입해서 보려는 게 아니라,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전체를 보려는 거야."

그는 두 시간 동안의 영화 관람이 유희가 아니라 공부 시간인 것처럼 말했다.


『GV빌런 고태경』, 109쪽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고태경이 정말 흥미로운 인간인가. 필경사 바틀비처럼 관심을 가질만 한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처음에는 그저 이 GV 빌런이 어떤 사고를 또 벌일까, 이게 궁금했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고태경 역시 조혜나와 마찬가지로 감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망생이었음이 밝혀지며 한단계 더 나아가며 전환된다. "도대체 저 빌런은 왜 저렇게 무례할까?"에서 시작된 질문은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영화를 떠나지 못할까?"라는 질문으로 전환된다. 그는 여러 역경을 거쳐서 결국 극장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었던 셈이다.



극장이 곧 그의 영화학교였다.


『GV빌런 고태경』, 120쪽


고태경은 늘 베레모를 쓰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을 대학노트를 무릎에 올리고, 이 베레모를 벗는다. 노트까지야 그럴 수 있다쳐도, 베레모는 굳이 왜 벗는가. 실내라서? 그렇다기에 고태경은 식당 같은 곳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는다. 우리가 쓴 모자를 구태여 벗을 때에는 예의를 차릴 때이다. 프로야구에서 데드볼을 맞춘 투수가 타자에게 모자를 벗어 정중히 사과하듯이.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것이, 타인의 노력이 담긴 영화를 보는 것이 고태경에겐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다음 대사에서 그의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그 사람 싱정 알아. 누구보다 잘 알아. 그 사람 인생은 영화야. 종교 영화야. 십 년 넘게 무언가를 기다리고 손에 잡힐 듯하다. 멀어지고 반복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돼."


『GV빌런 고태경』, 88-89쪽.



그의 영화인적 태도는 후배였던 민현석 대표에게 면박을 당했을 때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태경은 눈치보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지금 뭐하는 거야?"

"네?"

고태경의 무표정한 얼굴에 잠시 화가 스쳤다.

"조 감독. 감독 일 똑바로 해. 카메라를 들이대야지."


『GV빌런 고태경』, 171쪽


그는 면박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조혜나보다도 더 냉정하게 영화를 생각한다. 조혜나가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카메라를 들이밀지 못하자, 오히려 "찍으라며", "너의 일을 하라고" 다그친다. 그가 얼마나 영화에 진지한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를 갈 거냐는 물음에, 극장으로 간다! 이런 점에선 영화를 꿈꾸다 끝내 영화가 된 남자 같기도 했다. 무엇이든지 인생에 환유하는 건 시시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선 "life goes on"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역경과 좌절이 찾아와도 인생은 흘러간다. 아무리 멈추고 싶고, 아무리 별로인 장면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저 흘러가는 영화처럼.


또한 『GV빌런 고태경』의 결말이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운다>나 『급류』보다도 좋았던 점은 바로 그런 그의 태도와 열정이 남긴 채로 끝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혜나 이 영화, <GV빌런 고태경>으로 대박을 쳤다거나, 고태경이 마침내 모든 역경을 딛고 감독에 데뷔했다면 나는 이 소설이 그저 그렇게 기억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태경은 아직도 그 태도를 유지하며 도전하는 중이고 (작중에서 본인이 조혜나가 만드는 다큐가 그런 방향에서 끝나면 어떨까 했던 것처럼.) 조혜나도 도전 중이다. 그리고 결말은 마치 영화의 엔딩처럼 그가 다시 돌아와 GV에서 질문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엔딩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려진다.


또한 그는 <GV빌런 고태경>의 GV와 결말에서 자신의 태도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지점이 아닐까, 하면서도 깊이 공감되는 장면이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GV빌런 고태경』, 278쪽



조 감독, 영화를 만들자! 극장에서 다시 영화를 상영하자. 우리는 빛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빛을 보려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지.


『GV빌런 고태경』, 291쪽




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없다, 그러나 우리만의 바르샤바 영화제는 있다.



"재능이니 뭐니 하는 건 이십대에나 하는 말 아냐? (…) 꾸준히 계속하는 의지야말로 진짜 재능이지."

"어쭙잖은 재능은 저주라던데요."


『GV빌런 고태경』, 117쪽


어른이 되다는 건 수많았던 꿈의 목록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종 "꿈을 포기 못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이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도, 비난으로도 사용한다. 『GV빌런 고태경』은 1차적으로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고태경이란 인물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너도 한 번쯤 이런 애정을 품은 대상이 있지 않았느냐고. 이 "영화"의 자리에 자신이 좋아하는 걸 넣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GV빌런 고태경』을 좋아할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문학을 겹쳐 생각했다.



또한 애매한 재능의 문제는 많은 사람을 심란하게 한다. 꿈이냐, 현실이냐. 이 문제에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아마도 재능일텐데, 재능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메시의 재능을 가진 이가 농구에 꽂혀서 농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마이클 조던이 골프나 야구를 했던 것처럼.


근래 오래 곱씹는 말이 있다. "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결코 없다." 재능이란 건 단연 눈에 띄어서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못하다면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일에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순 없다. 그렇다면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좋아하는 일에 꾸준히 도전하고 사랑하는 게 재능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저궤도인간>의 동재처럼 말이다.



저 이제 알겠어요. 내가 뭘 하려는 건지요.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꼭 성공으로 결론나지 않아도 돼요. 돈 좀 못 벌면 뭐 어때. 그냥 … 내가 좋아하는 일을 … 계속 좋아하는 거. 그게 제가 이번 생에 하기로 한 일이에요.

<제궤도인간> 6화


그러한 엉덩이 재능은 제법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은 "바르샤바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장면이다. 조혜나는 수상에 대한 희망도, 사전 예고도 없어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 자신이 없을 때 뜻밖의 수상을 한다. "내가 없는 시상식에서 수상하게 된 것, 내 노력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호명해준 것." 구태여 고흐를 끌여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생은 언제나 작은 일이더라도 뒤늦은 반응을 얻기도 하고, 아예 그런 반응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딘가에선, 우리의 노력을, 우리의 꿈에 대한 정진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 재능은 없어도, 세상에서 B급으로 치든, C급으로 치든 상관없는 우리만의 바르샤바영화제가 있는 게 아닐까?



* * *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학교 조 교수는 끝까지 1차원적인 악인으로만 묘사된다. 바르샤바영화제도 뜬금없기는 했다. 그런데 고태경과 대비하려면 필요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문제는 바르샤바에서 종현의 태도였다. 갑작스런 변화는 너무 납작하다. 이전까지 다정하고 착하게만 그려졌던 종현이 갑자기 너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군다. (차라리 이전 연애에서 결별의 원인이 혜나가 아니라 종현에게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가 된다면 좀 더 이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혜나는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밝힌다.) 바르샤바에서의 종현은 화가 나서 화난게 아니라, 주인공인 혜나에게 고난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마치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말이다.


모든 시네필이 감독이 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감독은 시네필이다. 이를 본격적인 기류로 만들어낸 "새로운 물결"이라는 사조가 프랑스의 누벨바그다. 작중에서 누벨바그의 기수인 트뤼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트뤼포의 명언으로 알려진 '영화를 사랑하는 세가지 방법'이 언급된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만들어낸 오해다. 『GV빌런 고태경』에도 등장하는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정성일이 추천사를 썼는데, 여기서 자신이 어느 일본 잡지에 실린 트뤼포에 관한 글을 읽다가 오해해 한국에 이를 트뤼포의 말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는 말이 한국에는 폴 발레리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소설가 김영하 작가가 『빛의 제국』에서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작가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으며, 이는 폴 발레리가 아니라 폴 부르제의 말이라고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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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개정합본판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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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를 빌려와 볼까.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서로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흔하디 흔한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소재를 가진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독특한 점은 두 가지다. 우선 이 소설이 김보영 작가의 팬이었던 커플이 있는데, 그 중 남자 팬이 여자 팬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한 '낭독용 소설'을 써달라는 '사적인 청탁'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이다. 이런 소설 밖의 이야기는 흥미로우면서도, 소설 내에서 어떻게 달성되었는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충분한 조건이 된다. (다만, 나는 프로포즈용으로 쓰여졌다는 첫번째 소설이자 표제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다 읽고 나서는, '이게 정말 프로포즈에 써도 되는 소설인가?'하는 일말의 의문을 품었다. 재밌게도, 이 소설들 뒤에는 그 청탁의 당사자들의 소감 같은 것도 적혀있는데, 결론적으로 내 의문과 기우와는 다르게, 부부는 결혼을 했으며,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흥미롭게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서로를 기다리는 연인'이 시간 여행 속에서 엇갈린 거라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부터 본격화된 '광속'과 '시간 여행'의 이론은 <인터스텔라>를 비롯한 영화나 소설을 거쳐 이제는 상식의 반열에 올라 있다.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무한에 가까운 시간 속을 서로 엇갈리고 있는 거라면, 우리는 상대방을 끝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SF이면서 동시에 로맨스 소설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질문에 있다.



소설 내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말에도 한계 효용이 있는 법이어서, 너무 잦은 빈도로 사용되는 말은 그 효용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처한 극한의 상황 때문인지 수없이 반복되는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그 효용을 잃지 않으며 내내 서글픈 감정을 전달하는 데 번번이 성공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왜 슬픈 것일까. 누군가를 기다리려면, 우선 내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야 함을 함의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화자는 계속 이동한다. 그게 타의든, 자의든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야만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이 기다림이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누군가를 "계속" 기다릴 수 있으려면, 바로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주인공이 가진 단단한 믿음이 소설의 초반을 이끌어가는 힘이라면, 이 단단한 믿음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흔들리기 시작하는 게 소설의 중후반을 이끌어간다.





* * *






트릴로지 중 두번째로 등장하는 소설인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앞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남자 주인공이 기다리던 '상대방/누군가'가 주인공이다. 앞선 소설이 남자 주인공이 고독에 처해 한없이 자기 자신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도 여자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이 소설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지 못해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신에게 가고 있어」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향기가 한껏 느껴졌다. 예를 들어, 여주인공에게 우호적인 '항해사'는 아이들을 가르쳐 재래식 항해법을 존속시킨다. 광속에 도달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인간의 배에게 그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배는 현재 지구의 멸망으로 인해 돌아갈 곳을 잃은 상태다. 지금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AI와 컴퓨터가 다 해주지만, 이것들이 고장난다면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위대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파인만은 자신의 저서(『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에서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면, 살아남을 아이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밝힌 적이 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작은 입자들로, 서로 조금 떨어져 있을 때는 끌어당기고, 너무 밀착되면 서로 밀쳐낸다."



이는 곧 모든 물질의 상태의 변화 (기체·액체·고체)를 담고 있으며, 압력과 밀도에 관한 직관, 화학 반응과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명이자 흔적이 바로 나니까. 내가 당신의 유적이니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1쪽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생사에 대해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 다짐하는 장면은 이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 깨달음은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의 "나는 단수가 아니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결국 내가 곧잘 세트처럼 떠올리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분인의 죽음'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앞에서만 가능했던 나의 분인의 삶도 끝난다.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고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 수 없다." 


히라노 게이치로



또한 이 단편의 흥미로운 지점은, SF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인식의 전환에 있다.




그 애들은 배가 정박하면 당황해서 어른들에게 왜 시간이 말라붙어 있느냐고 물어.

그 아이들은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변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제 있었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고, 어제 보았던 하늘이 그 자리에 있으면 어리둥절해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2쪽



이는 소설 밖의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과 소설 속 인물들의 커다란 인식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광속 여행을 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시공간이 변해 있는 것이 '당연하고도 평범한 현상'이다. 소설 밖의 우리는 외부 풍경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것이 하룻밤 사이의 변화라고 한다면, 사실상 하룻밤 사이에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게 평범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소설 속의 규칙을 통해서, 소석 밖의 독자의 상식과 인식을 뒤집어버리는 장면이 '좋은 SF 소설'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믿는 편이다.




* * *




이제 이 소설에서 나를 가장 강력하게 충격했던 대목을 이야기해야 할 차례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 이 두 소설을 하나로 정리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물론, 앞서 언급한 롤랑 바르트의 말도 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우주를 떠도는 두 연인의 이야기니 우주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사람의 말을 빌려와 볼까.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 속에서, 앤과 한 행성, 한 시대를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은 나의 기쁨이었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고백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속 두 연인은 끊임없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태어나 같은 "시절"을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가없는 축복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 인연을 더 잘 표현한 것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대사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에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상의 그 하고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현 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거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인연이란 게, 좀 징글징글하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거기서 나와. 과거에 붙들려 있지 마. 당신은 나와 함께 있잖아.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야지. 같이 시간을 흘러가야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8쪽.



여자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남자 주인공이 건네는 말은 이 모든 말들을 압축하고 있다. 억겁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걸 함께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사진 예술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우리나라에서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로 유명하다. 브레송은 스쳐 지나가는 1/125초의 아주 짧은 '찰나'를 포착하여, 그 안에 사물의 본질과 조형적 완벽함을 담아냄으로써 '영원'으로 만드는 사진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브레송은 사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



나는 이 말을 사랑하는데,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을 그의 말을 빌려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을 만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운이라고."




* * *




세번째 작품인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다양한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우주 항법사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듄>을 떠올리게도 하고, 여러 장소를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도 한다. 또한 웹소설이나 서브컬처의 유구한 떡밥인 '현대인이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가면 어떻게 될까?'를 정면에서 다룬 흥미로운 소설이기도 하다. 나아가 마지막 결말은 SF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질문』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흥미로웠다면, '인류 최대 스케일의 쌍방삽질'을 다루는 이하진 작가의 『마지막 증명』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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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개정합본판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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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나니 칼 세이건의 말이 떠오른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 속에서, 앤과 한 행성, 한 시대를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은 나의 기쁨이었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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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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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






천명관의 신작 장편 소설인 『아코디언』을 읽었다. 2004년 『고래』로 한국문단 최고의 문제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작가인 만큼, 이번 신작에 쏠리는 기대도 남다른 것 같다. 『아코디언』도 『고래』와 비슷한 민담 같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홀로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주인공이 이 험난한 운명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래』의 주인공이 여성이었다면, 『아코디언』은 동이라는 남성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이러한 천명관 소설의 주제는 '가난', '외로움', '인간찬가'이라 이름붙여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는 한국소설의 '한'의 원형을 닮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고래』의 금복이나 춘희가 겪었던 불행처럼 『아코디언』의 동이가 겪는 불행이 개인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가 겪어온 특수한 상황 속에 얽혀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천명관 작가는 이런 한국의 특수성을 담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신작 소설의 제목과 주요 소재가 된 아코디언은 특이하다. 이국의 악기가 어째서인지 한국의 한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또한 오랫동안 영화 감독을 꿈꾸어왔던 그가 입봉작으로 선택한 원작 소설인 『뜨거운 피』만 해도 그렇다. 김언수 작가의 소설 『뜨거운 피』는 부산의 조폭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2000년 대 초 한국의 영화 계보 중 하나로 '조폭' 영화가 있는데, 천명관은 자신의 2020년 대 데뷔작으로 바로 그 '조폭' 영화를 택한다. (나는 지금 조폭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폭 영화'가 '조폭'을 다루는 방식은 한국 고유의 방식이 있고, 이는 일본의 야쿠자나, 미국의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처럼 무언간 '한국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소재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고래』나 『아코디언』은 2000년 대의 소설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만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대적 문체로 훌륭하게 풀어내는 작가들은 많다. 다만 천명관은 그런 문체로 빚어내는 현대화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 본인이 구사하는 문체가 민담스럽다면, 구태여 그걸 현대화하는 데 공을 들이느니, 이야기 본연의 재미에 집중해 소설의 장점을 살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장인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아코디언』과 『고래』, 『뜨거운 피』의 공통점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천명관이 천착하는 주제는 '한국적인 가족'이란 것도 알 수 있다. 세 작품은 모두 혈혈단신의 주인공이 자신만의 가족을 이루려는 이야기라고 정리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천명관의 소설이자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한 『고령화 가족』 역시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




나는 천명관이란 작가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니, 그의 꿈이나 문학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함부로 주장하는 건 할 수 없다. 그의 글에서 내가 느낀 몇 가지 인상만 주워 섬길 수 있을 뿐이다. 익실과 물 흐르듯이 쉽게 읽히는 문장, 그러니까 시쳇말로 쿠세도, 강세도 없는 듯한 문장들이 그의 문학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장의 강세는 주로 한 소설의 문학성을 가장 많이 담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김승옥의 이런 문장은 단 몇줄만으로 '무진'이라는 상상의 공간을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히 가져다 놓는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그러나 천명관의 소설은 탁월한 가독성에 비하여 문장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기이한 이야기 자체, 사건의 연속으로 기억된다.


『아코디언』은 특히나 초반부가 영화 <국제시장>과 드라마 <야인시대>를 연상케 한다. 전후의 빈곤상을 다루고 있기도 하거니와, 동이가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처럼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피난온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작중에 숱하게 등장하는 유행가는 이 소설이 마치 유행가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렵지 않고, 통속성을 한껏 담고 있으며, 그를 통해 듣는 이/읽는 이로 하여금 손쉽게 공감하게 만든다. 어쨌든 재밌고 뒤가 궁금해지게 만든다. 소설의 기원은 흥미라는 사실을 천명관 작가는 놓치지 않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 동이.




양 목사가 돌아왔지만 도망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자유가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거였다.


『아코디언』, 162쪽



- 나중에 죽어서 천당에 가면 뭘해. 씨발, 여기가 바로 지옥인데……


『아코디언』, 170쪽


위의 문장처럼 '생존'이 유일한 정언명령이고, 이를 위해선 그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되는 배경을 지닌 『아코디언』에서 유난한 인물이 딱 한 사람 있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눈치를 채겠지만, 그건 주인공 동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참혹한 시대와 운명 앞에 순응하고 선한 마음을 망가뜨려서라도 살아남는 사람, 순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 전자에는 깜상, 거북이 같은 인물이고, 후자는 상이군인과 연이일 것이다. (물론 연이는 시도에 그치긴 했다.)



동이는 이들과 다르다. 참혹한 시대와 운명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건 앞의 인물들과 마찬가지이지만, 동이는 끝까지 선한 본성을 꺾지 않는다. 맨몸으로 저항한다. 그런 점에서 동이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주인공의 자질을 갖췄다. 그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며 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이가 자신의 아코디언을 불자 뺨을 걷어올리지만, 그날밤 홍이를 불러내 아코디언을 직접 가르쳐준다.


물론, 동이가 마냥 선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인물을 외려 한심하게만 여길 수도 있다. 얼마간은 그런 감정도 생긴다. 왜냐하면, 연이에 대한 잔정 떄문에 일생 일대의 면접도 놓치게 된다. 현실적인 감각에서 동이는 멍청하다. 그러나 그게 동이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유이며, 읽는 내내 그를 응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매력이다.


그런 동이의 순수함 때문에 이런 의문도 생긴다. 하우스보이가 되든, 음식점 보조가 되든, 기지촌에서 출퇴근하는 이들처럼 해방촌에서 출퇴근하면 안 되는 건가? 미군 부대에 취직하면 무조건 움막을 떠나야하는 것처럼 그려진 건 소설 내에선 정확한 설명이 없어서 내내 지울 수 없는 의문이었다. 그냥 동이가 취직해서 그 돈으로 움막의 아이들을 돌보는 게 보다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동이는 마냥 선함을 추구하지는 못하고, 생존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나가려고 한다. 그 갈등과 고뇌 속에서 오야지가 되어가며 양 목사의 방식을 차용하게 된다. 악한 면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선 필요한 덕목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양 목사나 아미처럼 모질어지지는 못한다.



동이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동안 오갈 데 없는 앵벌이들을 위해 애써왔는데 아무도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화도 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럼 나가고 싶은 사람은 여기서 나가! 나가서 혼자 빌어먹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그것은 양 목사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아코디언』, 137쪽




몇 가지 단상들 - 연이, 아코디언, 그리고 희망.



이 소설의 핵심은 연이의 사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 소경 가수라는 점은 언뜻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미를 통해서 들은 연이가 시력을 잃게 된 경위도 그러하다. 그러나 진실을 알 수 없다. 여기에 도대체가 믿을 만한 선인이 있긴 한가? 악인과 피해자들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연이가 낳은 '돈이'는 과연 누구의 자식인가? 연이의 할아버지는 정말로 악인인가? 소설에서 드러나는 연이의 사연에는 명확한 진실을 찾을 수 없다. 연이의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연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악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에 대해서 털어놓는 이들이 모두 아미거나 양 목사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을 통해서 얻은 진실은 입증되거나 쉬이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다. 독자들은 이 사연을 접하고 딜레마에 빠지며, 이 시절의 혼란함, 아노미를 연이를 통해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진실은 아득하고 생존은 목구멍에서 다그친다.


또한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아코디언은 어떤가. 처음에는 아코디언이 특별히 환상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코디언이 들려줬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틀린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는 마치 동이가 스스로 만든 추론 같다. 동이와 거북이가 '돈이'의 아버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 장면을 살펴보면 그렇다. 거북이는 연이와 양 목사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동이는 차마 그런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코디언이 들려줬다는 이야기는 동이가 스스로 다다른 결론일 것이다. 동이가 그것이 아코디언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동이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 시대에 정말 의지할 만한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번도 보지 못한 진정한 어른 말이다.


- 내 얘기 잘 들어, 홍이야. 넌 잘 모르겠지만 너에겐 남다른 재주가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자신을 믿어야 돼.


『아코디언』, 270쪽


이는 결말 부근에 동이가 홍이를 송별하면서 건네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이 말은 어쩐지 동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처럼 보인다. 동이는 쟈니에게 들었던 '재주가 있어서 사는 게 쉽지 않겠다느니, 분수에 맞는 자리가 있다느니' 이런 말 때문에 스스로를 끝내 믿지 못했다. 그건 동이를 짓누르는 말이었다. 동이가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동이는 자신이 아코디언을 통해 스스로에게 해왔던 말을 그 스스로가 '홍이의 아코디언'이 되어 해준 것이다.



희망을 품는다는 건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아코디언』, 155쪽


마지막으로, 희망에 대하여 말해야만 할 것이다. 전후의 혼란상 속에서 희망을 품는다는 건 정말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것이 최선의 행복이자 최대의 희망이다. 그러나 동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쟈니의 말에 짓눌리고, 육손의 폭력에 좌절되긴 하여도 끝내 스스로 꿈꾸는 삶을 찾아나갔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앵벌이 가족'들을 육손에게서 해방시키고 부산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생존, 그 다음을 가족들에게 보장해준 것이다.


깜상은 동이와 악수를 나누며 자신들이 더는 어리기만 한 앵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맹수와 맞서 싸웠고 마침내 상대를 유인해 우물에 빠드렸다.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아코디언』, 260-261쪽


또한 홍이에게 스스로 아코디언이 되어, 희망을 물려준다. 동이의 꿈은 홍이를 통해 실현되려 한다. 결국 동이의 아코디언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던 희망을 연주하고자 했던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코디언』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소설이 필요했다고. 꼬마가 소년이 되고 그 소년이 다시 사내가 되고, 마침내 아버지가 되는 소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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