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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평점 :
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
천명관의 신작 장편 소설인 『아코디언』을 읽었다. 2004년 『고래』로 한국문단 최고의 문제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작가인 만큼, 이번 신작에 쏠리는 기대도 남다른 것 같다. 『아코디언』도 『고래』와 비슷한 민담 같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홀로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주인공이 이 험난한 운명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래』의 주인공이 여성이었다면, 『아코디언』은 동이라는 남성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이러한 천명관 소설의 주제는 '가난', '외로움', '인간찬가'이라 이름붙여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는 한국소설의 '한'의 원형을 닮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고래』의 금복이나 춘희가 겪었던 불행처럼 『아코디언』의 동이가 겪는 불행이 개인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가 겪어온 특수한 상황 속에 얽혀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천명관 작가는 이런 한국의 특수성을 담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신작 소설의 제목과 주요 소재가 된 아코디언은 특이하다. 이국의 악기가 어째서인지 한국의 한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또한 오랫동안 영화 감독을 꿈꾸어왔던 그가 입봉작으로 선택한 원작 소설인 『뜨거운 피』만 해도 그렇다. 김언수 작가의 소설 『뜨거운 피』는 부산의 조폭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2000년 대 초 한국의 영화 계보 중 하나로 '조폭' 영화가 있는데, 천명관은 자신의 2020년 대 데뷔작으로 바로 그 '조폭' 영화를 택한다. (나는 지금 조폭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폭 영화'가 '조폭'을 다루는 방식은 한국 고유의 방식이 있고, 이는 일본의 야쿠자나, 미국의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처럼 무언간 '한국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소재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고래』나 『아코디언』은 2000년 대의 소설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만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대적 문체로 훌륭하게 풀어내는 작가들은 많다. 다만 천명관은 그런 문체로 빚어내는 현대화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 본인이 구사하는 문체가 민담스럽다면, 구태여 그걸 현대화하는 데 공을 들이느니, 이야기 본연의 재미에 집중해 소설의 장점을 살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장인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아코디언』과 『고래』, 『뜨거운 피』의 공통점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천명관이 천착하는 주제는 '한국적인 가족'이란 것도 알 수 있다. 세 작품은 모두 혈혈단신의 주인공이 자신만의 가족을 이루려는 이야기라고 정리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천명관의 소설이자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한 『고령화 가족』 역시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
나는 천명관이란 작가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니, 그의 꿈이나 문학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함부로 주장하는 건 할 수 없다. 그의 글에서 내가 느낀 몇 가지 인상만 주워 섬길 수 있을 뿐이다. 익실과 물 흐르듯이 쉽게 읽히는 문장, 그러니까 시쳇말로 쿠세도, 강세도 없는 듯한 문장들이 그의 문학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장의 강세는 주로 한 소설의 문학성을 가장 많이 담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김승옥의 이런 문장은 단 몇줄만으로 '무진'이라는 상상의 공간을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히 가져다 놓는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그러나 천명관의 소설은 탁월한 가독성에 비하여 문장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기이한 이야기 자체, 사건의 연속으로 기억된다.
『아코디언』은 특히나 초반부가 영화 <국제시장>과 드라마 <야인시대>를 연상케 한다. 전후의 빈곤상을 다루고 있기도 하거니와, 동이가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처럼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피난온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작중에 숱하게 등장하는 유행가는 이 소설이 마치 유행가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렵지 않고, 통속성을 한껏 담고 있으며, 그를 통해 듣는 이/읽는 이로 하여금 손쉽게 공감하게 만든다. 어쨌든 재밌고 뒤가 궁금해지게 만든다. 소설의 기원은 흥미라는 사실을 천명관 작가는 놓치지 않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 동이.
양 목사가 돌아왔지만 도망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자유가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거였다.
『아코디언』, 162쪽
- 나중에 죽어서 천당에 가면 뭘해. 씨발, 여기가 바로 지옥인데……
『아코디언』, 170쪽
위의 문장처럼 '생존'이 유일한 정언명령이고, 이를 위해선 그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되는 배경을 지닌 『아코디언』에서 유난한 인물이 딱 한 사람 있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눈치를 채겠지만, 그건 주인공 동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참혹한 시대와 운명 앞에 순응하고 선한 마음을 망가뜨려서라도 살아남는 사람, 순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 전자에는 깜상, 거북이 같은 인물이고, 후자는 상이군인과 연이일 것이다. (물론 연이는 시도에 그치긴 했다.)
동이는 이들과 다르다. 참혹한 시대와 운명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건 앞의 인물들과 마찬가지이지만, 동이는 끝까지 선한 본성을 꺾지 않는다. 맨몸으로 저항한다. 그런 점에서 동이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주인공의 자질을 갖췄다. 그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며 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이가 자신의 아코디언을 불자 뺨을 걷어올리지만, 그날밤 홍이를 불러내 아코디언을 직접 가르쳐준다.
물론, 동이가 마냥 선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인물을 외려 한심하게만 여길 수도 있다. 얼마간은 그런 감정도 생긴다. 왜냐하면, 연이에 대한 잔정 떄문에 일생 일대의 면접도 놓치게 된다. 현실적인 감각에서 동이는 멍청하다. 그러나 그게 동이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유이며, 읽는 내내 그를 응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매력이다.
그런 동이의 순수함 때문에 이런 의문도 생긴다. 하우스보이가 되든, 음식점 보조가 되든, 기지촌에서 출퇴근하는 이들처럼 해방촌에서 출퇴근하면 안 되는 건가? 미군 부대에 취직하면 무조건 움막을 떠나야하는 것처럼 그려진 건 소설 내에선 정확한 설명이 없어서 내내 지울 수 없는 의문이었다. 그냥 동이가 취직해서 그 돈으로 움막의 아이들을 돌보는 게 보다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동이는 마냥 선함을 추구하지는 못하고, 생존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나가려고 한다. 그 갈등과 고뇌 속에서 오야지가 되어가며 양 목사의 방식을 차용하게 된다. 악한 면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선 필요한 덕목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양 목사나 아미처럼 모질어지지는 못한다.
동이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동안 오갈 데 없는 앵벌이들을 위해 애써왔는데 아무도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화도 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럼 나가고 싶은 사람은 여기서 나가! 나가서 혼자 빌어먹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그것은 양 목사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아코디언』, 137쪽
몇 가지 단상들 - 연이, 아코디언, 그리고 희망.
이 소설의 핵심은 연이의 사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 소경 가수라는 점은 언뜻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미를 통해서 들은 연이가 시력을 잃게 된 경위도 그러하다. 그러나 진실을 알 수 없다. 여기에 도대체가 믿을 만한 선인이 있긴 한가? 악인과 피해자들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연이가 낳은 '돈이'는 과연 누구의 자식인가? 연이의 할아버지는 정말로 악인인가? 소설에서 드러나는 연이의 사연에는 명확한 진실을 찾을 수 없다. 연이의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연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악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에 대해서 털어놓는 이들이 모두 아미거나 양 목사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을 통해서 얻은 진실은 입증되거나 쉬이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다. 독자들은 이 사연을 접하고 딜레마에 빠지며, 이 시절의 혼란함, 아노미를 연이를 통해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진실은 아득하고 생존은 목구멍에서 다그친다.
또한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아코디언은 어떤가. 처음에는 아코디언이 특별히 환상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코디언이 들려줬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틀린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는 마치 동이가 스스로 만든 추론 같다. 동이와 거북이가 '돈이'의 아버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 장면을 살펴보면 그렇다. 거북이는 연이와 양 목사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동이는 차마 그런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코디언이 들려줬다는 이야기는 동이가 스스로 다다른 결론일 것이다. 동이가 그것이 아코디언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동이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 시대에 정말 의지할 만한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번도 보지 못한 진정한 어른 말이다.
- 내 얘기 잘 들어, 홍이야. 넌 잘 모르겠지만 너에겐 남다른 재주가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자신을 믿어야 돼.
『아코디언』, 270쪽
이는 결말 부근에 동이가 홍이를 송별하면서 건네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이 말은 어쩐지 동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처럼 보인다. 동이는 쟈니에게 들었던 '재주가 있어서 사는 게 쉽지 않겠다느니, 분수에 맞는 자리가 있다느니' 이런 말 때문에 스스로를 끝내 믿지 못했다. 그건 동이를 짓누르는 말이었다. 동이가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동이는 자신이 아코디언을 통해 스스로에게 해왔던 말을 그 스스로가 '홍이의 아코디언'이 되어 해준 것이다.
희망을 품는다는 건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아코디언』, 155쪽
마지막으로, 희망에 대하여 말해야만 할 것이다. 전후의 혼란상 속에서 희망을 품는다는 건 정말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것이 최선의 행복이자 최대의 희망이다. 그러나 동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쟈니의 말에 짓눌리고, 육손의 폭력에 좌절되긴 하여도 끝내 스스로 꿈꾸는 삶을 찾아나갔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앵벌이 가족'들을 육손에게서 해방시키고 부산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생존, 그 다음을 가족들에게 보장해준 것이다.
깜상은 동이와 악수를 나누며 자신들이 더는 어리기만 한 앵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맹수와 맞서 싸웠고 마침내 상대를 유인해 우물에 빠드렸다.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아코디언』, 260-261쪽
또한 홍이에게 스스로 아코디언이 되어, 희망을 물려준다. 동이의 꿈은 홍이를 통해 실현되려 한다. 결국 동이의 아코디언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던 희망을 연주하고자 했던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코디언』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소설이 필요했다고. 꼬마가 소년이 되고 그 소년이 다시 사내가 되고, 마침내 아버지가 되는 소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