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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문학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최은영 소설가의 첫 산문집 『백지 앞에서』를 읽는 내내 박진영의 말이 떠올랐다. 가수 박진영의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특유의 가창 이론이 제일 유명하긴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박진영이 힘주어 주장하는 것은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이다. 박진영은 유재하를 예로 들면서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수의 자질인지를 설파한다.
의식적인 결과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많은 소설가의 에세이집은 자신이 쓰는 소설과 차별화된다. 문장이라든지, 소재라든지, 그런 것들에서 얼마간 거리감이 생긴다. 그러나 최은영의 산문집 『백지 앞에서』를 읽으면서 나는 이 에세이가 그녀의 소설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에세이와 소설 두 장르 사이에서 간극이 없는 작가는 처음이었다. 박진영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을 쓰듯이 에세이를 쓰는 것" 같았다.
소설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점차 손이 풀렸다. 내 관념 속 '멋진' 문장을 포기하고 나만의 문체로 글을 썼다. 문체는 내면의 고유한 리듬이었다. 나는 나의 리듬을 존중하고자 했다. '주제'나 '의미' 같은 관념도 버렸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백지 앞에서』, 35쪽
『백지 앞에서』에도 밝히듯이, 자신의 경험을 허구적 인물들의 이야기에 녹아내는 최은영의 작법 스타일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백지 앞에서』 역시 산문집이라기보다는 최은영 작가의 신작 소설집을 읽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백지 앞에서』에서 드러나는 여성지 편집 경험을 반영한 단편소설 「몫」 같은 작품을 이미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후반부에서 사회적 이슈에 관해 힘을 주어 말할 때는 이러한 경향이 다소 옅어지고 최은영의 목소리가 더 뚜렷하게 들리는 듯했다. (이러한 지점은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가게끔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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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을 때면, 다 읽지도 못하고 벌써부터 감상을 어떻게 적어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니까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문장, 단어, 대화를 앞에 두고 할 말을 찾느라 고통스럽다. 때로는 그런 고심이 도움이 되긴 한다. 더 정확한 어휘를 찾아 제 위치에 정렬시키는 것은 언제나 글쓰기에 보탬이 되니까.
반대로 공감하게 되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면, "그래, 나도 이랬어." 라고 단순한 감상만을 떠올리게 된다. 이 정도로만 읽고 넘어가도 되는 걸까, 이런 고민이 수반된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읽고 감상을 남기는 게 더 좋은 독법인지 잘 모르겠다.
『백지 앞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고통스러웠다. 앞서 말한대로, 소설과 에세이의 별반 다르지 않음에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내용의 층위에선 고통스러웠다. 너무 많은 공감을 남기게 되므로. 어떤 사이트에는 글 하나에 공감을 누르는 게 아니라 문장 단위에 공감이나 멘트를 달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 『백지 앞에서』가 그런 사이트에 올라온 글이었다면, 나는 숱한 문장들에 공감 버튼을 눌러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대체로 내 아픈 상처를 건드는 일이기도 했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이 그렇다.
돌아보면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문학 연구는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내 존재를 던져서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실패해도 타격받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 당시의 나는 항상 그런 식의 선택을 했다. 치명상을 입지 않을 길을 찾고 겉으로 무난해 보이기 위해서 나를 속였다.
『백지 앞에서』, 30쪽
"잘해야 하니까요." 나는 타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날 향한 기대를 만족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더 잘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백지 앞에서』, 58쪽
나이가 들면서 놀라는 점은 껍데기만 늙어간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어릴 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 거울 속에는 나이든 사람이 보인다.
『백지 앞에서』, 75쪽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어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울고 있었는지 눈과 얼굴이 붉었다. 아빠도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랑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그때의 나는 몰랐던 것 같다.
『백지 앞에서』, 76쪽
상처받을 때마다 나는 나의 자리를 줄여왔다. 다치지 않을 수 있는 범위를 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제한했다. 상처받은 마음은 기억에 들러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백지 앞에서』, 92쪽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유의 사고는 내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못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마음에 있는 소리도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진짜 감정을 전하는 건 남사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백지 앞에서』, 107쪽
소설은 작가의 내면을 파서(dig) 파는(sell)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백지 앞에서』를 읽으며 최은영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동시에 에세이를 쓰려면 이토록 솔직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김상혁 작가의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사람들 앞에 날것의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내미는 건 어떤 용기가 있어야 가능할 것인가. 적당히 필요한 만큼의 용기밖에 낼 줄 모르고 살아온 나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아래의 두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운동을 하던 때, 나 역시 트레이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운동을 하기 전에는 나한테는 몸이 있다는 감각이 잘 들지 않았는데, 운동을 하고 나면 근육통 때문에 비로소 나에게 몸이 있다는 감각이 선명해진다고.
할아버지의 일화는 슬프면서도, 아니 어쩌면 슬프기 때문에 인상적이다.
아프면 사람의 마음은 외로움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아플 때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부분을 의식하게 된다. (…) 아프지 않은 사람은 무릎이나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도.
『백지 앞에서』, 81쪽
칠십대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충동적으로 영정 사진을 찍으러 갔다. 술을 마셔서 볼이 붉어진 채로, 이런 일이 재밌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백지 앞에서』,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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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둔하기 짝이 없는 개인의 견해로는 최은영 작가는 한동안 한국 소설을 풍미한 "안다무"의 창시자인 것 같다. "안온, 다정, 무해"한 단편 소설들이 문단에서나 사회에서나 크게 이슈가 되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기점을 『쇼코의 미소』 발간 전후로 헤아리고 있다. (최은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표제 역시 『내게 무해한 사람』이다.)
나는 『쇼코의 미소』를 읽으며 최은영 작가에게 여러 번 감탄했다. 도대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정확히 짚어내고 그걸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으면서는 조금 힘겨웠다. 좀처럼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진도는 더디게만 나갔다. 앞서 읽어왔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답신」을 제외하고는 「그 여름」이나 「신짜오, 신짜오」 같이 오래도록 마음에 잔상을 남기는 작품이 없었다. (『백지 앞에서』에서 작가는 「답신」이 실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고 적었는데, 그래서였는지 화자의 심장이 날카롭게 와닿았다.) 독자의 입장에선 작가가 하나의 주제에 오랫동안 천착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구태여 괴로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다. 신춘문예를 비롯한 몇몇 공모전에서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이후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 중에는 아마도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느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의 상처이거나 또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백지 앞에서』를 읽고 나서야 최은영 작가가 무엇에 천착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최은영 작가는 대학생 시절 "여성주의"를 배웠고, 이는 일종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세계관의 변동이기도 했으며,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변화시킨다. 첫 꼭지인 「백지 앞에서」 고백한 이후로, 이러한 문장은 책 곳곳에서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이게 조금 아쉽다는 느낌도 받았다. 여성주의에도 종류는 다양하다. 최은영 작가의 여성주의는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여성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명징하게 설명해주었다면, 책을 읽는 일에는 물론이고 최은영 작가의 작품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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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오효진의 인간탐험 중
나 역시 이 말에 동의한다. 문학은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 문학이 지식인의 전유물이고, 거대담론을 주도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저물었다. 이제 문학은 영화, 웹툰, 드라마와 같은 수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도 뒤처진 처지에 놓여있다.
읽는 사람도 점점 줄어가는 마당에, 문학이 인류를, 인간 전부를 구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는 지극히 어려운 일에 성공하는 문학도 분명 존재한다. 어떤 문학은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이를테면, 『스토너』를 읽으면서 경험한 울림에 대해 고백하는 숱한 리뷰들을 보라.
그러나 이렇게 독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문학은 적어도 한 사람은 구원한다. 그 문학 작품을 써내려가는 당사자를. 그리하여, 나는 겨우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문학이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쓰는 한 사람을 구원할 순 있다. 최은영 작가의 『백지 앞에서』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그렇게 생각했다.
일개 독자에 불과한 나로서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최은영 작가와 작품에 대해 깊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최은영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그가 빚어낸 소설과 인물에 공감했는지를,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어떤 지점이 그런 반응을 이끌어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소설쓰기가 깊은 애도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처리하지 못했던 슬픔을 다시 한번 깊이 느끼며 소화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이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속 기억을 끌어내 어떤 애도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리라 희망했다.
『백지 앞에서』, 2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