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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문지혁 지음 / 해냄 / 2024년 9월
평점 :
소설을 쓰고자 마음 먹은 당신에게 필요한 한 권의 책
학창 시절 급식실에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이 반찬을 제일 좋아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물었다.
"너 어제는 다른 반찬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마 이때부터였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어떤 분야에 있어서든 '이건 정말 최고다.'라는 식의 표현을 최대한 지양하려고 노력한다. '제일', 그리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최고'와 같은 비교 형용사는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 단 하나의 대상을 최고라고 확정짓는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은 최고 미만의 것이 되어버리니까. 내가 그 대상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경험해본 것도 아니기에 어쩌면 훗날 정말로 "제일"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경우에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법서를 다 읽어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체로 이름난 작법서들을 제법 들춰보았다. 그중에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있고, 데이먼 나이트의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이디스 워튼의 『당신의 소설 속에 도롱뇽이 없다면』 ,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거나 『소설창작론』 교과서도 들춰보기도 했다. 이런 개론에서부터 제임스 우드가 자유간접화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같은 책도 읽었다. 웹소설 작가 한산이가 작가의 『웹소설의 신』을 비롯한 웹소설 작법서와 근래에는 김호연 작가의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를 읽었다.
고백하자면, 소설 쓰기는 공부와는 달라서 교과서를 반복해서 읽는다고 결코 잘 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배웠다. 작가 역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물론 작법서가 작가 대신 글을 써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말했잖아요.
"예술이란 불과 수학의 결합이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8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작법서를 펴드는 건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끼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글쓰기가 행복하다는 작가는 자주 보았지만, 쉽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대체로 많은 작법서에서 작가들은 글쓰기가 너무 어렵고, 자주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고 나는 다시 초고를 쓰러 간다.
이렇게 내가 읽었던 작법서를 구태여 꺼내놓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원칙을 깨고, 아주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단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여태껏 "내가 읽었던 작법서" 중에서 최고의 작법서였다. 나 자신의 원칙마저 저버리고 이런 무시무시한 문장을 적었으니 나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게 설령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 * *
지금은 이상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단 내에서도 자리를 잡은 문지혁 작가지만, 그가 등단 때부터 내부인으로서 평가받은 것은 아니다. 장르문학 작가로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아왔으며, 꽤 오랜 기간을 방황한 내용이 『소설 쓰고 앉아 있네』에 적혀있다. 이러한 작가 개인의 경험과 더불어, 그가 그간 해왔던 글쓰기 수업의 요체를 담은 책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등단한 지 제법 오래되고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습작생들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다.
때로는 선행 연구를 한다는 명목으로 지원하는 공모전의 이전 수상작이나, 신인문학상의 수상작들을 살펴보며 시간을 축낼 때가 있다. 이런 작가 지망생들에게 문지혁 작가는 뼈아픈 충고를 날린다.
독서는 작가에게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면서 동시에 공부이자 연구이지만, 독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간혹 도장 깨기를 하듯 독서를 하고 있다는 작가 지망생들을 만나게 돼요. (…) 과연 그 독서 목록을 모두 격파하고 나면 그들은 훌륭한 작가가 되어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는 데 계란 한 알을 걸겠습니다. (…) 독자로서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82쪽
또한 백지로 된 한 편의 논문이 존재할 만큼, 작가들에게는 불치병이나 다름 없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에 대해서도 간결한 처방을 내린다.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라고.
"딱 한 문장만 쓰자."
『소설 쓰고 앉아 있네』, 50쪽
내일 당장 다 지워버릴 지 모르지만, 일단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쓰는 것이 맞다. 못난 글을 써도 작가이지만, 못난 글조차 쓰지 못하면 작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포성 소리가 울리고, 화약냄새가 진동하는 전선에서도 작가들은 글을 썼다. 어쩌면 써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작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쓰지 않고선 작가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요즘에는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편한 시절인가. 그저 손에 든 휴대폰에 타이핑을 하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들은 어디에서나 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쓰고자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 작가들이, 작가들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장례식장에서, 신혼여행지에서, 키즈 카페에서, 직장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과 버스, 비행기에서, 아픈 와중에도 그냥 썼습니다. 쓸 시간이 없다고, 방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대신 말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67쪽
기본적인 마인드에 대해서 다잡아준 후,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실제적인 내용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이 정말 좋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특히나 시점에 대한 설명, 엔딩에 대한 설명이 그랬다. 우선 시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자동차와 운전자의 비유를 가져온다.
시점은 작가와 인물(화자와 주인공), 그리고 독자 사이의 아주 복잡한 관계, 궁극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거리'를 만들어주는 장치거든요.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14쪽
우선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화자는 운전자다. 그리고 독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동승자다. 운전자는 스스로 운전을 해나가면서 하는 모든 생각, 감정을 쏟아낸다. 차 안에 있는 독자는 들을 수 있지만, 바깥 세상은 들을 수 없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도 화자는 운전자고, 독자는 동승자인 건 동일하지만, 지금 이 두 사람은 차 밖에 있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중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화자(관찰자)의 생각은 들을 수 있다.
3인칭 객관적 시점에서는 독자는 누구의 차도 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내려다보는 카메라처럼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3인칭 제한적 시점에서는 1인칭 시점처럼 차 안에 들어가서 살펴보고, 운전자가 하는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제한적"이라는 수사처럼 도로(소설 안의) 위의 차량 단 한 대에만 적용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3인칭 전지적 시점은 모든 차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가 운전자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는 시점이다.
요약하자면, 시점이란 결국 "A(작가)/N(화자)/P(주인공)/R(독자)"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절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에서는 엔딩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우선 아이러니, 독자가 작품을 읽고 "깊이"를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는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 사이의 격차에 있다. 주인공에게 "외면적 목표"(100억 모으기 등)와 "내면적 목표(첫사랑 찾기)"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둘 모두를 달성하면, 동화적 엔딩이 된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식의 결말은 뒤에 벌어질, 그리고 그 끝에 이르기까지 내재된 많은 문제들을 모두 쉬쉬하게 만든다. 그 다음으로 외면적 목표는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내면적 목표를 달성한 경우에 "해피엔딩"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보고서』가 이에 해당할 것 같다. 대온실 수리보고서 작성(외면적 목표)에서는 빠져야 했지만, 과거의 상처 회복(내면적 목표)은 달성했으니 말이다.
그 다음으로는 외면적 목표는 달성했으되, 내면적 목표는 실패한 경우는 새드엔딩에 해당한다. 100억을 모아 부자가 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루어지지 못하면 공허함만 남는다. 어쩌면 현진건 작가의 「운수 좋은 날」이 이에 해당할 것 같다. 그날 하루 수입은 좋았지만, 결국 그 수입을 나누어 쓸 아내가 죽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는 외면적 목표 달성, 내면적 목표 달성 모두에 실패한 '우울한 엔딩'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엔딩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분류 방법은 작가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직관적이고 쉽게 와닿았다.
또한 자서전에 대한 정의 역시 이 책에서 처음 접해서 흥미로웠다. 자서전은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고 한다. 이름의 동일성, 참조 기능, 독자의 규약. 그리고 작가와 화자, 주인공이 모두 일치하는 작품의 경우에 자서전이 된다.
① 이름의 동일성
② 참조 기능
③ 독자의 규약
A(author, 작가)=N(narrator, 화자)=P(protagonist, 주인공)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04쪽
또한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플롯에 대해서도 다룬다. 플롯은 주인공을 향한 음모라고 정의하면서,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 헤쳐나가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플롯은 주인공을 향한 음모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46쪽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계속 똑같은 플롯만 주야장천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역사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수반하는 반복이잖아요? 그 작은 '차이'를 만들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트위스트'와 '디테일'에서 나옵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66쪽
또한 "돈 텔, 벗 쇼 (Don't tell, but show)"라는 유명한 창작 격언을 가져와 장면을 만들 것을 강조한다. 장면은 또다시 서술, 묘사,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 담겨 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직접 실천에 옮겨 적어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묘사는 감각을 감정으로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50쪽
* * *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이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과 비슷한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소설의 평범함과 비범함에 대한 이야기. 근래의 길란 작가의 소설들을 읽으며, 길란 작가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행동을 하는 주인공들을 내세워 매력적인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문지혁 작가 역시 소설은 '평범하지만 위장된 비범함'이어야 한다는 언급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함이 실은 위장된 비범함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00쪽
또한 특정 주제나 장르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서 이미 전에 나온 기라성 같은 작품을 읽다보면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데, 굳이 내가?" 라는 생각 말이다. 문지혁 작가 역시 그런 고민을 적어두었고, 그런 책들 사이에서도 "차이를 수반하는 반복"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한 발짝 더 나아간 이야기를 만들자고 격려한다.
선행 연구를 하다 보면 내가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작품들을 어김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그 목록이 너무 길고 방대해서 읽다가 '그냥 쓰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이렇게나 좋은 이야기들이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데, 거기에 내 것을 하나 더한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68쪽
또한 합평에 대한 견해 역시 비슷하다. 나는 합평을 해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르게 문학은 특히나 창작자가 창작물에 대한 동일시가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영화, 음악, 미술 분야의 창작자와 창작물 사이의 거리보다도 문학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까워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거의 동일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합평에서 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곧 창작자 본인에 대한 비판적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이 격앙되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합평에서 중요한 것은 합평을 통해 타인의 시각을 빌려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는 메타인지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목적은 어쨌든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지, 남을 깎아내리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① 우리와 우리가 쓴 것은 아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치 부모와 자식처럼.
② 우리는 자기 자신(그리고 자신의 자녀)을 정확하게 보기 어렵다.
③ 누군가 정확하게 보아주면 기분이 상하거나 상처를 받는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241쪽
또한 문지혁 작가는 책 내내 "차이를 수반해 반복"하여 "퇴고"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모든 초고는 다 쓰레기다." 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언급한다. 이는 내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늘 잊어버리곤 하는 말인데, 나는 퇴고를 잘 하지 못한다. 그건 내 글이 완벽해! 라는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내 글이 너무 못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들춰보기도 힘들 정도로. 그래서 퇴고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냥 새로운 글을 써버리는 쪽을 선택하는데, 이는 퇴고라는 중대한 문제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퇴고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반성한다......)
또한 퇴고에 있어서 작가는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라(kill your darlings)"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을 인용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때로는 그 소설을 시작하게 만든 부분이라 할지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초고는 다 비슷하게 별로입니다. 이를 누가 더 많이, 오래, 될 때까지 끈질기게 고칠 수 있느냐가 우리를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로 나누는 기준입니다. 초고의 완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29쪽
여담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원고, 초고, 퇴고의 한자에 대해서 알 수 있었는데,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한자여서 놀랐다. 원고와 초고는 모두 '볏집 고'를 쓰고, 퇴고는 '밀 퇴'와 '두드릴 고'를 쓰는 고사성어라고 한다.
퇴고란 무엇일까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퇴고'라는 단어가 어떤 한자로 이뤄져 있을 것 같냐고 물어보면, '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지만, '고'는 원고(原稿)나 초고(草稿)에 쓰이는 '볏짚 고(稿)'일 거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249쪽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779~843)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문득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라서 즉시 정리해 보았다. 제목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에 제(題)함'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초(草)를 잡았다.
閑居少隣竝(한거소린병) 이웃이 드물어 한적한 집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이 자란 좁은 길은 거친 뜰로 이어져 있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못 가의 나무에 깃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이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초를 잡고 나니 결구(結句)를 민다(推)로 해야 할지, 두드리다(敲)로 해야 할 지를 이리저리 궁리하며 가다가 자신을 향해 오는 고관의 행차와 부딪혔다. 그 고관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이며 부현지사(副縣知事)인 한유(韓愈, 768~824)였다. 가도는 먼저 길을 피하지 못한 까닭을 말하고 사과했다. 역시 대문장가인 한유는 뜻밖에 만난 시인의 말을 듣고 꾸짖기를 잊어버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내 생각엔 '두드리다.'가 좋을 듯하네." 이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퇴고 고사성어 (출처: 나무위키)
또한 문지혁 작가는 필립 로스의 말을 인용해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라고도 말한다. 이것도 나에게는 꽤나 뼈아프게 다가오는데, 나는 종종 무엇인가가 그럴 듯한 이야기거리가 떠오를 때까지 쓰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아마추어이끼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일정한 시간을 배정해 억지로라도 써보야할 것 같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냉정한 조언을 아끼지 않던 작가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중요한 고백을 한다. 스스로를 작가로 만든 것은 글쓰는 재능보다도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었다고. 정말로 우리에게는 재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상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를 써낸 작가도 습작기만 12년을 가졌다고 한다. '작가가 되는 것'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재능은 나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믿으며 포기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의미로 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친절하고 따뜻한 품성의 친구가 내 옆에 앉아 글쓰기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실제로 이 책의 도입부에서 작가는 그런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가끔 무슨 작법서를 봐야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나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을 주워섬기곤 한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간지가 나니까. 그리고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 읽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그러나 이제 누군가 내게 또 무슨 작법서를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추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