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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앉아 있네 -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문지혁 지음 / 해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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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자 마음 먹은 당신에게 필요한 한 권의 책





학창 시절 급식실에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이 반찬을 제일 좋아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물었다.

"너 어제는 다른 반찬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마 이때부터였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어떤 분야에 있어서든 '이건 정말 최고다.'라는 식의 표현을 최대한 지양하려고 노력한다. '제일', 그리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최고'와 같은 비교 형용사는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 단 하나의 대상을 최고라고 확정짓는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은 최고 미만의 것이 되어버리니까. 내가 그 대상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경험해본 것도 아니기에 어쩌면 훗날 정말로 "제일"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경우에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법서를 다 읽어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체로 이름난 작법서들을 제법 들춰보았다. 그중에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있고, 데이먼 나이트의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이디스 워튼의 『당신의 소설 속에 도롱뇽이 없다면』 ,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거나 『소설창작론』 교과서도 들춰보기도 했다. 이런 개론에서부터 제임스 우드가 자유간접화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같은 책도 읽었다. 웹소설 작가 한산이가 작가의 『웹소설의 신』을 비롯한 웹소설 작법서와 근래에는 김호연 작가의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를 읽었다.


고백하자면, 소설 쓰기는 공부와는 달라서 교과서를 반복해서 읽는다고 결코 잘 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배웠다. 작가 역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물론 작법서가 작가 대신 글을 써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말했잖아요.

"예술이란 불과 수학의 결합이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8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작법서를 펴드는 건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끼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글쓰기가 행복하다는 작가는 자주 보았지만, 쉽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대체로 많은 작법서에서 작가들은 글쓰기가 너무 어렵고, 자주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고 나는 다시 초고를 쓰러 간다.


이렇게 내가 읽었던 작법서를 구태여 꺼내놓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원칙을 깨고, 아주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단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여태껏 "내가 읽었던 작법서" 중에서 최고의 작법서였다. 나 자신의 원칙마저 저버리고 이런 무시무시한 문장을 적었으니 나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게 설령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 * *




지금은 이상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단 내에서도 자리를 잡은 문지혁 작가지만, 그가 등단 때부터 내부인으로서 평가받은 것은 아니다. 장르문학 작가로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아왔으며, 꽤 오랜 기간을 방황한 내용이 『소설 쓰고 앉아 있네』에 적혀있다. 이러한 작가 개인의 경험과 더불어, 그가 그간 해왔던 글쓰기 수업의 요체를 담은 책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등단한 지 제법 오래되고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습작생들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다.


때로는 선행 연구를 한다는 명목으로 지원하는 공모전의 이전 수상작이나, 신인문학상의 수상작들을 살펴보며 시간을 축낼 때가 있다. 이런 작가 지망생들에게 문지혁 작가는 뼈아픈 충고를 날린다.


독서는 작가에게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면서 동시에 공부이자 연구이지만, 독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간혹 도장 깨기를 하듯 독서를 하고 있다는 작가 지망생들을 만나게 돼요. (…) 과연 그 독서 목록을 모두 격파하고 나면 그들은 훌륭한 작가가 되어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는 데 계란 한 알을 걸겠습니다. (…) 독자로서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82쪽


또한 백지로 된 한 편의 논문이 존재할 만큼, 작가들에게는 불치병이나 다름 없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에 대해서도 간결한 처방을 내린다.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라고.



"딱 한 문장만 쓰자."

『소설 쓰고 앉아 있네』, 50쪽


내일 당장 다 지워버릴 지 모르지만, 일단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쓰는 것이 맞다. 못난 글을 써도 작가이지만, 못난 글조차 쓰지 못하면 작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포성 소리가 울리고, 화약냄새가 진동하는 전선에서도 작가들은 글을 썼다. 어쩌면 써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작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쓰지 않고선 작가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요즘에는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편한 시절인가. 그저 손에 든 휴대폰에 타이핑을 하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들은 어디에서나 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쓰고자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 작가들이, 작가들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장례식장에서, 신혼여행지에서, 키즈 카페에서, 직장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과 버스, 비행기에서, 아픈 와중에도 그냥 썼습니다. 쓸 시간이 없다고, 방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대신 말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67쪽



기본적인 마인드에 대해서 다잡아준 후,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실제적인 내용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이 정말 좋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특히나 시점에 대한 설명, 엔딩에 대한 설명이 그랬다. 우선 시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자동차와 운전자의 비유를 가져온다.


시점은 작가와 인물(화자와 주인공), 그리고 독자 사이의 아주 복잡한 관계, 궁극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거리'를 만들어주는 장치거든요.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14쪽


우선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화자는 운전자다. 그리고 독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동승자다. 운전자는 스스로 운전을 해나가면서 하는 모든 생각, 감정을 쏟아낸다. 차 안에 있는 독자는 들을 수 있지만, 바깥 세상은 들을 수 없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도 화자는 운전자고, 독자는 동승자인 건 동일하지만, 지금 이 두 사람은 차 밖에 있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중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관찰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화자(관찰자)의 생각은 들을 수 있다.


3인칭 객관적 시점에서는 독자는 누구의 차도 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내려다보는 카메라처럼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3인칭 제한적 시점에서는 1인칭 시점처럼 차 안에 들어가서 살펴보고, 운전자가 하는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제한적"이라는 수사처럼 도로(소설 안의) 위의 차량 단 한 대에만 적용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3인칭 전지적 시점은 모든 차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가 운전자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는 시점이다.


요약하자면, 시점이란 결국 "A(작가)/N(화자)/P(주인공)/R(독자)"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절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에서는 엔딩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우선 아이러니, 독자가 작품을 읽고 "깊이"를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는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 사이의 격차에 있다. 주인공에게 "외면적 목표"(100억 모으기 등)와 "내면적 목표(첫사랑 찾기)"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둘 모두를 달성하면, 동화적 엔딩이 된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식의 결말은 뒤에 벌어질, 그리고 그 끝에 이르기까지 내재된 많은 문제들을 모두 쉬쉬하게 만든다. 그 다음으로 외면적 목표는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내면적 목표를 달성한 경우에 "해피엔딩"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보고서』가 이에 해당할 것 같다. 대온실 수리보고서 작성(외면적 목표)에서는 빠져야 했지만, 과거의 상처 회복(내면적 목표)은 달성했으니 말이다.


그 다음으로는 외면적 목표는 달성했으되, 내면적 목표는 실패한 경우는 새드엔딩에 해당한다. 100억을 모아 부자가 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루어지지 못하면 공허함만 남는다. 어쩌면 현진건 작가의 「운수 좋은 날」이 이에 해당할 것 같다. 그날 하루 수입은 좋았지만, 결국 그 수입을 나누어 쓸 아내가 죽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는 외면적 목표 달성, 내면적 목표 달성 모두에 실패한 '우울한 엔딩'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엔딩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분류 방법은 작가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직관적이고 쉽게 와닿았다.


또한 자서전에 대한 정의 역시 이 책에서 처음 접해서 흥미로웠다. 자서전은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고 한다. 이름의 동일성, 참조 기능, 독자의 규약. 그리고 작가와 화자, 주인공이 모두 일치하는 작품의 경우에 자서전이 된다.


① 이름의 동일성

② 참조 기능

③ 독자의 규약


A(author, 작가)=N(narrator, 화자)=P(protagonist, 주인공)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04쪽



또한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플롯에 대해서도 다룬다. 플롯은 주인공을 향한 음모라고 정의하면서,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 헤쳐나가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배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플롯은 주인공을 향한 음모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46쪽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계속 똑같은 플롯만 주야장천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역사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수반하는 반복이잖아요? 그 작은 '차이'를 만들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트위스트'와 '디테일'에서 나옵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66쪽


또한 "돈 텔, 벗 쇼 (Don't tell, but show)"라는 유명한 창작 격언을 가져와 장면을 만들 것을 강조한다. 장면은 또다시 서술, 묘사,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 담겨 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직접 실천에 옮겨 적어보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묘사는 감각을 감정으로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50쪽




* * *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이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과 비슷한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소설의 평범함과 비범함에 대한 이야기. 근래의 길란 작가의 소설들을 읽으며, 길란 작가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행동을 하는 주인공들을 내세워 매력적인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문지혁 작가 역시 소설은 '평범하지만 위장된 비범함'이어야 한다는 언급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함이 실은 위장된 비범함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00쪽


또한 특정 주제나 장르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서 이미 전에 나온 기라성 같은 작품을 읽다보면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데, 굳이 내가?" 라는 생각 말이다. 문지혁 작가 역시 그런 고민을 적어두었고, 그런 책들 사이에서도 "차이를 수반하는 반복"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한 발짝 더 나아간 이야기를 만들자고 격려한다.


선행 연구를 하다 보면 내가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작품들을 어김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그 목록이 너무 길고 방대해서 읽다가 '그냥 쓰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이렇게나 좋은 이야기들이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데, 거기에 내 것을 하나 더한다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요.

『소설 쓰고 앉아 있네』, 168쪽


또한 합평에 대한 견해 역시 비슷하다. 나는 합평을 해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르게 문학은 특히나 창작자가 창작물에 대한 동일시가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영화, 음악, 미술 분야의 창작자와 창작물 사이의 거리보다도 문학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까워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거의 동일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합평에서 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곧 창작자 본인에 대한 비판적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이 격앙되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합평에서 중요한 것은 합평을 통해 타인의 시각을 빌려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는 메타인지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목적은 어쨌든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한 것이지, 남을 깎아내리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① 우리와 우리가 쓴 것은 아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치 부모와 자식처럼.


② 우리는 자기 자신(그리고 자신의 자녀)을 정확하게 보기 어렵다.


③ 누군가 정확하게 보아주면 기분이 상하거나 상처를 받는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241쪽


또한 문지혁 작가는 책 내내 "차이를 수반해 반복"하여 "퇴고"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모든 초고는 다 쓰레기다." 라는 헤밍웨이의 말을 언급한다. 이는 내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늘 잊어버리곤 하는 말인데, 나는 퇴고를 잘 하지 못한다. 그건 내 글이 완벽해! 라는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내 글이 너무 못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들춰보기도 힘들 정도로. 그래서 퇴고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냥 새로운 글을 써버리는 쪽을 선택하는데, 이는 퇴고라는 중대한 문제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퇴고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반성한다......)


또한 퇴고에 있어서 작가는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라(kill your darlings)"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을 인용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때로는 그 소설을 시작하게 만든 부분이라 할지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초고는 다 비슷하게 별로입니다. 이를 누가 더 많이, 오래, 될 때까지 끈질기게 고칠 수 있느냐가 우리를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로 나누는 기준입니다. 초고의 완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29쪽



여담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원고, 초고, 퇴고의 한자에 대해서 알 수 있었는데,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한자여서 놀랐다. 원고와 초고는 모두 '볏집 고'를 쓰고, 퇴고는 '밀 퇴'와 '두드릴 고'를 쓰는 고사성어라고 한다.



퇴고란 무엇일까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퇴고'라는 단어가 어떤 한자로 이뤄져 있을 것 같냐고 물어보면, '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지만, '고'는 원고(原稿)나 초고(草稿)에 쓰이는 '볏짚 고(稿)'일 거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249쪽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779~843)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문득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라서 즉시 정리해 보았다. 제목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에 제(題)함'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초(草)를 잡았다.


閑居少隣竝(한거소린병) 이웃이 드물어 한적한 집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이 자란 좁은 길은 거친 뜰로 이어져 있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못 가의 나무에 깃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이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초를 잡고 나니 결구(結句)를 민다(推)로 해야 할지, 두드리다(敲)로 해야 할 지를 이리저리 궁리하며 가다가 자신을 향해 오는 고관의 행차와 부딪혔다. 그 고관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이며 부현지사(副縣知事)인 한유(韓愈, 768~824)였다. 가도는 먼저 길을 피하지 못한 까닭을 말하고 사과했다. 역시 대문장가인 한유는 뜻밖에 만난 시인의 말을 듣고 꾸짖기를 잊어버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내 생각엔 '두드리다.'가 좋을 듯하네." 이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퇴고 고사성어 (출처: 나무위키)



또한 문지혁 작가는 필립 로스의 말을 인용해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라고도 말한다. 이것도 나에게는 꽤나 뼈아프게 다가오는데, 나는 종종 무엇인가가 그럴 듯한 이야기거리가 떠오를 때까지 쓰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아마추어이끼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일정한 시간을 배정해 억지로라도 써보야할 것 같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냉정한 조언을 아끼지 않던 작가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중요한 고백을 한다. 스스로를 작가로 만든 것은 글쓰는 재능보다도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었다고. 정말로 우리에게는 재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상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를 써낸 작가도 습작기만 12년을 가졌다고 한다. '작가가 되는 것'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재능은 나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믿으며 포기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의미로 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는 친절하고 따뜻한 품성의 친구가 내 옆에 앉아 글쓰기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실제로 이 책의 도입부에서 작가는 그런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가끔 무슨 작법서를 봐야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나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을 주워섬기곤 한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간지가 나니까. 그리고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 읽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그러나 이제 누군가 내게 또 무슨 작법서를 써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문지혁 작가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추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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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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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을 애도하는, 봄밤의 모든 것





소설가 백수린의 『봄밤의 모든 것』을 읽었다. 작년 봄에 나오자마자 사두고는, 결국 일년이나 지나 올해 봄이 끝나기 전에야 다 읽을 수 있었다. 『봄밤의 모든 것』은 총 7편의 단편소설들이 묶여 있다.




· 「아주 환한 날들」

· 「빛이 다가올 때」

· 「봄밤의 우리」

· 「흰 눈과 개」

· 「호우豪雨」

· 「눈이 내리네」

·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봄밤의 모든 것』을 읽으면서 앤드루 포터의 작품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실제로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한국어판에는 백수린 작가의 추천사가 적혀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백수린 작가가 앤드루 포터에게 받은 영향이 작품 전반에 스며 있는 듯하다. 특히나 3인칭 서술로 진행되는 작품에서 이렇게 질문이 돌출되는 작법은 영미 문학의 냄새를 짙게 만든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가로는 손보미 작가가 있다. 손보미 작가는 줄표/대시(-)를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자신에게 누군가의 완전한 신뢰와 사랑을 받는 일의 기쁨과 두려움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개가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냈다. 아, 다들 이 부재를 어떻게 견디는 거지?

「봄밤의 우리」, 95쪽



딸에게 결혼을 아주 잘했다고 말하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흰 눈과 개」, 129쪽



누구나 다 안다고? 대체 누가 다 안다는 말인가?

「흰 눈과 개」, 133쪽




『봄밤의 모든 것』을 읽으며 느낀 것은 백수린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드러나는 문체였다. 근래에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작가나 작품들이 있지만, 소설은 서사 문학이다. 『봄밤의 모든 것』은 특이하게도 서사성이 강하다는 느낌을 주진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사건 역시도 지극히 평범해서 "사건"이라 하기도 어렵다는 인상을 줄 정도다. 하지만 이를 상쇄해 작품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백수린 작가가 포착하는 감정의 단면과 이를 표현해내는 문장이다.



책을 읽으면서 소희가 느꼈던 것은 비밀스러운 기쁨이었다. 책을 펼치면 만나게 되는 세계는 상상 속에서 실재했고, 소희는 자신이 겪는 고독과 괴로움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호우豪雨」, 150-151쪽


그 시절 소희의 마음 속에서는 무엇인가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과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충돌했다. 낯선 세계로 모험을 떠나고픈 욕망과 아무 데도 갈 엄두를 내지 못하며 주저하는 기질이 날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전쟁을 벌였다.

「호우豪雨」, 151쪽


주변부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조차 다혜의 마음 속에는 어쩌면 사실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었다.

「눈이 내리네」, 182쪽


스물이었던 다혜에게 당시 스물일곱 살이던 준우는 까마득한 어른 같아 보였는데, 그건 그때 다혜가 이십대 후반까지의 삶만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내리네」, 191쪽


다혜는 그 당시 관계가 끝났음을 자신이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간을 끈 건 틀림없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에 대한 두려움. 사랑을 다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 다혜는 아는데, 당시 이별을 계속 유예했던 건 무엇보다 젊고 예뻤던 시절의 자신을 그가 상기시켰기 때문이었다.

「눈이 내리네」, 198쪽


어둠 속에서 친구의 숨소리가 전에 없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이만큼이나 가깝게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워할 날이 올거라는, 이 순간으로 되돌아오고 싶지만 절대로 그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할 날이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239쪽



이처럼 삶의 여정 속에서 문득 느끼고 지나가는 감정들에 주목한 문장들을 읽어나가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런 경험들은 이 작품들을 읽어나가는 "비밀스러운 기쁨"을 주었다.


소설집 후반에 실린 세 편의 단편 소설, 「호우豪雨」,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는 연작 소설이다. 대학교 동기들인 "소희", "다혜", "상아"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런 연작 작품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각각 독립적인 작품이 어떻게 서로 다른 작품과 연계되는지 찾아보는 일일 것이다. 각 작품의 화자가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사실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런 점들은 작품의 혈연 관계를 더욱 짙게 만들어준다.


「눈이 내리네」의 화자 다혜는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에서 술에 취해 울먹인다. 그리고 자신의 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이는 「눈이 내리네」에서 만났던 애인이 자신에게 남겼던 강렬한 기억 중 하나가 은연중에 영향을 끼친 듯하다.


차가운 발을 두손으로 감싸 쥐며 "작은 새 두 마리 같아"라고 말한다는 사실은.

-「눈이 내리네」, 195쪽


"이거 봐라, 나 발 진짜 못생겼지?" (…) "내 발 진짜 아빠 발이랑 똑같거든. 근데 우리 아빠는 새끼발가락 하나가 없다? 옛날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렇다는데, 어렸을 때는 맨날 나한테 악어가 물어 가서 한 개가 없다고 그랬어. 나는 그걸 또 오랫동안 믿었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228쪽



또한 노련한 작가는 독자를 애태울 줄도 아는 것 같다. 이 작품집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흰 눈과 개」에 있다. "아버지"가 카페에서 늘 보던 개의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작가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를 바로 말해주지 않는다. 독자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냉랭하던 딸을 불러서 같이 보려고 하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 잠시 지연시켜놓았던 진실을 보여준다. 이는 「호우」에서도 노인의 죽음에 대해서 곧장 말하지 않고 조금 지나 알려주는 것으로 재현된다.




* * *





사랑만큼 인류의 역사상 오래된 이야깃거리는 없을 것이다. 불멸의 고전 속에도 사랑은 등장하거니와 지금도 무수히 쏟아지는 문학과 노래, 영화에는 사랑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사랑과 상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러므로 상실과 애도 역시 무수한 변주를 겪으며 예술가들의 절망스럽게 사랑스러운 뮤즈가 되어왔다.


『봄밤의 모든 것』은 상실을 애도하는 소설로 읽힌다. 소설 속 인물들에겐 모두 당면하거나 충분히 지나왔다고 여긴 상실이 있다. 그것은 처치 곤란한 동반자였던 앵무새나, 개로 표상되기도 한다. 할머니거나, 토끼거나, 이모할머니거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거나, 젊은 시절에 친구들과 나눠가졌던 소중한 시절이거나. 소설 속 인물들은 제각기의 방법으로 이 상실을 껴안고 살고, 애도하면서 견딘다.


우리는 그런 소중한 봄과 같은 시간들이 곁을 스쳐지나갈 때는 미처 자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섣불리 그 봄이 영원할 것이라 믿어버린다. 그래서 무심코 이런 말을 내뱉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몇 번의 봄을 더 함께 볼 수 있을까?"

「봄밤의 우리」, 94쪽


인생은 가혹하게도 봄이 영원할 것이라 믿어버리게 된 직후에 봄을 빼앗는다. 그리하여, 소설 속 어떤 인물들은 이런 생각도 하는 것이리라. 내가 먼저 겪은 봄의 상실을 내 자식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미 숱한 봄을 잃어본 아버지와 그 봄을 만져도 보고 잃어도 보고 싶었던 딸은,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8년이라는 긴 시간을 단절된 채로 지낸다.


"헤어지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니까."

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덧붙였다.

"그렇지만 사실 전 제가 직접 겪어보고 알고 싶었어요."

「흰 눈과 개」, 128쪽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리가 한 쪽 없는 개가 뿜어내는 생명력을 보면서 이 부녀는 화해에 이른다. 이 대목에서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산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랑을 주는 법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 사람뿐일지도 모른다고.

「흰 눈과 개」, 140쪽



모든 상실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우리에겐 1~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조선에서도 그러했듯이 많은 문명에서 삼년에 걸친 장례가 문화가 발견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완전히 씻어내는 데 필요한 시간이 3년 정도라는 뜻일 것이다. 그만큼 상실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각자만의 봄밤이 필요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봄, 생명이 움트는 봄의 낮을 보내고, 세상이 쓸쓸하게 젖어드는 봄밤. 다가오는 여름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그 봄밤은 우리를 상실에서 구원한다.


그리고 다음날이 찾아오면, 다시 찾아올 다른 봄을 기대하는 것. 상실의 고통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봄밤이 필요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 * *




한 가지 의문스러웠던 옥의 티는 「눈이 내리네」에 있다. 이모 할머니는 글을 모른다고 밝혀지고, 생의 마지막에 다와가서 한글을 배운다. 그런데 그런 이모할머니가 어떻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을까? 설정 구멍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선해하자면, (음성) 메시지인 것 같기도 하다.


"이모할머니한테 늦는다고 말 안 하고 나왔더니 메시지를 벌써 일곱 개나 남기셨어."

「눈이 내리네」, 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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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환상 극장 안전가옥 FIC-PICK 10
최지원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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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환상적인 경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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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환상 극장 안전가옥 FIC-PICK 10
최지원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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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환상적인 경성에






'다이쇼 로망'이라는 말이 있다.


다이쇼 로망(大正ロマン、大正浪漫)은 일본에서 다이쇼 시대(1912~1926)의 낭만주의 사조를 뜻한다.


일본에서 다이쇼 시대는 메이지 유신 이후 팽창한 국세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로, 군국주의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고 대공황과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살기가 팍팍했던 쇼와 시대 초기의 1930년대~194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기 좋은 시대였다.때문에 일본인들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으며,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창작물들도 많이 나오는데 이를 다이쇼 로망이라고 한다. 유럽의 벨 에포크, 빅토리아 시대와 비슷한 느낌이다. 국가적으로 위세를 떨쳤다는 것과 문화적으로 융성했다는 이유로 현대에는 곧잘 미화되지만, 실상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 대한 수탈로 이룬 번영이었다는 점과 하층민들의 삶은 궁핍했다는 점 등에서 비슷하다.


- 나무위키, 다이쇼 로망 항목 중



위 설명에도 언급되듯이, '벨 에포크', '빅토리아 시대'와 같은 향수를 주는 시대이다. 이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특히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를 '경성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다이쇼 로망'처럼 명확한 장르로서 규정되기보다는 투여서 부르는 정도인 것 같다. 근래에 이 시기를 그린 작품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은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다.



개인적으로 일제강점기에 깊은 흥미를 느낀다. 그때에 태어났다고 한들, 내가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나는 타고난 겁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의 이야기를 접하고 분개하거나 같이 가슴을 졸이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경성 환상 극장』은 특이한 앤솔로지 단편집이다. 최지원, 전효원, 장아미, 김이삭, 한켠, 이 다섯명의 작가들이 모여서 각자 작품을 쓰는데, 그 작품들이 일종의 연작처럼 이어진다. 크게 세 가지 지점을 공유하는데, 시간대로는 '식민지 시기 경성'이라는 점, 공간대로는 경성의 <카르멘>을 상영하는 "환상극장"이라는 점, 그리고 소설의 주제가 모두 사랑, 로맨스라는 점이다.


각각의 단편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최지원, 「경성의 카르멘」


전효원, 「좋아하는 척」


장아미, 「무대 뒤에서」


김이삭, 「사랑의 큐피드」


한켠,「빛으로 빛으로」



이 작품의 서두에 수록된 「경성의 카르멘」은 이후 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는 <카르멘>의 대본을 쓴 작가에 대한 이야기다. <카르멘>은 원래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을 토대로 만든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다. 전세계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더불어 극장에 가장 많이 올려지는 레퍼토리다. 이번에 조금 찾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익숙한 곡들이 이 오페라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투우사의 노래>, <하바네로>, <서곡> 등이 그러했다.



* * *



『경성 환상 극장』 내에서는 오페라 <카르멘>을 연극으로 올린다. 그러기 위해선 대본의 수정이 필요한데, 이 수정을 맡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경성의 카르멘」이다.


이어지는 전효원 작가의 「좋아하는 척」은 조연 배우와 연극의 투자자를 조명한다. 『니자이나리』에서도 느껴졌듯이 대화를 생동감 있게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아미 작가의 「무대 뒤에서」는 <카르멘>을 공연하는 극단 '유월회'의 의상을 담당하는 '보헤미안' 사장과 무대 배경을 그리는 인물의 이야기다.


김이삭 작가의 「사랑의 큐피드」는 환상극장 매표소 직원과 베일에 쌓인 신비로운 인물인 극장주가 주인공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켠 작가의 「빛이여 빛이여」는 환상극장의 초연 공연에서 벌어졌던 10년 전 일을 다루고 있다. 그 공연에서 '카르멘' 역을 맡았던 여주인공과 무대 조명 담당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유일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앞선 작품들과 다르게 희곡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작중의 주요 배경으로 설정된 장소가 '환상극장'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재밌게 다가온다.


『경성 환상 극장』이 동시기를 다루는 작품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미스터션샤인>이 독립운동을 서사의 큰 축으로 삼아 이야기와 주제가 진행된다면, 『경성 환상 극장』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 운동 같은 거대 담론은 완전히 배제하고 사랑과 같은 이야기에 집중한 것은 아니다. 『경성 환상 극장』에도 (의열단을 모티프로 한 것처럼 보이는) '열혈단'이라는 무장 투쟁 단체가 등장하고 이들의 이야기가 단편들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중심 주제가 '사랑'이다보니, 식민지 경성의 시대상 같은 것에 조금 더 집중이 된 느낌이었다.


또한 구성적으로 5편의 작품들이 다른 작품의 꼬리를 물고 있는 구조라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척」에서 보헤미안 의상실에서 일하는 환희가 요새 자주 안 보인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동안 환희가 무엇을 했는지는 「무대 위에서」에서 밝혀진다. 또한 「무대 위에서」에서는 티켓걸 란주가 <카르멘> 상영 직전 준비 기간동안 출근을 하지 않는다고 언급되는데, 그동안 란주가 무엇을 했는지는 「사랑의 큐피드」에서 밝혀진다.

이런 식으로 앞 작품의 떡밥이 뒷 작품에서 해소되는 부분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시간대가 서로 겹치고 벌어지고 하다보니, 「경성의 카르멘」의 말미에 죽음을 맞은 정호진이 「좋아하는 척」에서는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지점은 세계관을 맞물리던 작업 중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옥의 티인듯 하다. (이후 이어지는 「사랑의 큐피드」(214쪽)에는 정호진의 죽음이 드러나있다.)



"이런 시대에 생각 없이 살면 총 맞아야지."


-『경성 환상 극장』, 277쪽



처음 접해보는 연작 형식의 엔솔로지 작품집이라 서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무대 위에서」는 읽기가 조금 어려웠는데, 아무래도 적은 분량에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을 담으려다보니 인물들의 심정을 모두 공감하기 어려웠다. 더 긴 분량이었다면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런 시대에 생각 없이 살면 총 맞아야지."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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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 안전가옥 오리지널 47
전효원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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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가시적인 것들의 가시화





전효원 작가의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을 읽었다. 마장동 축산시장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처음인지라 흥미로웠다. 전효원 작가의 소개 문구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잘 벼려낸 칼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으며, 손에서 칼을 내려놓은 동안에는 글을 쓴다." 그래서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에 묻어 있는 마장동 축산 시장의 생생한 현장이나, 도축 과정의 면밀한 묘사를 통해 짐작하건대, 아마도 전효원 작가가 축산시장에서 일하리라 생각했다.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니 과연 그랬다. 현업자가 아니고서야 나오기 어려운 핍진성이었다. 또한 작품에서도 언급되듯이 같은 마장동 축산 시장 내에서 차별이 존재한다는 점(육류, 내장, 기름, 칼갈이 등의 일종의 계급 구조)은 내부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점이다.



"그랬다니깐용. 백인들 사이에서 차별당한 거야 말할 것도 없고요. 한국에서도 클래식 음악 쪽에 워낙 쟁쟁한 집안 애들이 많잖아요. 저야 옛날 말로 백정 딸내미고요. 게다가 사실 마장동 시장 내에서도 내장은 약간 그런 게 있거든요. 치란도 그렇지 않아요? 마장동이라고 하면 한우 등심, 갈비, 아니면 삼겹살 같은 고기류를 떠올리지 곱창이나 대창을 먼저 생각하진 않죠. 내장류는 공식 명칭이 부산물이에요."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 93쪽



상상의 나래를 좀 더 펼쳐보자면, 아마도 개인적으로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 내의 민수 삼촌이라는 인물이 작가 본인의 자캐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사실 처음에 이름을 들었을 때는 남성일거라고 생각 못했다. 그래서 내가 그린 이미지 속의 작가는 이두박근이 매력적인, 도축 칼을 잘 쓰는 여성이었다……. 또한 내 생각보다도 나이가 좀 있으셔서 놀라웠다. 



* * *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은 재밌다.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읽어나갔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은 다름 아닌 주인공 "부응옥란"이다. 유약해 보이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어 아이를 낳고, 김제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시어머니와 맹랑한 딸을 키우는 베트남 여자. 뽀글머리와 꽃무늬 옷을 고수하지만, 한국어 실력과 발음만큼은 송혜교를 똑닮은 시골 여자. 평소에 범죄 드라마를 즐겨 보며, 자신은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했으나 다른 이주 노동자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무대포 성격까지 지녔다. 근래에 읽었던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 중 이처럼 입체적인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은 마장동 축산시장에서 내장을 취급하는 사장의 딸 "김유정"이 중국인 이주 노동자이자 자신의 애인인 "문소평"을 찾아달라고 "부응옥란"을 찾아오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다.



등장 인물이 한 명씩 차례대로 용의선상에 올랐다가 의혹이 벗겨지거나 강화되는 전형적인 추리극의 형식을 띤다. 제목인 "니자이나리"는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뜻이라고 한다. 제목과 표지, 작중 배경은 어쩐지 영화 <범죄도시>를 떠올리게끔 한다. 이에 대해 소설 내에서도 자조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인물들의 강렬한 캐릭터성 때문에 이런 부분이 얼마간 중화된다. (다만, 이 점이 나에게는 다소 아쉬웠는데, 나는 제목이나 소재만 보고는 <범죄도시>처럼 좀 더 어둡고 딥한 범죄극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부응옥란은 평소엔 한국말에 능통하지만, 불리할 땐 한국말을 모르는 척 굴기도 할 정도로 능청맞고 유쾌하다. 김유정 역시 "넹"과 같은 애교 섞인 말투를 구사하며 분위기를 둥글게 만든다. 게다가 속담과 사자성어를 좋아하는 정재훈의 캐릭터성도 눈에 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남는다. 우선 부응옥란의 강렬한 캐릭터성이 사건 전개의 개연성에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부응옥란은 작중 내내 결코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마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참전용사의 아우라를 지닌다. 억척스럽다는 전반부 묘사에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발견하고 나서도 지극히 덤덤해서 의아하다. 그것도 연속으로 두 번이나 발견하게 되는데 말이다. 그런 반응은 직업적으로 시신을 자주 보게 되는 인물에게나 어울릴 법하다.



게다가 최종전 국면에 이르러 누군가에 의해 냉동창고로 나가게 되는데, 나는 이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응옥란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이 위험한 장소에서 단 둘이 보자는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나갈 리 없다. 아무리 억세고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여성이고, 그녀를 불러낸 인물 역시 산전수전 다 겪어본 전사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재훈의 캐릭터에 대해서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정재훈이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는 이유는, 그가 갑작스럽게 부응옥란과 김유정을 돕지 못하게 됐기 때문인데, 추후에라도 그때 왜 그랬는지는 밝혀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재훈이 누명을 벗는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얼렁뚱땅 지나가는 장면이다. 다소 클리셰적인 사연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부응옥란이 그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는 건 다소 논리적이지 못하다. (물론, 직후에 리본 아줌마가 증언을 해준 덕에 혐의를 벗기는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사연을 듣고 부응옥란은 정재훈을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용의 선상에서 배제해버렸다.)



또한 결말의 진범을 잡는 부분도 의문이다. 


"진범을 진범으로 확정지을 수 있는 증거가 나왔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소설 안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부응옥란이 녹음하고 있는 줄 알고 있던 진범은 범행을 자백하지도 않았다. 부응옥란이나 김유정이 가지고 있는 증거라곤 다잉 메세지나 심증 뿐이다. 다잉 메세지는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이연화 사건이 다른 사람의 범행으로 마무리된 걸 보면, 진범이 DNA를 남길 정도로 어수룩한 것 같지도 않다. 이 결말은 충격적이긴 했지만, 꼭 그만큼 현실성이 없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마장동 축산시장에 대한 생생한 묘사만큼이나 작품의 중심축인 사건의 해결에 좀 더 심혈을 기울였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나아가 작품 전체에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큰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가는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을 통해서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실태에 대해서 고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소설을 쓴 것이다. 하지만 종종 그 욕구가 소설이라는 외형을 튀어나가려고 하는 지점들이 존재했다. 그때마다 내가 지금 소설을 읽는 것인지, 아니면 르포르타주를 읽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사실? 이주민들에게 사실이라는 단어만큼 큰 함정도 없답니다.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누명을 벗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특권인 줄 모르죠? 사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거야. 뭐, 아가씨는 해외 생활을 오래 해서 사회 분위기를 더 모를 것 같긴 하지만."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 41쪽


물론,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은 전효원 작가의 첫 장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아쉬운 점들이 보이는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지만 이게 이 작품 전체를 폄하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전부 충분히 개선될 수 있는 지점처럼 보여진다. (고백하건대, 나는 읽은 책에 대해선 전부 서평을 작성하진 않는다. 정말로 형편이 없거나 쓸 말이 없는 작품은 리뷰를 안 쓴다. 아니, 못 쓴다.) 



어쨌든,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을 막 덮은 내 손엔 『경성 환상 극장』이 있다. 이건 경성이라는 소재에 끌려서 샀는데, 공교롭게도 이 작품집 안에도 전효원 작가의 글이 있다. 전효원 작가의 다음 글을 읽으러 가기 위해 이만 리뷰를 마친다.



도대체 왜인지 몰라도 진심이란 건 당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었을 때 더욱 강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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