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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세대
백온유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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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청산하는 7가지 방법









백온유의 이름을 지난 <젊은작가상> 대상으로 처음 마주했다면, 내 독서 범위가 너무 얄팍하다는 걸 자백하는 걸까. 이번에 젊은작가상 대상작인 「반의반의 반」이 포함된 단편집 『약속의 세대』를 읽었다. 『약속의 세대』는 다음의 7편으로 구성된 작품집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광일」

「의탁과 위탁 사이」

「반의반의 반」

「회생」

「사망 권세 이기셨네」

「내가 있어야 할 곳」



다 읽고 나서 이 이야기가 범박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과거를 청산하는 7가지 방법'이라고.


우선 「나의 살던 고향은」은 '한서'라는 시골 마을 출신의 영지가 돌아가기 싫은 고향에 돌아가게 되고,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결국 마을의 산에 불을 질러버리는 이야기다. 자신을 늘 속박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으로 영지는 불을 질러버린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광일」과 「내가 있어야 할 곳」 두 편이다. 이 두 작품은 내가 좋은 단편 소설이라고 여기는 미덕을 갖춘 작품이었다. 좋은 단편 소설은 적은 분량 안에서 한 인물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고, 그로인해 "현재"에 이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독자에게 짐작케 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광일」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훌륭한 단편처럼 읽혔다.


특히나 「광일」의 주인공 '박광일'의 캐릭터가 흥미로웠다. 노인네와 흥정을 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인물인 것 같지만, 노인이 잘못 건넨 5만원은 돌려주고, 노인을 봉변에서 구해준다.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기 힘겨워하지만, 실상은 아내만을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일정구간까지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은 엔딩을 기대했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운수 좋은 날」의 다른 버전인 것 같기도 할 만큼 다소 의외의 엔딩을 갖고 있긴 하다.


잠은 죽음에 대한 예습이자 복습 같았다.

「광일」, 119쪽


「광일」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행은 왜 마음 약한 이들에게만 찾아오는가? 그런 이들에게 불행은 꼭 산사태의 형태로,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으로 다가온다. 광일은 구태여, 산장으로 갈 필요가 없었음에도 마음이 약하고, 과거에 손님을 길에서 내려준 기억 때문에 결국 스스로를 다독이며 산장으로 향한다. 이런 마음 약한 인물에, 도덕적인 선들과 자신의 이익 앞에서 깊게 갈등하는 인물들에게 나는 깊은 애착을 느끼곤 한다. 광일은 스스로 과거에 길에 내려준 손님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산장에 갔다가 결말을 맞이한다.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뜻대로 되진 않은 인물일 것이다.




그들은 그때 나를 찾아가지 않았듯 이번에도 나에게서 할머니를 찾아가지 않으리라.

「의탁과 위탁 사이」, 152쪽.



「의탁과 위탁 사이」는 「반의반의 반」의 짝패처럼 읽히기도 한다. 할머니-손녀의 관계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할머니가 병든 환자인 것도 그렇다. (이 지점에서 백온유의 또다른 관심사가 드러나는데, 작가는 (병든) 노인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도 그러하거니와, 「광일」,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도 이러한 인물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두 작품 역시 할머니, 엄마, 나 사이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현재를 억압하고, 결말 부근에 이르러서 각자 이 과거를 어떻게 청산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의탁과 위탁 사이」와 「반의반의 반」은 그런 청산 과정에 있어서도 유사성을 띠는데, 나름대로 명확한 선을 가지는 다른 수록작들과 다르게, 「의탁과 위탁 사이」는 틀니를 통해 할머니의 과거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며, 「반의반의 반」은 상당히 모호한 결말로 끝난다. 두 작품은 어떤 일을 해결한다기보다는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 깊은 관심을 할애한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젠 내가 안 만나주지. 세 시간을 기다렸잖아. 내가. 세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 노인한테."

「의탁과 위탁 사이」, 148-149쪽.



「회생」은 읽는 동안 좀 재밌었다. 제목과 다르게 연지 - 수영은 회생이 불가하다. 애초에 없던 아이를 뱃속에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져 (아마도) 깨진 그릇도 결코 회생시킬 수 없다. 마치 어설픈 솜씨로 '킨츠키'를 한 듯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형성하다가 그런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가볍고 경쾌한 느낌마저 주는 결말 부근에서 산산히 박살난다. 이는 과거의 실수는 결코 청산될 수 없으며, 유일한 방법은 억지로 붙여놓거나, 산산히 깨지거나, 라는 걸 암시하는 듯 하다.


「사망권세 이기셨네」는 「회생」처럼 두 친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또 다르게 읽힌다. 사이비 종교 2세들의 이야기다. 사이비 종교 간부의 딸이었던 '나'와 그런 간부의 비서 같은 역할을 했던 신도의 딸 세주는 엄마들의 권력 관계에 전염된 듯 이를 모방한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의 거짓말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나'와 세주는 냉정한 세상 앞에 서게 된다. 이 둘의 관계는 기이하게 역전되는데, 과거 부모들의 권력 관계나, 자신이 간부의 딸로써 가졌던 일종의 우월감 때문에 '나'는 세주에게 꼼짝을 못한다. '나'의 보살핌은 어쩐지 채무자가 채권자를 대하는 듯이 변한다. 과거가 현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이 둘은 결말에서 (「회생」의 연지와 수영과 달리) '회생'에 이르며, 처음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떤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담담한 화자의 서술과 다르게 극도로 잔인한 소설이다. '나'는 한국의 학창시절, 친구를 컨테이너에 가두고, 학폭위에 회부된다. 또한 '나'가 화재 소동을 겪으면서 먼저 간 딸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나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사건을 배치할 수 있는지 놀랐다. 이모의 딸이자 '나'의 사촌은 컨테이너에 갇힌 채 화마에 희생되었다는 점을 분할해 사건을 배치했지만, 참 잔인한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 집에서 사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엄마가 그애를 안고 있는 사진이 내 사진첩에 있어서 한동안은 당연히 그 아이가 나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아니더라고 고백했다. 사촌과 내가 어렸을 떄 부모가 바뀐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는 말은 다행히 하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 309쪽.


'나'는 이모의 딸이 되는 것을 이모에게 거절당했다고 진술하지만, 이 부분은 외려 이모가 '나'를 정말 딸로 받아들인 것처럼 읽힌다. 자식이 품에서 어리광만 부리는 게 아리나 자립하기를, 더는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 세상과 대면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그 자신이 먼저 앞세운 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조카인 '나'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이모부도 죽고 한국에 돌아온 이모와 '나'가 나눈 문답은 일종의 뒤늦은 대답 같이 느껴진다. (이 부분은 이 소설집 전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모. 봄이 오면 우리 마당에 꽃 심는 게 어때요?"

"좋지. 나도 너랑 같은 생각."

"무슨 꽃 심을까요?"

"너랑 같은 생각."


「내가 있어야 할 곳」, 317쪽.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라는 말은 곧 '너는 내 딸이야.', '나도 보내고 싶지 않았어.', 처럼 읽히지 않는가. 이모의 귀국은 결국 하나 남은 가족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나 남은 가족, 조카이자 딸인 '나'에게로. 또한 이 진술은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라디오를 틀자 거짓말처럼 마이클 볼턴의 <Lean on Me>가 나왔다. 이모부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중 하나였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노래네, 이모가 중얼거렸다. 이모가 좋아하는 가수여서 이모부가 자주 불렀던 건데 그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 321쪽.



가족 구성원 간에 한 쪽이 모르는 다른 한쪽의 행동 이유를 알고 있는 이는 가족이라는 말 외에 표현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약속의 세대』는 거칠게 축약하자면, 과거와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모아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내 과거를 살펴보면서 괴로워하고, 때로는 깨닫기도 하고, (마음 속으로나마) 불을 질러보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백온유 작가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뎌지지 않겠다'는 내지 첫 페이지의 글처럼,

나는 이 작가가 무뎌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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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도 복제가 되나요 안전가옥 쇼-트 34
윤혜성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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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품은 원본을 넘어설 수 있을까





윤혜성 작가는 이전에는 카피라이터로 일했으며, 작년에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의 극본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혐오도 복제가 되나요』가 소설 데뷔작이라고 한다.


『혐오도 복제가 되나요』는 주인공 이수한은 사별한 아내와의 사이에 있는 아들 재이를 두고 장모와 양육권 다툼 중이다. 재이를 만나기 위해 아내의 고향인 '리벨리우스(아마도 우크라이나를 염두에 둔 가상의 국가인 것 같다.)'에 가려고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어 가지 못한다. 이에 리벨리우스랑 인접한 러시아 법인장이 되어 조금이라도 재이의 곁에 가까이 가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소설은 이수한이 죽은 아내가 보낸 정체불명의 택배 박스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택배 박스 안에서 죽은 아내의 글씨체로 '너도 너같은 새끼랑 살아봐'라고 적힌 쪽지가 나와 충격을 받은 이수한은 연이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수한을 본뜬 불법 복제인간인 '리(re)수한'이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이다.


복제인간인 리수한을 죽여야 할지, 신고해야 할지 망설이던 와중, 리수한에게서 그도 어쩔 수 없는 '생명'이라는 징표를 발견한 '수한'은 그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러시아 법인장이 되기 위한 면접과 재이와의 만남이 겹쳤을 때, 수한은 리수한에게 도움을 청한다. 리수한은 면접을 성공적으로 치뤄내 수한은 러시아 법인장에 가까워지지만, 직접 나간 재이와의 만남에서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렇게 수한은 '원본인 나'보다 뛰어난 '복제인 나'를 마주하면서 복잡한 심경을 갖게 된다.


이후 이야기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그리고 복제 인간에 대한 질문을 파고들면서 전개된다.


'나와 똑같은 나'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서양에서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면 죽게된다는 '도플갱어' 괴담이 있고, 한국에는 내 손톱을 먹은 쥐가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 나를 대신하게 된다는 민담이 있다. 이는 인류의 무의식 속에 오랜 시간 잠재해 온 공포가 표면화된 것 같다.




이 드넓은 세상에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을까?




이전의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손톱-쥐'의 이야기처럼, 누가 진짜 '나'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로 귀결된다. 하지만 근래에 나오는 복제인간 이야기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파고드는 것 같다.



복제품은 원본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이를테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조선의 왕 광해군을 대체한 가짜 광대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광대 하선은 광해군의 부재 기간동안 요구된 현상 유지를 넘어서 '진짜 왕'이란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인물들인 도승지와 도 부장에게 진정으로 충심을 이끌어내는 결말은 인상적이다.


소설의 예로 들어가보자면, 서유미 작가의 단편 소설인 「저건 사람도 아니다」는 '나'를 꼭 빼닮은 로봇이 나를 대신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보다 뛰어난 나, 가족과 동료들이 인정해주는 가짜 나가 겪는 심리적인 갈등은 결국 '복제품이 나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귀결된다.


또한 근래에 읽었던, 『혐오도 복제가 되나요』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테세우스 패러독스』 역시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테세우스 패러독스』에서는 세 갈래로 나뉜 '나'가 등장하고, 이들 중 무엇이 진짜인지를 증명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지녀온 장르에서 시대에 따라 변주가 생기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혐오도 복제가 되나요』의 펀치라인인 '너도 너 같은 새끼랑 살아 봐'는 조금 아쉽다. 물론 한눈에 독자의 시선을 끌어들이기에는 강렬한 라인이다. 다만, 이로 인하여 독자는 이 작품에서 수한이 정말로 자신과 똑같은 성격을 가진 여자를 만나 고통을 겪고 거울 치료를 받는 과정이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책을 펼친다. 하지만, 리수한과 수한은 너무 다르다. 이를테면, 리수한이 수한을 대신해 회사에 나갔을 때, 수한보다 일처리나 대인관계에서 능숙한 면모를 보인다. 또한 아이와의 갈등에서도 적재적소에 개입한다. 작품 말미에 드러나는 '너도 너 같은 새끼랑 살아 봐'라는 메모의 전말은 그 메모가 지니는 내적 정합성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또한 작품에 떡밥이 산발적으로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정리가 더디고, 반복적인 구간들이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런 아쉬움들이 남긴 했지만, 첫 소설임에도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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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사람들
이유리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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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올라갈 곳이 없는 난장이들의 절규






『구름 사람들』은 21세기에 다시 쓰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저) 같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구름 사람들'은 구름 위에 사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언가 동화나 신화의 이야기 같고, <원피스>와 같이 만화에 나오는 신비로운 무리를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구름 사람들』에서의 구름 사람들은 땅에 집이 없어서 구름으로 올라가 삶을 꾸리는 인물들이다. 그 구름 역시 정상적인 구름이 아니라, (당연하게도 자연적인 구름은 수분 결정체여서 그 위에 올라설 수 없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환경 오염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구름이다. 땅도 집도 없고, 겁마저 없는 사람들이 이 구름 위에 모여 주거구역을 형성한다.


이는 곧 『난쏘공』의 인물들처럼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개발의 물결에 떠밀린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개발의 열풍에 희생된 영세민들은 수평적으로는 서울의 다른 변두리로, 그도 아니라면 근교로 자꾸만 밀려난다. 수직적으로는 고지대에, 즉 달동네에 몰린다. 여전히 서울 한복판에는 빼곡하게 집들이 자리잡은 달동네가 존재한다.


돈이야 먹고 죽을래도 없었지.

『구름 사람들』, 35쪽


달이 닿을 만큼 높은 곳이라서 달동네랬는데, 『구름 사람들』은 한발 더 나아간다. 아예 구름 위로 올라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징은 이 소설이 가지는 특이지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비슷한 계급 우화를 그리는 영화 <기생충>에서 가난한 이들은 결국 지하실로 향한다. 이는 계급이 지니는 상하관계를 그대로 차용한 장면이다. 하지만 『구름 사람들』은 이들을 하늘 위로 올려버린다. 부유한 이들의 머리 위로. 이는 경제적 계급의 기묘한 반전을 그리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여긴 땅보다 높잖아. 땅 사람들보다 더 빨리 천국에 도착할 수 있어.

『구름 사람들』, 121쪽


구름 사람들 중 하나인 춘 여사의 대사는 이들의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구름까지 쫓기어 온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천국", 그러니까 죽음 뿐이라는 사실을 잔인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남의 후원이나 바라고. 좆 같은 일해서 돈 벌 생각이나 하고. 글러 먹었다.

『구름 사람들』, 51쪽


『구름 사람들』의 주인공인 '오하늘'은 나중에 커서 BJ가 되겠다는 동생이 벌써부터 남의 후원이나 바란다고 짜증을 낸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잠시 멈춰야 했다. 우리가 흔히 인터넷 방송에서 사용하는 '후원'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서비스 비용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후원'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이 대목과 이런 하늘의 인식이 왜 필요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왜 좌절했을 때 미소 지을까. 그런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면서.

『구름 사람들』, 85쪽


『구름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균열을 일으키면서 진행된다. 우선, 외부적 요인. 구름이 존재하는 시에서는 인공강우제를 살포해서 구름을 없애려고 한다. 이는 곧 구름 사람들의 거주지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행위다. 물론 불법 점거에 가까운 상태이기 때문에, 보호받거나 구제 받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하늘의 아빠는 구름 사람들을 규합해 시위에 나선다. 이 시위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뭘 하라는 거야."

(…)

"넌 보이지도 않냐."

"뭘 보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래,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구름 사람들』, 180~181쪽


공권력은 그들의 시위를 철저히 비가시화시킨다. 마치 '상자 안에 잡아 가둬놓은 쥐'처럼 무력화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키려 한다.


두 번째 균열은 가족에 있다. 엄마가 땅 사람들의 집에 취직하면서 이 균열은 본격화된다. 세 번째 균열은 '오하늘'의 안에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다. 이렇게 세 가지 균열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설 전체를 구성한다.


인공강우 살포가 다가올수록, 이 균열들은 본격화된다. 오하늘의 거의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의 역할을 담당한 원과도 말다툼을 하게 되면서 이 균열이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야, 우리가 무슨 세균이냐.

땅 사람들이 보기엔 세균이나 다름없지. 얼마나 눈엣가시곘어. 인공강우제를 뿌려서 없애고 싶은 게 당연해.



『구름 사람들』이 유독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지점은 이 소설에는 절대적인 악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사실이 이 소설 자체를 더 지독한 "악인"처럼 만든다. 소설의 인물들은 제각각 처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나마 악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꼽는다면, 오하늘의 아빠인 것 같지만, 그는 어쩐지 소설 내내 처연하게만 그려진다.) 선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이 다를 뿐이다. 애당초 입장(立場)이라는 말도 그런 뜻이질 않는가.


주인공 오하늘은 동생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하지만 이를 반성하고 후회한다. 나아가 오하늘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할 뿐이다. 하지만 균열들은 오하늘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니가 제일 열심히 사는데…… 제일 착한 것도 넌데…… 왜 너한테만 이런 씨발 개같은 일만 생기는 거냐고.

『구름 사람들』, 255쪽


또한 『구름 사람들』은 언뜻 '원숭이손 괴담'의 변형 같게도 느껴진다. 오하늘이 문득 내뱉었던 어떤 말이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결과를 맺게 되는데, 이 결과가 참 아이러니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에서 지난 세기의 『난쏘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된다는 구분점이 생긴다.


『구름 사람들』은 결국 '더는 올라갈/도망칠 곳이 없는 난장이들의 절규'처럼 읽혔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의 시작부터 이 이야기의 결말이나 전개가 정해져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구름이란 어쩌면 흩어지는 게 당연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씁쓸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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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페이스
R. F. 쿠앙 지음, 신혜연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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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R.F 쿠앙의 『옐로페이스』는 네이버 웹툰 <저궤도인간> 후기에서 알게 되었다. 유사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 흥미가 생겼다. <저궤도인간>을 워낙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지인의 작품을 훔치게 된 주인공이라는 점에선 유사하기는 했다. 하지만 표절이라고 보기엔 어렵고 그저 소재가 겹친 정도에 불과해보인다.

실제로 편집 과정을 그리는 장면에선 비슷한 감정선이 그려지기도 했다.



지금 잘라내고 있는 글이 내 글이 아니라 남의 글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었으니까.

『옐로페이스』, 52쪽


다니엘라는 이런 나의 방향 전환에 답을 보내왔다. 정말 좋네요. 놀라울 정도로 함께 일하기가 편해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을 죽이자고 하면 아주 별나게 굴거든요.

『옐로페이스』, 67쪽


<저궤도인간>에서도 주재열의 원고 <그만두어야 할 때>의 편집을 맡은 장예주도 이런 넋두리를 내뱉는다.



그거 아세요? 1교가 이렇게 순조로웠던 적은 처음이에요.자잘한 교정 의견은 손발톱 다듬듯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도 하시지만, 어떤 의견은 생살을 베는 느낌이라고들 하세요.

<저궤도인간> 34화

주재열 역시 '자신의 살'이 아니기 때문에 장예주의 편집 의견을 수용할 수 있다는 독백을 하기도 한다.


다만 두 작품의 성격을 확실하게 구분짓는 것은 주인공의 태도다. 준 헤이워드는 <최후의 전선>을 훔쳤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정도가 주재열에 비하면 작은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 사실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면이 더 자주 부각되어 준을 동정하기 어려웠다. 물론, 준은 아테나의 초고를 자신이 재탄생시켰다고 믿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긴 하다. 또한 준 - 아테나의 관계와 주재열 - 이동재의 관계 역시 대조적이다. 준 - 아테나는 서로 대학 동창이기는 하나, 이해관계로 연결된 사이에 가깝다. 주재열 - 이동재는 주재열이 이동재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후원해주던 관계로 더 친밀했다. 이러한 관계성과 인물 자체의 성격이 작품을 훔친 행위에 대해 갖는 죄책감의 무게를 서로 다르게 만들고, 이에 따라 작품의 장르 자체가 달라지게 만든다.




<저궤도인간>이 인간이 가지는 내면 심리를 드러내보여주는 '드라마'에 가깝다면, 『옐로페이스』는 일종의 블랙코미디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뭇 진지한 고찰도 녹아있지만, 전반적으로 출판업계, 미디어업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준 헤이워드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중국계 미국인 '아테나 리우'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다. 그리고 그 혼란한 와중에 아테나의 차기작 초고를 손에 넣게 되고,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준 헤이워드는 이미 데뷔를 한 작가였지만, 업계에선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입지를 비롯해, 복합적인 감정으로 얽힌 아테나와의 관계는 독자가 준 도둑질에 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아테나는 글을 완전히 마치기 전에는 작품에 대해 밝히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베타 독자들에게 읽히는 법도 없었다. 인터뷰도, 소셜미디어에 슬쩍 정보를 흘리는 일도 없었다. 에이전트도, 편집자도 작업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줄거리조차 알 수 없었다.

『옐로페이스』, 24쪽


내가 아는 작가들은 다들 누군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꼈다. 글을 쓴다는 건 매우 고독한 작업이다.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고, 극심한 무한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징후가 조금만 보여도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옐로페이스』, 18쪽

글쓰기는 진정한 마법에 가장 가깝다.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며,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너무 고통스러울 때 글을 쓰면 새로운 자신의 세계를 만들 힘이 생긴다.

『옐로페이스』, 310쪽

나는 내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세상이 숨죽이고 기다리기를 원했다. 내 말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했다. 영구적으로 존재하기를 원했다. 죽은 후에도 산더미 같은 페이지를 남기고 싶었다. 여기 주니퍼 송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줬다, 라고 소리치는 페이지를.

『옐로페이스』, 357쪽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꾼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로테스크한 것들의 교차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살짝 엿볼 뿐 온전히 마주하지 못하는 어둠을 "여길 보라!" 하고 외치며 활짝 펼쳐 보이는 존재다. 누구도 분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존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다.

『옐로페이스』, 152쪽



도덕적인 문제, 작가의 고뇌와 더불어 『옐로페이스』가 천착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포지셔닝'이다. 준 헤이워드는 아테나의 작품, <최후의 전선>을 출간하면서 필명을 '주니퍼 송'으로 정한다. 물론 이는 준의 미들네임이기에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다만, '주니퍼 송'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것은, 준을 중국계 미국인으로 독자들이 '착각'하게끔 만드는 '미필적 고의'다. <최후의 전선>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중국인 노동자를 다룬 작품이고, 이에 대해 정당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중국계여야만 한다는 출판계의 암묵적인 합의에 바탕한 행위다. 실제로 준, 아니 주니퍼 송은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받는다.



"왜 백인 작가가, 그러니까, 중국인이 아닌 작가가 이런 얘기를 써서, 그걸로 이익을 얻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를요. 작가님은 왜 자신이 이 이야기를 쓸 적임자라고 생각하셨나요?"

『옐로페이스』, 150쪽



당사자성은 중요하다. 작중 캔디스 리 편집자가 강조하듯 당사자의 눈에는 보이는 결함이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선 주니퍼 송의 편을 들고 싶긴 하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 작품을 쓸 기회부터 박탈하는 건 해당 당사자성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 타인을 규정짓고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출판 업계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한국 문학계 역시 트위터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특정 이슈에 대한 공론장으로써도 기능하기도 하지만, 독서인구가 주로 모이는 곳이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의 악재를 대할 때에도 출판사는 관리가 가능한 리스크인지, 리스크로부터 어떠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지를 계산해보고 이를 활용하는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아니, 트위터는 현실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이다. 왜냐하면 그 영역에 출판이라는 사회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업계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옐로페이스』, 215쪽

"그들은 이 건을 문화전쟁 문제로 끌고 가고 있어요. 이런 경우는 늘 관심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책 판매량이… 늘어납니다. 판매량이 늘어나는 건 언제든 좋은 일이죠."

『옐로페이스』, 300쪽



『옐로페이스』는 쉽고 재밌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 역시 짚어야할 것 같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준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악재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의 대안을 떠올린다. 나는 이 아이디어가 정말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야기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문학적 구원과 엄청난 성공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길. 내내 이토록 명백한 답이 있었는데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옐로페이스』, 365쪽


또한 작품 자체가 너무 길고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 중간 빼는 것이 더 이야기의 호흡이나 집중도를 향상시킬 수 있어보이는 군살이 많았다. (물론, 영미 문학이 대체로 장황한 묘사와 느린 서사 전개를 선호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옐로페이스』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주니퍼 송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과오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전 실수의 씨앗이 된 방법을 자꾸만 반복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설의 결말에 이른다. 이러한 지점이 어쩌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우둔함이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과 함께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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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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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다시 타오르는 불씨







레이 브레드버리의 『화씨 451』을 알게 된 경위는 조은영 작가의 웹툰 <저궤도인간>을 통해서다. 작중 여주인공인 편집자 장예주는 남주인공 재열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편집자로 진로를 결정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한다. 그때 그녀는 『화씨 451』을 읽고 나서 진로를 결정했다고 말한다.



"내가 바로 플라톤의 「국가」라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시몬스가 바로 마르쿠스라오!"


<저궤도인간> 41화 / 『화씨 451』, 261쪽



<저궤도인간>에서 장예주의 대사에는 '!'이 달려 있는데, 내가 읽어본 판문에는 없었다. 아마도 장예주가 어렸을 적에 도취되었던 문장을 읊다가 첨가된 억양인 것 같다. 사실 '!'과 '책이 금지가 된 시대'라는 『화씨 451』의 설정 때문에 이 장면이 대단한 클라이맥스일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너무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마주한 장면은 격정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울림을 주었다.




* * *




『화씨 451』의 주인공은 '가이 몬태그'다.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유닛 중 하나인 파이어뱃 영웅 캐릭터의 이름은 '구이 몬태그'인데, 『화씨 451』의 주인공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직업은 방화수(fireman)로 금지된 물건인 책을 읽는 사람들이 발견되면 책과 집을 태우는 일을 맡고 있다.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


『화씨 451』, 15쪽


『화씨 451』은 가이 몬태그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책을 태우는 것에 희열까지 느끼는 몬태그는 어린 소녀 클라레스를 만나면서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화씨 451』 속 사회는 불쾌함이나 슬픔을 유발하는 모든 요소를 통제한다. 갈등을 피하고 대중의 평안함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깊은 사색과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책은 유해 물질로 규정되어 제거 대상이 된다. 책의 자리를 채운 것은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 대형 텔레비전 화면과 귀에 꽂는 소형 라디오다. 몬태그의 아내, 밀드레드는 완전히 중독되어 소통 능력을 사실상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브래드버리가 묘사한 이 풍경은 스마트폰과 숏폼에 온 시선을 빼앗긴 현대 사회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생각하지 않는 사회, 즉 질문이 사라진 사회는 통제하기 가장 쉬운 사회가 된다.


아는 것은 힘이지만, 동시에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도 있다.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때론 독이 되기 때문이다. 『화씨 451』에서는 지적 능력에 대한 평등성을 위하여 책을 읽는 것을 금지했다는데, 실상은 우민들이 통제하기가 쉽다는 권력자들의 의도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분서갱유나, 한국 군사정권이 실시했던 3S 정책이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근거다.


반면에 몬태그가 만난 클라레스는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명제를 부정하고,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 같다. 벽걸이 TV 대신 자연을 만끽하고, 무슨 일이든 "왜"를 궁금해 하며, 타인에게 "시간"을 할애한다. 몬태그에게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던 클라레스는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고, 이로 인해 몬태그는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몬태그가 정신적 멘토로 의지하게 되는 '파버' 교수는 책이 이 디스토피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1. 정보의 질


2. 이 정보들을 소화할 시간


3. 위의 두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얻어지는 배움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


『화씨 451』, 156쪽





책이 가진 질 좋은 정보들, 그리고 이를 독자가 소화할 충분한 여가 시간, 이 두 가지를 통해 깨달은 바를 자유롭게 실천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책은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요원해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언젠가 올 그 날을 고대하며, 그들은 스스로가 '결코 태울 수 없는 책'이 되자고 결심하게 된다.




* * *




『화씨 451』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제쯤이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화씨 451』을 범박하게 정리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인간이 우연히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서 이전의 삶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에 매혹당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형태의 플롯이기에, 이 플롯은 오랜 시간동안 변형,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플롯 하에서 나는 『화씨 451』을 읽으며,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소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작품은 이러한 공통점을 공유한다.


1. 주인공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 진실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협이 된다.


2. 기존 질서의 권력자들이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진실을 추적하게 된다.


3. 이전까지 그려온 삶의 궤적과는 전연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가이 몬태그가 스스로 책이 되기로 결심한 방랑자들을 찾아서 떠나듯이, 『비명을 찾아서』의 '기노시다' 역시 '상해 임시 정부'를 찾아서 떠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두 소설에 내가 왜 이토록 매력을 느끼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대체로 용기없이 사는 편이고, 그리하여 나의 용기없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소설은 한 인물의 변화를 따라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씨 451』에서 몬태그는 처음에는 불로 만악의 근원인 책을 태우는 일에 희열을 느꼈지만, 결말 부근에 이르러서는 불이 사람의 몸을 추위로부터 녹여줄 수 있으며, 음식을 조리하는 데 쓰일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는 그가 소설의 시작 부근과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리하여, 몬태그는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다시 불씨를 지핀다. 그 불씨는 책을 불태우는 불씨가 아니라, 인류의 희망을 지피는 불씨다. 권력자들이 그토록 다 태워버리려고 했지만, 불씨는 끝내 다시 타오르는 것이다.





* * *






『화씨 451』의 후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다. 『화씨 451』의 작중 내내, 몬태그가 윤리관, 당국의 추적 따위에 쫓기는 심리 묘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레이 브레드버리가 『화씨 451』을 작성하던 당시, 동전을 넣고 쓸 수 있는 UCLA 도서관의 타자기를 빌려서 썼다고 한다. 30분의 시간 제한이 있어서 쫓기는 심정으로 썼는데, 이게 작품에도 은연중에 반영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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