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소설가
임현 지음 / 창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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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이 되고 마는 선의, 그리고 아이러니





임현의 세 번째 소설집 『행복한 소설가』를 읽었다.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며, 목차는 다음과 같다. 2026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인 「너는 나의 이야기」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고, 202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은 수록되어 있었다.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부딪히는 돌과 바위들에게

느리게 흩어지기

분재

나를 아는 사람들

행복한 소설가



여덟 편을 다 읽고 남은 첫인상은 글이 어쩐지 읽기 편해졌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 소설 전반에서 감지되는 '소설의 에세이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독성이 좋아졌다는 점은 앞선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이나 『그들의 이해관계』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느껴지는 차이였다. 두 소설집에는 중간중간 멈칫하게 되거나 쉬이 넘어가지지 않는 문장이 더러 있었다. 2014년에 등단해 13년째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이니 문장이 더 유려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문장의 문제라기보다 소재의 차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선 소설집에서 임현은 독자가 불편해할 만한 소재를 거침없이 다루곤 했다. 나는 임현 작가가 건드리는 불편함을 좋아한다. 특히 「고두」를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내가 읽은 한국 단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고두」나 「엿보는 손」 같은 작품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불편함과 긴장을 마지막에 기어이 터뜨린다. 반면 이번 소설집은 그 불편함과 긴장을 유지하되 끝내 터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난 뒤 오래 곱씹게 되는 불편함은 앞선 소설집보다 조금 옅게 남았다. 




표제작「행복한 소설가」를 읽을 수 있는 문장 웹진






「행복한 소설가」 — 행복해서 쓸 수 없는 사람



그런 변화를 느끼며 읽어나가다 만난 표제작 「행복한 소설가」는, 어째서인지 작가의 오토픽션처럼 읽히기도 했다.



소설 창작 수업을 듣거나 작법서를 읽으면 글 쓰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마 그 주인공이 세상을 포착하는 시선과 사유가 작가 자신과 너무 밀착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지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0년 넘게 활동한 소설가라면 예외가 아닐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야 하는 직업적 숙명 탓에 그들은 결국 자기 내면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신의 직업이 하필 작가이므로 '글 쓰는 사람'에 대한 탐구를 영영 피해 갈 수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소설 곳곳에는 작가 본인을 연상시키는 문장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임현 작가는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첫 소설집이 출간된 이후로 줄곧, 나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문예창작학과나 사설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행복한 소설가」, 254쪽


「행복한 소설가」의 '나'는 소설을 쓰며 대학과 사설 아카데미에 출강하는 강사다. '나'는 첫머리부터 선배 작가를 떠올리며 소설가라는 직업을 깊이 들여다본다. 개인적으로는 표면에서 흘러가는 사건(아내 연재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나'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생각들이 훨씬 흥미로웠다. 성공한 사람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안타까운 사람이 소설을 쓴다는 대목이 특히 그랬다.


오히려 이미 불행한 사람들 중 누군가 소설을 쓰는 거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똑같은 고생담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고만고만하게 안타까운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 심지어 나름대로 이름 좀 알려졌다는 성공한 사람들이 왜 자꾸 에세이를 출간하겠나. 소설가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평범한 불행을 현재진행적으로 고백하는 존재들이다.

「행복한 소설가」, 261쪽


'나'는 근래 소설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는데, 그 이유를 스스로 '소설을 쓸 만큼' 충분히 불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를 그 상태로 밀어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내 연재다. 연재는 사실 굉장히 이상적인 아내다. 소설가인 '나'의 수입이 변변찮아도 불평하지 않고,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 고통에 공감하며, 그의 작업에 도움이 되려 애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나'에게는 딜레마가 된다.



내 행복의 근원. 나의 모든 것. 그리고 좀처럼 내가 무얼 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행복한 소설가」, 267쪽



'나'는 연재 덕분에 불행하지 않고, 소소하게나마 행복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불행한 자들의 전유물인 소설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슴슴하게 끝맺는다. 불행하지도 않고 그럭저럭 행복하기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는 소설가의 이야기로.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별로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은 무난한 날들을 보내는 중이다. 자주 내게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하지만 한결같이 잘 되지 않았다.


「행복한 소설가」, 296쪽




소설집 곳곳에 심어둔 아이러니



'아이러니'의 흔적은 소설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에서는 결말 부근에 흰 눈이 등장하는데, 흰 눈이 지니는 보편적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는 흔히 눈 덮인 풍경에서 추함과 상처와 아픔을 가려주는 화해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흰 눈은 추악한 현실의 문제를 아주 잠깐 덮어두는 역할에 그친다. 교묘한 위장술이라 불러도 좋겠다. 작중에는 '체호프의 총'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어찌 보면 이 흰 눈은 끝내 사라지지 않은 채 언젠가 기어이 격발되고야 말 문제들을 잠시 가려두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에서도 아이러니는 빠지지 않는다. 화자는 남자의 어머니 때문에 결별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후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남자에게 큰 목돈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연락을 한다. 그런데 그 목돈의 출처가 바로 그 어머니의 보험금이다. 톰 포드의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가 함께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재우는 기옥과 조금 달랐다. 오히려 선우에게 베푸는 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할 줄 알고,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더 측은하게 여기는 아이로 자랐으면 했다.

「분재」, 195쪽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아이러니는 「분재」 에 있다. 아이를 입양한 부부가 등장하고, 양부 재우는 선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베푸는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버려진 아이인 줄 알고 데려와 몇 년간 정성껏 키웠는데, 어느 날 친모가 나타난다. 아이는 양부모와 친모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 놓이고, 재우가 가르친 대로 '생각이 깊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한다. 가르친 대로 자란 아이의 선함이 가르친 사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셈이다. 읽으면서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와 짝을 지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잃어버렸던 아이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되찾았을 때 밀려오는 이상한 감정을 다룬 작품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 에서는 '선의'와 '위선'이 뒤섞인다.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선배를 돕기 위해 선뜻 선배의 빈 가죽 공방을 자신의 작업실로 빌린다. 선배네와 '나'의 부부는 함께 여행을 가고 반찬을 주고받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나'와 아내는 그 반찬을 잘 먹지 않아 일종의 골칫덩어리로 여긴다. 공방이 있는 건물의 번영회 사람들과 얽히면서 '나'는 자기 선의가 어디까지가 선의였는지를 되짚게 된다. 선의의 선(線)은 어디쯤에 그어져 있는지, 겉으로 친밀한 관계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여러모로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고백의 형식으로 돌아온 작품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는 이 소설집에서 이전 작품들의 경향을 가장 뚜렷하게 계승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임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면 고백체를 잘 쓰고 즐겨 쓰는 작가라는 인상을 함께 떠올리곤 한다. 「고두」와 「엿보는 손」, 「목견」,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이 모두 고백체로 쓰여 있고, 나는 이 작품들을 전부 좋아한다. 독자를 놀라게 하거나, 찝찝하게 만들거나, 끝내 충격에 빠뜨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앞선 작품들보다 한 걸음 더 '고백'의 형식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될까.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신부이기에, 이 발화는 자연스럽게 고해성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뒤섞으며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법이 피해자의 피해를 온전히 회복시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선과 악을 함께 품은 인물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간 뒤,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판단은 끝내 독자에게 넘긴다.


이 소설들을 다 읽고 나면 판결문 대신 진술서 한 장을 손에 쥔 기분이 된다. 어쩌면 그것이 이 소설집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선의라 믿었던 것이 어느 지점에서 위선으로 미끄러지는지, 그 선을 각자 그어보라고.



읽고 나니 임현 작가의 장편 소설은 아직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장편 한 권 정도는 나온 것 같은데, 장편소설은 아직 없는 듯하다. 한국 문학이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단편을 위주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래도 장편을 꼭 쓰긴 하는데, 등단한 지 10년이 넘은 작가의 장편 소설이 없다는 점이 신기했다. 어쩌면 임현이 '행복한 소설가'여서 쓰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작가의 장편소설도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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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 살롱 드 경성 1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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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경성'은 강력한 매혹 중 하나다. 경성이라는 단어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갈망과 금지된 것들에 도전하는 저항의식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나는 언제나 그 중력에 무람없이 끌려다닌다.


『살롱 드 경성』을 사실 처음 접한 건 칼럼이나 이 책이 아니었다. 유튜브 <삼프로TV>의 코너에서였다. <삼프로TV>의 전원경 교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즐겨보았었는데, 그에 대한 연장 선상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이 <살롱 드 경성>이었다. 이 방송을 보다가 결국 책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다뤄진 작가가 이중섭인데, 회화나 미술에 무지하기 짝이 없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도 이중섭 작가의 <흰 소>다. 



이 책의 매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가를 비롯해 잘 알지 못했던 화가들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다. 또한 그림이 풍성하게 삽입되어 보는 맛을 더한다. 나아가 이 책 전반을 감싸는 것은 저자의 미술과 한국 예술가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이인성의 사후 그에 대한 미술계와 학계의 평가도 지나치게 야박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나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주로 활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인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이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사회 시스템이 그것뿐이었는데.

(…)

억울하다. 이인성의 울분이 전이된 듯 억울하다.

『살롱 드 경성』, 252쪽




나는 금 산도 싫고 금 논도 싫다. 나는 화가가 될 것이다.

『살롱 드 경성』, 144쪽


『살롱 드 경성』을 읽으며 등장하는 화가들에게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예술에 대한 맹렬한 애정을 불태웠다는 점이다. 예술가는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산다. 대낮에 눈 뜬 채 꿈을 꾸기도 하고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도 홀로 별세계를 본다. 유영국의 일화는 이러한 예술가들의 이미지에 정확히 부합한다. 잘나가는 사업을 놔두고 상경해 팔리지도 않을 추상화를 그리겠다니. (유영국의 그림과 사업에 대해 적은 박준의 글이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에 실려 있어서 내심 반가웠다. 유영국 화가가 소주 사업을 할 때, 직접 소주병에 그림을 그려넣었는데, 박준 작가는 한때 이 소주병을 수중에 넣고 싶었던 적이 있다고 적었다.)


생활의 무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소시민인 나는 이렇게 모든 것을 내던져 부딪치는 이들에게 압도된다. 또한 이렇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을 보아주는 이들이 있어야 우리도 그들의 덕을 보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모든 예술가는 프리즘이다. 자신이 담은 세상이라는 빛을 여러 빛깔로 변환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때로는 자신이 본 것에 눈멀기도 한다. 나는 그런 예술가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이왕 아무도 안 알아주는 일을 할 바에야 마음껏 하고 싶은 멋진 일이나 하자는 생각!

『살롱 드 경성』, 101쪽


김환기 작가의 파트에서 저자가 적어놓은 문장이지만, 실상 『살롱 드 경성』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들에게 해당하는 표현인 것 같다.



도상봉과 나상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예술가 곁에는 이를 믿고 지지하는 짝이 있었던 것 같다. 시대상 탓에 주로 여성이 헌신하는 쪽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많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도상봉과 나상윤 부부의 도자기 일화는 그야말로 '부창부수'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박고석-김순자 부부의 일화도 흥미로웠다. 고고한 예술혼을 불태우던 박고석 화가를 대신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던 김순자는 한국을 넘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인정 받은 한복 디자이너가 되어 자식들을 건사한다. 그러다가 말년에 '남은 생을 박고석의 아내로 살고 싶다며'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도상봉보다 도자기를 더 좋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내 나상윤이었다. 보통은 돈이 궁한 형편에 도자기를 사오면 대부분 아내는 잔소리가 앞서기 마련인데, 나상윤은 오히려 반대였다. 어떤 도자기를 더 구해 오라고 조르기도 했을뿐더러, 도자기 평가에서부터 관리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이며 철저했다.

『살롱 드 경성』, 111쪽




얼마 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500권을 돌파했다. 이 시리즈의 1권, 100권, 200권 등의 순서가 되면 우리나라의 작품을 싣는다. 이번 500권에는 이미륵 작가의 『압록강은 흐른다』의 차례였다. 『살롱 드 경성』에도 이미륵 작가와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낸 김재원 작가 등이 1940년대에 유럽에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린 선구자로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를 접할 때마다 자주 오류에 빠진다. 이미 정조가 안경을 쓰고, 고종이 커피와 와플을 즐겼고, 경성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때때로 이 시대의 자료를 읽거나 보다가 현대의 흔적을 발견하면 놀란다. 내가 잘 모르던 미술 분야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생경하다. 이를테면, 김재원을 비롯한 몇몇 한국 작가가 독일에서 체류하던 때, 무솔리니의 초청으로 로마를 여행했다는 일화는 마치 다른 두 세계가 이어지듯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또한 책 곳곳에 BTS의 RM의 일화가 출몰한다. RM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유명한 미술 애호가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글쓰기를 비롯한 예술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지만, 유독 미술은 자기치유적 효능이 강한 예술 분야인 것 같다. 심리치료 과정 중에 미술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 중에도 내면의 결핍과 상처를 견디고 치유하기 위해 그림에 몰두한 경우가 많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죽음의 충동에 시달리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든 작품들이 다른 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러한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이 진정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예술의 영역에서 AI가 가장 먼저 인간에게 도전장을 내민 분야가 미술/회화다. 누차 고백한대로,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AI와 인간의 작품을 구별해낼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두 작품 사이에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AI가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려낸 사람의 사연, 이야기다. 예술 지상주의자들은 어쩌면 대관절 그게 무슨 상관이냐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작품 뒤의 녹아든 창작자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니 선 하나를 긋는데 하루를 고민하고, 내키지 않으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조금 더 가져봐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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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 박준의 시를 읽는 마음
박준 지음 / 난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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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을 읽는 마음







누군가 좋아하는 시인을 대라고 하면, 윤동주, 이상, 이육사, 정지용, 백석, 소월을 대겠다. 이후 시대의 시를 접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지금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겠다고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 시집을 붙잡고 매달려본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박준' 외에는 저 목록에 다른 시인을 추가하지 못한다.


나는 마음대로 박준을 한국 서정시의 적장자라 여긴다. 누군가 이를 치명적인 오독과 무지라 비난해도 아랑곳않는다. 나는 그래미어워즈나 아카데미 시상식의 심사위원이 아니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 기분 좋은 울림을 주는 시인들만 편애하기 때문이다.






박준을 왜 편애하느냐는 질문에는 그의 시를 읽어보라고, 또는 그가 출연한 방송을 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위에 인용한 글처럼 사랑에 대한 그의 표현이 무척이나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출연한 방송이다. 나는 언제나 작가들이 쓰는 글과 그들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하는데, 박준은 평소의 말투나 목소리가 어쩐지 그의 시를 닮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시가 그의 목소리를 닮아있는 것이겠지만, 내가 먼저 접한 것은 박준의 시이니, 내게는 시를 닮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이번 신작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를 사고 나서 나는 또 한번 박준이라는 시인에 대해서 괜히 혼자 애틋해졌다. 게으름으로 다 읽지도 못할 것이고, 몇 년후에나 이런 책이 있었지, 하고 들춰보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애호하는 문인들의 신간을 꾸역꾸역 사는 경우가 있다. 초판 한정으로 사인본이 증정되는 경우다. 대체로 신간 초기 판촉을 위해 초판본은 양장이거나, 엽서가 들어 있거나, 사인이 들어있다. 어릴 적에는 양장이 멋들어져 좋아했지만 요즘 나는 양장본의 각진 폼에 자꾸만 밀려난다. 엽서는 애당초 수집하거나 써보내는 취미 없어 그다지 흥미도 없다. (아, 내가 엽서를 적어 보내는 재미를 알았다면 달랐을까?)


나의 소장용을 자극하는 건 언제나 사인본이었다. 직접 대면해서 받은 사인본보다도 그렇게 수중에 넣은 사인본이 더 많다. 하지만 서명은 고된 노동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작가가 심혈을 기율여 멋들어지게 서명을 하면 그걸 인쇄해 삽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 서명 역시 귀하겠지만서도 나는 영 그런 사인'인쇄'본에는 손이 가질 않았다.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는 신간 출간 알림이 오자마자 구매했는데, 사실 사인본이 있는지도 몰랐다. 내게 박준이라는 작가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꼭 사서 읽어야 하는 작가였다. 책을 받아 첫 페이지를 열어보자 나는 좀 놀랐다. 박준의 서명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인쇄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반대편을 보자, 덜 마른 서명에서 묻어나온 하얀 잉크가 묻어 있었다. 한 번만 서명하면 수 천개로 복사할 수 있는 이런 편한 시대에 박준은 직접 서명해서 보낸다. 낭만은 불편의 다른 이름이라던데, 나는 여전히 낭만에 젖은 이 시인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의 인상적인 지점은 '시'와 '그 뒤에 달아놓은 박준의 글' 사이에 도약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책은 그 시에 대한 시인의 해석이나 시에 얽혀 있는 시인의 개인적인 일화 같은 게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글들도 수록되어 있지만, 어떤 시와 글들은 서로 거리감이 있다고 느낀 글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정지용의 <호수> 같은 시 뒤에는 연인(박준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미인)에 대한 글이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점점 흐려지는 그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마음에 남는 그림에 대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부족한 식견으로는 <호수>가 독자에게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인상을 자아내니 여기서 착안한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시와 흐려진 그림은 감상하는 이에게 선명한 이미지를 준다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쓰인 게 아닐까 한다.


첫 시집 제목을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 지을 만큼, 박준은 이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 같다. 흔히 어떤 사람의 이름까지도 앓게 되는 게 사랑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종종 참 쓰는 시에 꼭 맞게 어떻게 이름도 박준일까, 생각해온 적이 있는데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에 수록된 이름에 담긴 내력은 그런 낭만과는 전연 달라 퍽 재밌다.




작중 유영국 화가의 전시회에 다녀온 일화도 있는데, 요즘 같이 읽는 책인 『살롱 드 경성』에도 이 화가에 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또한 근래 예술가는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프리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에 대해 다룬 부분이 있어서 오래 곱씹게 되었다.


예술이 규범과 불온함을 동시에 내포한다고 정의할 때 누구나 한눈에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과 달리 불온함을 감지할 수 있는 눈은 저마다 다릅니다. 불온은 한 예술가가 대상을 재인식하는 과정에서 담지되는 것이며 감각을 물질화하는 방법에 따라 분화되기 마련이니까요.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62쪽


당연하지만 한번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박준뿐만 아니라 시인의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번 책에선 꿀에 대한 문장이 내게 그랬다.


꿀. 식물에서 왔지만 더이상 식물은 아니고 동물의 몸에 속해 있었지만 결코 동물은 아닌.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39쪽


또한 위안을 받기도 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몇몇 예외적인 시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시를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인이자 시집을 편찬하는 일에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할애해 온 박준마저도 시가 어렵다고 하니, 괜히 나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여 위안이 되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내가 더는 박준의 시를 사랑하지 못하는 날이 올까 두렵다. 그렇게 된다면, 미워할 것 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더는 사랑할 것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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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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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흘러도 여전한 문장론의 고전







글을 쓰다보면, 필연적으로 문장에 대한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표현이 맞을까, 더 좋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고민해서 뺀 쉼표를, 다시 읽어본 후에 넣었을 때에야 소설이 완성되었다고 느낀다는 레이먼드 카버만큼의 고민은 아니겠지만, 글을 쓸 때 어느 정도 고민은 필연적이다.




이번에 문장론에 대해서 공부하다보면 한 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이태준, 『문장강화』를 읽었다. 여기서 강화는 수준을 높인다는 강화(強化)가 아니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다는 뜻의 강화(講話)입니다.'강화(講話)'의 의미다.




1939년에 처음 나온 글쓰기 교본을 팔십몇 년이 지난 지금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몇 장 넘기지 않아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오히려 요즘 나오는 글쓰기 책들보다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대목이 여럿이었다.




이태준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는 문장가로서의 면모가 훨씬 두드러진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순했다. 좋은 문장을 쓰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것. 그런데 그 방법이 요즘 흔히 보는 작문 지침서와는 결이 다르다. 문법책처럼 규칙을 나열하지 않고, 실제 문인들의 글을 붙잡고 하나하나 왜 좋은지, 왜 고쳐야 하는지를 짚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바로 다음과 같다. 이는 직접적인 문장 작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근본 철학에 가깝다.









"생활이 있어야 말이 있고, 말이 있어야 글이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당연한 소리처럼 들렸다. 삶이 먼저고 언어가 그다음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책을 끝까지 읽고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오면 무게가 달라진다. 이태준은 이 순서를 뒤집어서 쓰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글을 먼저 예쁘게 꾸미려 하고, 그 글에 맞춰 생각을 짜맞추는 태도 말이다. 그는 글이란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삶과 무관하게 조립되는 물건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 시대에 이 말을 곱씹어보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요즘 우리는 문장을 다듬는 기술만 배우고 그 문장이 나온 자리, 즉 생활을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은 일물일어주의다. 하나의 사물에는 그것을 정확히 가리키는 말이 하나뿐이라는 생각. 이태준은 비슷비슷한 단어를 되는대로 골라 쓰는 습관을 경계한다. '아름답다'와 '곱다'와 '예쁘다'가 사전에서는 얼추 비슷해 보여도 실제 문장 안에서는 전혀 다른 자리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할 일은 그 정확한 한 단어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대충 비슷한 말로 때우면 문장은 흐릿해지고, 흐릿한 문장은 독자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솔직히 이 대목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좀 돌아보게 됐다. 글을 쓸 때 정확한 단어를 찾기보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어디서 본 듯한 표현을 가져다 쓰는 일이 얼마나 잦았던가. 이태준은 이런 습관을 게으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게으름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은 관찰이라고 말한다.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것과 가장 가까운 말을 찾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태도. 요즘 식으로 말하면 디테일에 대한 집요함이다.




책의 구성도 흥미롭다. 문장의 기초, 문체, 각종 글의 종류, 퇴고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다루기 때문에 처음 글을 쓰는 사람도 접근하기 쉽다. (물론 시대상의 옛스러운 말투는 감안해야 한다.) 또한 당시에 발표된 다양한 글들을 실제 예문으로 쓰며,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함께 짚는데, 이 부분이 이 책을 지금 읽어도 재미있게 만드는 이유다. 이론만 늘어놓지 않고 손으로 잡아 보여준다.




문체에 대한 장에서는 개성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태준은 좋은 글이란 규칙을 다 지킨 글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글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규칙을 무시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규칙을 충분히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튀는 문장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이 대목은 뜨끔할 것 같다. 기본기 없이 특이함만 좇으면 그건 개성이 아니라 미숙함일 뿐이라는 게 이태준의 진단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은, 글쓰기를 기술로만 접근하는 사람과 태도로 접근하는 사람의 차이다. 요즘 많은 글쓰기 책들이 문장을 짧게 써라, 접속사를 줄여라, 수동태를 피해라 같은 규칙을 나열한다. 물론 이런 규칙도 쓸모가 있다. 하지만 이태준은 규칙 이전에 삶을 보는 눈, 사물을 정직하게 관찰하는 태도를 먼저 요구한다. 규칙은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식이다. 이 순서가 이 책을 다른 작문 교재들과 구분 짓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읽으면 낡은 부분도 있다. 예로 든 글들이 대부분 1930년대 문인들의 작품이라 요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고, 문장 자체도 옛투가 많이 섞여 있어 처음에는 리듬을 잡기가 쉽지 않다. 한자어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쓰였고, 일부 표현은 요즘 맞춤법과 다르다. 하지만 이런 낯섦이 오히려 이 책을 천천히 읽게 만든다. 빨리 훑고 지나가는 대신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게 되는데, 이게 이태준이 원했던 독서법과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남는 건 결국 처음 인용했던 그 문장이다. 생활이 있어야 말이 있고, 말이 있어야 글이 있다는 말. 요즘처럼 글쓰기 기술이나 문장 스킬을 검색 몇 번으로 배울 수 있는 시대에, 이태준의 이 순서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종종 이 순서를 건너뛰고 곧바로 좋은 문장을 흉내 내려 한다. 근사한 표현, 있어 보이는 어휘를 먼저 모으고 거기에 내용을 끼워 맞춘다. 이태준이 봤다면 이런 글쓰기를 순서가 뒤집힌 글쓰기라고 불렀을 것 같다.




일물일어주의도 결국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정확한 단어를 찾는다는 건 단순히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물과 그 순간을 얼마나 진지하게 마주했느냐의 문제다. 대충 비슷한 말로 넘어가는 건 사물을 대충 본 것이고, 정확한 말을 찾아낸다는 건 그만큼 오래 들여다봤다는 뜻이다. 이태준에게 글쓰기란 결국 얼마나 정직하게, 얼마나 오래 보았는가의 기록이었던 셈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혹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을 붙잡고 밑줄을 그어볼 만하다. 당장 써먹을 문장 팁을 찾는 사람에게는 조금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장 이전에 무엇을 봐야 하는지, 무엇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책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열어보고 싶어졌다. 거기 쓰인 단어들이 정말 내가 찾아낸 단어였는지, 아니면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던져둔 말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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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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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람은 도박장의 손님이 되고






올해 세운 목표 중 하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는 것이었다. 일년의 반이 훌쩍 지나가고, 2/3이 다 끝나가는 지금도 읽지 못하고 있다. 『노름꾼』은 훌륭한 작품성과 함께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 관계도에 대한 예행 연습으로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제야 겨우 읽었다. 읽는 내내 난무하는 러시아 이름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올해가 가기 전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을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걸작이라 불리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보다 『노름꾼』이 더 큰 흥미를 끈 이유는 분량이 더 적기도 하지만, 『노름꾼』이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룰렛 도박에 상당히 중독되어 있었고, 당장 출판사에 새 소설을 납품하지 않으면, 그가 쓴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이 9년간 출판사에 귀속될 위기에 처했다. 결국 노름빚 앞에서 절망한 도스토옙스키는 타자수를 고용해서 약 한달동안 구술로 소설을 써내려가는데, 그게 바로 『노름꾼』이라고 한다. 또한 이 타자수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와 결혼을 하는 안나다.


『노름꾼』을 다 이해했느냐, 하고 물어보면 솔직히 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통에 나는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장광설이 상당히 현란하고 매혹적이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같이 미쳐가는 것만 같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도박장에 같이 있는 생생한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는데 나도 그런 것 같았다.


이 작품은 모든 인물들이 광기에 서려 있다. 도박이 모두를 그렇게 만들기도 하거니와, 도박과 비슷한 짜릿함을 주는 사랑에 미쳐있다. 장군이나 주인공 알렉세이가 그렇다. 특히나 주인공이자 화자인 알렉세이는 도박과 사랑 모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로 따라가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될 지가 궁금해서 따라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물론 『노름꾼』이 엄청난 걸작이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인물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걸 기세와 분위기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긴 하지만 정작 다 읽고 나면 "광기" 밖에 느껴지는 게 없다. "광기"가 곧 작품에서 추구한 바인 것 같아서 실패한 작품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용감한 사람은 도박장의 손님이 되고, 똑똑한 사람은 도박장의 직원이 된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는데, 정말 『노름꾼』의 인물들은 모두가 돈을 잃을 걸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다. 그 모습은 아마도 도스토옙스키 본인의 모습이었으리라. 이러한 자신의 부끄러운 면모까지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믿음과 흥미를 키우는 부분이다. 또한 나는 아이러니는 사랑하는데, 『노름꾼』이 노름꾼이었던 도스토옙스키의 노름빚을 갚기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이 작품에 대한 흥미를 키운다.




인물관계도



1.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소설의 서술자이자 장군 집안의 가정교사.


장군의 의붓딸 뽈리나를 맹목적이고 광기 어린 감정으로 짝사랑하는 중. 뽈리나의 부탁과 환심을 사기 위해 룰렛에 손을 댄다.


2. 뽈리나 알렉산드로브나


장군의 의붓딸. 장군의 전처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뽈리나의 동생들은 장군과 전처(뽈리나의 생모) 사이에서 얻은 아이들.


알렉세이의 맹목적인 사랑을 알면서도 냉담하고 가학적으로 대하지만 내면에는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양부의 빚 때문에 드 그리외 후작에게 얽혀 있으며, 미스터 에스틀리와도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한다.


3. 장군


퇴역 러시아 장군이자 알렉세이의 고용주.


도박과 방탕한 생활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드 그리외에게 저당 잡힌 상태. 모스크바에 있는 부유한 백모(할머니)가 사망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기만을 기다리며, 젊은 프랑스 사교계 여성 블랑슈와의 재혼을 꿈꾼다.


4. 안토니다 바실리예브나 (할머니)


장군의 부유한 모스크바 백모이자 가문의 실질적 기둥.


모두가 유산을 위해 사망 소식만을 기다린다. 그런데……….


5. 마르키 드 그리외


프랑스인 고리대금업자이자 가짜 후작 행세를 하는 야심가.


장군의 채권자로 일가를 쥐락펴락하며, 뽈리나를 빚으로 옭아매 정부로 만들었다.


6. 블랑슈


신분 상승과 돈을 노리는 프랑스 출신 사교계 여성.


장군이 목을 매는 사교계의 여성.


7. 미스터 애스틀리


여행 중 만나게 된 영국 신사.


알렉세이의 친구이자 관찰자. 뽈리나와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하며, 알렉세이와 그와 얽힌 이들에게 곧잘 호의를 베푼다.




화폐단위



소설에는 다양한 화폐 단위가 나오는데, 이를 제미나이를 통해 정리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화폐들 중 가장 가치가 낮은 러시아의 보조 동전 '꼬베이카(Kopeck)'를 1로 잡고, 1860년대 당시 환율을 바탕으로 각 화폐의 상대적 가치를 정리해 드립니다.


최하위 단위(꼬베이카) 기준 환산표


1 꼬베이카 (러시아 동화): 최하위 기준 단위

1 프랑 (프랑스 은화): 약 25 꼬베이카

1 굴덴 / 플로린 (남독일·오스트리아 은화): 약 60 꼬베이카

1 탈러 (북독일 은화): 약 95 ~ 100 꼬베이카

1 루블 (러시아 기본 통화): 정확히 100 꼬베이카 (1루블 = 100꼬베이카)

1 프리드리히스도어 (프로이센 금화): 약 500 ~ 525 꼬베이카


한눈에 보는 교환 비율 (근사치)


1 프리드리히스도어 (최고액 금화) = 약 5 탈러 = 약 5 루블 (500 꼬베이카) = 약 8.5 굴덴 = 약 21 프랑




*작중 알렉세이가 한 번에 20만 프랑을 따는데, 이를 현대적 가치로 환산하면 이렇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1860년대 20만 프랑의 현대 원화 가치 환산


19세기 중반(1860년대)의 통화를 현대 화폐로 환산할 때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3가지 경제학적 기준으로 20만 프랑을 직접 계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순금 실물 가치 기준 (약 70억 원)


1860년대 프랑스는 '프랑 제르미날'이라는 철저한 금본위제 화폐를 사용했습니다.

1프랑의 법정 순금 함유량: 약 0.29032g

20만 프랑의 순금 무게: 200,000 x 0.29032g = 58,064g (약 58.06kg)

현대 원화 환산: 현재 국내 순금 시세(1g당 약 12만 원 기준)를 적용하면 58,064g x 120,000원 = 69억 6,700만 원 (약 70억 원)


2. 소득 및 사회적 경제력 기준 (약 70억 ~ 85억 원)


당시 사람들의 소득 수준과 비교해 그 돈이 가진 '사회적 위력'을 환산하는 방식입니다.

1860년대 프랑스 소득 수준:

일반 도시 노동자 연봉: 약 1,000 ~ 1,200 프랑

부유한 부르주아 신사의 1년 생활비: 약 4,000 ~ 5,000 프랑

20만 프랑의 가치: 일반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약 170~200년간 일해야 버는 돈. 유한계급이 40~50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치스럽게 살 수 있는 거금.

현대 원화 환산: 현재 한국 임금근로자 평균 연봉(약 4,200만 원)을 기준으로 170~200년 치 소득을 계산하면 4,200만 원 x 170~200년 = 71억 4,000만 원 ~ 84억 원



3. 단순 장바구니 물가(CPI) 기준 (약 13억 ~ 15억 원)



프랑스 통계청(INSEE) 및 경제사학계의 역사적 소비자물가지수(CPI) 환산율을 적용한 방식입니다.


1860년 1프랑의 현대 유로 구매력: 약 4.0 ~ 4.5 유로 (19세기에는 공산품과 식료품의 생산 단가가 지금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단순 물가 배수는 낮게 나옵니다).

20만 프랑의 유로 환산: 약 80만 ~ 90만 유로

현대 원화 환산: 1유로 당 1,600원 기준으로 계산하면 850,000유로 x 1,600원 = 13억 6,000만 원


4. 부동산 및 실제 사치 규모 (약 80억 ~ 100억 원)


1860년대 파리 부촌(8구 등)의 최고급 저택 한 채 매매가가 약 10만~20만 프랑이었습니다.

파리 중심가의 대저택이나 서울 핵심지의 고급 주택 1채 가격이 현대에 80억~120억 원을 호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블랑슈가 저택을 빌리고 최고급 마차와 보석을 쓸어 담으며 한 달 만에 태워버린 20만 프랑의 파괴력은 약 70억~100억 원 규모의 벼락부자 당첨금으로 보는 것이 소설의 맥락에 가장 잘 들어맞습니다.



요약


단순 식료품/생필품 구매력(CPI)으로만 보면: 약 13억 ~ 15억 원

순금 실물 가치(금본위제)로 보면: 약 70억 원

부동산, 노동 가치, 실제 사치 규모로 보면: 약 70억 ~ 100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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