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인물부터 읽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주제까지, 예비 소설가가 피해야 할 모든 것
샌드라 뉴먼.하워드 미텔마크 지음, 정아영 옮김 / 날(도서출판)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퇴짜 맞을 원고 한 단락


"그녀는 슬펐다. 너무나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펐다."


민지가 한숨을 내쉬며 절규했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슬픈 비였다. 그때 세준이 방으로 들어왔다. 세준은 민지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민지는 세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참고로 이 도시는 1897년에 세워졌고, 인구는 약 34만 명이다.



이 단락은 제가 일부러 망쳐서 쓴 것입니다. 몇 개의 실수가 보이시나요? 감정을 직접 말해 버린 첫 문장, 한숨과 절규를 동시에 시키는 과장된 대사 태그, 날씨로 마음을 대신하는 익숙한 비유, 한 문단 안에서 민지와 세준 사이를 오가는 시점, 그리고 뜬금없이 끼어든 도시 정보까지. 최소 다섯 개입니다.


샌드라 뉴먼과 하워드 미텔마크의 『소설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는 바로 이런 단락을 수백 개 모아 놓은 책입니다. 잘 쓴 문장을 보여 주는 대신, 못 쓴 문장을 보여 주고 "이러면 편집자가 원고를 덮는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서평은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그리고 책을 덮자마자 내 원고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실수 다섯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두 저자는 소설을 가르치고, 편집하고, 쓰고, 리뷰한 경력을 합쳐 30년의 경험을 이 책에 모았다고 소개됩니다.


한국어판을 옮긴 정아영 번역가는 데이먼 나이트의 『단편 소설 쓰기의 모든 것』을 옮긴 분이기도 해서, 작법서 번역 경력이 있는 역자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 책이 다른 작법서와 다른 점: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망하는가'




혹시 제목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느껴지지 않는지?


"~아닌데, ~아닌데"


『소설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라는 제목부터 어쩐지,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런 시니컬한 조언은 각 챕터 도입부에 주로 포진되어 있습니다.



조의 겉모습을 설명하는 건 비교적 간단한 일이지만, 작품이 출간으로 이어지지 않는 작가들에겐 이마저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단어는 빽빽한데 놀라울 정도로 건질 만한 묘사가 없다. 아래의 방법들을 잘 활용하면 여러분도 말은 잔뜩 하면서도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 경지에 손쉽게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82쪽

미출간 소설가는 출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 먹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뛰어난 미출간 소설가는 단 한 번의 과감한 결정으로 자신의 아마추어라는 위상을 더욱 확고히 다진다.


『소설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206쪽



그렇습니다. 

이 책은 사실상 이렇게 하면 어떻게 투고한 작품들이 편집자 손에서 모조리 컷 당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의도는 그러니까 제발 이렇게 쓰지 말라! 입니다.) 어쩌면 저자들은 소설 쓰기를 희망하지만, 실패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수많은 지망생들이 제발 이 책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재밌게 써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유머는 한국판을 넘어올 때 편집자나 번역가 둘 중 한 명에게서도 엿보입니다. 이를 테면 소제목 챕터 구성에서 한국에서 유행한 밈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챕터들의 제목을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읽어나갈 때 얻을 수 있는 소소한 재미입니다.


주인공님 축지법 쓰신다

우리집 고양이 츄르를 좋아해

외모 체크!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사탄: 이건 내가 봐도 아닌데


다만, 123쪽의 "나의 복수를 독자에게 전부 알려라" 같은 항목은 되풀이해 읽어도 어떤 점을 지적한 건지, 소제목과 예시로 제시된 구문이 무슨 호응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서점의 작법서 코너는 대부분 "이렇게 하라"는 책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태 서평을 썼던 작법서들은 어김없이 그런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플롯은 3막으로, 인물은 욕망과 결핍으로, 문장은 짧게. 문제는 이런 조언을 다 알아도 막상 내 원고를 보면 어디가 틀렸는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이 책은 방향을 거꾸로 잡습니다. 저자들은 스스로 규칙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관찰을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비유가 재미있는데, "로터리에서는 좌회전"이 규칙이라면 "로터리에서 우회전을 하는 차는 어떻게 되는가"를 직접 보여주는 식입니다. 금지 조항을 외우게 하는 대신, 박살이 난 차들을 줄줄이 보여 주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전달할 때도 가벼운 어조를 유지하는 건 아닙니다. 이를 테면 이런 대목들에선 웃음기를 빼고, 진지하게 조언해줍니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라 해도 실제로 벌어진 이상 그럴 리 없다고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책의 독자들은 더 이상 믿어 주기 어려워지면, 그 세계에 계속 몰입하려 애쓰기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난다. 따라서 신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우연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플롯 장치도, 정도를 벗어난 극적 아이러니도 서슴없이 동원한다. 자신의 독자가 믿어 줄지 말지는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에겐 그런 사치가 허용되지 않는다.

『소설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49쪽


악당은 얼마든지 신보수주의자여도,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십 대여도, 열성적인 시온주의자여도 된다. 단, 바로 그 점이 그가 악당인 이유여서는 안 된다.

『소설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129쪽


그리고 129쪽에서 133쪽에 나오는 "내 소설의 인물은 얼마나 예측가능한가?" 같은 쪽지시험은 흥미롭습니다.


대학에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니는


A. 그를 위해 방금 막 구운 초콜릿칩 쿠키를 접시에 담고 있었다.

B. 그의 방을 그가 떠날 때 모습 그대로 간직해 두고 있었다.

C. 말도 없이 이사를 가고 없었다.

D. 식충 식물로 변해 있었다.


당신의 선택은?


저는 다행히도 총점 17점으로 아슬아슬하게 안정권에 있었습니다.





내 원고에서 먼저 찾을 실수 5가지


200개를 한 번에 다 고칠 수는 없습니다. 초고를 한 편이라도 끝낸 분이라면, 아래 다섯 가지부터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항목 이름은 원서에 소개된 표현을 제가 풀어 옮긴 것이라 한국어판 표기와 다를 수 있습니다.


① 의미심장해 보이는데 아무 일도 없는 전개


주인공이 수상한 편지를 발견합니다. 독자는 긴장합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끝까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이런 전개를 '양성 종양'에 빗댑니다. 무언가 중요해 보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닌 덩어리라는 뜻이죠. 체크 방법은 간단합니다. 원고에서 복선처럼 보이는 장면을 모두 표시한 뒤, 각각이 뒤에서 회수되는지 확인하세요. 회수되지 않는다면 삭제하거나 회수할 장면을 새로 써야 합니다.


② 작가의 신념을 액세서리처럼 걸친 인물


바이킹 전사가 갑자기 현대적인 채식주의 논리를 펼친다면 어떨까요. 인물이 그 시대, 그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작가 본인의 대변인이 되어 버린 경우입니다. 좋은 가치관을 인물에게 입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인물이 살아온 세계에서 그 생각이 자라날 수 없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내 주인공이 하는 말 중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 대목을 찾아보세요.


③ 공처럼 튕기는 시점


앞의 엉터리 단락에서 민지와 세준의 속마음이 번갈아 나왔던 것, 기억하시나요. 한 장면 안에서 시점이 테니스공처럼 왔다 갔다 하면 독자는 누구에게 몰입해야 할지 모릅니다. 장면 하나에는 시점 인물 하나, 라는 원칙만 지켜도 원고가 훨씬 단단해집니다.


④ 대사보다 시끄러운 대사 태그


원서 소개글부터가 이 실수를 패러디합니다. 인물이 그냥 "말했다"로 끝나지 않고 협박하듯, 훈계하듯, 의견을 피력하듯 말하고, 거기에 부사까지 붙습니다. 한국어로 치면 "절규했다", "일갈했다", "속삭이듯 외쳤다" 같은 표현입니다. 감정은 대사 안에 담아야지, 태그에 떠넘기면 안 됩니다. 원고에서 '말했다'가 아닌 대사 태그를 전부 찾아 절반 이상 '말했다'로 바꿔 보세요. 생각보다 원고가 조용하고 선명해집니다.


⑤ 조사한 걸 다 보여 주고 싶은 욕심


이 책은 자료 조사도 따로 다룹니다. 열심히 조사한 내용일수록 버리기 아깝고, 그래서 이야기와 상관없는 정보가 문단 사이에 끼어듭니다. 앞의 단락 마지막 문장, "이 도시는 1897년에 세워졌고"가 바로 그 예입니다. 조사는 빙산의 아랫부분이어야 합니다. 독자에게 보이는 건 장면에 필요한 한두 조각이면 충분합니다.





이 책으로 퇴고하는 3단계 루틴



1단계는 초고를 끝까지 쓰는 것입니다. 쓰는 도중에 이 책을 펴면 모든 문장이 실수처럼 보여 한 줄도 못 나갑니다. 실수 목록은 완성된 원고 앞에서만 약이 됩니다.


2단계는 한 번에 한 가지 실수만 찾는 것입니다. 오늘은 시점만, 내일은 대사 태그만, 모레는 회수되지 않은 복선만. 원고를 여러 번 읽는 게 번거로워 보여도, 한꺼번에 다 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3단계는 고친 이유를 한 줄씩 적어 두는 것입니다. "시점 흔들림, 세준 속마음 삭제"처럼요. 이 메모가 쌓이면 나만의 실수 목록이 생기고, 다음 원고에서는 같은 실수를 쓰는 순간 손이 멈춥니다.




읽으면서 감안할 점


첫째, 이 책은 통독용이라기보다 사전에 가깝습니다. 짧은 항목이 끝없이 이어지는 구조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으면 실수 목록에 질릴 수 있습니다. 초고를 하나 끝낸 뒤 퇴고할 때 옆에 펴 두고 찾아보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둘째, 미국 출판 시장이 배경입니다. 원서는 투고 원고 더미에서 빠져나와 서점에 가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에이전트나 투고 문화를 전제로 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한국의 공모전이나 웹소설 플랫폼과는 결이 다른 부분이 있으니 그 점은 걸러서 읽으면 됩니다.


셋째, 엉터리 예문은 원래 영어 문장의 실수를 보여 주는 것이라, 말장난이나 어감에 기대는 예시는 번역에서 맛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건 번역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책이 가진 숙명에 가깝습니다. 예문 자체보다 "이 예문이 무슨 실수를 보여 주려는가"에 집중하면 충분히 얻을 게 많습니다.




초고를 한 편 이상 완성했는데 어디를 고쳐야 할지 모르는 분, 합평에서 "뭔가 어색하다"는 말만 듣고 원인을 못 찾는 분, 공모전 투고를 앞두고 마지막 점검표가 필요한 분, 그리고 작법서의 딱딱한 문체에 지친 분들은 꼭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반대로 아직 한 줄도 쓰지 않은 분에게는 순서가 조금 이릅니다. 실수를 해 봐야 이 책이 아프게 웃깁니다. 처음이라면 쓰는 방법을 알려 주는 기본 작법서를 먼저 읽고, 초고가 생긴 뒤에 이 책을 펼치시길 권합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는 같은 역자가 옮긴 데이먼 나이트의 『단편 소설 쓰기의 모든 것』을 꼽고 싶습니다. 한 권이 "이렇게 쓰라"는 교과서라면, 이 책은 "이렇게 쓰면 망한다"는 오답 노트입니다. 둘을 나란히 두면 작법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퇴고하는 법 - 고치고 다듬지 않은 글은 아직 글이 아니다 ㅣ 땅콩문고
김은경 지음 / 유유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킬링 유어 달링!







퇴고는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겐 그 중요성이 간과되기 쉬운 과정 중 하나다. 글을 쓰는 것부터가 어려우니까 말이다. 그냥 다 쓰고 나면 끝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기 쉽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사실상 모든 작가들이 초고를 쓴 이후에야 진정한 글쓰기가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어떤 작가는 완성된 글에서 초고는 10%밖에 살아남지 않아야 제대로 된 글이라고까지 말한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퇴고하는 법』에서도 자주 인용되지만, 사실 글쓰기 작법서에서 헤밍웨이는 특히나 "퇴고" 파트에서 자주 등장한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저 선언이 공리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퇴고는 중요하며, 과정을 조금 보태면 사실상 글쓰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퇴고의 중요성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해도 막상 퇴고를 하려고 하면 막막한 것도 사실이다. 편집자로 오랜 세월 다른 이들의 글을 다듬어왔고, 스스로 에세이를 쓰기도 하는 김은경 작가의 『퇴고하는 법』은 친절하고도 유용한 조언들을 건넨다.


퇴고를 시작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덕목이 필요하다. 우선 초고를 완성할 인내심.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건 쉽지만 완성하긴 생각보다 어렵다. 그 다음으로는 엉망인 초고를 들여다 볼 용기가 필요하다. 퇴고가 버거운 실질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고칠 곳이 너무 많아 보여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쓰느라 너무 고생해서 원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기 떄문이다. 이 모두를 극복하고 초고를 대면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초고가 엉망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들여다 볼 마음이 없어지긴 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순간에 최선이자 최고라고 생각한 문장들을 써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순간에 더 나은 문장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도대체 그 문장을 적지 않고 왜 그보다 별로인 문장을 적는단 말인가?) 하지만 대부분 이 경우는 그저 글쓴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더 극히 드물게 초고지만 완벽한 작품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정말로 희박한 확률이다. 오죽하면, 헤밍웨이도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했을까!


우리는 극소수의 천재가 아닐 확률이 높으니, 엉망인 초고를 손에 쥐었을 것이다. 『퇴고하는 법』에서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살릴 부분과 버릴 부분을 가르는 안목이다. 다른 사람의 영화나 소설을 볼 때면, 우리는 손쉽게 "아, 이 장면은 너무 튀는데? 버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자신의 글을 다시 볼 때면, 정작 어디를 버려야 할지 모른다. 글이 엉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이 부분은 이래서 이 글에 어울리고, 저 부분은 저래서 이 글에 꼭 필요한 것 같다. 결국 다 버릴 곳이 없다는 느낌만 강하게 든다. 하지만 여전히 글이 엉망이라는 생각만은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퇴고하는 법』에서도 초고를 쓰고 난 후에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두고 다시 글을 살피라고 조언한다.


시간을 가지고 초고를 다시 살피자, 살릴 부분과 버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과감히, 읍참마속하는 결단력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른 사람 작품에서 우리가 사족 같다고 느낀 장면이 보이는 이유는, 그 작가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장면들이 그 작가의 '달링'이었을 수 있다. 『퇴고하는 법』에서 작가도 이에 대해 강력하게 조언한다.


킬링 유어 달링.


영국의 문학교수 아서 퀼러-코치 경은 "특히 잘 썼다고 느껴지는 문장을 썼다는 생각이 일면 주저하지 말고 전심전력을 다해 써라. 그리고 원고를 출판하기 전에 그 문장을 지워라. 당신의 소준한 문장을 과감히 죽여라"라고 조언했습니다.


『퇴고하는 법』, 22-23쪽






영화 <킬 유어 달링>에는 아서 퀼러-코치 경의 말(원문은 Murder your darling이라고 한다.)을 인용해 "너의 달링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문학 교수가 등장한다. 이때 달링은 우리가 쓴 글에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다. 그 문장 하나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수도 있고, 거기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 완성된 글을 보니 그 부분이 혼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거나, 소설 전체의 리듬과 주제의식을 파괴하고 있다면, 과감히 그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이 부분을 삭제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니까 많은 작품에서 이 부분은 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나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창작자 입장에선 그런 부분을 빼느니 이 모든 걸 버리는 게 낫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럴 때,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미인대회 이론을 참고해보면 어떨까. 케인즈는 주식 시장의 가격 결정 방식을 1930년대 신문의 미인 선발 대회에 빗대어 설명한 적이 있다. 이 대회의 우승 조건은 '자신이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참가자가 가장 아름답다고 투표할 사람'을 정확히 예측하여 고르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주관적인 기준은 배제하고 오직 타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혹은 타인들이 다른 사람의 선택을 어떻게 예상할지만을 고려해 결정을 해야 한다. 케인즈는 주식 시장의 투자자들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를 평가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주식을 사서 오를 것이라고 생각할까'를 추측하는 심리적 눈치 게임에 빠져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장면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안고 가는 것은 어쩌면, 하루 하루 가격이 하락하는 애착주식을 끝내 손절하지 못하고 수익률이 곤두박질치는 걸 그저 방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퇴고의 처음과 끝은 사실상 '나의 달링을 죽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서평을 쓸 때 나도 종종 이 원칙을 실천에 옮기기도 하는데, 책을 읽는 동안 이 부분이 너무 좋아서 꼭 서평에 써야겠다고 메모해놓고도 다 완성된 서평에서 사족 같이 느껴져 빼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 서평에도 있는데, 이런 부분이다.)


'내' 이야기인 듯하지만 '네' 이야기일 수도 있게 하는 글이 공감을 얻는 글입니다.


『퇴고하는 법』, 80쪽




『퇴고하는 법』에서 작가는 "다시 질문하기"라는 방법을 조언한다. 글을 앞에 두고 크게 4가지 질문을 던져보라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명료성), 이 질문은 곧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가와 맞닿는다. 또한 "독자가 따라올 수 있는가?" (범위), "글의 재료인 주장, 근거, 사례 등이 적절한가?"(조직), "독자들이 이해하기 적절하게 쓰여 있는가?"(어조) 등이다. 퇴고할 글을 앞에 두고 한 번쯤 되새겨보면 좋을 듯한 질문들이다.


접속사에 대한 부분도 흥미롭다. 사실 나는 접속사와 부사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고치려고 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얼마 전에 영화 리뷰 쓰기 수업에서도 들었던 말이 있는데, "그러나", "하지만"과 같은 부정 접속사가 아니라면 모든 접속사는 부수적인 것이라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 듯하다. 접속사는 일종의 못 같은 것이어서 못 없이 목재끼리 아귀를 잘 맞춰서 맞물리게 하는 게 더 단단하고 정교한 글을 쓰는 기술이라고. 접속사가 없어도 되게끔 문장을 이어나가는 것이 좋은 글이라는 말인데, 그 비유가 적확하게 머리에 그려져 오래 남았다. 『퇴고하는 법』에서도 접속사를 비롯한 부사의 남발을 경고하며 이를 다듬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퇴고는 언제 끝이 나는 걸까? 아무리 고치고 고쳐도 완벽한 글이라는 건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처럼 멀게만 느껴질 뿐인데 말이다. 앞서 읽었던 김보영 작가의 『SF작가의 사유와 글쓰기』에서 빌려와 볼까.


말하자면 지금 쓰는 소설이 지겹고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을 때는 아직 다 쓴 것이 아니다. 반대로 종일 그 소설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고칠 것이 하염없이 새로 떠오르고, 이러다가는 이 소설을 영원히 붙잡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을 때는 끝난 것이다.


김보영, 『SF작가의 사유와 글쓰기』, 172쪽


『퇴고하는 법』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등장한다.


이러다가 죽을 때까지 투고를 못 하겠다 싶어서요


(…)


"투고는 To-go다!" 쓴 글이 "나를 떠나는 것", "내 집을 떠나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는 말을 들으며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퇴고하는 법』, 19쪽


퇴고가 하기 싫어서 거들떠보는 마음 상태는 "퇴고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태"이고, 이대로는 영영 퇴고를 끝내지 못할 것 같다는 마음 상태는 "퇴고를 이제 그만 해야만 하는 상태"라는 조언이 서로 맞닿는 듯하다. 이것 역시 일종의 "킬링 유어 달링"과 비슷한 게 아닐까. 더 붙잡고 싶어도 과감하게 놓아주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무딘 칼은 팔면 안 돼요."

세상에 내놓는 글이라면, 그 안에 담긴 생각은 어느 정도 벼려져 있어야겠지요. 그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실하게 쓴 흔적, 끝까지 의심해 본 흔적, 쉽게 넘어가지 않으려 한 흔적…… 어쩌면 글의 완성도는 이런 흔적에서 드러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퇴고하는 법』, 131-132쪽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문장인데, 킬링 유어 달링과 함께 가장 이 책에서 인상깊은 부분이었다. 나도 이제 막 원고 수정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냥 대충해서 넘길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나자 조금 더 정신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누군가는 돈을 주고 살 테니까, (그게 그저 도서관이라고 할 지라도) 무딘 칼은 팔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다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나만큼은 그게 무딘 칼이라는 걸 알테니까. 지금 시기에 이 책을 읽은 게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책을 덮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오프사이드 ㅣ 안전가옥 쇼-트 35
김미조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완전한 법에 맞서는 여자들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35번째 소설인 『오프사이드』를 읽었다. 이번 작품의 작가는 김미조 작가인데,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경주기행>의 감독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GV빌런 고태경』의 정대건 작가나 같은 쇼트 시리즈의 『괴물, 용혜』의 김진영 작가와 마찬가지로 영화 감독과 작가를 겸한다.



나는 <경주기행>을 먼저 보고 나서 꽤 재밌게 보았기 때문에 『오프사이드』를 읽게 되었다. 물론, 내가 쇼트 시리즈의 팬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오프사이드』의 줄거리는 성주여자교도소의 실세인 무기수 '판금'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2박 3일의 귀휴를 얻는데, 이 일정에 실종된 엄마의 행방을 찾기 위해 성주여자교도소에 들어온 신입 교도관 '지오'가 동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성주여자교도소'에서 출발해 불법 업체 사무실, 섬, 바닷가, 공장 등을 종횡무진 누비는 로드뮤비 형식을 띠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이야기를 전개시킬 때 자주 채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인물을 어디론가 이동을 시키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을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 원칙을 중심으로 끝까지 밀고나간다.)


원칙주의자이자 범죄자에 대한 혐오감을 뼛속 깊이 체화하고 있는 지오는 복역 중인 죄수 주제에 활개를 치는 판금을 싫어하고, 판금 역시 원칙주의자에 꼿꼿한 애송이 교도관 지오를 싫어한다. 결국 『오프사이드』는 혐관으로 시작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끝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전형적인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주기행>을 얼마 전에 보았기 때문에 『오프사이드』를 읽는 내내 영화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오프사이드』와 <경주기행>은 사실상 동일한 플롯과 주제를 담고 있는 듯이 보였다.



판금은 끝까지 믿었다. 나쁜 짓은 하지 않았으니 법은 자신의 편일 거라고. 그리고 결과는 무기징역이었다.

믿지 말아야 했다. 법이라는 이름과 정의라는 환상을. 세상이 죄 없는 사람에게 얼마나 친절하지 않은지, 세상이 얼마나 함부로 한 사람의 인생을 한쪽 끝으로 몰아내는지 그녀는 그때 뼈저리게 배웠다.


『오프사이드』, 166쪽


두 작품 모두 "완벽하지 않은 법" 때문에 충분한 대가를 치르지 못한 범죄자에 대해 "사적인 제재"를 가하는 "복수극"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경주기행>에서는 "딸의 복수를 하는 엄마", 『오프사이드』에서는 "엄마의 복수를 하는 딸"로 관계가 바뀌었을 뿐이다. 또한 두 작품에 등장하는 악인은 그냥 악인이다.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아 감상하는 인물에게 일말의 동정심이나 이해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물론 <경주기행> 속 범인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영화 시점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악인이다.) 두 작품 모두 여자들의 관계를 중점으로 하며, 이 관계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다. <경주기행>은 엄마와 남은 딸들의 관계가, 『오프사이드』은 지오와 판금의 관계가 그런 축이 된다. 이 과정에서 두 작품 모두 남성들의 캐릭터는 다소 기능적으로만 사용하는데, 『오프사이드』에는 배장수라는 인물이, <경주기행>에서는 첫째 사위가 그렇다. 배장수는 나름의 역할이라도 부여받은 것 같은데 사실 <경주기행>에서는 첫째 사위는 없어도 되는 인물이었다.


두 작품은 결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연출한다. 두 작품 모두 법정에서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는다. 이 구성은 필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의 시작점이 "완벽하지 않은 법"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었으니, 모든 사건들을 진행된 후에는 "완벽하지만은 않은 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는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이 선을 넘었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비정한 깃발처럼, 판금의 삶 역시 누군가가 임의로 그어놓은 선들에 의해 번번이 무효 처리 당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위치에 철저히 고립되어 있던 판금을 향한 지독한 오프사이드 선언처럼 느껴졌다.


『오프사이드』, 196쪽



법을 만드는 사람들도, 법을 집행하는 이들도 법이 완벽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법은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하는 최소한의 도덕일 뿐이고, 이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구성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법의 목적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법이 개인의 삶을 모두 규제하는 통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피해자가 분명 우리 사회에는 존재한다. 이는 곧 우리 사회 전반에는 사적 제재의 가능성이 암약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사적 제재를 엄격히 금지한다. 사적 제재를 허용하는 순간, 법을 통해 유지되던 사회는 모두 형해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낸 법이 불완전한 건 태생적인 비극이다. 결국 법에 의한 피해자, 사적 제재를 꿈꾸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김미조는 영화와 소설을 통해 기꺼이 그들의 편에 서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김미조는 결국에는 사적 제재를 선택한 인물들을 법정으로 돌려보낸다. 그런 점에서 김미조 작가는 법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법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옹호하고 있진 않다. 다만 그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이들에게 더 무거운 책임감과 엄격함을 요청하는 듯이 보인다. 작가주의 사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장 르누아르 감독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아직 <경주기행>과 『오프사이드』밖에 보지 못했으나, 김미조 작가 역시 이 하나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감독은 평생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든다.

그는 그걸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반복할 뿐이다.


장 르누아르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사소한 것으론 용어의 시대성이다. 작중에 "신박하다.", "고나리질"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작품의 주제의식과 연관되어 있으며 배경으로 작용하는 월드컵이 있던 2002년에는 없던 단어다. 근래 생긴 용어이기에 이러한 핍진성을 세심하게 챙겼으면 좋았을 것 같다.


또한 <경주기행>에서 시각적으로 묘사하던 블랙 코미디적 난투극이 소설의 문장으론 다소 가볍거나 헐겁게 처리된 듯 했다. 이를테면 『오프사이드』 곳곳에 나타나는 결투씬은 <경주기행>에서의 가족과 범죄자 사이의 어설픈 개싸움을 연상시킨다. 다만 이를 청각과 시각으로 볼 때와 단순히 문장으로 읽을 때는 그 긴박한 긴장감이나 웃음을 유발하는 슬랩스틱적 요소가 잘 구현되지 못한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행복한 소설가
임현 지음 / 창비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선이 되고 마는 선의, 그리고 아이러니





임현의 세 번째 소설집 『행복한 소설가』를 읽었다.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며, 목차는 다음과 같다. 2026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인 「너는 나의 이야기」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고, 202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은 수록되어 있었다.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부딪히는 돌과 바위들에게

느리게 흩어지기

분재

나를 아는 사람들

행복한 소설가



여덟 편을 다 읽고 남은 첫인상은 글이 어쩐지 읽기 편해졌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 소설 전반에서 감지되는 '소설의 에세이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가독성이 좋아졌다는 점은 앞선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이나 『그들의 이해관계』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느껴지는 차이였다. 두 소설집에는 중간중간 멈칫하게 되거나 쉬이 넘어가지지 않는 문장이 더러 있었다. 2014년에 등단해 13년째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이니 문장이 더 유려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문장의 문제라기보다 소재의 차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선 소설집에서 임현은 독자가 불편해할 만한 소재를 거침없이 다루곤 했다. 나는 임현 작가가 건드리는 불편함을 좋아한다. 특히 「고두」를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내가 읽은 한국 단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고두」나 「엿보는 손」 같은 작품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불편함과 긴장을 마지막에 기어이 터뜨린다. 반면 이번 소설집은 그 불편함과 긴장을 유지하되 끝내 터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난 뒤 오래 곱씹게 되는 불편함은 앞선 소설집보다 조금 옅게 남았다. 




표제작「행복한 소설가」를 읽을 수 있는 문장 웹진






「행복한 소설가」 — 행복해서 쓸 수 없는 사람



그런 변화를 느끼며 읽어나가다 만난 표제작 「행복한 소설가」는, 어째서인지 작가의 오토픽션처럼 읽히기도 했다.



소설 창작 수업을 듣거나 작법서를 읽으면 글 쓰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 아마 그 주인공이 세상을 포착하는 시선과 사유가 작가 자신과 너무 밀착한 나머지, 시야가 좁아지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0년 넘게 활동한 소설가라면 예외가 아닐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야 하는 직업적 숙명 탓에 그들은 결국 자기 내면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신의 직업이 하필 작가이므로 '글 쓰는 사람'에 대한 탐구를 영영 피해 갈 수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소설 곳곳에는 작가 본인을 연상시키는 문장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임현 작가는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첫 소설집이 출간된 이후로 줄곧, 나는 일주일에 사나흘은 문예창작학과나 사설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행복한 소설가」, 254쪽


「행복한 소설가」의 '나'는 소설을 쓰며 대학과 사설 아카데미에 출강하는 강사다. '나'는 첫머리부터 선배 작가를 떠올리며 소설가라는 직업을 깊이 들여다본다. 개인적으로는 표면에서 흘러가는 사건(아내 연재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나'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생각들이 훨씬 흥미로웠다. 성공한 사람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안타까운 사람이 소설을 쓴다는 대목이 특히 그랬다.


오히려 이미 불행한 사람들 중 누군가 소설을 쓰는 거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똑같은 고생담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쓰고, 여전히 고만고만하게 안타까운 사람들이 소설을 쓴다. 심지어 나름대로 이름 좀 알려졌다는 성공한 사람들이 왜 자꾸 에세이를 출간하겠나. 소설가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평범한 불행을 현재진행적으로 고백하는 존재들이다.

「행복한 소설가」, 261쪽


'나'는 근래 소설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는데, 그 이유를 스스로 '소설을 쓸 만큼' 충분히 불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를 그 상태로 밀어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내 연재다. 연재는 사실 굉장히 이상적인 아내다. 소설가인 '나'의 수입이 변변찮아도 불평하지 않고,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 고통에 공감하며, 그의 작업에 도움이 되려 애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나'에게는 딜레마가 된다.



내 행복의 근원. 나의 모든 것. 그리고 좀처럼 내가 무얼 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행복한 소설가」, 267쪽



'나'는 연재 덕분에 불행하지 않고, 소소하게나마 행복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불행한 자들의 전유물인 소설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슴슴하게 끝맺는다. 불행하지도 않고 그럭저럭 행복하기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는 소설가의 이야기로.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별로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은 무난한 날들을 보내는 중이다. 자주 내게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하지만 한결같이 잘 되지 않았다.


「행복한 소설가」, 296쪽




소설집 곳곳에 심어둔 아이러니



'아이러니'의 흔적은 소설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에서는 결말 부근에 흰 눈이 등장하는데, 흰 눈이 지니는 보편적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는 흔히 눈 덮인 풍경에서 추함과 상처와 아픔을 가려주는 화해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흰 눈은 추악한 현실의 문제를 아주 잠깐 덮어두는 역할에 그친다. 교묘한 위장술이라 불러도 좋겠다. 작중에는 '체호프의 총'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어찌 보면 이 흰 눈은 끝내 사라지지 않은 채 언젠가 기어이 격발되고야 말 문제들을 잠시 가려두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에서도 아이러니는 빠지지 않는다. 화자는 남자의 어머니 때문에 결별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후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남자에게 큰 목돈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연락을 한다. 그런데 그 목돈의 출처가 바로 그 어머니의 보험금이다. 톰 포드의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가 함께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재우는 기옥과 조금 달랐다. 오히려 선우에게 베푸는 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할 줄 알고,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더 측은하게 여기는 아이로 자랐으면 했다.

「분재」, 195쪽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아이러니는 「분재」 에 있다. 아이를 입양한 부부가 등장하고, 양부 재우는 선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베푸는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버려진 아이인 줄 알고 데려와 몇 년간 정성껏 키웠는데, 어느 날 친모가 나타난다. 아이는 양부모와 친모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 놓이고, 재우가 가르친 대로 '생각이 깊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한다. 가르친 대로 자란 아이의 선함이 가르친 사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셈이다. 읽으면서 김영하 작가의 「아이를 찾습니다」와 짝을 지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잃어버렸던 아이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되찾았을 때 밀려오는 이상한 감정을 다룬 작품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 에서는 '선의'와 '위선'이 뒤섞인다.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선배를 돕기 위해 선뜻 선배의 빈 가죽 공방을 자신의 작업실로 빌린다. 선배네와 '나'의 부부는 함께 여행을 가고 반찬을 주고받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나'와 아내는 그 반찬을 잘 먹지 않아 일종의 골칫덩어리로 여긴다. 공방이 있는 건물의 번영회 사람들과 얽히면서 '나'는 자기 선의가 어디까지가 선의였는지를 되짚게 된다. 선의의 선(線)은 어디쯤에 그어져 있는지, 겉으로 친밀한 관계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여러모로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고백의 형식으로 돌아온 작품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는 이 소설집에서 이전 작품들의 경향을 가장 뚜렷하게 계승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임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면 고백체를 잘 쓰고 즐겨 쓰는 작가라는 인상을 함께 떠올리곤 한다. 「고두」와 「엿보는 손」, 「목견」,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이 모두 고백체로 쓰여 있고, 나는 이 작품들을 전부 좋아한다. 독자를 놀라게 하거나, 찝찝하게 만들거나, 끝내 충격에 빠뜨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앞선 작품들보다 한 걸음 더 '고백'의 형식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될까.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신부이기에, 이 발화는 자연스럽게 고해성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뒤섞으며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법이 피해자의 피해를 온전히 회복시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선과 악을 함께 품은 인물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간 뒤,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판단은 끝내 독자에게 넘긴다.


이 소설들을 다 읽고 나면 판결문 대신 진술서 한 장을 손에 쥔 기분이 된다. 어쩌면 그것이 이 소설집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선의라 믿었던 것이 어느 지점에서 위선으로 미끄러지는지, 그 선을 각자 그어보라고.



읽고 나니 임현 작가의 장편 소설은 아직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장편 한 권 정도는 나온 것 같은데, 장편소설은 아직 없는 듯하다. 한국 문학이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단편을 위주로 돌아가긴 하지만, 그래도 장편을 꼭 쓰긴 하는데, 등단한 지 10년이 넘은 작가의 장편 소설이 없다는 점이 신기했다. 어쩌면 임현이 '행복한 소설가'여서 쓰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작가의 장편소설도 꼭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 ㅣ 살롱 드 경성 1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3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나에게 '경성'은 강력한 매혹 중 하나다. 경성이라는 단어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갈망과 금지된 것들에 도전하는 저항의식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나는 언제나 그 중력에 무람없이 끌려다닌다.


『살롱 드 경성』을 사실 처음 접한 건 칼럼이나 이 책이 아니었다. 유튜브 <삼프로TV>의 코너에서였다. <삼프로TV>의 전원경 교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즐겨보았었는데, 그에 대한 연장 선상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이 <살롱 드 경성>이었다. 이 방송을 보다가 결국 책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다뤄진 작가가 이중섭인데, 회화나 미술에 무지하기 짝이 없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도 이중섭 작가의 <흰 소>다. 



이 책의 매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가를 비롯해 잘 알지 못했던 화가들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다. 또한 그림이 풍성하게 삽입되어 보는 맛을 더한다. 나아가 이 책 전반을 감싸는 것은 저자의 미술과 한국 예술가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이인성의 사후 그에 대한 미술계와 학계의 평가도 지나치게 야박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이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나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주로 활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인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이 가난한 화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사회 시스템이 그것뿐이었는데.

(…)

억울하다. 이인성의 울분이 전이된 듯 억울하다.

『살롱 드 경성』, 252쪽




나는 금 산도 싫고 금 논도 싫다. 나는 화가가 될 것이다.

『살롱 드 경성』, 144쪽


『살롱 드 경성』을 읽으며 등장하는 화가들에게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예술에 대한 맹렬한 애정을 불태웠다는 점이다. 예술가는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산다. 대낮에 눈 뜬 채 꿈을 꾸기도 하고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도 홀로 별세계를 본다. 유영국의 일화는 이러한 예술가들의 이미지에 정확히 부합한다. 잘나가는 사업을 놔두고 상경해 팔리지도 않을 추상화를 그리겠다니. (유영국의 그림과 사업에 대해 적은 박준의 글이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에 실려 있어서 내심 반가웠다. 유영국 화가가 소주 사업을 할 때, 직접 소주병에 그림을 그려넣었는데, 박준 작가는 한때 이 소주병을 수중에 넣고 싶었던 적이 있다고 적었다.)


생활의 무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소시민인 나는 이렇게 모든 것을 내던져 부딪치는 이들에게 압도된다. 또한 이렇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을 보아주는 이들이 있어야 우리도 그들의 덕을 보게 된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모든 예술가는 프리즘이다. 자신이 담은 세상이라는 빛을 여러 빛깔로 변환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때로는 자신이 본 것에 눈멀기도 한다. 나는 그런 예술가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이왕 아무도 안 알아주는 일을 할 바에야 마음껏 하고 싶은 멋진 일이나 하자는 생각!

『살롱 드 경성』, 101쪽


김환기 작가의 파트에서 저자가 적어놓은 문장이지만, 실상 『살롱 드 경성』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들에게 해당하는 표현인 것 같다.



도상봉과 나상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예술가 곁에는 이를 믿고 지지하는 짝이 있었던 것 같다. 시대상 탓에 주로 여성이 헌신하는 쪽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많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도상봉과 나상윤 부부의 도자기 일화는 그야말로 '부창부수'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박고석-김순자 부부의 일화도 흥미로웠다. 고고한 예술혼을 불태우던 박고석 화가를 대신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던 김순자는 한국을 넘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인정 받은 한복 디자이너가 되어 자식들을 건사한다. 그러다가 말년에 '남은 생을 박고석의 아내로 살고 싶다며'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도상봉보다 도자기를 더 좋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내 나상윤이었다. 보통은 돈이 궁한 형편에 도자기를 사오면 대부분 아내는 잔소리가 앞서기 마련인데, 나상윤은 오히려 반대였다. 어떤 도자기를 더 구해 오라고 조르기도 했을뿐더러, 도자기 평가에서부터 관리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이며 철저했다.

『살롱 드 경성』, 111쪽




얼마 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500권을 돌파했다. 이 시리즈의 1권, 100권, 200권 등의 순서가 되면 우리나라의 작품을 싣는다. 이번 500권에는 이미륵 작가의 『압록강은 흐른다』의 차례였다. 『살롱 드 경성』에도 이미륵 작가와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낸 김재원 작가 등이 1940년대에 유럽에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린 선구자로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를 접할 때마다 자주 오류에 빠진다. 이미 정조가 안경을 쓰고, 고종이 커피와 와플을 즐겼고, 경성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때때로 이 시대의 자료를 읽거나 보다가 현대의 흔적을 발견하면 놀란다. 내가 잘 모르던 미술 분야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생경하다. 이를테면, 김재원을 비롯한 몇몇 한국 작가가 독일에서 체류하던 때, 무솔리니의 초청으로 로마를 여행했다는 일화는 마치 다른 두 세계가 이어지듯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또한 책 곳곳에 BTS의 RM의 일화가 출몰한다. RM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유명한 미술 애호가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글쓰기를 비롯한 예술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지만, 유독 미술은 자기치유적 효능이 강한 예술 분야인 것 같다. 심리치료 과정 중에 미술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 중에도 내면의 결핍과 상처를 견디고 치유하기 위해 그림에 몰두한 경우가 많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죽음의 충동에 시달리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든 작품들이 다른 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아니, 어쩌면 바로 그러한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이 진정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예술의 영역에서 AI가 가장 먼저 인간에게 도전장을 내민 분야가 미술/회화다. 누차 고백한대로,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AI와 인간의 작품을 구별해낼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두 작품 사이에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AI가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려낸 사람의 사연, 이야기다. 예술 지상주의자들은 어쩌면 대관절 그게 무슨 상관이냐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작품 뒤의 녹아든 창작자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니 선 하나를 긋는데 하루를 고민하고, 내키지 않으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조금 더 가져봐도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