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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페이스
R. F. 쿠앙 지음, 신혜연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8월
평점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R.F 쿠앙의 『옐로페이스』는 네이버 웹툰 <저궤도인간> 후기에서 알게 되었다. 유사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 흥미가 생겼다. <저궤도인간>을 워낙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지인의 작품을 훔치게 된 주인공이라는 점에선 유사하기는 했다. 하지만 표절이라고 보기엔 어렵고 그저 소재가 겹친 정도에 불과해보인다.
실제로 편집 과정을 그리는 장면에선 비슷한 감정선이 그려지기도 했다.
지금 잘라내고 있는 글이 내 글이 아니라 남의 글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었으니까.
『옐로페이스』, 52쪽
다니엘라는 이런 나의 방향 전환에 답을 보내왔다. 정말 좋네요. 놀라울 정도로 함께 일하기가 편해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을 죽이자고 하면 아주 별나게 굴거든요.
『옐로페이스』, 67쪽
<저궤도인간>에서도 주재열의 원고 <그만두어야 할 때>의 편집을 맡은 장예주도 이런 넋두리를 내뱉는다.
그거 아세요? 1교가 이렇게 순조로웠던 적은 처음이에요.자잘한 교정 의견은 손발톱 다듬듯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도 하시지만, 어떤 의견은 생살을 베는 느낌이라고들 하세요.
<저궤도인간> 34화
주재열 역시 '자신의 살'이 아니기 때문에 장예주의 편집 의견을 수용할 수 있다는 독백을 하기도 한다.
다만 두 작품의 성격을 확실하게 구분짓는 것은 주인공의 태도다. 준 헤이워드는 <최후의 전선>을 훔쳤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정도가 주재열에 비하면 작은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 사실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면이 더 자주 부각되어 준을 동정하기 어려웠다. 물론, 준은 아테나의 초고를 자신이 재탄생시켰다고 믿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긴 하다. 또한 준 - 아테나의 관계와 주재열 - 이동재의 관계 역시 대조적이다. 준 - 아테나는 서로 대학 동창이기는 하나, 이해관계로 연결된 사이에 가깝다. 주재열 - 이동재는 주재열이 이동재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후원해주던 관계로 더 친밀했다. 이러한 관계성과 인물 자체의 성격이 작품을 훔친 행위에 대해 갖는 죄책감의 무게를 서로 다르게 만들고, 이에 따라 작품의 장르 자체가 달라지게 만든다.
<저궤도인간>이 인간이 가지는 내면 심리를 드러내보여주는 '드라마'에 가깝다면, 『옐로페이스』는 일종의 블랙코미디다.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뭇 진지한 고찰도 녹아있지만, 전반적으로 출판업계, 미디어업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준 헤이워드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중국계 미국인 '아테나 리우'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다. 그리고 그 혼란한 와중에 아테나의 차기작 초고를 손에 넣게 되고,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준 헤이워드는 이미 데뷔를 한 작가였지만, 업계에선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입지를 비롯해, 복합적인 감정으로 얽힌 아테나와의 관계는 독자가 준 도둑질에 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아테나는 글을 완전히 마치기 전에는 작품에 대해 밝히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베타 독자들에게 읽히는 법도 없었다. 인터뷰도, 소셜미디어에 슬쩍 정보를 흘리는 일도 없었다. 에이전트도, 편집자도 작업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줄거리조차 알 수 없었다.
『옐로페이스』, 24쪽
내가 아는 작가들은 다들 누군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꼈다. 글을 쓴다는 건 매우 고독한 작업이다.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고, 극심한 무한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징후가 조금만 보여도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옐로페이스』, 18쪽
글쓰기는 진정한 마법에 가장 가깝다.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며,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너무 고통스러울 때 글을 쓰면 새로운 자신의 세계를 만들 힘이 생긴다.
『옐로페이스』, 310쪽
나는 내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세상이 숨죽이고 기다리기를 원했다. 내 말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했다. 영구적으로 존재하기를 원했다. 죽은 후에도 산더미 같은 페이지를 남기고 싶었다. 여기 주니퍼 송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말을 우리에게 들려줬다, 라고 소리치는 페이지를.
『옐로페이스』, 357쪽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꾼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로테스크한 것들의 교차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살짝 엿볼 뿐 온전히 마주하지 못하는 어둠을 "여길 보라!" 하고 외치며 활짝 펼쳐 보이는 존재다. 누구도 분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존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다.
『옐로페이스』, 152쪽
도덕적인 문제, 작가의 고뇌와 더불어 『옐로페이스』가 천착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포지셔닝'이다. 준 헤이워드는 아테나의 작품, <최후의 전선>을 출간하면서 필명을 '주니퍼 송'으로 정한다. 물론 이는 준의 미들네임이기에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다만, '주니퍼 송'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것은, 준을 중국계 미국인으로 독자들이 '착각'하게끔 만드는 '미필적 고의'다. <최후의 전선>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중국인 노동자를 다룬 작품이고, 이에 대해 정당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중국계여야만 한다는 출판계의 암묵적인 합의에 바탕한 행위다. 실제로 준, 아니 주니퍼 송은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받는다.
"왜 백인 작가가, 그러니까, 중국인이 아닌 작가가 이런 얘기를 써서, 그걸로 이익을 얻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를요. 작가님은 왜 자신이 이 이야기를 쓸 적임자라고 생각하셨나요?"
『옐로페이스』, 150쪽
당사자성은 중요하다. 작중 캔디스 리 편집자가 강조하듯 당사자의 눈에는 보이는 결함이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선 주니퍼 송의 편을 들고 싶긴 하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 작품을 쓸 기회부터 박탈하는 건 해당 당사자성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 타인을 규정짓고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출판 업계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한국 문학계 역시 트위터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특정 이슈에 대한 공론장으로써도 기능하기도 하지만, 독서인구가 주로 모이는 곳이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의 악재를 대할 때에도 출판사는 관리가 가능한 리스크인지, 리스크로부터 어떠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지를 계산해보고 이를 활용하는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아니, 트위터는 현실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이다. 왜냐하면 그 영역에 출판이라는 사회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업계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옐로페이스』, 215쪽
"그들은 이 건을 문화전쟁 문제로 끌고 가고 있어요. 이런 경우는 늘 관심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책 판매량이… 늘어납니다. 판매량이 늘어나는 건 언제든 좋은 일이죠."
『옐로페이스』, 300쪽
『옐로페이스』는 쉽고 재밌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 역시 짚어야할 것 같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러 준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악재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의 대안을 떠올린다. 나는 이 아이디어가 정말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야기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문학적 구원과 엄청난 성공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길. 내내 이토록 명백한 답이 있었는데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옐로페이스』, 365쪽
또한 작품 자체가 너무 길고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 중간 빼는 것이 더 이야기의 호흡이나 집중도를 향상시킬 수 있어보이는 군살이 많았다. (물론, 영미 문학이 대체로 장황한 묘사와 느린 서사 전개를 선호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옐로페이스』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주니퍼 송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과오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전 실수의 씨앗이 된 방법을 자꾸만 반복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설의 결말에 이른다. 이러한 지점이 어쩌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우둔함이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과 함께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