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개정합본판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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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를 빌려와 볼까.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서로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흔하디 흔한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소재를 가진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독특한 점은 두 가지다. 우선 이 소설이 김보영 작가의 팬이었던 커플이 있는데, 그 중 남자 팬이 여자 팬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한 '낭독용 소설'을 써달라는 '사적인 청탁'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이다. 이런 소설 밖의 이야기는 흥미로우면서도, 소설 내에서 어떻게 달성되었는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충분한 조건이 된다. (다만, 나는 프로포즈용으로 쓰여졌다는 첫번째 소설이자 표제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다 읽고 나서는, '이게 정말 프로포즈에 써도 되는 소설인가?'하는 일말의 의문을 품었다. 재밌게도, 이 소설들 뒤에는 그 청탁의 당사자들의 소감 같은 것도 적혀있는데, 결론적으로 내 의문과 기우와는 다르게, 부부는 결혼을 했으며,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흥미롭게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서로를 기다리는 연인'이 시간 여행 속에서 엇갈린 거라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부터 본격화된 '광속'과 '시간 여행'의 이론은 <인터스텔라>를 비롯한 영화나 소설을 거쳐 이제는 상식의 반열에 올라 있다.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무한에 가까운 시간 속을 서로 엇갈리고 있는 거라면, 우리는 상대방을 끝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SF이면서 동시에 로맨스 소설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질문에 있다.



소설 내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말에도 한계 효용이 있는 법이어서, 너무 잦은 빈도로 사용되는 말은 그 효용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처한 극한의 상황 때문인지 수없이 반복되는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그 효용을 잃지 않으며 내내 서글픈 감정을 전달하는 데 번번이 성공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왜 슬픈 것일까. 누군가를 기다리려면, 우선 내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야 함을 함의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화자는 계속 이동한다. 그게 타의든, 자의든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야만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이 기다림이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누군가를 "계속" 기다릴 수 있으려면, 바로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주인공이 가진 단단한 믿음이 소설의 초반을 이끌어가는 힘이라면, 이 단단한 믿음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흔들리기 시작하는 게 소설의 중후반을 이끌어간다.





* * *






트릴로지 중 두번째로 등장하는 소설인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앞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남자 주인공이 기다리던 '상대방/누군가'가 주인공이다. 앞선 소설이 남자 주인공이 고독에 처해 한없이 자기 자신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도 여자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이 소설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지 못해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신에게 가고 있어」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향기가 한껏 느껴졌다. 예를 들어, 여주인공에게 우호적인 '항해사'는 아이들을 가르쳐 재래식 항해법을 존속시킨다. 광속에 도달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인간의 배에게 그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배는 현재 지구의 멸망으로 인해 돌아갈 곳을 잃은 상태다. 지금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AI와 컴퓨터가 다 해주지만, 이것들이 고장난다면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위대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파인만은 자신의 저서(『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에서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면, 살아남을 아이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밝힌 적이 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작은 입자들로, 서로 조금 떨어져 있을 때는 끌어당기고, 너무 밀착되면 서로 밀쳐낸다."



이는 곧 모든 물질의 상태의 변화 (기체·액체·고체)를 담고 있으며, 압력과 밀도에 관한 직관, 화학 반응과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명이자 흔적이 바로 나니까. 내가 당신의 유적이니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1쪽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생사에 대해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 다짐하는 장면은 이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 깨달음은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의 "나는 단수가 아니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결국 내가 곧잘 세트처럼 떠올리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분인의 죽음'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앞에서만 가능했던 나의 분인의 삶도 끝난다.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고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 수 없다." 


히라노 게이치로



또한 이 단편의 흥미로운 지점은, SF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인식의 전환에 있다.




그 애들은 배가 정박하면 당황해서 어른들에게 왜 시간이 말라붙어 있느냐고 물어.

그 아이들은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변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제 있었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고, 어제 보았던 하늘이 그 자리에 있으면 어리둥절해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2쪽



이는 소설 밖의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과 소설 속 인물들의 커다란 인식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광속 여행을 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시공간이 변해 있는 것이 '당연하고도 평범한 현상'이다. 소설 밖의 우리는 외부 풍경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것이 하룻밤 사이의 변화라고 한다면, 사실상 하룻밤 사이에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게 평범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소설 속의 규칙을 통해서, 소석 밖의 독자의 상식과 인식을 뒤집어버리는 장면이 '좋은 SF 소설'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믿는 편이다.




* * *




이제 이 소설에서 나를 가장 강력하게 충격했던 대목을 이야기해야 할 차례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 이 두 소설을 하나로 정리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물론, 앞서 언급한 롤랑 바르트의 말도 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우주를 떠도는 두 연인의 이야기니 우주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사람의 말을 빌려와 볼까.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 속에서, 앤과 한 행성, 한 시대를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은 나의 기쁨이었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고백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속 두 연인은 끊임없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태어나 같은 "시절"을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가없는 축복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 인연을 더 잘 표현한 것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대사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에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상의 그 하고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현 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거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인연이란 게, 좀 징글징글하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거기서 나와. 과거에 붙들려 있지 마. 당신은 나와 함께 있잖아.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야지. 같이 시간을 흘러가야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158쪽.



여자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남자 주인공이 건네는 말은 이 모든 말들을 압축하고 있다. 억겁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걸 함께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사진 예술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우리나라에서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로 유명하다. 브레송은 스쳐 지나가는 1/125초의 아주 짧은 '찰나'를 포착하여, 그 안에 사물의 본질과 조형적 완벽함을 담아냄으로써 '영원'으로 만드는 사진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브레송은 사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



나는 이 말을 사랑하는데,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을 그의 말을 빌려 요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을 만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운이라고."




* * *




세번째 작품인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다양한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우주 항법사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듄>을 떠올리게도 하고, 여러 장소를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도 한다. 또한 웹소설이나 서브컬처의 유구한 떡밥인 '현대인이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가면 어떻게 될까?'를 정면에서 다룬 흥미로운 소설이기도 하다. 나아가 마지막 결말은 SF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질문』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가 흥미로웠다면, '인류 최대 스케일의 쌍방삽질'을 다루는 이하진 작가의 『마지막 증명』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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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개정합본판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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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나니 칼 세이건의 말이 떠오른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 속에서, 앤과 한 행성, 한 시대를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은 나의 기쁨이었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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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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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






천명관의 신작 장편 소설인 『아코디언』을 읽었다. 2004년 『고래』로 한국문단 최고의 문제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작가인 만큼, 이번 신작에 쏠리는 기대도 남다른 것 같다. 『아코디언』도 『고래』와 비슷한 민담 같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홀로 정글과도 같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주인공이 이 험난한 운명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래』의 주인공이 여성이었다면, 『아코디언』은 동이라는 남성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이러한 천명관 소설의 주제는 '가난', '외로움', '인간찬가'이라 이름붙여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는 한국소설의 '한'의 원형을 닮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고래』의 금복이나 춘희가 겪었던 불행처럼 『아코디언』의 동이가 겪는 불행이 개인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가 겪어온 특수한 상황 속에 얽혀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천명관 작가는 이런 한국의 특수성을 담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신작 소설의 제목과 주요 소재가 된 아코디언은 특이하다. 이국의 악기가 어째서인지 한국의 한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또한 오랫동안 영화 감독을 꿈꾸어왔던 그가 입봉작으로 선택한 원작 소설인 『뜨거운 피』만 해도 그렇다. 김언수 작가의 소설 『뜨거운 피』는 부산의 조폭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2000년 대 초 한국의 영화 계보 중 하나로 '조폭' 영화가 있는데, 천명관은 자신의 2020년 대 데뷔작으로 바로 그 '조폭' 영화를 택한다. (나는 지금 조폭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폭 영화'가 '조폭'을 다루는 방식은 한국 고유의 방식이 있고, 이는 일본의 야쿠자나, 미국의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처럼 무언간 '한국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소재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고래』나 『아코디언』은 2000년 대의 소설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만이라고 할 수도 없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대적 문체로 훌륭하게 풀어내는 작가들은 많다. 다만 천명관은 그런 문체로 빚어내는 현대화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 본인이 구사하는 문체가 민담스럽다면, 구태여 그걸 현대화하는 데 공을 들이느니, 이야기 본연의 재미에 집중해 소설의 장점을 살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장인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아코디언』과 『고래』, 『뜨거운 피』의 공통점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천명관이 천착하는 주제는 '한국적인 가족'이란 것도 알 수 있다. 세 작품은 모두 혈혈단신의 주인공이 자신만의 가족을 이루려는 이야기라고 정리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천명관의 소설이자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한 『고령화 가족』 역시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를 닮은 소설, 영화를 담은 소설




나는 천명관이란 작가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니, 그의 꿈이나 문학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함부로 주장하는 건 할 수 없다. 그의 글에서 내가 느낀 몇 가지 인상만 주워 섬길 수 있을 뿐이다. 익실과 물 흐르듯이 쉽게 읽히는 문장, 그러니까 시쳇말로 쿠세도, 강세도 없는 듯한 문장들이 그의 문학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장의 강세는 주로 한 소설의 문학성을 가장 많이 담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김승옥의 이런 문장은 단 몇줄만으로 '무진'이라는 상상의 공간을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히 가져다 놓는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그러나 천명관의 소설은 탁월한 가독성에 비하여 문장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기이한 이야기 자체, 사건의 연속으로 기억된다.


『아코디언』은 특히나 초반부가 영화 <국제시장>과 드라마 <야인시대>를 연상케 한다. 전후의 빈곤상을 다루고 있기도 하거니와, 동이가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처럼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피난온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작중에 숱하게 등장하는 유행가는 이 소설이 마치 유행가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렵지 않고, 통속성을 한껏 담고 있으며, 그를 통해 듣는 이/읽는 이로 하여금 손쉽게 공감하게 만든다. 어쨌든 재밌고 뒤가 궁금해지게 만든다. 소설의 기원은 흥미라는 사실을 천명관 작가는 놓치지 않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 동이.




양 목사가 돌아왔지만 도망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자유가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거였다.


『아코디언』, 162쪽



- 나중에 죽어서 천당에 가면 뭘해. 씨발, 여기가 바로 지옥인데……


『아코디언』, 170쪽


위의 문장처럼 '생존'이 유일한 정언명령이고, 이를 위해선 그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되는 배경을 지닌 『아코디언』에서 유난한 인물이 딱 한 사람 있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눈치를 채겠지만, 그건 주인공 동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참혹한 시대와 운명 앞에 순응하고 선한 마음을 망가뜨려서라도 살아남는 사람, 순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저버리는 사람. 전자에는 깜상, 거북이 같은 인물이고, 후자는 상이군인과 연이일 것이다. (물론 연이는 시도에 그치긴 했다.)



동이는 이들과 다르다. 참혹한 시대와 운명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건 앞의 인물들과 마찬가지이지만, 동이는 끝까지 선한 본성을 꺾지 않는다. 맨몸으로 저항한다. 그런 점에서 동이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주인공의 자질을 갖췄다. 그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며 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이가 자신의 아코디언을 불자 뺨을 걷어올리지만, 그날밤 홍이를 불러내 아코디언을 직접 가르쳐준다.


물론, 동이가 마냥 선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인물을 외려 한심하게만 여길 수도 있다. 얼마간은 그런 감정도 생긴다. 왜냐하면, 연이에 대한 잔정 떄문에 일생 일대의 면접도 놓치게 된다. 현실적인 감각에서 동이는 멍청하다. 그러나 그게 동이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유이며, 읽는 내내 그를 응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매력이다.


그런 동이의 순수함 때문에 이런 의문도 생긴다. 하우스보이가 되든, 음식점 보조가 되든, 기지촌에서 출퇴근하는 이들처럼 해방촌에서 출퇴근하면 안 되는 건가? 미군 부대에 취직하면 무조건 움막을 떠나야하는 것처럼 그려진 건 소설 내에선 정확한 설명이 없어서 내내 지울 수 없는 의문이었다. 그냥 동이가 취직해서 그 돈으로 움막의 아이들을 돌보는 게 보다 합리적인 선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동이는 마냥 선함을 추구하지는 못하고, 생존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나가려고 한다. 그 갈등과 고뇌 속에서 오야지가 되어가며 양 목사의 방식을 차용하게 된다. 악한 면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선 필요한 덕목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양 목사나 아미처럼 모질어지지는 못한다.



동이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동안 오갈 데 없는 앵벌이들을 위해 애써왔는데 아무도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화도 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럼 나가고 싶은 사람은 여기서 나가! 나가서 혼자 빌어먹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그것은 양 목사가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아코디언』, 137쪽




몇 가지 단상들 - 연이, 아코디언, 그리고 희망.



이 소설의 핵심은 연이의 사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 소경 가수라는 점은 언뜻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아미를 통해서 들은 연이가 시력을 잃게 된 경위도 그러하다. 그러나 진실을 알 수 없다. 여기에 도대체가 믿을 만한 선인이 있긴 한가? 악인과 피해자들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연이가 낳은 '돈이'는 과연 누구의 자식인가? 연이의 할아버지는 정말로 악인인가? 소설에서 드러나는 연이의 사연에는 명확한 진실을 찾을 수 없다. 연이의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연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악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에 대해서 털어놓는 이들이 모두 아미거나 양 목사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을 통해서 얻은 진실은 입증되거나 쉬이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다. 독자들은 이 사연을 접하고 딜레마에 빠지며, 이 시절의 혼란함, 아노미를 연이를 통해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진실은 아득하고 생존은 목구멍에서 다그친다.


또한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아코디언은 어떤가. 처음에는 아코디언이 특별히 환상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코디언이 들려줬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틀린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는 마치 동이가 스스로 만든 추론 같다. 동이와 거북이가 '돈이'의 아버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 장면을 살펴보면 그렇다. 거북이는 연이와 양 목사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동이는 차마 그런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코디언이 들려줬다는 이야기는 동이가 스스로 다다른 결론일 것이다. 동이가 그것이 아코디언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동이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 시대에 정말 의지할 만한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번도 보지 못한 진정한 어른 말이다.


- 내 얘기 잘 들어, 홍이야. 넌 잘 모르겠지만 너에겐 남다른 재주가 있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자신을 믿어야 돼.


『아코디언』, 270쪽


이는 결말 부근에 동이가 홍이를 송별하면서 건네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이 말은 어쩐지 동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처럼 보인다. 동이는 쟈니에게 들었던 '재주가 있어서 사는 게 쉽지 않겠다느니, 분수에 맞는 자리가 있다느니' 이런 말 때문에 스스로를 끝내 믿지 못했다. 그건 동이를 짓누르는 말이었다. 동이가 가장 간절하게 원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동이는 자신이 아코디언을 통해 스스로에게 해왔던 말을 그 스스로가 '홍이의 아코디언'이 되어 해준 것이다.



희망을 품는다는 건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아코디언』, 155쪽


마지막으로, 희망에 대하여 말해야만 할 것이다. 전후의 혼란상 속에서 희망을 품는다는 건 정말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것이 최선의 행복이자 최대의 희망이다. 그러나 동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쟈니의 말에 짓눌리고, 육손의 폭력에 좌절되긴 하여도 끝내 스스로 꿈꾸는 삶을 찾아나갔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앵벌이 가족'들을 육손에게서 해방시키고 부산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생존, 그 다음을 가족들에게 보장해준 것이다.


깜상은 동이와 악수를 나누며 자신들이 더는 어리기만 한 앵벌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맹수와 맞서 싸웠고 마침내 상대를 유인해 우물에 빠드렸다.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아코디언』, 260-261쪽


또한 홍이에게 스스로 아코디언이 되어, 희망을 물려준다. 동이의 꿈은 홍이를 통해 실현되려 한다. 결국 동이의 아코디언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던 희망을 연주하고자 했던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코디언』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소설이 필요했다고. 꼬마가 소년이 되고 그 소년이 다시 사내가 되고, 마침내 아버지가 되는 소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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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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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쇠의 노래





최근의 화제작인 영화 두 편을 보았다. 나홍진 감독의 <HOPE(호프)>와 <스파이더맨 4: 브랜드 뉴 데이>다. 두 편에 대해 전체적인 감상을 별점으로 남기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호프>는 워낙에 많은 악평을 먼저 접하고 감상한 것이라 예상보다 별점이 높고, <스파이더맨>은 전작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감으로 인하여 예상보다는 별점이 낮았다. 두 작품의 개별적인 영화적 성취에 대하여서 나는 말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서로 정반대의 이유로 비슷한 지점에 나의 별점이 수렴하는 현상이 흥미로웠다.


김훈 작가의 『현의 노래』를 읽었다. 이 작품을 앞서 언급한 두 영화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스파이더맨>에 가깝다. 나는 김훈 작가를 좋아한다. 그가 쓴 『칼의 노래』는 내 문학의 만신전에 올라와 있으며 생각이 날때마다 재독하는 소설이다. 또한 『하얼빈』, 『남한산성』 같은 작품 역시 좋아한다. 그가 쓰는 역사소설은 그의 불가지론, 생의 허무함과, 그가 구사하는 건조한 문체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정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의 노래』는 의외로 아쉬웠다.


우선, 『현의 노래』은 다분히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칼의 노래』의 후속편 같다. 정신적인 후계라 해도 좋을 것이다. 김훈의 역사 소설을 거대한 사건(대문자 정치 혹은 역사적 풍랑) 속에서 한 인간이 허무한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라 감히 정리해볼 수 있을까. 『현의 노래』 역시 이전의 『칼의 노래』와 그 후에 쓰여진 『하얼빈』처럼 이러한 계보 속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의 노래』의 서사는 한줌 같다. 가야의 멸망과 우륵의 귀순, 그로 인한 가야금의 탄생 등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굵직한 서사이겠으나, 어쩐지 이 서사가 잘 잡히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내달렸던 안중근 의사나 일본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충무공의 일대기 같은 면모가 보이지 않았다. 우륵, 안중근, 충무공의 죽음으로 소설이 귀결된다는 점만 같다.


또한 『현의 노래』는 『칼의 노래』의 문체와 표현을 다수 답습하고 있다. 김훈이 다른 작품에서 흔히 '김훈체'라고 불리는 호흡이나 표현, 리듬을 구사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다. 생의 허무함, 인간의 불가해함을 다룰 때 특히 『현의 노래』에는 『칼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이 다수 등장한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칼의 노래』에서는 충무공의 고뇌와 굵직한 서사로 인하여 이 문장들이 강렬하게 파고든다. 두 작품 모두 전쟁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다루기는 한다. 그러나 궁에서 기악을 하는 악사와는 다르게, 전선에서 복무하는 장군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전쟁이라는 생과 사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무대, 시대의 격랑 속에 선 인간의 불가항력, 부조리와 이해불가능한 일들이 난무하고, 그 속에서 매번 옳고 그름을 따지며 고뇌하는 것이 『칼의 노래』의 매력이다. 반대로 『현의 노래』에서는 마치 작중 내내 반복되는 '소리'처럼 흩어지고 사라지는 서사 때문에 『칼의 노래』에서 빌려온 듯한 문장들이 개별적으로만 다가온다. 그로 인하여 하나의 총체적인 인상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일종의 '감각'만 만들어내는데 그치는 듯하다.


또한 『현의 노래』는 인물이 여럿 나뉘어 등장한다. 우륵과 우륵의 안티 태제같은 야로, 이사부, 아라, 비화 등. 이렇게 파편화된 인물들은 당대의 시간 속에서 제각각의 방법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려내지만, 이로 인하여 어느 인물 하나에 집중해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현의 노래』에서 도드라지는 부분은 대소변과 같은 '살아있는 몸'의 일이다. 야로로 대변되는 '불/쇠의 일', 우륵으로 대변되는 '소리/현의 일' 역시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작품은 내내 설파한다. 육체와 정신 중 무엇이 앞서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육체 없이는 정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육체의 일들에 작가가 천착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191~192쪽에 등장한다. 신라의 장수 이사부가 가야 고을 다로를 점령한 장면이다. 다로의 왕은 늙은 자신을 죽이고 어린 아들을 살려 햇볕을 쪼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이사부는 늙은 왕을 살려 햇볕을 쪼이게 하고, 어린 아들을 죽인다. 물론, 아들의 맹랑한 대답이 그 결정을 비트는 데 한 몫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원숭이손' 괴담처럼 다가온다. 소원을 이루었으나 그 소원은 기이하게 뒤틀려 있다. 이러한 기이한 뒤틀림은 부조리 같이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 장면이 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동안 작품에서 등장했던 '부조리'는 전쟁과 같은 거대한 시류의 몫이었다면, 이 장면에서 빚어진 부조리는 전적으로 이사부라는 개인이 자행한 부조리였기 때문이다.




쇠의 일, 현의 일.




『현의 노래』를 읽으며 내가 주인공으로 느낀 인물은 우륵이 아니다. 우륵보다는 야로가 현실적이고 공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신라와 가야, 그리고 백제 사이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세 개의 국가 사이를 바삐 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군종 사이에서도 바쁘게 오간다. 보병에게 기병에 대적할 가지극을 만들어주고, 가지극에 대항해 기병의 안장을 정비하거나, 기병이 가지극을 든 신란의 보병을 상대할 반달도끼를 만들어준다. 나는 차라리 이 소설은 『현의 노래』가 아니라 『쇠의 노래』라 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쇠는 형체가 제각각이지만, 불을 빌려 가지런히 한다. 반대로 현은 소리를 만들어내되, 이윽고 제각각으로 흩어지게 한다. 또한 쇠는 현실/땅에 발닿아 있는 일이다. 농사를 짓고, 병사를 죽이고, 땅을 얻는다. 반면에 현은 이상/허공에 매여 있는 일이다. 몸과 현을 통해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져 결코 땅에 매어둘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은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완강한 저항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야로이며, 야로를 통해 현현하는 쇠의 일, 전쟁이야 말로, '살아있는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륵은 야로의 현실적이며 약은 태도를 알고 있으나 이를 애써 외면하고 침묵한다. 이는 마치 <백로가>를 떠올리게 한다. 예술/이상은 현실의 더러움에서 필연적으로 거리를 두려하기 때문이다.



까마귀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샘낼세라


맑은 물에 기껏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백로가>


그렇다면, 어째서 야로는 이사부의 손에 죽고, 우륵은 살아남았는가. 이 대답은 우륵과 이사부의 대화 속에 있는 듯하다.



- 소리는 주인이 없는 것이냐?

- 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니 아마도 그러할 것이오.

- 너희 나라 대장장이 야로를 아느냐?

- 가야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소.

- 그 늙은 대장장이가 말하기를, 병장기는 주인이 따로 없어서 쥐는 자마다 주인이라 하였다. 소리는 병장기와 같은 것이냐?

- 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인 것이오. 병장기가 어떠한 것인지는 병부령께서더 잘 아시리이다.


『현의 노래』, 276쪽



우륵과 야로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서 비중있게 다뤄지는 이사부, 아라는 모두 '운명을 개척하려는 자들'로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사부는 칼을 들어 임금이 꿈꾸는 부처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고, 아라는 제 몸 하나를 건사하기 위하여 도망치나 결국 운명에 희생된다. 야로는 쇠를 통해 운명을 헤쳐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쇠는 현실에 깊이 얽매인 일이다. 우륵의 소리는 이상에 파묻힌 일이다. 다만, 두 사람은 제 손에 든 쇠와 소리가 모두 주인이 없기를 꿈꿨다. 그러나 쇠와 소리가 지니는 태생에서부터 그 꿈의 결말이 암시된다. 야로는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으나, 그의 재능(쇠를 다루는 일)이 전쟁에 쓸모 있기에 죽었다. 쇠에게는 명백한 주인이 있어야 한다. 주인이 없는 쇠는 주인의 적이 아니라 주인 그 자체를 겨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륵 역시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했으나 가야를 패망시킨 신라의 진흥왕과 군장들의 웃음거리로 삼을 만큼 전쟁에 하등 관련이 없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덮는 순간까지 우륵보다는 야로에게 더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을 나 혼자만이라도 『쇠의 노래』라고 몰래 고쳤다.




- 소리는 주인이 없는 것이냐?

- 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니 아마도 그러할 것이오.

- 너희 나라 대장장이 야로를 아느냐?

- 가야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소.

- 그 늙은 대장장이가 말하기를, 병장기는 주인이 따로 없어서 쥐는 자마다 주인이라 하였다. 소리는 병장기와 같은 것이냐?

- 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인 것이오. 병장기가 어떠한 것인지는 병부령께서더 잘 아시리이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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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세대
백온유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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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청산하는 7가지 방법









백온유의 이름을 지난 <젊은작가상> 대상으로 처음 마주했다면, 내 독서 범위가 너무 얄팍하다는 걸 자백하는 걸까. 이번에 젊은작가상 대상작인 「반의반의 반」이 포함된 단편집 『약속의 세대』를 읽었다. 『약속의 세대』는 다음의 7편으로 구성된 작품집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광일」

「의탁과 위탁 사이」

「반의반의 반」

「회생」

「사망 권세 이기셨네」

「내가 있어야 할 곳」



다 읽고 나서 이 이야기가 범박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과거를 청산하는 7가지 방법'이라고.


우선 「나의 살던 고향은」은 '한서'라는 시골 마을 출신의 영지가 돌아가기 싫은 고향에 돌아가게 되고,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결국 마을의 산에 불을 질러버리는 이야기다. 자신을 늘 속박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으로 영지는 불을 질러버린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광일」과 「내가 있어야 할 곳」 두 편이다. 이 두 작품은 내가 좋은 단편 소설이라고 여기는 미덕을 갖춘 작품이었다. 좋은 단편 소설은 적은 분량 안에서 한 인물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고, 그로인해 "현재"에 이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독자에게 짐작케 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광일」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훌륭한 단편처럼 읽혔다.


특히나 「광일」의 주인공 '박광일'의 캐릭터가 흥미로웠다. 노인네와 흥정을 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인물인 것 같지만, 노인이 잘못 건넨 5만원은 돌려주고, 노인을 봉변에서 구해준다.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기 힘겨워하지만, 실상은 아내만을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일정구간까지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은 엔딩을 기대했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운수 좋은 날」의 다른 버전인 것 같기도 할 만큼 다소 의외의 엔딩을 갖고 있긴 하다.


잠은 죽음에 대한 예습이자 복습 같았다.

「광일」, 119쪽


「광일」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행은 왜 마음 약한 이들에게만 찾아오는가? 그런 이들에게 불행은 꼭 산사태의 형태로,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으로 다가온다. 광일은 구태여, 산장으로 갈 필요가 없었음에도 마음이 약하고, 과거에 손님을 길에서 내려준 기억 때문에 결국 스스로를 다독이며 산장으로 향한다. 이런 마음 약한 인물에, 도덕적인 선들과 자신의 이익 앞에서 깊게 갈등하는 인물들에게 나는 깊은 애착을 느끼곤 한다. 광일은 스스로 과거에 길에 내려준 손님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산장에 갔다가 결말을 맞이한다.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뜻대로 되진 않은 인물일 것이다.




그들은 그때 나를 찾아가지 않았듯 이번에도 나에게서 할머니를 찾아가지 않으리라.

「의탁과 위탁 사이」, 152쪽.



「의탁과 위탁 사이」는 「반의반의 반」의 짝패처럼 읽히기도 한다. 할머니-손녀의 관계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할머니가 병든 환자인 것도 그렇다. (이 지점에서 백온유의 또다른 관심사가 드러나는데, 작가는 (병든) 노인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도 그러하거니와, 「광일」,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도 이러한 인물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두 작품 역시 할머니, 엄마, 나 사이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현재를 억압하고, 결말 부근에 이르러서 각자 이 과거를 어떻게 청산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의탁과 위탁 사이」와 「반의반의 반」은 그런 청산 과정에 있어서도 유사성을 띠는데, 나름대로 명확한 선을 가지는 다른 수록작들과 다르게, 「의탁과 위탁 사이」는 틀니를 통해 할머니의 과거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며, 「반의반의 반」은 상당히 모호한 결말로 끝난다. 두 작품은 어떤 일을 해결한다기보다는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는 데 깊은 관심을 할애한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젠 내가 안 만나주지. 세 시간을 기다렸잖아. 내가. 세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데, 노인한테."

「의탁과 위탁 사이」, 148-149쪽.



「회생」은 읽는 동안 좀 재밌었다. 제목과 다르게 연지 - 수영은 회생이 불가하다. 애초에 없던 아이를 뱃속에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져 (아마도) 깨진 그릇도 결코 회생시킬 수 없다. 마치 어설픈 솜씨로 '킨츠키'를 한 듯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형성하다가 그런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가볍고 경쾌한 느낌마저 주는 결말 부근에서 산산히 박살난다. 이는 과거의 실수는 결코 청산될 수 없으며, 유일한 방법은 억지로 붙여놓거나, 산산히 깨지거나, 라는 걸 암시하는 듯 하다.


「사망권세 이기셨네」는 「회생」처럼 두 친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또 다르게 읽힌다. 사이비 종교 2세들의 이야기다. 사이비 종교 간부의 딸이었던 '나'와 그런 간부의 비서 같은 역할을 했던 신도의 딸 세주는 엄마들의 권력 관계에 전염된 듯 이를 모방한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의 거짓말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나'와 세주는 냉정한 세상 앞에 서게 된다. 이 둘의 관계는 기이하게 역전되는데, 과거 부모들의 권력 관계나, 자신이 간부의 딸로써 가졌던 일종의 우월감 때문에 '나'는 세주에게 꼼짝을 못한다. '나'의 보살핌은 어쩐지 채무자가 채권자를 대하는 듯이 변한다. 과거가 현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이 둘은 결말에서 (「회생」의 연지와 수영과 달리) '회생'에 이르며, 처음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떤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담담한 화자의 서술과 다르게 극도로 잔인한 소설이다. '나'는 한국의 학창시절, 친구를 컨테이너에 가두고, 학폭위에 회부된다. 또한 '나'가 화재 소동을 겪으면서 먼저 간 딸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나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사건을 배치할 수 있는지 놀랐다. 이모의 딸이자 '나'의 사촌은 컨테이너에 갇힌 채 화마에 희생되었다는 점을 분할해 사건을 배치했지만, 참 잔인한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 집에서 사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엄마가 그애를 안고 있는 사진이 내 사진첩에 있어서 한동안은 당연히 그 아이가 나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아니더라고 고백했다. 사촌과 내가 어렸을 떄 부모가 바뀐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는 말은 다행히 하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 309쪽.


'나'는 이모의 딸이 되는 것을 이모에게 거절당했다고 진술하지만, 이 부분은 외려 이모가 '나'를 정말 딸로 받아들인 것처럼 읽힌다. 자식이 품에서 어리광만 부리는 게 아리나 자립하기를, 더는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 세상과 대면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그 자신이 먼저 앞세운 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조카인 '나'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이모부도 죽고 한국에 돌아온 이모와 '나'가 나눈 문답은 일종의 뒤늦은 대답 같이 느껴진다. (이 부분은 이 소설집 전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모. 봄이 오면 우리 마당에 꽃 심는 게 어때요?"

"좋지. 나도 너랑 같은 생각."

"무슨 꽃 심을까요?"

"너랑 같은 생각."


「내가 있어야 할 곳」, 317쪽.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라는 말은 곧 '너는 내 딸이야.', '나도 보내고 싶지 않았어.', 처럼 읽히지 않는가. 이모의 귀국은 결국 하나 남은 가족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나 남은 가족, 조카이자 딸인 '나'에게로. 또한 이 진술은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라디오를 틀자 거짓말처럼 마이클 볼턴의 <Lean on Me>가 나왔다. 이모부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중 하나였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노래네, 이모가 중얼거렸다. 이모가 좋아하는 가수여서 이모부가 자주 불렀던 건데 그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 321쪽.



가족 구성원 간에 한 쪽이 모르는 다른 한쪽의 행동 이유를 알고 있는 이는 가족이라는 말 외에 표현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약속의 세대』는 거칠게 축약하자면, 과거와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모아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내 과거를 살펴보면서 괴로워하고, 때로는 깨닫기도 하고, (마음 속으로나마) 불을 질러보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백온유 작가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뎌지지 않겠다'는 내지 첫 페이지의 글처럼,

나는 이 작가가 무뎌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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