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 박준의 시를 읽는 마음
박준 지음 / 난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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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을 읽는 마음







누군가 좋아하는 시인을 대라고 하면, 윤동주, 이상, 이육사, 정지용, 백석, 소월을 대겠다. 이후 시대의 시를 접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지금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겠다고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 시집을 붙잡고 매달려본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박준' 외에는 저 목록에 다른 시인을 추가하지 못한다.


나는 마음대로 박준을 한국 서정시의 적장자라 여긴다. 누군가 이를 치명적인 오독과 무지라 비난해도 아랑곳않는다. 나는 그래미어워즈나 아카데미 시상식의 심사위원이 아니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 기분 좋은 울림을 주는 시인들만 편애하기 때문이다.






박준을 왜 편애하느냐는 질문에는 그의 시를 읽어보라고, 또는 그가 출연한 방송을 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위에 인용한 글처럼 사랑에 대한 그의 표현이 무척이나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출연한 방송이다. 나는 언제나 작가들이 쓰는 글과 그들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하는데, 박준은 평소의 말투나 목소리가 어쩐지 그의 시를 닮아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시가 그의 목소리를 닮아있는 것이겠지만, 내가 먼저 접한 것은 박준의 시이니, 내게는 시를 닮았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이번 신작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를 사고 나서 나는 또 한번 박준이라는 시인에 대해서 괜히 혼자 애틋해졌다. 게으름으로 다 읽지도 못할 것이고, 몇 년후에나 이런 책이 있었지, 하고 들춰보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애호하는 문인들의 신간을 꾸역꾸역 사는 경우가 있다. 초판 한정으로 사인본이 증정되는 경우다. 대체로 신간 초기 판촉을 위해 초판본은 양장이거나, 엽서가 들어 있거나, 사인이 들어있다. 어릴 적에는 양장이 멋들어져 좋아했지만 요즘 나는 양장본의 각진 폼에 자꾸만 밀려난다. 엽서는 애당초 수집하거나 써보내는 취미 없어 그다지 흥미도 없다. (아, 내가 엽서를 적어 보내는 재미를 알았다면 달랐을까?)


나의 소장용을 자극하는 건 언제나 사인본이었다. 직접 대면해서 받은 사인본보다도 그렇게 수중에 넣은 사인본이 더 많다. 하지만 서명은 고된 노동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작가가 심혈을 기율여 멋들어지게 서명을 하면 그걸 인쇄해 삽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 서명 역시 귀하겠지만서도 나는 영 그런 사인'인쇄'본에는 손이 가질 않았다.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는 신간 출간 알림이 오자마자 구매했는데, 사실 사인본이 있는지도 몰랐다. 내게 박준이라는 작가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꼭 사서 읽어야 하는 작가였다. 책을 받아 첫 페이지를 열어보자 나는 좀 놀랐다. 박준의 서명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인쇄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반대편을 보자, 덜 마른 서명에서 묻어나온 하얀 잉크가 묻어 있었다. 한 번만 서명하면 수 천개로 복사할 수 있는 이런 편한 시대에 박준은 직접 서명해서 보낸다. 낭만은 불편의 다른 이름이라던데, 나는 여전히 낭만에 젖은 이 시인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의 인상적인 지점은 '시'와 '그 뒤에 달아놓은 박준의 글' 사이에 도약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책은 그 시에 대한 시인의 해석이나 시에 얽혀 있는 시인의 개인적인 일화 같은 게 담겨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글들도 수록되어 있지만, 어떤 시와 글들은 서로 거리감이 있다고 느낀 글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정지용의 <호수> 같은 시 뒤에는 연인(박준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미인)에 대한 글이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점점 흐려지는 그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마음에 남는 그림에 대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부족한 식견으로는 <호수>가 독자에게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인상을 자아내니 여기서 착안한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시와 흐려진 그림은 감상하는 이에게 선명한 이미지를 준다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쓰인 게 아닐까 한다.


첫 시집 제목을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 지을 만큼, 박준은 이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 같다. 흔히 어떤 사람의 이름까지도 앓게 되는 게 사랑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종종 참 쓰는 시에 꼭 맞게 어떻게 이름도 박준일까, 생각해온 적이 있는데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에 수록된 이름에 담긴 내력은 그런 낭만과는 전연 달라 퍽 재밌다.




작중 유영국 화가의 전시회에 다녀온 일화도 있는데, 요즘 같이 읽는 책인 『살롱 드 경성』에도 이 화가에 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또한 근래 예술가는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프리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에 대해 다룬 부분이 있어서 오래 곱씹게 되었다.


예술이 규범과 불온함을 동시에 내포한다고 정의할 때 누구나 한눈에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과 달리 불온함을 감지할 수 있는 눈은 저마다 다릅니다. 불온은 한 예술가가 대상을 재인식하는 과정에서 담지되는 것이며 감각을 물질화하는 방법에 따라 분화되기 마련이니까요.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62쪽


당연하지만 한번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박준뿐만 아니라 시인의 글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번 책에선 꿀에 대한 문장이 내게 그랬다.


꿀. 식물에서 왔지만 더이상 식물은 아니고 동물의 몸에 속해 있었지만 결코 동물은 아닌.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39쪽


또한 위안을 받기도 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몇몇 예외적인 시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시를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인이자 시집을 편찬하는 일에 인생의 많은 시간을 할애해 온 박준마저도 시가 어렵다고 하니, 괜히 나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여 위안이 되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내가 더는 박준의 시를 사랑하지 못하는 날이 올까 두렵다. 그렇게 된다면, 미워할 것 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더는 사랑할 것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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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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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흘러도 여전한 문장론의 고전







글을 쓰다보면, 필연적으로 문장에 대한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표현이 맞을까, 더 좋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고민해서 뺀 쉼표를, 다시 읽어본 후에 넣었을 때에야 소설이 완성되었다고 느낀다는 레이먼드 카버만큼의 고민은 아니겠지만, 글을 쓸 때 어느 정도 고민은 필연적이다.




이번에 문장론에 대해서 공부하다보면 한 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이태준, 『문장강화』를 읽었다. 여기서 강화는 수준을 높인다는 강화(強化)가 아니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다는 뜻의 강화(講話)입니다.'강화(講話)'의 의미다.




1939년에 처음 나온 글쓰기 교본을 팔십몇 년이 지난 지금 읽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몇 장 넘기지 않아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오히려 요즘 나오는 글쓰기 책들보다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대목이 여럿이었다.




이태준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는 문장가로서의 면모가 훨씬 두드러진다.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순했다. 좋은 문장을 쓰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것. 그런데 그 방법이 요즘 흔히 보는 작문 지침서와는 결이 다르다. 문법책처럼 규칙을 나열하지 않고, 실제 문인들의 글을 붙잡고 하나하나 왜 좋은지, 왜 고쳐야 하는지를 짚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바로 다음과 같다. 이는 직접적인 문장 작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근본 철학에 가깝다.









"생활이 있어야 말이 있고, 말이 있어야 글이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당연한 소리처럼 들렸다. 삶이 먼저고 언어가 그다음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책을 끝까지 읽고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오면 무게가 달라진다. 이태준은 이 순서를 뒤집어서 쓰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글을 먼저 예쁘게 꾸미려 하고, 그 글에 맞춰 생각을 짜맞추는 태도 말이다. 그는 글이란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 삶과 무관하게 조립되는 물건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 시대에 이 말을 곱씹어보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요즘 우리는 문장을 다듬는 기술만 배우고 그 문장이 나온 자리, 즉 생활을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은 일물일어주의다. 하나의 사물에는 그것을 정확히 가리키는 말이 하나뿐이라는 생각. 이태준은 비슷비슷한 단어를 되는대로 골라 쓰는 습관을 경계한다. '아름답다'와 '곱다'와 '예쁘다'가 사전에서는 얼추 비슷해 보여도 실제 문장 안에서는 전혀 다른 자리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할 일은 그 정확한 한 단어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대충 비슷한 말로 때우면 문장은 흐릿해지고, 흐릿한 문장은 독자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솔직히 이 대목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좀 돌아보게 됐다. 글을 쓸 때 정확한 단어를 찾기보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어디서 본 듯한 표현을 가져다 쓰는 일이 얼마나 잦았던가. 이태준은 이런 습관을 게으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게으름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은 관찰이라고 말한다.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것과 가장 가까운 말을 찾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태도. 요즘 식으로 말하면 디테일에 대한 집요함이다.




책의 구성도 흥미롭다. 문장의 기초, 문체, 각종 글의 종류, 퇴고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다루기 때문에 처음 글을 쓰는 사람도 접근하기 쉽다. (물론 시대상의 옛스러운 말투는 감안해야 한다.) 또한 당시에 발표된 다양한 글들을 실제 예문으로 쓰며,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함께 짚는데, 이 부분이 이 책을 지금 읽어도 재미있게 만드는 이유다. 이론만 늘어놓지 않고 손으로 잡아 보여준다.




문체에 대한 장에서는 개성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태준은 좋은 글이란 규칙을 다 지킨 글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목소리가 살아있는 글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규칙을 무시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규칙을 충분히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튀는 문장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이 대목은 뜨끔할 것 같다. 기본기 없이 특이함만 좇으면 그건 개성이 아니라 미숙함일 뿐이라는 게 이태준의 진단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은, 글쓰기를 기술로만 접근하는 사람과 태도로 접근하는 사람의 차이다. 요즘 많은 글쓰기 책들이 문장을 짧게 써라, 접속사를 줄여라, 수동태를 피해라 같은 규칙을 나열한다. 물론 이런 규칙도 쓸모가 있다. 하지만 이태준은 규칙 이전에 삶을 보는 눈, 사물을 정직하게 관찰하는 태도를 먼저 요구한다. 규칙은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식이다. 이 순서가 이 책을 다른 작문 교재들과 구분 짓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읽으면 낡은 부분도 있다. 예로 든 글들이 대부분 1930년대 문인들의 작품이라 요즘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고, 문장 자체도 옛투가 많이 섞여 있어 처음에는 리듬을 잡기가 쉽지 않다. 한자어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쓰였고, 일부 표현은 요즘 맞춤법과 다르다. 하지만 이런 낯섦이 오히려 이 책을 천천히 읽게 만든다. 빨리 훑고 지나가는 대신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게 되는데, 이게 이태준이 원했던 독서법과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남는 건 결국 처음 인용했던 그 문장이다. 생활이 있어야 말이 있고, 말이 있어야 글이 있다는 말. 요즘처럼 글쓰기 기술이나 문장 스킬을 검색 몇 번으로 배울 수 있는 시대에, 이태준의 이 순서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종종 이 순서를 건너뛰고 곧바로 좋은 문장을 흉내 내려 한다. 근사한 표현, 있어 보이는 어휘를 먼저 모으고 거기에 내용을 끼워 맞춘다. 이태준이 봤다면 이런 글쓰기를 순서가 뒤집힌 글쓰기라고 불렀을 것 같다.




일물일어주의도 결국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정확한 단어를 찾는다는 건 단순히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물과 그 순간을 얼마나 진지하게 마주했느냐의 문제다. 대충 비슷한 말로 넘어가는 건 사물을 대충 본 것이고, 정확한 말을 찾아낸다는 건 그만큼 오래 들여다봤다는 뜻이다. 이태준에게 글쓰기란 결국 얼마나 정직하게, 얼마나 오래 보았는가의 기록이었던 셈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혹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을 붙잡고 밑줄을 그어볼 만하다. 당장 써먹을 문장 팁을 찾는 사람에게는 조금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장 이전에 무엇을 봐야 하는지, 무엇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책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열어보고 싶어졌다. 거기 쓰인 단어들이 정말 내가 찾아낸 단어였는지, 아니면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던져둔 말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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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꾼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재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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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람은 도박장의 손님이 되고






올해 세운 목표 중 하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는 것이었다. 일년의 반이 훌쩍 지나가고, 2/3이 다 끝나가는 지금도 읽지 못하고 있다. 『노름꾼』은 훌륭한 작품성과 함께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 관계도에 대한 예행 연습으로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제야 겨우 읽었다. 읽는 내내 난무하는 러시아 이름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올해가 가기 전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을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걸작이라 불리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보다 『노름꾼』이 더 큰 흥미를 끈 이유는 분량이 더 적기도 하지만, 『노름꾼』이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 룰렛 도박에 상당히 중독되어 있었고, 당장 출판사에 새 소설을 납품하지 않으면, 그가 쓴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이 9년간 출판사에 귀속될 위기에 처했다. 결국 노름빚 앞에서 절망한 도스토옙스키는 타자수를 고용해서 약 한달동안 구술로 소설을 써내려가는데, 그게 바로 『노름꾼』이라고 한다. 또한 이 타자수는 훗날 도스토옙스키와 결혼을 하는 안나다.


『노름꾼』을 다 이해했느냐, 하고 물어보면 솔직히 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통에 나는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장광설이 상당히 현란하고 매혹적이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같이 미쳐가는 것만 같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도박장에 같이 있는 생생한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는데 나도 그런 것 같았다.


이 작품은 모든 인물들이 광기에 서려 있다. 도박이 모두를 그렇게 만들기도 하거니와, 도박과 비슷한 짜릿함을 주는 사랑에 미쳐있다. 장군이나 주인공 알렉세이가 그렇다. 특히나 주인공이자 화자인 알렉세이는 도박과 사랑 모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로 따라가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될 지가 궁금해서 따라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물론 『노름꾼』이 엄청난 걸작이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인물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걸 기세와 분위기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긴 하지만 정작 다 읽고 나면 "광기" 밖에 느껴지는 게 없다. "광기"가 곧 작품에서 추구한 바인 것 같아서 실패한 작품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용감한 사람은 도박장의 손님이 되고, 똑똑한 사람은 도박장의 직원이 된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는데, 정말 『노름꾼』의 인물들은 모두가 돈을 잃을 걸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다. 그 모습은 아마도 도스토옙스키 본인의 모습이었으리라. 이러한 자신의 부끄러운 면모까지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아낼 수 있다는 점이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믿음과 흥미를 키우는 부분이다. 또한 나는 아이러니는 사랑하는데, 『노름꾼』이 노름꾼이었던 도스토옙스키의 노름빚을 갚기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이 작품에 대한 흥미를 키운다.




인물관계도



1.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소설의 서술자이자 장군 집안의 가정교사.


장군의 의붓딸 뽈리나를 맹목적이고 광기 어린 감정으로 짝사랑하는 중. 뽈리나의 부탁과 환심을 사기 위해 룰렛에 손을 댄다.


2. 뽈리나 알렉산드로브나


장군의 의붓딸. 장군의 전처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뽈리나의 동생들은 장군과 전처(뽈리나의 생모) 사이에서 얻은 아이들.


알렉세이의 맹목적인 사랑을 알면서도 냉담하고 가학적으로 대하지만 내면에는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양부의 빚 때문에 드 그리외 후작에게 얽혀 있으며, 미스터 에스틀리와도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한다.


3. 장군


퇴역 러시아 장군이자 알렉세이의 고용주.


도박과 방탕한 생활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드 그리외에게 저당 잡힌 상태. 모스크바에 있는 부유한 백모(할머니)가 사망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기만을 기다리며, 젊은 프랑스 사교계 여성 블랑슈와의 재혼을 꿈꾼다.


4. 안토니다 바실리예브나 (할머니)


장군의 부유한 모스크바 백모이자 가문의 실질적 기둥.


모두가 유산을 위해 사망 소식만을 기다린다. 그런데……….


5. 마르키 드 그리외


프랑스인 고리대금업자이자 가짜 후작 행세를 하는 야심가.


장군의 채권자로 일가를 쥐락펴락하며, 뽈리나를 빚으로 옭아매 정부로 만들었다.


6. 블랑슈


신분 상승과 돈을 노리는 프랑스 출신 사교계 여성.


장군이 목을 매는 사교계의 여성.


7. 미스터 애스틀리


여행 중 만나게 된 영국 신사.


알렉세이의 친구이자 관찰자. 뽈리나와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하며, 알렉세이와 그와 얽힌 이들에게 곧잘 호의를 베푼다.




화폐단위



소설에는 다양한 화폐 단위가 나오는데, 이를 제미나이를 통해 정리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화폐들 중 가장 가치가 낮은 러시아의 보조 동전 '꼬베이카(Kopeck)'를 1로 잡고, 1860년대 당시 환율을 바탕으로 각 화폐의 상대적 가치를 정리해 드립니다.


최하위 단위(꼬베이카) 기준 환산표


1 꼬베이카 (러시아 동화): 최하위 기준 단위

1 프랑 (프랑스 은화): 약 25 꼬베이카

1 굴덴 / 플로린 (남독일·오스트리아 은화): 약 60 꼬베이카

1 탈러 (북독일 은화): 약 95 ~ 100 꼬베이카

1 루블 (러시아 기본 통화): 정확히 100 꼬베이카 (1루블 = 100꼬베이카)

1 프리드리히스도어 (프로이센 금화): 약 500 ~ 525 꼬베이카


한눈에 보는 교환 비율 (근사치)


1 프리드리히스도어 (최고액 금화) = 약 5 탈러 = 약 5 루블 (500 꼬베이카) = 약 8.5 굴덴 = 약 21 프랑




*작중 알렉세이가 한 번에 20만 프랑을 따는데, 이를 현대적 가치로 환산하면 이렇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1860년대 20만 프랑의 현대 원화 가치 환산


19세기 중반(1860년대)의 통화를 현대 화폐로 환산할 때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3가지 경제학적 기준으로 20만 프랑을 직접 계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순금 실물 가치 기준 (약 70억 원)


1860년대 프랑스는 '프랑 제르미날'이라는 철저한 금본위제 화폐를 사용했습니다.

1프랑의 법정 순금 함유량: 약 0.29032g

20만 프랑의 순금 무게: 200,000 x 0.29032g = 58,064g (약 58.06kg)

현대 원화 환산: 현재 국내 순금 시세(1g당 약 12만 원 기준)를 적용하면 58,064g x 120,000원 = 69억 6,700만 원 (약 70억 원)


2. 소득 및 사회적 경제력 기준 (약 70억 ~ 85억 원)


당시 사람들의 소득 수준과 비교해 그 돈이 가진 '사회적 위력'을 환산하는 방식입니다.

1860년대 프랑스 소득 수준:

일반 도시 노동자 연봉: 약 1,000 ~ 1,200 프랑

부유한 부르주아 신사의 1년 생활비: 약 4,000 ~ 5,000 프랑

20만 프랑의 가치: 일반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약 170~200년간 일해야 버는 돈. 유한계급이 40~50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치스럽게 살 수 있는 거금.

현대 원화 환산: 현재 한국 임금근로자 평균 연봉(약 4,200만 원)을 기준으로 170~200년 치 소득을 계산하면 4,200만 원 x 170~200년 = 71억 4,000만 원 ~ 84억 원



3. 단순 장바구니 물가(CPI) 기준 (약 13억 ~ 15억 원)



프랑스 통계청(INSEE) 및 경제사학계의 역사적 소비자물가지수(CPI) 환산율을 적용한 방식입니다.


1860년 1프랑의 현대 유로 구매력: 약 4.0 ~ 4.5 유로 (19세기에는 공산품과 식료품의 생산 단가가 지금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단순 물가 배수는 낮게 나옵니다).

20만 프랑의 유로 환산: 약 80만 ~ 90만 유로

현대 원화 환산: 1유로 당 1,600원 기준으로 계산하면 850,000유로 x 1,600원 = 13억 6,000만 원


4. 부동산 및 실제 사치 규모 (약 80억 ~ 100억 원)


1860년대 파리 부촌(8구 등)의 최고급 저택 한 채 매매가가 약 10만~20만 프랑이었습니다.

파리 중심가의 대저택이나 서울 핵심지의 고급 주택 1채 가격이 현대에 80억~120억 원을 호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블랑슈가 저택을 빌리고 최고급 마차와 보석을 쓸어 담으며 한 달 만에 태워버린 20만 프랑의 파괴력은 약 70억~100억 원 규모의 벼락부자 당첨금으로 보는 것이 소설의 맥락에 가장 잘 들어맞습니다.



요약


단순 식료품/생필품 구매력(CPI)으로만 보면: 약 13억 ~ 15억 원

순금 실물 가치(금본위제)로 보면: 약 70억 원

부동산, 노동 가치, 실제 사치 규모로 보면: 약 70억 ~ 100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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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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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기담집




성해나의 신작 소설집 『인비인』을 읽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기담집'이라는 타이틀이 달렸다. 기담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 이번에 명확한 의미를 찾아보았다. 당연히 괴담과 비슷한 결을 지닌 무섭고 기이한 이야기일 줄 알았으나 의외로 이상야릇하고 재밌는 이야기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기담1 奇談/奇譚


명사

1.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표준국어대사전




어제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9)

인비인(人非人) (27)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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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총 9편의 작품이 실린 『인비인』도 괴담집은 아니다. 앞에 실린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인비인」은 괴담에 가깝긴 하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괴담이라기보다 신기한 이야기 정도의 느낌이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옛날 우리 설화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설화의 구조가 현대의 시점에서, 한국과 미국 등의 공간으로 펼쳐져 있는 것 같다.


9편의 기담은 3개의 분류로 나뉘어져 있다. 어제, 오늘, 내일이다. 어제에 실린 3편은 모두 일제강점기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까지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일들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오는지에 대해 담고 있다.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은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우선 근래 시끄러운 여배우 때문이다. 친일파 조상의 행적에 대해서 무지했던 여배우가 그들이 누렸던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다가 결국 그들이 친일파였음이 낱낱히 밝혀진 사건이다.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현실의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문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이를 부정하다가 죽기 직전에는 부끄러워한다. 이 모습이 겹치면서 지금 여배우는 어떤 심정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은 성해나 작가의 첫 소설집인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단편소설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의 초안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선 친일 행적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는 가족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하나의 소설이 어떤 형식으로 변해가는지를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어제"에 실린 3편의 소설이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성해나 작가가 다루는 일본(식민지 시절)의 이야기가 내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빛을 걷으면 빛』에 실린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 「오즈」에도 일제 강점기 시절의 피해자 할머니가 등장한다. 이때부터 성해나 작가는 이런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다.





오늘 섹션에 실린 글들은 기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많았다. 누군가의 인생을 경매로 사고 파는 이야기나 윤회를 믿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일 섹션에 실린 글들은 현재도 무섭게 발전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를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윤회 (당한) 자들」, 「고(蠱)」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특히 「고(蠱)」는 「혼모노」를 떠올리게 한다.


「혼모노」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가짜가 진짜를 이기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진짜 가짜는 누구고 가짜 진짜는 누가 되는가?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이 소설의 결말에서 흐릿해져버린다.



「고(蠱)」는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종사해야 할 고가 주인의 주인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주인에게 종사하는 이야기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하이데거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고(蠱)」는 한층 더 나아가 아예 우로보로스처럼 머리가 꼬리를 물어버려서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이렇듯 본질의 경계를 흐려버리는 성해나의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다.




이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은 성해나 작가는 확실히 순문학 작가 중에선 장르소설 쪽으로 나아가려는 힘이 강한 작가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순문학과 장르소설 사이에 어떤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장르소설은 소설이란 형식이 지니고 있던 본연의 서사성, 이야기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순문학은 의미나 서정성을 더 강화한 쪽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성해나와 김기태 같은 작가가 순문학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서사성과 이야기의 즐거움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으로 그 생각은 더 단단해졌다. (김초엽 작가나 천선란 작가, 정세랑 작가도 그런 편에 속하는 것 같은데, 직접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다.)


또한 『인비인』에는 작품마다 작가의 후기가 달려 있어서 좋았다.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해당 작품을 썼는지를 읽어보는 것은 평론가들의 해설 지면과 다른 솔직한 창작관을 엿볼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성해나 작가의 관심폭이 상당히 넓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양한 장르나 소재를 다루면서 적재적소에 필요한 어휘와 지식을 담을 수 있는 재능이 부러웠다. 성해나 작가의 다음 작품들도 기대가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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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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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없다. 그러나 





근래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강의를 듣고 있다. 그렇다보니,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GV빌런 고태경』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얼마 전에 읽은 『아코디언』의 천명관 작가는 오랫동안 영화 감독을 꿈꿔왔으나 소설가로 먼저 세상에 알려지고, 영화 감독이 되었다. 정대건 감독은 그 반대인데, <투 올드 힙합 키드>로 먼저 감독을 데뷔한 후 소설가로도 이름을 알리게 된 케이스다. 나는 <투 올드 힙합 키드>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당시에는 힙합에 경도되어 있었고, 실제 래퍼들의 삶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야 『급류』의 작가 정대건이 그 감독이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고 반가웠었다. 정확히 찾아서 따져본 것은 아니지만, 정대건 작가 이후로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 일하던 작가나 감독들이 소설을 출판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괴물, 용혜』나 『무덤까지 비밀이야』 같은 작품의 작가들도 비슷한 출신을 가지고 있다.





* * *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작가가 쓴 화제작인 『급류』를 일 년 전쯤에 읽었다. 나는 대체로 읽었던 모든 책에 대해서 짧게라도 감상평을 남기려고 하는 편인데, 『급류』는 실패했다. 서평을 쓸 때, 장점만을 언급하는 주례사 비평은 나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가능하면 내가 느낀 장점과 단점 모두를 적으려고 한다. 다만, 『급류』에선 어느 장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책의 서평에 쓸 수 있는 말은 온통 부정적인 것밖에 없었다. 아주 가끔 그런 책들을 만나게 되고, 나는 그럴 때마다 서평 적기를 생략한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이 각고의 노력을 들여서 만든 작품에 대해 쉽게 험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GV빌런 고태경』에 대한 관심도 조금은 식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이 환기된 것은 영화 리뷰 쓰기 강의도 있지만, 올해 재밌게 보았던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동안 영화 감독 입봉을 준비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점차 진상이 되어간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모자무싸>의 결말보다는 『GV빌런 고태경』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모자무싸>는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동만의 성공을 보여주지만, 『GV빌런 고태경』에선 고태경이 작중 스스로 지향했던 것처럼, '그는 여전히 도전하고 있다.'라는 결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GV빌런 고태경』이 『급류』보다 좋았다. 내가 느낀 『급류』의 유일한 덕목은 잘 읽힌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의 연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천명관도 그렇고, 앞의 두 작품 작가들도 그렇고, 영화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글은 쉽고 이미지화가 잘된다는 장점을 공유한다. 『GV빌런 고태경』 역시 그런 장점이 잘 묻어난 데다가, 작가가 오래 몸담았던 업계의 일이다 보니 자전적이어서 좀 더 솔직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아래와 같은 문장은 쉬워보이고 당연해보이는 문장이지만, 업계에서 살펴보지 않는 한 쓸 수 없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통제다. 위대한 영화 감독들은 대부분 통제광들이다.


『GV빌런 고태경』, 50쪽


아무리 세상에 동기부여되는 말이 많이 있다지만 '나도 하겠는데?'만큼 효과적인 동력은 없다. 그래, 쟤도 했는데 내가 왜 못해. 나는 남은 맥주를 원샷으로 비웠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나 감독이지.


『GV빌런 고태경』, 55쪽


말하다보니 어쩐지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요약하는 것만 같았다. 노 굿(NG)을 오케이하면서 살아온 인생, 변명 같은 인생. 관객들은 그런 사정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영화로 말하는 것이다.


『GV빌런 고태경』, 77쪽



유머 역시 재밌었다. 관심의 공산주의나, 잃어버린 자아가 인도가 아닌 아이슬란드에 있다는 점 등이 그러했다.



관심의 공산주의가 필요하다. 관심의 재분배, 최소 생계 유지처럼 최소 관심 유지가 되는 사회.


『GV빌런 고태경』, 66쪽



예전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인도에 갔는데 요즘에는 잃어버린 자아가 아이슬란드에 가 있잖아.


『GV빌런 고태경』, 124-125쪽




감독은 선택의 프로




감독이 똑바로 잘해야 하는 한 가지라면 역시 선택이겠지.

『GV빌런 고태경』, 151쪽


작중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사안은, 감독은 선택을 하는 직업이란 사실이다. 여러 컷들 중에서 최고의 컷을 골라내고 이어붙이고. 감독이 편집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강의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들었다. 영화는 이처럼 편집의 예술인데, 한국이 유독 특이한 환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영화 감독은 편집과 촬영에 모두 전적인 권한을 갖는데, 미국의 할리우드에서는 촬영은 감독이 하되, 편집권은 스튜디오가 갖는다고 한다. 수백 억이 투자된 영화의 흥행을 결정짓는 것이 편집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주는 듯하다. (재밌는 점은 예고편만 전문적으로 편집하는 감독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고편과 본편의 내용이 전혀 다른 '예고편 사기', '터저 사기' 같은 헤프닝이 생기기도 한다.)


『GV빌런 고태경』의 주인공인 조혜나는 이 선택의 문제 앞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감독으로써 영화를 편집할 때, 늘 선택의 기로 앞에서 고뇌하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선택의 문제 앞에서 고뇌하기도 한다. 예컨대, 가장 중요한 영화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정을 끝내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조헤나는 영화에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만두어야 하는가. 아주 가끔은 재능이 아니라 일에 대한 사랑이 그 자리에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떤 것에 대한 사랑보다는 조롱과 냉소가 더 쉬우니까.


『GV빌런 고태경』, 126쪽


나는 극장을 정말 사랑해. 나는 영화를 정말 사랑해.


『GV빌런 고태경』, 133쪽



고태경이란 문제적 인물





"선생님, 한때 영화인이기도 하셨잖아요. 과거에 영화인이셨던 분들이 현장을 떠나서도 어떻게 영화와 극장을 사랑하며 지내는지 담고 싶-"

"나 아직 영화인이요."


『GV빌런 고태경』, 64쪽


『GV빌런 고태경』은 고전적인 소설의 형태를 차용한다. 이를테면, 근대 소설이 발화하던 시기에 많은 작품들은 소설 주인공 이름을 제목으로 쓴다.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리나』처럼. 『GV빌런 고태경』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플롯도 전통을 잘 따른다. 주인공이 문제적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 인물과 가까워지다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를 통해 마침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 구조다. 전형적이고, 전형적인 만큼 보편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플롯이다.


어떤 의미에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같기도 하다. 현대에 영화를 찍는 감독이 고전 영화의 기법들을 모두 교과서적으로 차용해 적용해 만든 영화 같이 『GV빌런 고태경』은 근대소설의 교과서적 문법을 착실하게 따른다.



어김없이 극장 맨 뒤에 앉아 대학노트를 펼친 고태경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영화를 뒤에 앉아서 보세요?"

"나는 내용에 몰입해서 보려는 게 아니라,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전체를 보려는 거야."

그는 두 시간 동안의 영화 관람이 유희가 아니라 공부 시간인 것처럼 말했다.


『GV빌런 고태경』, 109쪽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고태경이 정말 흥미로운 인간인가. 필경사 바틀비처럼 관심을 가질만 한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처음에는 그저 이 GV 빌런이 어떤 사고를 또 벌일까, 이게 궁금했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고태경 역시 조혜나와 마찬가지로 감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망생이었음이 밝혀지며 한단계 더 나아가며 전환된다. "도대체 저 빌런은 왜 저렇게 무례할까?"에서 시작된 질문은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영화를 떠나지 못할까?"라는 질문으로 전환된다. 그는 여러 역경을 거쳐서 결국 극장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었던 셈이다.



극장이 곧 그의 영화학교였다.


『GV빌런 고태경』, 120쪽


고태경은 늘 베레모를 쓰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을 대학노트를 무릎에 올리고, 이 베레모를 벗는다. 노트까지야 그럴 수 있다쳐도, 베레모는 굳이 왜 벗는가. 실내라서? 그렇다기에 고태경은 식당 같은 곳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는다. 우리가 쓴 모자를 구태여 벗을 때에는 예의를 차릴 때이다. 프로야구에서 데드볼을 맞춘 투수가 타자에게 모자를 벗어 정중히 사과하듯이.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것이, 타인의 노력이 담긴 영화를 보는 것이 고태경에겐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다음 대사에서 그의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그 사람 싱정 알아. 누구보다 잘 알아. 그 사람 인생은 영화야. 종교 영화야. 십 년 넘게 무언가를 기다리고 손에 잡힐 듯하다. 멀어지고 반복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돼."


『GV빌런 고태경』, 88-89쪽.



그의 영화인적 태도는 후배였던 민현석 대표에게 면박을 당했을 때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태경은 눈치보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지금 뭐하는 거야?"

"네?"

고태경의 무표정한 얼굴에 잠시 화가 스쳤다.

"조 감독. 감독 일 똑바로 해. 카메라를 들이대야지."


『GV빌런 고태경』, 171쪽


그는 면박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조혜나보다도 더 냉정하게 영화를 생각한다. 조혜나가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카메라를 들이밀지 못하자, 오히려 "찍으라며", "너의 일을 하라고" 다그친다. 그가 얼마나 영화에 진지한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를 갈 거냐는 물음에, 극장으로 간다! 이런 점에선 영화를 꿈꾸다 끝내 영화가 된 남자 같기도 했다. 무엇이든지 인생에 환유하는 건 시시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선 "life goes on"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역경과 좌절이 찾아와도 인생은 흘러간다. 아무리 멈추고 싶고, 아무리 별로인 장면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저 흘러가는 영화처럼.


또한 『GV빌런 고태경』의 결말이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운다>나 『급류』보다도 좋았던 점은 바로 그런 그의 태도와 열정이 남긴 채로 끝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조혜나 이 영화, <GV빌런 고태경>으로 대박을 쳤다거나, 고태경이 마침내 모든 역경을 딛고 감독에 데뷔했다면 나는 이 소설이 그저 그렇게 기억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태경은 아직도 그 태도를 유지하며 도전하는 중이고 (작중에서 본인이 조혜나가 만드는 다큐가 그런 방향에서 끝나면 어떨까 했던 것처럼.) 조혜나도 도전 중이다. 그리고 결말은 마치 영화의 엔딩처럼 그가 다시 돌아와 GV에서 질문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엔딩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려진다.


또한 그는 <GV빌런 고태경>의 GV와 결말에서 자신의 태도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지점이 아닐까, 하면서도 깊이 공감되는 장면이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GV빌런 고태경』, 278쪽



조 감독, 영화를 만들자! 극장에서 다시 영화를 상영하자. 우리는 빛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빛을 보려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지.


『GV빌런 고태경』, 291쪽




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없다, 그러나 우리만의 바르샤바 영화제는 있다.



"재능이니 뭐니 하는 건 이십대에나 하는 말 아냐? (…) 꾸준히 계속하는 의지야말로 진짜 재능이지."

"어쭙잖은 재능은 저주라던데요."


『GV빌런 고태경』, 117쪽


어른이 되다는 건 수많았던 꿈의 목록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종 "꿈을 포기 못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이 같다는 말을 칭찬으로도, 비난으로도 사용한다. 『GV빌런 고태경』은 1차적으로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고태경이란 인물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너도 한 번쯤 이런 애정을 품은 대상이 있지 않았느냐고. 이 "영화"의 자리에 자신이 좋아하는 걸 넣어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GV빌런 고태경』을 좋아할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문학을 겹쳐 생각했다.



또한 애매한 재능의 문제는 많은 사람을 심란하게 한다. 꿈이냐, 현실이냐. 이 문제에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아마도 재능일텐데, 재능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메시의 재능을 가진 이가 농구에 꽂혀서 농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마이클 조던이 골프나 야구를 했던 것처럼.


근래 오래 곱씹는 말이 있다. "세상에 애매한 재능은 결코 없다." 재능이란 건 단연 눈에 띄어서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못하다면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일에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순 없다. 그렇다면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좋아하는 일에 꾸준히 도전하고 사랑하는 게 재능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저궤도인간>의 동재처럼 말이다.



저 이제 알겠어요. 내가 뭘 하려는 건지요.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꼭 성공으로 결론나지 않아도 돼요. 돈 좀 못 벌면 뭐 어때. 그냥 … 내가 좋아하는 일을 … 계속 좋아하는 거. 그게 제가 이번 생에 하기로 한 일이에요.

<제궤도인간> 6화


그러한 엉덩이 재능은 제법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은 "바르샤바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장면이다. 조혜나는 수상에 대한 희망도, 사전 예고도 없어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 자신이 없을 때 뜻밖의 수상을 한다. "내가 없는 시상식에서 수상하게 된 것, 내 노력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호명해준 것." 구태여 고흐를 끌여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생은 언제나 작은 일이더라도 뒤늦은 반응을 얻기도 하고, 아예 그런 반응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딘가에선, 우리의 노력을, 우리의 꿈에 대한 정진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 재능은 없어도, 세상에서 B급으로 치든, C급으로 치든 상관없는 우리만의 바르샤바영화제가 있는 게 아닐까?



* * *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학교 조 교수는 끝까지 1차원적인 악인으로만 묘사된다. 바르샤바영화제도 뜬금없기는 했다. 그런데 고태경과 대비하려면 필요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문제는 바르샤바에서 종현의 태도였다. 갑작스런 변화는 너무 납작하다. 이전까지 다정하고 착하게만 그려졌던 종현이 갑자기 너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군다. (차라리 이전 연애에서 결별의 원인이 혜나가 아니라 종현에게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가 된다면 좀 더 이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혜나는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밝힌다.) 바르샤바에서의 종현은 화가 나서 화난게 아니라, 주인공인 혜나에게 고난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마치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말이다.


모든 시네필이 감독이 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감독은 시네필이다. 이를 본격적인 기류로 만들어낸 "새로운 물결"이라는 사조가 프랑스의 누벨바그다. 작중에서 누벨바그의 기수인 트뤼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트뤼포의 명언으로 알려진 '영화를 사랑하는 세가지 방법'이 언급된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만들어낸 오해다. 『GV빌런 고태경』에도 등장하는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정성일이 추천사를 썼는데, 여기서 자신이 어느 일본 잡지에 실린 트뤼포에 관한 글을 읽다가 오해해 한국에 이를 트뤼포의 말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는 말이 한국에는 폴 발레리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소설가 김영하 작가가 『빛의 제국』에서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작가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으며, 이는 폴 발레리가 아니라 폴 부르제의 말이라고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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