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일상>은 작가 세스 노터봄이 수십년간 1년에 몇 달 머무른다는 어느 섬에서의
기록이다. 바깥세상에서 잠시 돌아와 식물을 돌보며 그의 의식에 흐르는 생각들을
실었다.
1933년생의 이 할아버지가 좋다.
1965년생의 나와 공통점이 많다. 나무에 애정이 있고 어학과 클래식과 우주에 관심이
있다. 그 깊이에 난 비할 바 못 되지만.
그가 하늘을 보며 보이저호, 명왕성을 얼마나 멋진 문장으로 묘사하는지!
또 그가 탐독한 작가들과 작품들은 내가 알거나 읽은 것도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얼마전 신문에서 정혜윤이 그랬다.
코로나 시절 여행에 갈증날때면 읽었다는 세스 노터봄의 "보석같은" (그녀 표현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 찾아보니 품절이다. 중고는 비싸다!
여행이 자유로와지면 그 바람을 타고 재출간되길 바란다.
...나는 예전에 헬름스의 귀한 책《파암 아니에스크보프Fam Ahniesgwow》를 산 적이 있다. 책에는 LP 한 장이 포함되어 있었고 암스테르담 집에 있는 그LP를 들은 지는 50년도 넘었지만, 목소리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던 숲은 기억한다. 서로 얽혀 있어서 즉각 알아들을수 없는 단어들, 뒤죽박죽 엉킨 목소리들,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와 같은 부류의 책이었다. 그것은 실험이지만 오도해서는 안 되는 실험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그는1960년의 그 에세이에 "실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용어는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술은 타고난 대로가아니라 실험적일 때 그 가능성이 있다."라고 썼다. 아도르노는 쉬운 작가나 시상가가 아니다. 그의 독일어는 때로는 지금의 내 정원만큼
캄캄하게 보인다. 자신을 작곡가로 여기기도 그는 그 에세이에서 헬름스와 연결하여 음악에 관해 쓰는데, 거기에 언급된 일련의 작곡가들이 ‘신Sinn‘ - 여기서는 ‘의미‘ 또는 이해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점은 요즘 절반의 지하세계가 나머지 절반을 제거하느라 바쁜 네덜란드에서는 어쨌든분명한 모습이긴 하다. 또한 아도르노는 슈토그하우젠도 그맥락을 한계값Grenzwert 으로 본다고 쓴다. 그로써 나는 그것을 여기까지‘ 그리고 ‘더는 그만‘이라는 의미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그는 다다이스트에 관해 및 단락을 더 할애한다. ‘언어의 표현과 의미 사이의 충돌은 다다이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표현을 위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는 한 가지다. 카네티가 조이스를 언어 다다이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가? 아도르노는 복잡한 추론을 통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카네티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그는 프루스트에서 시작해 비자발적인 기억과 프로이트의연상법을 거쳐 조이스에 도달하는데, 표현과 의미 사이의긴장을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 연상법을 이용한다. 왜냐하면 무롯 연상이란 고립된 단어들에 들러붙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치는 무의식적 표현에서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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