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 피플
앨리슨 에스파흐 지음, 김보람 옮김 / 북로망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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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북로망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직접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며칠 전 북로망스에서 책 한 권을 받았습니다. 앨리슨 에스파흐의 <웨딩 피플>. 겉은 깊은 블루인데 표지를 넘기면 안쪽이 환한 핑크였습니다. 푸른 밤하늘에서 분홍빛 새벽으로 넘어가는 듯한 이 색의 대비가, 책을 다 읽고 나니 그저 디자인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한 장으로 압축한 그림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의 절벽 위, 19세기풍 고급 호텔이 무대입니다. 화요일부터 그다음 주 월요일까지, 한 결혼식 주간 동안 벌어지는 일을 요일별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 호텔에 빈손으로 들어온 여자가 있습니다. 이혼한 대학교수 피비. 짐 가방 하나 없이 녹옥색 원피스만 걸치고 와서, 프런트 직원이 짐을 묻자 “없다”고 답합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조용히 생을 마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읽는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죽으러 온 사람의 이야기인데, 페이지마다 웃음이 터집니다. 카일리 제너와 킴 카다시안 농담, 21달러짜리 땅콩호박 토스트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사람들, 159개나 되는 입가심 숟가락. 결혼식 문화의 허세를 콕콕 찌르는 위트가 어찌나 촘촘한지,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한 편을 보는 듯한 장면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러면서도 그 웃음 바로 밑에는 죽음과 상실이 깔려 있습니다. 가벼운 농담 한 줄과 무거운 슬픔 한 줄이 같은 문장 안에서 서로를 붙들고 있는데, 그 솜씨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읽다가 몇 번이나 멈칫했습니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신부 라일라입니다. 100만 달러를 들여 완벽한 결혼식을 준비하는 여자. 프랑스에서 6개월 전에 배송받은 샴페인 잔까지 갖췄지만, 정작 결혼식 당일 차가 평범한 세단이라는 이유로 입구 계단에 주저앉습니다. 죽으려는 여자와 완벽을 좇는 신부. 정반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일주일을 함께 보내며, 서로가 쓰고 있던 가면을 한 겹씩 벗겨 냅니다.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변화의 순간들이 결코 무겁게 쏟아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특히 오래 들여다본 대목 세 군데를 적어 봅니다.


첫 번째는 화요일, 도착 장면입니다. 모두가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러 온 호텔에 죽으러 온 사람이 섞여 있다는 설정 자체가 지독한 아이러니입니다. 피비를 기다리는 호텔을 “위엄 있는 늙은 개”에 빗대고, 체크인 줄에 선 사람들을 “티타늄 급 강도의 튼튼한 여행객”이라 부르는 문장들에서, 이 작가가 슬픔을 다루는 손길이 얼마나 가벼운지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벼움은 결코 얕은 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는 목요일, 처녀파티가 열리던 날의 낚시터입니다. 피비가 “위험한 추락”이라 적힌 경고판을 무시하고 절벽으로 내려가 어부를 돕고, 떠돌이 개와 달리기를 하고, 어두운 물속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끌어 올립니다. 깊고 캄캄한 물에서 환하고 충격적인 세상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의 ‘살려는 의지’가, 죽으려던 사람의 마음에 처음으로 균열을 냅니다. 죽는 건 쉽지만 하루를 더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큰 행운이라는 깨달음.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회복의 첫걸음이 되는 그 흐름이 무척 좋았습니다.


세 번째는 일요일, 본식입니다. 자동차 한 대 때문에 무너진 라일라가 사실은 더 깊은 진실을 꺼내는 장면. “게리 씨는 저를 안 사랑해요.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곧이어 자기도 게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인정합니다. 이때 피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입을 닫습니다. 어설픈 거짓말로 자기 상태를 둘러대던 화요일의 피비와 가장 멀어진 지점이 바로 이 침묵이었습니다.


그 직후, 피비가 라일라에게 건네는 들러리 축사가 이 책에서 제가 가장 아낀 대목입니다. 피비는 “이 결혼식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에요. 전 이곳에 죽으러 온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을 봐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라일라에게, “라일라 씨 덕분에 이번 주 내내 저한테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있었어요. 예쁜 원피스를 입을 이유가, 무언가의 일부가 될 이유가 있었어요. 평생 잊지 않고 고마워할게요”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눈물을 흘리는 그 자리에서, 죽으러 온 사람이 살아갈 이유를 결혼식에서 찾았다는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닿게 됩니다.


결말은 어느 하나 깔끔하게 매듭짓지 않으면서도 환합니다. 라일라는 면사포를 벗어 들고 결혼식을 멈추고 캐나다로 떠나, 어머니와 푸틴을 먹는 여자가 됩니다. 게리는 묘지에서 잠든 밤을 지나 처음으로 자기 감정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피비는 호텔의 ‘겨울 관리인’이 되기로 합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피비는 로비 책장에 <댈러웨이 부인>을 다시 꽂고, 처음 왔던 날처럼 세상을 무대 소품처럼 바라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이내 암적색 옷을 입은 남자에게 팁을 건네고, 세상 속으로 걸음을 내딛”습니다. 빈손으로 들어왔던 여자가 여행 가방을 끌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는 장면. 시작과 끝이 정확히 마주 보며 닫히는 이 마무리가 오래 남았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현대로 옮겨 놓은 듯한 작품이라는 평이 괜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단 며칠의 시간 안에 한 사람의 생 전체를 압축해 담는 솜씨가 그렇습니다. 다만 울프가 의식의 흐름으로 무겁게 가라앉는다면, 에스파흐는 같은 깊이를 유머로 떠올립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화 한 편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절벽 위 호텔, 화려한 결혼식, 정반대의 두 여자, 그리고 죽음과 웃음이 손을 맞잡는 대사들. 실제로 소니 픽처스에서 영화화가 확정됐다고 하니, 이 장면들이 스크린에서 어떻게 살아날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책장을 덮으며 든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완벽한 결혼식이 아니어도, 빈손으로 도착했어도, 하루를 더 살아내는 일에는 그 자체로 값이 있다는 것. 무언가를 빈틈없이 ‘진행’시켜야만 제대로 살고 있다고 믿어 온 마음에, 이 책은 조용히 다른 길을 일러 줍니다.


여름의 초입, 바깥 공기가 점점 무르익는 이맘때 읽기에 잘 어울리는 책이었습니다. 햇살은 환한데 마음 한쪽이 자꾸 서늘해지는 날이 있다면, 그런 날 이 호텔에 며칠 머물다 오시면 좋겠습니다.웨딩피플 속으로...


죽으러 온 여자가 남의 결혼식에서 살아갈 이유를 되찾는, 죽음을 말하면서 이만큼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드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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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장례식
조현선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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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마음이 가라앉는 날에는 이상하게도 죽음을 다룬 이야기에 더 손이 갑니다. 무겁게 짓누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만히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여 주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북로망스 출판사를 통해 직접 받아 본 조현선 작가의 <나의 완벽한 장례식>이 꼭 그런 책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표지에 먼저 마음이 갔습니다. 주황빛과 보랏빛이 부드럽게 어우러진, 한눈에 봐도 세련된 디자인이었습니다. 작은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등불 같은 불빛, 챙 넓은 모자를 쓴 누군가의 실루엣. 어딘가 동화 같으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끄는 그림이었지요. 그런데 그 그림 위에 얹힌 제목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나의 완벽한 장례식>. '완벽한 장례식'이라니, 도대체 어떤 장례식이 완벽할 수 있다는 걸까. 그 호기심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저처럼 나이가 들수록 '장례식'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도 장례식장을 두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돌아오는 길마다, 떠난 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자꾸 떠올리게 되더군요. 그런 마음이 이 책의 제목에 더 깊이 끌렸던 이유였습니다.


이야기는 작은 병원 곁에 딸린 매점에서 펼쳐집니다. 갓 스무 살이 된 나희는 분식집을 하시는 아버지의 형편이 넉넉지 않아, 대학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하려고 이 병원 매점의 야간 근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새벽 두 시, 이 매점에는 평범하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그림자가 없고, 존재감이 희미한 사람들. 바로 세상을 떠난 이들입니다.


나희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능력으로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래전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한동안 닫혀 있던 그 능력이, 스무 살 무렵 다시 열린 것이지요. 처음에는 무서워서 음악 소리를 키우고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나희가, 차츰 이 손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과정이 이 책의 큰 줄기입니다.


이 죽은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떠나기 전 미처 끝내지 못한, 마음에 걸리는 단 하나의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중에서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인물 김수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죽는 순간 마음을 꽉 잡고 있던 한 가지만 기억해. 죽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진짜 원하는 바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표지에도 적힌 이 문장은,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무게가 사뭇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끝내 붙잡고 놓지 못하는 그 한 가지는 무엇일까. 나희는 그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마지막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고, 그렇게 그들은 비로소 가벼운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납니다.


가장 마음이 오래 머문 대목은 떠난 청년 윤성우와 작은 떠돌이 개 황구의 이야기였습니다. 녹슨 목걸이를 한 작은 개가 며칠째 매점 앞을 맴돌며 주인을 애타게 찾고, 윤성우가 그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책장을 한참 붙들고 있었습니다. 떠난 존재들 사이에도 남는 온기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책이 단순한 '귀신 이야기'에서 한 발 더 깊어지는 지점은 후반부입니다. 새벽 두 시마다 매점 시계 밑에 말없이 서 있던, 어딘가 무섭게만 느껴지던 할머니 유령. 그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결로 접어듭니다. 누군가를 오래 미워해 온 사람의 마음과, 그 미움 뒤에 가려져 있던 사연이 천천히 포개지는 과정은 직접 읽으며 따라가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다만 한 문장만은 옮겨 두고 싶습니다. 매점 사장님 미수가 오래 묻어 둔 가족 이야기를 꺼내며 무심하게 던지는 말입니다.


"평생 나한테 연락하려고 애썼다고는 하더라. 근데 뭐, 내가 사느라 바빴으니까."


그 짧은 말 속에 얼마나 많은 회한이 눌려 있는지요. 그리고 작가가 그려 내는 통찰 한 줄이 오래 남습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상황에 오랜 세월 처해 있던 사람은 제정신이기 힘들다." 누군가를 끝내 미워하기 전에, 그 사람이 견뎌야 했던 시간을 한 번쯤 헤아려 보게 만드는 문장이었습니다.


결말은 굳이 옮기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느 날부터 그 무섭던 할머니 유령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고, 미수가 "다 잘 해결됐어"라고 말하며 웃는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웃음에는 행복과 슬픔이 함께 묻어 있어서 나희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행복과 슬픔이 함께 묻어 있는 웃음. 떠나보냄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완벽한 장례식'이 무엇인지, 마지막 장을 덮으며 비로소 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도 미안함도 없이 가볍게 떠나는 일, 그리고 남은 이들이 끝내 마음을 정리하고 서로를 놓아 주는 일. 그렇게 잘 떠나보내는 모든 순간이 곧 완벽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읽는 내내 무서운 책이라기보다 따뜻한 책이었습니다. 동화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다가도, 어느 대목에서는 가만히 책을 덮고 한참을 앉아 있게 했습니다. 어디 하나 모나지 않게, 차분하게 잘 마무리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기억이 있는 분, 마음 한편에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을 품고 계신 분, 혹은 저처럼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잘 떠나보낸다는 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싶은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무겁지 않게, 그러나 오래 마음에 남는 위로를 건네는 책입니다.


읽고 나니 김수영의 그 말이 자꾸 맴돕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 단 한 가지만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장 꽉 붙잡고 있는 그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이 책은 그렇게, 살아 있는 우리에게 가만히 질문을 건네는 듯합니다.


이 글은 북로망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직접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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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한정판)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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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처음 쥐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책이 참 야무지다는 것이었어요. 일반 판형보다 한 뼘쯤 작은데 두께는 제법 묵직하고, 표지가 단단한 견장정이라 손바닥에 올려 두면 작은 사전 한 권을 든 기분이 듭니다. 흰 바탕 위에 초록 고양이가 사뿐히 걸어가고, 그 둘레로 둥근 안경과 펼친 책, 술병과 잔이 판화처럼 새겨진 표지를 보고 있으면, 이 안에 담긴 이야기가 어떤 분위기인지 펼치기도 전에 짐작이 가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책인데, 받자마자 표지를 한참 들여다본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1905년에 발표한 데뷔작이고,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작 직접 읽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100년도 더 된 소설이라 하면 어딘가 점잖고 어렵겠거니 했는데, 첫 문장에서부터 그 짐작이 보기 좋게 빗나가더라고요.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이 한 줄에 이야기 전체의 목소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인간에게 몇 번이나 내던져진 끝에 겨우 영어 교사 구샤미 선생의 집에 흘러든 이름 없는 고양이가 화자예요.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바로 그 낮고 무심한 자리에서 인간을 올려다보기 때문에 인간이 평소에 감추고 사는 우스움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처음 인간을 마주한 장면에서 고양이는 서생의 얼굴을 두고 "털로 소복해야 할 얼굴이 주전자처럼 매끈"하고, 한가운데 뚫린 구멍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고 묘사해요. 담배 피우는 사람을 이렇게 그려 놓으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풍경이 별안간 기이하고 우습게 보입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혼자 웃었어요. 식구들은 주인을 대단한 공부벌레로 알고 있지만, 고양이가 옆에서 지켜본 주인은 서재에서 책에 침이나 흘리며 낮잠 자는 사람입니다. 고양이는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적어요. "선생이란 실로 편한 직업이다. 이렇게 잠만 자면서도 밥벌이가 된다면 고양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이 갑자기 그림에 빠져서는, 친구가 전한 화가의 말 한마디에 무릎을 치고 정작 자고 있는 고양이를 그려 놓고는 눈도 색깔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대목도 그렇고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그럴듯하게 받아 안고 흉내 내다 우스워지는 모습이, 어쩐지 남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압권은 주인과 그 친구들이 모여 끝없이 떠드는 장면들이에요. 미학자 메이테이가 들이닥쳐 박학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안주인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옛 현인들의 말을 줄줄이 끌어와 만담처럼 늘어놓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소크라테스까지 동원해 그럴듯한 인용을 쏟아 내는데, 진지한 고전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지는 광경이 묘하게 통쾌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다 지켜본 고양이가 내리는 결론에 이 작품의 속내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움직이면서, 재미있지도 않은 일에 웃고, 시답잖은 일에 기뻐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존재."


세상을 등진 척 초연하게 굴지만 속에는 명예욕과 욕심이 그득한 사람들. 고양이는 그들을 "바람 부는 대로 수세미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표현해요. 웃다가 문득 멈칫하게 되는 건, 그 풍경 안에 나 역시 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아는 척하지만 외롭고, 체면을 지키느라 애쓰지만 사소한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모습이 100년 전 메이지 시대 지식인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거든요. 신용이니 체면이니 하며 비싼 담배 하나로도 자신을 포장하려는 사업가 산페이를 보면, 요즘 우리가 작은 물건들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는 풍경이 겹쳐 보이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유쾌한 풍자에서 멈추는 책은 아니에요. 웃음 뒤에는 늘 옅은 쓸쓸함이 깔려 있습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 감정이 짙어져요. 곁에 있던 검은 고양이가 죽고 사람들이 위패까지 만들어 독경을 올리는 장면을 지나면서, 그토록 활기차게 인간을 비웃던 화자마저 어느 순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즘은 외출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왠지 세상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간을 가장 멀리서 바라보던 고양이가 끝내 인간을 닮아 무뚝뚝해지는 거예요. 마지막에 고양이가 사람들이 마시다 남긴 술에 취해 맞는 결말은, 웃음 끝에 남는 허망함을 조용히 매듭짓습니다.


옮긴이가 책 끝에 남긴 한마디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지나치게 웃다 보면 눈물이 찔끔 나오는 건 재미 때문만이 아니라, 웃음이 지나간 후의 허망함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이요. 이 책이 꼭 그렇습니다. 한바탕 웃고 나면 그 자리에 작고 서늘한 무언가가 남아요.


번역도 그 분위기를 살리는 데 큰 몫을 합니다. 김난주 번역가의 문장은 고양이 특유의 점잔 빼는 말투와 능청을 자연스럽게 살려, 100년 전 일본 서재의 공기를 어색함 없이 읽히게 만들어요. 낯선 인명이나 옛 상품 이름에는 짧은 주석을 달아 두어, 모르고 지나칠 뻔한 농담의 묘미까지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큰 사건이 휘몰아치는 소설은 아니에요.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이어지면서 인물들의 성격과 시대의 풍경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방식이라, 빠른 전개를 기대하면 다소 더디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느긋함이 오히려 이 책의 맛이라고 생각해요. 서두르지 않고 사람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누군가를 조금 더 여유롭게 바라보게 되거든요.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스쳐 지나가는 데 익숙해진 요즘, 이 책은 묘하게 위로가 됩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단정하기 전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우스움과 외로움, 그 서툶을 먼저 들여다보게 만들거든요. 거창한 교훈을 내세우지 않고, 그저 고양이의 눈을 빌려 우리를 슬쩍 비춰 줄 뿐인데도 말이죠. 고전이 어렵게만 느껴져 펼치기를 망설였거나, 일상에 지쳐 잠시 한 발 물러서서 사람을 바라보고 싶은 때라면, 이 작은 한 권이 생각보다 든든한 동행이 되어 줍니다.


여름 문턱에 접어든 요즘, 창을 열어 두면 더운 바람에 섞여 매미 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표지의 초록 고양이가 걷던 그 계절이 지금이구나 싶어집니다. 무더위에 마음마저 늘어지는 날, 굳이 무언가를 얻으려 애쓰지 않고 그저 고양이를 따라 사람 구경하듯 천천히 넘기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에요.


이름 없는 고양이의 눈을 빌려, 웃다가 문득 쓸쓸해지는 인간의 풍경을 그려 낸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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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바꿔도 인생이 바뀐다 ㅣ 인생 시리즈 2
김태환 지음 / 새벽녘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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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가 좀 특이했어요. 신문 한 면을 오려 온 것처럼 위쪽엔 영문 카피가 박혀 있고, 가운데 그림 속 사람은 한쪽으로 엉킨 실타래를, 다른 쪽으론 햇살과 새싹을 떠올리고 있더군요. 그 아래로 짧은 글들이 칸칸이 들어차 있었고요. 보통 자기계발서 표지가 큰 제목 하나로 승부를 본다면, 이 책은 펼치기도 전에 하고 싶은 말을 그림과 글로 미리 늘어놓은 셈이었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책인데, 손바닥만 한 크기에 두께도 얇아서 들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었어요.


<생각만 바꿔도 인생이 바뀐다>는 김태환 작가의 책이고, <말투만 바꿔도 인생이 바뀐다>에 이은 두 번째 권이라고 합니다. DAY 0에서 DAY 30까지 서른한 개의 짧은 글로 나뉘어 있어요. 처음엔 긍정적으로 살라고 등 떠미는 책이려니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결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생각 한 조각이 어떻게 기분을 정하고 행동을 만들고 끝내 삶의 방향까지 틀어버리는지를, 심리학과 뇌과학에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얹어 담담하게 풀어가더군요.


가장 먼저 손이 멈춘 꼭지는 〈바꿀 수 없는 일에 마음을 낭비하지 마라〉였어요. 살다 보면 이미 쏟아진 물을 두고 한탄하거나 내리는 비를 멈추려 애쓰는 식으로, 손을 떠난 일에 매달릴 때가 많죠. 책은 우리가 가장 많이 마음을 흘려보내는 두 대상을 '타인의 생각'과 '지나간 과거'로 짚는데, 이 대목에서 솔직히 뜨끔했습니다.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누군가의 속을 억지로 돌려보려 하거나, 한참 전 실수를 오늘까지 끌고 와 곱씹는 일. 따져보면 둘 다 제가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더라고요. "심리적 평온함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나온다"는 문장 앞에서, 그동안 평온이라는 걸 너무 수동적으로만 여겨왔구나 싶었어요.


회복탄력성을 다룬 〈인생이 무너져 내렸을 때 필요한 마음가짐〉은 또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게 타고나는 기질인 줄 알았는데, 이 책은 훈련으로 키우는 '마음의 근육'이라고 말해요. 그러면서 회복이 빠른 사람은 무너진 자리에서 거창한 계획부터 세우는 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을 먼저 한다고 일러줍니다. 이불을 개고, 물 한 잔을 데워 마시고, 잠깐 걷는 것. 그런 작은 성취가 모여 다시 일어설 힘이 된다는 거예요. 솔직히 이 부분이 제일 위로가 됐어요. 무너진 사람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각오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살아냈다는 작은 인정이라는 말이, 어딘가 다정하게 들렸거든요. 책은 혼자 버티지 말라는 당부도 빼놓지 않습니다. 곁의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건 약함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라고요.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실패다"라는 메리 픽포드의 말이 이 꼭지 끝에 놓여 있었습니다.


나이를 이야기하는 〈나의 한계를 규정짓는 '나이'에서 벗어나라〉에 이르러서는 한 번 책장을 덮고 천장을 봤어요. 저자는 정작 발목을 잡는 게 늦은 나이가 아니라 나이를 한계로 못 박는 낡은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65세에 전 재산을 잃고도 일흔에 성공한 사람, 일흔이 훌쩍 넘어 처음 붓을 든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제 마음을 친 건 그런 위인담보다 이 문장이었어요. "노화는 단지 주름이 늘어날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고, 더 이상 도전하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서서히 늙어가기 시작한다." 마흔을 한참 지나온 사람으로서, '이 나이에 뭘'이라는 말로 슬그머니 닫아둔 문이 몇 개쯤 떠올랐습니다. 늙는 건 햇수가 아니라 호기심을 접는 일이라는 말. 한동안 가만히 곱씹었어요.


아쉬움을 굳이 꼽자면, 등장하는 본보기들이 워낙 크게 성공한 인물들이라 가끔 거리가 느껴졌어요. 하루하루 평범하게 버티는 사람의 이야기가 조금 더 섞였더라면 손이 더 잘 닿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건 흠이라기보다 취향에 가까운 말이에요. 짧은 호흡으로 핵심만 또렷이 짚어주는 책이라, 부담 없이 읽으면서도 매번 한 가지쯤 생각거리를 쥐여주는 점은 분명한 장점이었으니까요.


다 읽고 남은 한마디는 결국 '구분'이었어요. 어쩔 수 없는 것은 평온하게 내려놓고, 바꿀 수 있는 오늘에 마음을 쏟는 것. 돌아보면 일이든 사람 사이든, 우리는 손쓸 수 없는 일에 너무 많은 기운을 흘려보내며 지내죠. 그 단순한 사실을 다그치지 않고 차분히 일러준다는 것만으로 이 작은 책은 제 몫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서평단으로 받아 읽은 책들 가운데, 이 한 권은 잠들기 전 머리맡에 두고 한 꼭지씩 넘기기 좋은 자리에 놓이게 됐어요. 새 걸음을 떼기가 망설여지는 분, 지난 일을 자꾸 되감으며 마음이 가라앉는 분이라면 가까이 두고 천천히 펼쳐보셔도 좋겠습니다.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6월이에요. 한낮 볕은 따갑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선선한 바람이 남아 있죠. 이런 날 얇은 책 한 권을 들고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이, 어쩌면 굳어 있던 생각의 방향을 슬며시 틀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평온하게 내려놓고, 바꿀 수 있는 오늘에 마음을 쏟게 하는 단정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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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설계자들 -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바이오해킹까지, 실리콘밸리 영생 프로젝트를 추적하다
알렉스 크로토스키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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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영생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것도 공상과학 작가나 종교인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이들이 말이지요. 띠지에 박힌 "실리콘밸리의 영생주의자 선언"이라는 문구가 어딘가 신비롭게 느껴져서, 안에 어떤 이야기가 들었을지 궁금한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습니다.


<불멸의 설계자들>은 BBC와 채널 4를 거친 방송인이자 학자인 알렉스 크로토스키가 실리콘밸리의 '영생 프로젝트'를 추적한 취재기입니다. 일론 머스크, 피터 틸, 샘 올트먼, 제프 베이조스, 비탈릭 부테린 같은 이름들이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죽음 자체를 정복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 욕망이 혈장 교환이나 바이오해킹을 넘어 '장수 국가'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 구상으로까지 뻗어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차근차근 펼쳐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표지의 나비가 그제야 이해되더군요. 푸른 날개는 살아 있는 생명의 것인데 몸통은 정교한 금속 마디로 분해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태어나 늙고 사라지는 존재를 고장 난 기계처럼 뜯어고치려는 사람들, 이 책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첫 챕터 '엔지니어 증후군'부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저자는 이 욕망의 뿌리가 의외로 깊다고 짚어요. 르네상스 시대에 다 빈치가 인체를 "자연에서 가장 위대한 도구"라 불렀고, 데카르트가 인간을 '기계적인 몸'과 '비물질적인 정신'으로 갈라놓으면서, 사람들은 금속 부품 다루듯 신체를 해체하고 통제할 일종의 허가를 얻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굳어진 관념이 어찌나 뿌리 깊은지, 진화의학자 랜돌프 네스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는 누구도 이 말이 비유임을 인지하지 않는" 수준이 되어버렸다고요. 신체는 기계이니 고장 나면 고치면 그만이라는 발상이지요.


그런데 저자가 들려주는 '구글 독감 트렌드' 사례가 이 믿음에 슬쩍 균열을 냅니다. 구글은 검색어를 추적하면 질병관리센터보다 빠르게 독감 유행을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결국 실제보다 두 배나 많은 환자를 내다보는 과대 오류에 빠졌어요. 한 평론가의 표현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GFT 초기 버전의 절반은 독감 탐지기였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겨울 탐지기였다." 사람이 아플 때 모두 똑같은 검색어를 쓰리라 가정한 결과였지요.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핵심을 짚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오로지 데이터만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컴퓨터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숫자로 분해할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게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물음입니다.


책의 한가운데에서 만난 한 가족의 이야기는 마음을 무겁게 눌렀습니다. 조지아주 남부에 사는 몰리와 크리스 부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캠핑카에서 살며, 생계를 위해 주말마다 두 시간씩 줄을 서서 혈장을 기증합니다. 미국은 세계 혈장 공급량의 약 70%를 생산하는 나라이고, 그 피는 "미국 극빈층의 생명줄"로 불린다더군요. 자신이 내준 혈장이 부유한 이들의 '역노화 상품' 재료로 흘러간다는 말을 들은 몰리는 격분합니다. "억만장자들이 내 혈장을 원한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내야 할 거예요." 그리고 그녀가 덧붙인 한마디가 책장을 넘긴 뒤에도 자꾸 되살아났어요. "죽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것 같네요."


저자는 여기에 차가운 숫자들을 나란히 놓습니다. 같은 도시 안에서도 우편번호에 따라 기대 수명이 갈리고, 런던에서는 동쪽으로 지하철역을 두 정거장 갈 때마다 기대 수명이 1년 이상 줄어든다는 통계 앞에서는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게다가 AI 진단 모델의 토대가 되는 유전자 자료의 분석 대상자 중 80~90%가 유럽계 혈통이었다니, 그 정밀의학이라는 것이 애초에 인류의 극히 일부만 들여다본 셈이지요. "장수는 웰빙과는 무관한 이유로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저자의 이 진단은 우리에게도 결코 먼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사는 일이 결국 지갑의 두께에 달린 미래라면, 그 미래는 소수의 것일 뿐일 테니까요.



이 책의 진짜 무게는 마지막 장에 가서야 드러났습니다. 평생 의사이자 면역학자로 죽음의 최전선에 섰던 저자의 아버지가, 정작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극도로 쇠약해져 자력을 잃는 모습을 지켜본 이야기였어요. 종교도 내세에 대한 믿음도 없던 저자는 두 부모를 떠나보낸 뒤 길을 잃고 몇 년간 죽음에 매달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임종을 앞둔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들을 만나며 다다른 결론은 이랬습니다. "그들이 답을 기술에서 찾았다면 나는 사람에게서 찾았다."


책을 닫으며 저자는 4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 속 길가메시 왕은 영원한 삶을 찾아 떠나지만, 여인숙 주인 시두리는 이렇게 일러주지요. "그대가 찾는 영원한 생명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끝이 오기 전까지는 삶을 즐겨라. 그대 손을 잡아주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내를 품에 안아 기쁘게 만들어라.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결국 불멸을 얻지 못한 왕은 겸허해져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저자가 여기에 단 문장이 책의 마지막 울림이었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보다 오래 남는다. 결국 우리를 불멸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이다."


그 반대편에는 'Don't Die'라는 종교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억만장자 브라이언 존슨이 서 있습니다. 그가 던진 말이 책을 덮은 뒤에도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인생 최고의 건강을 주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상태에 닿는 대가로 여러분은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알고리즘이 먹으라고 할 때, 알고리즘이 짚어주는 것을 먹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겠습니까?" 더 오래 사는 대가로 삶의 결정권을 알고리즘에 넘긴다면, 그렇게 늘어난 시간을 온전히 제 것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죽음을 정복하려는 사람들이 정작 죽음 자체에는 이상하리만치 호기심이 없다는 저자의 지적도 오래 곱씹게 되더군요.


읽는 내내 흥미로웠던 건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사례와 인물을 통해 술술 넘어간다는 점이었습니다.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펼쳐도 좋고, 부모님의 노년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거나 문득 제게 남은 시간을 헤아려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장에서 전혀 다른 울림을 받을 거예요. 영생이라는 거창한 화두를 빌려 결국 '잘 사는 일이 무엇인가'로 돌아오게 만드는 책이니까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이 책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실리콘밸리의 화려한 신기술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전혀 다른 자리에 와 있더군요. 죽음을 어떻게 미룰까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까를 생각하게 만든 한 권이었습니다.


해가 길어진 6월입니다. 저녁이 늦도록 환한 이 계절에는, 영원히 사는 법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졌어요. 길가메시가 4천 년 전에 들었던 그 충고처럼요.


죽음을 정복하려는 실리콘밸리의 욕망을 좇다가, 4천 년 전 길가메시가 이미 도달했던 결론으로 돌아오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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