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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한 나를 끌어내는 법
에이미 커디 지음, 이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하버드 교수도 "나는 가짜"라고 느꼈다,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서평
"때로 내가 직장에서 성공을 거둔 게 사실은 뭔가 착오가 있어서 잘못 평가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문장에 '예'라고 답할 직장인, 생각보다 많을 거 같아요.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실린 가면감정 측정 문항 가운데 하나인데, 저도 속으로 '예' 쪽에 동그라미를 치게 되더라고요. 아는 척, 괜찮은 척, 다 알고 있는 척. 하루에도 몇 번씩 짓는 그 표정에 심리학 이름까지 붙어 있다니 반갑기도 하고 조금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파워포즈라는 말도 이 책에 자주 나와요. 아재 귀에는 파워포인트 신기능처럼 들리기 딱 좋은 이름인데, 몸을 크게 펼치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더군요.
표지에는 연한 하늘빛 그물 같은 공간 한가운데, 무지개 망토를 두른 작은 실루엣이 한 팔을 번쩍 들고 서 있어요. 2017년에 처음 나왔던 책이 올가을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고, 원제는 〈Presence〉예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처음엔 살짝 겁이 났는데, 사람 사연이 많아서 생각보다 술술 넘어가는 편입니다.

책은 북카페 장면으로 문을 엽니다. 글을 쓰던 저자에게 점원 페테인이 다가와서, 의과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르기 전에 화장실에서 '원더우먼' 자세로 서 있었던 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고 고마워하는 장면이에요.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직했던 사회심리학자 에이미 커디는 2012년 테드 강연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자주 찾아온다고 하더라고요.
여기까지만 보면 밝은 성공담 같은데, 프롤로그는 금세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열아홉 살 대학 2학년 때, 친구 둘과 번갈아 운전하며 밤길을 달리다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와이오밍 주 한복판, 새벽 4시 무렵이었고, 뒷자리 침낭에서 자던 저자는 차 밖으로 튕겨 나갔대요. 외상성 뇌손상이었습니다. 의사들은 "대학을 졸업할 기대는 마세요."라고 했고, 6개월쯤 지나 찾아온 가까운 친구 둘은 "넌 분명 우리가 알던 예전의 그 친구가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친구들의 그 한마디가 참 아프게 들렸어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니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움에 죄의식까지 느꼈다고 하니까요. 남들이 하는 말의 절반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처럼 들렸다는 대목도 있어요.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저자는 사고 이전의 자신인 것처럼 지내려고 애썼고, 그 시절을 이렇게 돌아봐요.
"내가 마치 내 몸에 침입한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
공부하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학습 동아리에도 들어간 끝에, 동급생들보다 4년 늦게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기꾼.
이 단어가 책 전체를 꿰는 실 같아요.
4장으로 가면 이 단어가 연구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심리학자 클랜스가 오벌린대학 상담센터에서 만난 학생들은 시험 성적도 좋고 추천장도 많이 받은 학생들이었는데, 그런 학생들이 "제가 이 학교에 입학한 건 순전히 오벌린대학의 실수입니다"라고 말했대요. 클랜스와 동료 수전 임스는 이를 '가면현상'이라 부르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성취도가 높은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겼지만, 1985년에 이르러 남성도 똑같은 감정을 겪는다는 걸 알게 됐대요.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의 저자도 테드 강연 뒤에 자신이 가면을 쓴 것처럼 느껴진다는 메일을 수천 통 받았는데, 그중 절반은 남성이 보낸 거였다고 하네요.
같은 직장인으로서 오래 생각하게 된 대목은 강연을 마친 저자에게 다가온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의 고백이에요.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대요.
"사실 저는 매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제가 가당치도 않게 사업가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기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나이도 비슷하고, 아침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처지도 같아서 그런지 남 얘기 같지가 않았어요. 책에는 남자는 강인하고 늘 자신감에 차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자기불신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그 끝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남성은 이 짐을 비밀리에, 조용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짊어질 수밖에 없다."
회의 자리에서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한마디가 왜 그렇게 꺼내기 어려운지, 이 문장 앞에서 조금 알 것 같더라고요.
대학 행정처 직원 데이비드의 메일도 기억에 남아요. 실제로는 50점짜리인데 세상 사람들은 90점이나 받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상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 "아, 돌겠네. 진짜!" 한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다가도 짠해지더군요. 작가 닐 게이먼조차 처음 18개월 동안은 누가 와서 가짜에 사기꾼이라고 하면 "예, 맞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거라고 하니, 정말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인가 봐요.
클랜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이걸 '가면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대요. 증후군이나 콤플렉스, 정신 질병이 아니니까요.
"그건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거든요."
이 말이 은근히 위로가 됐습니다.
그럼 저자는 그 가면을 어떻게 벗었을까요. 실마리는 대학원 첫해의 한 장면에 있어요. 20분짜리 발표가 너무 두려워서 학업을 그만두겠다는 저자에게 상담사 선생님이 해준 말이 있거든요.
"설령 그게 잘하는 척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프롤로그에 나온 "진짜로 이루어질 때까지 진짜로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여기서 짐작이 갑니다. 하버드에서 "저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어요"라며 우는 여학생을 마주하는 장면도 이어지는데, 그 대목은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솔직히 처음엔 살짝 걸리는 마음이 있었어요. 자세 하나 바꾼다고 사람이 얼마나 달라질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책도 그 부분을 슬쩍 넘어가지는 않더군요. 면접관 앞처럼 도전이 한창 진행 중인 자리에서 파워포즈를 취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선을 긋고, 효과가 계속 이어지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까다롭고 어려운 질문임이 분명하다"고 털어놓기도 해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주니 귀가 더 열리더라고요.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 제일 손이 많이 갈 것 같은 장은 9장이에요. 까다로운 도전을 앞두고 몸을 크게 펼치라는 대목은 이렇게 맺습니다.
"도전이 기다리는 방으로 걸어 들어갈 때쯤이면 뇌도 온전히 활성화되어 있을 것이다. 일종의 준비운동이라고 생각하라."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몸을 펼 만한 곳으로 엘리베이터, 화장실, 계단을 꼽는 것도 현실적이고요. 사람들이 메일로 들려준 파워포즈가 도움이 된 순간들에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때, 비판적 평가를 받거나 주기 전, 그리고 직장에 사직서를 낼 때까지 들어 있어요. 마지막 항목에서는 괜히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직장인이 바로 써먹을 만한 건 '하루 종일 자세에 신경 써라' 쪽이에요. 한 시간에 한 번 스마트폰 알림으로 자세를 확인하고, 모니터 위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믿을 만한 동료에게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말해달라고 부탁하라는 식입니다. 마우스를 일부러 몸에서 먼 곳에 두는 동료, 양치질할 때 한 손을 허리춤에 대는 조교 이야기도 나와요. 사무실 공기가 서늘해지는 요즘 같은 철에는 이 문장이 딱 맞더군요.
"숄, 스카프, 담요, 카디건 따위로 몸을 감싸고 그 속에서 태아 자세로 웅크리지 마라. 차라리 옷을 여러 겹 껴입어라."
무릎 담요 덮고 동그랗게 웅크리는 게 겨울 사무실의 국룰인 줄만 알았는데 말이죠.
펭귄 팔 이야기도 있어요. 불안할 때 겨드랑이부터 팔꿈치까지를 옆구리에 붙인 채 팔 끝만 움직이는 자세인데, 저자가 괄호 안에 "독자도 이 동작을 지금 당장 해보기 바란다."라고 슬쩍 덧붙여 놨어요. 교수님이 강의하다 말고 시키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10장으로 넘어가면 자기넛지라는 말이 나와요. 거창한 결심 대신 작은 행동으로 스스로를 살짝 떠미는 방법인데, 이 문장이 참 좋았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넛지를 할 때, 이 사람은 건축가가 되고 동시에 건물이 된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한 초등학교에서 했던 실험도 흥미로웠습니다. 사실은 아무 근거도 없는 '성적이 오를 학생' 명단을 받은 교사들이 그 학생들을 더 많이 격려하고 학습 기회를 더 주었더니, 1년 뒤 정말 점수가 훨씬 좋아졌다는 내용이에요. 저자가 이어서 "이번에는 당신이 기업의 상사이고" 하고 물어오는데, 그 질문 앞에서는 직장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뜨끔할 것 같아요.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후반부에서 제일 정이 간 건 저자의 달리기 이야기예요. 해마다 새해가 되면 달리기 전문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가, 1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포기하곤 했대요. 그러다 딱 한 번만 달리기로 마음먹고, 기분 좋게 느낄 수 있는 속도로만 달렸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여행과 달리기를 엮으면서 트레일러닝의 즐거움도 알게 됐고요. 마라톤 완주는 앞으로도 못 할지 모른다면서 이렇게 덧붙여요.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게 중요하다."
조금 앞에 나온 시카고의 한 고등학교 이야기와도 이어지는 느낌이에요. 〈마인드셋〉의 저자 캐럴 드웩이 소개한 그 학교는 졸업하려면 꼭 들어야 하는 과목을 통과하지 못한 학생에게 '아직Not Yet'이라는 학점을 준대요. 아직이라는 두 글자에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회의 전마다 어깨가 움츠러드는 분이나, 잘해놓고도 "운이 좋았죠"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분이라면 꽤 반가운 책일 거 같아요. 심리학 연구 이야기가 많은데도 사람 사연이 촘촘히 끼어 있어서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9장의 자세 팁은 책상 가까이 두고 가끔 다시 펼쳐 보기 좋아서 소장할 맛도 나고요.
11월 첫 수요일이에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워져서 자꾸 몸이 움츠러드는 계절인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덕분에 어깨부터 한번 펴 보자는 마음이 드네요. 올해 달력도 딱 두 장 남았으니, 내년 결심은 거창하게 세우지 말고 딱 한 번씩만 해볼 생각이에요. 펭귄 팔은 펭귄한테 돌려주고요. 좋은 책 하나 만나서 이번 주는 가슴 펴고 걷는 기분입니다.
열아홉 살의 사고, 그리고 하버드 교수도 피해 가지 못한 가면감정을 지나, 몸을 펴는 작은 습관에서 자존감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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