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타는 미술관 - 그림과 연애하듯 살아가다, 감상X데이트코스X아트테크
김용임 지음 / 책이라는신화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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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봤습니다. 연분홍 바탕에 파스텔톤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앞을 검은 옷차림의 남녀가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지나갑니다. 도시는 납작한 일러스트인데 두 사람만 유화 질감으로 얹혀 있어서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갑니다. <썸타는 미술관>이라는 가벼운 제목과 정통 회화가 한 화면에 놓인 셈인데, 이 조합이 책의 성격을 미리 일러주더군요. 미술관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대신 걸어 들어가 볼 만한 거리로 낮춰 놓겠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지은이는 아트디렉터 김용임 씨입니다. 기업 비서실에서 최연소 팀장으로 일하다 그림 한 점을 만난 뒤 인생의 방향을 튼 분이라고 해요. 목차부터 미술관 구조를 그대로 빌려 왔습니다. 상설관에서 긴장을 풀어주고, 제1관에서 감정으로 그림을 만나고, 제2관에서 혼자 서는 시간을 다루고, 제4관과 제5관에서 예술가의 사랑과 명화 속 관계를 살핍니다. 뒤쪽 특별관은 국내 미술관 데이트 코스, 별관은 아트테크 정보로 방향을 틀고요. 판형과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며칠에 걸쳐 편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곳은 제2관이었어요. 도입에서 중국 경극의 변검을 끌어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바꿔 쓰며 산다는 이야기인데, 회사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친구와 가족 앞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범위를 넓히더군요. 돈 잘 버는 아빠, 다정한 엄마, 말 잘 듣는 자녀 같은 기대를 예로 들면서 저자 스스로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먼저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그 솔직함 덕에 방어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어요. 이어지는 문장이 이랬습니다.


"나에게 가장 무심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때가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몰라서라는 말이 뒤에 붙습니다. 마흔 후반쯤 되면 자기 관리라는 말을 건강검진 결과지로만 이해하게 되는데, 이 대목은 다른 쪽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저자는 외로움과 고독을 갈라놓습니다. 외로움은 연결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결핍이고, 고독은 스스로 고른 관계의 거리두기라는 겁니다. 앞엣것은 타율적이고 뒤엣것은 자율적이라고 정리한 뒤, 고독이 필요할 때 미술관이 최적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해요. 감춰진 나와 만나고 싶을 때 그곳으로 가라는 문장으로 챕터가 닫히는데, 함께 실린 워터하우스의 그림에서 프시케가 여는 황금 상자와 겹쳐 놓으니 뜻이 분명해집니다.


같은 관 뒤쪽에는 김환기의 점화가 나옵니다. 이 챕터는 저자가 겪은 두 번의 이별을 먼저 꺼내 놓아요. 오랜 이웃이자 인생 선배였던 분의 부고를 받고, 퇴원하면 콩국수를 사드리려 했는데 그날은 오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개인전에 못 갔다고 송구해하는 저자에게 인연이 될 때 만나면 된다고 답했던 화가와도 그렇게 헤어졌고요. 시간 날 때 보지요, 라는 흔한 인사가 이렇게 무거워질 수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검은 화면 위를 지나가는 선들을 두고, 평행하던 선이 다른 선과 만났다가 제 갈 길을 가는 그 스침과 헤어짐이 격조 있는 질서를 만든다고 읽어냅니다. 마지막 두 문장이 오래 남았어요.


"애도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는 아직이다."


제5관에서는 호퍼의 <룸 인 뉴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거실에 앉은 남녀가 나오는데 남자는 신문에 붙어 있고 여자는 건반에 손가락만 얹고 있어요. 저자는 이 장면을 두고 침묵에 여러 얼굴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친밀함일 때가 있고, 생각을 정리하려는 잠깐의 고요일 때가 있으며,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자존심일 때도 있다는 겁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나 단절로 대화를 접어버린 상태고요. 이 분류가 이 책에서 제일 쓸모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조금 아쉬웠어요. 침묵의 층위를 그렇게 세심하게 나눠 놓고서도 결론은 냉각된 관계 쪽으로 비교적 빠르게 되돌아갑니다. 저자 본인도 두 사람이 외출을 앞두고 잠시 앉아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열어 놓았으면서 말이죠. 오래 산 사이의 침묵에는 편안한 쪽도 분명히 있는데, 그 얼굴 앞에 조금 더 머물러 줬다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물론 이건 화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읽는 사람의 사정이 개입한 감상일 겁니다.


이어지는 곤살레스-토레스의 <제목 없음, 완벽한 연인>이 그 아쉬움을 얼마간 메워줬어요. 똑같이 맞춰 놓은 벽시계 두 개를 나란히 걸어둔 작품입니다. 처음엔 같은 시간을 가리키지만 하나가 빨라지고 하나가 느려지면서 결국 어긋나요. 저자는 사랑이 차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차이를 받아들이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씁니다. 완벽한 연인이라는 제목이 역설이라는 설명도 덧붙이고요. 도판 속 두 시계는 아직 거의 같은 자리에 있는데, 오른쪽 초침만 아주 조금 앞서 있습니다. 사진은 한 순간에 멈춰 있으니 어긋나는 과정 자체는 실물 앞에서만 볼 수 있겠더군요.


뒤쪽 별관은 결이 확 달라집니다. 아트테크 기본 상식을 다루는데, 시장 흐름을 태동기와 폭발기, 조정기로 나눈 뒤 지금을 재편기라 부르며 진짜들만 남은 생존자 리그라고 표현해요. 열풍이 지나간 자리를 냉정하게 보는 시선이라 믿음이 갔습니다. 그런데 인기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 미술품은 가치가 내려가는 일이 없다는 문장이 슬쩍 들어가 있어요. 바로 앞에서 경기침체로 구조 조정을 겪었다고 써놓고, 몇 줄 아래 리스크 항목에서는 잘못 접근하면 자금이 묶이거나 손실이 난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낀 이 단정만 홀로 붕 떠 있습니다. 투자 이야기는 제 몫이 아니라 판단은 접어두더라도, 나머지 서술이 워낙 조심스러워서 이 한 줄이 더 눈에 걸렸어요. 초보 컬렉터를 향한 마지막 조언이 숫자만 보면 피로해진다는 말이었던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애정이 곧 정보력이라는 문장 쪽이 이 책의 본심에 가까울 겁니다.


읽는 동안 미술 지식이 늘었다기보다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다시 보였다는 쪽이 정직한 소감이에요. 다만 혼잡을 피해 평일 오전에 가라는 조언은 두 군데에서 반복되는데, 주중에 묶여 있는 처지에서는 실행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폐장 한두 시간 전이라는 대안이 함께 적혀 있어서 그 문장을 접어 두었습니다. 미술이 낯설어 입구에서 망설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첫 장부터 편하게 들어갈 수 있을 테고, 오래 함께 산 사람과 말수가 줄었다고 느끼는 이에게는 호퍼와 두 시계 이야기가 다르게 읽힐 겁니다.


입추이자 8월의 한복판입니다. 밖에 십 분만 서 있어도 셔츠가 젖는 날씨인데, 이런 때야말로 서늘하게 관리되는 전시장이 고마운 계절이지요. 더위가 물러갈 즈음 가까운 미술관 한 곳쯤 다녀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여도 괜찮고, 오래된 사람과 나란히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표지 속 두 사람처럼 우산 하나 나눠 쓰고 말이죠.


그림 앞에서 어색했던 마음을 풀어주고, 혼자와 함께 사이의 거리를 다시 재보게 하는 미술관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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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우는 고전 12권 - 고전이 가르쳐준 리더의 자기 경영 법칙, 나의 존엄 리더의 서재 1
노진화 지음 / 진성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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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미색 바탕에 세피아 한 가지 색으로만 그려진 표지였습니다. 쌓아 올린 책 더미 위에 혼천의와 지구본이 놓이고, 그 둘레를 궤도선이 돌고 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자기계발서 특유의 강한 색이나 큰 약속 같은 것이 없어서, 오히려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표지였어요. 고서 느낌의 테두리 안에 붓글씨 같은 굵은 제목이 앉아 있는 모양새가 이 책의 태도를 미리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나를 세우는 고전 12권>은 노진화 저자가 카프카부터 스타인벡까지 열두 편의 고전을 오늘의 자기경영 언어로 옮긴 책입니다. 20년간 브랜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다 기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력이 곳곳에서 드러나요. 작가와 시대는 필요한 만큼만, 줄거리는 뼈대만 남기고, 곧장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넘어옵니다. 고전 해설서를 기대하고 펼치면 조금 당황할 수도 있겠습니다.


첫 장이 카프카의 <변신>입니다. 벌레로 변한 아침에 그레고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걱정이 기차를 놓쳤다는 사실이었다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저자는 산업화기 유럽의 공장과 기차,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속 톱니바퀴로 시야를 넓혔다가, 다시 소설 안쪽으로 돌아옵니다. 그러고는 소설에서 이런 대목을 끌어옵니다.


"나의 양친 때문에 참고 있으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래전에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빚이 족쇄가 되어 그만두겠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던 사람의 말입니다. 저자는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고 씁니다. 그 문장 앞에서 마음이 좀 무거워졌습니다.


이 장에서 오래 남은 건 소외를 정의하는 방식이었어요. 소외의 가장 잔인한 형태는 추방이 아니라 봉인이라는 것.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레고르는 가족의 명단에서 지워지고, 그가 없어도 집안의 일상은 그럭저럭 굴러갑니다. 방문 밖이 오히려 분주해진다는 서술이 특히 서늘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화살을 바깥으로만 돌리지 않습니다. 가장 깊은 소외는 내면에 있고, 타인의 잣대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쓸모로만 평가하기 시작하는 순간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고 못을 박아요. 조직이 사람을 벌레로 만들기 전에 제가 먼저 저를 벌레로 만든다는 문장이 이 장의 마침점입니다. 장 끝에 놓인 '리더의 노트'도 같은 자리를 짚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숫자로 점수 매겨진다고 느끼는 순간 딱 그 숫자만큼만 일하게 되고, 효율로만 사람을 재는 조직이 결국 가장 비효율적이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고요. 관리자 자리에 있는 분이라면 이 짧은 박스에서 한 번 멈추게 될 겁니다.


다섯 번째 장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입니다. 1941년에 미국 비자를 받고도 늙은 부모를 두고 갈 수 없어 떠나지 않았다는 한 문단이 이 장 전체의 무게를 지탱합니다. 이듬해 가족과 함께 끌려가 네 곳의 수용소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그는 부모와 아내와 형을 잃었어요. 수감번호 119104번.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었고, 벌거벗은 실존만 남았다고 책은 적습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면 앞 장의 그레고르가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쓸모가 다한 자리에서 사람이 어떻게 치워지는지를 두 텍스트가 다른 각도로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프랭클이 목격한 것은 붕괴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한 번 지급되는 빵 한 조각을 더 약한 이에게 양보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 굶주린 몸으로 막사 한쪽에서 노래하고 시를 읊던 밤의 기록이 함께 남아 있어요. 저자는 그것을 오락이 아니라 인간임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고 읽습니다. 해방 이후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풀려난 생존자들이 먼저 마주한 것은 기쁨이 아니라 환멸이었고, 돌아갈 집에는 가족이 없었으며, 세상은 이제 그만 잊고 살라고 말했다는 것. 세상의 무관심이 가장 잔인한 폭력이었다는 문장이 담담해서 더 아팠어요.


복수하려는 생존자들 앞에서 프랭클이 남긴 말이 이 장의 정점입니다.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견뎌온 것인데, 이제 와서 짐승이 될 수는 없다."


여기 붙은 '리더의 노트'가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위기에 빠진 사람에게 리더가 해야 할 일은 힘내자는 구호가 아니라, 함께 그 시간을 보내고 먹고 마시며 옆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저자는 씁니다. 어떤 처방보다 실행하기 어려운 조언이지요.


열 번째 장의 <동물농장>은 결이 또 다릅니다. 저자의 관심은 권력을 쥔 돼지들보다 그 아래 있던 이들에게 가 있어요. 특히 말 복서입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풍차 건설에 매진했고, 다른 동물들이 지쳐 쓰러질 때도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한마디로 자신을 채찍질했던 존재. 그의 좌우명은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였고, 성실함만이 그의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늙어 일할 수 없게 되자 도살장으로 팔려갑니다. 마차에는 도축업자라고 적혀 있었고요. 선전 담당 스퀼러의 발표는 이랬습니다.


"복서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동물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말을 믿었습니다. 저자는 조직을 무너뜨리는 것이 대개 불복이 아니라 복종이라고 정리하고, 무지와 냉소와 방관이 결합될 때 권력자가 더 큰 자유를 얻는다고 덧붙여요. 밀그램 실험을 2017년에 폴란드 연구팀이 다시 해봤더니 참가자의 약 90퍼센트가 마지막 단계까지 버튼을 눌렀다는 대목에서는 이 이야기를 옛날이야기로 밀어둘 수 없게 됩니다. 배급 축소를 조정이라 부르고 굶주림을 희생으로 포장하는 언어의 기술을 짚는 부분도 오래 남았습니다. 실패한 결정이 원래 그럴 계획이었다로 고쳐 쓰이고 떠난 사람의 기여가 조용히 지워지는 풍경은, 어느 조직에나 조금씩 있으니까요.


다만 읽으면서 한 군데 걸리는 데가 있었습니다. 저자는 복서를 질문이 없는 인물로 그립니다. 의심이란 없었고 오직 성실함만이 그의 언어였다고요. 그런데 같은 장 안에, 복서가 스노볼은 외양간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다고 말했다가 무시당하는 장면이 그대로 나옵니다. 자기 눈으로 본 것을 한 번은 입 밖에 냈던 셈이지요. 저자가 이 대목을 따로 짚지 않고 지나가는 게 아쉬웠어요. 물음이 아예 없던 사람과, 물었으나 묵살당한 뒤 다시는 묻지 않게 된 사람은 다르니까요. 후자 쪽이라면 그 침묵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여백을 남겨두는 게 이 책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남기겠다고 머리말에서부터 밝히고 있으니까요.


책 전체를 놓고 보면 열두 편이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같은 물음을 반복합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서 있는가. 그리고 저자가 내놓는 실마리는 거창하지 않아요. 정말 그런가라고 한 번 더 따져 묻는 힘, 그 한 문장입니다. AI가 판단의 상당 부분을 대신하기 시작한 지금, 판단은 위임할 수 있어도 책임은 위임할 수 없다는 이 책의 문장이 유난히 또렷하게 읽히더군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이 책을 만났습니다. 서평단 활동을 하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인 도서도 있고, 읽는 속도가 자꾸 느려지는 도서도 있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어요. 각 장 끝의 '사유의 질문' 네 개 때문이기도 합니다. 직함과 성과를 빼고 나의 정체성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같은 물음 앞에서는 답을 적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팀 단위로 함께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고요. 고전을 처음 펼치는 분에게는 부담 없는 입구가 되어줄 것 같습니다. 이미 읽은 분이라면 익숙한 인물이 전혀 다른 각도로 서 있는 걸 보게 될 거예요. 무엇보다 요즘 자기 자리가 흔들린다고 느끼는 분들께 조용히 건네고 싶은 도서입니다.


내일이 입추라는데 더위는 아직 한창입니다. 이런 계절에는 두꺼운 책이 잘 넘어가지 않는데, 이 한 권은 장마다 끊어 읽기 좋게 짜여 있어 한 장씩 천천히 읽었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어울리는 독서였어요. 매미 소리가 잦아들 무렵이면 아마 두 번째 권이 나오지 않을까 기다려집니다.


쓸모로 자신을 증명해온 사람에게, 열두 편의 고전이 그 아래에서도 남는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묻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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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앵글 독서법 - 누구나 독서 고수가 되는 3단계 읽기 혁명
김미경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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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받았을 때 봉투가 하나 더 들어 있었습니다. 빨간 봉투 안에 저자가 손으로 쓴 편지가 접혀 있었고, 표지를 열어 보니 사인도 있었어요.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받아봤지만 이렇게 정성이 담겨 온 경우는 드물어서 봉투를 한동안 들여다봤습니다. 편지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대한민국 전역에 가득해지기를 바란다는 문장이 있었는데, 인쇄된 홍보 문구로 만났다면 그냥 지나쳤을 말이 손글씨로 오니 다르게 읽혔습니다.


표지는 편지와 결이 사뭇 다릅니다. 채도 높은 노랑 위에 굵은 검정 제목이 정면으로 서 있고, 한가운데 여러 겹으로 포개진 삼각형이 분홍에서 초록으로 번져 나갑니다. 아래 검정 띠에는 빠르게 읽고, 쉽게 이해하고, 강력하게 기억하라는 문장이 박혀 있고요. 솔직히 처음엔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속독을 내세운 자기계발서는 대체로 사람을 다그치는 쪽이라, 펼치기도 전에 뒤로 물러서게 되거든요. 그런데 <트라이앵글 독서법>은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힘을 뺐습니다.


편지에 3단계를 꼭 적용해서 읽어달라는 당부가 있어서 그대로 따라 해봤어요. 1초에 1페이지씩 넘기는 워밍업은 처음엔 영 어색했습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이걸 왜 하나 싶었고요. 그런데 몇 차례 반복하니 이상하게 손이 가벼워졌습니다. 지금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미리 정해두니 진도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더군요. 2단계에서 핵심 단서에 동그라미를 치며 읽을 때는 눈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감각이 있었고, 3단계에서 동그라미만 따라 다시 볼 때 앞에서 흐릿했던 문장이 조금 또렷해졌습니다. 각 단계를 세 번씩 돌린다는 구체적인 방식은 본문에 들어가서야 알게 됐습니다.


4장은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다정한 대목입니다. 이해가 안 되면 넘어가면 안 된다는 믿음, 저자는 그것이 우리를 책에서 멀어지게 만든 가장 큰 착각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한 문장이 막히면 거기 멈춰 서고, 그러다 이 책은 나에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고, 결국 덮어버린다는 설명은 제 경험과 거의 그대로 겹쳤습니다. 책장 한쪽에 앞부분만 손때가 묻은 채로 꽂혀 있는 책들이 떠올랐고요.


"이해는 선행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이 진단이 위로가 되는 까닭은 책임의 방향을 옮겨놓기 때문입니다. 못 읽은 이유를 개인의 끈기에서 찾지 않고 방법의 문제로 돌려주니까요. 저자는 반복이 이해를 만든다고 말하면서, 억지로 짜낸 이해와 반복이 선물처럼 데려다주는 이해를 구분합니다. 맥락 없이 붙잡은 부분적 이해는 파편 한 조각일 뿐이라는 말도 함께 놓여 있는데, 나무를 들여다보느라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비유가 표지 문구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숲에서 나무로, 그리고 다시 숲으로. 그 한 줄이 전체 설계도였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았습니다.


7장은 성격이 또 다릅니다. 금을 팔아 책을 사라는 제목부터 기세가 셉니다. 한 권씩 사지 말고 열 권을 함께 사라, 올해 열 권을 읽겠다면 백 권을 사라, 백 권이 목표라면 천 권을 사라. 읽는 속도로 밀어붙이던 목소리가 여기서는 사들이는 규모로 옮겨 갑니다.


이 대목에서는 저도 걸음이 느려졌습니다. 저자가 그 무게를 모르지는 않아요. 뒤에 붙은 문답에서 열 권을 한꺼번에 사는 일이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만만치 않다는 질문을 직접 받아, 새로운 항구로 떠나는 항해에 비용을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답하거든요. 열 권 중 한 권이라도 나를 끌고 가는 밧줄이 되어준다는 대답에는 수긍이 갑니다. 다만 그 답이 도착하는 곳은 결국 마음가짐이라, 책을 둘 공간이 넉넉지 않은 살림이나 매달 정해진 예산 안에서 움직이는 형편에는 그대로 옮기기 어려운 부분이 남습니다. 저는 이 장을 읽으면서 동네 도서관과 중고서점을 함께 떠올렸어요. 열 권을 모두 소유하지 않더라도 같은 주제로 여러 저자를 나란히 놓아보는 시도는 해볼 수 있으니까요. 저자가 짚은 핵심도 소유의 규모보다는 한 사람의 관점에 갇히지 않는 데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같은 장에서 뜻밖에 마음이 풀린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사들인 책을 책상에도 거실에도 침대 머리맡에도 쌓아두고, 눈에 거슬리고 발에 걸리게 하라는 권유예요. 작정하고 읽지 않아도 되고 지나다 제목만 힐끗 봐도 된다고 합니다. 펼치지 않은 채 쌓아두기만 해도 제목이 신호를 보내고, 언젠가 그 신호가 책장을 열게 만든다는 것이죠. 사둔 책이 밀려 있어 새 책 앞에서 괜히 미안해지는 사람에게 이건 꽤 큰 사면입니다. 앞에서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짐을 덜어주더니, 여기서는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의무까지 풀어주는 셈이에요. 열 권이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질문이 다른 책의 답이 되고, 그렇게 책들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순간을 독서의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설명도 오래 남았습니다.


목소리가 가장 낮아지는 곳은 장 사이에 끼어 있는 문답 코너입니다. 본문이 선언에 가깝다면 이쪽은 저자가 존댓말로 조용히 건네는 이야기예요. 같은 분야 열 권을 어떤 비율로 채우면 되느냐는 질문에, 입문서 몇 권 전문서 몇 권 하는 식의 공식 대신 자기 삶에서 지금 채워야 할 결핍을 먼저 분석한다고 답합니다. 손에 잡히는 배분표를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허전할 수도 있는 답변인데, 뒤에 이어지는 문장 때문에 이 코너를 몇 번이나 다시 봤습니다.


"저의 책 읽기는 생존 독서입니다."


읽고 싶은 책이나 베스트셀러에는 눈을 돌리지 못한 채 생업에 맞춘 읽기를 해왔다고, 좋아하는 소설이나 시는 육십 대부터 읽을 생각이라고 저자는 적어두었습니다. 지금은 시를 조금씩 낭독하고 외우는 중이라고요. 삼십 년을 현장에서 버틴 이력이 성취의 목록이 아닌 미뤄둔 것들의 목록으로 적혀 있는 걸 보면서, 이 안내서가 왜 이렇게 급하게 등을 미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필요한 것만 읽어온 세월을 가진 사람의 말이라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튼튼한 울타리도, 변함없이 지지해 준 친구도, 앞으로 나아갈 때 켜져 있던 신호등도 책이었다는 문장이 과장 없이 들렸어요.


7장 중간의 사진 페이지에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놓여 있습니다. 책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도와준다는 문장인데, 금을 팔아서라도 책을 사라는 선언 바로 곁에 이 말이 배치된 것이 좋았습니다. 결국 이 한 권이 세는 대상은 권수가 아니라는 뜻으로 읽혔거든요.


다 읽고 나서 편지를 다시 펼쳐 봤습니다. 마지막 바람이 학교 쪽을 향해 있더군요. 교실에서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를, 책 읽기가 어려운 누군가에게 이 방법이 하나의 기술이 되기를. 부록에 태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이어지는 생애주기 로드맵과 워크시트가 붙은 이유가 그제야 이해됐습니다. 저자가 그리는 그림은 독서 고수 몇 사람의 탄생보다 책장을 편하게 펼치는 사람들이 늘어난 풍경 쪽에 가까워 보입니다.


물론 이 방식이 모든 종류의 책에 통할지는 저도 판단을 미뤄두고 있습니다. 정보를 다루는 실용서에서는 확실히 효율이 있었는데, 문장 자체를 천천히 맛봐야 하는 소설이나 시집 앞에서 1초에 1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좀 더 해봐야 알 것 같아요. 저자도 시는 낭독하고 외운다고 했으니 책의 성격에 따라 다른 속도를 쓰고 있을 텐데, 그 구분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좋아하지만 요즘 들어 진도가 유난히 더디다면 이 안내서가 도움이 될 겁니다. 서점에서 사놓고 다 읽지 못해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분이라면 7장의 권유만으로도 한숨 돌리게 될 테고요. 아이에게 책을 쥐여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잔소리만 늘고 있다면 부록의 로드맵을 먼저 펼쳐보셔도 좋겠습니다.


8월의 한복판입니다. 낮에는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계절이죠. 이런 날씨에는 두꺼운 책을 붙들고 씨름하기보다 1초에 1페이지씩 넘기는 워밍업으로 시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읽어내겠다는 마음을 놓으니 책이 조금 만만해졌고, 만만해지니 손이 갑니다. 이 도서가 남긴 가장 큰 소득은 그 가벼움이었습니다.


<트라이앵글 독서법>은 빨리 읽는 법을 알려주면서, 잘 읽어야 한다는 짐을 함께 덜어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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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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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지난주에 받아 두고 여태 붙들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일 마키아벨리>가 그렇습니다. 두께 때문은 아니었어요. 한 절이 두어 쪽으로 끝나고, 설명이나 사례도 거의 붙지 않습니다. 결론만 남긴 짧은 글 백스무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구성이라 마음먹으면 하루에도 다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너 절을 지나면 속도가 저절로 떨어집니다.


먼저 아쉬웠던 점부터 적어 두겠습니다. 모든 절이 단정문의 연속으로 쌓이다 보니, 여러 편을 이어서 읽으면 리듬이 비슷하게 들립니다. 힘은 세지만 예외를 품을 여백은 좁아요. 사람이 늘 계산으로만 움직이지는 않고, 뒤늦게 도착한 마음이 그래도 고마웠던 기억이 저에게는 분명히 있거든요. 원전을 오늘의 말로 다시 쓴 책이어서 어디까지가 마키아벨리의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옮긴 이의 해석인지 궁금해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절 제목 아래에 출발이 된 원전의 장과 절이 작게 표기돼 있어 확인할 길은 열려 있지만, 그 확인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 자체가 이 도서의 성격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표지 이야기도 해야겠네요. 흰 바탕에 먹으로 그은 옆얼굴, 이마 자리에 삼각형 하나, 그 안에 눈이 뜨여 있습니다. 색이라고는 검정과 흙빛뿐이에요. 그림 속 시선이 정면을 향하지 않고 비스듬한 곳에 걸려 있다는 점이 한동안 눈에 밟혔습니다. 사람을 마주 보는 눈이라기에는 각도가 어긋나 있고, 사람을 읽어내는 눈이라기에는 표정이 담담합니다.


<위버멘쉬>를 쓴 어나니머스의 두 번째 고전 재해석입니다. <군주론> 한 권에 기대지 않고 <로마사 논고>와 <피렌체사>까지 함께 읽어, 여러 저작에 흩어져 있던 사유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었다고 해요. 인간 본성, 권력의 법칙, 생존 전략, 운명과 성공. 네 개의 장에 서른 절씩 담겨 있습니다.


제1장 앞쪽, 늦은 선의를 다룬 절에서 걸음이 멈췄습니다.


"인간은 호의의 크기보다 타이밍을 믿는다."


평소 거리를 두던 사람이 궁지에 몰린 뒤에 손을 내밀면 받는 쪽은 감사보다 의심을 먼저 꺼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도움이라도 도착한 시각이 다르면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이어지는 대목은 더 서늘합니다. 신뢰는 위기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위기가 오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다는 것. 한 번의 선물이 오래된 무관심을 지우지 못한다는 표현 앞에서는 제 지난 몇 해를 셈해 보게 됐습니다.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마음이 언제 도착했는지까지가 관계의 실체더군요.


제2장에서는 곁에 둔 사람이 지도자를 증명한다는 절을 따로 표시해 뒀습니다.


"잘못된 인사는 운명이 아니라 판단의 실패다."


무능한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그의 무능보다 그를 앉힌 사람의 무능이 먼저 드러난다는 진단입니다. 뒤이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하나로 압축해요. 그가 누구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가. 자기 이익부터 셈하는 사람은 이미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다는 말이 뒤따릅니다. 여기까지는 위정자의 이야기로 읽히지만, 보상이 부족하면 불만이 자라고 권한이 지나치면 야망이 자란다는 대목에 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연차가 쌓이면 누구나 사람을 고르고 배치하는 자리에 서게 되고, 그 선택은 결국 자기 실력의 기록으로 남습니다. 조직은 바깥의 적보다 안에서 잘못 앉힌 사람 때문에 먼저 흔들린다는 문장으로 절이 닫히는데, 이 자리에서는 위로보다 경고 쪽이 컸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가장 위험한 적이 된다는 절은 제목만 보면 냉소에 가깝습니다. 실제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배신의 뿌리를 미움에서 찾지 않고 욕망에서 찾거든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신뢰와 함께 바람도 자란다는 것. 은혜가 배신을 막아 주지 못하는 이유도 담담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받은 것을 기억하기보다 아직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보니까요. 다만 저자는 배신이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지는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등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쪽은 배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신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놓고도 끝내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절을 닫습니다.


뒤쪽 두 장으로 갈수록 화살의 방향이 바뀝니다. 멈춰야 할 순간을 아는 것이 진짜 실력이라는 절에서는, 사람들이 실패해서 무너지기보다 성공한 뒤에 멈추지 못해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승리가 사람을 대담하게 만들고 그 대담함이 손쉽게 오만으로 바뀐다는 것. 한 번 맞은 판단이 다음에도 맞으리라 믿는 순간 성공이 함정으로 변한다는 흐름입니다. 긴장이 풀리고 경계가 사라질 때 운이 조용히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는 구절은 이 책에서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표현이었어요.


바로 뒤에 놓인 절도 결이 같습니다. 큰 사람은 자리가 아니라 역할을 선택한다는 이야기요. 로마에서는 어제 최고 권한을 쥐었던 사람이 오늘 다른 이를 돕는 일을 굴욕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앞에 서느냐보다 가장 필요한 곳에 적합한 사람이 서는 일이 중요했으니까요.


"현실은 직책보다 역할을 먼저 요구한다."


앞에 설 줄만 아는 사람은 절반만 성장한 사람이라는 진단이 이어집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직함이 하나둘 붙었다가 언젠가는 떼어지기도 하는데, 그 과정을 실패의 목록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차가운 책이라는 인상으로 펼쳤다가 다 읽고 나니 그렇게만 부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도서의 위로는 등을 쓸어 주는 종류가 아닙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서 덜 다치게 하는 쪽입니다. 호의를 베풀고도 오해받아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제1장 앞쪽에서 자주 멈추게 될 거예요. 조직 안에서 사람을 뽑고 맡기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제2장이 유난히 따갑게 읽힐 테고요. 다만 따뜻한 문장으로 마음을 데우려고 펼친 독자에게는 결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아 읽었습니다. 서평단 활동을 하다 보면 순하게 흘러가는 책을 주로 만나게 되는데, 이번처럼 읽는 사람의 판단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안내서를 만나면 자세가 달라지더군요. 밑줄을 긋는 대신 여백에 제 생각을 적어 두게 됐습니다.


입추가 코앞인데 더위는 아직 물러날 기미가 없습니다. 매미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지고 해가 길어 저녁이 늦게 옵니다. 이런 계절에는 마음이 풀어지기 쉬운데, 이 한 권은 그렇게 풀린 마음을 조금 붙잡아 줍니다. 짧은 글 한두 편 읽고 덮어 두었다가 며칠 뒤 다시 펼치기에 알맞아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바뀌는 때까지 곁에 두고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믿음을 거두게 하는 대신, 그 믿음이 무엇 위에 서 있었는지 확인하게 만드는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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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츠바이크의 위대한 투자 원칙 - 40년간 시장을 이긴 월스트리트 전설의 투자법
마틴 츠바이크 지음, 송미리 옮김 / 이레미디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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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은 바탕에 금빛 선 하나, 그리고 황소의 뿔. 표지 자체는 단정한데 겉을 두른 문구들은 목소리가 큽니다. 1987년 블랙 먼데이 예측이라는 이력이 맨 앞에 놓여 있으니 그럴 만합니다. 정작 책을 펼치면 그 화려한 수식과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문장들이 이어집니다.


<마틴 츠바이크의 위대한 투자 원칙>의 저자는 자신을 어느 학파에도 넣지 않습니다. 통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쓰는 실무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판단을 통화정책과 금리, 테이프가 보여주는 모멘텀, 투자 심리라는 세 축으로 나눕니다. 비중 배분이 독특합니다. 종목을 고를 때는 기준의 90퍼센트가량을 펀더멘털에 기대지만, 시장 전체의 방향을 가늠할 때 펀더멘털의 몫은 10퍼센트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기업을 보는 눈과 시장을 보는 눈에 아예 다른 도구를 배정해 두는 방식입니다.


타이밍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저점에서 사서 고점에서 판다"는 오래된 통념을 해체합니다. 다우가 4,000까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4,300에 매수하고, 6,000을 노리는 대신 5,700에 매도하면 수익 확률이 90퍼센트에 이른다는 계산이 제시됩니다. 완벽한 지점을 맞히려는 시도가 오히려 확률을 깎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계산 과정 자체는 단순한데, 그 단순함이 통념을 밀어내는 데는 충분히 쓰입니다.


책 전체를 지탱하는 문장은 두 개뿐입니다. 연준에 맞서지 말 것, 그리고 추세에 맞서지 말 것.


통화 지표를 0점에서 8점까지 매기고 모멘텀을 재는 4% 모형의 점수를 더해 하나의 종합 점수로 만드는 방식은 지금 기준으로도 명료합니다. 매수와 해제를 가르는 임계값이 왜 하필 그 숫자에 놓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얇게 느껴졌습니다. 1979년부터 1981년 사이의 데이터로 다듬어진 기준선이 지금의 시장 구조에서도 같은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책은 여기에 답하지 않고, 검증은 읽는 사람에게 넘어옵니다.


심리 지표를 다루는 장의 서두에는 P. T. 바넘 이야기가 나옵니다. 관객이 나가지 않아 회전이 막히자 출구에 '퇴로'라는 표지판을 세워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일화입니다. 겨냥하는 것은 군중의 발걸음입니다. 약세장 바닥에서는 악재가 줄지어 나오지만 연준이 신용을 풀고 금리를 낮추면 상승은 이미 시작되고, 강세장 초반 여섯 달은 기업 이익이 줄어드는 구간인데도 수익률이 가장 높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좋은 실적이 곧 주가 상승이라는 월스트리트식 사고가 전체적으로 틀렸다는 주장은 처음에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시장이 미래를 미리 할인한다는 원리로 되짚으면 앞뒤가 맞습니다. 저자는 그 흐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대중은 정확히 잘못된 시점에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공매도를 다룬 장은 가장 논쟁적인 부분입니다. 수익은 제한되고 손실은 무한하다는 통념을 담보 구조와 강제 청산으로 반박하고, 결국 파산할 종목이라면 어느 가격에 진입하든 "80%와 98%는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저자는 앞서 매수 쪽에 걸어둔 규칙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추세는 당신의 친구다. 테이프와 싸우지 마라." 방향이 반대여도 규칙은 하나라는 태도가 이 책의 일관성입니다. 그리고 장 끝에서 저자 스스로 문을 닫아겁니다. "그러나 일반 투자자에게 공매도를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적은 뒤, 숙련된 투자자의 보조 전략으로 본다고 선을 긋습니다. 자기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대목에서 저자에 대한 신뢰가 붙었습니다. 물론 배경은 미국 시장입니다. 호가 제한이나 세제 설명은 국내 제도와 결이 다르고,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은 책 바깥의 과제로 남습니다.


번역과 편집도 성실합니다. 하락하는 종목에 포지션을 계속 쌓는 방식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옮긴이가 각주로 신용 사용 시의 위험을 따로 짚어둡니다. 저자가 지나가듯 넘긴 자리에 안전장치를 하나 더 놓은 셈입니다.


정작 오래 남은 것은 지표 쪽이 아니었습니다. 매수가보다 10에서 20퍼센트 아래에 스톱을 걸어두라는 조언, 그리고 성공을 정의한 짧은 한 줄입니다. "성공이란 수익을 내고 손실을 피하는 것이다." 뒤에는 이런 말이 붙습니다. "무엇보다 편안한 밤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숫자를 오래 다뤄본 사람이라면 이 문장의 무게를 짐작할 겁니다. 반토막 난 자산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두 배가 필요하고, 그 두 배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손실이 발생한 며칠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규칙을 미리 정해 판단이 흔들릴 자리를 좁혀두는 방식은 결국 시간을 아끼려는 장치입니다.


아쉬운 점도 적어둡니다. 지표를 매일 계산해 점수를 갱신하는 작업량은 전업으로 시장을 보는 사람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본업이 따로 있는 독자가 이 체계를 그대로 옮겨오기는 어렵고, 책도 그 부담에 대해서는 별다른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통합 모형의 표를 눈으로 따라가다 중간에 멈추게 되는 순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오래 읽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개별 종목을 고르는 요령 이전에 시장 전체의 방향을 재는 순서를 알려주고, 그 순서를 독자가 직접 검증하도록 밀어붙입니다. 차트와 지표 용어가 낯선 단계라면 앞부분에서 속도가 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수가 흔들릴 때마다 근거 없이 결정을 바꿔온 경험이 있다면, 자기 기준을 다시 세우는 재료로 쓸 만합니다.


시장의 소음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계절에 데이터라는 건조한 언어를 붙들어보는 일에도 나름의 쓸모가 있습니다.


흔들리던 판단에 점수를 매기는 법을 알려주는 책, <마틴 츠바이크의 위대한 투자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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