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11가지 법칙
체탄 바갓 지음, 이선미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세 얼간이 원작자가 알려 주는 코끼리 먹는 법 | 체탄 바갓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서평


배고픈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배달 앱 화면을 노려보고 있어요. 주문은 30분째 감감무소식이고, 앱 속 작은 오토바이 아이콘은 1km 떨어진 곳에서 꼼짝도 안 하고, 기사에게 건 전화는 두 번 다 통화 중입니다. 이 사람이 영화 (세 얼간이)의 원작자라니, 첫 장면부터 웃음이 나더라고요.


자기계발서 첫 장면치고는 꽤 배고픈 출발이죠.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체탄 바갓이 자기 삶을 밑천 삼아 쓴 자전적 자기계발서예요. 부제가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11가지 법칙'인데 코끼리 먹는 얘기까지 나온다길래, 처음엔 대식가를 위한 다이어트 책인가 했네요. 10월 첫 화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따끈한 게 당기는 요즘이잖아요. 제목은 차가워도 책 속은 김 나는 커리 냄새로 가득해서 계절이랑 은근히 잘 맞는 거 같아요.


형식부터 좀 특이합니다. 저자가 혼자 칠판 앞에 서서 강의하는 게 아니라, 배달 기사 비라즈 슈클라와 밥상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흘러가거든요. 출판사 소개를 보니 비라즈는 저자의 옛 모습을 일부 담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하더라고요. 소설가가 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답게 규칙들이 장면 속에 녹아 있어서 교과서 넘기는 기분은 별로 안 들었어요.


책은 2014년 뭄바이 반드라 거리에서 시작해요. 영화 (투 스테이츠)가 극장에 걸려 있고,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엔 그의 책이 줄지어 있고, 차기작 신문 광고비로만 2,000만 루피(옮긴이 주석으로 우리 돈 약 3억 2천만 원)를 쓰던 시절이에요. 그런데 정작 그 정점에서는 어떻게 거기까지 왔는지도 몰랐다고 털어놓더군요. 어린 시절은 괴로웠고, 자란 시골도 딱히 도움이 되는 곳은 아니었다고 하고요. 10년이 지나 쉰 살 가까이 돼서야 겨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는데, 여기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돌아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이 잘 안 되는 건 사십 대 후반 직장인도 비슷하거든요.


그러고는 대뜸 이렇게 못을 박아요.

"세상은 도움을 베풀기 위해 다정한 시선으로 우리를 따스하게 보듬어 주는 곳이 아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 밥상머리에서 들은 것과 어른이 돼서 마주하는 세상은 다르다는 얘기예요. 매정하고 거칠다는 말까지 덧붙이고요.

드디어 벨이 울립니다. 문 앞에는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청년이 옆구리 살이 삐져나올 만큼 작은 빨간 조마토 티셔츠를 입고 땀범벅이 된 채 서 있어요. 저자는 그 앞에서 "3일 동안 굶고 나서야 사과를 발견한 석기 시대 원시인"처럼 음식을 낚아채는데, 이 비유에서 소리 내서 웃었네요. 그런데 청년이 저자의 두 손을 맞잡고 배달 후기는 제발 나쁘게 남기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는 순간, 웃음이 쏙 들어가더라고요.


펑크가 났다는 오토바이, 두 번 다 통화 중이던 전화, 자기 발끝만 내려다보는 눈.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그다음 식탁이에요. 30분 뒤에 화상 미팅이 잡혀 있는데도 저자는 비라즈를 집 안으로 들이고, 접시와 숟가락을 꺼내 라즈마 커리와 쌀밥을 덜어 줍니다. 한자리에 앉기를 한참 머뭇거리던 비라즈가 겨우 앉아서 꺼낸 말이 "절 이렇게 대접해 준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입니다"였어요. 저자의 대답은 짧아요. "괜찮아요. 식사 시간이 외롭지 않아서 저도 좋네요." 대단한 명언도 아닌데 저는 이 두 줄이 참 좋았습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될 때가 있잖아요.


밥상에서 나오는 비라즈의 사정은 녹록지 않아요. 역사학 석사까지 마친 스물일곱 살 청년인데, 8년을 만난 여자 친구 아르피타가 다른 사람에게 떠났다고 합니다. 한 달 수입이 1만 8,000루피인데 뭄바이에서는 슬럼가 방 한 칸 월세만 8,000루피라서, 다음 월급날까지 남는 게 없다고 하고요. 인스타그램에서 본 새 남자 친구는 BMW를 몬다는데, 비라즈는 "제 직업도 변변치 않으니, 좋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저도 잘 알아요"라고 말해요. 삶의 의미까지 놓아 버린 듯한 말이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읽는 쪽도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비라즈의 하루 중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장면이 있어요. 퇴근 시간 꽉 막힌 길을 10km, 40분 동안 달려 빤 두 개를 배달했더니 손님이 문 앞에서 5초 만에 먹어 치웠다는 얘기요. 빤은 빈랑 잎에 곡물이며 과일, 향신료를 싸서 씹어 먹는 인도 길거리 음식이라고 옮긴이 주석이 알려 주더군요. 공들인 일이 몇 초 만에 소비되고 끝나는 허무함은 직장인이라면 다들 한 번쯤 겪어 보셨을 거 같아요.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순서가 좋았습니다. 배달 기사라는 직업엔 잘못이 없고, 떳떳하게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이라고 먼저 말해 준 다음에야 이렇게 묻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이겁니다. 당신은 이 직업으로 충분한가요?"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라는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가는 질문이었어요.


중반의 '큰 꿈은 한 입씩' 장에는 저자 본인 얘기가 제일 진하게 담긴 거 같아요. 학창 시절 학교 잡지에 글을 쓰긴 했지만 작가로서 잠재력이 있다고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대요. 홍콩의 은행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고 하고요. "나는 기계 공학 전공에 MBA 소지자일 뿐인걸. 은행원일 뿐이라고." 이름표만 바꾸면 우리 회사 탕비실에서도 충분히 들릴 법한 혼잣말이에요.


저자의 처방은 코끼리 먹기입니다. 코끼리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서 한 번에 한 조각씩, 오랜 시간 동안" 먹는다는 거죠. 하루 한 페이지면 1년이면 한 권이라는 계산으로 출발했다가, 투자 은행 일이 바빠 그마저 버거우니까 주말엔 하루 두 페이지, 평일엔 사흘만 한 페이지씩 쓰는 걸로 계획을 고쳐요. 초본에만 2년이 걸렸고, 출판사에서는 단칼에 거절당했고, 결국 처음부터 다시 썼대요. 3년 동안 코끼리를 여러 마리 먹고 나서야 데뷔작 <세 얼간이>가 세상에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계획을 고쳤다는 부분이 특히 반가웠어요. 바쁜 날엔 쉬어 가도 무너지지 않게 판을 다시 짠 거니까요. "나는 천재도 아니고 비범한 재능도 없다"는 고백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입에서 나오니 오히려 믿음이 갔고요. 방 청소를 했다고, 시장에서 토마토를 3kg나 사 왔다고 대단하다며 칭찬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대목도 웃긴데 뼈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크게 웃은 장면이 하나 있어요. 저자가 코끼리 먹는 법을 한참 설명하는 동안 비라즈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먼 데를 보고 있고, 그사이 저자 그릇의 오트밀은 한 톨도 안 남았거든요.


"제 이야기, 제대로 들으셨죠?"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네? 말을 하시지 그랬어요. 저랑 같이 먹으면 됐는데요. 마침 냉장고에 음식이 더 있는데, 갖다 드릴까요?" "아뇨, 그게 아니에요. 저는 사실 코끼리를 먹어 본 적이 없거든요. 염소나 토끼도요."

비유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비라즈도, 빈 그릇 앞에서 냉장고부터 챙기는 작가도 둘 다 정겹더군요.

웃음 뒤에 비라즈가 꺼내는 고백은 좀 아파요. 학교에선 평범한 학생이었고, 자기를 좋아해 주는 아르피타 하나면 충분하다고 믿었대요. 친구가 철도청 공무원 시험을 같이 준비하자고 했을 때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어려워 보였고, 스스로 평범하다고 여겼고, 아르피타와 보낼 시간이 줄어드는 게 싫었다고요. 그 친구는 합격했는데 자기는 시험장에 가 본 적도 없다면서 "돌이켜보니 참 부끄럽네요"라고 말해요. 그 앞에서 저자가 건넨 문장이 마음에 콕 박히더라고요. "누구도 당신의 행복의 원천이 되어 줄 순 없어요. 그 사람들에게 공정한 처사가 아니거든요."


그때 해 볼걸 싶은 시험장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싶어요. 저자는 그런 비라즈에게 "먹어야 할 코끼리는 또 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조급해하지 말라고, 그건 비라즈 씨만 아는 거라고 덧붙입니다. 이 장 끝에서는 비라즈가 오히려 저자를 따뜻하게 안아 주고, "이 수업이 당신만큼이나 저에게도 필요한 것"이라는 말도 나와요. 가르치는 쪽도 이 밥상에서 뭔가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오늘의 주제가 코끼리였다면, 내일 주제는 바퀴벌레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비라즈만큼이나 저도 다음 장이 궁금해졌어요.

'사람을 남겨라' 장의 병아리콩 통조림 이야기는 직장인이라면 무릎을 칠 만해요. 골드만삭스 시절 저자는 '독사 T'라고 부르는 최악의 상사를 만나 원하던 업무에서 밀려나고, 승진에서도 두 번이나 떨어졌대요.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닷컴 버블 여파로 금융계 채용이 꽁꽁 얼어붙은 때였다고 하고요. 그러다 주말에 홍콩 쇼핑몰에서 예전 상사였던 데미안 우드를 우연히 만나 충동적으로 집에 초대합니다. 메뉴는 병아리콩 통조림에 토마토 퓌레와 향신료를 넣고 볶은 차나 마살라, 후식은 알폰소 망고였어요.


저녁 끝 무렵 지나가듯 요즘 회사에서 그리 행복하지 않다고 흘렸더니, 데미안은 "아, 그래요? 왜죠? 그런데 망고 진짜 맛있네요" 하고 망고만 오물거렸대요. 그런데 두 달 뒤에 크레딧스위스로 이직할 생각이 있냐는 연락이 옵니다. 거기서 다시 도이치뱅크로 옮겨 모은 돈이 전업 작가로 나설 밑천이 됐다고 하니, 저자 말대로 병아리콩 통조림 한 캔이 인생을 바꿔 놓은 셈이에요. 독사 T가 나중에 타임지 100인 명단에서 저자 이름을 보고서야 그가 유명해진 걸 알았다는 대목에는 은근한 통쾌함도 있었고요. 회사 다니면서 독사 한 명 안 만나 본 분은 아마 드물 거예요.

솔직히 걸렸던 건 말투예요. "이 책을 고른 당신은 이미 그들보다 낫다"라든가 "세상에 당신을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기억하자" 같은 문장은 처음 보면 좀 움찔하게 됩니다. 계층 사이에 견고한 철벽이 있다는 얘기도 꽤 냉정하게 들리고요. 그래도 비라즈와 마주 앉은 장면들 사이에 이런 말이 놓이니까, 밥 사 주는 선배가 정색하고 해 주는 얘기처럼 들리긴 하더라고요. 저자 스스로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당부하고요.


마지막 '나가며'는 에머슨의 문장으로 열려요. "당신의 운명이 되라고 정해준 유일한 사람은 당신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고백이 의외로 인간적입니다. 자기는 혹독한 군사 훈련을 시키는 교관이 아니고, 파티와 여행과 친구들과 주고받는 시시한 농담을 좋아하고, 술도 마시고 몸에 안 좋은 음식도 먹는 사람이라고 하거든요. 앞으로 50년을 더 산다고 해도 남은 주말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셈법 앞에서는 저도 괜히 남은 주말을 헤아려 보게 되더라고요.

'이걸 꼭 해야 되나?'가 '이걸 하면 되는구나!'로 바뀐다는 말, 그리고 "불행하다면 세상의 모든 성공도 의미가 없다"는 문장까지 오고 나니 앞에서 들은 직설들이 조금 다르게 읽혔어요. 차가운 제목 끝에서 저자가 붙드는 단어는 결국 행복이었습니다.


소장 가치로 보면, 핵심을 네모 상자에 따로 정리해 둔 대목이 쓸모 있어 보여요. "코끼리는 한 번에 최대 두 개까지만 처리하자" 같은 문장은 체크리스트처럼 다시 꺼내 보기 좋거든요. 조마토, 라즈마 커리, 빤, 차나 마살라처럼 낯선 인도 이야기마다 옮긴이 주석이 붙어 있고, 루피를 우리 돈으로 환산해 둔 것도 친절했어요. 이선미 님 번역이 매끄러워서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가 술술 넘어갔습니다. 비라즈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 갈지는 직접 따라가 보시는 게 제일 재미있을 거 같아요.


읽는 내내 즐거웠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같은 책은 다 읽고 나면 뭐라도 한 조각 시작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선선한 10월 첫 주에 코끼리를 한 입씩 먹는 법을 배운 기분이에요. 커리에 병아리콩에 망고까지 먹는 얘기가 하도 많이 나와서, 제 커리어보다 오늘 저녁 메뉴가 더 걱정되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주말들 아껴 쓰시길요.


차가운 제목 뒤에 커리 한 그릇의 온기와 '코끼리는 한 입씩'이라는 현실적인 처방, 그리고 결국 행복을 붙드는 마음이 담긴 책


#세상은공평하지않다 #체탄바갓 #이선미 #오픈도어북스 #자기계발서 #자전적자기계발서 #세얼간이원작자 #불공평한세상에서살아남는11가지법칙 #큰꿈은한입씩 #코끼리먹기 #병아리콩통조림의기적 #직장인책추천 #자기계발책추천 #책추천 #가을책추천 #서평 #서평단 #북스타그램 #BOOKU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전자책]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 -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28가지 이별 수업
사카구치 유키히로 외 지음, 황정원 옮김 / 포텐업 / 202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734명의 목소리로 배우는 28가지 이별 수업,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 서평


"저희 엄마는 100살이셨어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의 들어가는 말에 실린 목소리 중 하나예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이야기도 잘하시고 식사도 잘하셨대요. 주변에서는 다들 호상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이분은 내년 봄에 태어날 손자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냥 1년만 더 살아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호상이라는 말은 살면서 참 흔하게 듣는 말인 거 같아요. 그 말 뒤에 이런 마음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10월 첫 주 화요일입니다. 월요일은 겨우 넘겼는데 주말은 아직 까마득한, 그런 요일이죠.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져서 그런지 이런 책이 유난히 손에 잘 붙는 계절이에요.

책은 간세이가쿠인대학 '슬픔과 사별 연구센터'의 사카구치 유키히로, 아카타 지즈루 두 사람이 함께 썼고 황정원 님이 우리말로 옮겼어요. 포텐업에서 9월 15일에 나왔고 부제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28가지 이별 수업'입니다. 제목만 보고는 감성 에세이인가 싶었는데, 막상 들여다보니 꽤 꼼꼼하게 짜인 심리서에 가깝더라고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가 특이한 건 만들어진 방식이에요. 저자들이 만난 유가족 734명의 체험담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 사람들이 슬픔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유형별로 나눠서 28가지로 정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패턴 랭귀지'라는 기법을 썼대요. 책의 설명을 빌리면 많은 사람이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실천적인 처방을 뽑아내는 방법이고, 건축이나 교육, 간호 같은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고 하더군요. 한 사람의 극복기는 그동안 많았어도, 수많은 사람의 체험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는 게 저자의 이야기입니다.


수업 하나하나의 생김새도 정갈한 편이에요. 제목 아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돼요' 같은 짧은 실천 문구가 붙고, 소제목마다 실제 사연이 이어지고, 저자의 조언이 따라오다가 마지막에 Point 상자 속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상담실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들어가는 말에는 이런 대목도 있어요. 이 책의 모든 조언이 다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슬픔에 대처하는 데 정답은 없으니 나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것만 골라서 적용해 보라고요. 나만의 방법을 만들어 29번째 수업이라 생각해도 좋다고까지 합니다.


29번째 수업이라니.

장례가 점점 간소해지고 친척끼리 만나는 일도 줄면서 슬픔을 함께 나누는 문화가 약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이어지는데, 우리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제 나이쯤 되면 휴대폰에 부고 문자가 오는 일이 부쩍 잦아지는 거 같아요. 그래서인지 들어가는 말에 실린 사연 가운데 두 개가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한 분은 곧 정년퇴직이라 앞으로 둘이서 여행도 가고 고향에도 가자고 이야기했는데 혼자 남겨졌다고 해요. 다른 한 분은 "바쁘다는 말 좀 그만하고……" 더 빨리 고향에 돌아갈 걸 그랬다고 하고요. 바쁘다는 말, 직장인이라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잖아요. 그 말이 이런 후회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 남의 이야기로만 넘기기는 어렵더군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수업 16 '주변 사람에게 맞춰주려 애쓰지 마라'였어요. 10년 전 아버지를 잃은 30대 남성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병약해서 주변 사람 모두가 "이제부터는 네가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대요. 그 뒤로 10년 동안 가족을 지탱해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20대 때 여행 다니고 연애하며 즐겁게 사는 것 같았는데, 자기한테는 그런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어느새 짊어지게 되는 짐이 있죠.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내가 버텨야 한다'는 역할을 떠안기 쉬운 나이라 그런지, 이 사연은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같은 수업에는 친구가 "이제 좀 괜찮아졌어?"라고 물어볼 때가 제일 싫었다는 고백도 나와요. 어머니를 잃은 40대 여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아요. 근데 그런 말을 들으면, '언제까지 슬퍼할 거야? 빨리 괜찮아져야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려요."


"계속 울면 어머니가 천국에 못 가신대" 같은 말을 들으면 막 화가 나고, 그러다 그렇게 모나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또 밉다고 하더군요. 여기에 저자가 건네는 답이 참 다정했어요.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받는 건 당연하다고, "내가 예민하고 까칠해서가 아니라는 말이에요"라고요. 위로가 안 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 그만이라는 조언도 붙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고요.


남편을 잃은 40대 여성의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친하게 지내던 부부가 함께 여행 간 사진을 SNS에서 보고 스마트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고 해요. 저자들의 조언대로 계정을 탈퇴하고 나서 처음에는 세상에 뒤처진 것 같아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자기감정과 마주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 수업에서는 뜨끔했던 순간도 있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래도 당신은 괜찮은 편이에요" 같은 말들이 상처가 되는 위로로 나오는데, 다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흔히 주고받는 말이잖아요. 위로랍시고 비슷한 말을 건넨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는 장담 못 하겠더라고요. '좋은 뜻으로 한 말에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소제목이 괜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는 남겨진 당사자 못지않게, 그 곁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람한테도 잘 맞는 책 같아요.


5장으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수업 25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을 떠올려라'에서 맛보기로 소개하고 싶은 사연이 있어요. 아버지를 잃은 40대 여성은 돌아가신 아빠 생신 때면 꼭 종류별로 맛있는 케이크를 사 먹는대요. 아빠가 자기 생일에도 딸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서 원하는 만큼 마음껏 먹게 해줬기 때문이랍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힘든 날들도 있었지만 생신날을 이렇게 보내면 그냥 아빠가 제 곁에 계신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거든요."

생일 축하 문구가 적힌 초콜릿 플레이트까지 다 먹어버려서 그때마다 엄마한테 한소리 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어요. 슬픈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같은 수업에 나오는 70대 남성의 이야기는 결이 또 달라요. 갑자기 아내를 떠나보내고 몇 년이 지나자 가끔 아내 얼굴이 희미해져서 겁이 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제 곁에 진짜 있었는지,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이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억이 희미해져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했던 사진을 출력해 침실에도 거실에도 식탁에도 걸어두고 틈날 때마다 바라봤대요. 그러자 아내가 분명히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다시 느낄 수 있게 됐다고요.


침실에도, 거실에도, 식탁에도.

저자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으로 산다는 말을 꺼내면서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꼭 가져보라고 권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수업 끝 Point 상자에는 "그 사람은 가고 없지만 그 사람과 함께했던 날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는 보통 단행본보다 살짝 얇은 편이에요. 가방에 넣어도 티가 안 나는 두께라 제 뱃살보다 훨씬 날씬합니다. 수업 하나하나가 짧게 나뉘어 있어서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날 마음에 맞는 수업 하나만 펼쳐 봐도 되는 구성이라 책장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 보기 좋겠더라고요. 표지에 '내가 떠난 후 슬퍼할 가족을 위해 남기고 싶은 책'이라는 문구가 있던데, 다 읽고 나니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언젠가는 내가 남겨질 수도, 내가 누군가를 남기고 떠날 수도 있으니 집에 한 권쯤 두면 든든할 책이에요.


들어가는 말 끝에 있는 문장 하나.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은 나 자신에게 친절하자."


은행잎이 슬슬 물들 채비를 하는 10월이에요. 가을 탄다는 말이 있죠. 저는 요즘 책을 탑니다. 새 책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아재가 다 됐네요. 슬픔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차분하게 들을 수 있어서, 마음 한쪽을 잘 갈무리한 기분입니다. 앞으로 누군가 큰일을 겪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말을 고르기 전에 이 책부터 떠올릴 거 같아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차 한 잔 곁에 두는 가을 보내세요.


빨리 잊으라고 다그치지 않고, 떠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734명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28가지 이별 수업


#이제는만날수없는당신이생각나는밤에 #사카구치유키히로 #아카타지즈루 #황정원 #포텐업 #심리서추천 #이별수업 #사별 #애도 #그리프케어 #슬픔치유 #유가족 #위로가되는책 #가을책추천 #책추천 #신간도서 #서평 #서평단 #북스타그램 #BOOKU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
제이크 냅 외 지음, 박우정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 쪼개진 달력 사이에 파란 덩어리 하나 서평


빨간 바탕에 시커먼 두 글자.

표지 앞면은 '클릭'이라는 글자가 거의 다 덮고 있어요. 솔직히 제목만 보고는 마우스 더블클릭부터 알려주는 아재 컴퓨터 교실 책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가 끝까지 붙드는 질문은 딱 하나더라고요.


"통했어?"

팀, 관리, 기술, 디자인, 가격, 타이밍, 운까지, 신제품이 뜨고 지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은데 결국 이 한마디로 모인다는 얘기예요. 제품과 고객이 레고 블록 두 개처럼 딱 맞물려야 한다면서, '제품'과 '고객'이라고 적힌 파란 블록 그림에 '통했다!'까지 붙여 놨더군요. 저자도 "상당히 뻔한 말이란 것, 안다"고 먼저 털어놓아요. 그렇게 선수를 치니까 오히려 다음 얘기가 궁금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10월 첫 주 화요일이에요. 월요일 회의를 한 바퀴 돌고 나면 화요일쯤엔 이번 주 달력이 대충 눈에 들어오잖아요.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는 그 달력을 자꾸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었어요.

책을 쓴 사람은 제이크 냅과 존 제라츠키, <스프린트>와 <메이크 타임>을 같이 쓴 콤비예요. 제이크 냅은 지메일 개발에 참여했고 구글미트를 공동 설립했어요. 존 제라츠키는 구글애즈와 유튜브에서 리더로 일했고, 책에서는 JZ라고 불러요. 두 사람이 구글벤처스와 지금의 캐릭터캐피털에서 스타트업과 함께 진행한 스프린트만 300번이 넘는대요. 이번 책은 그 스프린트보다 한 발 앞, 프로젝트를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쓰는 '토대 구축 스프린트' 이야기입니다. 박우정 번역가가 옮겼고 김영사에서 나왔어요.


이력만 보면 넥타이를 꽉 맨 경영서일 것 같은데, 문장은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편이에요. 인공지능 스타트업 현장에서 일하는 자기들을 디즈니랜드에서 패스트패스를 가진 두 꼬마에 빗대요. 이렇게 일하는 동기가 부분적으로는 이기적이라고, 자기들 돈이 걸려 있어서라고 순순히 인정하기도 하고요. 디자인 스프린트가 성공했을 땐 "우린 좋아서 죽을 뻔했다"고까지 썼더라고요. 스티븐 킹 책이 아니면 끝까지 읽기도 힘든 사람이라 책을 최대한 짧게 썼다는 고백에선 웃음이 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책도 보통 경영서보다 얇고 가벼운 편이에요. 경영서라고 하면 목침으로 써도 될 두께부터 떠오르는데, 이건 가방에 넣어도 어깨가 파업할 일은 없겠더라고요.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에서 가장 이 책다운 건 빈칸 채우기 같아요. 저자들이 '토대 구축 가설'이라고 부르는 한 문장인데, 생김새는 이래요. 우리가 '고객'이 겪는 '문제'를 '접근방식'으로 해결한다면, 고객은 '경쟁 상대'보다 우리 솔루션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솔루션이 '차별화 요소'이기 때문이다.

지메일, 블루보틀, 플랫아이언 헬스, 슬랙이 실제로 이 칸을 어떻게 채웠는지 차례로 보여주는데, 이게 은근히 재미있었어요. 블루보틀은 잠깐 쉬고 싶은 커피 손님에게 장인 스타일 커피와 세련된 카페로 다가가면서 스타벅스와 맞서요. 이유는 "맛있고 멋지"기 때문이래요. 슬랙의 칸에는 경쟁 상대로 이메일이, 차별화 요소로 "재미있고 팀워크를 증진"한다는 말이 들어가 있고요. 신규 사업 보고서 맨 앞에 이 다섯 칸만 채워 와도 회의 시간이 절반은 줄겠다 싶더라고요.


물론 저자들 말로는 이 단순한 약속을 찾는 게 절대 쉽지 않대요. 한 스타트업의 공동 창업자 세 명에게 타깃 고객을 써보라고 했더니 답이 세 가지로 갈렸대요. 경쟁사와 뭐가 다르냐는 질문 하나에는 60분짜리 토론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이 대목에선 뜨끔했어요. 우리 팀에 같은 질문을 던지면 몇 분짜리 토론이 될지,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저자들 표현대로 "뻔한 문제가 항상 그렇게 뻔한 건 아닌 것이다."


예전 방식을 묘사하는 대목도 남 얘기 같지 않았어요.

회의를 하고, 하고, 또 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슬라이드와 문서와 스프레드시트를 쏟아내고, 조직 안 알력다툼에서 상대보다 오래 버티다가, 결국 예감에 기대 몇 년을 매달린다는 거예요. 저자들은 이걸 "예전 방식이다. 게다가 정신 나간 것이다"라고 잘라 말해요. 쳇바퀴만 돌리는 다람쥐 열두 마리를 청소도구함에 넣고 육각 렌치 하나 던져주며 이케아 가구를 조립하라는 것과 같다는 비유까지 얹고요. 웃기긴 한데, 웃고만 있기엔 너무 익숙한 풍경이라서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1장의 스톡홀름 이야기예요. 2009년 1월, 제이크 냅은 일주일 출장으로 스톡홀름에 가요. 스톡홀름을 매우 좋아한다고 먼저 못 박아 두고는, 그해 1월은 춥고 어두컴컴했고 보도는 더러워진 눈으로 진창이었다며 '처량'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더군요. 진짜 처량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두 친구 세르주 라샤펠, 미카엘 드루게와 함께하던 화상회의 프로젝트가 1년 반이 넘도록 기능만 덧붙인 채 제자리였거든요. 게다가 금융위기 속에 구글이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다른 사무소를 닫는다고 발표한 참이었어요.


셋은 "약간 미친 짓"을 하기로 합니다. 월요일 아침, 금요일까지 프로토타입을 만들자고 정했어요. 일정표의 회의를 전부 거절하고, 이메일과 채팅에서 로그아웃한 뒤 창문 없는 회의실로 들어가요. 수백 개 아이디어 가운데 남긴 건 시장에서 가장 쓰기 쉬운 화상회의 소프트웨어, 그거 하나였대요. 미카엘이 보낸 링크를 클릭하자 "짜잔!" 하고 서로 얼굴이 보이고 "안녕!" 하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읽는 쪽까지 신이 나더라고요. 그게 지금의 구글미트라는 건 저자가 1장에서 바로 밝혀 둡니다.

그래도 제가 오래 들여다본 건 그 뒤에 나오는 달력 그림 두 장이었어요. '스톡홀름에 가기 전' 달력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칸이 잘게 쪼개져 있고, 파란 집중 시간이 띄엄띄엄 박혀 있어요. '스톡홀름에서' 달력은 다섯 칸이 통째로 파란 덩어리 하나고요. 저자는 이전 방식이 "시간의 섬들"을 줬다면 이번엔 "대륙"을 줬다고 표현했어요.


한 시간을 잡아도 몰입하는 데 15분, 일하는 데 15분이 걸리고, 이메일 한 번 확인하고 나면 다음 회의를 생각할 시간이 된대요. 이 대목에선 제 업무 수첩을 들킨 기분이었습니다. 셋이 한 시간 통화하면 절반은 맥락 잡는 데, 절반은 마무리하는 데 썼다는 얘기도 마찬가지고요.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집중도가 계단처럼 올라가는 그래프 밑에는 "순전히 내 경험에 따라 만들었지만, 맞는 것 같지 않은가?"라고 적혀 있어요. 40대 후반 직장인으로서 맞다고 손을 번쩍 들고 싶었어요.


1장 뒷부분은 거의 직장인 생존 지침서 같아요. 이메일에 바로 답하고 30분마다 이 회의 저 회의로 옮겨 다니는 하루를 두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이라고 비트는 문장이 있어요. 스프린트에 결정권자를 꼭 앉히라면서, 끝나고 보스를 설득할 필요가 없는 건 "회의실 안에 보스가 내내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는 문장도 있고요. 회의 많은 부서 사람이라면 다 같이 웃을 대목이에요.


맛보기로 하나 옮기면, 저자는 살면서 겪은 비상사태를 줄줄이 늘어놔요. 뼈도 부러져 봤고, 이도 깨졌고, 비장이 파열되고, 신종플루에 정전에 배심원까지 해봤다고요. 그러고는 "아마도 최악의 비상사태는 느린 와이파이일 것이다"라고 덧붙이더군요. 이런 일이 터지면 회의를 취소하고 메일함을 무시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하잖아요. 그러니 큰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도 '좋은 비상사태'를 선언하라면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라고 합니다.


"우리 팀은 지금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 회의를 취소할 수밖에 없고, 답장이 늦어질 겁니다."

이 메시지는 결정권자가 직접 보내라고 해요. 윗사람 이름으로 나가는 부재중 공지라니, 상상만 해도 든든하더라고요.

그룹 브레인스토밍을 하지 말라는 대목도 좋았어요. 17세기 영국 왕립협회 과학자들한테 사업계획을 세우라고 해도 곧장 '아이디어!'를 외치며 접착식 메모지와 피자를 주문할 거라는 문장에서 한참 웃었습니다. 브레인스토밍이 집단 속에서 불편한 사람, 말로 설득하는 데 서툰 사람, 조용할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사람을 밀어낸다는 지적도 나와요. 목소리 큰 사람 쪽으로 흘러가는 회의에서 끝내 입을 못 떼던 후배들 얼굴이 몇 명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에서 제일 자주 보게 되는 그림, 2×2 도표.

5장에 나오는 오비털 머티리얼즈 이야기가 대표적이에요. 구글 딥마인드에서 일했던 조니 고드윈이 AI의 힘을 빌려 새로운 분자를 발명하겠다고 세운 회사예요. 처음엔 자기 기술의 장점을 '이것저것 다 때려 넣는' 식으로 열댓 가지나 고객에게 쏟아냈대요. 돌아온 건 위압감이었고요. 보고서에 장점 하나라도 빠질까 봐 이것저것 밀어 넣던 버릇이 있는 저로서는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첫 도표에서 오비털은 '익숙하지 않음'과 '변화 필요'가 만나는 왼쪽 아래 구석에 처박혀 있어요. 그러다 '더 높은 품질'과 '더 낮은 실패율' 딱 두 가지로 축을 바꾸자 오른쪽 위로 자리가 뒤바뀌는데, 그 장면이 꽤 통쾌하더라고요.


이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요. 스카이프와 탠드버그 사이에서 가망 없어 보이던 구글미트는 '브라우저만 필요'와 '다자간'으로 축을 새로 그립니다. 컨버스와 아디다스 앞에서 예산도 적고 이미지도 별로였던 나이키는 시그니처 농구화와 전례 없는 계약으로, 이메일과 맞붙은 슬랙은 재미와 팀워크로 판을 다시 짜고요. 사례마다 파란 상자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쓱 올라가요. 그걸 보고 있으면 "일단 차별화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렵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어느새 우리 회사 제품은 어느 축에 올려볼까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차별화를 정의하다가 "차별화는… 음," 하고 뜸을 들이는 것도 재밌어요. "언제나 대단한 일이다. 아니, 이 말은 취소!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다" 하고 스스로 말을 고치는 것도 이 사람 말버릇 같아서 정이 갔어요.

솔직히 걸렸던 건 책이 아니라 제 달력 쪽이었어요. 저자들이 권하는 대로 이틀을 통째로 비우는 건, 일정이 빼곡한 중년 직장인한테는 꽤 먼 얘기처럼 들리더라고요. 다행히 저자들도 그걸 알아요. 조직에 따라서는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그러고는 일단 책을 읽고, 팀과 작은 과정부터 해본 다음, 큰 프로젝트 때 체크리스트대로 가보라고 길을 나눠 놨어요. 결정권자를 설득해야 하는 처지라면 "이 책을 들고 가라"는 말까지 해주는데, 등을 슬쩍 떠미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소장 가치는 책 끝 '10시간 실전 체크리스트'에서 확실히 느껴졌어요. 파란 장을 넘기면 결정권자와 함께 시작하기, 작은 팀 구성하기, 달력에서 이틀 전체 비우기 같은 항목이 네모 체크박스와 함께 줄지어 있어요. 항목마다 본문 어디로 돌아가면 되는지 안내도 붙어 있고요. 앞에서 웃으며 읽은 튕겨내기 메시지가 여기서 그대로 다시 나오니 반갑더라고요. 노란색 포스트잇과 블랙 마커가 가장 좋은 이유가 익명성을 지켜주고 인지 부하를 줄여주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구체적이에요. 준비물에는 점 스티커 옆에 간식이 당당히 올라가 있습니다. 간식까지요. 진행자 항목의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 유력한 후보다"라는 문장 앞에선 괜히 지목당한 기분이 들었어요.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는 새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다시 꺼내 펼치게 될 책 같아요.


후기에서 열 가지 교훈을 한자리에 모아 둔 것도 좋았어요. 그중 "첫 아이디어에 대한 대안을 찾아보라!"와 "증명하기 전까진 가설일 뿐이다!"는 처음 떠올린 안에 금방 정드는 제 습관을 정확히 찌르는 말 같았습니다. 시골에 병원을 열면서 웹사이트 프로토타입부터 주민들에게 보여준 의사 카밀 플레밍의 이야기가 나와요. 부정 승차를 막으려고 부정 승차자를 인터뷰한 브뤼셀의 가엘 메르시에 이야기도 있고요. 이런 얘기를 보면 스타트업 사람들만 쓰는 방법은 아니구나 싶어요. 괄호 안에 툭 던진 "고객 우선주의!"에선 또 웃었고요.


그리고 후기 첫머리. 저자가 어릴 때 꿈꾼 건 영화 (백투더퓨처)에서 드로리언을 타임머신으로 바꾼 브라운 박사 같은 발명가였대요. 마분지, 노끈, 꼬챙이, 스카치테이프로 실험했지만 작동하는 시간여행 장치는 끝내 못 만들었다고요. 벤처펀드 운영은 "주머니에 플루토늄이 가득 들어 있는 산발머리의 천재"가 되는 것과는 분명 다르대요. 그래도 팀이 큰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도울 때마다 브라운 박사와 칠판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해요. 같은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라 그런지 이 대목이 참 반가웠습니다. 어릴 적 꿈과 지금 하는 일이 꼭 같지 않아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재미를 찾아낸 사람의 얘기 같아서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10월 들어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선선해졌어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이번 가을엔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 덕분에 기획 공부까지 같이 한 기분입니다. 잘게 쪼개진 제 달력 사이에도 파란 덩어리 하나쯤 만들어 보고 싶어지는 화요일이네요. 좋은 책 만나서 한 주가 든든하게 시작된 거 같아 좋았습니다.


회의만 길어지는 팀에게 "통했어?"라는 질문 하나와 빈칸 다섯 개, 2×2 도표를 건네는 이틀짜리 기획 플레이북


#클릭 #클릭아이디어에서비즈니스로 #제이크냅 #존제라츠키 #박우정 #김영사 #토대구축스프린트 #스프린트 #디자인스프린트 #차별화 #2x2도표 #신사업기획 #기획실행 #경영서추천 #직장인독서 #신간도서 #책추천 #서평 #BOOKU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사고의 품격 - 판단의 품격을 높여주는 아홉 번의 생각 수업
투리 문테 지음, 이영래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땅콩버터 취향에 정치가 묻어난다고요? <사고의 품격> 서평



부드러운 땅콩버터를 좋아하세요, 알갱이가 씹히는 쪽을 좋아하세요?

싱거운 질문 같지만, 이 대답에 정치 성향이 묻어난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하실 거예요. 그런데 <사고의 품격>에 진짜로 그런 데이터가 나옵니다. 누가 올렸는지도 모를 '부드러운(알갱이가 없는) 땅콩버터가 최고다'라는 의견을 정치 성향별로 나눠 봤더니, 왼쪽으로 한 칸씩 갈수록 반대가 늘었다고 해요. 극좌에서는 44퍼센트가 반대했는데 극우로 가면 16퍼센트까지 떨어지더군요.


저자는 이 순간을 '반(反)유레카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래요.


이 표현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10월 첫 화요일이에요.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지니 책 생각이 더 나는 계절이 온 거 같습니다.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만 틀어 놓다 잠들곤 했는데,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새 책 오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지더라고요. 이번 책은 21세기북스에서 나온 투리 문테의 <사고의 품격>이고, 이영래 님이 옮겼어요.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하고 손에 들면 묵직한 편이라 처음엔 살짝 긴장했는데, 막상 펼치니 이야기가 술술 넘어가는 쪽이었습니다.


표지를 보면 갈색 격자 칸칸이 DNA, 신전, 유인원, 모래시계 그림이 들어가 있어요. 책을 펼쳐 보면 그 그림들이 왜 거기 있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기후와 지리, 문화, 몸, 유전자, 감정, 집단까지, 내 생각이 어디서 흘러들어 왔는지를 아홉 번의 수업으로 나눠 따라가는 구성이거든요.

책은 카를 융의 문장으로 문을 엽니다. "사람은 생각의 주인이 아니다.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첫 장부터 내 생각이 정말 내 것이 맞느냐고 묻는 거죠.


머리말의 저자 이야기가 꽤 독특해요. 투리 문테는 수피교 스승 '아가'를 따르는 공동체에서 자랐대요. 여름이면 스페인 남부의 거대한 캠핑장에서 전 세계에서 온 2,000명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고 하고요. 심리학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무용수, 카펫 제작자가 한데 모여 밤늦도록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열 살 무렵부터 의심이 싹텄고, 대학교 1학년 무렵 "만약 문제가 내가 아니라면?" 하는 전환을 겪어요.


여기까지는 흔한 성장담 같지만 그다음이 재밌습니다. 20년쯤 전에 부모님도 똑같은 전환을 겪었는데, 방향이 정반대였다는 거예요. 아들이 믿음 밖으로 걸어 나올 때 부모는 믿음 안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죠. 지금도 신을 믿느냐고 여쭤보면 두 분은 융의 말로 답한대요. "믿을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한 집, 같은 스승, 정반대의 결론.

저자는 누구 진실이 맞는지 따지는 대신 "왜 나와 부모님은 다르게 생각하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 하나가 책 전체를 끌고 가는 엔진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 질문을 붙들고 저자는 2019년에 '의견의 백과사전' 팔리아를 만들어요. '식물은 의식이 있는가'부터 호날두가 메시보다 뛰어난가까지, 1,000개가 넘는 질문을 정리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야심 찬 프로젝트가 잘 안 풀렸대요. 찾아오는 사람은 대부분 숙제 자료를 찾는 고등학생이었고, 사이트를 두 번이나 갈아엎고 뉴스레터에 의견 지도까지 내봤지만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다 마지막 실험으로 '투표' 버튼 하나를 달았더니 첫 6개월 만에 투표가 100만 번을 넘었답니다. 기획안 몇 번 엎어 본 직장인이라면 이 대목에서 웃음 반 한숨 반이 나오실 거예요. 공들인 건 조용하고 버튼 하나가 대박 나는 일, 회사에서도 심심찮게 보니까요.


그렇게 모인 데이터에서 이상한 상관관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별은 두 개뿐이다'에 동의하는 비율은 남성이 67퍼센트, 여성이 45퍼센트였대요. '외계인은 존재한다'는 믿음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강해지고요. 저자는 결국 이런 의문까지 갑니다. "우리가 진보나 보수 또는 중도로 기우는 이유는 그저 그것이 맞다고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1부 첫 수업에서는 싱가포르가 나와요. 1965년 독립 무렵엔 우간다와 비슷한 수준이던 나라가, 지금은 지표만 보면 북유럽 국가처럼 보일 정도로 잘사는 나라가 됐대요. 그런데 껌이 영토 전역에서 금지이고, 남의 눈에 띌 수 있으면 집 안에서도 알몸으로 다니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 낯선 조합을 두고 저자는 "하지만 얼마간은 날씨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며 몽테스키외를 불러와요. 몽테스키외는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같은 오페라를 봤는데 관객 반응이 너무 달라서, 양의 혀를 얼려 보고는 추운 나라 사람들은 감각이 둔하다고 결론 내렸다고 하네요.


그 결론은 틀렸지만 저자는 방향을 살짝 틀어요. 덥고 습한 곳은 병원체가 번성하는 곳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행동적 면역체계'를 키워 왔다는 거죠. 코로나 때 마스크 쓰고 손 소독제 바르던 게 바로 그 면역체계가 본격적으로 돌아간 결과였대요. 곰팡이 핀 음식을 버리는 것도 같은 맥락인데, 괄호 안에 "치즈 같은 특정 음식을 제외하면"이라고 슬쩍 붙여 둔 게 재밌었어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태도나 엄격한 규범도 이렇게 몸을 지키려던 습관이 생각으로 굳은 거라고 보더군요.

이 이야기가 Class 4에서 다시 이어지는 게 신기했습니다. 혀에 있는 미뢰가 많은 사람일수록 우파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대요. 몽테스키외가 혀를 들여다본 건 아주 엉뚱한 짓은 아니었던 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한 맛에 민감한 것도 큰 소리에 더 놀라는 것과 같은 결이라고 해요. 위협이 눈앞에 있든 입 안에 있든 말이에요.


음식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하면, 중도는 와인보다 맥주를 좋아하는 편이래요. 저자가 그 이유를 짐작하다가 수제 맥주 양조장이 "중산층 중년 중도 성향 아버지들" 사이에서 유행해서일까 하는 대목에서는 좀 뜨끔했습니다. 세 단어 중 두 개는 확실히 저한테 해당하거든요. 나머지 하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표정이 애매한 얼굴 사진을 보여 주면 보수 성향은 위협적으로, 진보 성향은 좋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는 실험도 있어요. 회의 중에 상사 표정 하나 읽느라 진땀 빼 본 사람이라면 남 일 같지 않으실 거예요.


혐오 민감성 대목은 가볍게 넘기기 어려웠어요. 코를 찡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는 반응은 원래 감염원에서 몸을 지키려고 생긴 거래요. 그런데 이게 집단 전체로 번지면 특정한 사람들을 '불결하다'고 몰아세우는 데까지 간다는 이야기거든요. 역사 속 사례까지 이어지다 보니 읽는 속도가 저절로 느려졌습니다.


솔직히 1부 초반에는 날씨가 생각을 정한다는 말이 좀 세게 들렸어요. 덥고 습하면 권위적이고 춥고 건조하면 관대하다니, 지도만 펼쳐 놓으면 사람 속을 다 안다는 얘기처럼 들려서요. 그런데 저자가 혹한의 아이슬란드도, 덥고 습한 태국도 진보적이라는 예외를 먼저 꺼내 놓더군요. 기후가 태도에 미치는 유일한 영향은 아니라면서요. 땅콩버터 패턴도 끝내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여론 분석이 과학보다 소설에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털어놓습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쪽이 오히려 믿음이 가는 거 같아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2부에 나오는 이 질문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나는 항상 X가 맞다고 믿어왔는데, 그것이 타당한지 다시 확인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한 날이 있었는가?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40대 후반이 되니 이 문장이 꽤 아프게 찔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다시 확인하는 일보다 지키는 일에 더 힘을 쓰게 되잖아요. 회의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면 듣기도 전에 방어 논리부터 세우게 되고요. 저자는 반박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자기 생각 속 모순을 거의 고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동의하지 않는 생각과 마주하는 일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법을 배우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1부의 '행동적 면역체계'가 2부에서 '지적 면역체계'로 짝을 이루는데, 저는 이 연결이 <사고의 품격>만의 묘미 같았어요. 남의 말을 덥석 믿지 않는 확증편향이 사실은 속지 않으려는 방어 장치라는 거죠. 혼자 있을 땐 결함인데, 둘이 부딪치면 쓸모가 생긴대요.

예시로 영화 (아담스 패밀리)의 모티시아와 고메즈 부부가 나오는데 이게 참 재밌습니다. 결혼기념일 저녁, 모티시아는 지배인이 마음에 드는 프랑스 식당 에스카르고에 가고 싶어 하고, 고메즈는 늘 가던 식당만 고집해요. '매력적인 지배인'은 남편을 설득하는 데 하등 쓸모가 없으니 모티시아는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백조 내장 요리가 이 도시 최고라든가, 소믈리에가 드라큘라 백작의 직계 후손이라든가 하는 이유요. 저자는 이걸 이렇게 표현해요. "이런 고집과 사후 합리화의 난투극 속에서 기적이 피어난다." 결혼기념일 식당 하나 고르는 일도 협상이라는 걸 아는 중년 남편이라면 웃음이 나실 대목이에요.


추론을 떠올릴 때 혼자 턱을 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말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떠올리라는 말도 좋았어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다들 시끌벅적하게 논쟁하는 그림이요. 파인만의 이 말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다."


뒤로 갈수록 데이터가 든든하게 받쳐 줘요. 까다로운 카드 문제에서 똑똑한 사람들도 85퍼센트가 틀렸는데, 평범한 학생들이 소그룹으로 모여 풀었더니 80퍼센트가 맞혔대요. 저자 말로는 단거리 선수를 100미터 2.5초에 뛰게 만드는 수준이랍니다. 위키백과에서도 편집자들 의견이 극도로 갈린 주제의 문서일수록 품질이 최상위권이었다고 하고요. 다른 분야 사람들이 함께 일할 때 획기적인 발견이 자주 나왔다는 케빈 던바의 연구를 읽으면서는 다른 부서 사람이 한 명 끼면 꽉 막혔던 회의가 풀리던 순간들이 떠올랐어요.


감사의 말까지 꼭 읽어 보시길 권하고 싶어요. 집필에 3개월이면 된다던 사람에게 실제로는 3년이 걸렸다며, 그에 대한 감사가 "저주를 겨우 넘어선다"고 써 놨거든요. 3개월짜리 일정이 3년으로 늘어나는 건 회사나 출판이나 똑같은가 봅니다. 저자는 그 끝에 이렇게 덧붙여요. "결국 이 책은 대화의 기적에 관한 책입니다."


누가 맞는지 끝장을 보는 대화에 지친 분이라면 특히 반가우실 책이에요. <사고의 품격>은 상대를 이기는 기술 대신, 내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들여다보게 해 줍니다. 한 번 읽고 꽂아 두기엔 아깝고, 생각이 꽉 막혔다 싶을 때 다시 꺼내 보면 좋을 거 같아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고, 덮고 나니 조금은 겸손해진 기분이더라고요.


은행잎이 하나둘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10월이에요. 올가을엔 생각이 다른 사람 말에 귀를 조금 더 열어 보려고 합니다.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든든한 화요일이네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내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알면 다른 생각과도 웃으며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책


#사고의품격 #투리문테 #이영래 #21세기북스 #인문교양 #교양서추천 #심리학책 #책추천 #신간도서 #서평 #도서리뷰 #북스타그램 #가을책추천 #10월추천도서 #최재천추천 #확증편향 #집단지성 #양극화 #독서기록 #BOOKU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 인생의 굴레마다 찾아온 뜻밖의 해답
우인 지음 / 서울문화사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몸은 퇴근했는데 마음은 아직 회사에? 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서평


표지만 봐도 힘이 쭉 빠지는 책이 있더라고요. 노란 하늘에 구름이 둥실 떠 있고, 그 위에 부처님이 팔베개를 하고 모로 누워 계십니다. 어깨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고요. 옆에 적힌 문구가 "열반은 모르겠고, 오늘 하루는 좀 살 만해지고 싶습니다!"인데, 누가 제 속마음을 표지에 옮겨 놓은 줄 알았어요.


<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는 13년 차 직장인 우인 작가가 쓴 책이에요. 제목에 부처님이 있어서 경전 해설서인가 싶었는데, 막상 펼치니 회의실이랑 단톡방, 카드 명세서와 퇴근길 지하철이 줄줄이 나옵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판형에 두께도 부담 없는 편이라 가방에 넣어도 무게가 거의 공(空)에 가깝더라고요. 부처님 책은 들고 다니는 것부터 비움인 모양입니다.


읽는 방식이 좀 특이해요.

꼭지마다 경전 구절이나 불교 개념 하나에서 출발하는데, 거기서 오래 서성이지 않고 바로 오늘의 일상으로 내려오거든요. 제가 읽은 꼭지들은 파란 글씨로 된 누군가의 고민으로 열리고 거기에 답이 이어지는 식이라, 상담 코너를 읽는 기분도 납니다. 프롤로그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통의 구조는 사찰 법당 안에만 있지 않고 "점심 메뉴 앞에 있고, 증권계좌에도 있습니다"라고요. 증권계좌라는 단어에서 웃음이 났는데, 웃고 나니 좀 찔리더군요.



프롤로그는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요.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잠깐 정신이 드는 것 같다가도 책을 덮으면 다시 원래 자리고, 유튜브 알고리즘이 권하는 마인드셋 영상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털어놓습니다. 퇴근하면 유튜브만 보다 잠들던 게 얼마 전까지 제 모습이라 이 대목에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라고요. 그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한 사람이 뜻밖에도 부처님이었고, 그 말이 수천 년 전 언어에 싸여 있어서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라는 거죠.


이름이 생기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프롤로그의 이 문장이 <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의 첫 단추 같아요.

다른 꼭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은 곳은 3장의 카드값 이야기였어요. 사연 속 주인공은 월급날 휴대폰이 두 번 운다고 해요. 오전엔 입금 알림, 오후엔 카드사 출금 알림. 그 사이에 야근 사흘째 밤 11시에 결제한 러닝화가 있고, 점심시간에 백화점을 돌다 산 니트가 있고, 회식 끝나고 집에 가기 싫어 혼자 마신 하이볼 다섯 잔이 있습니다. "이 정도는 내가 나를 위해 쓸 수 있잖아"라는 말까지 붙으니 남 얘기 같지가 않더군요.


저자는 이 손동작을 정확히 그려 둔 문장이 따로 있다면서, 그 문장의 주제가 다름 아닌 윤회라고 말해요. 갈애(渴愛)의 어원이 '목마르다'라는 설명에, 아지랑이를 물인 줄 알고 쫓아가는 비유가 붙고요. 그러고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어제의 갈애가 오늘의 카드값을 만들었고, 오늘의 카드값이 내일의 출근을 만듭니다."

읽고 나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회사원의 한 달을 이렇게 짧게 줄인 문장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해결책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장바구니에 담긴 금액을 월급으로 나눠서 "이 물건은 상사의 잔소리를 몇 시간 견뎌야 하는 값인가"로 바꿔 보는 것, 사고 싶은 게 생기면 3일 동안 장바구니에만 담아 두는 것. 불교의 지(止)가 멈춤을 뜻한다는 설명 뒤에 "멈추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이긴 것입니다"라는 말이 붙는데, 이건 당장 써먹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처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요. 돈 안 드는 출구를 하나쯤 마련해 두라는 건데, 예로 든 게 산책, 글쓰기, 오래된 친구에게 거는 전화 한 통, 그리고 30분의 독서예요. 목록 끝에 독서가 올라 있는 걸 보니 요즘 새 책 오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괜히 반갑더라고요.


4장으로 넘어가면 공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야, 원래 다 힘든 거야. 나 때는 더했어. 버티다 보면 다 요령이 생겨." 번아웃 꼭지가 이 말로 열리는데, 솔직히 여기서 좀 걸렸어요. 40대 후반이 되고 보니 저는 이 말을 듣는 쪽보다 하는 쪽에 가까운 나이거든요. 후배한테 위로라고 건넨 말이 상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사연 속 사람은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더 열심히 했대요.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까지 버티고, 쉬는 날에도 밀린 걸 해치웠는데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진다고 합니다. 설레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요. 저자는 이런 증상들을 "경전의 문장들"이라고 부르더군요. 좋아하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도 남은 에너지가 바닥에 닿았다는 신호라고 하고요.


여기에 깔라마경이 붙습니다. 전해 내려온다고 해서, 스승이 말했다고 해서 믿지 말고, 스스로 경험해 보고 해롭다고 알 때 버리라는 부처님 말씀이에요. 그래서 저자는 휴가든 운동이든 명상이든 방법부터 고르지 말고 내 몸을 첫 번째 증인으로 세우라고 해요. 휴가를 냈는데 더 불안하다면 지금은 휴가가 나한테 맞지 않는 거라는 말까지 하는데, 이렇게 솔직한 마음 책은 오랜만이었습니다.


중간에 '갓생이라는 신흥종교'라는 소제목이 있는데, 새벽 5시 미라클 모닝 인증, 퇴근 후 자기계발 기록, 주말마다 다녀오는 재테크 임장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져요. 저자는 그걸 "화려한 열정의 연대기"라고 부르고요.


이 꼭지에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은 약한 것이 아니라는 한마디인 것 같아요.

마지막 꼭지 제목은 '퇴근했는데 마음은 아직 회사에 있다'입니다. 사연이 "저는 매일 두 번 집에 돌아옵니다. 몸의 퇴근과 마음의 퇴근이죠"로 시작하는데, 직장인이라면 다들 무릎을 칠 문장이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 무심코 던진 "너 요즘 좀 예민한 거 아니야?" 한마디가 지하철에서도, 저녁 밥상에서도, 누워서도 떠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여기에 돌아오는 답이 물 한 컵 이야기예요.


"먼저, 물이 든 컵 하나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물이 탁해졌을 때, 그 물을 억지로 저어서 맑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저을수록 더 탁해질 뿐입니다. 다만 가만히 두면, 찌꺼기는 스스로 가라앉습니다."

그 뒤로 (잡아함경)의 두 번째 화살 이야기가 이어지더라고요. 누군가의 말이나 예상치 못한 상처 같은 첫 번째 화살은 피하기 어렵지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실제로 그런 사람인 걸까" 하면서 같은 자리에 거듭 꽂는 두 번째 화살은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거예요. 계속 물을 젓고 있는 손이 결국 내 손이라는 대목에선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해탈한 사람도 억울하면 속상하고 서운하면 화가 난다는 대목도 좋았어요. 그 감정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데서 차이가 난다고 하네요. 흔들려도 괜찮다고 먼저 말해 주니까, 저처럼 마음 근육이 시원찮은 사람도 끝까지 편하게 따라갈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를 읽는 내내 저자가 옆자리 동료처럼 느껴졌어요. 같은 회의실에 들어가고 같은 메신저 창 앞에서 한숨 쉬어 본 사람이 하는 말이라 설교 냄새가 덜 나는 것 같더라고요. 저자 소개에 경전을 거꾸로 읽으면 출근길과 회의실이 보인다는 말이 있던데, 책을 따라가다 보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도거, 갈애, 전도몽상 같은 한자어가 목차에 빼곡해서 처음엔 시험공부 하는 기분이 들까 살짝 걱정했어요. 막상 읽어 보면 월급날 알림이나 단톡방 같은 장면이 먼저 나와서 금방 익숙해지더군요. 단어 하나를 알게 될 때마다 내 하루에 이름표가 하나씩 붙는 느낌이라, 나중엔 그 한자어들이 오히려 기다려졌습니다.


<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는 35개 꼭지가 따로 읽어도 무리가 없어 보여서 순서대로 볼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목차 제목도 "단톡방에서 나만 읽씹당했다", "회사를 떠나면 정말 모든 것이 나아질까" 같은 하소연이나 질문이라, 그날 걸리는 마음에 맞춰 골라 펼치면 될 것 같아요. 책상 한쪽에 꽂아 두고 월요일마다 한 알씩 꺼내 먹는 상비약 같은 책이에요.


10월 첫 주 화요일입니다. 월요일을 겨우 넘기고 나니 아침저녁으로 겉옷 생각나는 계절이 성큼 와 있네요. 이번 주는 금요일이 한글날이라 한 주가 짧은데, 그래도 화요일은 화요일이라 몸이 무겁긴 합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던데, 올가을은 갈애는 좀 내려놓고 가을애에나 푹 빠져 보려고요.


<사는 게 왜 이런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덕분에 휘젓던 손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 한번 정리한 기분이라 좋았어요. 단풍 드는 동안 장바구니 3일 법칙부터 하나씩 해 볼 생각입니다.


카드값부터 번아웃, 퇴근 후까지 직장인의 하루하루에 부처님 말씀으로 이름을 붙여 주는 생활밀착형 마음 처방전


#사는게왜이런지부처님께물었습니다 #우인 #서울문화사 #신간도서 #마음공부 #직장인마음공부 #불교에세이 #부처의지혜 #마음챙김 #마음다스리기 #번아웃 #깔라마경 #두번째화살 #갈애 #해탈 #직장인책추천 #서평 #책리뷰 #가을책추천 #BOOKU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