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한정판)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평점 :
절판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처음 쥐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책이 참 야무지다는 것이었어요. 일반 판형보다 한 뼘쯤 작은데 두께는 제법 묵직하고, 표지가 단단한 견장정이라 손바닥에 올려 두면 작은 사전 한 권을 든 기분이 듭니다. 흰 바탕 위에 초록 고양이가 사뿐히 걸어가고, 그 둘레로 둥근 안경과 펼친 책, 술병과 잔이 판화처럼 새겨진 표지를 보고 있으면, 이 안에 담긴 이야기가 어떤 분위기인지 펼치기도 전에 짐작이 가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책인데, 받자마자 표지를 한참 들여다본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1905년에 발표한 데뷔작이고,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작 직접 읽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100년도 더 된 소설이라 하면 어딘가 점잖고 어렵겠거니 했는데, 첫 문장에서부터 그 짐작이 보기 좋게 빗나가더라고요.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이 한 줄에 이야기 전체의 목소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인간에게 몇 번이나 내던져진 끝에 겨우 영어 교사 구샤미 선생의 집에 흘러든 이름 없는 고양이가 화자예요.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바로 그 낮고 무심한 자리에서 인간을 올려다보기 때문에 인간이 평소에 감추고 사는 우스움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처음 인간을 마주한 장면에서 고양이는 서생의 얼굴을 두고 "털로 소복해야 할 얼굴이 주전자처럼 매끈"하고, 한가운데 뚫린 구멍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고 묘사해요. 담배 피우는 사람을 이렇게 그려 놓으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풍경이 별안간 기이하고 우습게 보입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혼자 웃었어요. 식구들은 주인을 대단한 공부벌레로 알고 있지만, 고양이가 옆에서 지켜본 주인은 서재에서 책에 침이나 흘리며 낮잠 자는 사람입니다. 고양이는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적어요. "선생이란 실로 편한 직업이다. 이렇게 잠만 자면서도 밥벌이가 된다면 고양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이 갑자기 그림에 빠져서는, 친구가 전한 화가의 말 한마디에 무릎을 치고 정작 자고 있는 고양이를 그려 놓고는 눈도 색깔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대목도 그렇고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그럴듯하게 받아 안고 흉내 내다 우스워지는 모습이, 어쩐지 남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압권은 주인과 그 친구들이 모여 끝없이 떠드는 장면들이에요. 미학자 메이테이가 들이닥쳐 박학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안주인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옛 현인들의 말을 줄줄이 끌어와 만담처럼 늘어놓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소크라테스까지 동원해 그럴듯한 인용을 쏟아 내는데, 진지한 고전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지는 광경이 묘하게 통쾌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다 지켜본 고양이가 내리는 결론에 이 작품의 속내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움직이면서, 재미있지도 않은 일에 웃고, 시답잖은 일에 기뻐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존재."


세상을 등진 척 초연하게 굴지만 속에는 명예욕과 욕심이 그득한 사람들. 고양이는 그들을 "바람 부는 대로 수세미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표현해요. 웃다가 문득 멈칫하게 되는 건, 그 풍경 안에 나 역시 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아는 척하지만 외롭고, 체면을 지키느라 애쓰지만 사소한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모습이 100년 전 메이지 시대 지식인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거든요. 신용이니 체면이니 하며 비싼 담배 하나로도 자신을 포장하려는 사업가 산페이를 보면, 요즘 우리가 작은 물건들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는 풍경이 겹쳐 보이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유쾌한 풍자에서 멈추는 책은 아니에요. 웃음 뒤에는 늘 옅은 쓸쓸함이 깔려 있습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 감정이 짙어져요. 곁에 있던 검은 고양이가 죽고 사람들이 위패까지 만들어 독경을 올리는 장면을 지나면서, 그토록 활기차게 인간을 비웃던 화자마저 어느 순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즘은 외출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왠지 세상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간을 가장 멀리서 바라보던 고양이가 끝내 인간을 닮아 무뚝뚝해지는 거예요. 마지막에 고양이가 사람들이 마시다 남긴 술에 취해 맞는 결말은, 웃음 끝에 남는 허망함을 조용히 매듭짓습니다.


옮긴이가 책 끝에 남긴 한마디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지나치게 웃다 보면 눈물이 찔끔 나오는 건 재미 때문만이 아니라, 웃음이 지나간 후의 허망함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이요. 이 책이 꼭 그렇습니다. 한바탕 웃고 나면 그 자리에 작고 서늘한 무언가가 남아요.


번역도 그 분위기를 살리는 데 큰 몫을 합니다. 김난주 번역가의 문장은 고양이 특유의 점잔 빼는 말투와 능청을 자연스럽게 살려, 100년 전 일본 서재의 공기를 어색함 없이 읽히게 만들어요. 낯선 인명이나 옛 상품 이름에는 짧은 주석을 달아 두어, 모르고 지나칠 뻔한 농담의 묘미까지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큰 사건이 휘몰아치는 소설은 아니에요.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이어지면서 인물들의 성격과 시대의 풍경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방식이라, 빠른 전개를 기대하면 다소 더디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느긋함이 오히려 이 책의 맛이라고 생각해요. 서두르지 않고 사람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누군가를 조금 더 여유롭게 바라보게 되거든요.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스쳐 지나가는 데 익숙해진 요즘, 이 책은 묘하게 위로가 됩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단정하기 전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우스움과 외로움, 그 서툶을 먼저 들여다보게 만들거든요. 거창한 교훈을 내세우지 않고, 그저 고양이의 눈을 빌려 우리를 슬쩍 비춰 줄 뿐인데도 말이죠. 고전이 어렵게만 느껴져 펼치기를 망설였거나, 일상에 지쳐 잠시 한 발 물러서서 사람을 바라보고 싶은 때라면, 이 작은 한 권이 생각보다 든든한 동행이 되어 줍니다.


여름 문턱에 접어든 요즘, 창을 열어 두면 더운 바람에 섞여 매미 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표지의 초록 고양이가 걷던 그 계절이 지금이구나 싶어집니다. 무더위에 마음마저 늘어지는 날, 굳이 무언가를 얻으려 애쓰지 않고 그저 고양이를 따라 사람 구경하듯 천천히 넘기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에요.


이름 없는 고양이의 눈을 빌려, 웃다가 문득 쓸쓸해지는 인간의 풍경을 그려 낸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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