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리허설 - 살기 위해, 한 번 죽어 보기 ㅣ 세계척학전집 8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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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내 장례식에서도 나는 구경꾼이었다, 이클립스 〈죽음 리허설〉 서평


눈을 감고 내 장례식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영정 사진이 걸리고, 아는 얼굴들이 하나둘 들어오는 장면까지는 어렵지 않게 그려질 거예요. 그런데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나는 어디쯤 서 있었나요? 관 속에 누워 있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요.


이 질문으로 문을 여는 책이 〈죽음 리허설〉입니다. 지식 유튜버 이클립스의 '세계척학전집' 여덟 번째 책이에요. 처음엔 '철학'을 잘못 쓴 줄 알았어요. 아는 척 좀 하게 해 주는 학문이라면 저 같은 아재한테 딱이겠다 싶더라고요. 시리즈 여덟 번째 권이긴 한데, 따로 읽어도 흐름 따라가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서 앞 권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죽음을 다룬다고 해서 내내 무겁게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프로이트, 몽테뉴, 붓다, 가완디 같은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데, 사람마다 실험이나 이야기를 하나씩 들고 와서 강의 한 편씩 듣는 느낌이 들어요.


프롤로그에 나오는 실험부터 재미있었어요. 죽음에 대해 짧은 글만 쓴 대학생들은 앞으로 벌 돈을 더 높게 내다보고 자기 몫도 더 챙기려 했대요. 그런데 고층 아파트에 불이 나 빠져나갈 길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가 죽어 가는 모습을 자세히 그려 보고 지난 삶을 돌아본 사람들은, 더 가지려는 행동이 뚜렷하게 줄었다고 하더군요. 같은 죽음을 떠올렸는데 방향이 정반대로 갈린 셈이죠.

죽음을 짧게 스치기만 하면 막연한 불안으로 남고, 끝까지 바라보면 구체적인 두려움이 된다는 설명이 이어져요. 엄마에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두려움 같은 거요. 그런 두려움에는 할 일이 있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같은 직장인으로서 오래 생각하게 된 대목은 '사회적 죽음'이라는 말이었어요. 저자는 시한부 선고 같은 일은 드물지만, 사람은 살면서 몇 번씩 자기 삶의 일부가 끝나는 일을 겪는다고 해요. 다니던 회사에서 밀려나고, 오래 준비한 시험에 떨어지고, 믿던 관계가 끝나는 일들이요.

회사에서 밀려나는 일이라니.

첫머리부터 이 얘기가 나오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도 이 책의 생각들은 삶의 일부가 끝난 날에도 그대로 쓸 수 있다고 하니, 죽음 책이 갑자기 오늘 하루에 쓰는 책처럼 느껴지더라고요.


PART 1의 프로이트 장으로 넘어가면 맨 처음 던진 장례식 질문에 답이 나와요. 우리는 상상 속 장례식에서도 늘 식장 한쪽에 선 구경꾼이라는 거죠. 〈톰 소여의 모험〉에서 교회 2층 구석에 숨어 자기 장례식을 지켜보던 톰처럼요. 상상하려면 상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 죽음은 바로 그 사람이 사라지는 일이니 제대로 그려질 리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아이들에게 아기 생쥐가 악어에게 잡아먹히는 인형극을 보여 준 실험도 나와요. 아이들은 죽은 생쥐가 밥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건 정확히 답하면서도, 생쥐가 아직 엄마를 사랑한다고 답한 경우가 많았대요. 대학생 일부도 비슷하게 답했다니, 나이를 먹는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모양이에요.


이 장에서 뜨끔했던 건 부고 이야기였어요. 이 나이쯤 되면 부고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데, 그때마다 사고였는지 무슨 병이었는지부터 묻게 되잖아요. 책은 그 질문 뒤에 이런 계산이 숨어 있다고 말해요.

"과로였다면 나는 그렇게까지 일하지 않는다. 사고였다면 조심하면 된다. 여든이 넘으셨다면 나는 아직 멀었다."

원인을 확인하는 순간 죽음은 특별한 사정이 있던 한 사람의 일로 줄어들고, 나는 그 사정의 바깥에 선다는 거예요. 반박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죽음 리허설〉만의 재미는 장마다 붙은 '리허설' 박스 같아요. 읽은 생각을 오늘 하루에 한 번 써 보라는 질문들인데, 쉬워 보여도 대충 넘어갈 수가 없게 생겼어요. 카이우스는 죽는다는 삼단논법 이야기 끝에는, 카이우스 자리에 내 이름을 넣으면 내게 남은 시간에도 끝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며 그 안에 꼭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아직 시작하지 않은 까닭은 뭔지 물어요. 장 끝의 '더 읽기' 박스도 친절했어요. 다음에 읽을 책을 난이도 별점까지 붙여서 알려 주거든요. 가완디 장 끝에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별 두 개로 소개하고 있어요.


읽는 순서도 자유예요. 파트 순서대로 읽기를 추천하긴 하지만, 목차에서 손이 멈추는 문장부터 들어가도 된다고 해요. 파트마다 '지금 하는 모든 일이 부질없어 보일 때 꺼내라', '다짐이 자꾸 흐려지고 미뤄 둔 일이 쌓여 갈 때 꺼내라' 같은 처방이 붙어 있어서 상비약 같은 느낌도 들고요.

PART 2의 윌리엄스 장은 질문을 거꾸로 던져요. 죽음이 나쁘다면, 죽지 않는 건 좋은 일일까. 300년 넘게 늙지 않고 이름을 바꿔 가며 산 오페라 가수 엘리나가 나오는데, 차페크의 희곡 〈마크로풀로스 사건〉 이야기예요. 밥을 먹으려고 살아 있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쓰던 소설을 끝내고 싶다거나 딸이 어른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은 내일도 살고 싶게 만든다는 구분이 꽤 선명하더군요.


여기 붙은 리허설은 유난히 반가웠습니다.

"이번 주에 가장 기다려지는 일 하나를 떠올려 보라. 그 일을 매주 되풀이해도 지금처럼 기다려질까. 아니라면, 매주 되풀이해도 기다려질 일은 무엇인가."

요즘 제게 제일 기다려지는 일은 새 책이 오는 날이거든요. 매주 되풀이해도 지금처럼 설렐지는 장담 못 하지만, 아직은 새 책 소식만 들어도 들뜨는 걸 보면 꽤 오래갈 것 같아요. 존 마틴 피셔라는 철학자는 좋은 음식이나 음악,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처럼 몇 번을 되풀이해도 다시 좋은 즐거움이 있다고 했대요.


되풀이해도 좋은 즐거움.

이 장은 어느 한쪽 편을 들어 주지 않고 끝나는데, 저는 그게 오히려 좋았어요.

〈죽음 리허설〉에서 제일 현실적인 장을 꼽으라면 PART 3의 가완디 장일 거 같아요. 부모님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은 나이라서인지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어요. 완화의료 전문의 수전 블록은 척수 종양 수술을 받은 일흔네 살 아버지에게 출혈이 생겨서, 몇 분 안에 아버지 대신 재수술 여부를 골라야 했대요. 다행히 수술 전날 아버지에게 물어 둔 답이 있었다고 해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고 텔레비전으로 미식축구를 볼 수 있다면, 나는 계속 살고 싶다."

거창한 철학도 아니고, 아이스크림과 미식축구라니.

그런데 그 소박한 문장 하나 덕분에 그 급박한 순간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가족이 짐작한 환자의 뜻이 세 번에 한 번꼴로 실제와 어긋났다는 연구도 나오는데, 우리 식구들이 정말 뭘 원하는지 제가 알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리허설은 '이것만 있으면 나는 계속 살고 싶다'는 문장을 완성해 보라고 하고, 내가 말할 수 없게 된 날 나 대신 결정할 사람이 그 문장을 알고 있는지 묻습니다.


요양원에 잉꼬 100마리와 개, 고양이, 화분을 들였더니 약 처방이 근처 요양원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돌볼 것이 생기면 아침에 눈을 떠야 할 이유가 생긴다는 설명이 붙어 있고요. 이 장은 이 문장으로 정리되는 거 같아요.

"결국 우리의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좋은 삶이다."

PART 4는 제 또래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파트 같습니다. 카스텐슨 장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시간이 넉넉하다고 느끼면 나중을 위한 약속이 지금을 위한 약속을 앞서기 쉽다. 도움이 될 사람과의 약속은 먼저 잡고, 가족은 다음에 봐도 된다며 미룬다."

업무 약속은 칼같이 잡으면서 식구들과의 저녁은 자꾸 다음으로 밀리는 게 직장인 달력의 흔한 모양이잖아요. 그 바로 뒤에 붙은 리허설에서는 솔직히 좀 머쓱해졌어요.

"지금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여든 살에도 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한 끼를 함께한 것은 언제인가."

첫 번째 질문의 답은 금방 나오는데, 두 번째 질문에는 날짜가 선뜻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노인들은 남은 시간에 맞춰 만날 사람을 고르고 있었고, 사라진 관계는 대부분 인사나 나누던 가벼운 사이였다는 연구 결과도 함께 나와요.


이어지는 얄롬 장에서는 자기 죽음을 실감하고 삶이 바뀌는 순간을 '각성 경험'이라고 부르는데, 꼭 큰일이 아니어도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이나 앞자리가 바뀌는 생일, 은퇴가 그 순간이 될 수 있대요. 앞자리 바뀌는 생일이 머지않은 사람으로서는 흘려듣기 어려운 얘기였어요.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을 훨씬 많이 후회한다는 연구, 결정한다는 뜻의 decide가 '잘라 낸다'는 라틴어에서 왔다는 이야기, 미루는 것도 하나의 결정이라는 말까지 이어지는데, 나중으로 미뤄 둔 일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 대목에서 뜨끔하실 거 같아요. 그림을 배울지 1년째 고민만 하는 사람은 그림이 자기에게 의미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예시에선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책 생김새도 예뻐요. 연보라 표지 한가운데 일식처럼 생긴 검은 원이 있고, 안에서는 장마다 표지 색이 보라, 초록, 와인색으로 바뀌면서 사상가 이름이 필기체 영어로 크게 박혀 있어요. 두께는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고, 부록으로 '남은 삶에 묻는 스무 가지 질문'까지 붙어 있어요. 한 번 읽고 꽂아 두기보다는, 파트마다 적힌 '꺼낼 때'에 맞춰 다시 펼쳐 보기 좋은 책이라 소장 가치도 충분하다고 봐요. 프롤로그 끝에 이런 문장이 있거든요.


"그들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남긴 글을 펼치면, 그들은 아직 대답한다."

11월 들어 첫 수요일, 은행잎이 노랗게 내려앉는 늦가을에 죽음 이야기라니 좀 쓸쓸할 줄 알았는데, 〈죽음 리허설〉은 오늘을 챙기라고 등을 살살 떠미는 책이었어요. 연말이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때라 더 그렇게 느껴졌나 봐요.


리허설은 이만하면 충분히 한 것 같으니, 본공연은 최대한 늦게, 아주 아주 늦게 올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죽음 리허설〉 덕분에 미뤄 둔 저녁 약속부터 하나 잡아 볼까 싶어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한결 정돈된 기분입니다.


내 장례식의 구경꾼 자리에서 출발해, 오늘 누구와 한 끼를 먹을지까지 데려다주는 늦가을의 인문 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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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한 나를 끌어내는 법
에이미 커디 지음, 이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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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하버드 교수도 "나는 가짜"라고 느꼈다,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서평


"때로 내가 직장에서 성공을 거둔 게 사실은 뭔가 착오가 있어서 잘못 평가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문장에 '예'라고 답할 직장인, 생각보다 많을 거 같아요.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실린 가면감정 측정 문항 가운데 하나인데, 저도 속으로 '예' 쪽에 동그라미를 치게 되더라고요. 아는 척, 괜찮은 척, 다 알고 있는 척. 하루에도 몇 번씩 짓는 그 표정에 심리학 이름까지 붙어 있다니 반갑기도 하고 조금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파워포즈라는 말도 이 책에 자주 나와요. 아재 귀에는 파워포인트 신기능처럼 들리기 딱 좋은 이름인데, 몸을 크게 펼치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더군요.

표지에는 연한 하늘빛 그물 같은 공간 한가운데, 무지개 망토를 두른 작은 실루엣이 한 팔을 번쩍 들고 서 있어요. 2017년에 처음 나왔던 책이 올가을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고, 원제는 〈Presence〉예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처음엔 살짝 겁이 났는데, 사람 사연이 많아서 생각보다 술술 넘어가는 편입니다.


책은 북카페 장면으로 문을 엽니다. 글을 쓰던 저자에게 점원 페테인이 다가와서, 의과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르기 전에 화장실에서 '원더우먼' 자세로 서 있었던 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고 고마워하는 장면이에요.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직했던 사회심리학자 에이미 커디는 2012년 테드 강연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렇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자주 찾아온다고 하더라고요.


여기까지만 보면 밝은 성공담 같은데, 프롤로그는 금세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열아홉 살 대학 2학년 때, 친구 둘과 번갈아 운전하며 밤길을 달리다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와이오밍 주 한복판, 새벽 4시 무렵이었고, 뒷자리 침낭에서 자던 저자는 차 밖으로 튕겨 나갔대요. 외상성 뇌손상이었습니다. 의사들은 "대학을 졸업할 기대는 마세요."라고 했고, 6개월쯤 지나 찾아온 가까운 친구 둘은 "넌 분명 우리가 알던 예전의 그 친구가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친구들의 그 한마디가 참 아프게 들렸어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니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러움에 죄의식까지 느꼈다고 하니까요. 남들이 하는 말의 절반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처럼 들렸다는 대목도 있어요.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저자는 사고 이전의 자신인 것처럼 지내려고 애썼고, 그 시절을 이렇게 돌아봐요.


"내가 마치 내 몸에 침입한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

공부하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학습 동아리에도 들어간 끝에, 동급생들보다 4년 늦게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기꾼.

이 단어가 책 전체를 꿰는 실 같아요.

4장으로 가면 이 단어가 연구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심리학자 클랜스가 오벌린대학 상담센터에서 만난 학생들은 시험 성적도 좋고 추천장도 많이 받은 학생들이었는데, 그런 학생들이 "제가 이 학교에 입학한 건 순전히 오벌린대학의 실수입니다"라고 말했대요. 클랜스와 동료 수전 임스는 이를 '가면현상'이라 부르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성취도가 높은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겼지만, 1985년에 이르러 남성도 똑같은 감정을 겪는다는 걸 알게 됐대요.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의 저자도 테드 강연 뒤에 자신이 가면을 쓴 것처럼 느껴진다는 메일을 수천 통 받았는데, 그중 절반은 남성이 보낸 거였다고 하네요.

같은 직장인으로서 오래 생각하게 된 대목은 강연을 마친 저자에게 다가온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의 고백이에요.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대요.


"사실 저는 매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제가 가당치도 않게 사업가의 가면을 쓰고 있는 사기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나이도 비슷하고, 아침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처지도 같아서 그런지 남 얘기 같지가 않았어요. 책에는 남자는 강인하고 늘 자신감에 차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자기불신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그 끝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남성은 이 짐을 비밀리에, 조용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짊어질 수밖에 없다."

회의 자리에서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한마디가 왜 그렇게 꺼내기 어려운지, 이 문장 앞에서 조금 알 것 같더라고요.


대학 행정처 직원 데이비드의 메일도 기억에 남아요. 실제로는 50점짜리인데 세상 사람들은 90점이나 받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상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 "아, 돌겠네. 진짜!" 한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다가도 짠해지더군요. 작가 닐 게이먼조차 처음 18개월 동안은 누가 와서 가짜에 사기꾼이라고 하면 "예, 맞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거라고 하니, 정말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인가 봐요.


클랜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이걸 '가면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대요. 증후군이나 콤플렉스, 정신 질병이 아니니까요.

"그건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거든요."

이 말이 은근히 위로가 됐습니다.

그럼 저자는 그 가면을 어떻게 벗었을까요. 실마리는 대학원 첫해의 한 장면에 있어요. 20분짜리 발표가 너무 두려워서 학업을 그만두겠다는 저자에게 상담사 선생님이 해준 말이 있거든요.


"설령 그게 잘하는 척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프롤로그에 나온 "진짜로 이루어질 때까지 진짜로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여기서 짐작이 갑니다. 하버드에서 "저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어요"라며 우는 여학생을 마주하는 장면도 이어지는데, 그 대목은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솔직히 처음엔 살짝 걸리는 마음이 있었어요. 자세 하나 바꾼다고 사람이 얼마나 달라질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책도 그 부분을 슬쩍 넘어가지는 않더군요. 면접관 앞처럼 도전이 한창 진행 중인 자리에서 파워포즈를 취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선을 긋고, 효과가 계속 이어지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까다롭고 어려운 질문임이 분명하다"고 털어놓기도 해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주니 귀가 더 열리더라고요.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 제일 손이 많이 갈 것 같은 장은 9장이에요. 까다로운 도전을 앞두고 몸을 크게 펼치라는 대목은 이렇게 맺습니다.


"도전이 기다리는 방으로 걸어 들어갈 때쯤이면 뇌도 온전히 활성화되어 있을 것이다. 일종의 준비운동이라고 생각하라."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몸을 펼 만한 곳으로 엘리베이터, 화장실, 계단을 꼽는 것도 현실적이고요. 사람들이 메일로 들려준 파워포즈가 도움이 된 순간들에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때, 비판적 평가를 받거나 주기 전, 그리고 직장에 사직서를 낼 때까지 들어 있어요. 마지막 항목에서는 괜히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직장인이 바로 써먹을 만한 건 '하루 종일 자세에 신경 써라' 쪽이에요. 한 시간에 한 번 스마트폰 알림으로 자세를 확인하고, 모니터 위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믿을 만한 동료에게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말해달라고 부탁하라는 식입니다. 마우스를 일부러 몸에서 먼 곳에 두는 동료, 양치질할 때 한 손을 허리춤에 대는 조교 이야기도 나와요. 사무실 공기가 서늘해지는 요즘 같은 철에는 이 문장이 딱 맞더군요.


"숄, 스카프, 담요, 카디건 따위로 몸을 감싸고 그 속에서 태아 자세로 웅크리지 마라. 차라리 옷을 여러 겹 껴입어라."

무릎 담요 덮고 동그랗게 웅크리는 게 겨울 사무실의 국룰인 줄만 알았는데 말이죠.

펭귄 팔 이야기도 있어요. 불안할 때 겨드랑이부터 팔꿈치까지를 옆구리에 붙인 채 팔 끝만 움직이는 자세인데, 저자가 괄호 안에 "독자도 이 동작을 지금 당장 해보기 바란다."라고 슬쩍 덧붙여 놨어요. 교수님이 강의하다 말고 시키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10장으로 넘어가면 자기넛지라는 말이 나와요. 거창한 결심 대신 작은 행동으로 스스로를 살짝 떠미는 방법인데, 이 문장이 참 좋았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넛지를 할 때, 이 사람은 건축가가 되고 동시에 건물이 된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한 초등학교에서 했던 실험도 흥미로웠습니다. 사실은 아무 근거도 없는 '성적이 오를 학생' 명단을 받은 교사들이 그 학생들을 더 많이 격려하고 학습 기회를 더 주었더니, 1년 뒤 정말 점수가 훨씬 좋아졌다는 내용이에요. 저자가 이어서 "이번에는 당신이 기업의 상사이고" 하고 물어오는데, 그 질문 앞에서는 직장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뜨끔할 것 같아요.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후반부에서 제일 정이 간 건 저자의 달리기 이야기예요. 해마다 새해가 되면 달리기 전문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가, 1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포기하곤 했대요. 그러다 딱 한 번만 달리기로 마음먹고, 기분 좋게 느낄 수 있는 속도로만 달렸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여행과 달리기를 엮으면서 트레일러닝의 즐거움도 알게 됐고요. 마라톤 완주는 앞으로도 못 할지 모른다면서 이렇게 덧붙여요.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게 중요하다."

조금 앞에 나온 시카고의 한 고등학교 이야기와도 이어지는 느낌이에요. 〈마인드셋〉의 저자 캐럴 드웩이 소개한 그 학교는 졸업하려면 꼭 들어야 하는 과목을 통과하지 못한 학생에게 '아직Not Yet'이라는 학점을 준대요. 아직이라는 두 글자에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회의 전마다 어깨가 움츠러드는 분이나, 잘해놓고도 "운이 좋았죠"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분이라면 꽤 반가운 책일 거 같아요. 심리학 연구 이야기가 많은데도 사람 사연이 촘촘히 끼어 있어서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9장의 자세 팁은 책상 가까이 두고 가끔 다시 펼쳐 보기 좋아서 소장할 맛도 나고요.


11월 첫 수요일이에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워져서 자꾸 몸이 움츠러드는 계절인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덕분에 어깨부터 한번 펴 보자는 마음이 드네요. 올해 달력도 딱 두 장 남았으니, 내년 결심은 거창하게 세우지 말고 딱 한 번씩만 해볼 생각이에요. 펭귄 팔은 펭귄한테 돌려주고요. 좋은 책 하나 만나서 이번 주는 가슴 펴고 걷는 기분입니다.


열아홉 살의 사고, 그리고 하버드 교수도 피해 가지 못한 가면감정을 지나, 몸을 펴는 작은 습관에서 자존감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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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지음 / 정보문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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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비서, 파워 쿼리는 자동 절차! 연말 앞둔 직장인의 엑셀 책 - 회사 실무에 힘을 주는 엑셀 2024



표가 단정해 보여서 기분까지 좋아지는 버튼이죠.

그런데 그 버튼이 나중에 필터와 피벗 테이블을 꼬이게 만드는 주범일 수 있다는 걸 〈회사 실무에 힘을 주는 엑셀 2024〉에서 제대로 알게 됐어요. 2019판과 2021판에 이어 나온 시리즈 최신판이고, 기본·활용·함수·실무 네 파트에 예제가 165개나 들어 있습니다.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들고 다니기만 해도 팔에 먼저 '실무의 힘'이 붙을 것 같더군요.


11월 첫 주 수요일입니다. 은행잎은 거의 다 떨어졌고 회사 안은 슬슬 연말 보고서 분위기가 나기 시작하는 때라, 엑셀 책이 유난히 반가운 거 같아요.


저자 서정아 님은 기업 연수원과 공무원 교육기관에서 엑셀을 가르쳐 온 강사라고 해요. 그래서인지 저자의 글부터 현장 냄새가 납니다. 같은 결과를 내더라도 기능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소요 시간이 몇 배에서 수십 배까지 벌어진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데요.


"단순한 기능 습득을 넘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업무 생산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된 것입니다."

수십 배라니, 좀 뜨끔하더라고요.

이번 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AI 이야기예요. 기본 기능 파트의 마지막인 Section 50이 'AI에게 효과적으로 물어보기'인데, 첫 문장이 이렇습니다.

"AI는 '대신'이 아니라 '도와주는 비서'입니다."

질문 공식도 깔끔해요. 상황, 데이터 모양, 원하는 결과, 제약 조건 이 네 가지만 넣어 주면 성공률이 올라간다고 하고,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템플릿도 세 가지나 실려 있어요.

같은 직장인으로서 오래 생각하게 된 대목은 '좋은 질문 vs. 나쁜 질문' 비교였어요. 나쁜 질문 예시가 "엑셀에서 IF가 안 돼요."와 "데이터 정리 좀 해 줘요."인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죠. 그 위 POINT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AI도, 사람도 추가 질문이 늘어나고 시간적으로도 손해입니다."

AI 사용법을 설명하는 자리인데 회사에서 일을 주고받는 요령처럼 읽혀서 웃음이 났어요. 후배한테 일을 맡길 때 범위와 예시부터 또렷하게 말해 주고 있는지, 저도 한번 돌아보게 되는 문장이더라고요.


다시 병합 셀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활용 파트의 Section 30과 31이 짝을 이룹니다. 30에서는 출판사 이름이 병합된 도서목록표를 풀어서 빈칸 없이 채우는데요. AI에게 보낸 프롬프트와 AI가 내놓은 답을 먼저 보여 주고, 그다음 실제 화면으로 따라 하게 해요. 순서는 병합 해제, 이동 옵션에서 빈 셀 선택, '=A4' 입력 후 Ctrl+Enter, 마지막으로 값만 붙여넣기예요.


Ctrl+Enter 한 번에 빈 셀이 바로 위 출판사명으로 한꺼번에 채워지는 장면은 꽤 통쾌했어요.

31은 반대로 같은 텍스트를 다시 병합하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AI에게 VBA 코드를 짜 달라고 합니다. 코드가 지면을 길게 차지하고 있어서 처음엔 좀 겁이 나요. 그런데 막상 할 일은 '사용 방법(짧게)'에 적힌 네 줄이 전부예요. Alt+F11로 편집기를 열고, 모듈을 삽입하고, 붙여 넣고, Alt+F8로 실행하면 끝이에요. 파일을 닫을 때 뜨는 매크로 경고창에서 무엇을 누르면 되는지까지 짚어 주는 걸 보면, 초보가 어디서 멈칫하는지 잘 아는 분이 쓴 책 같아요.


함수 파트에서는 XLOOKUP이 반가웠습니다. VLOOKUP 하나로 버텨 온 사람이라면 이 POINT 한 줄에 귀가 솔깃할 거예요.


"XLOOKUP 함수는 VLOOKUP 함수에서는 안 되었던 검색 값 기준의 왼쪽 데이터 추출도 가능합니다."

찾는 값보다 왼쪽에 있는 열을 가져오려고 열 순서를 이리저리 바꿔 본 분들, 꽤 계실 거 같은데요.

GROUPBY도 흥미롭더군요. =GROUPBY(지역,매출액,SUM) 한 줄이면 지역별 합계가 나오고, 여기에 FILTER를 끼우면 판매채널이 온라인인 데이터만 따로 묶입니다. 원본에 표 서식이 걸려 있으면 데이터를 추가해도 결과에 바로 반영된다니, 피벗 테이블 필드를 끌어다 놓던 수고가 수식 하나로 줄어드는 셈이에요.


〈회사 실무에 힘을 주는 엑셀 2024〉의 진짜 재미는 실무 파트 끝자락에 있는 파워 쿼리 세 장에 몰려 있는 거 같아요. Section 13 도입부의 이 문장이 세 장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해 줍니다.


"데이터 정리를 '작업'이 아니라 '자동화된 절차'로 바꾸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제가 쉬워서 좋았어요. 지점별로 1월부터 6월까지 옆으로 늘어선 크로스탭 표를 열 피벗 해제로 세로로 세우면 60행이 360행이 됩니다. 여기에 7월 데이터를 붙이고 새로 고침을 누르면 420개로 바로 반영돼요. 크로스탭이 "사람이 보기에는 편리하지만, 엑셀에서 데이터를 분석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라는 설명에는 무릎을 치게 되더라고요.


Section 14는 매출 데이터와 제품 마스터를 '제품 코드'로 이어 붙이는 장이에요. VLOOKUP과 비교하는 대목이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VLOOKUP은 행이 늘어나면 수식을 고쳐야 하고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파일이 무거워지는데, 파워 쿼리는 새로 고침만으로 반영된다는 거죠. 조인 종류 여섯 가지를 벤다이어그램과 함께 정리한 표는 따로 떼어 책상 앞에 붙여 두고 싶을 만큼 깔끔하고요.


그리고 Section 15.

매달 쌓이는 엑셀 파일을 폴더째 불러와 하나로 합치는 내용이에요. 파일 세 개를 취합해 180개 행을 만든 다음, 빼 두었던 4월 파일을 폴더에 다시 넣고 새로 고침을 누르면 240개가 됩니다.

"파일을 추가하더라도 새로 고침만으로 데이터가 자동 반영됩니다."

월말마다 파일을 하나씩 열어 복사하고 붙여 본 분이라면 이 장면에서 한숨 반, 탄성 반이 나올 거예요. 새로 고칠 때마다 열 너비가 바뀌지 않게 하는 설정까지 챙겨 주는 마무리도 세심하더군요.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버전이에요. 표지에는 2013부터 Office 365까지 모든 버전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XLOOKUP은 엑셀 2021과 Microsoft 365에서, GROUPBY는 Office 2024 이상에서만 쓸 수 있다고 해당 장 도입부에 적혀 있습니다. 최신 함수 장을 펼치기 전에 회사 PC의 엑셀 버전부터 한번 확인해 보시면 마음이 편할 거 같아요. 〈회사 실무에 힘을 주는 엑셀 2024〉가 그런 사용 가능 버전을 장 도입부에 미리 밝혀 두어서, 따라 하다가 헤맬 일은 적어 보였어요.


구성은 사전처럼 찾아보기 좋게 짜여 있어요. 기본부터 차례로 따라가도 되고, 필요한 Section만 골라 펼쳐도 됩니다. 엑셀을 막 시작하는 신입 때 만났으면 좋았겠다 싶다가도, 함수 이름은 대충 아는데 매번 검색창부터 여는 지금 같은 때 더 쓸모가 큰 책 같기도 해요. 〈회사 실무에 힘을 주는 엑셀 2024〉는 한 번 읽고 꽂아 두기보다 책상 옆에 두고 자꾸 꺼내 보게 되는 쪽이라,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고 퇴근길 해도 부쩍 짧아졌어요. 연말 보고서 시즌을 앞두고 〈회사 실무에 힘을 주는 엑셀 2024〉 덕분에 든든한 비서 하나 들인 기분입니다.

다가오는 겨울엔 야근 말고 새로 고침 버튼으로 퇴근해 볼 생각이에요. 좋은 책 만나서 이번 주가 괜히 든든하네요.


병합 셀 해제부터 AI 질문법, 새로 고침 한 번으로 끝나는 파워 쿼리까지, 반복 업무를 '절차'로 바꿔 주는 늦가을의 든든한 엑셀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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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프렌즈 구마모토·아소·히타 - 최고의 휴가를 위한 스마트 가이드북, 2027~2028년 최신판 ㅣ 베스트 프렌즈 시리즈 14
전상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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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구마모토를 그저 골프 치러 가는 곳 정도로 생각했다면 유감이다."


책 앞쪽 키워드 꼭지에 대뜸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 살짝 뜨끔했어요. 제 머릿속 구마모토가 딱 그 정도였거든요. 골프, 그리고 볼 빨간 검은 곰 한 마리. 아소는 화산 있는 동네, 히타는 이름부터 낯선 곳이었고요. 그런데 <베스트 프렌즈 구마모토·아소·히타>를 넘기다 보니 후쿠오카에서 멈춰 있던 제 규슈 지도가 아래로 쑥 넓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11월 첫 화요일이에요. 월요일을 간신히 넘기고 나면 몸은 무거운데, 여행책은 펼치기만 해도 연차가 며칠 남았는지부터 세어 보게 되니 신기하더라고요. 서평단 시작하고 생긴 버릇 중에 제일 즐거운 버릇 같아요.


<베스트 프렌즈 구마모토·아소·히타>는 표지부터 기분이 좋습니다. 버터처럼 연한 노란 바탕에 하늘색 노면전차, 그 뒤로 초록 숲 위에 올라앉은 구마모토성이 있어요. 위쪽엔 "알차다, 편하다, 가볍다" 말풍선 세 개가 줄줄이 달려 있고요. 보통 여행 가이드북보다 확실히 얇고 길쭉해서 가방 옆주머니에 꽂아도 될 크기예요. 이렇게 가벼운 책인데 히타에는 무게 1,000kg짜리 일본 최대 게타가 있다고 하니, 책이 덜어낸 무게를 나막신 한 짝이 다 가져간 모양입니다.


처음엔 사진 예쁜 책인가 보다 했어요. Must Do List 사진들이 워낙 시원시원하거든요. 하늘로 휘어 올라간 구마모토성 석축, 이끼 낀 돌계단 끝에 도리이가 서 있는 가미시키미 쿠마노이마스 신사, 단풍 사이로 두 줄기 물이 떨어지는 다카치호 협곡까지요. 그런데 본문으로 들어가니 진짜는 꼭지마다 붙은 작은 글씨더군요. 운영 시간, 요금, 가는 방법, 그리고 지도 키워드와 맵코드가 다 붙어 있어요. 구글 지도나 렌터카 내비에 그대로 찍으면 되는 숫자들이에요. 아소 쪽은 대중교통으로 다니기 힘들어 렌터카를 권한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럴수록 이 숫자들이 든든하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책을 읽다 보면 저자 말투가 꽤 솔직해서 웃게 돼요. 구주산 쪽 농가 레스토랑 베벤코는 "음식 가격이 다소 비싸고 주문과 서빙을 직접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멋진 풍경이 단점을 모두 잊게 한다"고 소개해요. 구로카와 저지우유 직판장에선 플레인 요구르트가 무겁고 단맛이 없어 호불호가 갈린다고 미리 일러 주고요. 히타 양갱 가게 꼭지에는 "어쩔 수 없이 대용량으로만 살 수 있다는 점은 아쉽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대용량이라니요. 그건 아재들한테 아쉬운 점이 아니라 장점입니다. 좋은 말만 늘어놓는 안내서는 왠지 덜 믿게 되는데, 단점을 이렇게 같이 꺼내 놓으니 나머지 칭찬도 믿고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저자 소개에는 "철이 다 들기 전에, 양쪽 무릎 연골이 나가기 전에 일본 전국을 두 발로 정복하는 꿈"이 있다고 쓰여 있어요. 이 대목에서 제 무릎 사정부터 떠올랐습니다. 매달 한두 번 일본을 오간다는 분이 쓴 책이라 그런지, 문장마다 직접 걸어 본 사람의 계산이 묻어 있는 느낌이에요. 구사센리 주차장은 성수기 주말 오전 9시면 거의 찬다고 하고, 아소 신사 앞 몬젠마치 상점가는 식사를 안 하면 10~20분이면 충분하대요. 구로카와 파티세리 로쿠는 오후 1~2시면 빵이 다 팔린다고 하고요.


유독 속도를 늦춰 읽게 된 건 구마모토성 꼭지 끝에 붙은 '구마모토성 곳곳에 남은 우리 역사'였어요.


세이난 전쟁 때 사쓰마군을 이끌었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나는 정부군에게 패한 것이 아니다. 기요마사공에게 패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해요.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가볍지 않더라고요. 성을 쌓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울산성 전투에서 식량과 물이 바닥나 처참한 상황까지 몰렸던 사람이에요. 거기서 익힌 축성 기술과 조선에서 끌고 간 도공들의 기술로 구마모토성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성 안에 우물을 120개 넘게 파고, 먹을 수 있는 토란 줄기로 다다미를 짠 것도 장기전에 대비한 거라니 울산에서의 일이 자꾸 겹쳐 보였어요. 기요마사 동상은 지금도 울산과 반대 방향을 보고 서 있다고 하고요. 성 바로 옆에는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울산마치'라는 이름이 노면전차 역 이름으로 남아 있대요.


그냥 지나쳤다면 멋진 성 사진 몇 장 찍고 끝났을 곳이에요. 이 사연을 알고 성벽을 올려다보면 같은 돌도 다르게 보일 거 같습니다. 꼭지는 악연이었던 두 도시가 오늘날 울산광역시와 구마모토시로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는 문장으로 끝나요. 그 한 줄에서 마음이 조금 풀리더군요.


같은 꼭지에 은행나무 이야기도 있어요. 가토 기요마사가 "이 은행나무가 천수각만큼 자랐을 때 이 성에서 병란이 일어나겠지"라고 했는데, 실제로 세이난 전쟁 때 천수각과 그 앞 은행나무에 큰불이 났다고 해요. 불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올라와 지금도 천수각 앞을 지키고 있어서 구마모토성을 '은행나무성'이라고도 부른대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사진이 함께 실려 있는데, 마침 은행잎 지는 계절이라 그런지 그 사진에 눈이 자꾸 갔어요.


아소 파트로 넘어가면 사진의 결부터 달라집니다. 하늘이 반, 초원이 반이에요. 나카다케 화구는 지름 600m, 깊이 130m인데, 분화 상황과 화산가스에 따라 그때그때 출입이 바뀌어서 "운이 좋아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네요. 천식, 기관지 질환, 심장질환이 있으면 출입할 수 없다는 안내에서 건강검진 결과지가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저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봐요.


기시마다케는 아소 5악 중에 하이킹 난도가 가장 낮아서 계단으로 30분쯤이면 오른다고 해요. 나카다케 화구 뒤로 해가 떠오르는 사진이 여러 장 이어지는데, 주황빛 연기가 하늘로 번지는 걸 보니 매일 보는 해랑 같은 해가 맞나 싶었어요. 다이칸보 사진 중에는 모자 쓴 두 분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칼데라를 내려다보는 뒷모습이 있어요. 설명 한 줄 따로 붙은 것도 아닌데 그 사진이 좋았습니다. 회사 일에 쫓겨 굴러가다 보면 나중에 저렇게 앉아 있을 날이 오긴 할까 싶기도 하고요.


구로카와 꼭지는 읽기만 해도 어깨가 풀리는 거 같아요. 작은 마을에 온천 딸린 료칸이 30곳 가까이 모여 있고, 온천 마패 하나로 그중 25곳 가운데 3곳을 골라 들어갈 수 있대요. 어른 ¥1,500에 유효기간은 6개월이고, 여러 명이 한 장을 나눠 써도 된다고 해요. 수건 없는 곳이 많다는 안내도 있고, 당일치기라면 오히려 비쌀 수 있으니 2박 이상 머물 때 사라는 팁도 붙어 있어요. 노천탕 BEST 5 중에서는 사람이 직접 팠다는 신메이칸 동굴탕이 제일 궁금했어요. 대나무 봉을 잡고 서서 들어가는 이코이 료칸은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요. 연말부터 3월 말까지는 마을 전체에 등불이 걸린다니 벌써 마음이 바빠집니다.


맛보기로 한 대목만 옮겨 볼게요. 히타를 소개하는 문장이에요.


"예로부터 물이 맑기로 유명해서 간장과 술이 맛있는 지역이며 농산물의 품질이 좋아서 어느 집을 가도 평균 이상의 맛을 낸다."


어느 집을 가도 평균 이상이라니요. 메뉴 골랐다가 실패할까 걱정 많은 중년한테는 이만한 보증이 없는 거 같아요. 히타 간장집은 모든 제품을 맛볼 수 있고 한글 표기까지 되어 있대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만능 간장'으로 통하는 고레잇폰이 인기라고 하고, 간장 소프트아이스크림이라는 것도 있더군요. 그러고 보니 이 책엔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정말 끝없이 나와요. 다이칸보, 뉴쿠사센리, 고겐도, 밀크랜드팜, 야마다산치 목장까지요. 키워드 꼭지에 유제품이 따로 한 자리를 차지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히타는 (진격의 거인)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고향이라 도시 전체를 작품으로 꾸며 놨다고 해요. 키워드 꼭지에 "신조오 사사게요(심장을 바쳐라)!" 구호까지 넣어 둔 걸 보면 저자도 이 부분은 신나서 쓴 게 아닐까 싶어요. 스탬프북 구입, AR 촬영을 위한 VPN 앱 설치, 조사병단 망토는 국내에서 1만 원대에 미리 사 가라는 준비물 안내까지 꼼꼼하더라고요. 덕질에도 준비물이 있다는 걸 덕분에 배웠어요.


솔직히 마음에 걸린 건 제 체력 쪽이었어요. 히타 꼭지에 '12시간 렌터카 본전 뽑는 코스'가 있거든요. 아침 8시에 차를 받아 댐, 언덕의 나무, 박물관, 맥주 공장, 온천, 다케다 공원 일몰, 저녁 식사까지 돌고 밤 8시에 기름 채워 반납하는 일정이에요. 보기만 해도 알차고 신나는데, 운전대를 열두 시간 붙잡고 있을 제 허리가 따라와 줄지는 자신이 없더군요. 아소와 구로카와 쪽도 렌터카를 권하는 대목이 많으니, 운전이 부담스럽다면 일정을 넉넉하게 잡는 쪽이 마음 편할 거 같아요.


이번 판은 2027~2028년 최신판이고, 2026년 9월까지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요. 목차를 보면 렌터카 이용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한 꼭지와 여행 중 지진을 만났을 때의 대처 가이드도 따로 있고, 뒤쪽에는 지역별 지도와 노면전차 노선도도 실려 있어요. 후쿠오카는 이미 몇 번 다녀와서 다음 규슈 여행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베스트 프렌즈 구마모토·아소·히타>를 펼치는 순간 행선지가 정해질 거 같아요. 들고 다니기 가벼우니 여행 내내 손이 자주 갈 것 같고요.


11월 들어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습니다. 히타 양갱집의 유자양갱은 10월부터 3월까지만 나온다니 딱 지금이 제철이에요. 구로카와 등불도 곧 켜질 테니, 이번 겨울 연차는 여기에 써 볼까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옵니다. 좋은 여행지 하나 마음속에 찜해 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네요.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늦가을 보내세요.


쿠마몬 너머 구마모토성의 우리 역사, 아소 칼데라의 초원, 구로카와 노천탕, 히타의 간장과 진격의 거인까지 가볍게 들고 다니며 챙길 수 있는 규슈 한가운데 여행 안내서


#베스트프렌즈구마모토아소히타 #베스트프렌즈시리즈 #전상현 #중앙북스 #구마모토여행 #아소여행 #히타여행 #구로카와온천 #구마모토성 #쿠마몬 #진격의거인성지순례 #규슈여행 #일본소도시여행 #여행가이드북 #렌터카여행 #일본온천여행 #2027여행 #책추천 #서평 #북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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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 ㅣ 메이트북스 슬림북 10
미셸 몽테뉴 지음,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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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400년 전 동네 형님의 솔직한 넋두리 |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 서평


빨간 표지가 먼저 손을 끄는 책이에요. 새빨간 바탕에 흰 글씨 제목이 큼직하게 들어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목에 하얀 주름 깃을 두른 몽테뉴가 옆얼굴로 서 있습니다. 표정이 근엄해서 처음엔 잔소리 꽤나 하실 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읽어보니 이 양반, 자기 얘기를 몽땅 털어놓는 스타일이더군요. 이름부터 몽테뉴라 그런가 싶었습니다.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는 편역자의 말부터 요즘 얘기로 문을 열어요. 프로필을 고르고, 잘 나온 사진을 남기고, 성취를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시대라고요. 그렇게 보여주는 일이 많아질수록 정작 실제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는 일은 뒤로 밀리기 쉽다는 거예요. 회사 메신저 프로필 사진 하나 고르는 데도 은근히 신경 쓰는 게 사람 마음이라, 첫 장부터 뜨끔한 느낌이 들었어요.


남에게 보이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나.

그 사이가 멀어지는 시대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가 조금 특이한 건 생김새부터예요. 몽테뉴가 평생 쓰고 고친 <수상록> 세 권 전체를 바탕으로 53가지 주제를 뽑아 요즘 말로 다시 풀어 쓴 편역서거든요. 완역본도 아니고 유명한 문장만 모은 명언집도 아니라고 편역자가 직접 밝혀두었더라고요. 몽테뉴처럼 한 가지 생각을 여러 방향에서 살펴보고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않는 태도를 살리고 싶었다는데, 읽어보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꼭지마다 몽테뉴가 "나는" 하고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이라, 철학 강의를 듣는다기보다는 동네 형님 넋두리를 듣는 기분에 가깝습니다.


편역자의 말에서 웃음이 났던 대목도 있어요. 몽테뉴는 사랑과 성, 식사와 수면, 병과 노화, 배변과 통증처럼 점잖은 철학책이 피하기 쉬운 문제를 거리낌 없이 다뤘대요. 배변까지 철학에 넣은 사람이라니. 기억력이 나쁜 것도 숨기지 않았고, 생각이 바뀌면 바뀐 흔적까지 남겼다고 하니 이 정도면 솔직함이 거의 체질인 분 같았어요.


몽테뉴 하면 서재에 틀어박힌 근엄한 사상가부터 떠올렸는데, 이 책 속 몽테뉴는 꽤 사람 냄새가 납니다. 보르도 시장으로 뽑혔을 때 처음엔 사양했다가 왕의 명령까지 더해지자 결국 맡았고, 두 번이나 선출됐다고 해요. 그때 시민들 앞에서 기억력과 경험은 부족하지만 야심과 탐욕, 폭력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는데, 취임 인사치고는 참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말 같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02번 꼭지, 한 번의 행동으로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였어요. 어제는 위험 앞에서 담대했던 사람이 오늘은 사소한 일에 겁을 먹고, 한때 너그러웠던 사람이 작은 이익 앞에서 인색해지기도 한다고 하죠. 사람은 우리가 설명하고 싶어 하는 만큼 한결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름표가 참 쉽게 붙는다는 걸 알게 돼요. "그 친구는 원래 좀 덜렁대", "그 팀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는 식으로요. 몽테뉴는 친절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유능한 사람, 실패한 사람이라고 빠르게 정해버리면 그 뒤로는 이름표에 맞는 행동만 골라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읽다 보니 제가 남한테 붙여둔 이름표들이 몇 개 떠오르더군요. 제 등에 붙어 있을 이름표도요.


그리고 이 꼭지의 마지막 문장.

"한 번 잘했다고 완성된 사람인 척하지 말고, 한 번 잘못했다고 자기 전부를 버리지도 마라."

남 얘기인 줄 알았는데 결국 나한테 돌아오는 말이었어요. 몽테뉴도 다른 사람에게 그래야 하지만 자신에게는 더욱 그렇다고 덧붙이거든요. 실수 하나에 며칠씩 끙끙 앓는 중년 직장인에게는 이만한 처방이 없는 거 같습니다.


03번 꼭지에서는 웃으면서 찔렸어요. 몽테뉴는 나이가 들어 욕망이 줄었다고 해서 자기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대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유혹을 덜 따르게 된 것과 더 현명해진 것은 다른 일이라고요. 나이 들어 저녁 약속 줄어든 걸 철든 증거로 여기는 중년이 저만은 아닐 텐데요. 몽테뉴 앞에서는 그냥 체력 문제였던 걸로.


그래도 이 꼭지가 놀리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몽테뉴는 자신을 한 문장으로 완성하려 하지 않는다고, 지금의 생각이 내일 달라질 수도 있고 그 변화 역시 나라고 말합니다. 어제 한 말과 오늘 생각이 다르면 체면 깎이는 것 같아 괜히 우기게 될 때가 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면 바뀐 이유를 함께 보면 된다는 얘기가 편하게 들렸어요.


요즘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보니 22번 꼭지가 특히 반가웠습니다. 몽테뉴는 박식하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책을 읽지 않았고, 길고 힘든 독서를 억지로 견디지도 않았대요. 플루타르코스의 짧은 글과 세네카의 편지를 좋아한 것도 필요한 곳에서 펼치고 원하는 때에 덮을 수 있어서라고요. 키케로처럼 훌륭한 사람의 글도 서론이 길게 이어지면 지친다는 고백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400여 년 전 대철학자도 서론 긴 건 힘들었구나 싶어서요.


"나는 인용을 세지 않고 그 무게를 잰다"는 문장도 마음에 들었어요. 몇 권 읽었나 세어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몽테뉴는 그 책으로 내가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라고 하더군요.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를 읽으며 이 블로그에 서평을 남기는 이유랑도 닮은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3번 꼭지는 회의실 풍경 그 자체예요. 논쟁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누가 이기는지부터 따지고, 생각이 막히면 목소리를 높이거나 말꼬리를 잡는다고 하죠. 그 옛날 프랑스나 지금 우리네 회의실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몽테뉴는 상대의 이유가 더 강하다면 거기에 굽히는 것도 승리라고 말해요. 대화를 마친 뒤에는 "무엇을 새로 알게 되었는가"를 묻고 싶다고요.


회의 끝나고 나오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뭐였더라.

30번과 32번 꼭지는 같이 읽으면 재미가 두 배예요. 몽테뉴는 말을 살 때는 다리와 눈, 몸 상태부터 살피면서 사람을 볼 때는 왜 옷과 신분부터 보느냐고 물어요. 칼집이 화려하다고 그 안의 칼까지 좋은 건 아니라는 비유도 이어지고요. 통풍이 찾아오면 왕도 다른 사람처럼 아프다는 대목에서는 피식 웃었습니다.


32번에서 몽테뉴는 가장 높은 자리를 바라지 않았고, 파리에서 둘째나 셋째쯤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대요. 이 나이쯤 되면 위로 올라가는 자리와 내 생활을 지킬 수 있는 자리 사이에서 저울질하게 되는데, 몽테뉴는 그 앞에서 별로 망설이지 않았던 거 같아요. 왕자들이 제대로 배우는 건 말 타기뿐이라는 말도 나와요. 말은 왕의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으니까요. 알렉산드로스가 고개를 기울이면 신하들도 따라 기울였다는 이야기, 파보리누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논쟁을 져주면서 서른 개 군단을 거느린 사람보다 자기가 더 잘 안다고 우길 수 있겠느냐며 웃었다는 일화까지. 높은 자리일수록 솔직한 말을 듣기 어렵다는 얘기를 이렇게 재밌게 풀어놓으니 술술 읽히더라고요.


33번 꼭지는 첫 문장부터 마음에 들어왔어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빌려줄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은 나에게 남겨두어야 한다."

몽테뉴의 아버지도 같은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대요. 늙은 몸과 건강, 집안의 평온까지 잊을 만큼 도시 일에 자신을 내맡겼다고 해요. 몽테뉴는 그 선의를 존경했지만 그 방식까지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고 밝힙니다. 일에 모든 걸 쏟아부은 윗세대를 보며 자란 사람이라면 이 몇 줄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책임은 다하되 그 일이 영혼을 모두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되고, 지나친 열정은 오히려 판단을 흐린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되, 내 힘 밖의 결과까지 끌어안지는 않겠다고요. "세상의 모든 짐을 내 마음속에 들여놓을 필요는 없다"는 문장은 월요일 아침마다 한 번씩 꺼내 보고 싶더라고요.


솔직히 걸렸던 부분은 48번 꼭지였어요. 몽테뉴는 늙어서 그리스어를 새로 배우기 시작한 카토의 열정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해요. 좋은 일에도 제때가 있다고요. 이 나이에 와서야 책 읽는 재미를 붙인 사람으로서는 순간 서운하더군요. 늦게 시작한 게 죄인가 싶어서요.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문단에서 마음이 풀렸어요.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를 멈추라는 뜻은 아니래요. 공부는 언제든 이어갈 수 있고, 다만 늘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살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지금 삶에 맞는 공부를 하고 이미 배운 것을 더 잘 쓰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면 된다고요. 몽테뉴가 정말 경계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몸은 늙는데 욕망은 계속 젊어지는 것. 무덤에 한 발을 두고도 새 집을 짓는다는 비유 앞에서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망설여졌어요.


몽테뉴는 이제 가장 긴 계획도 한 해를 넘기지 않으려 한다고 해요. 무엇을 더 시작할지만 묻지 않고 무엇을 누리고 마치고 놓아줄지도 생각하겠다는 말이 이 나이에 듣기 딱 좋았습니다. 회사는 여전히 삼 년짜리 계획표를 들이밀지만요.


49번 꼭지는 조금 더 차분하게 읽혔어요. 우리는 일흔이나 여든까지 사는 걸 당연한 몫처럼 여기지만, 자연은 누구에게도 몇 살까지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예요. 그렇다고 내일 죽을 사람처럼 모든 일을 서두르라는 뜻은 아니라고 하고요. 다만 시간이 많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해야 할 말과 선택, 책임을 이유 없이 미루지는 말라고 합니다.


미뤄둔 말들이 몇 개 떠올랐어요.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는 메이트북스 슬림북 시리즈 중 한 권이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얇은 책이에요. 저보다 훨씬 날씬해서 살짝 질투가 날 정도. 한 꼭지가 짧아서 아무 데나 펼쳐도 되고, 마음이 복잡한 날 목차에서 지금 필요한 제목 하나 골라 읽기에도 좋아요. 필요한 곳에서 펼치고 원하는 때에 덮을 수 있는 책을 좋아했다는 몽테뉴의 취향이 책 모양에 그대로 담긴 것 같더라고요. <수상록>을 통째로 읽을 엄두는 안 나는데 몽테뉴가 어떤 사람인지는 궁금했다면 이만한 입구가 없을 거 같습니다. 책상 옆에 두고 오래 꺼내 볼 책으로 손색이 없어요.


어느새 11월 첫 주, 월요일을 겨우 넘기고 맞은 화요일입니다. 길가 은행잎이 바닥에 수북하게 깔리고 곧 입동이라니 한 해가 정말 빠르네요. <몽테뉴의 지혜, 자신에게 솔직하라> 덕분에 마음 한쪽에 쌓여 있던 묵은 짐을 좀 내려놓은 기분이에요. 완벽해지려고 애쓰기 전에 오늘 하루라도 나한테 솔직해 보기로, 몽테뉴 형님이랑 조용히 약속 하나 해봅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차 한 잔 곁에 두고 좋은 책 만나시길 바랄게요.


완벽한 척 대신 흔들리는 나를 그대로 들여다보라고 말하는 400년 전 동네 형님 몽테뉴의 53가지 솔직한 인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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