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Who - 누가 인생 후반전에서 승리하는가
박형수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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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40대 후반 직장인이 읽은 <은퇴 후 Who>서평, 퇴직이 조금 덜 무서워졌어요


"지잉~."

휴대전화 진동 한 번에 27년 다닌 회사와 작별하게 된 상무님이 있습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재무담당 부사장이었고, 들려온 말은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요…"였다고 해요. <은퇴 후 Who>는 이 전화 한 통으로 첫 이야기를 엽니다. 저 같은 40대 후반 직장인한테는 첫 장면부터 남의 일로만 읽히지는 않더라고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10월 첫 수요일이에요. 한 주의 딱 허리쯤이라 몸은 무겁고 주말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날인데, 이런 날 붙들고 있기엔 '퇴직'이 좀 무거운 단어이긴 하죠. 솔직히 제목을 처음 봤을 땐 '은퇴 후~' 하고 길게 한숨 쉬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영어 Who, 그러니까 '누가'였습니다. 누가 인생 후반전에서 웃게 되는지를 묻는 책이더군요.


<은퇴 후 Who>는 중앙일보 '더중앙플러스'에서 박형수 기자가 연재하는 '은퇴Who'를 바탕으로 엮었다고 해요. 기자가 퇴직 뒤 새 삶을 시작한 50명을 직접 만났고, 그중 24명의 이야기를 골라 담았습니다. 기자가 쓴 책이라 딱딱한 기사체를 떠올렸는데, 막상 펼쳐 보면 주인공이 "나는"으로 시작해 자기 얘기를 직접 풀어 가는 1인칭이에요. 중간중간 인터뷰 육성이 따로 들어가 있어서, 옆자리 선배한테 살아온 얘기를 듣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은퇴후조언'이라는 페이지가 붙어서 본인이 직접 뽑은 실전 팁을 따로 정리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보통 자기계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인데, 한 사람 이야기가 한 편씩 끊겨 있어서 마음 가는 사람부터 골라 읽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첫 주인공 강찬영 씨 이야기는 숫자에서 시작합니다. 한진해운 상무 시절 월 1000만원, 퇴직 직후 스카우트된 곳에서는 월 800만원. 그 자리마저 1년 2개월 만에 끝나자, 같은 업계로 다시 가 봐야 옛 후배들한테 반갑지 않은 부탁이나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고 해요. 이 대목에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군요. 회사 이름을 떼고 나면 '부탁하는 사람'으로 남기 쉽다는 건, 직장 생활 좀 해 본 사람이면 대충 아는 그림이라서요.


그 뒤의 선택이 재밌었어요. 아내가 가계 사정을 꼼꼼히 따져 보더니 근검절약 모드로 바꾸면 월 300만원이면 되니까 "당신은 200만원만 벌어오면 된다"고 했다는 거예요. 차를 팔고, 골프를 끊고, 휴대전화는 알뜰폰으로 바꿨대요. 그렇게 시작한 일이 택배 분류였습니다. 오전엔 원광디지털대 동양철학과 온라인 수업을 듣고,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는 현장에 나가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이었다고 합니다.

사방이 뚫린 작업장이라 여름엔 옷에 소금꽃이 피었다는데, 정작 본인은 나중엔 "오히려 좋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몸은 고돼도 업무 고민이 없으니 마음은 가벼웠다고요. 임원 시절엔 경영진과 부하 직원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 했는데, 여기선 일한 만큼 정확하게 받으니 "세상 편했다"고 합니다.


샌드위치 신세.

책에 나온 이 표현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웃고 나니 조금 씁쓸하기도 했어요. 중간관리자로 사는 40대 후반이라면 위아래로 눌리는 그 느낌을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택배 상자 앞에서 마음이 편하다고 하니, 편하다는 게 꼭 몸이 편한 것만은 아닌 거 같아요. 지금은 국민학생 때부터 좋아하던 그림으로 돌아와 '시니어 웹툰 작가'로 지내고, 방탄소년단 노래 가사를 주역과 명리학으로 풀어서 해외 팬들과 나눈다고 하니 인생 참 모를 일입니다.


두 번째로 오래 붙잡고 읽은 사람은 변성일 씨예요. 이분은 출발선부터 다릅니다. 대기업 임원이 아니라 여러 중소기업을 12년 동안 옮겨 다닌 사무직이었고, 둘째가 태어난 2011년에 회사를 나왔어요. 그때 나이가 마흔이었대요. 본인 말로는 "버티고 버티다 떠밀리듯 나온" 거였고요.

다른 꼭지보다 유독 천천히 읽게 된 건 그다음부터였어요. 국비 지원으로 가구 만들기 과정을 듣고 이력서를 100장 넘게 냈는데 번번이 떨어집니다. 정말 가고 싶던 공방에서는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은 뽑지 않으니 그만 지원했으면 좋겠다"는 이메일이 왔다고 하더군요. 겨우 들어간 공방은 월급 100만원에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소리 지르는 대표 밑에서 10개월을 버티다 나왔다고 하고요. 퇴직하고 3년이 지나도록 자리를 못 잡자 "억장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그 짧은 말에 담긴 가장의 사정이 어떤 건지 대충은 짐작이 가더라고요.


솔직히 이 책에서 제 마음에 제일 걸린 것도 그 이메일이에요. 나이가 이력서 맨 윗줄에서 먼저 읽히는 세상이라는 건 알고 있어도, 이렇게 활자로 보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계속 무겁게만 흐르지는 않아요. 좌절해 있던 그의 눈에 신문 기사 하나가 들어오는데, 세계적인 가구 기업 이케아가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이었어요. '카펜터'라는 직군을 보고 목수를 뽑나 보다 싶어 무작정 지원했다가 서류에서 떨어지고, 몇 달 뒤 인사팀에서 다른 직군으로 면접을 보겠느냐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 면접 장면이 이래요.

"무작정 간 그 면접이 진짜 재밌었어요. 그룹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들이 '우리는 당신의 배경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궁금하다'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더라고요. 그리고 정말로 나이, 경력, 학벌, 자격증 등 배경에 대해선 단 하나도 묻지 않았어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물건 3개를 가져오라'는 준비물에 그가 챙겨 간 건 직접 깎은 나무 소품 하나, 그리고 손수 만든 샌드위치와 김밥이었대요. 조언 페이지를 보면 면접이 4시간이나 걸렸고,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어떻게 화해하는지까지 물었다고 하네요. 이 대목은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그 면접에서도 결국 떨어지지만, 카펜터가 매장 쇼룸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게 수확이었다고 해요. 그 길로 인테리어 현장에서 '노가다'를 4년 했고, 2018년 이케아 고양점이 문을 열 때 마흔일곱 살에 합격합니다. 아내가 '이케아 직원 세일 혜택' 얘기를 듣고 함박웃음을 지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따라 웃었어요.


입사 뒤 이야기에는 찔리는 데가 하나 있었어요. 예전 직장에선 근무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몰래 주식 창이나 야구 중계를 보다가, 팀장 눈치를 보며 늦게까지 야근하는 일이 흔했대요. 이케아에서는 일할 땐 '초집중'하고 퇴근이나 휴가는 눈치 안 보고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지긋지긋하던 월요병까지 다 나았다니, 그 말이 제일 부러웠습니다.


세 번째 사람, 김민식 PD 편은 결이 또 다릅니다. 2020년 24년 다닌 MBC를 명예퇴직으로 나왔는데, 코로나19가 한창이라 평생 꿈꾸던 산티아고 순례길도, 동료들과의 밥자리도 다 막혔다고 해요. 선배들 환송연은 기획하고 MC까지 보던 예능 PD가 정작 자기 환송연 하나 없이 회사를 나왔다는 대목에선 웃을 수가 없었어요. 퇴직자들을 모아 놓고 강사가 꺼냈다는 첫마디 "여러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퇴직자들이십니다"도 저한테는 쉽게 지나가지지 않는 말이었고요.


그런 그가 지금은 스스로 '연금술사'이자 '월천거사'라고 해요. 연금으로 술을 살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사람, 그리고 월 소득이 1000만원 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래요. 그런데 비결이라고 내놓는 게 의외로 소박합니다. 30대부터 적은 돈으로 연금저축을 시작했고, 보너스나 승진으로 목돈이 생기면 써 버리지 않고 연금 상품에 하나씩 더 들었다고 해요. 퇴직 위로금으로 대출을 갚고 남은 5000만원으로 평생 처음 자기한테 선물을 하려다가, '사고 싶은 게 생기면 최소 6개월은 묵혀두자'는 원칙 때문에 캠핑카를 결국 안 샀대요. 대신 그 돈에 붙은 이자 70만원으로 자전거를 샀다는 일화에선 웃음이 나더라고요. 본인도 "좀 지독한가요. 하하." 하니까요.


김민식 PD가 4050에게 해 주는 얘기는 저한테 제일 실용적으로 와닿았어요. 지금의 소비와 취미가 퇴직 뒤에도 이어질 수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것, 그리고 후배가 할부로 뭘 사려고 하면 "그럼 일단 12개월 적금 넣어"라고 말해 준다는 대목이요. "사람이 좌절하는 순간은 선택지를 빼앗겼을 때인 것 같아요"라는 말은 골프 얘기 끝에 나오는데, 꼭 골프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닌 거 같더군요.


세 사람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니 공통점이 몇 가지 보였어요. 강찬영 씨와 변성일 씨는 둘 다 아내가 먼저 등을 밀어줬습니다. 강찬영 씨는 "나보다 빨리 과거와 결별해 준 아내"라고 했고, 변성일 씨의 아내는 동화작가였는데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행복한 일을 찾아야 한다"며 자기가 글로 돈을 벌 테니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라고 했대요. 강찬영 씨 조언 페이지 첫 항목도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배우자'였고요. 또 하나는 다들 숫자부터 따져 봤다는 거예요. 강찬영 씨 아내가 계산한 월 300만원, 김민식 PD가 가계부를 써서 뽑은 생존비 월 200만원 같은 숫자들이요.


결국 다들 덜 쓰는 법부터 익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은퇴 후 Who>는 한 번에 쭉 읽고 꽂아 두기보다 곁에 두고 한 사람씩 꺼내 읽기 좋은 책 같아요. 오늘은 세 사람 얘기만 했지만, 목차에는 '연봉 1억'의 마술사 소방관, 농협을 그만둔 72세 화가, 구례에서 1억을 버는 부부 같은 제목이 줄줄이 있어서 다음엔 누구 얘기를 들어 볼까 고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인물마다 실린 사진도 반가웠어요. 웹툰 화면 앞의 강찬영 작가, 쇼룸 앞에서 팔짱 낀 변성일 씨 얼굴을 보고 나니 활자로만 읽던 사람이 옆 동네 형님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표지에서 턱을 괸 할아버지 옆에 그려진 자전거가, 다 읽고 나면 김민식 PD의 그 자전거처럼 보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예요. 퇴직이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든 바로 그 문턱에 선 사람이든, 자기 나이에 맞는 대목 하나쯤은 건질 거 같아요.


길가 은행나무들이 슬슬 노란 물이 들 채비를 하는 10월입니다. 인생으로 치면 저도 딱 이 계절쯤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은퇴 후 Who>를 덮고 나니 다가올 겨울이 조금 덜 무섭게 느껴지네요. 한 주의 반환점인 수요일에 좋은 선배들 얘기를 실컷 듣고 나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일단 저는 '30년 뒤의 나'한테 혼나지 않게 오늘 저녁엔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올라가 볼까 해요. 김민식 PD 계산법대로라면 그것만으로 PT비 5만원은 번 셈이니까요.


직함을 내려놓은 선배들이 '회사원 나'에서 '그냥 나'로 돌아가는 길을 자기 목소리로 들려주는, 40대 직장인에게 미리 건네는 든든한 예고편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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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지막 피부과
박상영.박의정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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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가려운 데를 제대로 긁어주는 책,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 서평

독감 보름, 아니면 온몸 두드러기 보름.

둘 중 하나를 꼭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이세요?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첫 꼭지를 이 밸런스 게임으로 엽니다. 저자는 망설임 없이 독감을 고르겠다고 하더군요. 독감은 약을 털어 넣고 이불 속에 누워 쉴 권리라도 있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채 쉼 없이 가려운 피부병은 단 1분 1초의 평온함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어요.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저도 독감 쪽에 손을 들게 되더라고요.


10월 초입, 한 주의 허리쯤인 수요일입니다. 아침저녁 공기가 바삭하게 마르기 시작하니 피부과 책을 만나기에 딱 맞는 철인 거 같아요. 제목만 보면 마지막 경고장 같은데, 막상 열어보면 가려운 데를 제대로 긁어주는 책이더라고요.

요즘 피부과라고 하면 레이저랑 시술부터 떠오르잖아요.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진주에서 20년 넘게 진료실을 지켜온 두 원장의 진료 기록이에요. 피부과 전문의 박상영 원장과 신경과 전문의 출신 박의정 원장 부부가 함께 썼습니다. 레이저를 켜기 전에 환자의 하루부터 묻는 의사들이라는 소개가 읽어보니 꼭 맞는 거 같았어요.


진료실 이야기만 나오는 것도 아니에요. (왕도 피하지 못한 가려움)이라는 소제목 아래로 조선의 세조가 등장합니다. 종기와 궤양이 온몸을 덮어 진물과 고름이 끊이지 않았고, 정사를 뒤로한 채 전국의 약수터와 온천을 찾아다녔다고 하더군요. 욕조 안에서 업무를 보던 장 폴 마라도 나와요. 초상화마다 조끼 안에 손을 넣고 있는 나폴레옹의 그 포즈가 가려움을 참으려던 습관이었을지 모른다는 추측까지 이어지고요. 처칠의 하얀 각질, 마이클 잭슨의 백반증 이야기도 뒤따릅니다.


역사책 속 그 근엄한 얼굴들 뒤에 가려움이 숨어 있었다니.

저자들은 통증은 응급실로 달려갈 명분이 되는데 가려움은 유난스러움 취급을 받는다고 말해요. 그러면서 피부병은 그걸 겪는 당사자에게 재난이라고 잘라 말하죠. 앞에 깔아둔 역사 이야기 덕분인지 그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더라고요. 한 해 700만 명이 넘는 사람, 그러니까 국민 7명 중 1명이 피부 문제로 병원을 찾는다는 숫자도 함께 나옵니다. 첫 꼭지 끝자락의 이 문장이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거 같아요.


"피부과는 단순히 매끄러운 피부를 만드는 곳만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붉은 자국 뒤에 숨겨진 환자의 재난을 읽어내고, 무너진 피부 장벽을 다시 세워 평범한 일상을 되찾아주는 곳이다."

40대 후반 직장인으로서 제일 찔렸던 건 PART 4 첫 꼭지 (정기적으로 혈압은 재면서 피부는 왜?)였어요. 회사 건강검진 때마다 혈압 재고 피 뽑고 내시경까지 받으면서, 피부를 검사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종합건강검진 항목에서 피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1%도 안 된다는 대목에선 괜히 웃음이 나더라고요. 딱 제 얘기라서요. 나이에 따라 봐야 할 곳이 다르다면서 40대와 50대는 호르몬 변화와 그동안 쌓인 자외선 손상을 살펴야 한다는데, 이 나이에 쌓인 게 어디 자외선뿐일까 싶기도 했습니다.


유독 속도를 늦춰 읽게 된 건 70대 후반 할머니 이야기예요. 팔다리가 가렵다며 가려움증 주사 한 대만 놔달라고 오셨는데, 원장님 눈에 뺨 한구석의 거칠거칠한 검은 점이 걸렸대요.

"어르신, 이거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아이고, 원장님. 안 그래도 이것도 나중에 시간 나면 싹 빼려고 했어요."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 그 점은 오랜 세월 선크림도 없이 뙤약볕 아래서 농사지으며 쌓인 자외선 손상이 만든 광선각화증이었어요. 피부암으로 진행될 수 있는 전암성 병변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해 깨끗하게 나았다는 문장까지 가서야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가려운 팔다리만 보고 처방전을 뚝딱 끊어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대목에서는, 이분들이 진료 시간을 왜 그렇게 길게 쓰는지 알 것 같았어요. 발바닥 사마귀로 왔다가 얼굴과 목덜미의 아토피까지 함께 잡게 된 중학생 이야기도 같은 결입니다. 보호자는 그저 체질이려니 하고 지내왔다는데,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더군요.


개인적으로 제일 반가웠던 건 박스 글 (의사 박의정이 진단한 마흔의 피부 기록)이에요. 남에게 권하는 검사를 정작 자기는 받아본 적이 없다면 권할 자격이 없다며, 원장님이 직접 검진을 받고 결과를 털어놓거든요. 유·수분이 부족하고 색소와 주름이 잘 생기는 피부,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짙어진 기미가 결과로 나왔대요. 결과는 대체로 무난했는데 정작 마음에 걸린 건 습관이었다고 하더군요. 아침에 한 번 바르고 마는 자외선 차단제, 하루 여덟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보내는 건조한 실내, 오래 내버려 둔 변비와 소화불량 같은 것들이요.


솔직히 이 대목에서 좀 걸렸어요. 하루 여덟 시간 모니터 앞이면 저는 양반 소리 들을 처지고, 자외선 차단제는 아침에 한 번이라도 바르면 다행인 날이 더 많거든요. 원장님은 그 뒤로 외출할 때 두세 시간마다 차단제를 덧바르고, 물을 더 마시고, 식이섬유를 챙긴대요. 그 목록이 하나같이 제 일상에서 빠져 있는 것들이라 뜨끔했습니다.


대단한 처방은 아니다.

원장님이 스스로 붙인 이 한마디라서 오히려 믿음이 가는 거 같아요. 환자에게 권하기 전에 내가 먼저 겪어봤다는 말을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마무리까지, 의사가 쓴 글인데 옆자리 동료가 건네는 얘기처럼 편하게 읽혀요.


PART 5로 넘어가면 결이 조금 달라집니다. 백반증을 앓던 80대 중반 할머니가 허리 압박 골절로 큰 수술을 받은 몸으로 진주 외곽에서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매주 병원을 찾으셨대요. 치료가 정체되던 무렵 원장님이 날도 추운데 석 달쯤 쉬었다가 봄에 다시 시작하자고 권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나중에 자식들이 오래도록 볼 영정사진 찍어야 하는데 이 얼룩덜룩한 얼굴로 찍으면 자식들 마음이 얼마나 속상하겠나.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고쳐놓으려고 내가 이렇게 오는 거잖아."


원장님은 이 말 앞에서 이동 거리와 치료 효율만 셈하던 자기 시야가 부끄러웠다고 고백해요. 미용 치료라는 말을 이런 자리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거울 앞에서 단정하고 싶은 마음은 나이가 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도, 할머니의 목소리를 거치고 나니 한결 또렷하게 들리는 거 같아요.


또 한 분은 편도로 버스 세 번, 왕복 여섯 번을 갈아타며 일주일에 두 번씩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셨다는 할머니예요. 원장님 수술이 길어지는 바람에 그냥 돌아가셔야 했던 날이 있었대요. 미안한 마음에 다음 진료를 무료로 해드렸더니, 그다음 진료일에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을 한 상자 가득 안고 오셨다고 하죠. 그 뒤로 직원들이 레이저 기계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가장 먼저 할머니 차트를 찾아 전화를 드렸다는 대목이 참 좋았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 알아서 한 일이었다고 하니까요. 이어지는 동정과 공감 이야기에서는 환자의 발치로 내려가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함께 바라보는 게 공감이라고 하는데, 두 할머니 이야기를 지나온 뒤라 설명이 쉽게 들어오더라고요.


맺는 글 (그렇게 의사가 된다)에는 박상영 원장의 전공의 시절이 나와요. 새벽 2시, 병원에서 차로 20분 거리였던 문산휴게소의 자판기, 그리고 당시 500원이던 파란색 캔커피 하나. 고급 커피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지금도 그 캔커피를 제일 좋아한다는 고백이 괜히 반갑더라고요. 캔커피 한 잔으로 버티던 시절 이야기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품고 있는 거 같아서요. 그 무렵 큰 사고를 당해 근무하던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서도 처음 꺼낸 말이 "아까 내원한 환자 어디 있습니까?"였대요. 그런데 원장님은 지금이라면 후배에게 절대 권하지 않을 일이라고 스스로 선을 긋습니다. 그 솔직함 덕분에 영웅담처럼 읽히지 않아서 좋았어요. 좋은 의사는 정답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의 고통 앞에서 끝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이 책 전체를 한 줄로 묶어주는 느낌이 듭니다.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두께도 보통 에세이 정도라 부담이 없고, 물방울이 둥글게 고리를 그린 하늘빛 표지가 깔끔해서 책장에 꽂아두기에도 좋아요. 차례를 보면 아이의 아토피부터 사춘기 여드름, 대상포진과 옴, 무좀, 탈모, 피부암, 끝나지 않는 두드러기까지 생애 주기를 따라가요. 집에 누가 피부 때문에 고생할 때 해당 장을 펼쳐보면 되는 구성이라 오래 두고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에서 얼굴 두껍게 버티는 건 자신 있었는데, 정작 진짜 피부 두께는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는 걸 이번에 알았네요.


10월 들어 공기가 제법 건조해졌어요. 이번 가을엔 로션 한 통이랑 선크림 하나쯤은 가방에 넣고 다닐 생각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 덕분에 좋은 의사 두 분을 책으로 먼저 만난 거 같아서, 마음까지 촉촉해진 기분이에요.


가려움도 재난이라고 말해주는 두 의사의 진료실, 혈압은 재면서 피부는 왜 안 보느냐는 질문 앞에서 내 습관부터 돌아보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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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11가지 법칙
체탄 바갓 지음, 이선미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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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세 얼간이 원작자가 알려 주는 코끼리 먹는 법 | 체탄 바갓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서평


배고픈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배달 앱 화면을 노려보고 있어요. 주문은 30분째 감감무소식이고, 앱 속 작은 오토바이 아이콘은 1km 떨어진 곳에서 꼼짝도 안 하고, 기사에게 건 전화는 두 번 다 통화 중입니다. 이 사람이 영화 (세 얼간이)의 원작자라니, 첫 장면부터 웃음이 나더라고요.


자기계발서 첫 장면치고는 꽤 배고픈 출발이죠.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체탄 바갓이 자기 삶을 밑천 삼아 쓴 자전적 자기계발서예요. 부제가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11가지 법칙'인데 코끼리 먹는 얘기까지 나온다길래, 처음엔 대식가를 위한 다이어트 책인가 했네요. 10월 첫 화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따끈한 게 당기는 요즘이잖아요. 제목은 차가워도 책 속은 김 나는 커리 냄새로 가득해서 계절이랑 은근히 잘 맞는 거 같아요.


형식부터 좀 특이합니다. 저자가 혼자 칠판 앞에 서서 강의하는 게 아니라, 배달 기사 비라즈 슈클라와 밥상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흘러가거든요. 출판사 소개를 보니 비라즈는 저자의 옛 모습을 일부 담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하더라고요. 소설가가 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답게 규칙들이 장면 속에 녹아 있어서 교과서 넘기는 기분은 별로 안 들었어요.


책은 2014년 뭄바이 반드라 거리에서 시작해요. 영화 (투 스테이츠)가 극장에 걸려 있고,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엔 그의 책이 줄지어 있고, 차기작 신문 광고비로만 2,000만 루피(옮긴이 주석으로 우리 돈 약 3억 2천만 원)를 쓰던 시절이에요. 그런데 정작 그 정점에서는 어떻게 거기까지 왔는지도 몰랐다고 털어놓더군요. 어린 시절은 괴로웠고, 자란 시골도 딱히 도움이 되는 곳은 아니었다고 하고요. 10년이 지나 쉰 살 가까이 돼서야 겨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는데, 여기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돌아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이 잘 안 되는 건 사십 대 후반 직장인도 비슷하거든요.


그러고는 대뜸 이렇게 못을 박아요.

"세상은 도움을 베풀기 위해 다정한 시선으로 우리를 따스하게 보듬어 주는 곳이 아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 밥상머리에서 들은 것과 어른이 돼서 마주하는 세상은 다르다는 얘기예요. 매정하고 거칠다는 말까지 덧붙이고요.

드디어 벨이 울립니다. 문 앞에는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청년이 옆구리 살이 삐져나올 만큼 작은 빨간 조마토 티셔츠를 입고 땀범벅이 된 채 서 있어요. 저자는 그 앞에서 "3일 동안 굶고 나서야 사과를 발견한 석기 시대 원시인"처럼 음식을 낚아채는데, 이 비유에서 소리 내서 웃었네요. 그런데 청년이 저자의 두 손을 맞잡고 배달 후기는 제발 나쁘게 남기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는 순간, 웃음이 쏙 들어가더라고요.


펑크가 났다는 오토바이, 두 번 다 통화 중이던 전화, 자기 발끝만 내려다보는 눈.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그다음 식탁이에요. 30분 뒤에 화상 미팅이 잡혀 있는데도 저자는 비라즈를 집 안으로 들이고, 접시와 숟가락을 꺼내 라즈마 커리와 쌀밥을 덜어 줍니다. 한자리에 앉기를 한참 머뭇거리던 비라즈가 겨우 앉아서 꺼낸 말이 "절 이렇게 대접해 준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입니다"였어요. 저자의 대답은 짧아요. "괜찮아요. 식사 시간이 외롭지 않아서 저도 좋네요." 대단한 명언도 아닌데 저는 이 두 줄이 참 좋았습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될 때가 있잖아요.


밥상에서 나오는 비라즈의 사정은 녹록지 않아요. 역사학 석사까지 마친 스물일곱 살 청년인데, 8년을 만난 여자 친구 아르피타가 다른 사람에게 떠났다고 합니다. 한 달 수입이 1만 8,000루피인데 뭄바이에서는 슬럼가 방 한 칸 월세만 8,000루피라서, 다음 월급날까지 남는 게 없다고 하고요. 인스타그램에서 본 새 남자 친구는 BMW를 몬다는데, 비라즈는 "제 직업도 변변치 않으니, 좋은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저도 잘 알아요"라고 말해요. 삶의 의미까지 놓아 버린 듯한 말이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읽는 쪽도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비라즈의 하루 중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장면이 있어요. 퇴근 시간 꽉 막힌 길을 10km, 40분 동안 달려 빤 두 개를 배달했더니 손님이 문 앞에서 5초 만에 먹어 치웠다는 얘기요. 빤은 빈랑 잎에 곡물이며 과일, 향신료를 싸서 씹어 먹는 인도 길거리 음식이라고 옮긴이 주석이 알려 주더군요. 공들인 일이 몇 초 만에 소비되고 끝나는 허무함은 직장인이라면 다들 한 번쯤 겪어 보셨을 거 같아요.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순서가 좋았습니다. 배달 기사라는 직업엔 잘못이 없고, 떳떳하게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일이라고 먼저 말해 준 다음에야 이렇게 묻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이겁니다. 당신은 이 직업으로 충분한가요?"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라는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가는 질문이었어요.


중반의 '큰 꿈은 한 입씩' 장에는 저자 본인 얘기가 제일 진하게 담긴 거 같아요. 학창 시절 학교 잡지에 글을 쓰긴 했지만 작가로서 잠재력이 있다고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대요. 홍콩의 은행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고 하고요. "나는 기계 공학 전공에 MBA 소지자일 뿐인걸. 은행원일 뿐이라고." 이름표만 바꾸면 우리 회사 탕비실에서도 충분히 들릴 법한 혼잣말이에요.


저자의 처방은 코끼리 먹기입니다. 코끼리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서 한 번에 한 조각씩, 오랜 시간 동안" 먹는다는 거죠. 하루 한 페이지면 1년이면 한 권이라는 계산으로 출발했다가, 투자 은행 일이 바빠 그마저 버거우니까 주말엔 하루 두 페이지, 평일엔 사흘만 한 페이지씩 쓰는 걸로 계획을 고쳐요. 초본에만 2년이 걸렸고, 출판사에서는 단칼에 거절당했고, 결국 처음부터 다시 썼대요. 3년 동안 코끼리를 여러 마리 먹고 나서야 데뷔작 <세 얼간이>가 세상에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계획을 고쳤다는 부분이 특히 반가웠어요. 바쁜 날엔 쉬어 가도 무너지지 않게 판을 다시 짠 거니까요. "나는 천재도 아니고 비범한 재능도 없다"는 고백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입에서 나오니 오히려 믿음이 갔고요. 방 청소를 했다고, 시장에서 토마토를 3kg나 사 왔다고 대단하다며 칭찬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대목도 웃긴데 뼈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크게 웃은 장면이 하나 있어요. 저자가 코끼리 먹는 법을 한참 설명하는 동안 비라즈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먼 데를 보고 있고, 그사이 저자 그릇의 오트밀은 한 톨도 안 남았거든요.


"제 이야기, 제대로 들으셨죠?"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네? 말을 하시지 그랬어요. 저랑 같이 먹으면 됐는데요. 마침 냉장고에 음식이 더 있는데, 갖다 드릴까요?" "아뇨, 그게 아니에요. 저는 사실 코끼리를 먹어 본 적이 없거든요. 염소나 토끼도요."

비유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비라즈도, 빈 그릇 앞에서 냉장고부터 챙기는 작가도 둘 다 정겹더군요.

웃음 뒤에 비라즈가 꺼내는 고백은 좀 아파요. 학교에선 평범한 학생이었고, 자기를 좋아해 주는 아르피타 하나면 충분하다고 믿었대요. 친구가 철도청 공무원 시험을 같이 준비하자고 했을 때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어려워 보였고, 스스로 평범하다고 여겼고, 아르피타와 보낼 시간이 줄어드는 게 싫었다고요. 그 친구는 합격했는데 자기는 시험장에 가 본 적도 없다면서 "돌이켜보니 참 부끄럽네요"라고 말해요. 그 앞에서 저자가 건넨 문장이 마음에 콕 박히더라고요. "누구도 당신의 행복의 원천이 되어 줄 순 없어요. 그 사람들에게 공정한 처사가 아니거든요."


그때 해 볼걸 싶은 시험장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싶어요. 저자는 그런 비라즈에게 "먹어야 할 코끼리는 또 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조급해하지 말라고, 그건 비라즈 씨만 아는 거라고 덧붙입니다. 이 장 끝에서는 비라즈가 오히려 저자를 따뜻하게 안아 주고, "이 수업이 당신만큼이나 저에게도 필요한 것"이라는 말도 나와요. 가르치는 쪽도 이 밥상에서 뭔가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오늘의 주제가 코끼리였다면, 내일 주제는 바퀴벌레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비라즈만큼이나 저도 다음 장이 궁금해졌어요.

'사람을 남겨라' 장의 병아리콩 통조림 이야기는 직장인이라면 무릎을 칠 만해요. 골드만삭스 시절 저자는 '독사 T'라고 부르는 최악의 상사를 만나 원하던 업무에서 밀려나고, 승진에서도 두 번이나 떨어졌대요.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닷컴 버블 여파로 금융계 채용이 꽁꽁 얼어붙은 때였다고 하고요. 그러다 주말에 홍콩 쇼핑몰에서 예전 상사였던 데미안 우드를 우연히 만나 충동적으로 집에 초대합니다. 메뉴는 병아리콩 통조림에 토마토 퓌레와 향신료를 넣고 볶은 차나 마살라, 후식은 알폰소 망고였어요.


저녁 끝 무렵 지나가듯 요즘 회사에서 그리 행복하지 않다고 흘렸더니, 데미안은 "아, 그래요? 왜죠? 그런데 망고 진짜 맛있네요" 하고 망고만 오물거렸대요. 그런데 두 달 뒤에 크레딧스위스로 이직할 생각이 있냐는 연락이 옵니다. 거기서 다시 도이치뱅크로 옮겨 모은 돈이 전업 작가로 나설 밑천이 됐다고 하니, 저자 말대로 병아리콩 통조림 한 캔이 인생을 바꿔 놓은 셈이에요. 독사 T가 나중에 타임지 100인 명단에서 저자 이름을 보고서야 그가 유명해진 걸 알았다는 대목에는 은근한 통쾌함도 있었고요. 회사 다니면서 독사 한 명 안 만나 본 분은 아마 드물 거예요.

솔직히 걸렸던 건 말투예요. "이 책을 고른 당신은 이미 그들보다 낫다"라든가 "세상에 당신을 구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기억하자" 같은 문장은 처음 보면 좀 움찔하게 됩니다. 계층 사이에 견고한 철벽이 있다는 얘기도 꽤 냉정하게 들리고요. 그래도 비라즈와 마주 앉은 장면들 사이에 이런 말이 놓이니까, 밥 사 주는 선배가 정색하고 해 주는 얘기처럼 들리긴 하더라고요. 저자 스스로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당부하고요.


마지막 '나가며'는 에머슨의 문장으로 열려요. "당신의 운명이 되라고 정해준 유일한 사람은 당신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고백이 의외로 인간적입니다. 자기는 혹독한 군사 훈련을 시키는 교관이 아니고, 파티와 여행과 친구들과 주고받는 시시한 농담을 좋아하고, 술도 마시고 몸에 안 좋은 음식도 먹는 사람이라고 하거든요. 앞으로 50년을 더 산다고 해도 남은 주말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셈법 앞에서는 저도 괜히 남은 주말을 헤아려 보게 되더라고요.

'이걸 꼭 해야 되나?'가 '이걸 하면 되는구나!'로 바뀐다는 말, 그리고 "불행하다면 세상의 모든 성공도 의미가 없다"는 문장까지 오고 나니 앞에서 들은 직설들이 조금 다르게 읽혔어요. 차가운 제목 끝에서 저자가 붙드는 단어는 결국 행복이었습니다.


소장 가치로 보면, 핵심을 네모 상자에 따로 정리해 둔 대목이 쓸모 있어 보여요. "코끼리는 한 번에 최대 두 개까지만 처리하자" 같은 문장은 체크리스트처럼 다시 꺼내 보기 좋거든요. 조마토, 라즈마 커리, 빤, 차나 마살라처럼 낯선 인도 이야기마다 옮긴이 주석이 붙어 있고, 루피를 우리 돈으로 환산해 둔 것도 친절했어요. 이선미 님 번역이 매끄러워서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가 술술 넘어갔습니다. 비라즈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 갈지는 직접 따라가 보시는 게 제일 재미있을 거 같아요.


읽는 내내 즐거웠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같은 책은 다 읽고 나면 뭐라도 한 조각 시작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선선한 10월 첫 주에 코끼리를 한 입씩 먹는 법을 배운 기분이에요. 커리에 병아리콩에 망고까지 먹는 얘기가 하도 많이 나와서, 제 커리어보다 오늘 저녁 메뉴가 더 걱정되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주말들 아껴 쓰시길요.


차가운 제목 뒤에 커리 한 그릇의 온기와 '코끼리는 한 입씩'이라는 현실적인 처방, 그리고 결국 행복을 붙드는 마음이 담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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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 -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28가지 이별 수업
사카구치 유키히로 외 지음, 황정원 옮김 / 포텐업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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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734명의 목소리로 배우는 28가지 이별 수업,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 서평


"저희 엄마는 100살이셨어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의 들어가는 말에 실린 목소리 중 하나예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이야기도 잘하시고 식사도 잘하셨대요. 주변에서는 다들 호상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이분은 내년 봄에 태어날 손자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냥 1년만 더 살아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호상이라는 말은 살면서 참 흔하게 듣는 말인 거 같아요. 그 말 뒤에 이런 마음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10월 첫 주 화요일입니다. 월요일은 겨우 넘겼는데 주말은 아직 까마득한, 그런 요일이죠.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져서 그런지 이런 책이 유난히 손에 잘 붙는 계절이에요.

책은 간세이가쿠인대학 '슬픔과 사별 연구센터'의 사카구치 유키히로, 아카타 지즈루 두 사람이 함께 썼고 황정원 님이 우리말로 옮겼어요. 포텐업에서 9월 15일에 나왔고 부제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28가지 이별 수업'입니다. 제목만 보고는 감성 에세이인가 싶었는데, 막상 들여다보니 꽤 꼼꼼하게 짜인 심리서에 가깝더라고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가 특이한 건 만들어진 방식이에요. 저자들이 만난 유가족 734명의 체험담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 사람들이 슬픔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유형별로 나눠서 28가지로 정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패턴 랭귀지'라는 기법을 썼대요. 책의 설명을 빌리면 많은 사람이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실천적인 처방을 뽑아내는 방법이고, 건축이나 교육, 간호 같은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고 하더군요. 한 사람의 극복기는 그동안 많았어도, 수많은 사람의 체험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는 게 저자의 이야기입니다.


수업 하나하나의 생김새도 정갈한 편이에요. 제목 아래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돼요' 같은 짧은 실천 문구가 붙고, 소제목마다 실제 사연이 이어지고, 저자의 조언이 따라오다가 마지막에 Point 상자 속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상담실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들어가는 말에는 이런 대목도 있어요. 이 책의 모든 조언이 다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슬픔에 대처하는 데 정답은 없으니 나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것만 골라서 적용해 보라고요. 나만의 방법을 만들어 29번째 수업이라 생각해도 좋다고까지 합니다.


29번째 수업이라니.

장례가 점점 간소해지고 친척끼리 만나는 일도 줄면서 슬픔을 함께 나누는 문화가 약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이어지는데, 우리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제 나이쯤 되면 휴대폰에 부고 문자가 오는 일이 부쩍 잦아지는 거 같아요. 그래서인지 들어가는 말에 실린 사연 가운데 두 개가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한 분은 곧 정년퇴직이라 앞으로 둘이서 여행도 가고 고향에도 가자고 이야기했는데 혼자 남겨졌다고 해요. 다른 한 분은 "바쁘다는 말 좀 그만하고……" 더 빨리 고향에 돌아갈 걸 그랬다고 하고요. 바쁘다는 말, 직장인이라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잖아요. 그 말이 이런 후회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 남의 이야기로만 넘기기는 어렵더군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수업 16 '주변 사람에게 맞춰주려 애쓰지 마라'였어요. 10년 전 아버지를 잃은 30대 남성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병약해서 주변 사람 모두가 "이제부터는 네가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대요. 그 뒤로 10년 동안 가족을 지탱해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20대 때 여행 다니고 연애하며 즐겁게 사는 것 같았는데, 자기한테는 그런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어느새 짊어지게 되는 짐이 있죠.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내가 버텨야 한다'는 역할을 떠안기 쉬운 나이라 그런지, 이 사연은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같은 수업에는 친구가 "이제 좀 괜찮아졌어?"라고 물어볼 때가 제일 싫었다는 고백도 나와요. 어머니를 잃은 40대 여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아요. 근데 그런 말을 들으면, '언제까지 슬퍼할 거야? 빨리 괜찮아져야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려요."


"계속 울면 어머니가 천국에 못 가신대" 같은 말을 들으면 막 화가 나고, 그러다 그렇게 모나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또 밉다고 하더군요. 여기에 저자가 건네는 답이 참 다정했어요.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받는 건 당연하다고, "내가 예민하고 까칠해서가 아니라는 말이에요"라고요. 위로가 안 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면 그만이라는 조언도 붙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고요.


남편을 잃은 40대 여성의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친하게 지내던 부부가 함께 여행 간 사진을 SNS에서 보고 스마트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고 해요. 저자들의 조언대로 계정을 탈퇴하고 나서 처음에는 세상에 뒤처진 것 같아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자기감정과 마주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 수업에서는 뜨끔했던 순간도 있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래도 당신은 괜찮은 편이에요" 같은 말들이 상처가 되는 위로로 나오는데, 다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흔히 주고받는 말이잖아요. 위로랍시고 비슷한 말을 건넨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는 장담 못 하겠더라고요. '좋은 뜻으로 한 말에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소제목이 괜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는 남겨진 당사자 못지않게, 그 곁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람한테도 잘 맞는 책 같아요.


5장으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수업 25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을 떠올려라'에서 맛보기로 소개하고 싶은 사연이 있어요. 아버지를 잃은 40대 여성은 돌아가신 아빠 생신 때면 꼭 종류별로 맛있는 케이크를 사 먹는대요. 아빠가 자기 생일에도 딸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서 원하는 만큼 마음껏 먹게 해줬기 때문이랍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힘든 날들도 있었지만 생신날을 이렇게 보내면 그냥 아빠가 제 곁에 계신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거든요."

생일 축하 문구가 적힌 초콜릿 플레이트까지 다 먹어버려서 그때마다 엄마한테 한소리 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어요. 슬픈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같은 수업에 나오는 70대 남성의 이야기는 결이 또 달라요. 갑자기 아내를 떠나보내고 몇 년이 지나자 가끔 아내 얼굴이 희미해져서 겁이 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제 곁에 진짜 있었는지,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이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억이 희미해져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했던 사진을 출력해 침실에도 거실에도 식탁에도 걸어두고 틈날 때마다 바라봤대요. 그러자 아내가 분명히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다시 느낄 수 있게 됐다고요.


침실에도, 거실에도, 식탁에도.

저자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으로 산다는 말을 꺼내면서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꼭 가져보라고 권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수업 끝 Point 상자에는 "그 사람은 가고 없지만 그 사람과 함께했던 날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생각나는 밤에>는 보통 단행본보다 살짝 얇은 편이에요. 가방에 넣어도 티가 안 나는 두께라 제 뱃살보다 훨씬 날씬합니다. 수업 하나하나가 짧게 나뉘어 있어서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날 마음에 맞는 수업 하나만 펼쳐 봐도 되는 구성이라 책장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 보기 좋겠더라고요. 표지에 '내가 떠난 후 슬퍼할 가족을 위해 남기고 싶은 책'이라는 문구가 있던데, 다 읽고 나니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언젠가는 내가 남겨질 수도, 내가 누군가를 남기고 떠날 수도 있으니 집에 한 권쯤 두면 든든할 책이에요.


들어가는 말 끝에 있는 문장 하나.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은 나 자신에게 친절하자."


은행잎이 슬슬 물들 채비를 하는 10월이에요. 가을 탄다는 말이 있죠. 저는 요즘 책을 탑니다. 새 책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아재가 다 됐네요. 슬픔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차분하게 들을 수 있어서, 마음 한쪽을 잘 갈무리한 기분입니다. 앞으로 누군가 큰일을 겪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말을 고르기 전에 이 책부터 떠올릴 거 같아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차 한 잔 곁에 두는 가을 보내세요.


빨리 잊으라고 다그치지 않고, 떠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734명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28가지 이별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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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
제이크 냅 외 지음, 박우정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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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 쪼개진 달력 사이에 파란 덩어리 하나 서평


빨간 바탕에 시커먼 두 글자.

표지 앞면은 '클릭'이라는 글자가 거의 다 덮고 있어요. 솔직히 제목만 보고는 마우스 더블클릭부터 알려주는 아재 컴퓨터 교실 책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가 끝까지 붙드는 질문은 딱 하나더라고요.


"통했어?"

팀, 관리, 기술, 디자인, 가격, 타이밍, 운까지, 신제품이 뜨고 지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은데 결국 이 한마디로 모인다는 얘기예요. 제품과 고객이 레고 블록 두 개처럼 딱 맞물려야 한다면서, '제품'과 '고객'이라고 적힌 파란 블록 그림에 '통했다!'까지 붙여 놨더군요. 저자도 "상당히 뻔한 말이란 것, 안다"고 먼저 털어놓아요. 그렇게 선수를 치니까 오히려 다음 얘기가 궁금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10월 첫 주 화요일이에요. 월요일 회의를 한 바퀴 돌고 나면 화요일쯤엔 이번 주 달력이 대충 눈에 들어오잖아요.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는 그 달력을 자꾸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었어요.

책을 쓴 사람은 제이크 냅과 존 제라츠키, <스프린트>와 <메이크 타임>을 같이 쓴 콤비예요. 제이크 냅은 지메일 개발에 참여했고 구글미트를 공동 설립했어요. 존 제라츠키는 구글애즈와 유튜브에서 리더로 일했고, 책에서는 JZ라고 불러요. 두 사람이 구글벤처스와 지금의 캐릭터캐피털에서 스타트업과 함께 진행한 스프린트만 300번이 넘는대요. 이번 책은 그 스프린트보다 한 발 앞, 프로젝트를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쓰는 '토대 구축 스프린트' 이야기입니다. 박우정 번역가가 옮겼고 김영사에서 나왔어요.


이력만 보면 넥타이를 꽉 맨 경영서일 것 같은데, 문장은 생각보다 수다스러운 편이에요. 인공지능 스타트업 현장에서 일하는 자기들을 디즈니랜드에서 패스트패스를 가진 두 꼬마에 빗대요. 이렇게 일하는 동기가 부분적으로는 이기적이라고, 자기들 돈이 걸려 있어서라고 순순히 인정하기도 하고요. 디자인 스프린트가 성공했을 땐 "우린 좋아서 죽을 뻔했다"고까지 썼더라고요. 스티븐 킹 책이 아니면 끝까지 읽기도 힘든 사람이라 책을 최대한 짧게 썼다는 고백에선 웃음이 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책도 보통 경영서보다 얇고 가벼운 편이에요. 경영서라고 하면 목침으로 써도 될 두께부터 떠오르는데, 이건 가방에 넣어도 어깨가 파업할 일은 없겠더라고요.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에서 가장 이 책다운 건 빈칸 채우기 같아요. 저자들이 '토대 구축 가설'이라고 부르는 한 문장인데, 생김새는 이래요. 우리가 '고객'이 겪는 '문제'를 '접근방식'으로 해결한다면, 고객은 '경쟁 상대'보다 우리 솔루션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솔루션이 '차별화 요소'이기 때문이다.

지메일, 블루보틀, 플랫아이언 헬스, 슬랙이 실제로 이 칸을 어떻게 채웠는지 차례로 보여주는데, 이게 은근히 재미있었어요. 블루보틀은 잠깐 쉬고 싶은 커피 손님에게 장인 스타일 커피와 세련된 카페로 다가가면서 스타벅스와 맞서요. 이유는 "맛있고 멋지"기 때문이래요. 슬랙의 칸에는 경쟁 상대로 이메일이, 차별화 요소로 "재미있고 팀워크를 증진"한다는 말이 들어가 있고요. 신규 사업 보고서 맨 앞에 이 다섯 칸만 채워 와도 회의 시간이 절반은 줄겠다 싶더라고요.


물론 저자들 말로는 이 단순한 약속을 찾는 게 절대 쉽지 않대요. 한 스타트업의 공동 창업자 세 명에게 타깃 고객을 써보라고 했더니 답이 세 가지로 갈렸대요. 경쟁사와 뭐가 다르냐는 질문 하나에는 60분짜리 토론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이 대목에선 뜨끔했어요. 우리 팀에 같은 질문을 던지면 몇 분짜리 토론이 될지,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저자들 표현대로 "뻔한 문제가 항상 그렇게 뻔한 건 아닌 것이다."


예전 방식을 묘사하는 대목도 남 얘기 같지 않았어요.

회의를 하고, 하고, 또 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슬라이드와 문서와 스프레드시트를 쏟아내고, 조직 안 알력다툼에서 상대보다 오래 버티다가, 결국 예감에 기대 몇 년을 매달린다는 거예요. 저자들은 이걸 "예전 방식이다. 게다가 정신 나간 것이다"라고 잘라 말해요. 쳇바퀴만 돌리는 다람쥐 열두 마리를 청소도구함에 넣고 육각 렌치 하나 던져주며 이케아 가구를 조립하라는 것과 같다는 비유까지 얹고요. 웃기긴 한데, 웃고만 있기엔 너무 익숙한 풍경이라서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1장의 스톡홀름 이야기예요. 2009년 1월, 제이크 냅은 일주일 출장으로 스톡홀름에 가요. 스톡홀름을 매우 좋아한다고 먼저 못 박아 두고는, 그해 1월은 춥고 어두컴컴했고 보도는 더러워진 눈으로 진창이었다며 '처량'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더군요. 진짜 처량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두 친구 세르주 라샤펠, 미카엘 드루게와 함께하던 화상회의 프로젝트가 1년 반이 넘도록 기능만 덧붙인 채 제자리였거든요. 게다가 금융위기 속에 구글이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다른 사무소를 닫는다고 발표한 참이었어요.


셋은 "약간 미친 짓"을 하기로 합니다. 월요일 아침, 금요일까지 프로토타입을 만들자고 정했어요. 일정표의 회의를 전부 거절하고, 이메일과 채팅에서 로그아웃한 뒤 창문 없는 회의실로 들어가요. 수백 개 아이디어 가운데 남긴 건 시장에서 가장 쓰기 쉬운 화상회의 소프트웨어, 그거 하나였대요. 미카엘이 보낸 링크를 클릭하자 "짜잔!" 하고 서로 얼굴이 보이고 "안녕!" 하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읽는 쪽까지 신이 나더라고요. 그게 지금의 구글미트라는 건 저자가 1장에서 바로 밝혀 둡니다.

그래도 제가 오래 들여다본 건 그 뒤에 나오는 달력 그림 두 장이었어요. '스톡홀름에 가기 전' 달력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칸이 잘게 쪼개져 있고, 파란 집중 시간이 띄엄띄엄 박혀 있어요. '스톡홀름에서' 달력은 다섯 칸이 통째로 파란 덩어리 하나고요. 저자는 이전 방식이 "시간의 섬들"을 줬다면 이번엔 "대륙"을 줬다고 표현했어요.


한 시간을 잡아도 몰입하는 데 15분, 일하는 데 15분이 걸리고, 이메일 한 번 확인하고 나면 다음 회의를 생각할 시간이 된대요. 이 대목에선 제 업무 수첩을 들킨 기분이었습니다. 셋이 한 시간 통화하면 절반은 맥락 잡는 데, 절반은 마무리하는 데 썼다는 얘기도 마찬가지고요.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집중도가 계단처럼 올라가는 그래프 밑에는 "순전히 내 경험에 따라 만들었지만, 맞는 것 같지 않은가?"라고 적혀 있어요. 40대 후반 직장인으로서 맞다고 손을 번쩍 들고 싶었어요.


1장 뒷부분은 거의 직장인 생존 지침서 같아요. 이메일에 바로 답하고 30분마다 이 회의 저 회의로 옮겨 다니는 하루를 두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이라고 비트는 문장이 있어요. 스프린트에 결정권자를 꼭 앉히라면서, 끝나고 보스를 설득할 필요가 없는 건 "회의실 안에 보스가 내내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는 문장도 있고요. 회의 많은 부서 사람이라면 다 같이 웃을 대목이에요.


맛보기로 하나 옮기면, 저자는 살면서 겪은 비상사태를 줄줄이 늘어놔요. 뼈도 부러져 봤고, 이도 깨졌고, 비장이 파열되고, 신종플루에 정전에 배심원까지 해봤다고요. 그러고는 "아마도 최악의 비상사태는 느린 와이파이일 것이다"라고 덧붙이더군요. 이런 일이 터지면 회의를 취소하고 메일함을 무시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하잖아요. 그러니 큰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도 '좋은 비상사태'를 선언하라면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라고 합니다.


"우리 팀은 지금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 회의를 취소할 수밖에 없고, 답장이 늦어질 겁니다."

이 메시지는 결정권자가 직접 보내라고 해요. 윗사람 이름으로 나가는 부재중 공지라니, 상상만 해도 든든하더라고요.

그룹 브레인스토밍을 하지 말라는 대목도 좋았어요. 17세기 영국 왕립협회 과학자들한테 사업계획을 세우라고 해도 곧장 '아이디어!'를 외치며 접착식 메모지와 피자를 주문할 거라는 문장에서 한참 웃었습니다. 브레인스토밍이 집단 속에서 불편한 사람, 말로 설득하는 데 서툰 사람, 조용할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사람을 밀어낸다는 지적도 나와요. 목소리 큰 사람 쪽으로 흘러가는 회의에서 끝내 입을 못 떼던 후배들 얼굴이 몇 명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에서 제일 자주 보게 되는 그림, 2×2 도표.

5장에 나오는 오비털 머티리얼즈 이야기가 대표적이에요. 구글 딥마인드에서 일했던 조니 고드윈이 AI의 힘을 빌려 새로운 분자를 발명하겠다고 세운 회사예요. 처음엔 자기 기술의 장점을 '이것저것 다 때려 넣는' 식으로 열댓 가지나 고객에게 쏟아냈대요. 돌아온 건 위압감이었고요. 보고서에 장점 하나라도 빠질까 봐 이것저것 밀어 넣던 버릇이 있는 저로서는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첫 도표에서 오비털은 '익숙하지 않음'과 '변화 필요'가 만나는 왼쪽 아래 구석에 처박혀 있어요. 그러다 '더 높은 품질'과 '더 낮은 실패율' 딱 두 가지로 축을 바꾸자 오른쪽 위로 자리가 뒤바뀌는데, 그 장면이 꽤 통쾌하더라고요.


이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요. 스카이프와 탠드버그 사이에서 가망 없어 보이던 구글미트는 '브라우저만 필요'와 '다자간'으로 축을 새로 그립니다. 컨버스와 아디다스 앞에서 예산도 적고 이미지도 별로였던 나이키는 시그니처 농구화와 전례 없는 계약으로, 이메일과 맞붙은 슬랙은 재미와 팀워크로 판을 다시 짜고요. 사례마다 파란 상자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쓱 올라가요. 그걸 보고 있으면 "일단 차별화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렵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어느새 우리 회사 제품은 어느 축에 올려볼까 따져보게 되더라고요.


차별화를 정의하다가 "차별화는… 음," 하고 뜸을 들이는 것도 재밌어요. "언제나 대단한 일이다. 아니, 이 말은 취소!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다" 하고 스스로 말을 고치는 것도 이 사람 말버릇 같아서 정이 갔어요.

솔직히 걸렸던 건 책이 아니라 제 달력 쪽이었어요. 저자들이 권하는 대로 이틀을 통째로 비우는 건, 일정이 빼곡한 중년 직장인한테는 꽤 먼 얘기처럼 들리더라고요. 다행히 저자들도 그걸 알아요. 조직에 따라서는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그러고는 일단 책을 읽고, 팀과 작은 과정부터 해본 다음, 큰 프로젝트 때 체크리스트대로 가보라고 길을 나눠 놨어요. 결정권자를 설득해야 하는 처지라면 "이 책을 들고 가라"는 말까지 해주는데, 등을 슬쩍 떠미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소장 가치는 책 끝 '10시간 실전 체크리스트'에서 확실히 느껴졌어요. 파란 장을 넘기면 결정권자와 함께 시작하기, 작은 팀 구성하기, 달력에서 이틀 전체 비우기 같은 항목이 네모 체크박스와 함께 줄지어 있어요. 항목마다 본문 어디로 돌아가면 되는지 안내도 붙어 있고요. 앞에서 웃으며 읽은 튕겨내기 메시지가 여기서 그대로 다시 나오니 반갑더라고요. 노란색 포스트잇과 블랙 마커가 가장 좋은 이유가 익명성을 지켜주고 인지 부하를 줄여주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구체적이에요. 준비물에는 점 스티커 옆에 간식이 당당히 올라가 있습니다. 간식까지요. 진행자 항목의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 유력한 후보다"라는 문장 앞에선 괜히 지목당한 기분이 들었어요.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는 새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다시 꺼내 펼치게 될 책 같아요.


후기에서 열 가지 교훈을 한자리에 모아 둔 것도 좋았어요. 그중 "첫 아이디어에 대한 대안을 찾아보라!"와 "증명하기 전까진 가설일 뿐이다!"는 처음 떠올린 안에 금방 정드는 제 습관을 정확히 찌르는 말 같았습니다. 시골에 병원을 열면서 웹사이트 프로토타입부터 주민들에게 보여준 의사 카밀 플레밍의 이야기가 나와요. 부정 승차를 막으려고 부정 승차자를 인터뷰한 브뤼셀의 가엘 메르시에 이야기도 있고요. 이런 얘기를 보면 스타트업 사람들만 쓰는 방법은 아니구나 싶어요. 괄호 안에 툭 던진 "고객 우선주의!"에선 또 웃었고요.


그리고 후기 첫머리. 저자가 어릴 때 꿈꾼 건 영화 (백투더퓨처)에서 드로리언을 타임머신으로 바꾼 브라운 박사 같은 발명가였대요. 마분지, 노끈, 꼬챙이, 스카치테이프로 실험했지만 작동하는 시간여행 장치는 끝내 못 만들었다고요. 벤처펀드 운영은 "주머니에 플루토늄이 가득 들어 있는 산발머리의 천재"가 되는 것과는 분명 다르대요. 그래도 팀이 큰 프로젝트를 시작하도록 도울 때마다 브라운 박사와 칠판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해요. 같은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라 그런지 이 대목이 참 반가웠습니다. 어릴 적 꿈과 지금 하는 일이 꼭 같지 않아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재미를 찾아낸 사람의 얘기 같아서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10월 들어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선선해졌어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이번 가을엔 <클릭, 아이디어에서 비즈니스로> 덕분에 기획 공부까지 같이 한 기분입니다. 잘게 쪼개진 제 달력 사이에도 파란 덩어리 하나쯤 만들어 보고 싶어지는 화요일이네요. 좋은 책 만나서 한 주가 든든하게 시작된 거 같아 좋았습니다.


회의만 길어지는 팀에게 "통했어?"라는 질문 하나와 빈칸 다섯 개, 2×2 도표를 건네는 이틀짜리 기획 플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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