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인비디아 - 우리는 왜 부러워하는가
김기남 지음 / 시그마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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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원하는 것을 전부 가진 하루를 그려 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근심 하나 없고 창밖 풍경마저 마음에 꼭 드는 하루를 시간 단위로 채워 보라는 것. 그렇게 남은 평생을 살면 무료함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불행을 겪게 될 거라고 저자는 장담합니다. 설득하는 문장이 아니라 직접 세어 보게 만드는 문장이어서, 읽는 사람이 반박할 틈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호모 인비디아>의 인상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어요.


표지도 같은 이야기를 먼저 해 둡니다. 짙은 남색 위에 흰 선으로 그은 산길, 그 비탈을 Invidia라고 적힌 둥근 바위를 밀며 오르는 작은 사람. 봉우리는 분명히 그려져 있는데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차를 펼치니 1장에 꼭대기에도 안식처는 없다는 소제목이 있더군요. 저자 김기남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일하는 교과교육학자이고, 지리교육을 연구하며 사람들이 서로를 비교하는 방식에 오래 관심을 두어 왔다고 소개됩니다. 그 이력이 책의 폭을 결정합니다. 심리학에서 출발해 진화론과 사회학, 나중에는 지리학까지 끌어옵니다.


2장에서 다루는 엄친아 이야기는 한 방송 프로그램의 심층 인터뷰에서 시작합니다. 엄친아로 불리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는 사람, 직장에서 실적을 지키느라 소진되고 있다는 사람, 과거의 형편 때문에 평범한 이들을 부러워했다는 사람. 저자가 짚는 건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부분에서 뛰어났을 뿐인데 바깥의 시선이 그들을 하나의 존재로 합쳐 버렸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상대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장점만 오려 붙인 합성물이라는 주장이 여기서 처음 구체적인 얼굴을 얻습니다.


같은 장에 티치아노가 그린 시지프스 그림이 실려 있고, 그 아래 캡션이 붙어 있습니다. "비교는 끝이 없는 형벌이다. 정상에 올라도 우리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비교 대상뿐이다." 표지의 그 산길이 결국 이 그림이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장을 닫는 대목에서 저자는 같은 바위를 다르게 씁니다. 실존하지 않는 유령과 싸우느라 자신과 아이를 함께 힘들게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뒤, 아들러의 "열등감은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끄는 원동력"이라는 말을 얹고, 아이가 자기만의 바위를 깎아 조각상을 만들도록 돕는 일이 유일한 열쇠라고 씁니다. 굴러떨어지던 돌이 조각의 재료로 바뀌는 자리. 이 책에서 가장 솜씨가 좋은 전환이었습니다.


7장은 결이 확 달라집니다. 남태평양의 나우루 공화국 이야기가 나와요. 새똥이 굳어 만들어진 인광석이 비료로 값이 나가면서 섬사람들은 일하지 않고도 큰돈을 벌었고 연료까지 무상이었는데, 자원이 바닥나자 수입한 기름을 넣을 돈이 없어 고급 차들을 그냥 세워 두어야 했다는 결말입니다. 자원의 저주라는 개념을 이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겠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한국으로 시선을 옮겨, 자원도 국토도 부족한 조건 위에 세운 산업과 기후의 이점을 나란히 짚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풍요가 곧 마음의 안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통계 몇 줄이 함께 인용되는데, 무겁게 다뤄야 할 대목이라 여기서는 논지만 옮겨 둡니다. 부동산이 오를 때도 내릴 때도 마음이 편치 않더라는 것, 부의 가장 큰 대가 중 하나가 시간이라는 것.


이 장에서 오래 남은 문장은 짧았습니다. 풍요는 불행에 너무 취약하다. 그 뒤에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이야기가 붙습니다. 분화가 멈추지 않는데도 주민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화산재가 쌓아 놓은 흙 때문이고, 그 땅에서 자란 포도로 담근 와인이 최고 등급으로 꼽힌다는 것. 그래서 부러움은 화산재와도 같다고 저자는 정리합니다. 형벌의 돌, 조각의 재료, 비옥한 재. 같은 물질이 놓인 자리에 따라 다른 것이 된다는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다르게 합니다.


한국 독자에게 가장 가까이 닿는 곳은 역시 8장입니다. 부탄의 행복지수가 2015년 이후 급락한 원인을 저자는 방송과 SNS의 보급에서 찾습니다. 경제 사정은 그대로였고 비교의 대상이 생겼을 뿐인데 불행이 시작됐다는 것. 이어 이스털린의 역설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씁니다. 삶에 만족하기 위한 조건은 내가 잘 사는 것보다 내 주변에 더 잘 사는 사람이 없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인정하기 껄끄러운데 반박하기도 어려운 문장입니다.


아파트를 다룬 대목도 정직합니다. 주택을 소유한 쪽이 임차한 쪽보다 행복도가 낮게 나온다는 연구, 상승기에 수억을 벌고도 더 오른 값을 보며 후회했다는 지인의 이야기, 그리고 원하는 것의 진짜 가치는 그것을 손에 넣기 전까지만 유효하다는 관찰. 저자는 이 구조를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붉은 여왕에 빗댑니다. 풍경이 함께 움직이는 나라에서는 제자리에 있으려고만 해도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하니까요.


꼬꼬면과 허니버터칩, 포켓몬빵으로 이어진 품절 대란을 두고 저자가 내리는 진단은 간결합니다. 생산량이 늘지 않았는데도 유행이 지나면 품귀가 사라지는 건, 그 열풍이 맛이 아니라 남들이 하니까라는 동조 심리에서 나왔다는 증거라는 것. 그래서 제 행복이 아파트 평수보다 좁아진 이유는 마음속에 나는 없고 남들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이 장은 스스로를 정리합니다.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나느냐는 흔한 농담을 뜯어보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어요. 그 말 안에는 정작 자기가 얼마나 만족했는지가 빠져 있다는 지적입니다.


읽으면서 걸린 부분도 적어 둡니다. 사례가 아주 많습니다. 8장만 해도 열 페이지 남짓에 부탄과 이스털린, 아파트, 유행 소비, 라듐, 품절 대란, 동조 실험, 동네 축구가 몰려 있어요. 읽는 재미는 확실한데 뒤로 갈수록 결론은 같고 예시만 바뀌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7장에서 한국의 산업 발달과 기후 조건을 길게 설명하는 대목도 그 자체로는 흥미롭지만 부러움이라는 주제에서 잠시 멀어집니다. 마지막 장에서 부러움이 고통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만으로 해방될 수 있다고 쓴 대목에서도 잠깐 멈칫했습니다. 구조를 안다고 감정이 곧바로 물러나 주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그 뒤에 부러움과 친구가 되는 기술을 따로 배치해 둔 걸 보면, 저자도 자각 하나로 끝난다고 여기지는 않는 듯합니다. 문장이 조금 단호했을 뿐이겠지요.


7장의 착지점이 이 책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롤모델은 참고서일 뿐 정답지가 아니며, 그 삶 전체가 행복으로 가득할 거라 믿는 순간 우리가 이미 가진 것과 그들이 가진 그늘을 함께 지우게 된다는 것. 그러니 "우리는 부러움을 목적지나 종착지가 아니라 삶의 경로에 존재하는 하나의 이정표쯤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씁니다. 8장의 마지막도 같은 자리에 도착합니다. 아이들의 동네 축구에서는 공이 사라진 자리에 아이들만 모여 있곤 하는데 프로 선수는 공을 쫓지 않고 공이 갈 곳을 먼저 차지한다는 비유. 남들의 부러움이 몰려 있는 그곳에 정작 제가 원하는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부러움은 내면의 나침반이 고장 났을 때 울리는 경고음이라는 정의가 뒤따르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말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물어보라는 권유로 닫힙니다.


판형은 부담 없는 크기이고 분량도 과하지 않습니다. 소제목이 잘게 나뉘어 있어 흐름이 끊겨도 다시 붙잡기 쉬웠고, 개념보다 사례가 먼저 오는 순서라 속도가 처지지 않았어요. 오델로와 시지프스, 붉은 여왕과 마릴린 먼로가 한 권에 섞여 있는데도 산만하지 않은 건 부러움이라는 축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승진자 명단이 붙는 계절을 몇 번 지나 본 사람이라면, 축하한다는 말과 속마음 사이의 미세한 간격을 압니다. 그 간격을 인성의 문제로 여기며 혼자 부끄러워했다면 이 책이 꽤 정확한 대답을 줍니다. 아이 성적표 앞에서 남의 집 아이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부모에게도, 피드를 넘기다 이유 없이 기운이 빠지는 날이 잦아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입추도 넘겼는데 한낮의 열기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매미 소리가 조금씩 성글어지는 이맘때, 정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위를 밀어 올려 온 지난 계절을 한 번쯤 되짚어 보기에 알맞은 한 권이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들기 전에 마음 한쪽을 정리해 두고 싶은 분들께 권합니다.


부러움은 없앨 수 없지만, 그 정체를 알고 나면 끌려다니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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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롱이 이야기 - 아직 그리고 있습니다, 그 병아리
김진솔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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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두께가 있는 책이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펼치니 진도가 꽤 나갔습니다. 각 꼭지 앞머리마다 네 컷 만화가 붙어 있는 구성이라 문장으로 눌린 마음을 그림이 한 번씩 풀어주더군요. 하늘색 바탕에 노란 병아리 하나만 크게 올린 표지도 그렇고, 겉보기에는 가볍고 말랑한 책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띠지에 적힌 문구가 이미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10만 팔로워 계정 해킹, 스물아홉 번의 이모티콘 낙방. 표지의 얼굴과 그 아래 적힌 이력 사이의 거리가 이 책의 성격입니다.


<뾰롱이 이야기>는 인스타툰 작가 김진솔이 열아홉에 마우스로 그린 병아리 한 마리를 13년 넘게 끌고 온 기록입니다. 시작은 낭만적이지 않아요. 수학 학원에서 선생님이 다들 이해했느냐고 물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가 열네 살에 공부를 놓고 미술 학원으로 옮겨 갑니다. 그 선택을 두고 작가는 "말이 정착이지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적습니다. 다른 능력을 전부 포기하고 행운이라는 스탯 하나에 전부를 투자한 게임 캐릭터 같은 결정이었다는 비유도 붙는데, 자기 진로를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되짚는 문장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어지는 한 줄이 오래 남았어요.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숨을 쉬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스케치북 위라는 사실을, 부모님도 나도 어렴풋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잘하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거기서만 숨이 쉬어져서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책의 중간은 상처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초기에 올린 그림에 징그럽다는 댓글이 달렸고, 하필 그 댓글에 좋아요가 400개 넘게 찍히는 것까지 지켜봤다고 해요. 수천 개의 칭찬보다 단 하나의 뾰족한 화살이 마음에 더 깊게 박히는 법이라는 문장이 여기서 나옵니다. 무해하고 귀여운 그림으로 방향을 튼 것이 순수한 취향의 결과만은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스케치북 구석에 잠들어 있던 동글동글한 병아리가 다시 불려 나오는 대목이 그 직후입니다.


가장 오래 붙들려 읽은 건 군 복무 중 계정을 통째로 잃는 장면이었습니다. 휴가 중 무심코 누른 링크 하나로 3년 치 기록이 사라졌고,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처지라 그 삭제를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고객센터는 매크로 답변을 반복했고 수사기관에서도 범인 특정이 어렵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분노와 원망의 화살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꽂혔다는 서술이 담담해서 오히려 마음이 무거웠어요. 상실 자체보다 그것을 처리할 방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사람을 더 깊이 끌어내린다는 걸 이 대목이 보여줍니다.


이후 4년의 정체기와 우울증을 지나는 구간에서 작가가 붙든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두세 시간 남짓 병아리를 그리는 그 짧은 시간이라도 자신에게 의미가 있기를 바랐다고 적혀 있어요. 이 시기에 수없이 돌려봤다는 영상이 백상예술대상에서 오정세 배우가 남긴 수상 소감입니다. 무엇을 하든 그 일을 계속하셨으면 좋겠다는 말, 자책하지 말라는 말. 작가 스스로도 누군가에겐 흔한 감성적인 말로 들릴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끝없이 무너져 내리던 그 시절에는 생명줄 같았다고 씁니다. 흔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붙잡았다는 고백이 저는 더 정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고는 기계처럼 그리던 자기 그림이 언젠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길이 되기를 눈물로 기도했다고 적어요. 애초에 입시의 압박 속에서 자기를 달래려고 그렸던 병아리인데, 그게 남을 위로하는 자리로 옮겨 갔다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셈입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린 지점도 있었습니다. 회복의 신호가 다시 좋아요 1,000개라는 숫자로 제시된다는 점이에요. 앞쪽에서 작가는 숫자에 취해 있던 이십 대 초반을 스스로 오만한 흑역사라고 적어두었는데, 돌아온 자리에서도 다시 일어섰다는 증거는 결국 반응의 크기입니다. 작가가 이 반복을 어디까지 의식했는지는 책만으로 알기 어려웠어요. 물론 그것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니 당연한 일이고, 매끈한 깨달음으로 봉합하지 않은 편이 오히려 솔직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한 문장이라도 자기 점검이 놓였다면 더 단단해졌을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서 작가는 100개의 선플보다 단 1개의 악플에 더 깊게 베인다고 다시 말합니다. 초반에 했던 말과 사실상 같은 이야기인데 태도가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모니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면, 지금은 무례한 댓글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즉시 지웁니다. 자기 기분 때문만이 아니라 만화를 보러 온 다른 사람들까지 상하지 않게 하려는 이유에서요. 마음이 시린 날에는 비슷한 상처를 겪는 동료 작가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로 묵은 감정을 털어낸다고 하고요. 상처가 사라진 게 아니라 다루는 법이 생긴 것이고, 그게 이 책이 말하는 마음의 근육입니다.


그림 쪽에서도 같은 태도가 반복됩니다. 어두운 게 좋다는 친구에게 병아리가 불을 끄고 곁에 앉으며 어둡고도 따뜻하게 있어 주겠다고 하는 컷, 왜 우느냐고 물어놓고 자기도 같이 울어버리는 컷, 나 같은 울보를 누가 좋아하겠느냐는 말에 울보 사랑협회에서 나왔다며 팻말을 들고 나타나는 컷. 회원이 몇 명이냐는 물음에 우리 둘이 다라고 답하는 마지막 칸이 특히 좋았습니다. 세상 전체의 인정을 대신 구해다 주는 대신 한 명의 편이 되어 주는 쪽. 이 책의 위로는 계속 그 크기를 유지합니다.


책의 끝자락에서 작가는 자신의 모순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는 내 만화로 나의 차가운 본성을 억지로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만의 부드러운 표현 방식으로 내 안의 갈증을 풀어나가고, 꽁꽁 숨겨두었던 따뜻함을 세상에 조심스레 꺼내놓는 중일 뿐이다." 냉소적인 사람이 가장 다정한 캐릭터를 그린다는 사실이 위선이 아니라 표현 방식이었다는 이야기죠.


서평단으로 만나는 책은 대체로 새로 나온 목소리인데, 이번 한 권은 십 년 넘게 한자리에서 버틴 사람의 기록이라 결이 달랐어요. 오래 해온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계속할지 접을지 저울질해 본 사람이라면 남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을 겁니다. 캐릭터 하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살아남는지 궁금한 분에게도 실무 감각이 담긴 기록으로 읽힐 테고, SNS의 숫자에 마음이 오르내려 본 적 있다면 특히 그렇습니다. 다만 3장은 우울과 치료를 정면으로 다루니, 지금 마음이 가라앉아 있다면 속도를 늦춰 읽으시길 권합니다.


책 속 회복은 벚꽃이 흩날리는 봄의 이미지로 닫히는데, 여기 계절은 아직 늦여름입니다. 매미 소리가 얇아지고 저녁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한 겹 섞이기 시작하는 무렵이죠. 지나온 여름을 잘 견뎌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그런 밤에 두께감 있는 이 책을 조금씩 덜어 읽기 좋겠습니다.


한 줄 요약: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법을 병아리 한 마리와 함께 13년째 증명해온 사람의 담백한 작업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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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피로사회 - 몸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
해준 지음 / 힘찬북스(HCbooks)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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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 한가운데 둥근 문이 하나 서 있습니다. 문 안쪽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고, 사람은 없어요. 건강을 다루는 책이라면 대개 달리는 사람이나 잘 만들어진 몸을 앞세우는데, <건강피로사회>는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를 내걸었습니다. 크림빛 여백에 먹색 제목만 얹은 표지가 서늘할 만큼 조용해서, 처음에는 건강서인 줄도 몰랐습니다. 다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보니 그 비어 있는 자리가 무슨 뜻인지 알겠더군요. 저기 와서 좀 앉으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손에 쥐어 보니 두께도 무게도 만만치 않아서, 며칠에 걸쳐 나눠 읽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게 이 책과 맞는 속도였다고 생각합니다. 45개 장이 짧게 끊어져 있는데도 한 번에 몰아 읽기가 쉽지 않아요. 한 장씩 읽고 나면 뭔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집니다.


저자는 25년차 트레이너이고, 그중 20년을 재벌 총수와 그 가족들의 건강을 전담해 왔다고 소개됩니다. 이력만 보면 관리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의 비법을 기대하게 되는데, 책은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가장 완벽하게 관리하는 사람이 가장 자주 무너지더라는 것. 현장에서 마주한 그 역설이 이 한 권의 출발점입니다.


초반부에 체중계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이던 것이 아침마다로 바뀌고, 어느 순간 몸이 아니라 숫자와 살고 있었다는 사람의 사례입니다. "몸은 똑같은데 수치에 따라 하루가 달라졌다"는 문장에서 잠깐 손이 멈췄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 상태를 느끼는 대신 오늘 나올 숫자부터 계산한다는 대목도 그렇고요. 저자는 수면 앱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앱을 깔기 전에는 피곤하면 눕고 눈이 떠지면 일어났는데, 깊은 수면이 부족하다는 표시를 본 날은 하루가 그 점수 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죠. 건강 앱의 구조를 뜯어보는 부분이 특히 날카롭습니다. 수면이 괜찮으면 활동량이 부족하고, 활동량을 채우면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갑니다. 앱은 언제나 다음 문제를 찾아냅니다. 저자는 이걸 완료되지 않는 할 일 목록을 매일 들고 사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어요.


"측정은 원래 도구다. 도구가 주인이 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이 챕터에서 제 마음을 붙든 건 회복을 쉽게 그리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체중계를 치운 첫 주에 사람들이 허공에 발을 딛는 기분이라고 말한다는 것, 판단을 기계에 넘긴 세월이 길수록 감각이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저자는 굳이 적어 둡니다. 안 쓰던 감각은 처음엔 삐걱거린다고, 그러다 조금씩 살아난다고요. 이렇게 하면 낫는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의 문장이라 오히려 믿음이 갔습니다.


책의 중반으로 갈수록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몸 바깥으로 옮겨 갑니다. 3년 동안 식단을 지키고 주 5회 운동하고 술을 끊어서, 담당 의사가 이 나이에 이런 결과는 처음 봤다고 할 만한 검사지를 받아 든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병원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지 못했다고 해요. 결과를 함께 기뻐할 사람이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아서였습니다. 술자리를 끊으면서 그 자리의 사람들과 멀어졌고, 주말 운동을 지키면서 주말의 약속을 미뤘던 3년이었습니다.


"결과지의 숫자가 좋아질수록, 그 숫자를 함께 볼 사람은 줄어들었다. 건강이라는 이름의 고립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1938년에 시작된 하버드 성인발달연구를 끌어옵니다. 노년의 건강과 행복을 가장 잘 예측한 것이 부나 명예가 아니라 따뜻하고 안정적인 인간관계였다는, 이제는 제법 알려진 이야기죠. 다만 이 책에서는 그 결론이 사례 위에 얹혀 있어서 훈훈한 교훈으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외로움이 막 시작된 사람은 외롭다고 말하는데 오래된 사람은 담담하게 말한다는 관찰, 아픈 걸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회복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진단이 뒤따르거든요. 건강이라는 주제로 연결됐지만 사람으로는 연결되지 못한 자리들이 있다는 문장도 오래 남았습니다.


사십 대 후반을 지나는 입장에서 가장 실감 나게 읽힌 대목은 나이 드는 몸을 다룬 장이었습니다. 거울 앞에서 낯선 얼굴을 만난 날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나이가 든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먼저 왔다고 저자는 씁니다. 막아야 했는데 못 막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표현이 정확했어요. 이어서 저자는 20대의 몸을 기준점으로 삼는 순간 그 뒤의 모든 세월이 잃어버린 것의 목록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40대는 20대에서 무언가 빠진 상태가 되고, 50대는 더 많이 빠진 상태가 되는 셈이죠. 이 계산법으로는 평생 만족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몸이 늙는 게 아니라, 늙지 않은 몸을 정답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었다."


전환은 질문을 바꾸는 데서 옵니다. 무엇을 잃었느냐 대신, 지금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걷기와 요가와 수영이 답으로 나왔다는 흐름입니다. 몸은 시간을 담는다고, 출산과 병과 스트레스와 기쁨을 다 담고 지금 여기 있는 것이 흔적이고 역사이고 증거라고 적은 문장이 이 장의 가장 좋은 자리였습니다. 나이 드는 몸과 화해한 날 그 사람이 더 젊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마무리도 담백하고요.


25년이 남긴 원칙을 정리한 뒷부분에서 저자는 처음의 믿음을 스스로 지웁니다. 규칙적인 생활과 강도 있는 운동과 좋은 음식이 건강의 전부라고 여겼는데, 25년이 지난 지금 그중 진짜로 남은 건 하나도 없다고요. 대신 남은 것으로 꼽은 것들은 소박합니다. 주변을 정리하는 것, 남의 몸을 따라가지 않는 것,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키고 판단하는 것. 주변이 편안하면 사람도 덩달아 건강해지고 주변이 지옥 같으면 결국 병든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수천 명의 몸에서 확인했다고 말합니다. 몸과의 싸움이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이유도 여기서 정리돼요. 싸우는 쪽도 몸이고 싸움의 상대도 몸이니, 출구는 승리가 아니라 중단이라는 것입니다.


책의 끝자락에는 10년 넘게 지켜본 클라이언트가 등장합니다. 처음 왔을 때 몸과 전쟁 중이던 사람이 요즘은 몸이 쉬고 싶다고 하면 쉰다고 말하더랍니다. 더 잘 된다는 게 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 이랬습니다. 몸이 좋아진 게 아니라 삶이 편안해졌다고. 먹고 나서 생각이 없어졌고, 운동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졌고, 자고 일어났을 때 오늘 하루가 기대된다고요. 싸움이 줄어든 자리에 조용한 것이 온다는 저자의 표현이 여기서 설득력을 얻습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리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좋은 사람들 곁에 있으라는 조언은 자기 시간과 관계를 어느 정도 고를 수 있는 사람에게 유효한 처방입니다. 일터와 가족 구성을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이 원칙이 어떻게 번역되는지는 책 안에서 충분히 답해지지 않아요. 매주 수영을 다니게 된 사례도 마찬가지고요. 관리 조건이 좋은 사람들을 오래 지켜본 이력이 이 책의 강점이면서 동시에 한계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수치를 놓아도 괜찮은 사람과 반드시 관리해야 하는 사람의 경계도 조금 더 분명했으면 싶었습니다. 물론 이 책이 처음부터 처방전을 자처하지 않으니, 그 몫은 읽는 사람이 자기 사정에 맞춰 재는 수밖에 없겠지요.


권말에는 몸 감각 회복 필사 노트가 붙어 있습니다. 본문의 문장을 직접 손으로 옮겨 적게 해 둔 구성인데, 숫자에 내주었던 감각을 되찾자는 이 책의 주장과 형식이 맞아떨어집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받아 읽어 왔지만, 다 읽고 나서 책장에 꽂아 두는 대신 손이 닿는 곳에 두고 싶어진 도서는 오랜만이었습니다. 빨리 읽고 정리해야 한다는 마음 자체가 이 책이 지적하는 그 조급함과 닮아 있다는 걸 중간쯤에서 알아차렸거든요.


입추가 지났는데도 한낮의 열기는 그대로입니다. 이런 계절에는 몸이 저절로 처지고, 그럴 때마다 관리를 놓쳤다는 기분이 따라붙기 쉽죠. 이 책은 그 자책을 조용히 거둬 갑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실패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완벽하게 맑은 날만 골라 살 수는 없다고요. 건강 정보에 지쳐 본 적 있는 분이라면, 그리고 체중계 눈금 하나로 하루의 기분이 좌우된 아침을 겪어 본 적 있다면 이 한 권이 건네는 말이 남다르게 들릴 겁니다. 저는 이 책을 위로서로 읽었습니다.


몸을 이기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건강은 목표에서 삶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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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사랑 이야기
도나쵸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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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정사각에 가까운 판형이라 한 손에 들어옵니다. 두께도 얇아서 가방 안쪽에 넣으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예요. 흰 바탕 위에 굵은 선으로 그린 캐릭터가 노란 모자 같은 것을 얹고 붉은 하트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있는데, 그 하트가 반듯한 모양이 아닙니다. 한쪽이 눌린 채로 품에 들어 있어요. 표정은 점 두 개가 전부라 웃는 얼굴인지 참는 얼굴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왼쪽 위에 놓인 한 줄이 그제야 눈에 들어옵니다. 사랑은 끝났고 마음만 남았다. 표지에 적힌 이 문장이 결국 책 전체의 요약이었다는 걸 다 읽고 나서 알았습니다.


<망한 사랑 이야기>는 도나쵸 작가가 짧은 만화로 엮은 에세이입니다. 짝사랑에서 출발해 플러팅과 썸, 연애를 지나 외사랑과 이별, 미련을 거쳐 새로운 사랑으로 닫히는 구성이에요. 목차를 먼저 훑었을 때 걸린 건 분량 배분이었습니다. 미련 장이 다른 어느 장보다 깁니다. 사랑이 끝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그 뒤를 치우는 시간이 같지 않다는 걸, 작가는 차례만으로 이미 말해 두었더군요.


만화라 페이지는 빨리 넘어갑니다. 네 컷 안에 대사가 두세 마디뿐인 꼭지도 많아서, 마음먹으면 한 시간 남짓에 끝까지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속도가 붙다가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걸립니다. 걸리는 자리는 사람마다 다를 텐데, 저는 외사랑 장이 시작되는 문 앞에서 처음 멈췄습니다.


그 장의 첫 페이지에는 접힌 쪽지 그림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사랑의 정의가 왜 어려운지 아느냐고 물어 놓고는, 사랑은 복잡하다고 스스로 답해 버려요. 그 아래 붉은 하트 안팎으로 감정 단어가 알약처럼 빼곡히 붙어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나란하고, 설렘 옆에 죄책감이 있고, 희망과 배신감이 같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요. 사랑을 한 단어로 정리해 보려던 시도가 왜 번번이 실패했는지, 그림 한 장이 대신 설명해 줍니다.


같은 장 안에 하트 두 개만 등장하는 꼭지가 있습니다. 큰 하트가 작은 하트에게 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딱 하나가 부족하다고 말해요. 부족한 게 무엇이냐면 "내 사랑만큼 사랑이 크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칸에서 큰 하트는 상대를 탓하는 대신 "맞춰줄게"라고 말하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제목이 다시 적힙니다. 내 사랑도 작은 척. 이 네 컷 앞에서 생각이 좀 길어졌습니다. 젊을 때는 이런 조절을 비겁하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다르게 읽힙니다. 상대가 감당할 만큼만 내보이는 일도 배려의 한 형태라는 걸, 몇 번의 관계를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니까요.


인물이 아예 나오지 않는 페이지도 있습니다. 펼쳐진 공책 세 권과 연필만 그려져 있어요. 첫 장에는 서운하다고 적혀 있고, 다음 장에는 그 위에 다른 글씨가 겹쳐지고, 마지막 장에는 쩔 수 없지, 하는 말만 남습니다. 서운함을 썼다가 지우고 체념으로 고쳐 쓰는 과정이 필기 흔적만으로 보이는 셈이지요. 할 말을 삼키는 습관이 오래된 사람이라면 이 페이지에서 조금 머쓱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만 이어지지는 않아요. 자러 간다고 인사해 놓고 엎드려서, 나중에는 아예 드러누워서 화면을 들여다보는 꼭지가 있습니다. 그림 밑에 '자러간다'의 의미, 라고 짧게 적혀 있고요. 보고 싶다고 해 놓고 지금 나오라는 말에는 아니라고 답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이런 페이지에서는 소리 내서 웃게 돼요. 슬픔을 정면으로 다루다가 슬쩍 농담으로 빠지는 리듬이 이 책의 호흡을 살립니다.


뒤쪽 미련 장으로 갈수록 색이 빠집니다. 세상에는 제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꼭지에서, 옆에서 날아오는 조언은 "너의 마음가짐."이라는 짧은 한마디예요. 화자는 "그게 제일 맘대로 안돼"라고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말풍선 하나만 놓여 있어요. 대화가 거기서 끊깁니다.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흔한 처방이 왜 잘 듣지 않는지, 이 책은 설명 대신 침묵을 그려 둡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앉은 장면도 좋았습니다. 후회도 미련도 잘 안 한다고 시작해 놓고, 두 번째 칸에서 검게 칠한 말풍선이 화면을 덮어요. 머리속에 시커먼 미련이 가득하다고요. 결국 마지막에 이렇게 인정합니다. "그 미련이 다 너야". 말풍선을 까맣게 칠해 속내의 무게를 드러낸 방식이 단순하면서도 정확합니다.


읽으면서 걸린 점도 있습니다. 미련 장에 실린 꼭지들이 서로 비슷한 감정을 조금씩 다른 각도로 되짚는데, 한자리에서 몰아 읽으면 어느 순간 구분이 흐려집니다. 미련이라는 감정 자체가 그렇게 반복되는 것이니 의도한 구성일 수도 있겠지만, 중간에 덮어 두었다가 며칠 뒤에 다시 여는 쪽이 이 도서에는 더 맞는 독법 같았어요. 하나 더 꼽자면, 연애 장에 행복은 쟁취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 주는 꼭지가 있는데, 저는 이 책의 힘이 그런 정답보다 대답을 미뤄 두는 태도에 있다고 봅니다. 빈 말풍선 하나로 끝내 버리던 바로 그 방식 말이지요.


그렇다고 독자를 어두운 자리에 두고 가지는 않습니다. 연애 장 안에 배경이 유독 어두운 짧은 꼭지가 하나 있어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검은 덩어리가 바닥에 늘어져서 힘들다고 한마디를 흘립니다. 붉은 하트가 다가와 일어나라고, 나아가자고 말하고, 검은 덩어리는 응, 하고 몸을 일으켜요. 설득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옆에 와서 두 마디를 건넬 뿐이에요. 표지 속 캐릭터가 왜 하트를 그렇게 꼭 안고 있었는지, 이 장면을 보고 나면 짐작이 갑니다.


누구에게 권할 만한지 굳이 적어 보자면, 사랑이 끝난 자리에 아직 마음만 남아 있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가 닿을 책입니다. 다만 그 시절이 한참 지난 사람에게도 읽을 자리가 있어요. 지나온 관계를 미화하지도 후회로 덮지도 않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의 거리에서 넘겨다보는 일이, 이 나이쯤 되면 오히려 편하거든요. 문장이 짧고 그림이 커서 활자에 지친 날에도 부담이 없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붙드는 책이 있고, 그냥 자꾸 손이 가는 책이 있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어요.


여름 끝자락입니다. 낮의 열기는 아직 그대로인데 저녁 공기는 조금씩 결이 달라지고 있어요. 계절이 바뀌는 자리에서는 지나간 것들이 이유 없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런 저녁에 이 얇은 책을 몇 장 넘기면,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서둘러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웁니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남는 마음을 재촉하지 않는 책. 네 컷짜리 짧은 만화가 그 감정을 성급히 봉합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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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쓰는 AI만 멍청해 보일까? - 같은 AI를 써도 결과가 달라지는 진짜 이유
이한빛 지음 / 생능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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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보라색 바탕 위에 노랑과 검정으로 눌러 쓴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 아래에는 정장 차림의 사람이 끝없이 풀려 나오는 종이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붙들고 서 있고요. 뒤엉킨 종이가 커다란 퍼즐 조각 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답이 없다기보다 조각이 아직 안 맞았다는 쪽으로 읽혔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인데, 표지 여백마다 손글씨로 흩어놓은 문구들을 훑어보다가 이건 기술서가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저자 이한빛은 데이터 분석가로 일하며 여러 기업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지금은 연세대학교에서 AI와 데이터 분석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력을 가진 사람이 제일 먼저 꺼내는 말이 뜻밖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설명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설명은 말의 양이 아니라, 머릿속 전제와 판단 기준을 문장 안으로 옮기는 능력이라고 범위를 좁혀둡니다. 이 한정 덕분에 보고서도 쓰고 발표도 하는 사람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막힙니다. 빠르게 결론부터 말하면 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배경을 길게 늘어놓으면 말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니, 우리는 점점 짧게 말하고 기준은 생략하는 쪽으로 훈련되어 왔다는 것이지요. 이 대목은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뜨끔할 겁니다.


책이 드는 예시가 소박해서 더 잘 붙습니다. 'ㅇㅋ' 한 마디에 우리는 진짜 괜찮다는 건지 마지못해 알겠다는 건지까지 담아 보냅니다. 사람끼리는 그 여백이 눈치와 표정으로 알아서 메워지는데, AI 앞에서는 그대로 빈칸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틀리지는 않는데 어딘가 어긋나고, 정작 사용자는 자기 질문 실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 흐름 끝에 놓인 문장이 이 도서의 온도를 결정한다고 봤습니다. "우리는 설명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고 믿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책망 대신 해명에 가까운 문장이라, 읽는 사람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집니다.


중반으로 들어가면 논조가 단단해집니다. 조건을 말하지 않았으니 답도 중립적으로 나왔겠거니 여기지만, 답은 기준 없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용자가 기준을 비워두면 시스템의 기본값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는 설명이 이어지고, 이 과정을 저자는 위임이라 부릅니다. "판단을 넘긴 것이 아니라 판단 기준을 넘긴 것이다." 삽화 한 장이 이 논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최종 결정 버튼은 사람 손에 있는데, 그 사람이 서 있는 출발선의 위치는 이미 화면 쪽에서 정해져 있습니다. 퇴사 여부, 연봉 협상, 공부 루틴, 투자 기준까지 차례로 맡기다 보면 "AI가 그렇게 말하던데"라는 말버릇이 남고, 무엇이 합리적인지 정의하는 잣대는 조금씩 바깥으로 옮겨갑니다. 여기에 덧붙는 지적이 서늘합니다. AI의 문장은 사과처럼도 조언처럼도 들리지만 그 말을 직접 한 사람은 없고, 말과 책임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


후반부는 처방입니다. 회의 일정 조율 메일을 두 번 시켜본 실험이 나오는데, 두 번째에 바꾼 것은 요청 문장이 아니라 그 앞에 붙인 세 줄뿐이었습니다. 읽는 사람은 외부 파트너, 이번 주 안에 확정, 첫 협업 일정 조율. 이 세 줄을 상태라 부르고 Who와 When과 Why로 정리합니다. 결과물에는 기한이 들어가고 상대가 취할 행동이 분명해졌지요. 저자의 요약은 담백합니다. 달라진 건 말솜씨가 아니라 판단이 시작되는 자리였다고. 상태를 뒤에 붙이면 보조 정보로 처리되기 쉬우니 앞에 두라는 조언까지, 오늘 당장 메일 창에서 써먹을 만합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린 데도 있습니다. 책은 퇴사할까, 대학원 가는 게 좋을까 같은 물음에 조건이 빠져 있다고 짚는데, 사실 그런 질문은 조건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면 이미 절반쯤 답을 쥔 셈입니다. 실무에서 막히는 순간도 비슷해서, Who와 Why 자체가 흐릿한 채로 일이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 상태를 적어보라는 요구는 일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라는 말과 같아지는데, 그 앞 단계를 어떻게 통과할지에 대한 안내는 상대적으로 얇게 느껴졌어요. 저자도 상태는 출발선일 뿐이라며 선을 그어두긴 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이 서 있는 자리는 분명합니다. 프롬프트 요령을 모아둔 안내서가 아니고, 결국 사람이 자기 생각을 어떻게 문장으로 옮기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AI에게 몇 번씩 다시 시켜보다 지쳐본 적 있는 분이라면 앞부분에서 벌써 표정이 달라질 것 같고, 팀원에게 일을 넘길 때 늘 되묻는 말을 듣는 실무자에게도 남는 게 있을 겁니다. 서평단으로 받아 읽은 책들 중에서, 읽은 뒤 다음 날 업무 방식이 한 칸 움직인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 도서가 그랬습니다.


판형도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아 저녁 시간 며칠이면 넘어갑니다. 팔월의 열기가 아직 한창이라 창을 열어두면 밤공기가 미지근하게 들어오는 무렵인데, 머리를 무겁게 만들지 않으면서 생각은 한 번 정리해주는 쪽이라 이 계절과 잘 맞았어요. 여름이 물러가기 전에 일하는 방식 하나쯤 손봐두고 싶다면 곁에 두어도 좋겠습니다.


말하지 않은 만큼 판단을 넘겨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러주는, AI 활용서의 얼굴을 한 설명 훈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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