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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롱이 이야기 - 아직 그리고 있습니다, 그 병아리
김진솔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두께가 있는 책이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펼치니 진도가 꽤 나갔습니다. 각 꼭지 앞머리마다 네 컷 만화가 붙어 있는 구성이라 문장으로 눌린 마음을 그림이 한 번씩 풀어주더군요. 하늘색 바탕에 노란 병아리 하나만 크게 올린 표지도 그렇고, 겉보기에는 가볍고 말랑한 책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띠지에 적힌 문구가 이미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10만 팔로워 계정 해킹, 스물아홉 번의 이모티콘 낙방. 표지의 얼굴과 그 아래 적힌 이력 사이의 거리가 이 책의 성격입니다.

<뾰롱이 이야기>는 인스타툰 작가 김진솔이 열아홉에 마우스로 그린 병아리 한 마리를 13년 넘게 끌고 온 기록입니다. 시작은 낭만적이지 않아요. 수학 학원에서 선생님이 다들 이해했느냐고 물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가 열네 살에 공부를 놓고 미술 학원으로 옮겨 갑니다. 그 선택을 두고 작가는 "말이 정착이지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적습니다. 다른 능력을 전부 포기하고 행운이라는 스탯 하나에 전부를 투자한 게임 캐릭터 같은 결정이었다는 비유도 붙는데, 자기 진로를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되짚는 문장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어지는 한 줄이 오래 남았어요.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숨을 쉬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스케치북 위라는 사실을, 부모님도 나도 어렴풋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잘하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거기서만 숨이 쉬어져서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책의 중간은 상처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초기에 올린 그림에 징그럽다는 댓글이 달렸고, 하필 그 댓글에 좋아요가 400개 넘게 찍히는 것까지 지켜봤다고 해요. 수천 개의 칭찬보다 단 하나의 뾰족한 화살이 마음에 더 깊게 박히는 법이라는 문장이 여기서 나옵니다. 무해하고 귀여운 그림으로 방향을 튼 것이 순수한 취향의 결과만은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스케치북 구석에 잠들어 있던 동글동글한 병아리가 다시 불려 나오는 대목이 그 직후입니다.
가장 오래 붙들려 읽은 건 군 복무 중 계정을 통째로 잃는 장면이었습니다. 휴가 중 무심코 누른 링크 하나로 3년 치 기록이 사라졌고,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처지라 그 삭제를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고객센터는 매크로 답변을 반복했고 수사기관에서도 범인 특정이 어렵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분노와 원망의 화살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꽂혔다는 서술이 담담해서 오히려 마음이 무거웠어요. 상실 자체보다 그것을 처리할 방법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사람을 더 깊이 끌어내린다는 걸 이 대목이 보여줍니다.

이후 4년의 정체기와 우울증을 지나는 구간에서 작가가 붙든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두세 시간 남짓 병아리를 그리는 그 짧은 시간이라도 자신에게 의미가 있기를 바랐다고 적혀 있어요. 이 시기에 수없이 돌려봤다는 영상이 백상예술대상에서 오정세 배우가 남긴 수상 소감입니다. 무엇을 하든 그 일을 계속하셨으면 좋겠다는 말, 자책하지 말라는 말. 작가 스스로도 누군가에겐 흔한 감성적인 말로 들릴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끝없이 무너져 내리던 그 시절에는 생명줄 같았다고 씁니다. 흔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붙잡았다는 고백이 저는 더 정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고는 기계처럼 그리던 자기 그림이 언젠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길이 되기를 눈물로 기도했다고 적어요. 애초에 입시의 압박 속에서 자기를 달래려고 그렸던 병아리인데, 그게 남을 위로하는 자리로 옮겨 갔다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셈입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린 지점도 있었습니다. 회복의 신호가 다시 좋아요 1,000개라는 숫자로 제시된다는 점이에요. 앞쪽에서 작가는 숫자에 취해 있던 이십 대 초반을 스스로 오만한 흑역사라고 적어두었는데, 돌아온 자리에서도 다시 일어섰다는 증거는 결국 반응의 크기입니다. 작가가 이 반복을 어디까지 의식했는지는 책만으로 알기 어려웠어요. 물론 그것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니 당연한 일이고, 매끈한 깨달음으로 봉합하지 않은 편이 오히려 솔직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한 문장이라도 자기 점검이 놓였다면 더 단단해졌을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서 작가는 100개의 선플보다 단 1개의 악플에 더 깊게 베인다고 다시 말합니다. 초반에 했던 말과 사실상 같은 이야기인데 태도가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모니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면, 지금은 무례한 댓글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즉시 지웁니다. 자기 기분 때문만이 아니라 만화를 보러 온 다른 사람들까지 상하지 않게 하려는 이유에서요. 마음이 시린 날에는 비슷한 상처를 겪는 동료 작가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로 묵은 감정을 털어낸다고 하고요. 상처가 사라진 게 아니라 다루는 법이 생긴 것이고, 그게 이 책이 말하는 마음의 근육입니다.
그림 쪽에서도 같은 태도가 반복됩니다. 어두운 게 좋다는 친구에게 병아리가 불을 끄고 곁에 앉으며 어둡고도 따뜻하게 있어 주겠다고 하는 컷, 왜 우느냐고 물어놓고 자기도 같이 울어버리는 컷, 나 같은 울보를 누가 좋아하겠느냐는 말에 울보 사랑협회에서 나왔다며 팻말을 들고 나타나는 컷. 회원이 몇 명이냐는 물음에 우리 둘이 다라고 답하는 마지막 칸이 특히 좋았습니다. 세상 전체의 인정을 대신 구해다 주는 대신 한 명의 편이 되어 주는 쪽. 이 책의 위로는 계속 그 크기를 유지합니다.
책의 끝자락에서 작가는 자신의 모순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는 내 만화로 나의 차가운 본성을 억지로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만의 부드러운 표현 방식으로 내 안의 갈증을 풀어나가고, 꽁꽁 숨겨두었던 따뜻함을 세상에 조심스레 꺼내놓는 중일 뿐이다." 냉소적인 사람이 가장 다정한 캐릭터를 그린다는 사실이 위선이 아니라 표현 방식이었다는 이야기죠.

서평단으로 만나는 책은 대체로 새로 나온 목소리인데, 이번 한 권은 십 년 넘게 한자리에서 버틴 사람의 기록이라 결이 달랐어요. 오래 해온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계속할지 접을지 저울질해 본 사람이라면 남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을 겁니다. 캐릭터 하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살아남는지 궁금한 분에게도 실무 감각이 담긴 기록으로 읽힐 테고, SNS의 숫자에 마음이 오르내려 본 적 있다면 특히 그렇습니다. 다만 3장은 우울과 치료를 정면으로 다루니, 지금 마음이 가라앉아 있다면 속도를 늦춰 읽으시길 권합니다.
책 속 회복은 벚꽃이 흩날리는 봄의 이미지로 닫히는데, 여기 계절은 아직 늦여름입니다. 매미 소리가 얇아지고 저녁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한 겹 섞이기 시작하는 무렵이죠. 지나온 여름을 잘 견뎌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그런 밤에 두께감 있는 이 책을 조금씩 덜어 읽기 좋겠습니다.
한 줄 요약: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법을 병아리 한 마리와 함께 13년째 증명해온 사람의 담백한 작업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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