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y, Set, Korean! (준비, 시작, 한국어!)
장인혜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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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한국어 쉽네!" 기린이 외치기까지, <Ready, Set, Korean!> 서평


"아… 한국어 어려워."

기린 한 마리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기를 쥔 채 책상에 털썩 엎드립니다. 그런데 몇 컷 지나지 않아 이 친구가 주먹을 불끈 쥐고 "한국어 쉽네!"를 외치더라고요.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별일은 없었어요. 독수리는 "미국 사람이에요", 코끼리는 "태국 사람이에요", 무스는 "캐나다 사람이에요", 털모자 쓴 곰은 "러시아 사람이에요". 반 친구들이 똑같은 꼴의 문장을 돌아가며 말하는 걸 듣던 기린이 "아마 별로 안 어려울지도…?" 하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듭니다. 나라 이름 하나만 바꿔 끼우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시원스쿨닷컴에서 나온 <Ready, Set, Korean!> 1과 만화인데, 이 몇 컷에 책 전체의 성격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Ready, Set, Korean!>은 한글은 읽을 줄 알게 된 외국인 학습자가 본격적인 초급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말문부터 틔워 보자고 만든 입문 회화 교재예요. 표지 위쪽 말풍선에 적힌 "Your Next Step After Learning Hangeul"이 딱 그 얘기고요. 평생 한국어로 먹고살아 온 사십 대 후반 아재가 외국인용 한국어 교재 서평을 쓴다니, 처음엔 저도 좀 웃기긴 했습니다. 서평단 하면서 소설이며 에세이며 이것저것 받아 봤지만 내 모국어를 배우는 책은 또 처음이라서요.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요.

저자 장인혜 선생님은 K-pop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부터 해외에서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그렇게 20년 가까이 외국인 학습자들을 만나 왔다고 해요. 머리말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한글을 막 뗐을 때 밝던 학습자들의 표정이 초급 과정에 들어가자마자 금세 사라진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은/는', '이/가', '을/를'에 '-습니다', '-아요/어요'까지 한꺼번에 밀려오니 첫 문장부터 틀릴까 걱정하게 된다는 거죠. 생각해 보면 우리도 중학교 영어 시간에 딱 그랬던 거 같아요.


저자는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즐거운 순간을 이렇게 적어 두었어요.

"서툴더라도 내 말이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그 말에 대한 대답이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이 문장에서는 회사 생활이 겹쳐 보이더라고요. 연차가 쌓일수록 틀리지 않을 말만 고르게 되는데, 막상 일이 굴러가는 건 어설프게라도 먼저 꺼낸 한마디 덕분일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머리말은 "이 교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했습니다"로 이어지고, 실제로 책 전체가 일단 입부터 떼게 만드는 쪽으로 짜여 있어요. 저자 표현을 빌리면 "먼저 입으로 익히고, 나중에 문법으로 정리하는 방식"이고요.


1과에 들어가기 전에 "처음이라도 괜찮아요!"라는 코너가 먼저 나옵니다. "천천히 말해 주세요", "다시 말해 주세요", "한국어 잘 못해요" 같은 생존 표현이 동물 친구들 그림과 같이 실려 있고, 표현마다 '언제 써요?' 상자가 붙어 있어요.


"잠시만요" 하나에 그림이 두 장.

한 장은 알파카가 손가락을 들고 기다려 달라는 장면이고, 다른 한 장은 꽉 찬 지하철에서 길을 비켜 달라는 장면이에요. 같은 말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는 걸 긴 설명 없이 그림으로 보여 주니 한눈에 들어오더군요. 우리야 아무렇지 않게 쓰는 말이지만, 처음 배우는 사람한테는 이런 게 제일 헷갈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다음 장에는 택시, 한옥 앞 한복, 명동 거리, 치맥, 한강 유람선, 찜질방 양머리 수건, 편의점 1+1까지 한국 여행 사진첩 같은 그림이 쭉 붙어 있습니다. 노래방 화면에 뜬 "서비스 +10분 추가!"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어요. 그거 받으면 괜히 기분 좋은 거, 이제 외국 친구들도 알게 되겠구나 싶어서요.


등장하는 친구들 얘기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표지에도 나오는 호랑이가 선생님이고, 알파카 알피, 판다 판판, 기린, 무스, 독수리, 코끼리, 코기, 펭귄 같은 친구들이 과마다 돌아가며 나와요. 손에 든 국기가 저마다 달라서 다국적 반 친구들을 귀엽게 옮겨 놓은 느낌이 듭니다. 저는 기린한테 제일 정이 가더라고요. 어려우면 바로 엎드리고, 할 만하다 싶으면 금세 주먹을 쥐는 게 꼭 뭘 처음 배울 때 우리 모습 같아서요.


12과 제목은 "아아 주세요."예요. 솔직히 '아아'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누가 어디 아픈 줄 알았거든요. 책에는 팁 상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줄여서 '아아'라고도 해요"라고 친절하게 나와 있더군요. 외국인 학습자만큼이나 제 또래 아재들한테도 꼭 필요한 설명일지 모르겠어요.


만화에서는 기린이 카페라테를 시키고, 점원 코기가 "사이즈는요?", "시럽 넣어 드릴까요?" 하고 물어요. 기린의 대답은 "아니요, 시럽 빼 주세요." 건강검진 결과지가 신경 쓰이는 나이라 그런지 이 한마디가 괜히 반가웠습니다. 진동벨이 울리고 와이파이까지 묻고 나면 이번엔 무스 차례예요. 아이스 카페라테 큰 사이즈에 두유까지 야무지게 넣어 달라고 하더니 "여기 화장실 어디 있어요?" 하고 냅다 뛰어가는 마지막 컷에서 결국 크게 웃었어요. 주문, 옵션, 포장, 와이파이, 화장실까지 카페에서 입 열 일이 한 장면에 다 들어가 있는 셈이에요. 새 단어 페이지에는 메뉴와 시럽·두유·휘핑크림 같은 옵션, 진동벨과 빨대까지 그림 카드로 정리돼 있고, "먹고 갈게요"와 "가져갈게요"도 그림 두 장으로 나눠 놓았습니다.


13과 "치맥! 짠!"은 직장인 입장에서 반갑지 않을 수가 없는 제목이죠. 네온사인 켜진 치킨집에 독수리, 코기, 코끼리 셋이 들어가 "세 명이에요" 하는 첫 장면부터 퇴근길 풍경 그대로예요. 생맥주 있냐, 소주 있냐 묻고, 막걸리는 "아니요, 없어요"라는 답을 듣고, 치킨하고 감자튀김을 시키고, "짠! 건배!" 바로 다음 컷이 "취해요."


속도가 아주 한국적입니다.

새 단어 페이지 아래 '문법 팁'에는 두 가지 메뉴를 같이 시킬 때 단어 뒤에 '하고'를 붙인다는 설명이 나와요. 예문이 "치킨하고 맥주 주세요.", "소주하고 파전 주세요."더라고요. 조사 하나 가르치는데 예문을 이렇게 고르니 안 외워질 수가 없겠다 싶었어요. 만화와 패턴으로 충분히 말해 본 다음에 원리를 짧게 정리해 주는 흐름이라, 머리말에서 말한 방식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과 만화 후반부는 분위기가 살짝 달라져요. 장면이 강가 포장마차로 넘어가고, "오늘 어때요?"라는 물음에 코끼리가 "너무 슬퍼요"라고 답합니다. 생각 풍선 속에는 다투는 듯한 코끼리 둘이 보이고요. 옆에 앉은 코기는 별말 없이 "여기 소주 하나 더 주세요!"를 외칩니다. 무슨 사연인지 만화에선 따로 말해 주지 않아요. 그냥 옆에 앉아 한 병 더 시켜 주는 것. 마음 상한 친구한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대개 그 정도라서, 이 몇 컷은 웃기기보다 좀 찡하더라고요.


20과 "도와주세요."는 분실물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무스가 지하철에서 빨간 가방을 잃어버려서 안내 데스크, 분실물 센터, 경찰서까지 돌고 돌아요. 겨우 가방을 찾았나 싶었는데 "가방 안에 지갑, 우산, 물 있어요. 핸드폰 없어요." 하며 또 울상이 되더니, "핸드폰…? 핸드폰…? 여기 있어요!"


손에 들고 있었던 거죠.

경찰관이 엄지를 척 들어 주는 마지막 컷까지 보고 나니, 폰을 손에 쥐고 폰을 찾는 건 국적 불문 만국 공통인가 봅니다.

같은 과 뒤쪽 '화재 대피' 만화는 결이 완전히 달라요. "지금 불났어요! 나가요!", "비상구 저기 있어요.", "119 불러 주세요! 소방차 불러 주세요!"가 이어지고, 대피한 친구들이 "목 아파요", "머리 아파요" 하다가 구급차에 오릅니다. 팁 상자에는 지진, 태풍, 폭우, 폭염, 한파, 폭설, 실종 같은 단어와 함께 한국에서는 긴급 상황에 재난 문자가 온다는 안내, 그리고 119와 112 번호가 정리돼 있어요. 이 페이지는 한 줄 한 줄 따라가며 읽었습니다. 우리는 재난 문자가 울리면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라도 하지만, 한국어가 서툰 사람한테는 그저 낯선 알림음일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림책처럼 귀여운 교재 끝자락에 이런 내용까지 챙겨 넣은 걸 보니, 학습자를 오래 곁에서 지켜본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부록 "단어만 말해도 통해요!"는 "드디어 20과를 다 끝냈네요! 정말 축하해요!"로 시작해요. 그러고는 아직 말하려면 떨리냐고 묻고, 괜찮다고, 완벽한 문장이 아니어도 단어 하나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다독여 줍니다. 알파카가 "저기요… 서울역…?" 하면 경찰관이 길을 알려 주고, 판다가 손가락 두 개를 펴고 "주세요!" 하면 펭귄 점원이 "네, 김치찌개랑 불고기 두 개요?" 하고 알아들어요. 병원에서는 토끼가 머리를 짚고 "머리… 머리…."


그거면 된다는 거죠.

머리말에서 꺼낸 자신감 이야기가 책 맨 끝에서 이렇게 다시 돌아오니, 첫 장에서 엎드렸던 기린이 떠올랐어요. <Ready, Set, Korean!>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틀려도 괜찮으니 일단 말해 보라고요.

솔직히 걸렸던 건 제 쪽 사정이에요. 저는 이미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라, 처음 배우는 학습자가 이 패턴들을 얼마나 쉽게 받아들일지는 짐작만 할 수 있거든요. 문장이 너무 당연하게 읽혀서 학습자 입장이 되어 보려면 일부러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래도 영어 회화책 앞에서 쩔쩔매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림 보고 단어 하나 바꿔 끼우는 이 방식이 얼마나 고마운지는 알 것 같아요. 회사에 외국인 동료가 있거나 한국어 배우는 외국 친구가 있다면 한 권 건네주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판형이 크고 보통 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그림 카드와 만화가 페이지마다 큼직하게 들어가 있어서 넘기는 맛이 있고, 만화 옆 QR 코드로 같은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출판사 소개를 보면 과마다 써 봐요, 연습해요, 말해 봐요 같은 활동과 노래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Ready, Set, Korean!>은 교실에서 써도 좋고 혼자 따라 하기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0월도 끝자락이고, 바람이 제법 차가워진 화요일이에요. 책 덕분에 '아아'는 확실히 배웠는데, 이 날씨엔 아무래도 "뜨거운 아메리카노 주세요"가 먼저 나올 것 같네요. 메뉴 앞에 '뜨거운'만 붙이면 된다는 것도 <Ready, Set, Korean!>에서 배웠으니까요. 한 주 초입부터 귀엽고 따뜻한 책을 만나서 기분 좋았습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포근한 가을 보내세요.


"아… 한국어 어려워"로 엎드렸던 기린이 "한국어 쉽네!"를 외치기까지,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먼저 심어 주는 한국어 첫걸음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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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4호 구축전차 / 4호 돌격포 사진집
하비재팬 편집부 지음, 김정규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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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전차가 모자라서 만든 사냥꾼들, <독일 4호 구축전차 / 4호 돌격포 사진집> 서평


전차가 모자란 군대는 무엇으로 전차를 막았을까요.


표지에 이미 답이 반쯤 나와 있습니다. 점박이 위장 무늬를 두른 납작한 차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스듬히 달려오는데, 있어야 할 포탑이 없어요. 그 자리에 긴 포신 하나가 앞으로 쭉 뻗어 있고, 승무원 둘이 해치 위에 걸터앉아 있더군요. 낮고 단단하게 생겼는데 어딘가 사냥개 같은 느낌이 듭니다. 출판사가 붙인 문구도 "적 전차를 저격하는 사냥꾼들!"이더라고요.


<독일 4호 구축전차 / 4호 돌격포 사진집>은 하비재팬 편집부가 엮고 김정규 님이 옮겨서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나온 책이에요. 제2차 세계대전 후기에 신뢰성 높은 IV호 전차를 바탕으로 만든 대전차 자주포 네 종을 다룹니다. IV호 구축전차, IV호 전차/70(V), IV호 전차/70(A), 그리고 IV호 돌격포. 약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모두 합쳐 약 3,000량이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10월 마지막 주 화요일이에요. 바람이 제법 차가워지니 따뜻한 커피 옆에 큼직한 책 하나 펼쳐두기 좋은 계절인 거 같아요. 판형이 A4라 시원시원합니다. 두께는 보통 소설책보다 얇은 편인데, 펼치면 양면 가득 전차가 들어차서 책상 위에 한 대 세워둔 기분이 들어요.


사진집이라길래 사진만 쭉 이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독일 4호 구축전차 / 4호 돌격포 사진집>의 1장은 생각보다 읽는 맛이 있더라고요. 1935년 재군비에서 시작해서, 전격전을 준비하던 독일이 '전차의 적은 전차'라는 결론에 닿기까지를 차근차근 따라갑니다. I호 전차 차체에 체코제 4.7cm 대전차포를 얹은 I호 전차 구축차가 첫 시도였고,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KV-I과 T-34를 만나 진격이 막힌 이야기가 뒤를 잇죠. 그때 구세주처럼 나선 게 원래 보병 지원용으로 만든 III호 돌격포였다는 대목이 재미있었어요. 전고가 1,960mm로 IV호 전차 D형보다 한참 낮아서 대전차전에서 쓸모가 컸다고 하네요. 나중에 베를린 공습으로 알케트 공장이 피해를 입자, 크루프 그루존이 IV호 전차 차체에 III호 돌격포 상부를 얹어 빈자리를 메웠다는 사연도 나옵니다. 그렇게 나온 IV호 돌격포가 모두 1,141량이라고 하고요.


그 대목에서 한 문장을 보고 피식 웃었습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실전에서는, 책상머리에서 계획한 대로만 진행되지 않는 법."


회사에서 기획서 한 번이라도 써본 사람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장 아닐까요. 보병 지원하라고 만든 차가 정작 전차 잡는 일로 이름을 날렸다니, 계획표와 현장 사이의 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거 같아요.


구축전차 쪽으로 넘어가도 비슷합니다. 설계는 포마그가 맡았는데, 히틀러가 탑재할 포와 궤도 폭, 최저 지상고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지시했다고 해요. 윗분이 디테일까지 챙기면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말을 아끼겠습니다. 이름도 참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IV호 전차 구축차 F형'으로 양산 명령이 내려졌고, 'IV호 구축전차 F형'으로도 불리다가, L/70포를 얹은 뒤에는 히틀러가 직접 'IV호 전차 랑(V)'이라고 이름을 붙였대요. 그러고 나서 보통은 'IV호 전차/70(V)'로 불렸다고 하고요. 이름이 하도 바뀌어서 담당자는 명함을 몇 번이나 새로 찍었을까 싶더군요. 구축전차인데 굳이 '전차'라는 이름을 붙인 데는, 만들던 IV호 전차 H/J형을 이 차로 바꿔 나가겠다는 뜻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네 차종 가운데 마음이 제일 쓰였던 건 IV호 전차/70(A)였어요. 알케트가 개수 키트를 맡고 니벨룽겐 제작소에서 만든 차인데, '잠정 사양(Zwischenlösung)'이라고도 불렸다더군요. L/70포를 얹은 차를 빨리 늘리려고 IV호 전차 차체를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쓰다 보니 차고가 70(V)보다 35cm나 높아졌다고 해요. 전선에서는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차라리 IV호 전차 J형을 만드는 쪽이 낫겠다는 보고서까지 올라왔답니다.


그래도 1944년 8월부터 1945년 3월까지 277량이 만들어졌습니다. 임시방편으로 시작했는데 끝까지 현장을 지킨 셈이라, 중년 직장인 눈에는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4장 캡션 하나는 이 차를 두고, 주포를 빼면 설계가 많이 바뀌어서 "거의 다른 차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하더군요. 땜질로 출발해서 자기 모양을 갖춰 간 차라고 생각하니 괜히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독일 4호 구축전차 / 4호 돌격포 사진집>이 제 얼굴을 보여주는 건 2장부터인 거 같아요. 독일 문스터 전차박물관에 있는 IV호 구축전차 시제차 V2를 앞, 옆, 위, 뒤에서 차례로 훑어 갑니다. 이 차가 걸어온 길도 흥미로웠어요. 프랑스에서 훈련용으로 쓰이다가 소뮈르 기갑 박물관을 거쳐 문스터로 돌아와 복원됐다고 해요. 그래서 측면에 훈련용 차량이라는 뜻의 'Schulungs-Fahrzeug'가 큼직하게 적혀 있습니다.


캡션은 정말 깨알 같습니다. 차체 앞쪽 예비 궤도 랙에 10개가 걸려 있는데 "좌우에 5개 정도 더 들어갈 것 같다"고 굳이 덧붙여 주고, 전조등은 '보쉬 라이트'라는 애칭에 커버에 'Bosch'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고 알려주는 식이에요. 공구 코너에서 보던 그 이름을 전차 전조등에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요. 2단식 머즐 브레이크는 앞쪽이 타원이고 뒤쪽이 원형이라는 것, 고깔 모양 기관총 포트 커버는 안에서 좌우로 돌려서 여닫는다는 것까지.


사진 옆에 선으로 그린 도면이 붙어 있어서, 사진에서 그림자에 묻힌 부분을 도면이 받쳐줍니다. 4장에는 70(A)를 정면, 후면, 위에서 본 도면이 크게 실려 있고 화살표마다 주석이 빼곡해요. 모형 만드시는 분들은 이 몇 장만으로도 본전 생각이 안 나실 거 같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프랑스 소뮈르 기갑 박물관에 있는 IV호 전차/70(A) 사진들이었어요. 현존하는 유일한 70(A)라고 하는데, 1944년 12월 자유 프랑스군 제3 보병사단 '알제리아'가 노획해서 전후에도 프랑스군이 운용했다고 합니다. 이 차는 전투에서 입은 상처를 그대로 둔 채 보존돼 있어요. 차체 앞쪽 오른편에 포탄 세 발이 맞아서 두 발은 뚫고 들어갔고 한 발은 장갑에 박혔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용접이 떨어져 벌어진 틈으로는 안쪽의 7.5cm 포미가 들여다보이고요.


깔끔하게 복원된 시제차 사진을 보다가 이 대목에 오니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장갑 두께와 경사각을 숫자로만 따라 읽어 왔는데, 그 숫자가 버텨야 했던 순간이 쇠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1945년 무렵의 흑백 사진들도 그랬습니다. 폐허가 된 마을에 선 70(A) 옆으로 민간인 두 사람이 손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사진이 있고, 민가 앞에 버려진 70(A)의 긴 포신에 빨래가 널린 사진도 있어요. 무기 사진집인데 전쟁이 끝나 가던 무렵의 일상이 사진 가장자리에 같이 찍혀 있더군요.


솔직히 처음엔 용어가 좀 버거웠어요. Pak 39 L/48, KwK L/70, 치메리트 코팅, 쉬르첸, 맨틀릿 같은 말이 쉬지 않고 나오거든요. 그래도 사진 바로 옆에 설명이 붙어 있어서 몇 장 넘기다 보면 눈에 익습니다. 쉬르첸을 강판에서 6mm 와이어 철망으로 바꾼 게 무게를 줄이고 펜더 사이에 끼는 먼지를 덜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사진 속 차체 옆구리부터 보게 되더라고요.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슷하게 생긴 네 차종의 차이를 사진과 도면으로 하나씩 맞대 볼 수 있어서,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는 생각날 때마다 꺼내 펼쳐 보게 되는 책인 거 같습니다. 큼직한 판형 덕분에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해도 든든하고요.


요즘 은행잎이 하루가 다르게 노래지는 10월 끝자락입니다. <독일 4호 구축전차 / 4호 돌격포 사진집>을 덮고 나니 머릿속에 낮고 단단한 차체가 한 대 남은 기분이에요. 좋은 자료집 하나 들인 거 같아 마음이 넉넉합니다. 내일 출근할 때는 저도 IV호 구축전차처럼 몸을 낮추고 조용히 자리까지 진입해 보려고요.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가을 보내세요.


전차가 모자라던 시절 IV호 전차 차체로 버텨 낸 대전차 자주포 네 종을 개발 이야기, 박물관 실차 디테일, 전장 사진으로 따라가는 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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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한 번은 동양철학
오사지마 마사오 지음, 박현아 옮김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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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억이 통장에 있는데 나만 모른다면? <인생에 한 번은 동양철학> 서평


표지부터 좀 귀엽습니다. 하얀 바탕에 선 몇 개로 그린 인물들이 저마다 편한 자세로 있는데, 한 분은 엎드려서 턱을 괴고 책을 읽고 있고, 아래쪽 분홍 띠 위의 스님은 아예 다리를 쭉 뻗고 기대앉아 계시더라고요. 철학책 표지가 이렇게 늘어져 있어도 되나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그 자세가 곧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이었던 거 같아요.


책을 펴자마자 저자가 10초만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내 계좌에 1억 엔, 우리 돈으로 9억 원쯤이 들어 있는데 정작 나는 그 사실을 모르는 모습이래요.

아재 입장에선 9억이라는 숫자에서 이미 마음이 좀 흔들렸습니다만.

아무도 모르는 돈에 무슨 가치가 있냐고 하면, 저자는 그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숫자일 뿐이라고 답해요. 그리고 이 책은 그 1억 엔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존재, 그러니까 당신 자신을 알아보게 하려는 책이라고 소개하죠. 첫 장부터 이렇게 훅 들어오니 다음 장을 안 넘길 수가 없더군요.


<인생에 한 번은 동양철학>은 일본에서 '숟가락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사랑받는 유튜버 오사지마 마사오가 쓴 책이에요. 어려운 불경을 떠먹여 주듯 풀어줘서 숟가락인가 싶었는데, 읽어 보니 그 짐작이 영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붓다, 용수, 세친, 달마, 노자, 장자, 호넨, 신란, 렌뇨, 잇큐까지 열 명의 사상가가 차례로 나오는데요. 장 제목에 "노자와 곰돌이 푸의 닮은 삶의 태도", "달마 인형이 둥근 이유는 과도한 수행 때문이다" 같은 게 섞여 있어서 목차만 봐도 철학책 같지가 않았어요.


제일 특이하다고 느낀 건 장이 시작하는 방식이었어요. 사상가 소개로 바로 가지 않고 평범한 직장인의 하루를 먼저 보여주거든요. 붓다 장은 아침 알람을 끄는 장면으로 열립니다. 상사가 보낸 "어젯밤에 준 보고서, 좀 더 알기 쉽게 만들 수 없을까?"라는 메시지 한 줄에 커피 향조차 느껴지지 않는대요. 딱히 나무라는 말도 아닌데 말이죠. 오후엔 동료의 푸념이 꼭 내 얘기 같고, 거래처 전화에는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숙이다가 수화기를 쥔 손바닥에 땀이 뱁니다. 퇴근 전철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며 "또 쓸데없이 신경 쓰고 있네" 하고 중얼거리는 데서 장면이 끝나요.


남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이 괜찮았어요. 쉽게 주눅 드는 건 약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만큼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고 주변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힘이 있어서 마음이 반응하는 거라고 해요. 다정한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도 강하게 반응하기 쉽다고도 하고요. 그러니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말고, "별거 아니야", "나중에 생각하지 뭐"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 보라고 권하는데, 이 두 마디가 생각보다 쓸모 있겠다 싶더군요.


붓다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도 재밌었어요. 석가족 왕국의 장남으로 태어나 돈, 지위, 명성을 다 가졌고, 학문과 무예까지 뛰어났던 사람이래요. 저자 말로는 지금으로 치면 그야말로 초엘리트였답니다. 최고의 미인이라던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해 자식 복까지 누렸는데, 그런 사람이 "언젠가 늙고 병들고 죽어갈 인생,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를 고민했다는 거예요. 저자는 이걸 '세계 최초의 중2병 발병'이라고 불러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는 이야기에도 갓난아이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다고 슬쩍 덧붙이고요. 세계 4대 성인이 나랑 같은 고민을 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어깨가 좀 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맛보기로 한 대목만 옮겨 볼게요. 늘 남과 비교하고, 억지웃음을 짓고, 실력보다 잘나 보이려고 무리하는 모습들을 쭉 늘어놓은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이 상태에서는 없으면 없는 대로 괴롭고, 있으면 있는 대로 또 괴롭다."

붓다는 이런 상태를 유무동연(有無同然)이라고 불렀대요. 우리가 바라볼 곳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상태라고 하네요. 그렇다고 깨달음의 경지까지 갈 필요는 없고, 지금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덧붙이는데, 여기서 마음이 좀 놓였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장자 장의 첫 장면이었어요.

"또 졌다."

영업 실적이 나왔는데 동기 사사키가 1등이고 나는 중간보다 아래예요. 등 뒤에서 사사키 칭찬이 들리더니 "그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까지 이어집니다. 내 이름은 안 나왔는데 왠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은 그 기분이요. 점심시간에 다른 동료가 "이 자료는 사사키 프레젠테이션에 비하면 좀 약한데" 하며 넘기는 종이가 하필 내가 만든 자료였고, 포크를 든 손이 멈춥니다. 시험 점수, 스포츠 기록, 회사 할당량까지 인생은 늘 숫자와의 싸움이었다는 고백도 나와요. 마흔 줄 후반쯤 되면 그 숫자에 실적이 붙고, 연봉이 붙고, 요즘은 건강검진 수치까지 따라붙는 거 같아요. 저자는 1등을 거머쥐어도 그 1등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이 새로 생긴다는 아이러니를 짚은 다음 이렇게 정리합니다. "타인과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거의 예외 없이 지친다." 경쟁이 노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휘둘려 자신을 갉아먹지는 말자고 하니,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아서 좋았어요.


솔직히 콕 찔린 건 렌뇨 장 앞부분이었어요. 제목부터 '다정함 착취'입니다. 학교 운영위원회 회장이 "누구 이거 부탁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묻자 다들 시선을 떨구고, 그 침묵이 싫어서 결국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가 입에서 나와요. 운동회 담당에 바자회 준비, 소식지 편집까지 매번 그렇게 손을 들어 왔대요. 직장으로 넘어오면 "이거 해줄 사람?"이라는 말에 무작정 나서는 모습이 되고요. 그러다 나온 한 문장에 뜨끔했어요. "그렇게 주변 기대에 계속 맞추다 보면 어느새 좋은 사람이 그저 만만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회사에서 이십 년 넘게 지내다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게 되거든요. 저자는 그 답을 렌뇨에게서 찾아보자며 장을 이어 가는데, 그 얘기는 직접 펼쳐 보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에필로그에는 결혼하면 행복하고 미혼이면 불행하다, 부자가 되면 행복하고 가난하면 불행하다 같은 '잘못된 규칙'들을 표로 정리해 둔 부분이 있어요. 저자는 연봉, 성과, 성적, 체중 같은 숫자에 휘둘리는 마음을 '숫자병'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소중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부분까지 억지로 남에게 맞추거나 강박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 책의 요지예요. 그리고 이 문장이 나와요. "성인군자가 되지 않아도, 큰 부자가 되지 않아도,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약속에 늦은 친구를 '이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면 웃는 얼굴로 맞이할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조용히 옮겨간다는 얘기로 책이 마무리돼요. 거창한 깨달음보다 이런 손에 잡히는 예시로 끝나서 좋았습니다.


<인생에 한 번은 동양철학>은 두께도 부담 없는 편이고, 장마다 고민 하나와 사상가 한 명씩 짝을 이루고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돼요. 누가 나보다 앞서 있어서 속이 쓰린 날엔 장자 장을 펴고, 또 혼자 일을 떠안은 날엔 렌뇨 장을 펴면 될 것 같아요. 책장에 꽂아 두고 그때그때 꺼내 보기 좋은 책입니다. 동양철학이라고 하면 한자 가득한 어려운 책부터 떠올리시는 분들도 <인생에 한 번은 동양철학>은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일본에서 아마존 7개 부문 1위를 했다는데, 다들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말이 그만큼 듣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시월도 끝자락이고 어느새 화요일이네요. 길가 나무들도 하나둘 잎을 내려놓는 계절인데, 저도 어깨에 들어간 힘을 조금은 빼 봐도 되겠다 싶습니다.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오늘 하루는 너무 애쓰지 마시길요.


애쓰는 법만 배워 온 사람에게 열 명의 사상가가 힘 빼는 법을 알려주는, 출퇴근길에 꺼내 보기 좋은 동양철학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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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십 대를 위한 도덕경 - 물처럼 부드럽게, 산처럼 단단하게 52주간의 생각 수업 ㅣ AI 시대, 십 대를 위한 철학
최태규 지음 / 다빈치페이지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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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물처럼 낮게, 산처럼 단단하게 | AI 시대, 십 대를 위한 도덕경 서평


언뜻 보면 초록 산이 겹겹이 솟은 그림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산봉우리마다 책장이 비치는데, 초록 책들을 엎어서 쌓은 거더군요. 그 꼭대기 구름 위에서 교복 입은 아이 둘이 등을 맞대고 책을 읽고 있고요. 2,500년 된 할아버지 말씀이 AI한테 뭐든 물어보는 요즘 십 대한테 정말 먹힐까. <AI 시대, 십 대를 위한 도덕경>은 표지부터 그 질문에 그림으로 답을 해두고 시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10월도 끝자락이에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고, 월요일을 넘기고 화요일쯤 되면 좀 풀릴 법도 한데 어깨는 여전히 무겁네요. 예전 같았으면 이런 날엔 퇴근하고 유튜브 틀어놓고 졸았을 텐데, 요즘은 서평단 책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재가 됐습니다. 사람 일 모르는 거 같아요.


저자 최태규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 20년 가까이 아이들을 가르쳐 온 분이라고 해요. 앞서 <AI 시대, 십 대를 위한 논어>를 펴냈고, 머리말을 보면 공자 이야기를 쓰고 나니 자연스럽게 노자에게로 이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공자가 인간성의 회복에서 답을 구했다면 노자는 인위적인 것을 내려놓는 데서 해답을 찾았다는 설명이 짧고 깔끔해서 좋았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도덕경>입니다"라는 한 줄로 넘어가는 대목도 꽤 시원시원했고요.


머리말에서 저자는 AI에게 없고 사람에게만 있는 것으로 세 가지를 꼽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지혜, 손에 쥔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 그리고 흔들릴 때 중심을 잡는 힘이에요.


"고전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를 가르칩니다."


회사 생활을 이십 년 넘게 해 보니 엑셀 함수는 검색하면 다 나오더군요. 그런데 한 소리 듣고 난 다음 마음을 어떻게 추스르는지는 어디에도 안 나와 있었어요. 그런 건 결국 사람이 오래 다듬어 온 말에 기대게 되는 거 같아요.


<AI 시대, 십 대를 위한 도덕경>만의 재미는 인물 코너에 있는 듯합니다. 1년 52주에 맞춰 매주 사자성어 하나와 인물 한 명이 짝지어 나오는데, 이 인물들이 독자한테 직접 말을 거는 형식이거든요. 김홍도, 모차르트, 워런 버핏, 권정생, 리처드 파인먼까지 시대도 나라도 제각각이에요. 차례를 훑다 보면 '반면교사'로 들어간 인물들도 눈에 띕니다. '잡으려 하는 사람은 잃는다'는 집자실지 자리에 궁예가, '말이 많으면 자주 궁색해진다'는 다언삭궁 자리에 원균이 서 있더라고요. 배치만 봐도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유독 천천히 읽은 건 18주 상선약수, '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다' 편이었어요.


"더러운 걸레를 빨 때도 걸레를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죠."


이어서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틈을 만나면 소리 없이 스며든다는 문장이 나와요. "시궁창에도, 진흙탕에도 물은 불평 없이 머무르죠"라는 문장에서는 좀 뜨끔했습니다. 저는 진흙탕 같은 회의에 들어가면 표정부터 먼저 나가는 사람이라서요. 장 끝에서는 지금 무작정 밀어붙이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는지 묻는데, 이 질문은 아이들보다 중년 직장인한테 먼저 날아오는 질문 같았어요.


그 뒤에 간디가 등장하는데, 첫마디가 "나는 사상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란다"예요. 할아버지가 손주를 앉혀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말투입니다. 소금을 직접 만들려고 바닷가까지 걸었던 일, 물레를 돌려 천을 짰던 일을 담담하게 풀어놓더라고요. 감옥에 갇히고 굶고 맞으면서도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는 말투가 조용한데도 쉽게 넘어가지지 않았습니다.


"물은 바위와 싸우지 않아. 그저 돌아 흐를 뿐이지만, 끝내 바위를 뚫는 것은 물이란다."


"눈에는 눈으로 맞서면 결국 온 세상의 눈이 멀게 된다."


아이들한테 "참아라, 부드럽게 해라" 하고 잔소리하면 한쪽 귀로 흘려듣잖아요. 그런데 역사 속 인물이 자기 목소리로 들려주면 이야기가 다르게 들어갈 것 같았어요. 교실에서 오래 아이들을 만나 본 분이라 이런 화법을 고른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맛보기로 하나 옮겨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새 스마트폰을 갖고 싶어서 오래 기다렸는데 막상 손에 넣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좋은 모델이 눈에 들어와요." 지족을 풀어주는 부분이에요. 다른 장에서는 노자가 말한 배(腹)와 눈(目)을 이야기하면서 "눈이 원하는 것은 끝이 없어요"라고 하는데, 읽다 보니 스마트폰 자리에 자동차나 아파트 평수, 동기의 직함을 넣어도 그대로 말이 되더군요. 십 대를 위한 책인데 마흔 후반 아재 마음도 정확히 건드립니다.


각 장 끝에는 '가족과 함께 이야기 나눠요' 코너가 있어요. 질문이 다섯 개씩 붙어 있습니다. 마지막 52주의 질문 중에 이런 게 있더라고요.


"지금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놓아준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자리, 익숙한 일하는 방식, 예전에 잘했던 기억 같은 것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질문이었어요. 아이한테 묻기 전에 아빠가 먼저 대답을 준비해 둬야 할 것 같고요.


솔직히 처음엔 '~해요'체로 아이에게 말을 거는 문장이 어른 입장에서는 살짝 간지럽게 느껴졌습니다. 몇 장 넘기니 그 말투 덕분에 오히려 편하게 읽히더군요. 사자성어 네 글자도 한자부터 보면 낯설지만, 옆에 우리말 뜻이 바로 붙어 있어서 부담은 없었어요.


두께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노자는 5,000여 자만 남기고 함곡관을 넘어갔다는데, 그걸 풀어 쓰니 이만큼이 되네요. 노자 할아버지가 보시면 "다언삭궁이다"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한 주에 한 장씩이니 무게는 나눠 들면 됩니다.


소장 가치는 충분한 거 같아요. 한 번 읽고 꽂아 두는 책이 아니고 1년 내내 옆에 두고 펼치는 책이라서요. 머리말에도 "차례대로 읽어도 좋고, 마음이 끌리는 것부터 골라 시작해도 좋습니다"라고 되어 있어요. 저자는 "쉰두 개의 한자 성어 중 단 하나라도 '이게 내 좌우명이다'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하더군요. 십 대 자녀가 있는 집이라면 식탁에 한 권 올려 두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처럼 <도덕경> 이름만 알고 제대로 펼쳐 본 적 없는 어른한테도 문턱이 꽤 낮은 책입니다.


맺음말 제목은 '선생님, 고맙습니다'예요. 첫 번째로 고마운 선생님이 노자더라고요. 이어서 <도덕경>을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해 온 분들께 인사하고, 마지막엔 네 번째 책을 내기까지 곁에서 응원해 준 아내와 두 딸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가족과 함께 읽으라고 쓴 책의 끝이 가족에게 건네는 인사라서 보기 좋았어요.


창밖 은행잎도 하나둘 떨어지는 계절이에요. 나무도 저렇게 때 되면 내려놓는구나 싶네요. <AI 시대, 십 대를 위한 도덕경> 덕분에 1년을 같이 걸어갈 책이 한 권 생긴 기분이라 든든합니다. 상선약수라니까 저는 일단 커피 한 잔 줄이고 물부터 한 잔 더 마셔 보려고요. 다들 따뜻한 가을 보내세요.


물처럼 낮게 흐르는 법을 1년 52주에 나눠, 역사 속 인물들이 직접 들려주는 도덕경 입문서


#AI시대십대를위한도덕경 #도덕경 #최태규 #다빈치페이지 #노자 #청소년인문 #청소년추천도서 #동양고전 #고전읽기 #상선약수 #사자성어 #52주독서 #가족독서 #하브루타 #십대추천책 #인문교양 #서평 #책추천 #북유럽BOOKULOVE #신간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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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의 지혜,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53가지 인생 지혜 ㅣ 메이트북스 슬림북 8
에픽테토스 지음, 강현규 엮음, 김성훈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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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풍이 분다고 서풍을 불게 할 수는 없다, <에픽테토스의 지혜,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서평


2천 년 전 철학자가 "화난 메시지는 바로 보내지 말고 잠시 두어라"라고 말했다면 믿어지시나요. 사고 싶은 게 생겼다고 곧바로 결제하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처음엔 엮은이가 말을 너무 요즘식으로 바꾼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읽다 보니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끝까지 붙드는 재미 같더라고요. 오늘 이야기할 책은 <에픽테토스의 지혜,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입니다.


10월도 어느새 끝자락으로 가는 목요일이에요. 목요일은 주말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날이라 목요일이라는, 저 혼자 믿는 설이 있습니다. 네, 아재라서 그렇습니다.


표지부터 눈에 확 들어와요. 진한 벽돌색 바탕에 곱슬곱슬한 수염의 철학자 한 분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고, 그 아래에 "바꿀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라는 문장이 큼직하게 박혀 있습니다. 철학자 표정이 꼭 "자네, 또 쓸데없는 데 힘 빼고 있지?" 하고 묻는 것 같아요.


두께는 보통 책보다 확실히 얇은 편이에요. 손에 쥐면 가볍다 싶은데 그 안에 꼭지가 53개나 들어 있습니다. 한 꼭지가 짧아서 하나씩 끊어 읽기 좋고, 이어서 읽으면 네 개의 파트가 계단처럼 이어지더라고요.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는 데서 시작해 흔들리는 상황에서 나를 지키는 법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책임을 다하는 법으로, 마지막엔 생각을 점검하고 바로 실천하는 법까지 올라갑니다.


<에픽테토스의 지혜,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만의 특이한 점은 편역자의 말에서 먼저 보였어요. 엮은이 강현규 님이 밝히기를, 이 책은 <담화록>을 그대로 옮긴 완역본은 아니라고 해요. 제자 아리아노스가 스승의 강의와 대화를 받아 적은 <담화록>을 중심축으로 삼고, 짧게 압축된 <엥케이리디온>과 단편은 보완 자료로 참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이유도 납득이 갔어요. <엥케이리디온>은 원칙을 파악하기엔 좋은데 왜 그 원칙이 필요한지는 많이 생략돼 있고, <담화록>에는 에픽테토스가 제자들과 묻고 답하며 생각을 바로잡아가던 현장이 남아 있다는 거죠.


그래서인지 책 전체에 질문하는 목소리가 깔려 있는 느낌이 듭니다. 편역자의 말에 나오는 두 문장이 딱 그 목소리예요.


"정말 그렇게 믿는가" "그렇다면 실제로도 그렇게 살고 있는가"


마흔 후반에 이 질문을 받으면 좀 뜨끔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에픽테토스 본인이에요. 꼭지마다 "나는 ~라고 말한다"로 말문을 열고, 중간쯤 가면 꼭 "당신도"라며 독자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고대 로마의 선생님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구도라, 철학책인데도 상담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조연들도 꽤 나옵니다. 소리와 그림자만 보고 적이 왔다고 외치는 겁먹은 정찰병이 있고, 반대편에는 죽음과 가난을 살핀 뒤 그것들이 비겁함과 굴종보다 두려운 건 아니라고 본 디오게네스가 있어요. 사냥꾼의 깃털을 피해 달아나다 그물로 뛰어드는 사슴도 나오고, 죽음과 고통을 아이가 무서워하는 가면에 빗댄 소크라테스도 잠깐 얼굴을 비추고요. 비유가 하나같이 그림처럼 떠올라서 어려운 용어 없이도 뜻이 쑥 들어오는 편이었습니다.


헤라클레스에게 사자와 멧돼지가 없었다면 그 힘을 어디서 확인할 수 있었겠느냐는 물음도 좋았어요. 고난을 일부러 찾아다니라는 뜻은 아니라고 바로 덧붙이는 게 이 선생님 스타일이더군요. 그러고는 또 독자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당신도 직장이나 관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지만, 사실을 차분히 확인하고 맡은 책임을 다하고 불필요한 분노를 줄일 수는 있다고요.


첫 꼭지에 나오는 배 이야기는 장면으로 남았어요. 배를 띄우려는 사람은 배와 짐을 준비하고 떠날 때를 기다릴 수는 있지만, 어떤 바람이 불지는 정할 수 없다고 하죠.


북풍이 분다고 원망하며 서풍을 불게 할 수는 없다.


직장 생활 오래 하면서 제가 가장 많이 힘을 뺀 데가 어디였나 떠올려 보면, 대부분 바람 쪽이었던 거 같아요. 윗사람 기분, 인사 결과, 남들의 평가 같은 것들요. 책에서는 시험에서 준비하고 답하는 건 당신 몫이지만 결과까지 정할 수는 없고, 관계에서 솔직하게 말하고 약속을 지킬 수는 있어도 상대 마음까지 바꿀 수는 없다고 해요.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라는 말도 아니더군요. 몸은 돌보고 재산은 관리하고 책임도 다하되, 그 결과까지 반드시 내 뜻대로 되라고 요구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떨릴 때는 평가보다 내가 할 일에 집중하라"라는 꼭지에는 혼자 연주할 땐 멀쩡하던 음악가가 극장에만 서면 떨린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연주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 박수와 평판 욕심까지 얹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면서 발표나 면접을 앞두고 있다면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정하라고 합니다. 첫 문장을 익히고, 핵심을 정리하고, 예상 질문에 답하는 연습을 하고, 실수하면 바로잡으면 된다고요. 철학자가 이렇게 실무적인 조언을 할 줄은 몰랐어요. 연말이 다가오면 회사마다 평가 얘기가 슬슬 나오는데, 그 시즌에 책상 앞에 붙여두고 싶은 문장도 하나 있었습니다.


"다만 한 번의 칭찬이나 비판을 내 능력 전체에 대한 판결처럼 받아들이지 마라. 평가는 다음 수행을 고치는 자료로 쓰면 충분하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욕망을 모두 채우는 삶을 자유라고 부르지 마라"였어요. 돈을 꼭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돈 줄 사람 눈치를 보게 되고, 높은 자리를 원하면 그 자리를 줄 사람에게 매이고, 좋은 평판을 원하면 사람들 말에 흔들린다고 해요.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 이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쥔 사람이 내 기쁨과 두려움까지 좌우하기 시작한다."


이 나이쯤 되면 이 말에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더 높은 자리를 얻으려고 아첨하고, 옳지 않은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기 기준까지 바꾸게 된다면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는지 보라는 대목에서는 회사에서 본 여러 얼굴이 스쳐 갔습니다.


그중엔 제 얼굴도 있었고요.


그래도 에픽테토스가 욕망을 없애라고 몰아붙이지는 않아요. 무엇을 욕망할지 가리라고 하죠. 정직하게 행동하고 책임을 다하고 자기 판단을 바로 세우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허락해줄 필요도 없다는 말이 은근히 든든하더라고요.


"말을 잘하기보다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판단하라"는 꼭지는 회의실 풍경과 겹쳐 읽혔어요. "유창함을 지혜와 혼동하지 마라." 말하기 전에 왜 이 말을 하려는지 보라고 하는데, 상대에게 꼭 필요한 말인지, 아니면 내가 더 많이 안다는 걸 보여주거나 상대를 이기고 싶은 건지 돌아보라는 뜻이래요. 마이크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 분들이 먼저 떠오르긴 했는데, 솔직히 저도 가끔 그럽니다.


결론부터 정해놓고 근거만 모으는 회의 얘기도 나와요. 추론의 규칙을 다루는 꼭지인데, 진짜 은화와 가짜 은화 비유가 쉽게 들어오더라고요. "진짜는 받고 가짜는 버려라"라는 원칙만 안다고 돈을 가릴 수 있는 건 아니고, 실제로 둘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원하는 결론이 나오면 근거를 쉽게 받아들이고, 마음에 안 드는 결론에는 더 까다로워지기 쉽다는 대목에선 할 말이 없었어요.


화가 나거나 욕망이 생길 때를 다룬 꼭지에는 이런 권유가 나옵니다. 마음에 떠오른 인상을 향해 "잠깐 기다려라. 네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겠다"라고 말해보라는 거예요. 화가 나면 지금 당장 되갚아야 속이 풀릴 것 같고, 욕망이 생기면 지금 못 얻으면 큰 걸 놓칠 것 같지만, 강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요. 분노도 반복할수록 습관이 된다는 말에 이어 "감정은 먼저 찾아올 수 있어도, 그다음 행동까지 감정에게 맡기지는 마라"는 문장까지 오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결제 버튼 앞에서도 통하는 말이라 더 반가웠고요.


웃음이 났던 문장도 하나 있어요. 술이나 쾌락에 쉽게 끌린다면 처음엔 그런 상황과 거리를 두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약한 습관을 굳이 강한 유혹 앞에 세울 필요는 없다." 2천 년 전 철학자가 이렇게까지 현실적이어도 되나 싶었어요. 같은 꼭지에서 철학 공부를 어려운 논리부터 시작하지 말고 무엇을 원하고 피할지부터 바로잡으라고 하는데, 네 파트가 왜 이 순서로 놓였는지 그제야 감이 왔습니다.


처음 몇 꼭지는 솔직히 살짝 혼나는 기분이었어요. <에픽테토스의 지혜,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제목부터 명령형이고, 꼭지 제목도 "~하라", "~마라"가 53번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읽어갈수록 그 말투가 꾸지람보다는 오래 알고 지낸 선배의 직언처럼 들리더라고요.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보다 이런 사람이 나이 들수록 귀해지는 법이니까요.


한 번 읽고 꽂아두기엔 아까운 책 같아요. 꼭지 제목만 훑어도 그날 나한테 필요한 말이 하나쯤은 걸립니다. 사람 때문에 속 끓는 날엔 모욕을 같은 방식으로 되받아치지 말라는 34번을, 발표를 앞둔 날엔 9번을 펼치면 되는 식이라 책상 한쪽에 두고 손 닿는 대로 꺼내 보기 좋겠어요. 가벼워서 가방에 넣고 다니기도 부담이 없고요. 스토아철학이 처음이어도 겁먹을 필요 없는 책이라,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진 늦가을이에요. 북풍이 분다고 서풍을 불게 할 수는 없다고 하니, 이 찬바람은 원망하지 말고 외투 한 겹 더 챙기는 걸로 대응해 보겠습니다. <에픽테토스의 지혜,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덕분에 든든한 선생님 한 분 모셔온 것 같아서 마음이 꽉 찬 기분이에요. 남은 10월, 다들 바꿀 수 있는 것에 힘 쓰시면서 따뜻하게 보내세요.



북풍을 원망하는 대신 내 돛을 손보게 해주는, 2천 년 전 선생님의 53가지 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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