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기록법 - 평범한 생각을 가장 강력한 지적 자산으로 바꾸는 힘
조윤제 지음 / 오아시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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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받아 들고 처음 든 생각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이었어요. 한 손에 들어오는 판형에 두께도 얇아서, 가방 어디에 넣어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표지는 미색 한지 질감 위에 붓과 벼루, 연적, 쌓아 올린 책 묶음이 가는 펜선으로 그려져 있고, 그 옆으로 붉은 세로 글씨가 곧게 내려옵니다. 선비의 서안을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구도라, 요즘 자기계발서에서 흔히 보는 매끈함과는 결이 다르게 단정했습니다. <다산의 기록법>은 그렇게 조용한 첫인상으로 시작됐습니다.


조윤제 작가는 다산 정약용이 18년 유배 중에 500여 권을 남긴 힘을 천재성 쪽에서 찾지 않습니다. 초서, 관찰, 축적, 차록으로 시작해 분류와 편집을 거쳐 증언과 가르침까지, 열여덟 가지 기록법으로 그 힘을 풀어냅니다. 각 장 끝에는 실천 가이드가 붙어 있어서, 옛사람의 이야기로만 남지 않게 하려는 편집자의 손길도 느껴집니다.


첫 꼭지가 초서인데, 여기서 조금 뜻밖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다산이 말한 초서는 좋은 문장을 베껴 적는 기술이 아니었어요.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판단하는 저울이 마음에 먼저 서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나 책 한 권을 읽을 때는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뽑아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흘려보내야 한다."


이 문장을 두고 저는 흘려보낸다는 쪽에 눈길이 갔습니다. 저장 앱과 스크랩 폴더에 담아 두기만 하고 다시 열어 보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모으는 일보다 버리는 일이 훨씬 어려운 기술이라는 걸 인정하게 됩니다. 다산은 같은 책을 반복해 읽기만 하는 공부를 소를 탄 사람에 빗댔는데, "소를 탄 사람은 자기 소가 제일 빠른 줄 안다"는 한 줄이 유독 서늘하게 읽혔어요.


2장으로 넘어가면 이야기의 무대가 달라집니다. 다산조차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여 여러 번 덮었던 책이 <주역>이었다고 해요. 유배지에서 다른 책을 다 거두고 그 한 부만 책상에 올려 둔 뒤로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읊는 것에서 밥상을 대하고 뒷간에 가고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까지 <주역> 아닌 것이 없었다고 스스로 적었습니다. 그렇게 쌓인 메모와 해설이 나중에 <주역사전>이 되었고요. 이 대목에서 저자는 다산에게 책이란 백지에서 새로 시작하는 일이 아니었다고 정리합니다. 이미 써 둔 기록을 다시 엮는 과정이었다는 겁니다.


솔직히 이 장면 앞에서는 감탄과 거리감이 같이 왔습니다. 18년이라는 유배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밀도이기도 하니까요. 하루의 대부분을 다른 일에 쓰는 사람이 그 몰입을 어떻게 나눠 가질 수 있는지, 책은 그 질문에는 조금 덜 답해 주는 편입니다. 각 장 끝의 가이드가 그 간격을 메우려 하고 있지만, 실천 항목이 서너 단계로 압축되어 있어서 조금 더 촘촘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았어요.


그럼에도 3장에 이르러 마음이 풀렸습니다.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회갑을 맞은 해에, 다산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묘지명을 직접 씁니다. 남이 죽은 뒤에 써 주는 글을 스스로 앞당겨 쓴 셈이죠. 거기에 실패한 경험도 후회스러운 과거도 남김없이 적어 넣고는 "취하고 버릴 것을 드러내어 일가의 글로서 갖추었다"고 매듭짓습니다. 초서에서 말한 그 저울이 이번에는 자기 생애를 향해 놓인 겁니다.


같은 장에 실린 문답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유배지에서 마당을 쓸고 샘을 파고 꽃을 심는 다산에게, 한 노인이 내일이라도 사면되면 떠날 텐데 왜 평생 살 사람처럼 계획을 세우느냐고 물었어요. 다산은 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사람이 선창 안에 물 한 잔을 붓고 갈댓잎 배를 띄운 뒤, 그 뜬 것을 비웃으며 정작 자기가 큰 바다에 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어떻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잠시 머무는 자리라고 대충 살지 않았던 사람의 대답입니다. 지금 있는 곳이 임시라고 느껴질 때 꺼내 볼 만한 장면이었습니다.


4장의 '파리를 조문하는 글'은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기근과 돌림병으로 길에 시체가 즐비하던 해, 다산은 온 집에 들끓는 파리 떼를 굶어 죽은 백성이 몸을 바꿔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상을 차립니다.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적으면서요. 관리들이 태평성대라 보고하던 시절에, 아무도 적지 않은 진실을 이런 방식으로 남긴 겁니다. 기록이 개인의 자산에서 시대의 증언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여기였습니다.


요즘 노트 쓰기와 메모 정리에 관심 두는 분들이 부쩍 늘었지요. 도구는 계속 좋아지는데 남는 것이 없다는 답답함도 함께 늘어난 것 같고요.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자리를 도구가 아니라 기준에서 찾습니다. 기록학자 김익한 교수가 추천사에서 다산의 절망 한복판에 놓인 묘지명 장면을 특히 짚은 이유도 그래서일 겁니다. 오래 기록해 왔지만 결과물로 이어지지 못해 막막한 사람이라면 2장이 먼저 읽힐 테고, 무엇을 남길지부터 막막한 쪽이라면 1장이 오래 붙들 것 같습니다. 고전을 어렵게 여기던 분들에게도 문턱이 낮은 편이에요. 원문 인용마다 해설이 바로 붙고, 판형이 작아서 짬짬이 몇 쪽씩 읽어 나가기 좋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정리해 두지 않으면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걸 자주 실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한 권은 읽는 방식 자체를 한 번 점검하게 해 준 도서였습니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는 고생이 매우 많다. 그러나 너희들이 책을 읽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들으면 이로써 근심이 사라진다"는 대목이 있는데, 방법을 말하는 책의 첫머리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놓여 있다는 점이 이 책을 끝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줬어요.


늦여름 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은 저녁, 창밖 매미 소리가 하루하루 옅어지는 걸 들으며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여름이 지나가는 자리에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일도 결국 기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을 문턱에 놓고 읽기에 어울리는 책이었습니다.


다산의 기록은 많이 모으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기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조용히 일러 주는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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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쓰기로 했습니다
신은정 지음 / 행복우물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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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짙은 초록 막대 열두 개가 나란히 서 있고, 그중 하나만 노란색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습니다. 신은정 작가의 <나답게 쓰기로 했습니다> 표지를 처음 봤을 때 서가에 꽂힌 책등이 떠올랐어요. 조금 더 보니 줄에서 살짝 빠져나온 한 사람 같기도 하더군요. 제목에서 '나'만 노란 손글씨로 처리하고 괄호로 감싼 걸 보면, 표지 디자인 자체가 이미 책의 주장을 한 번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손에 쥐어 보면 핸드북 판형이라 얇고 가볍습니다. 백육십여 쪽에 다섯 개 장과 부록까지 들어 있으니 밀도는 있는데, 가방에 넣고 다니며 짬짬이 읽기에 부담이 없는 두께예요. 글쓰기 책은 대개 두껍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첫 장 넘기기가 쉽지 않은데, 이 도서는 그 문턱을 판형에서부터 낮춰 놓은 것 같습니다.


책의 출발점은 단순합니다. 왜 쓰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첫 줄이 안 나오는가. 저자는 그 답을 재능에서 찾지 않아요. "위대한 일은 작은 용기에서 시작된다. 실행할 용기, 첫 줄을 쓸 용기, 그거면 충분하다."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1장에서 인용한 박혜란 작가의 육아 이야기를 저자가 방관이 아닌 방목으로 읽어낸 대목이 인상적이었는데, 아이를 붙들어 가르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읽고 쓰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챕터는 '엄마'를 청자로 두고 쓰였지만, 물려주는 것이 말이 아니라 태도라는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자기 자리로 옮겨 오게 되는 것 같아요.


3장에 오면 책의 목소리가 실용서 쪽으로 확 기웁니다. 감정을 종이에 쏟아내기만 하면 일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진단, 글은 읽히는 순간 완성되니 독자가 있어야 한다는 정리가 나오죠. 그 뒤에 붙은 두 문장이 이 책에서 가장 다정한 자리라고 봅니다.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라서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쓰면서 특별해진다."


방법도 구체적입니다. 중심 독자를 한 명 정하고 그 대상을 넓혀 가라는 조언, 관찰에서 기획, 집필, 퇴고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 독자가 원하는 것을 재미와 효용과 감동 셋으로 압축한 정리까지 군더더기가 없어요. 오감을 다룬 챕터에서는 안톤 체호프의 말을 끌어옵니다. 달이 빛난다고 하지 말고 깨진 유리 조각에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보여 달라는 그 말이요. 저자는 오감 글쓰기를 독자에게 4D 영화를 보여주는 일에 비유하는데, 슬펐다는 단어는 머리로 이해되지만 눈물이 뺨을 타고 턱끝으로 떨어졌다는 문장은 가슴으로 이해된다는 설명이 쉽게 와닿습니다. 그러면서도 "오감 글쓰기는 대단한 재능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저 더 다정하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눌러 두는 태도가 좋았어요.


4장은 챗GPT를 다룹니다. 요즘 나오는 글쓰기 책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주제인데, 저자는 도구가 잘하는 일을 자료 조사와 문장 정리와 구조 제안으로 한정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잘 활용해도 깊숙이 숨어 있는 진심은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선을 긋습니다. 그 진심에 저자가 붙인 이름이 '내면의 진동'이에요. 자기가 쓴 글을 밤에 혼자 읽을 때 부끄러우면서도 예쁘고,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고 싶으면서 누군가는 봐줬으면 좋겠는 묘한 마음. 알고리즘이 계산할 수 없는 건 문장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마음이라는 게 저자의 답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에서 잠깐 갸웃했습니다. 앞장에서는 독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쓰라고 하고, 여기서는 아무도 안 읽었으면 싶은 마음까지 껴안으라고 하니까요. 제목이 내건 '나답게'와 독자 맞춤 사이의 간격은 저자가 마지막에 독자가 원하는 것에 제 경험을 덧붙이라는 공식으로 봉합하는데, 실제로 글을 쓸 때 그 접점을 찾는 일이 가장 어려운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이건 책의 흠이라기보다 글쓰기라는 일 자체가 품고 있는 모순에 가깝겠지요.


이 도서가 흔한 글쓰기 안내서와 갈라지는 지점은 뒷부분입니다. 5장 후반부는 잘 안 됐던 이야기로 채워져 있어요. 탈고를 다룬 챕터에서 저자는 헤밍웨이가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했다는 말을 끌어온 뒤, 제 원고 역시 쓰레기 중 쓰레기였다고 적습니다. 어찌나 재미없고 지루한지 더 못 읽고 노트북을 덮어버렸다는 고백, 고치고 또 고쳐도 수정할 것이 계속 보인다며 "이거 정말 미치는 일이다"라고 내뱉는 대목에서 저는 이 저자를 믿게 됐습니다. 눈으로 읽을 때와 소리 내어 읽을 때가 확연히 다르다는 관찰도 해 본 사람만 쓸 수 있는 문장이고요.


이어지는 챕터에서는 첫 책을 냈을 때의 욕심을 그대로 꺼내 놓습니다. 부끄럽지만 베스트셀러의 꿈을 꿨고, 사전 예약 기간에 책 팔기에만 급급해서 책 한 권을 썼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고요. 희망이 욕심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그 마음이 행동과 말투에도 묻어나왔을 거라는 자기 진단까지 나옵니다. 성공담으로 마감하는 실용서가 대부분인 걸 생각하면 꽤 드문 마무리예요. 그리고 저자는 그 시간을 통해 이전보다 단단한 글을 담대하게 써 나갈 수 있게 되었다며 "실패는 보물 같은 경험이 되었다."로 정리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걸리는 게 있긴 합니다. 표지 카피는 모두가 공감하는 나의 이야기가 브랜드가 된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책의 끝자락은 잘될 거라는 환상을 버리자는 쪽으로 착지하거든요. 퍼스널 브랜딩을 내걸어 놓고 성과에 대한 기대는 내려놓으라 하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 잠깐 발이 엇갈립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쪽이 훨씬 정직한 순서 같기도 해요. 결과를 약속하는 책은 흔하고, 결과가 오지 않아도 계속하라고 말하는 책은 드무니까요. 마흔을 훌쩍 넘기고 나면 후자의 말이 더 오래 남습니다.


이 한 권을 붙잡고 있을 만한 사람을 떠올려 봤어요. 블로그에 몇 년째 글을 올리면서도 제 이름을 걸어 본 적은 없는 분, 언젠가 책 한 권 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에만 접어 둔 채 나이만 먹었다고 여기는 분이 먼저 생각났습니다. 챗GPT를 켜 놓고 원하는 글이 안 나와 답답했던 경험이 있다면 4장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고요. 부록에 실린 글감 예시와 활동지는 혼자보다 모임에서 활용도가 높아 보입니다. 다만 탈고와 투고 절차를 아주 상세하게 익히려는 분이라면 이 판형의 분량이 조금 아쉬울 수 있겠습니다. 그 대신 시작을 미루던 사람의 등을 밀어 주는 일에는 확실히 강한 안내서예요.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읽다 보면 소개할 말을 고르는 일에만 익숙해지기 쉬운데, 이번엔 조금 달랐어요. 서평 쓰기 노하우를 다룬 챕터를 읽고 나서 서평이라는 글도 결국 누군가에게 가닿아야 완성된다는 저자의 관점을 빌려 쓰게 됐거든요. 책을 읽고 쓰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작 제 이야기는 뒤로 미뤄 두었다는 걸 이번에 인정하게 됐습니다.


늦더위가 아직 남아 있지만 저녁 공기에는 확실히 다른 결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매미 소리가 조금씩 얇아지는 시기죠. 여름 내내 미뤄 둔 일이 있다면 가을이 오기 전에 한 줄쯤 시작해 보기 좋은 때입니다. 저자가 책 안에 남긴 말을 그대로 옮기며 닫습니다. "진심으로 써 보자. 쓰다듬듯 읽어 보자."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첫 줄을 미루고 있을 뿐이라고, 실패담까지 꺼내 보이며 등을 밀어 주는 얇고 단단한 글쓰기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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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를 위한 부자 습관, 부자 마인드 - 십 대의 사고방식이 평생의 부를 결정한다
한지우 지음 / 다빈치페이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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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절약이라는 말에는 오래전부터 인색하다는 그림자가 따라다녔습니다. <십 대를 위한 부자 습관, 부자 마인드>는 그 단어의 뿌리부터 파헤치며 시작하는데, 영어 'Thrift'가 '번영하다'라는 뜻의 'Thrive'에서 나왔다는 대목에서 생각이 한 번 멈춥니다. 아껴 쓴다는 행위가 본래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써서 번성시킨다는 의미였다는 것.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궁색함의 증거처럼 취급받아 온 시간을 떠올리면, 어원 하나가 꽤 큰 정정을 해 주는 셈입니다.


한지우 작가가 쓰고 다빈치페이지에서 펴낸 이 책은 청소년을 향해 쓰였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면 화살이 어른 쪽으로도 자주 날아옵니다. 저자가 내세우는 개념은 '해피리치'예요. 많이 버는 사람보다 잘 다루는 사람이 오래간다는 전제 위에서, 진화심리학과 행동경제학, 뇌과학과 행복학을 넘나들며 돈을 대하는 태도를 여섯 개 장에 걸쳐 정리합니다. 판형과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 며칠에 나눠 읽기 좋고, 문장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순하게 풀려 있습니다.


가장 오래 붙들었던 대목은 부자들의 생활 습관을 다룬 부분이었습니다. <이웃집 백만장자>의 추적 결과를 인용하면서,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평범한 동네에서 검소하게 살고 차를 십 년 이상 타며 자녀에게 집안 사정을 알리지 않기도 한다고 전합니다. 이유가 인상적이더군요. 소비의 유혹에 아예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램지솔루션의 2022년 리포트도 비슷한 그림을 보여 주는데, 돈을 과시하기보다 돈이 주는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고 소박한 집에 살더라는 특징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스스로 김을 뺍니다. 절약만 하면 누구나 부자가 되느냐고 반문하는 문장을 먼저 꺼내 놓거든요. 독자가 지을 시큰둥한 표정을 저자가 알고 있다는 뜻이라, 이후 설명이 설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답도 정직합니다. 쉬워 보이는 그 습관이 지금 사회에서는 몹시 어려워졌다는 것. 마케팅은 24시간 작동하고, SNS를 켜면 팔로워들의 신상 자랑이 팝콘처럼 튀어나오고, 우리는 서로의 소유물로 위치를 잰다고 짚습니다. "단단한 부의 철학과 습관이 없다면 이런 분위기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이 책 전체의 방향을 쥐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절약의 목적을 규정하는 방식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자는 모은 돈이 결국 하기 싫은 일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권을 쥐여 준다고 말합니다. 통장 잔고를 늘리는 일이 자유의 크기를 늘리는 일과 이어진다는 관점인데, 사십 대 후반의 자리에서 읽으니 이 문장이 저축의 이유를 다시 정리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행복을 소유 나누기 욕망으로 설명하는 폴 사무엘슨의 공식도 나옵니다. 분자가 커지면 분모도 함께 커져 결국 제자리에 머문다는 진단 끝에 저자는 이렇게 권합니다. "소유를 늘리는 데는 일종의 한계도 있고 돈도 많이 들어가니 욕망을 조절하는 방법을 택해 봅시다." 어른에게는 수긍이 가는 말인데, 십 대 독자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릴 여지가 있어 보였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나이에 욕망을 줄이라는 조언이 먼저 도착하면, 꿈의 크기를 낮추라는 말로 오해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행히 뒤로 갈수록 균형이 잡히긴 합니다. 상대적 욕망과 절대적 욕망을 갈라 놓고, 남과 견주는 쪽의 욕망만 문제 삼거든요.


일과 몰입을 다룬 자리에서는 스시 장인 오노 지로가 등장합니다. "돈은 더 이상 큰 의미가 되지 않아요. 그저 더 나은 기술을 얻는다는 것, 더 나은 스시를 만든다는 것, 그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여든이 넘어서도 현장을 지키는 이유를 묻는 흔한 질문에 대한 답이지요.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해피리치에게 은퇴는 없다고 정리합니다. 경제적 자유를 얻어 여가만 남은 삶이 곧 행복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파이어족이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처럼 번졌던 우리 사회에도 던져볼 만한 물음입니다. 다만 이 결론에는 몰입할 만한 천직을 이미 찾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 일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떤 순서를 권할지, 책이 조금 더 말을 보태 주었으면 싶었어요.


중반부로 넘어가면 결이 달라집니다. 돈을 다룬 장의 문패에 놓인 탈무드 문장이 셉니다. "어린 자녀에게 돈 버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녀를 도둑으로 키우는 것과 같다." 그리고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의 이진이 불려 나옵니다. IMF 외환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고 채무자들에게 시달리던 아이가 절대 행복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이요. 저자는 이것을 우리 사회의 집단적 상처라 부르면서, 부모의 경제적 위기가 다음 세대의 인성까지 바꿔 놓는 과정을 짚습니다. 돈이 개인과 가정의 존엄을 지키는 방어막 역할을 한다는 서술도 여기 붙어 있는데, 그 시절을 통과한 세대라면 담담하게 읽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이 장에서 가장 설득력 있었던 근거는 따로 있습니다. 한 사람의 경제 성향이 주로 청년기에 형성되어 평생 잘 변하지 않고, 그 시기 대부분을 부모의 보호 아래 보내기 때문에 돈에 대한 태도가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연구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는 책이라는 표지의 문구가 왜 붙었는지, 이 문단 하나로 설명이 됩니다.


심리학 용어 '스키마'를 끌어와 부에 대한 인식의 틀을 점검하자고 제안하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이미 굳은 인지적 틀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상식이라 믿었던 것이 실은 비상식일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뒤이어 부자는 태생부터 다르다거나 똑똑한 사람만 부자가 된다는 통념을 하나씩 해체합니다. 다만 이 흐름에서 나폴레온 힐이나 로버트 기요사키 같은 성공학 계열의 목소리가 나란히 호명되는 건 조금 조심스러웠습니다. 저자도 '다소 과격하게'라는 단서를 달아 거리를 두긴 했지만, 앞장에서 절약과 몰입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던 결과는 온도가 달라 보였어요.


마지막 장은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애플 하면 잡스를 먼저 떠올리지만 저자는 동업자 워즈니악 쪽을 해피리치의 전형으로 세웁니다. 회사가 커진 뒤에도 경영을 원하지 않았고, 즐겁지 않은 일이라면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말했고, 그런 뜻에서 애플사가 자기 인생의 독사과 같다고 표현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성공 비결을 묻는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두 가지 목표도 오래 남았습니다. 세상을 바꿀 물건을 만드는 것, 그리고 자신의 기준대로 인생을 사는 것. 아내와 웃고 있는 그를 지켜보던 인터뷰어가 잡스가 더 성공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느냐고 속으로 되뇌는 장면에서, 성공이라는 단어의 눈금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용히 증명됩니다.


존 템플턴 편은 조금 복잡한 감정을 남겼습니다. 비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투자한다는 그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1997년 12월 한국 주식시장에 들어가 큰 수익을 냈다는 사례가 나오거든요. 앞에서 IMF를 우리의 집단적 상처로 꺼내 놓았던 바로 그 책에서요. 투자 원리로만 보면 교과서 같은 사례지만, 누군가의 삶이 무너진 시점이 누군가에게는 진입 시점이었다는 사실이 그대로 지나갑니다. 두 장면 사이의 온도차를 저자가 한 줄이라도 짚어 주었다면, 십 대 독자에게 돈의 얼굴을 더 정직하게 보여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물론 템플턴이라는 인물 자체는 자녀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고 전 재산을 재단에 기증한 사람이고, 행복은 무지개처럼 좇아가서 붙잡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는 중에 얻어지는 부산물이라고 정리한 그의 관점은 이 책의 주장과 잘 맞물립니다.


각 꼭지 끝에 놓인 '생각 더하기' 코너도 언급해 두고 싶습니다. 일이 금지된 나라를 상상해 보게 하거나, 우리가 아는 돈과 부자와 부유함의 상식 중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식이에요. 답을 주지 않고 질문만 남기는 구성이라, 아이 혼자 읽고 덮기보다 어른이 옆에서 같이 답을 만들어 볼 때 훨씬 값이 나올 겁니다.


여러 권을 읽다 보면 어떤 도서는 서평을 쓰고 나면 손을 떠나고, 어떤 도서는 책장 한쪽에 그대로 남습니다. 이 한 권은 후자에 속할 것 같아요. 돈 이야기를 꺼내는 일을 어딘가 부끄럽게 여겨 온 문화 속에서, 그 대화를 여는 마중물로 삼기에 알맞은 안내서라고 봅니다. 경제 지식이 급한 아이보다는 돈을 대하는 기준부터 세워야 할 아이에게 먼저 쥐여 주고 싶고, 사실 그 기준이 흔들리는 건 어른 쪽도 마찬가지지요.


매미 소리가 옅어지고 아침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여름 내내 미뤄 둔 이야기들을 꺼내기에 나쁘지 않은 계절이고, 용돈이나 통장이나 아르바이트 같은 화제도 그중 하나일 겁니다. 이 책은 그 대화의 첫 문장을 대신 써 주는 정도의 역할을 충분히 해냅니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를 묻기 전에 돈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먼저 정리해 주는, 부모와 십 대가 나란히 읽기 좋은 경제 인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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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튀르키예(터키) - 최고의 튀르키예 여행을 위한 가장 완벽한 가이드북, 2027년 개정판 ㅣ 프렌즈 Friends 7
주종원.채미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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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받아 들고 처음 한 생각은 단순했어요. 두껍다, 그리고 무겁다. 한 번에 훑고 덮을 물건이 아니라서 시간을 두고 며칠에 걸쳐 나눠 읽었습니다.


표지는 노란 바탕 위에 짙은 남색 밤하늘이 얹혀 있고, 카파도키아 열기구 몇 개가 별빛 사이를 떠다녀요. 한쪽에 붙은 '생애 첫 여행친구'라는 배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멋을 부린 화보집이라기보다 처음 떠나는 사람 곁에 앉아 순서를 일러 주는 쪽에 가깝겠구나 싶었어요.


<프렌즈 튀르키예(터키)> 2027년 최신판은 8개 지역 60개 도시를 담고, 그리스의 로도스와 코스까지 끌어안은 개정판입니다. 세계문화유산 스물한 곳 안내와 아홉 개의 추천 루트, 이스탄불 상세 지도가 부록으로 붙어 있고요. 앞머리에 2026년 6월까지 모은 현지 정보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물가와 입장료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니 감안하라고 미리 적어 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 있게 내밀면서도 한계를 먼저 말하는 태도가 이 도서 전체의 온도를 짐작하게 해 줬어요.


읽는 내내 되풀이해서 마주친 말은 포기하라는 조언이었습니다. 8일 핵심 루트에서는 야간버스를 연달아 타면 체력이 남아나지 않는다고 경고하고, 17일 역사 루트에서는 다 보려 하지 말고 골라서 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준비 파트에 이르러 같은 이야기가 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더군요. "'짐의 무게와 여행의 즐거움은 반비례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행 짐에 관한 말이지만, 이 한 권을 관통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욕심을 줄여야 남는 게 있다는 것.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읽으니, 일정표뿐 아니라 요즘 제 손에 쥔 것들에 대한 이야기처럼도 들렸어요.


의외였던 건 이스탄불보다 작은 도시들에서 이 안내서가 더 다정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마시아를 초록 강이 흐르는 왕들의 계곡이라 부르며 돌산과 석굴 분묘, 사과 산지라는 사실까지 챙겨 놓았고, 에르주룸에서는 광장에서 출발해 성채까지 도보 10분, 거기서 신학교까지 5분 하는 식으로 하루 동선을 분 단위로 짜 줍니다. 성채 전망을 소개하면서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서 느긋하게 주변 전망을 감상해 보자"고 덧붙인 대목에서는 저자들이 실제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한 문장이 많다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에요. 별점 하나를 매긴 곳에는 안 봐도 무방하다고 적어 두고, 어느 병원은 저렴하지만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쿠샤다스는 볼거리가 많지 않다고 인정합니다. 남동 아나톨리아는 여름에 40도를 넘으니 아예 가지 말라고까지 하고요. 좋은 말만 늘어놓지 않는 안내서가 결국 더 믿음이 갑니다.


다만 몇 군데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정치 항목은 2026년 현재를 기준으로 갱신해 두었는데 인구 통계는 2021년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개정의 밀도가 항목마다 다른 인상을 받았습니다. 숙소를 몇 군데 둘러보고 정하라거나 성수기에도 흥정해 볼 만하다는 조언도, 예약 앱으로 방을 잡는 지금의 습관과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였고요. 물론 배낭 하나 메고 걷는 여행자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말일 테니, 이건 책의 흠이라기보다 읽는 사람이 자기 여행 방식에 맞춰 걸러 낼 몫이겠지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입니다. 그동안 여러 권을 읽어 왔지만 이렇게 두꺼운 실용서를 만난 건 오랜만이었어요. 소설처럼 마음을 흔들지는 않아도, 언젠가 갈 곳을 미리 걸어 보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이 한 권의 자리는 분명했습니다. 튀르키예를 곧 떠날 사람에게는 실무 교본이 될 테고, 당장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지도를 펴 놓고 하는 예행연습이 되어 줄 겁니다.


8월 중순의 열기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하필 지금은 아나톨리아 남동쪽이 가장 뜨거울 시기라 책에서도 말리는 계절이지요. 대신 아마시아의 사과가 익는다는 가을을 떠올리며 지도를 한 번 더 펼쳤습니다. 떠나지 못하는 계절에도 여행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모양이에요.


욕심을 덜어 낼수록 멀리 간다는 것을, 60개 도시의 정보를 빌려 조용히 일러 주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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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확률, 100%
김빵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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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쥐자마자 든 생각은 가볍다는 것이었습니다. 핸드북 판형이라 가방 아무 데나 넣어도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두께도 만만해서 며칠이면 끝까지 갈 수 있는 분량이에요. 표지는 위쪽이 구름 번진 하늘색, 가운데가 형광에 가까운 분홍 띠, 아래가 짙은 파랑 물결로 나뉘어 있습니다. 흰 선으로 그린 새와 꽃, 별과 하트가 낙서처럼 흩어져 있어서, 소개 글에 적힌 신수와 신물이라는 단어를 읽기 전까지는 판타지일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첫 장을 펴면 그 인상이 더 굳어집니다. <다시 만날 확률, 100%>는 옥주라는 바닷가 시골 마을의 개학 날 아침으로 문을 열어요. 단짝이 돈을 벌겠다며 실습을 나가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된 고3 탁현진의 막막함이 앞부분을 채웁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하나씩뿐이라 그 나물에 그 밥, 다 아는 얼굴이라는 곳. 관광객이 없어 상권이 죽었고, 담임은 새 학기 첫날 이제 진짜 몇 명 안 남았다는 인사부터 건넵니다. 판타지의 문을 열기 전에 지방 소멸의 풍경을 먼저 깔아 두는 구성인데, 이 순서 덕분에 뒤에 오는 설화가 붕 뜨지 않았어요.


전학생 서수인이 들어서는 장면은 색으로 처리됩니다. 준비를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 다른 학교 교복을 그대로 입고 온 아이 하나만, 주황색으로 물든 교실에서 청색으로 튀었다고요. 표지의 분홍과 파랑이 그대로 문장이 된 것 같아서 이 대목이 반가웠습니다.


두 사람의 첫 대화가 학생증을 주워 주며 시작된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사진이 실물과 다르다는 타박에 현진이 엄지로 사진을 가리고 이름만 내밀며 "이 학교에서 탁 씨는 나뿐이거든." 하고 답하는 식이에요. 그날 오후 책상에 놓이는 딸기우유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편의점 투플러스원으로 남은 걸 건네는 거고, 급식실에서 옆자리를 두드리며 "왜 거기 앉아? 혼자 먹게? 같이 먹자." 하는 말에 현진은 "됐어. 혼자가 편해."라고 대꾸한 뒤 속으로 곧장 그 말을 뒤집습니다. 겉으로 튕기고 속으로 흔들리는 열여덟의 화법이 두 줄 만에 끝나는데, 이 소설의 로맨스가 어떤 속도로 갈지 여기서 짐작이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오래 붙들고 있었던 이유는 다른 쪽에 있습니다. 가운데쯤 놓인 이장 허영철의 장이에요.


여기서 옥주의 용신 설화가 통째로 펼쳐집니다. 승천하다 떨어진 용을 나그네가 돌봐 주고, 보답으로 소원을 묻자 나그네는 용이 이곳에 계속 머물기를 빌었다는 이야기. 소원이 이루어져 용은 하늘로 가지 못한 채 인간의 행색으로 함께 살고, 여의주를 탐낸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 달아나면서 둘 다 무너집니다. 나그네를 잃은 용이 울다가 바다가 되었다는 결말까지 듣고 나면, 옥주라는 지명이 왜 바다에 보배가 머문다는 뜻인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요.


문제는 그 설화가 현재로 넘어오는 방식입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재난이 먼저 옵니다. 축사의 돼지가 떼로 죽고, 멀쩡하던 과수원 나무가 병들고, 무른 곳 없던 열매가 떨어집니다. 하필 해무가 마을을 덮고 있어서 카메라에 잡히는 것도 없고요. 마을회관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멱살부터 잡습니다. 그러다 바이러스가 도는 것 같다며 축산과 신고 이야기를 꺼내는 대목에서, 이 작가가 초자연을 다루면서도 생활의 감각을 놓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화살이 열여덟 아이 하나에게 모이는 과정에는 뚜렷한 악당이 없습니다. 당집의 무당은 제단 훼손이 사실인지 묻는 이장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건 소문이라고, 소문."이라고 잘라 말하고, 가진 걸 다 잃은 사람들이 무슨 마음을 모으겠냐는 반문에는 "가진 걸 다 잃었으니 더 선동되기 쉽지."라고 받습니다. 군수는 여의주를 손에 넣으면 세상이 우리 것이 될 수 있다며 이장의 약점을 쥐고 흔들고요. 이장이 끝내 무너지는 지점이 아들의 서울 역세권 전세금이라는 사실은 조금 아프게 읽혔습니다. 신물이니 신수니 하는 이야기의 한복판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결국 자식 앞으로 남겨 줄 방 한 칸이라는 설정이니까요.


그리고 소문은 아주 시시하게 시작됩니다. 이장이 보행기를 밀고 가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그 이야기 들으셨냐고 묻는 장면인데, 동기가 대단한 악의도 아니에요. 숙제를 빨리 털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필요한 사람은 딱 하나, 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줄 사람뿐이라고요. 그 문단은 이렇게 닫힙니다. "소문이란 건 전염병처럼 어쩔 도리 없이 번지는 것이니까." 앞에서 마을 사람들이 가축 폐사를 두고 전염병을 걱정하던 장면과 겹쳐 놓으면, 정작 마을을 덮친 역병이 무엇이었는지가 선명해집니다.


다만 갸웃한 대목도 있었습니다. 무당의 처방은 소문으로 아이를 압박해 여의주를 찾게 만들자는 것인데, 계산이 좀 헐겁습니다. 몰린 사람은 도망칠 수도 있고, 흥분한 마을 사람들이 손을 대기라도 하면 신물 회수는 영영 어려워지니까요. 굿 값을 부르는 장면이 바로 뒤에 붙어 있어서 신념과 잇속 중 어느 쪽이 앞선 건지 끝까지 애매하게 남습니다. 인물의 이중성으로 읽으면 그럴듯하지만, 계획으로 보면 성기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어요. 설화가 중반에야 등장하는 배치도 취향이 갈릴 것 같습니다. 앞쪽 백여 쪽을 근거 없이 따라가야 하는 셈이라, 설정의 윤곽을 먼저 쥐고 읽는 걸 좋아하는 분이라면 초반이 다소 헐겁게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덮고 나서 오래 남은 건 에필로그였습니다. 청보리밭 한가운데, 날개가 밟혀 날지 못하는 나비 앞에 두 아이가 마주 앉습니다. 남자아이가 두 손으로 나비 위에 작은 지붕을 만들며 "사람들이 밟고 가면 어떡해. 지켜주자." 하고, 여자아이가 그 위에 제 손을 포갭니다. 부모가 부르는 소리에 아이는 손을 빼야 하고, 이름을 묻고 답하는 짧은 인사가 오갑니다. "수인이구나. 잊지 않고 기억할게. 우리 다음에 또 만나." 제목이 회수되는 자리이자, 설화 속 나그네가 용에게 빌었던 소원과 같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장면의 풍경 묘사가 표지와 그대로 포개진다는 점도 적어 두고 싶어요. 새파란 하늘과 푸르스름한 들판이 한가운데 선을 그어 나눈 것처럼 보이고, 바다 같기도 하고 과거와 미래 같기도 하고, 하나인 것 같으면서 둘인 것 같은 세계라고 적혀 있습니다. 죽을 것처럼 보이던 나비가 손을 벌리자 날아오르고, 아이도 나비도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 다시 청보리 이삭 끝에 앉아 하얀 날개를 반짝이는 마무리도 좋았습니다. 다시 만난다는 약속이 이미 한 번 지켜진 셈이니까요.


표지에 뽑힌 "죽을 만큼 싫었나 보지. 너를 잊는 게."라는 한 줄을 처음 봤을 때는 흔한 로맨스 카피로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니 저 문장의 무게가 조금 달라집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그 사이에서 어른들이 무엇을 덮고 무엇을 옮겨 놓았는지를 지나온 뒤라서요.


서평단으로 만나는 책 중에는 표지와 소개 글에서 받은 인상 그대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한 권은 그 예상을 두어 번 비껴갔어요. 로맨스판타지의 옷을 입고 있지만 안쪽에는 공동체가 사람 하나를 골라내는 절차가 꽤 정교하게 깔려 있고, 그 절차를 굴리는 사람들이 전부 제 자식과 제 살림을 걱정하는 평범한 얼굴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십 대의 연애담을 기대하고 펼친 분에게는 예상 밖의 무게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무게 때문에 로맨스의 온기가 더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학교와 마을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눈치를 보며 자란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장의 장에서 오래 멈추게 될 거예요.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이 글이 더워지는 여름에 잠시나마 시원한 바람처럼 곁을 지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적었습니다. 광복절이 지나고 아침저녁 공기가 슬쩍 물러서기 시작한 요즘 읽으니, 여름이 완전히 물러나기 전에 남겨 두는 한 줄기 바람 같았습니다. 폭염이 꺾이는 자리에서 읽기에 알맞은 두께이고, 알맞은 온도입니다.


소문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바닷마을에서, 잊지 않겠다는 약속 하나가 두 생을 건너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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