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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기록법 - 평범한 생각을 가장 강력한 지적 자산으로 바꾸는 힘
조윤제 지음 / 오아시스 / 2026년 8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받아 들고 처음 든 생각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이었어요. 한 손에 들어오는 판형에 두께도 얇아서, 가방 어디에 넣어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표지는 미색 한지 질감 위에 붓과 벼루, 연적, 쌓아 올린 책 묶음이 가는 펜선으로 그려져 있고, 그 옆으로 붉은 세로 글씨가 곧게 내려옵니다. 선비의 서안을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구도라, 요즘 자기계발서에서 흔히 보는 매끈함과는 결이 다르게 단정했습니다. <다산의 기록법>은 그렇게 조용한 첫인상으로 시작됐습니다.

조윤제 작가는 다산 정약용이 18년 유배 중에 500여 권을 남긴 힘을 천재성 쪽에서 찾지 않습니다. 초서, 관찰, 축적, 차록으로 시작해 분류와 편집을 거쳐 증언과 가르침까지, 열여덟 가지 기록법으로 그 힘을 풀어냅니다. 각 장 끝에는 실천 가이드가 붙어 있어서, 옛사람의 이야기로만 남지 않게 하려는 편집자의 손길도 느껴집니다.
첫 꼭지가 초서인데, 여기서 조금 뜻밖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다산이 말한 초서는 좋은 문장을 베껴 적는 기술이 아니었어요.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판단하는 저울이 마음에 먼저 서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나 책 한 권을 읽을 때는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뽑아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흘려보내야 한다."

이 문장을 두고 저는 흘려보낸다는 쪽에 눈길이 갔습니다. 저장 앱과 스크랩 폴더에 담아 두기만 하고 다시 열어 보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모으는 일보다 버리는 일이 훨씬 어려운 기술이라는 걸 인정하게 됩니다. 다산은 같은 책을 반복해 읽기만 하는 공부를 소를 탄 사람에 빗댔는데, "소를 탄 사람은 자기 소가 제일 빠른 줄 안다"는 한 줄이 유독 서늘하게 읽혔어요.
2장으로 넘어가면 이야기의 무대가 달라집니다. 다산조차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여 여러 번 덮었던 책이 <주역>이었다고 해요. 유배지에서 다른 책을 다 거두고 그 한 부만 책상에 올려 둔 뒤로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읊는 것에서 밥상을 대하고 뒷간에 가고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까지 <주역> 아닌 것이 없었다고 스스로 적었습니다. 그렇게 쌓인 메모와 해설이 나중에 <주역사전>이 되었고요. 이 대목에서 저자는 다산에게 책이란 백지에서 새로 시작하는 일이 아니었다고 정리합니다. 이미 써 둔 기록을 다시 엮는 과정이었다는 겁니다.

솔직히 이 장면 앞에서는 감탄과 거리감이 같이 왔습니다. 18년이라는 유배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밀도이기도 하니까요. 하루의 대부분을 다른 일에 쓰는 사람이 그 몰입을 어떻게 나눠 가질 수 있는지, 책은 그 질문에는 조금 덜 답해 주는 편입니다. 각 장 끝의 가이드가 그 간격을 메우려 하고 있지만, 실천 항목이 서너 단계로 압축되어 있어서 조금 더 촘촘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았어요.
그럼에도 3장에 이르러 마음이 풀렸습니다.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회갑을 맞은 해에, 다산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묘지명을 직접 씁니다. 남이 죽은 뒤에 써 주는 글을 스스로 앞당겨 쓴 셈이죠. 거기에 실패한 경험도 후회스러운 과거도 남김없이 적어 넣고는 "취하고 버릴 것을 드러내어 일가의 글로서 갖추었다"고 매듭짓습니다. 초서에서 말한 그 저울이 이번에는 자기 생애를 향해 놓인 겁니다.
같은 장에 실린 문답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유배지에서 마당을 쓸고 샘을 파고 꽃을 심는 다산에게, 한 노인이 내일이라도 사면되면 떠날 텐데 왜 평생 살 사람처럼 계획을 세우느냐고 물었어요. 다산은 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사람이 선창 안에 물 한 잔을 붓고 갈댓잎 배를 띄운 뒤, 그 뜬 것을 비웃으며 정작 자기가 큰 바다에 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어떻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잠시 머무는 자리라고 대충 살지 않았던 사람의 대답입니다. 지금 있는 곳이 임시라고 느껴질 때 꺼내 볼 만한 장면이었습니다.
4장의 '파리를 조문하는 글'은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기근과 돌림병으로 길에 시체가 즐비하던 해, 다산은 온 집에 들끓는 파리 떼를 굶어 죽은 백성이 몸을 바꿔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상을 차립니다.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적으면서요. 관리들이 태평성대라 보고하던 시절에, 아무도 적지 않은 진실을 이런 방식으로 남긴 겁니다. 기록이 개인의 자산에서 시대의 증언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여기였습니다.
요즘 노트 쓰기와 메모 정리에 관심 두는 분들이 부쩍 늘었지요. 도구는 계속 좋아지는데 남는 것이 없다는 답답함도 함께 늘어난 것 같고요.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자리를 도구가 아니라 기준에서 찾습니다. 기록학자 김익한 교수가 추천사에서 다산의 절망 한복판에 놓인 묘지명 장면을 특히 짚은 이유도 그래서일 겁니다. 오래 기록해 왔지만 결과물로 이어지지 못해 막막한 사람이라면 2장이 먼저 읽힐 테고, 무엇을 남길지부터 막막한 쪽이라면 1장이 오래 붙들 것 같습니다. 고전을 어렵게 여기던 분들에게도 문턱이 낮은 편이에요. 원문 인용마다 해설이 바로 붙고, 판형이 작아서 짬짬이 몇 쪽씩 읽어 나가기 좋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정리해 두지 않으면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걸 자주 실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한 권은 읽는 방식 자체를 한 번 점검하게 해 준 도서였습니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는 고생이 매우 많다. 그러나 너희들이 책을 읽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들으면 이로써 근심이 사라진다"는 대목이 있는데, 방법을 말하는 책의 첫머리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놓여 있다는 점이 이 책을 끝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줬어요.
늦여름 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은 저녁, 창밖 매미 소리가 하루하루 옅어지는 걸 들으며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여름이 지나가는 자리에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일도 결국 기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을 문턱에 놓고 읽기에 어울리는 책이었습니다.
다산의 기록은 많이 모으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기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조용히 일러 주는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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