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조작되는 것이다 ㅣ 시대철학 2
파울 요제프 괴벨스 지음 / 비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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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받고 먼저 눈에 걸린 건 색이었어요. 연한 살구빛 바탕에 세필로 그린 듯한 초상, 그 아래를 가로지르는 짙은 버건디 띠. 배색만 보면 조용한 교양서인데, 정작 거기 얹힌 문장은 진실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설계된다는 선언입니다. 디자인의 온도와 문구의 온도가 서로 다르다는 인상, 그게 이 한 권에 대한 첫 느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목차를 펼치고 잠시 망설였습니다. 저자 이름이 요제프 괴벨스인 데다, 다섯 개 장의 소제목이 전부 명령문이에요. 가상의 적을 악마화하라거나, 동정심을 거세하라는 문장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출판사 소개글은 이 도서가 선동술을 배우기 위한 책이 아니라 반면교사라고 분명히 밝혀두었는데, 목차만 훑으면 독하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처세서로 오해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이 간극을 어떻게 감당할지가 읽는 동안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1장의 마지막 글은 시각이 활자를 앞선다는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대중은 읽기 전에 보고, 시각이 점령된 뒤에야 활자를 끼워 맞춘다는 것이죠. 읽은 것은 잊혀도, 본 것은 남는다. 이 짧은 문장 뒤에 붙는 역사적 사례가 나치 독일의 뉴스릴이었습니다. 실제로 1930년대 초까지 독일의 뉴스릴 시장은 네 개 제작사로 갈라져 있었는데, 1933년 이후 선전부의 감독과 검열 아래 놓였고 1939년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통합되어 1940년 6월부터 '독일 주간 뉴스'라는 단일 타이틀로 극장에 걸렸습니다. 극장에서 본영화 앞에 붙던 그 짧은 화면 안에는 진군하는 전차와 환호하는 군중과 미소 짓는 총통이 있었고, 후퇴와 시체와 공포는 없었습니다. 보고 나온 관객은 전쟁을 안다고 믿었습니다. 책은 여기서 사람의 뇌가 본 것과 일어난 것을 구분하지 못하며, 그 구분하지 못함이 모든 권력의 출발점이라고 짚습니다. 권력은 일어난 일을 통제하지 못하고 보여줄 것을 통제한다는 정리에 이르면, 90년 전 이야기가 조금도 멀지 않게 들려요. 출근길에 넘기는 짧은 영상과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본 화면이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자국을 남긴다는 대목은 숏폼과 알고리즘 피드에 익숙해진 지금의 우리를 거의 그대로 묘사합니다.


3장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시간 쪽으로 옮겨갑니다. 반복이 신념을 만든다는 이야기인데, 근거로 든 사실은 꽤 단단합니다. 1933년 제정된 편집자법 이후 선전부와 제국언론원이 언론인 등록과 보도 지침을 쥐고 있었고, 등록하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법조문에는 제국의 힘을 국내외에서 약화시킬 내용을 싣지 못하게 하는 조항까지 들어 있었어요. 같은 메시지가 다른 자리, 다른 입, 다른 매체에서 동시에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착각한다는 진단이 여기서 나옵니다.


읽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저자는 같은 일이 회사에서도 벌어진다고 씁니다. 누군가 가볍게 흘린 평가가 다음 주에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고, 세 번째 사람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올 때 그 평가는 사실이 되어버립니다. 사실로 굳은 평가는 평판이 되고, 평판이 된 뒤에는 그 말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조직에서 시간을 보낸 사람이라면 이 문장의 실감을 부인하기 어려울 거예요. 뒤이어 칭찬의 경로도 똑같다고 말합니다. 세 번 반복된 칭찬은 능력이 되고, 다섯 번은 권위가 되고, 열 번은 권력이 된다는 계산이죠. 그리고 이렇게 못 박습니다. "권력은 능력에서 오지 않는다. 권력은 반복에서 온다." 이 차가운 사실을 마주하지 못하면 평생 자기 능력만 닦다가 끝난다는 말이 뒤따르는데, 성실함 하나로 버텨온 쪽에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는 진단입니다.


다만 책을 덮고 나서 한 가지는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도서에는 확인 가능한 역사적 사실과 저자 자신의 해석이 같은 문장 결로 나란히 놓여 있어요. 뉴스릴 통합이나 편집자법처럼 자료로 뒷받침되는 서술이 있고, 괴벨스가 두려워한 단 한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는 식의 해석이 있는데, 둘의 무게가 같아 보이게 쓰여 있습니다. 3장의 소제목으로 걸린 거짓의 반복에 관한 문장 역시 한국에서 오래 괴벨스 어록처럼 통용되어 왔지만, 정본 전기에서도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종류에 속합니다. 오히려 1934년 연설에서 그는 거짓말을 수반한 선전은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책은 해당 문장을 괴벨스의 어록으로 내세우지 않고 반복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틀로 쓰고 있어서 큰 흠은 아니지만, 반면교사를 자처한 책이라면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저자의 목소리인지 조금 더 표시해두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서가 미덥게 느껴진 대목도 3장에 있었습니다.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권하는 책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을 저자가 알고 있어요. 매번 다 의심하면 사람은 살 수가 없고, 살 수 없는 자리에서 결국 더 큰 권위에 기대게 된다면서 의심의 끝은 새로운 맹신이라고 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의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한 문장만 의심해 보라고 권합니다. 자기 문장이 들어섰는지 알아보는 표식도 단순합니다. 그 문장을 떠올릴 때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고,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호흡으로만 발음된다는 것.


짐은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도 이 안에 있습니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이미 절반은 자유인데, 짐인 줄도 모르고 평생 지고 다니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죠. 그 문장 앞에서는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마지막 장은 뉘른베르크의 밤에서 시작합니다.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고안한 빛의 기둥,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함성이 나옵니다. 성화 봉송이 그 대회에서 처음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저는 이 책을 계기로 다시 확인해봤는데, 올림피아의 고대 경기장에서 채화한 불을 3천 명이 넘는 주자가 이어 달려 베를린까지 옮겼고, 봉송 경로는 옛 독일 올림픽 선수가 설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감동으로 소비하는 의례의 출발점이 선전의 무대였다는 사실은 차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자가 짚는 핵심은 괴벨스가 가장 정교하게 설계한 것이 연설문이 아니라 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어둠과 빛의 비율, 군중의 밀도, 음악의 박자를 계산해두면 그 안에 들어선 사람은 자기 의지로 환호한다고 믿게 되고, 공간이 끌어낸 환호를 스스로 신념이라 부르게 된다는 것이죠.


여기서 책은 규모를 갑자기 줄입니다. 회식 자리를 떠올려보라고 해요. 모두가 한 사람을 비웃을 때 같이 웃지 않으면 분위기가 깨지고, 한 결정에 혼자 침묵하면 눈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고 따라 웃은 웃음과 따라 끄덕인 고갯짓이 쌓여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입을 막는다는 서술이었습니다. 조명과 깃발의 역사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저녁 자리까지 내려오는 이 이동이 이 책의 가장 좋은 솜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차가운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같이 웃고 같이 박수쳐도 좋다고, 다만 그 박수의 끝에서 오늘 무엇에 동의했는지 한 줄을 적어두라고 합니다. 그 기록이 다음 날의 판단을 지킨다는 것이죠. 되짚는 동안 부끄러움이 올라온다면 회복의 신호이고, 부끄러움조차 올라오지 않는다면 경고의 신호라는 구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5장의 제목이 유난히 살벌한데, 정작 그 안에 담긴 태도는 이렇게 온순했어요.


책의 끝자락에 놓인 이미지는 한 발 늦은 박수입니다. 환호 속에서 반 박자 늦게 손을 마주치는 그 미세한 시차가 자기 의지의 마지막 표시이고, 그 표시가 남은 사람은 다음 날 거울 앞에서 자기를 알아본다는 것이죠. 지배자의 자리를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아래 환호의 한가운데로 옮겨놓는 마무리인데, 목차 내내 군림과 탈취를 외쳐온 책이 마지막에 와서 스스로의 기대를 배반하는 구조입니다. 이 배반이 있어서 저는 이 한 권을 처세서가 아니라 경고문으로 읽었습니다.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매일 무엇을 듣고 보고 말하는지, 그 셋의 합이 다음 일 년이고, 다음 일 년이 쌓여 십 년이 되고, 십 년이 쌓여 그 사람의 얼굴이 된다는 대목입니다. 얼굴은 그 사람이 반복한 모든 것을 정확히 보여 준다는 말 앞에서, 살아온 시간이 어느 정도 쌓인 사람은 잠깐 조용해질 수밖에 없더군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마음이 편해지는 책과 불편해지는 책이 갈립니다. 이 도서는 후자였어요. 다만 그 불편함이 나쁜 종류는 아니었습니다. 자기계발서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우리가 확신이라 부르는 것들의 출처를 되짚게 만드는 쪽이고, 뉴스와 피드와 회의실에서 매일 오가는 말들을 조금 다르게 듣게 합니다. 얇고 가벼운 판형이라 오래 들고 있기에 좋은 안내서인데, 그 안에 든 질문은 오래 남는 편입니다. 격한 문장에 쉽게 설득되지 않는 독자라면 오히려 이 책과 잘 맞을 것 같고, 스스로 판단한다고 믿어온 시간이 길수록 읽는 재미와 서늘함이 함께 올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바뀌기 시작한 9월입니다. 한낮의 더위는 아직 남았는데 저녁 무렵의 바람은 확실히 다른 결로 불어와요. 이런 계절에는 한 해 동안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라 웃었는지 조용히 되짚어보기가 조금 수월합니다. 이 한 권은 그 되짚음의 목록을 꽤 구체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묻게 만드는 책. 선동의 기술을 가르치는 대신, 이미 새겨진 자국을 들춰볼 용기를 권하는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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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만든 세계 - 통화·공급망·기술을 둘러싼 패권전쟁
유재일 지음 / 김영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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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정과 회색만으로 채운 표지 위에 낡은 지도 한 장이 흰 선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MAR PACIFICUM, AMERICA SEPTENT 같은 라틴어 지명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서, 세계가 아직 측량되는 중이던 시절의 화면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어요. 두 개의 반구가 위아래로 겹쳐 모래시계처럼 서 있는 구도도 눈에 오래 남습니다. <미국을 만든 세계>는 그 조용한 화면 아래쪽에 붉은 글씨 한 줄만 뜨겁게 얹어 두었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설계한 국가가 세상을 장악했다는 문장이었죠.



책은 보통 크기에 보통 두께입니다. 패권이라는 단어를 앞세운 도서치고는 위압감이 없어서, 손에 쥐었을 때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실제로 읽는 속도도 잘 붙는 편이었어요.

첫 장은 은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은은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은은 모든 것과 바꿀 수 있었고 마침 일본에는 은이 풍부했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는데요. 이와미 은광을 필두로 대항해시대 은 생산량의 30퍼센트를 일본이 차지했고, 그 은으로 서양의 무기와 탄약을 샀다는 설명이 뒤를 받칩니다. 여기서 저자는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싸움으로만 두지 않고, 대항해시대를 만난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진 패권전쟁으로 다시 세워 놓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임진왜란에는 조총과 거북선과 의병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는 거기에 회계 장부가 한 장 더 붙어요. 화력 병기가 발명돼도 탄약을 대량으로 확보할 경제력이 없으면 화력 전쟁 자체를 수행할 수 없다는 대목에서, 전쟁이 결국 보급과 재원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일본은 조총 부품을 분업으로 만들어 한곳에서 조립하는 생산 단지까지 갖췄지만 화약의 원료인 염초는 끝내 수입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강수량이 많고 습해서 염초가 쌓이지 않고 씻겨 나가는 땅, 화산 지형 특성상 산성인 토양. 염초를 만드는 박테리아는 알칼리를 선호한다니, 화약이라는 것도 결국 흙과 날씨의 문제였던 셈입니다.

조선은 오줌과 분뇨가 섞인 흙을 긁어모아 끓이고 정제하는 자초법으로 화약을 자체 조달했고, 그 기술은 엄격히 관리된 국가 기밀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고려 말 최무선이 주물 기술과 자초법을 후대에 전한 계보도 짧게 나옵니다. 조선은 주조로 대포를 만들고 자초법으로 화약을 얻었으며, 일본은 단조로 조총을 만들고 화약은 사들였습니다. 두 나라가 택한 제조 방식의 차이가 전황에 그대로 반영되어, 조선은 함포로 해전을 압도하고 일본은 조총으로 육상 회전을 압도했다는 정리는 꽤 명쾌했어요. 은을 캐는 기술인 회취법이 조선에서 건너간 것이었고, 그 은이 다시 조선을 향한 전쟁 자금이 됐다는 흐름은 읽고 나서도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중간쯤에는 영국이 빚과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721년 캘리코 금지법으로 인도산 면직물을 막아 봤지만 품질과 가격은 따라잡히지 않았다고 해요. 인도에는 숙련노동자가 풍부하고 인건비도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지켜 주는 울타리 안에서도 밀수품에 밀리던 업자들이 결국 기술 쪽으로 방향을 틀고, 플라잉 셔틀과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가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1774년에 금지법은 폐지되고, 이제 영국 면직물이 수출길에 올라섭니다.

맨체스터가 왜 면직물의 도시였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건조하면 면실이 잘 끊기는데 적당히 습한 날씨는 실을 팽팽하고 질기게 유지해 주고, 맨체스터가 딱 그런 날씨였다는 겁니다. 수력을 얻기 쉬웠고, 인도에서 원료가 들어오는 리버풀이 가까웠고, 증기기관 시대에는 랭커셔 탄광의 석탄을 바로 받을 수 있었죠. 산업혁명의 발상지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인데, 거대한 역사도 날씨와 물길과 항구의 거리 같은 사소한 조건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철도가 깔리자 물류비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원자재와 노동자와 투자금이 한곳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대목에 랭커셔-요크셔 철도회사 노동자들이 친목과 체력 단련을 위해 만든 축구팀이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됐다는 이야기가 곁들여져 있어요. 종일 석탄가루를 뒤집어쓰며 노동하던 철도 노동자들 삶의 희망이 그 출발이었다고 저자는 적어 두었습니다. 금융과 공급망을 다루는 책 한가운데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면 온도가 달라집니다.

이 챕터의 결론은 제목 그대로입니다.

"영국은 성취해냈다. 빚을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임을 증명했다."



철길이 깔리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올 때마다 영구채는 상대적으로 쪼그라들었고, 영구채가 미래를 짓누르기에는 영국의 성장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직후 GDP 대비 200퍼센트를 넘던 부채가 1840년에 14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는 숫자도 나오는데요. 저는 숫자보다 그 앞에 놓인 한 문장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이 시기 사람들에게 미래는 반드시 오늘보다 더 나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는 서술이었어요. 성장률이 이자율을 웃도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땅했을지 짐작해 봤습니다. 그런 확신이 흔치 않은 요즘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뒤로 갈수록 이야기는 돈이 몸을 벗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전신환 챕터가 그렇습니다. 지금도 송장에 T/T로 남아 있는 그 약자가, 물리적인 현금을 직접 배송하던 시대를 끝내고 돈을 정보로 바꿔 놓은 기술이라는 설명이에요. 수개월 걸리던 국제 송금이 몇 시간으로 줄고, 해적과 난파와 강도의 위험이 사라집니다. 은을 배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던 첫 장의 풍경과 겹쳐 읽으면, 화폐가 무게를 잃어 가는 경로가 곧 주도권이 옮겨 가는 경로였다는 것이 보입니다.

다만 속도를 쥔 쪽과 그 속도에 노출된 쪽의 처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식민 본국 중앙은행은 전신으로 식민지의 자본 흐름과 원자재 가격과 기업 수익성을 실시간으로 파악했고, 채산성이 떨어지면 전신환 한 번으로 자금을 회수해 그 경제를 파탄으로 몰았다고 해요. 예금은 식민지에서 모으고 대출은 본국 기업에 해주는 회로, 식민지의 자본으로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인프라를 깔았다는 요약 앞에서는 숨을 좀 고르게 됩니다.

그 사례로 1905년 조선의 화폐정리사업이 나옵니다. 백동화를 갑·을·병종으로 나누고 상태가 불량한 병종은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교환해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 병으로 판정된 화폐를 쥐고 있던 사람은 그대로 자산을 잃었고, 결제 화폐가 바뀌는 과정에서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그 빈자리를 일본 자본이 채웠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만 놓고 보면 수탈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이어집니다. 낮은 금리의 자금을 전신환으로 들여온 쪽이 급전이 필요한 사람과 땅값 급등을 예견하지 못한 사람을 상대로 거래를 활발히 하면서 경제를 장악했다는 설명이죠.

솔직히 이 대목에서는 저자와 조금 다른 자리에 서서 읽었습니다. 헐값에 샀다거나 강제로 빼앗았다고 보는 것이 사안을 단순화한 관점이라는 서술에는 일리가 있고, 교과서가 놓쳐 온 회로를 보여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제일은행권이 조선의 결제 화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조건 자체가 이미 주권의 문제였습니다. 금융 기술의 우위라는 설명이 정교해질수록 그 전제가 배경으로 물러나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자도 문단 끝에서 차별적 신용 공급이 세계 모든 식민지에서 발생한 수탈의 방법이라고 못 박아 두긴 했는데, 그 한 줄이 좀 더 앞에 놓였다면 읽는 마음이 덜 서늘했을 것 같습니다.

러일전쟁을 다룬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런던으로 급파된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차관 협상에 사활을 걸고, 협상 내용을 도쿄에 전신으로 타전하며 지휘를 받아 결국 타결에 성공합니다. 영국 자본가들이 빌려준 돈은 전신환으로 일본 국고에 즉시 입금되고, 일본 정부는 그 돈을 곧바로 영국과 미국의 군수업체로 송금해 최신식 전함과 무기와 탄약을 공급받았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프랑스에서 거액을 빌렸지만 전신환을 쓸 수 없어 블라디보스토크나 뤼순까지 돈을 보내서 물자를 구매해야 했다고 해요. 저자는 이를 두고 수행해야 할 전쟁의 난이도가 달랐다고 표현합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 직전이었던 러시아가 바이칼호 얼음 위에 임시 철도를 깐 이야기도 나옵니다. 얼음이 깨지고 기관차가 수몰되는 순간 크게 좌절했을 것이라는 문장 뒤에, 바이칼호 구간을 마무리한 후에 전쟁이 터졌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붙습니다. 챕터의 마지막은 짧습니다. 금융과 물류, 이 두 가지 때문에 희비가 엇갈렸다는 것이죠.

얼음판 위의 철길을 읽다가 첫 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장기 포위전을 버티지 못한 이유로 군량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설명이 있었거든요. 16세기의 산길과 20세기 초의 얼어붙은 호수가 같은 문제를 다른 무대에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300년을 가로지르며 하려던 말이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총칼의 승부처럼 보이는 사건들의 아래쪽에 언제나 돈의 배선도와 물자의 동선이 깔려 있었다는 겁니다.

책을 덮고 나서 가장 크게 남은 것은 위기감보다 오히려 담담함이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한국을 패권전쟁을 수행하며 무역대국이 된 제국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으로서 미 패권 질서를 공기처럼 흡입하며 여기까지 온 나라로 규정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지고 자국우선주의가 판을 치는 지금의 정세가 극도의 불안과 혼란을 준다는 진단도 함께요. 환율과 에너지 가격, 장바구니 물가처럼 우리가 체감하는 변화들이 어디서 시작된 흔들림인지 알고 나면,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형태를 얻습니다. 형태를 아는 불안은 그래도 견딜 만해요. 이 도서의 미덕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지반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책입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대체로 마음을 다독이는 쪽이거나 지식을 채우는 쪽 중 하나인데, 이 한 권은 세계 뉴스를 읽는 눈을 조금 다르게 고쳐 준 편에 속합니다. 국제 정세 기사를 볼 때마다 진영과 인물 이야기에 먼저 눈이 가던 습관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은 뒤로는 자금이 어디서 조달되고 물자가 어느 경로로 움직이는지를 먼저 찾게 될 것 같아요. 역사 교양서를 좋아하는 분에게는 익숙한 사건들이 다시 조립되는 재미가 있을 테고, 역사를 멀게 느끼는 분이라도 은과 화약과 철도와 전신이라는 구체적인 물건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유재일의 유튜브를 보던 분이라면 영상에서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한 줄로 꿰어지는 감각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9월 중순의 아침 공기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창을 열면 여름의 습기가 빠진 서늘함이 먼저 들어오고, 해가 지는 시간도 눈에 띄게 빨라졌어요. 계절이 바뀔 때는 옷장을 정리하듯 생각도 한 번 정리하고 싶어지는데, 올해 초가을에는 이 한 권이 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세계가 다시 거칠어지는 시기에 무엇을 기준으로 뉴스를 읽어야 할지, 그 기준선을 하나 얻은 기분입니다.

은과 철도와 전신을 따라가며, 총칼 뒤에 깔린 돈과 물자의 배선도를 읽게 하는 한 권. 미국이 흔들리는 시대에 한국이 어디 서 있는지를 차분히 확인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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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심양석 지음 / 프롬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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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으로 그린 집 한 채가 표지의 거의 전부입니다. 삐뚤삐뚤한 선으로 세운 벽, 굴뚝에서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는 연기, 창문 하나. 그 안쪽에 빨간 손글씨로 제목이 앉아 있어요. 어떤 책은 표지에서 이미 말투를 들려주는데,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가르치려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아니라, 밥 다 먹고 상 치운 뒤에 조용히 꺼내는 말의 높이였어요.


책은 아빠가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 묶음입니다. 가족, 친구와 관계, 학교생활과 공부, 앞으로 살아갈 태도까지 네 장으로 나뉘어 있고, 글마다 짧은 그림과 웹툰이 붙습니다. 두께도 판형도 보통입니다. 손에 쥐면 부담이 없고, 한 편이 두 쪽을 넘지 않으니 진도라는 개념 없이 읽힙니다. 지은이 심양석 작가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오래 일했고 인스타그램에서 두 아들과의 일상을 웹툰으로 그려왔다고 하는데, 아이들 말버릇과 반응을 아는 사람의 문장이라는 게 읽는 동안 계속 느껴졌습니다.


1장의 식탁 이야기부터 마음이 기울었어요. 아침저녁으로 일하는 부모와 학교, 학원을 오가는 아이가 한 상에 둘러앉는 일이 하루에 한 번도 어렵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그 짧은 시간이 실은 축복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다 괄호 하나가 나옵니다. "그래서 식탁에서는 최대한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몰랐지?)" 아이에게 들키듯 적어놓은 이 한 줄에 책 전체의 기획이 다 들어 있습니다. 밥상에서 삼킨 말들을 종이에 옮겨 적은 것이 이 도서의 정체라는 뜻이니까요. 뒤따르는 세 컷 웹툰도 좋았습니다. 책 그만 보고 먹으라는 잔소리와 졸고 있는 아이로 시작해, 치킨 앞에서 다 같이 웃고, 마지막에는 부부만 남아 하루 수고했다고 주고받으며 닫힙니다. 글이 말한 소소한 이야기를 그림이 곧바로 증거로 내놓는 구성이에요.


2장에서 만난 '당당히 거절할 수 있는 용기'는 아이용 조언으로만 두기 아까운 대목입니다. 부탁을 받을 때 몸과 마음이 괜찮을지 먼저 묻고, 들어줄 거라면 부담이 덜한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합니다. 시간을 나눠 돕거나 할 수 있는 만큼만 돕는 방법까지 예로 들고, 거절할 때 쓸 말투를 세 문장이나 적어둡니다. 지금은 피곤해서 어렵다고, 그 부탁은 못 들어주지만 다른 건 도울 수 있다고, 시간이 부족하니 절반만 도와주겠다고. 결론은 이렇게 닫힙니다. "꼭 기억하렴. 부탁을 들어주는 건 언제나 네 선택이고, 네 권리야."


이 챕터에는 솔직히 의문도 남았습니다. 힘든 상황에서 부탁을 거절한다는 이유로 멀어질 관계라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다고 쓴 부분이에요. 어른에게는 맞는 말인데, 관계의 폭이 교실 하나만큼인 아이에게는 조금 이르고 단호하게 들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아이 혼자 읽기보다 옆에서 한마디 덧붙여줄 사람이 필요해 보였어요. 재미있는 건 이 글에 붙은 웹툰입니다. 기획안을 대신 해달라, 서류를 부탁한다는 말에 흔쾌히 응하다가 결국 등 뒤에 '부탁'이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매달고 울먹이는 장면인데, 배경이 교실이 아니라 직장입니다. 아이 눈높이라는 기획과 살짝 어긋나지만, 거절을 가르치면서 정작 못 하는 쪽이 누구인지 숨기지 않은 셈이라 오히려 정직하게 읽혔습니다.


4장으로 갈수록 이야기의 반경이 넓어집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는 제목만 보면 한때 유행한 말장난처럼 스쳐갈 수 있는데, 도입 그림이 그 가벼움을 곧장 눌러버립니다. 휴대전화를 보며 저 가족은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고, 저 부모는 아이에게 명품을 선물했다고 중얼거리는 어른이 있고, 그 옆에서 아이 둘이 아빠를 부르며 놀이터에 같이 가자고 묻습니다. 비교에 붙잡힌 쪽은 아이가 아니었어요. 본문에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터넷 글도 인용되는데,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 또래보다 적은 연봉, 늦은 출발로는 인생이 망하지 않지만 남의 삶과 자신을 견주기 시작하면 정신이 반드시 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저자가 더한 문장이 오래 남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에만 집중하다 보면, 너의 소중한 일상은 어느 순간 초라하고 불행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손에 쥔 것이 줄어들지 않았는데도 이름만 바뀌는 일, 그 이치를 뒤따르는 세 컷 웹툰이 아주 간명하게 보여줍니다. 행복이라는 명패를 달고 웃던 얼굴이 더 큰 명패를 본 순간 멈추고, 마지막 컷에서 배경이 어둡게 깔리며 명패의 글자만 불행으로 바뀝니다.


우리 쪽 사정과 겹치는 이야기라 더 그랬을 겁니다. 명절이나 방학이면 어김없이 올라오는 여행 사진, 학원 정보와 남의 집 성적, 형편보다 앞서가는 소비까지, 비교가 일상이 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만큼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어른의 목소리는 흔하지 않습니다. 책 뒤쪽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쓰는 편지 자리가 비어 있는데, 그 빈 칸을 언제 채울지는 각자 형편대로 두면 될 것 같습니다. 당장 못 채워도 이 도서의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아요.


띠지에 적힌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는 물음은 2장 안에 같은 제목의 글로 들어 있습니다. 아이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먼저 답해야 하는 쪽은 책을 펼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잔소리를 줄이는 일은 결국 할 말을 고르는 일이고, 고르려면 스스로를 먼저 들여다봐야 하니까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아 읽었는데, 서평을 쓰기 위해 읽는 책들 사이에서 이 한 권은 위치가 좀 달랐습니다. 다 읽고 나서 서평 파일이 아니라 아이 책장 쪽을 먼저 떠올리게 만들었으니까요.


9월 중순으로 들어서면서 저녁 공기가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여름내 각자 흩어져 있던 식구들이 다시 한 상에 앉기 쉬워지는 계절이에요. 상을 물리고 나서 이 책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어주기에도 알맞은 분량입니다. 아이가 자라 혼자 길을 걸을 때 이 문장들을 다시 꺼내 읽는다면, 그때는 아마 지금과 다른 대목에 밑줄이 그어질 겁니다.


밥상에서 삼킨 말들을 종이에 옮겨 적은 아빠의 편지, 그래서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읽게 되는 한 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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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 운명을 이긴다 - 기회를 행운으로 바꾸는 작은 행동의 힘
티나 실리그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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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덜컹 멈춰 서는 장면으로 이 책은 시작합니다. 낯선 여성이 비상 정지 버튼을 누르고, 옆에 있던 남성이 산업 스파이냐고 날카롭게 묻습니다. 지목당한 사람은 저자 본인이에요.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상사는 경쟁 스타트업이 주최하는 콘퍼런스에 스탠퍼드대 박사 과정 학생인 척 참석하라고 지시했고, 경험 없는 사회 초년생이던 그는 토를 달지 않고 알았다고 답했습니다. 시카고까지 날아가 발표마다 질문을 던졌는데, 나중에 보니 그 분야를 꽤 아는 사람만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던 겁니다. 주최 측이 회사에 확인 전화를 걸었고, 정체가 드러난 그는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서 실토한 뒤 건물 밖으로 거칠게 쫓겨납니다. 그 순간 속으로 내뱉은 말은 운도 없다는 탄식이었고요.


운을 다루는 책이 이렇게 망신스러운 실패로 문을 연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티나 실리그는 <스무 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로 오래 읽힌 저자인데, 10년 만의 신작에서는 곧바로 자기 실수담을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상사나 업계 관행 쪽으로 돌리지 않아요. 자신의 핵심 가치관에 대해, 그 가치관이 시험대에 오를 때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적습니다. 상사를 기쁘게 하려고 충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인정까지 덧붙이고요.


여기서 등장하는 비유가 책 전체의 골격이 됩니다. 배가 안정성과 복원력을 유지하려고 밑바닥에 싣는 중량물이 밸러스트인데, 분명한 가치관이 그 무게추와 같다는 겁니다. 눈앞의 제안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념과 맞는 것인지, 항로를 벗어나게 하는 유혹적 방해물인지 분별하게 해준다는 설명이에요. 첫 장 머리에 적힌 한 줄이 이 책의 입장을 요약합니다.


"행운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지켜 격랑에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사람의 편이다."


속도나 방향보다 무게를 먼저 이야기한다는 순서가 좋았습니다. 표지의 청록빛 물결도 잔잔하다기보다 계속 움직이는 수면처럼 보이는데, 그런 수면 위에서는 결국 배 밑에 뭘 싣고 있느냐가 남는다는 얘기니까요.


다만 저 엘리베이터 장면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도 들었어요. 상사의 지시를 받은 사회 초년생이 그 자리에서 거절하기 어려운 위계도 분명히 작용했을 텐데, 책은 그 몫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미심쩍은 요청을 판단해줄 조언자 그룹을 곁에 두라, 누군가 잘못된 선택으로 떠밀 경우를 대비해 탈출 전략을 마련해두라는 조언도 옳기는 한데, 그런 그룹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의 조건 차이는 개인의 결심으로 메워지지 않습니다. 사표를 던지고 나온 저자 남편의 일화 역시 결단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였고요. 한국 직장의 공기를 아는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저와 비슷한 유보를 느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도서가 실천만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걸 뒤쪽에서 알게 됩니다. 3부에 회복을 다룬 장이 있는데, 여기서 저자는 실험실 냉동고에서 복어 독 시약병이 모두 열린 채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대학원 시절을 꺼냅니다. 몸에는 별 이상이 없었지만 공포가 사라지지 않아 실험실 근처에만 가도 공황 상태에 빠졌고, 그 상태로는 졸업 연구를 끝낼 수 없었습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체계적 둔감화였어요. 여러 주에 걸쳐 실험실에 조금씩 가까이 가고, 작업대에 다가가는 연습을 하고, 마지막에는 새로 채운 시약병 쪽으로 조금씩 더 다가갔습니다. 불안해질 때마다 멈춰서 물을 천천히 마시고 병원 응급실 쪽으로 걸어갔다는 문장, 실제로 가지는 않았지만 지척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는 문장에서 이 책의 온도를 봤습니다. 두려움을 의지로 눌러 없앤 기록이 아니라 거리를 조금씩 줄여간 기록이라 믿음이 갔어요.


같은 장에서 권하는 도구가 실패 이력서입니다. 성취를 나열하는 이력서의 반대편에 서서, 망친 경험과 좌절한 경험, 실패한 경험을 각각에서 배운 점과 함께 정리하는 겁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효용도 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까지 실수를 곱씹으며 괴로워할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적어둔 쪽이 마음에 남습니다. 스탠퍼드에서 강의하는 맷 에이브러햄스가 들려준 실패의 금요일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금요일마다 전 직원이 모여 그 주에 한 가장 큰 실수를 발표하고, 투표로 뽑힌 사람에게 저녁 식사 비용쯤 되는 상금을 주는데 같은 실수로 두 번 받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많은 사무실에서 이 제도를 그대로 옮기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 실수를 공개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전제가 먼저 마련되어야 작동하는 장치인데, 책은 그 순서까지는 깊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회복을 다룬 장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결국 회복력은 실패를 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역경을 이겨낼 도구를 가졌음을 아는 데서 온다."


편집에서도 이 문장을 여백 한 면에 크게 다시 앉혔더군요. 도구를 가졌음을 안다는 표현이 위로가 됩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요구가 아니고, 무너진 다음에 쓸 물건이 손에 있다는 확인에 가깝잖아요.


마지막 장은 가면 증후군을 다룹니다. 최근 문헌 고찰에서 설문 대상자 1만 4,000명 중 82퍼센트가 살면서 이 감각을 경험했다고 답했고, 연령대와 성별에 상관없이 고르게 나타난다고 해요. 저자는 이 증후군이 우울증과 불안, 낮은 자존감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며 만성 스트레스와 번아웃으로 이어진다는 연구를 먼저 밝혀둔 다음에야 관점을 뒤집자고 제안합니다. 그 순서가 성실해서 뒤따르는 주장도 받아들일 만했습니다.


이 장에서 가장 오래 붙잡힌 대목은 무술 이야기였어요. 가라테 8단인 사범이 제자의 동작을 보며 정확하지만 방식이 틀렸다고 자주 말한다는데, 결과가 좋아 보여도 동작에 명확한 의도가 담기지 않으면 수행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뜻이었습니다. 무술에서도 인생에서도 의도는 식별 가능하다는 문장이 붙어 있고요. 책의 첫 장에서 충동적 반응과 숙고를 갈라놓았던 이야기가 마지막 장에서 다시 돌아온 셈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축을 붙들고 있어서 구성이 단단해 보였어요.


공항 일화도 하나 적어둘게요. 낯선 남자가 맷 에이브러햄스에게 다가와 <불안을 이기고 당당하게 말하는 법>의 저자가 맞냐고 묻고는, 그 책을 샀는데 읽지 않았지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느냐는 물음에, 그런 주제를 다룬 책이 존재하는 걸 보고 자신만 그런 게 아니구나 알게 되어 혼자 힘으로 극복해보기로 했다고 답했다는 거예요. 이 책도 어떤 독자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쓰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저자가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대목도 짚고 싶어요. 익숙하지 않은 주제의 강의를 시작할 때 자격 미달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만 그 감정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공동 강사나 초빙 강연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지식과 경험이 웬만큼 쌓이면 그런 안전장치를 없앨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이고요. 혼자 감당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처럼 읽혔습니다. 물론 겸손해져서 덜 말하게 된다는 걸 이점으로 꼽은 부분은 조직에 따라 다르게 작동할 겁니다. 먼저 입을 여는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자리에서는 그 겸손이 손해로 남기도 하니까요. 장을 닫는 인용은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입니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매일 하나씩 하라."


판형과 두께가 부담 없는 정도라 마음 편히 펼쳤는데, 막상 읽어보니 앉은 자리에서 쭉 넘기는 종류는 아니었어요. 장마다 세 가지 질문이 붙어 있습니다. 강인한 회복력을 발휘할 때가 언제인지,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 기회를 만난 경험이 있는지 같은 것들이요. 연필을 들고 답을 적으며 가는 안내서에 가깝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덮는 책과 붙잡고 쓰게 되는 책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권하고 싶은 사람을 굳이 정리하지는 않겠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잦아진 시기라면 첫 장의 무게추 이야기가 먼저 닿을 테고, 실수 하나를 오래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패 이력서 쪽부터 읽어도 괜찮습니다. 회의실에서 자기 자리를 의심해본 적 있는 연차라면 마지막 장을 먼저 펼치는 순서도 나쁘지 않아요. 어느 쪽으로 들어가도 항해라는 비유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9월 중순이 되니 아침저녁 공기가 먼저 달라집니다. 여름 동안 미뤄둔 일들이 슬쩍 떠오르는 철이기도 하고요. 이런 계절에는 크게 방향을 틀기보다 배 밑에 뭘 싣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돛은 그다음에 펼쳐도 늦지 않겠지요.


운을 기다리는 마음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흔들릴 때 붙잡을 무게추와 다시 일어설 도구를 손에 쥐여주는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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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주 대영박물관 시간 여행 - 대영박물관에서 큐티하기
박양규 지음 / 큐리북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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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깊은 남색 바탕 한가운데 모래빛 석판이 놓여 있습니다. 수염을 곱게 땋아 내린 사람들이 줄지어 선 아시리아 부조인데, 돌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표지만 봐도 박물관 유리장 앞에 선 기분이 듭니다. 제목 위로는 금색 선이 지붕 모양을 그리고, 그 아래 '대영박물관에서 큐티하기'라는 부제가 작게 앉아 있어요. 표지 하나로 이 책의 성격이 거의 다 설명되는 셈입니다. 유물을 구경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매주 한 칸씩 채워 가는 책이라는 뜻이니까요.


판형은 넉넉한데 두께가 거의 없습니다. 가방에 세워 넣어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서, 앉은자리에서 몇 주 분량을 훑어보기에 부담이 없었어요. 큰 책이 주는 시원한 사진과 얇은 책이 주는 휴대성이 같이 왔다는 점은 예상 밖의 장점이었습니다.


구성은 단정합니다. 한 주마다 펼친 두 면이 배정되고, 성경 구절로 문을 열어 유물을 소개하고 해설을 붙인 뒤 질문 세 개로 넘깁니다. 눈에 띄었던 건 유물마다 전시관 번호가 적혀 있다는 점이에요. 57관 문 위, 55관 7번 진열장, 69관 17번 진열장처럼요. 이 책을 실제로 들고 그 자리에 서게 될 사람을 염두에 둔 설계라는 게 분명히 보입니다.


28주 셉나의 무덤에서 오래 눈길이 갔습니다. 아시리아가 유다까지 밀고 내려오던 시기, 산헤립의 침공 앞에 나라의 대표로 세 사람이 나섰고 그중 하나가 서기관 셉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를 국고와 왕궁을 맡은 자로 불렀다고 하니, 직함보다 실권이 훨씬 컸던 인물이었던 듯합니다. 저자는 1950년에 발굴되어 해독된 그의 묘석 내용을 옮겨 놓습니다. 왕궁을 관할하던 자의 무덤인데 은과 금은 없고 자신과 아내의 뼈만 있다는 기록이었다고요. 나라가 흔들리는 동안 그는 자기 무덤을 짓고 있었다는 해석이 이어집니다. 해설 앞머리에 놓인 "인생의 진짜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라는 문장이, 뒷부분의 "성경을 줄줄 꿰고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지식으로 소유한 종교인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와 맞물리면서 마음에 남았어요.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자기 자리와 이름을 어떻게 남길지 한 번쯤 계산해 봤을 텐데, 그 계산의 끝을 돌 하나가 보여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걸리는 구석도 있었습니다. 셉나가 이사야의 선언대로 죽었다고 단정하는 부분, 그리고 무덤이 투탕카멘 묘비를 모방한 것이라는 설명은 짧은 지면에 결론만 놓여 있어서 근거를 더 보고 싶어졌어요. 성경공부교재로 분류된 책이니 압축이 불가피했겠지만, 이렇게 강한 해석에는 반 문단이라도 출처를 붙여 줬으면 신뢰가 더 붙었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읽히는 책의 장점과 이런 아쉬움은 아마 한 몸일 겁니다.


책 전체의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37주 나보니두스 연대기였습니다. 그리스 역사가들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을 나보니두스로 적었고 벨사살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다니엘서는 후대의 창작이고 벨사살은 허구의 인물이라는 견해가 오래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르에서 나온 실린더가 나보니두스의 기도문이었고, 거기에 자신의 맏아들 벨사살이 실명으로 등장했다는 것이죠. 뒤이어 해독된 연대기에는 왕이 아라비아의 테이마에 십 년 넘게 머무는 동안 통치권을 아들에게 맡겼다는 기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고학 발굴은 신학자들의 견해를 수정하도록 만들었습니다"라는 저자의 정리가 담담해서 오히려 힘이 있었어요. 다니엘이 받은 자리가 왜 셋째였는지, 그 어색했던 표현이 점토판 하나로 풀리는 대목은 읽으면서 작게 감탄했습니다.


끝자락에 놓인 49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로마 시민권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재판 없이 처벌받지 않고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으며 세금과 생계까지 보장받았다는 목록이 꽤 길어요. 그 모든 혜택을 저자는 한 문장으로 묶습니다. 시민권자는 로마가 책임진다는 뜻이었다는 것. 그러고 나서 제국의 변방에 살며 생계를 염려하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이 쓴 편지를 읽습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적 비유나 미사여구가 아니었습니다"라는 설명 뒤에, 우리도 믿는다고 하면서 생계와 미래의 염려를 신앙의 본질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 문장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의 집값과 노후를 떠올리게 되는 자리라, 이 책에서 가장 조용하게 위로가 되는 대목이었어요.


성경을 정보로만 알고 있던 시절이 저에게도 길었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정보를 유물이라는 물증 옆에 세워 준다는 데 있습니다. 창조와 부활과 재림을 말하면 어딘가 멋쩍어지는 시대에, 돌과 점토판이 먼저 증언해 주는 경험은 생각보다 든든했어요. 성경 지식은 있는데 그것이 실제 역사로 다가오지 않던 분들, 소그룹이나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 줄지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특히 쓸모가 클 것 같습니다. 언젠가 런던행 계획이 있다면 이 한 권을 짐에 먼저 넣는 편이 좋겠고요. 굳이 그 먼 곳에 가지 않아도, 일 년을 한 주씩 나눠 걷는 코스로 충분히 성립합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인데, 이번에는 읽고 나서 곧장 다 소비하지 않고 책상 옆에 세워 두었습니다. 한 번에 완독할 책이 아니라는 걸 중간쯤에서 알아차렸거든요. 1주부터 차례로 밀고 나가기보다, 그날 마음이 닿는 주차를 펼쳐 보는 방식이 저에게는 맞았습니다.


아침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습니다. 9월 중순에 시작하면 마지막 장을 덮는 건 내년 이맘때가 될 텐데, 그 계산이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든든하게 느껴졌어요. 연초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1주를 펼쳐도 아무 문제가 없는 책입니다. 가을에서 시작해 가을에 닿는 여정도 나쁘지 않겠다 싶습니다.


성경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에게, 돌과 점토판이 먼저 대답해 주는 52주짜리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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