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주 대영박물관 시간 여행 - 대영박물관에서 큐티하기
박양규 지음 / 큐리북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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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깊은 남색 바탕 한가운데 모래빛 석판이 놓여 있습니다. 수염을 곱게 땋아 내린 사람들이 줄지어 선 아시리아 부조인데, 돌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표지만 봐도 박물관 유리장 앞에 선 기분이 듭니다. 제목 위로는 금색 선이 지붕 모양을 그리고, 그 아래 '대영박물관에서 큐티하기'라는 부제가 작게 앉아 있어요. 표지 하나로 이 책의 성격이 거의 다 설명되는 셈입니다. 유물을 구경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매주 한 칸씩 채워 가는 책이라는 뜻이니까요.


판형은 넉넉한데 두께가 거의 없습니다. 가방에 세워 넣어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서, 앉은자리에서 몇 주 분량을 훑어보기에 부담이 없었어요. 큰 책이 주는 시원한 사진과 얇은 책이 주는 휴대성이 같이 왔다는 점은 예상 밖의 장점이었습니다.


구성은 단정합니다. 한 주마다 펼친 두 면이 배정되고, 성경 구절로 문을 열어 유물을 소개하고 해설을 붙인 뒤 질문 세 개로 넘깁니다. 눈에 띄었던 건 유물마다 전시관 번호가 적혀 있다는 점이에요. 57관 문 위, 55관 7번 진열장, 69관 17번 진열장처럼요. 이 책을 실제로 들고 그 자리에 서게 될 사람을 염두에 둔 설계라는 게 분명히 보입니다.


28주 셉나의 무덤에서 오래 눈길이 갔습니다. 아시리아가 유다까지 밀고 내려오던 시기, 산헤립의 침공 앞에 나라의 대표로 세 사람이 나섰고 그중 하나가 서기관 셉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를 국고와 왕궁을 맡은 자로 불렀다고 하니, 직함보다 실권이 훨씬 컸던 인물이었던 듯합니다. 저자는 1950년에 발굴되어 해독된 그의 묘석 내용을 옮겨 놓습니다. 왕궁을 관할하던 자의 무덤인데 은과 금은 없고 자신과 아내의 뼈만 있다는 기록이었다고요. 나라가 흔들리는 동안 그는 자기 무덤을 짓고 있었다는 해석이 이어집니다. 해설 앞머리에 놓인 "인생의 진짜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라는 문장이, 뒷부분의 "성경을 줄줄 꿰고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지식으로 소유한 종교인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와 맞물리면서 마음에 남았어요.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자기 자리와 이름을 어떻게 남길지 한 번쯤 계산해 봤을 텐데, 그 계산의 끝을 돌 하나가 보여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걸리는 구석도 있었습니다. 셉나가 이사야의 선언대로 죽었다고 단정하는 부분, 그리고 무덤이 투탕카멘 묘비를 모방한 것이라는 설명은 짧은 지면에 결론만 놓여 있어서 근거를 더 보고 싶어졌어요. 성경공부교재로 분류된 책이니 압축이 불가피했겠지만, 이렇게 강한 해석에는 반 문단이라도 출처를 붙여 줬으면 신뢰가 더 붙었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읽히는 책의 장점과 이런 아쉬움은 아마 한 몸일 겁니다.


책 전체의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37주 나보니두스 연대기였습니다. 그리스 역사가들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을 나보니두스로 적었고 벨사살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다니엘서는 후대의 창작이고 벨사살은 허구의 인물이라는 견해가 오래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르에서 나온 실린더가 나보니두스의 기도문이었고, 거기에 자신의 맏아들 벨사살이 실명으로 등장했다는 것이죠. 뒤이어 해독된 연대기에는 왕이 아라비아의 테이마에 십 년 넘게 머무는 동안 통치권을 아들에게 맡겼다는 기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고학 발굴은 신학자들의 견해를 수정하도록 만들었습니다"라는 저자의 정리가 담담해서 오히려 힘이 있었어요. 다니엘이 받은 자리가 왜 셋째였는지, 그 어색했던 표현이 점토판 하나로 풀리는 대목은 읽으면서 작게 감탄했습니다.


끝자락에 놓인 49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로마 시민권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재판 없이 처벌받지 않고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으며 세금과 생계까지 보장받았다는 목록이 꽤 길어요. 그 모든 혜택을 저자는 한 문장으로 묶습니다. 시민권자는 로마가 책임진다는 뜻이었다는 것. 그러고 나서 제국의 변방에 살며 생계를 염려하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이 쓴 편지를 읽습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적 비유나 미사여구가 아니었습니다"라는 설명 뒤에, 우리도 믿는다고 하면서 생계와 미래의 염려를 신앙의 본질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 문장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의 집값과 노후를 떠올리게 되는 자리라, 이 책에서 가장 조용하게 위로가 되는 대목이었어요.


성경을 정보로만 알고 있던 시절이 저에게도 길었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정보를 유물이라는 물증 옆에 세워 준다는 데 있습니다. 창조와 부활과 재림을 말하면 어딘가 멋쩍어지는 시대에, 돌과 점토판이 먼저 증언해 주는 경험은 생각보다 든든했어요. 성경 지식은 있는데 그것이 실제 역사로 다가오지 않던 분들, 소그룹이나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 줄지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특히 쓸모가 클 것 같습니다. 언젠가 런던행 계획이 있다면 이 한 권을 짐에 먼저 넣는 편이 좋겠고요. 굳이 그 먼 곳에 가지 않아도, 일 년을 한 주씩 나눠 걷는 코스로 충분히 성립합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인데, 이번에는 읽고 나서 곧장 다 소비하지 않고 책상 옆에 세워 두었습니다. 한 번에 완독할 책이 아니라는 걸 중간쯤에서 알아차렸거든요. 1주부터 차례로 밀고 나가기보다, 그날 마음이 닿는 주차를 펼쳐 보는 방식이 저에게는 맞았습니다.


아침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습니다. 9월 중순에 시작하면 마지막 장을 덮는 건 내년 이맘때가 될 텐데, 그 계산이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든든하게 느껴졌어요. 연초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1주를 펼쳐도 아무 문제가 없는 책입니다. 가을에서 시작해 가을에 닿는 여정도 나쁘지 않겠다 싶습니다.


성경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에게, 돌과 점토판이 먼저 대답해 주는 52주짜리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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