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과 회색만으로 채운 표지 위에 낡은 지도 한 장이 흰 선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MAR PACIFICUM, AMERICA SEPTENT 같은 라틴어 지명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서, 세계가 아직 측량되는 중이던 시절의 화면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어요. 두 개의 반구가 위아래로 겹쳐 모래시계처럼 서 있는 구도도 눈에 오래 남습니다. <미국을 만든 세계>는 그 조용한 화면 아래쪽에 붉은 글씨 한 줄만 뜨겁게 얹어 두었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설계한 국가가 세상을 장악했다는 문장이었죠.
책은 보통 크기에 보통 두께입니다. 패권이라는 단어를 앞세운 도서치고는 위압감이 없어서, 손에 쥐었을 때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실제로 읽는 속도도 잘 붙는 편이었어요.
첫 장은 은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은은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은은 모든 것과 바꿀 수 있었고 마침 일본에는 은이 풍부했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는데요. 이와미 은광을 필두로 대항해시대 은 생산량의 30퍼센트를 일본이 차지했고, 그 은으로 서양의 무기와 탄약을 샀다는 설명이 뒤를 받칩니다. 여기서 저자는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싸움으로만 두지 않고, 대항해시대를 만난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진 패권전쟁으로 다시 세워 놓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임진왜란에는 조총과 거북선과 의병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는 거기에 회계 장부가 한 장 더 붙어요. 화력 병기가 발명돼도 탄약을 대량으로 확보할 경제력이 없으면 화력 전쟁 자체를 수행할 수 없다는 대목에서, 전쟁이 결국 보급과 재원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일본은 조총 부품을 분업으로 만들어 한곳에서 조립하는 생산 단지까지 갖췄지만 화약의 원료인 염초는 끝내 수입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강수량이 많고 습해서 염초가 쌓이지 않고 씻겨 나가는 땅, 화산 지형 특성상 산성인 토양. 염초를 만드는 박테리아는 알칼리를 선호한다니, 화약이라는 것도 결국 흙과 날씨의 문제였던 셈입니다.
조선은 오줌과 분뇨가 섞인 흙을 긁어모아 끓이고 정제하는 자초법으로 화약을 자체 조달했고, 그 기술은 엄격히 관리된 국가 기밀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고려 말 최무선이 주물 기술과 자초법을 후대에 전한 계보도 짧게 나옵니다. 조선은 주조로 대포를 만들고 자초법으로 화약을 얻었으며, 일본은 단조로 조총을 만들고 화약은 사들였습니다. 두 나라가 택한 제조 방식의 차이가 전황에 그대로 반영되어, 조선은 함포로 해전을 압도하고 일본은 조총으로 육상 회전을 압도했다는 정리는 꽤 명쾌했어요. 은을 캐는 기술인 회취법이 조선에서 건너간 것이었고, 그 은이 다시 조선을 향한 전쟁 자금이 됐다는 흐름은 읽고 나서도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중간쯤에는 영국이 빚과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721년 캘리코 금지법으로 인도산 면직물을 막아 봤지만 품질과 가격은 따라잡히지 않았다고 해요. 인도에는 숙련노동자가 풍부하고 인건비도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지켜 주는 울타리 안에서도 밀수품에 밀리던 업자들이 결국 기술 쪽으로 방향을 틀고, 플라잉 셔틀과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가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1774년에 금지법은 폐지되고, 이제 영국 면직물이 수출길에 올라섭니다.
맨체스터가 왜 면직물의 도시였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건조하면 면실이 잘 끊기는데 적당히 습한 날씨는 실을 팽팽하고 질기게 유지해 주고, 맨체스터가 딱 그런 날씨였다는 겁니다. 수력을 얻기 쉬웠고, 인도에서 원료가 들어오는 리버풀이 가까웠고, 증기기관 시대에는 랭커셔 탄광의 석탄을 바로 받을 수 있었죠. 산업혁명의 발상지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인데, 거대한 역사도 날씨와 물길과 항구의 거리 같은 사소한 조건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철도가 깔리자 물류비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원자재와 노동자와 투자금이 한곳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대목에 랭커셔-요크셔 철도회사 노동자들이 친목과 체력 단련을 위해 만든 축구팀이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됐다는 이야기가 곁들여져 있어요. 종일 석탄가루를 뒤집어쓰며 노동하던 철도 노동자들 삶의 희망이 그 출발이었다고 저자는 적어 두었습니다. 금융과 공급망을 다루는 책 한가운데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면 온도가 달라집니다.
이 챕터의 결론은 제목 그대로입니다.
"영국은 성취해냈다. 빚을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임을 증명했다."
철길이 깔리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올 때마다 영구채는 상대적으로 쪼그라들었고, 영구채가 미래를 짓누르기에는 영국의 성장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 직후 GDP 대비 200퍼센트를 넘던 부채가 1840년에 14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는 숫자도 나오는데요. 저는 숫자보다 그 앞에 놓인 한 문장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이 시기 사람들에게 미래는 반드시 오늘보다 더 나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는 서술이었어요. 성장률이 이자율을 웃도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땅했을지 짐작해 봤습니다. 그런 확신이 흔치 않은 요즘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뒤로 갈수록 이야기는 돈이 몸을 벗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전신환 챕터가 그렇습니다. 지금도 송장에 T/T로 남아 있는 그 약자가, 물리적인 현금을 직접 배송하던 시대를 끝내고 돈을 정보로 바꿔 놓은 기술이라는 설명이에요. 수개월 걸리던 국제 송금이 몇 시간으로 줄고, 해적과 난파와 강도의 위험이 사라집니다. 은을 배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던 첫 장의 풍경과 겹쳐 읽으면, 화폐가 무게를 잃어 가는 경로가 곧 주도권이 옮겨 가는 경로였다는 것이 보입니다.
다만 속도를 쥔 쪽과 그 속도에 노출된 쪽의 처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식민 본국 중앙은행은 전신으로 식민지의 자본 흐름과 원자재 가격과 기업 수익성을 실시간으로 파악했고, 채산성이 떨어지면 전신환 한 번으로 자금을 회수해 그 경제를 파탄으로 몰았다고 해요. 예금은 식민지에서 모으고 대출은 본국 기업에 해주는 회로, 식민지의 자본으로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인프라를 깔았다는 요약 앞에서는 숨을 좀 고르게 됩니다.
그 사례로 1905년 조선의 화폐정리사업이 나옵니다. 백동화를 갑·을·병종으로 나누고 상태가 불량한 병종은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교환해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 병으로 판정된 화폐를 쥐고 있던 사람은 그대로 자산을 잃었고, 결제 화폐가 바뀌는 과정에서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그 빈자리를 일본 자본이 채웠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만 놓고 보면 수탈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이어집니다. 낮은 금리의 자금을 전신환으로 들여온 쪽이 급전이 필요한 사람과 땅값 급등을 예견하지 못한 사람을 상대로 거래를 활발히 하면서 경제를 장악했다는 설명이죠.
솔직히 이 대목에서는 저자와 조금 다른 자리에 서서 읽었습니다. 헐값에 샀다거나 강제로 빼앗았다고 보는 것이 사안을 단순화한 관점이라는 서술에는 일리가 있고, 교과서가 놓쳐 온 회로를 보여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제일은행권이 조선의 결제 화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조건 자체가 이미 주권의 문제였습니다. 금융 기술의 우위라는 설명이 정교해질수록 그 전제가 배경으로 물러나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자도 문단 끝에서 차별적 신용 공급이 세계 모든 식민지에서 발생한 수탈의 방법이라고 못 박아 두긴 했는데, 그 한 줄이 좀 더 앞에 놓였다면 읽는 마음이 덜 서늘했을 것 같습니다.
러일전쟁을 다룬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런던으로 급파된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차관 협상에 사활을 걸고, 협상 내용을 도쿄에 전신으로 타전하며 지휘를 받아 결국 타결에 성공합니다. 영국 자본가들이 빌려준 돈은 전신환으로 일본 국고에 즉시 입금되고, 일본 정부는 그 돈을 곧바로 영국과 미국의 군수업체로 송금해 최신식 전함과 무기와 탄약을 공급받았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프랑스에서 거액을 빌렸지만 전신환을 쓸 수 없어 블라디보스토크나 뤼순까지 돈을 보내서 물자를 구매해야 했다고 해요. 저자는 이를 두고 수행해야 할 전쟁의 난이도가 달랐다고 표현합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공 직전이었던 러시아가 바이칼호 얼음 위에 임시 철도를 깐 이야기도 나옵니다. 얼음이 깨지고 기관차가 수몰되는 순간 크게 좌절했을 것이라는 문장 뒤에, 바이칼호 구간을 마무리한 후에 전쟁이 터졌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붙습니다. 챕터의 마지막은 짧습니다. 금융과 물류, 이 두 가지 때문에 희비가 엇갈렸다는 것이죠.
얼음판 위의 철길을 읽다가 첫 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장기 포위전을 버티지 못한 이유로 군량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었다는 설명이 있었거든요. 16세기의 산길과 20세기 초의 얼어붙은 호수가 같은 문제를 다른 무대에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300년을 가로지르며 하려던 말이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총칼의 승부처럼 보이는 사건들의 아래쪽에 언제나 돈의 배선도와 물자의 동선이 깔려 있었다는 겁니다.
책을 덮고 나서 가장 크게 남은 것은 위기감보다 오히려 담담함이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한국을 패권전쟁을 수행하며 무역대국이 된 제국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으로서 미 패권 질서를 공기처럼 흡입하며 여기까지 온 나라로 규정합니다. 울타리가 무너지고 자국우선주의가 판을 치는 지금의 정세가 극도의 불안과 혼란을 준다는 진단도 함께요. 환율과 에너지 가격, 장바구니 물가처럼 우리가 체감하는 변화들이 어디서 시작된 흔들림인지 알고 나면,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형태를 얻습니다. 형태를 아는 불안은 그래도 견딜 만해요. 이 도서의 미덕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지반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책입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대체로 마음을 다독이는 쪽이거나 지식을 채우는 쪽 중 하나인데, 이 한 권은 세계 뉴스를 읽는 눈을 조금 다르게 고쳐 준 편에 속합니다. 국제 정세 기사를 볼 때마다 진영과 인물 이야기에 먼저 눈이 가던 습관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은 뒤로는 자금이 어디서 조달되고 물자가 어느 경로로 움직이는지를 먼저 찾게 될 것 같아요. 역사 교양서를 좋아하는 분에게는 익숙한 사건들이 다시 조립되는 재미가 있을 테고, 역사를 멀게 느끼는 분이라도 은과 화약과 철도와 전신이라는 구체적인 물건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유재일의 유튜브를 보던 분이라면 영상에서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한 줄로 꿰어지는 감각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9월 중순의 아침 공기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창을 열면 여름의 습기가 빠진 서늘함이 먼저 들어오고, 해가 지는 시간도 눈에 띄게 빨라졌어요. 계절이 바뀔 때는 옷장을 정리하듯 생각도 한 번 정리하고 싶어지는데, 올해 초가을에는 이 한 권이 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세계가 다시 거칠어지는 시기에 무엇을 기준으로 뉴스를 읽어야 할지, 그 기준선을 하나 얻은 기분입니다.
은과 철도와 전신을 따라가며, 총칼 뒤에 깔린 돈과 물자의 배선도를 읽게 하는 한 권. 미국이 흔들리는 시대에 한국이 어디 서 있는지를 차분히 확인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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