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다 하지 않습니다
온선(온라인선생님)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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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할 수 있다고 다 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다 하지 않습니다> 서평


주황색 표지 한가운데에서 사람 하나가 책상에 팔을 늘어뜨린 채 엎드려 있어요. 머리 위에는 딱 한 칸 남은 배터리가 떠 있고요. 제목이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다 하지 않습니다>인데, 그림과 제목을 같이 보자마자 이건 내 얘기다 싶더라고요.


오늘이 추석 연휴 첫날이에요. 목요일인데 출근을 안 한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반은 쉰 기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 목표도 이 책 제목에서 빌려왔어요. 송편, 더 많이 먹을 수 있지만 다 먹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해봐야 알겠지만요.

저자 온선(온라인선생님)은 혼자 일한 지 8년, 유튜브 구독자 24만 명과 함께해 온 분이에요. 스마트폰이며 AI며 어려운 걸 가장 쉽게 알려주던 분이 AI 덕분에 일은 빨라졌는데 하루는 오히려 좁아졌다고 털어놓는 책입니다.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써본 사람의 고백이라 그런지 첫 장부터 귀가 솔깃하더군요.


시작은 가벼운 질문 하나예요. "AI랑 같이 쓰면, 하루에 몇 개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응이 올 만한 유튜브 대본 하나에 하루가 꼬박 걸리던 시절이었는데, 저자는 "하루에 세 개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물론 해봐야 알겠지만요"라고 조심스럽게 답합니다. 정해진 목표도 아니었고, 어디까지 되는지 가늠해 보자고 나눈 대화였대요.

그런데 그 숫자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고 해요.

"가능할 수도 있다"던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능하다"로 줄어들고, "주제마다 다르다"는 조건은 흐려지고, 결국 "이제 세 개는 할 수 있잖아요"라는 말이 되어 돌아온다는 거죠. 직장 생활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이 흐름이 너무 익숙할 거 같아요. 회의 때 "한번 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던진 말이 어느새 다음 분기 목표 칸에 들어가 있는 그런 일이요. "숫자는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면 힘을 갖는다"는 문장에서 괜히 뜨끔했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바로 다음 꼭지 '아무도 몰아붙이지 않는데, 속도는 올라가 있다'였어요. 처음에는 보안 문제로 회사 자료를 넣지 말라는 공지가 먼저 나와요. 시간이 지나면 조심하라는 말 옆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말이 붙고, 개인의 실험이던 일이 어느새 팀의 역량으로 평가받게 되는데요. 이 과정이 차근차근 그려지는데 요즘 사무실 공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나를 몰아붙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속도는 올라가 있다."

회사는 더 빠른 보고서를, 발주자는 더 빠른 초안을 기대하고, 주변 동료들은 더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요. "어제의 속도는 성실함이었는데, 오늘의 속도는 느림처럼 보일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중년 직장인으로서 살짝 서운한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성실함 하나로 버텨온 세대한테는 꽤 아픈 말이라서요.


책 중반으로 가면 저자 개인의 이야기가 더 진하게 나와요. 유튜브를 오래 하다 보니 책을 쓰자는 제안, 사업을 하자는 제안, 강의 요청, 콘텐츠 협업, 해외 진출이나 마케팅 제안까지 계속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좋은 제안일수록 거절이 더 어려웠다면서 속마음을 그대로 꺼내 놓습니다. "이걸 거절해도 되나.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올까. 너무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거의 제 속마음 받아쓰기 수준.


저자가 좋았던 건 거절을 멋있게 포장하는 편이 아닌 거 같다는 점이에요. 돈이 괜찮으면 고민했고, 이름 있는 곳이면 더 고민했고, 규모가 커 보이면 한 번 더 흔들렸다고 솔직하게 말하거든요. 그렇게 거절을 반복하고 나서야 남은 일들의 공통점이 보였고, 그게 다섯 개의 질문으로 정리됩니다. 다시 고를 수 있는가, 내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한 번 만든 것이 오래 남는가, 깊이 들어갈 여지가 있는가, 지금 내 삶의 시기와 맞는가. 처음부터 세워둔 원칙이 아니고 부딪히면서 뒤늦게 보인 기준이라는 설명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어요.


그중 '한 번 만든 것이 오래 남는가'를 설명하면서 저자가 일할 때 종종 일타쌍피를 생각한다고 하는 대목이 있어요. 명절이면 화투판 옆을 서성이게 되는 아재로서 이 단어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군요. 영상이든 강의든 한 번 만들어두면 직접 설명하지 않는 시간에도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뜻인데, 들인 시간이 한자리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회사 일에도 그대로 통하는 거 같아요.


마지막 질문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나는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한 줄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글의 온도가 조금 달라집니다. 어떤 날은 아이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했고, 어떤 날은 촬영이나 강의보다 집안일이 먼저였다는 이야기예요. 같은 일도 어떤 시기에는 가능하고 어떤 시기에는 어렵다는 말은 나이가 들수록 더 와닿아서, 이 부분은 한 줄 한 줄 따라가듯 읽게 되더라고요.


요즘은 들어온 제안을 AI로 표를 만들어 단가, 일정, 수정 범위, 2차 활용 여부, 필요한 에너지까지 나란히 놓고 볼 수도 있대요. 그런데 저자는 "표가 일을 골라주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제일 찔렸던 건 12장이었습니다. 네 살 아이 치약 하나 고르려고 GPT에 물었다가, 다른 AI에도 묻고, 검색을 다시 하고, 후기까지 찾아보다 보니 선택지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는 이야기예요. 얘한테도 물어보고 쟤한테도 물어보면 더 좋은 답이 나올 것 같은 그 마음. 결국 동네 엄마들 단톡방에서 누군가 추천해 준 치약을 샀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졌어요.


웃고 나니 좀 따끔하더라고요. 뭐 하나 고르려다 비교하고 또 비교하다 지치는 게 남 얘기 같지 않아서요. 저자는 그 시간이 전부 헛수고는 아니었다고, 덕분에 불소 함량이나 성분표에서 뭘 먼저 봐야 하는지는 알게 됐다고 공정하게 짚어요. 그래도 끝내 필요했던 건 이 정도면 괜찮다고 넘어갈 수 있는 감각이었다는 거죠.


"AI가 줄여준 시간은 자동으로 내 시간이 되지 않았다."

에필로그는 아이가 "엄마, 이걸로 책 만들어줘"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열려요. 동물이 나왔다가 친구가 나왔다가 주인공이 갑자기 다른 곳에 가 있는, 앞뒤가 딱 맞지 않는 이야기인데도요. 예전 같으면 '나중에 해보자', '엄마가 시간이 되면 해줄게' 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는 고백 뒤에 저자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다시 해보고 싶었을까.' 바쁘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이유로, 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접어두었던 것들을 다시 꺼내보고 싶어졌다는 대목에서는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AI 덕분에 무엇을 더 해낼지보다 무엇을 다시 해볼 수 있을지를 묻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게 참 좋았습니다.


AI를 누구보다 먼저 써온 사람이 속도를 줄이고 선을 긋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흔한 AI 책들하고는 결이 좀 다른 거 같아요. 회사를 그만두라고도, 더 버티라고도 하지 않고, 회사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내 일의 크기와 속도는 내가 정해보자는 쪽이라 월급쟁이가 읽어도 부담이 없더라고요. 크기도 두께도 보통이라 손에 들기 편하고, 꼭지가 짧게 나뉘어 있어서 한 꼭지씩 끊어 읽기도 좋습니다. 표지에는 내 일의 기준을 직접 정해보는 5단계 워크시트 '나의 일 기준 키트'가 QR로 들어 있다고 소개돼 있는데, 읽고 나서 내 기준을 직접 써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장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 느낌이에요.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추석 연휴 첫날,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다 하지 않습니다>를 떠올리며 이번 연휴에는 할 수 있는 걸 다 하겠다고 욕심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표지 속 그 사람처럼 방전되기 전에 저도 배터리 칸 좀 넉넉히 채워둘 생각이에요. 좋은 책을 만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다들 보름달처럼 넉넉한 한가위 보내세요.


할 수 있는 게 많아진 시대에 어디까지 할지는 내가 정해도 된다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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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워진 세계
아사쿠라 히로카게 지음, 이구름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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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버려진 페트병 같은 우리에게, <우리가 주워진 세계> 서평


손바닥에 올려 보면 핸드북 사이즈라 아담한데, 옆으로 돌려 보면 두께가 제법 됩니다. 들고 다니기 좋은 크기에 이만한 두께면 작은 체구에 근육을 숨긴 셈이라, 가방에 넣으니 어깨가 먼저 알아채더라고요. 책 사이에는 담당 편집자의 편지가 한 장 들어 있었어요. 스스로 '버려진 페트병'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느냐고 묻는 편지였는데, 그 질문을 품고 이야기로 들어가게 되는 구조가 꽤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펼친 <우리가 주워진 세계>는 크리스마스 아침, 쓰레기봉투가 터지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주인공 아사히는 도쿄의 민간 청소업체 모리야마산업에서 일하는 계약직 청소부예요. 12월 25일, 봉투 네 개를 한꺼번에 들어 올린 순간 손가락 끝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압축 버튼을 누르자 파열음이 연달아 터집니다. 아사히는 수류탄을 몸으로 막는 병사처럼 한 발짝 앞으로 나서요.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던 외제 SUV에 국물이 튀지 않게 하려고요. 누런 액체가 작업복을 흠뻑 적시고, 옆에 있던 동료는 한숨처럼 "끔찍한 크리스마스 선물이군." 하고 중얼거립니다.


그런데 그 SUV는 사거리에서 가속 페달을 세차게 밟고 떠나 버려요. 이 대목의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저 여성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청소부가 몸을 바쳐 걸쭉하고 누런 액체로부터 차를 보호했다는 사실을."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누군가 몸으로 막아 낸 일은 티가 안 나고, 불편했던 몇 초만 기억되는 순간들이요. 아사히는 일한 지 겨우 1년인데 파견 지역이 바뀌어도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것 같다며, 어릴 적 보던 타임루프물을 떠올립니다. 1년 차가 벌써 이러면 20년 넘게 출근 도장 찍은 사람은 뭐라고 해야 하나 싶어 피식 웃다가도, 그 막막함만큼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웃음이 금방 가라앉더군요.


지나가던 중학생들이 "웩, 역겨워!" 하고 코를 싸쥐는 장면도 있어요. 추운 아침인데 몸속에서는 수치심이 확 달아오르고, 아사히는 그런 처량한 마음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이미 오래전에 익혔다고 해요. 그저 눈앞의 쓰레기산에 집중하는 것. 그 요령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한동안 그 문장에 눈이 붙어 있었습니다.


퇴근한 아사히의 방은 거의 비어 있어요. TV도 없고, 소품이나 장식도 없고, 소설과 만화는 전부 전자책으로 봅니다. 로봇청소기를 돌려 두고도 직접 청소기를 밀고 밀대질까지 해요. 쓸데없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방을 보면 속이 뻥 뚫린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장을 보러 나가려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옆집 여자와 눈이 딱 마주칩니다.


"아……."


그 옆집 여자가 도모에예요. 청소부 앞에서 쓰레기를 집 안으로 들고 들어가려는 사람입니다. "쓰레기……군요." "네, 쓰레기예요." 하고 이어지는 대화를 보고 웃음이 터졌어요. 당황한 아사히 앞에서 전기포트를 집어 들고 "이거, 굉장하죠?" 하며 태연하게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습니다. 뒤로 가면 도모에가 엄청난 대식가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아사히와 동료 민토가 100엔짜리 회전초밥을 먹는 도모에를 흉내 내며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하고 웃는 장면도 나와요. 도모에라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윤곽이 잡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다고 가볍기만 한 인물은 아닙니다. 도모에가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버려진 쓸모없는 쓰레기를 모아 그걸 성벽 삼아 우리만의 왕국을 만들었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동화 속 왕국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는 듯한 말투였다고 하는데, 그 다정함 때문에 더 아프게 읽혔습니다.


<우리가 주워진 세계>만의 재미는 이 '왕국'이라는 말에 있는 것 같아요. 원제가 (ゴミの王国), 우리말로 '쓰레기의 왕국'이거든요. 도모에 모녀에게 쓰레기 더미로 만든 왕국이 있었다면, 아사히네 집에는 가족 말고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청결의 왕국'이 있어요. 한쪽은 너무 채워서, 한쪽은 너무 비워서 자기를 지켜 온 사람들이에요. 장마다 첫머리에 같은 그림이 실려 있는 것도 좋았어요. 페트병 안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매번 나와서, 장이 바뀔 때마다 이 둘을 다시 떠올리게 되더군요. (무미 스파게티), (파르페 민트), (중간부터 본 드라마) 같은 장 제목도 하나같이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하게 만듭니다.


가장 천천히 읽었던 부분은 4장 (파르페 민트)에서 아사히가 2년 반 만에 본가에 가는 장면이에요. 아버지가 계단에서 넘어져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내려갔는데, 알고 보니 단순 골절이었어요. 어머니는 "미안해!" 하면서, 졸업하고 한 번도 안 와서 궁금했다고 합니다. 눈가 주름이 전보다 조금 더 깊어진 것 같다는 한 줄에서 저는 오래 멈춰 있었어요.


부모님은 아사히가 교육 출판사에 다니는 줄 알아요.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는데 붙었다고 거짓말을 해 버렸거든요. 그래서 집에 오기 전에 유난히 꼼꼼하게 몸을 씻고, 식탁에서는 어머니 눈을 피합니다.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컵에 맥주를 받아 들고 아사히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요?" 하고 말을 꺼내요. 청소 말이에요. 둘뿐인 집을 왜 그렇게까지 치우냐고요. 그런데 그 말을 뱉어 놓고 스스로도 어이없어합니다. 정작 자기는 방에 티끌 하나만 있어도 못 견디는 사람이니까요.


어머니와 자신을 "아버지가 프로그래밍한 로봇청소기"에 빗대는 문장에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뒤로 어머니가 아사히도 몰랐던 옛이야기를 꺼내는데, 그걸 듣고 나면 이 집의 청소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아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새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결국 누군가를 집에 묶어 두는 족쇄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예요. 저도 부모 노릇을 하는 입장이라 이 대목이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걱정에서 시작한 습관이 가족의 규칙으로 굳어 버리는 일은 어느 집에나 하나쯤 있지 않을까 싶어요.


1장에서 곰팡이 핀 찹쌀떡을 보고 문득 어머니를 떠올리던 장면이 이 식탁 장면과 이어지는 것도 좋았어요. 앞에서 무심히 지나간 문장이 뒤에서 다시 돌아오는 재미가 있습니다.


5장 (깨끗한 쓰레기 저택)에서는 동료 민토와 도는 수거 현장이 나와요. 재활용품 수거 날인데, 민토는 맥주캔 브랜드만 봐도 세상 형편을 알 수 있다고 해요. 작년보다 맥주캔이 줄었고, 발포주나 싼 캔 칵테일이 부쩍 늘었어요. 역을 사이에 두고 북쪽 서민 동네와 재개발된 남쪽 동네의 쓰레기가 달라지는 풍경도 나옵니다. "평소에는 그다지 의식하지 못하는 그 경계를 말없는 쓰레기가 알려준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어요. 분리수거장에 뭐가 쌓이는지로 동네를 읽는 시선이라니, 이 작가는 쓰레기를 참 오래 들여다본 사람 같습니다.


같은 날, 일용직 운전기사 사와키 씨가 자전거 탄 청년의 길을 막는 일이 생겨요. 청년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사회에 적응 못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런 일이나 하는 거겠지" 하고 내뱉습니다. 아사히가 민토에게 들은 대로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만은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하자, 사와키 씨가 소리를 높여요. 20년을 버틴 동네 술집은 망하고 빚만 남았고, 연금도 얼마 안 된다고요. 그리고 "나를 포기해야 이렇게라도 일하며 버틸 수 있는 거라고!" 하고 외칩니다.


그 말에 아사히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요. 몇 번이고 재활용되는 자원처럼 사람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은 조금씩 닳고 깎여 나간다는 생각이 이어집니다. 쉰 가까운 나이가 되고 보니 '포기하지 마'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소설이 그 말을 쉽게 편들지도, 쉽게 버리지도 않는 게 좋았어요.


민토는 그 반대편에서 균형을 잡아 주는 인물 같아요. 끝까지 정중한 말투로 사와키 씨를 대하고, 아사히가 어깨를 떨 때는 "괜찮을 거야" 하고 손을 얹어 주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라는 민토의 말은 이 책에서 제일 오래 붙들고 싶었던 문장이었습니다. 도모에에게도 마주해야 할 과거가 있고, 아사히는 그 길에 함께 나서요. 그 길이 어디에 닿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솔직히 걸렸던 부분을 하나 꼽자면, 초반의 쓰레기 묘사가 너무 생생하다는 거예요. 곰팡이 핀 찹쌀떡, 누런 국물, 치킨 뼈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서 비위가 약한 분이라면 첫 장은 조금 각오하고 들어가시면 좋겠어요. 다만 그 냄새를 한 번 통과하고 나면, 뒤에 이어지는 따뜻함이 훨씬 크게 다가옵니다.


소장 욕심도 나는 책이에요. 페트병 사이로 별이 흩어진 표지가 예쁘고, 장마다 같은 그림이 들어가 있어 책 자체가 하나의 작은 전시처럼 느껴졌어요. 핸드북 판형이라 손에 쥐는 맛도 좋고, 편집자 편지까지 끼워 두면 오래 보관하고 싶은 한 권이 됩니다.


오늘이 마침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목요일이네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해져서 소설 속 한겨울 수거 현장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고향 가시는 분들은 부모님 눈가 주름을 한 번쯤 찬찬히 보게 되실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주워진 세계>를 덮고 나니, 버린 것과 남긴 것 사이에서 마음 한 칸이 정리된 기분이에요. 명절 끝나고 분리수거장이 산처럼 쌓일 게 벌써 눈에 선한데, 올해는 페트병 라벨만큼은 깔끔하게 떼서 내놓을 생각입니다. 책 한 권이 분리수거 교육까지 시켜 주네요. 좋은 책 만나서 연휴 시작이 든든합니다.


모든 걸 비우는 남자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여자가 서로의 왕국 문을 두드리는, 쓰레기 냄새 끝에 따뜻함이 남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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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초역 오디세이 -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원작 대서사!!
호메로스 원작, 손길영 편저 / 스타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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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30년 넘게 품고 있다가 차기작으로 골랐다는 그 (오디세이아)를, 오늘의 우리말로 한 권에 눌러 담은 책이에요.


프롤로그 제목이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오늘의 그대에게)인데, 여기서 이 책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가 먼저 드러납니다. 놀란 감독이 그 오래된 이야기에 끌린 이유를 두고, 화려한 신화나 몬스터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승리의 고양감 뒤에 찾아오는 죄의식과 회한, 결국 집으로 돌아가려 몸부림치는 '인간 본연의 고투'였다고 짚어두거든요. 이 문장을 읽고 나니 뒤에 나올 거인이나 마녀 이야기가 괴물 구경거리로만 보이지는 않더군요.


세상이라는 바다는 늘 또 다른 폭풍우와 외눈박이 거인, 영혼을 마비시키는 유혹의 섬을 던져놓는다는 대목이 있어요. 인생을 바쳐 정성껏 쌓아 올린 뗏목이 가장 안심했던 순간 어이없이 산산조각 난다는 문장도요. 사십 대 후반쯤 되면 이런 비유가 좀 다르게 읽힙니다. 뗏목 산산조각 나 본 사람들, 주변에 꽤 있잖아요.


이 책의 생김새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편집 방식이었습니다. 권마다 앞에 그 권 전체 줄거리를 한 문단으로 압축해 놓고, 그다음에 (통찰의 초역)이라는 상자 글이 붙고, 그러고 나서 본문이 시작돼요. 24권을 한 권으로 줄이면서 길을 잃지 않게 손잡이를 달아둔 느낌입니다.


제1권 (신들의 결정, 그리고 남겨진 청년)의 상자 글이 이런 식이에요. 위대한 여정은 거창한 도약이나 완벽한 준비에서 시작되지 않고, 자신이 남겨진 초라한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서는 아주 작은 용기에서 출발한다고. 구원자는 외부에서 오지 않으며, 무력감의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는 한 인생의 어떤 비극도 해결되지 않는다고요.

다른 데보다 속도를 늦춰서 정독했던 건 텔레마코스가 나오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날 때 포대기에 싸여 있던 갓난아기가 이제 건장한 청년이 됐는데, 구혼자들 기세에 눌려 기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해요. 궁전 구석 기둥에 힘없이 기대서서 집안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고, 어깨는 늘 무겁게 굽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환상처럼 홀연히 나타나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 주기만 바라는 유약한 소년의 틀에 머물러 있었다는 문장에서 잠깐 멈칫했어요.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아서요. 회사에서도 누가 나타나서 이 상황 정리해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 하면서 하루를 넘기는 날이 있거든요.


거기에 아테나가 멘테스의 모습으로 찾아와 던지는 말이 이렇습니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어린아이가 아니다. 언제까지 아버지만 그리워하며 주저앉아 슬퍼할 수는 없다. 스스로 무기를 쥐고 세상 밖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야 할 때다!"


그런데 이 여신이 말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민회를 열어라, 배 한 척과 노잡이 스무 명을 구해라,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찾아가라 하고 할 일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갑니다. 그러고는 청년의 처진 어깨를 강하게 짚어주죠. 신이 내려와서 해주는 일이 결국 등 떠밀어 주는 거라는 게, 읽으면서 좀 웃기고 좀 뭉클했습니다.


제9권 제목은 아예 대놓고 (외눈박이 거인 외길 인생, 외나무다리 승부)예요. 편역자분이 여기서 한번 웃기고 가겠다고 작정하신 것 같더라고요. 저도 제목만 보고 피식했으니 성공하신 셈입니다.


내용은 다들 아시는 그 장면입니다.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독한 포도주를 먹이고 자기 이름을 '아무도 아닌 자'라고 속인 뒤, 불에 달군 올리브 통나무로 외눈을 찌르고 양 배 밑에 매달려 빠져나오는 대목이요. 재미는 재미대로 살아 있는데, 이 권의 상자 글이 재미로만 끝나게 두질 않아요. 위기의 순간일수록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감을 내려놓는 철저한 겸손함이 목숨을 구하는 무기가 된다고 해놓고, 바로 이어서 지혜로 승리를 거둔 순간에 찾아오는 오만과 자만이 더 거대한 저주를 부른다고 못을 박습니다. 실제로 오디세우스가 바다로 빠져나온 뒤에 참지 못하고 진짜 이름을 외치며 도발하다가 일이 커지거든요.


이긴 다음이 더 위험하다.

이건 뭐, 직장 생활 좀 해보신 분들은 설명 안 해도 아실 거예요.


맛보기로 한 대목 옮겨보면 세이렌 장면이 좋았습니다. 자기를 돛대에 묶으라고 명령하면서 "내가 만약 저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홀려 너희에게 밧줄을 풀라고 애원하거나 눈짓을 하거든, 너희는 절대로 내 말을 듣지 말고 오히려 더 굵은 밧줄로 나를 돛대에 사정없이 바짝 묶어야 한다!" 하고 미리 못을 박아두죠. 그리고 정말로 대장이 눈을 부라리며 풀어달라고 몸부림칠 때, 귀를 막은 부하들이 더 굵은 밧줄을 들고 달려옵니다. 미래의 나를 못 믿어서 현재의 내가 손을 써두는 이야기라, 결심이 사흘 못 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남 일 같지 않은 장면이었어요.


솔직하게 걸렸던 부분도 있습니다. 권마다 교훈을 먼저 정리해 주는 그 상자 글이 장점이면서 동시에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내가 느끼기 전에 느낄 방향을 알려주는 셈이라, 고전을 천천히 헤매는 재미를 기대하고 오신 분은 답을 미리 받아 든 기분이 들 수도 있겠더라고요. 24권을 한 권으로 압축하다 보니 인물들이 지나가는 속도가 빠른 것도 사실이고요. 요약 문단과 본문이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하는 구간에서는 눈이 좀 미끄러졌습니다. 다만 이건 이 책이 원래 겨냥한 자리를 생각하면 흠이라기보다 성격에 가깝다고 봅니다.


책 자체는 보통 크기에 보통 두께예요. 고전이라고 해서 각오하고 들 필요는 없습니다. 팔뚝 운동은 다른 걸로 하셔야 해요. 뒤에 명언 100선이 주제별로 묶여 있고 (오디세이아)의 신들을 정리한 부록도 붙어 있어서, 다 읽고 나서도 뒤적일 구석이 남아 있는 구성입니다. 원전 완역본으로 가기 전에 지도 한 장 손에 쥐는 용도로도 괜찮을 것 같고요.


프롤로그 끝자락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그대가 나락으로 떨어져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라도, 내면의 자부심과 품위를 잃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미 승리자다."


평소 같으면 좀 세다 싶었을 말인데, 누더기를 걸치고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그 사람 이야기를 따라 읽고 나서 만나니 다르게 들리더군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여름 내내 지쳐 있다가 이제 좀 숨 돌리는 시기에, 3천 년 묵은 아저씨가 바다에서 고생하는 이야기 읽으면서 묘하게 기운을 얻었어요. 나만의 이타카가 어디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분리수거는 해냈으니 한 걸음은 뗀 걸로 치겠습니다.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3천 년 된 귀향 이야기를 오늘의 말로 압축하고 권마다 삶의 해설을 붙인, 고전 앞에서 자꾸 미끄러졌던 사람에게 손잡이가 되어주는 책.


#초역오디세이 #오디세이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손길영 #스타북스 #그리스신화 #고전읽기 #고전추천 #서평 #서평단 #독서기록 #책스타그램 #놀란감독 #오디세우스 #텔레마코스 #세이렌 #인문교양 #40대독서 #BOOKU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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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각자의 오디세이아를 쓴다 ㅣ 서양철학전집 하이엔드 고전 2
호메로스 지음 / 클래시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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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핸드북 사이즈라 얇고 가볍습니다. 가방 옆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 들고 다니기 좋겠다 싶었어요.


제목만 봤을 땐 <오디세이아> 번역본인 줄 알았습니다.

펼쳐보니 결이 좀 다르더군요. 원전을 그대로 옮긴 책은 아니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서 장면을 하나씩 꺼내 와 지금 우리 하루 위에 겹쳐 놓는 구성입니다. 표지에는 서양철학전집 하이엔드 고전 시리즈 02라고 적혀 있고요.


프롤로그 첫 문장부터 사람을 붙잡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오디세이아>를 오해했다." 어릴 땐 외눈박이 거인이며 마녀의 섬이며 화려한 삽화에 눈이 가려져서 그 아래 흐르는 검고 무거운 물줄기를 오래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이야기를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냉혹한 생존의 기록"으로 다시 읽는다고 해요. 삶을 항해에 빗대는 비유가 너무 낭만적이라는 지적도 이어집니다. 잔잔한 바다, 시원한 바람, 별 보며 방향 잡는 밤. 그런 그림은 사후의 회상 속에만 있고 실제 그의 바다는 배가 부서지고 동료가 익사하는 쪽이었다는 거죠.


이 책에서 신을 자주 부르는 이유도 미리 밝혀둡니다. 포세이돈, 아테나, 제우스, 헤르메스는 결국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의 이름이라고. 태어난 땅의 척박함, 혈통의 굴레, 시대의 격랑, 예고 없이 무너지는 운명의 장난. 그래서 인간의 위대함은 신을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이길 수 없는 폭풍 속에서도 자기 손으로 노를 잡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하더군요. 신은 이길 수 없다고 못 박아두고 시작하는 책이라니, 서문부터 기운이 셉니다.


1장 첫 꼭지가 '신의 변덕에 분노하기보다 묵묵히 돛을 올려라'인데, 솔직히 저는 소제목만 보고 좀 삐딱해졌어요. 힘든 사람한테 그냥 참으라는 소리 같아서요. 그런데 저자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자기도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참으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실용적인 조언이더라고요. 바람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 바뀌는 순간 곧장 나갈 수 있게 지금부터 돛을 손질해 두라는 것. "준비된 자에게만 순풍은 의미가 있다"는 문장 앞에서 괜히 제 책상 서랍을 떠올렸습니다.


태어난 나라, 태어난 시대, 태어난 집안,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지금'을 얼마나 자주 삼키며 살아왔냐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이 나이쯤 되면 저 질문 한두 번쯤은 다들 목구멍에 걸어보지 않았나 싶어요. 분노 자체를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분노는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인정해 주거든요. 다만 "노를 젓는 것은 근육이지 감정이 아니다"라며 선을 긋고, 그 원망이 하루에서 몇 시간을 가져가는지 한 번 계산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1장 끝 문장이 좋았습니다. 돛은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고 손으로 올리는 것이며, 손이 있는 한 우리는 아직 항해자라고.


다른 페이지보다 속도를 늦춰 정독하듯 읽었던 건 2장의 몰리 이야기였어요. 키르케의 마법에 걸린 부하들을 구하러 가는 오디세우스에게 헤르메스가 건넨 약초. 검은 뿌리에 우윳빛 꽃이 피고 인간의 손으로는 뽑기 어렵다는 풀입니다. 저자가 붙든 지점은 그게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해독제였다는 사실이에요. 마녀를 이기는 도구가 아니라, 마녀의 세계 안에서도 내가 나로 남아 있게 해주는 것.


여기서 좀 뜨끔했습니다. 우리는 이기는 훈련만 받아왔다고 하거든요. 시험에서 이기고, 면접에서 이기고, 연봉에서 이기고, 결혼에서 이기고, 육아에서 이기는 훈련. 정작 이기는 동안 내가 나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확인하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요. 저자 본인도 오래 그쪽에 포함되어 있었을 거라고 덧붙이는데, 그 문장에서 저도 슬쩍 손을 들었습니다.


키르케의 마법이 무서운 이유가 폭력적이지 않아서라는 해석도 인상 깊었어요. 때리지 않고 오히려 정성껏 대접한다는 거죠. 좋은 자리에 앉히고, 향기로운 음식을 내오고, 부드럽게 말을 걸고. 저항할 이유가 없는 대접 앞에서 사람이 가장 무방비해진다는 말. 그렇게 술잔이 건네지고 돼지의 몸을 얻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짐승의 몸에 갇혀 통제권만 빼앗긴 상태라는 풀이가 꽤 서늘했습니다.


세상은 매일 새로운 술잔을 건넨다고 해요. 어떤 잔에는 성공, 어떤 잔에는 안정, 어떤 잔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요. 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게 나한테 정말 필요한 건지 남들이 다 들고 있어서 나도 들어야 할 것 같은 건지, 그 구분이 흐려지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 표정을 살피고, 그 표정에 맞춰 톤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하는 순간에 대한 관찰도 있습니다. 처음엔 조심스러운 조율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어느 날 "나는 오늘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없구나" 하고 알게 된다는 것. 며칠째, 몇 달째, 어쩌면 몇 년째.


상대 말이 옳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상대 표정이 무서워서 끄덕이는 것은 겉으로 같아 보여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완전히 다르다고, 전자는 대화이고 후자는 이미 마법이라고 쓰더군요. 회의실 풍경 하나가 자동으로 떠올랐습니다.


4장에서는 파이아케스 해변에 떠밀려 온 오디세우스를 오래 들여다봅니다. 배도 부하도 옷 한 벌도 없고,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이라는 이름조차 파도에 씻겨 나간 상태. 짠물에 부푼 살갗과 며칠 굶어 흐릿해진 눈. 나뭇잎을 긁어모아 몸을 덮고 잠든 그가 다음 날 나우시카 공주 앞에 서는데, 무기도 지위도 없이 자신에게 남은 언어와 태도만으로 상대를 설득해 낸다는 대목입니다.


인간의 뼈대는 잘 살 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 나와요. 명예와 재물과 타인의 환호가 뼈를 두껍게 감싸고 있어서 정작 나를 지탱하는 중심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른 채 살아간다고. 그러다 그 껍데기가 한꺼번에 휩쓸려 가는 순간에야 처음으로 자기 뼈를 만져 본다는 겁니다.


이 장이 미더웠던 건 밑바닥을 미화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곳은 아프고 외롭고 가끔은 사람을 완전히 부수기도 하며, 모든 사람이 그 경험을 자산으로 바꿔내는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적어둡니다. 성급한 위로를 건네지 않겠다는 말도 하고요. 곧 좋아질 거라거나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이 지금 이 순간엔 아무 힘이 없다는 걸 자기도 안다고. 다시 올라올 때는 속도가 훨씬 느리지만 제 손가락 끝으로 바위를 짚으며 올라가기 때문에 그 자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밑바닥을 겪은 사람 특유의 눈빛 이야기도 있어요. 화려하지 않고 낮게 가라앉아 있고 목소리도 크지 않은데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든든한 사람. 소리 지르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에 저도 조용히 동의했습니다.


또 하나. 저는 이 책을 읽고 나니 원전이 다시 궁금해졌는데, 반대로 오디세이아 자체의 이야기 맛을 기대하고 집으면 갈증이 남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장면은 재료로 쓰이는 쪽이라서요.


소장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두툼한 고전 완역본은 책장에서 위엄만 뽐내다 끝나기 쉬운데, 이 정도 크기면 아무 데나 펴서 한 꼭지씩 다시 읽기 좋아요. 밑줄 그을 문장도 넉넉하고요. 다섯 겹의 항해라는 틀이 있어서 오늘 내 상태에 맞는 장을 골라 펼치는 식으로 써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여름 내내 버텨낸 것만으로 용하다 싶은 시기인데, 이 책은 그 버팀을 낭비가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쪽이라 읽는 내내 든든했어요. 프롤로그 끝 문장이 계속 남습니다. 짐은 가볍게 꾸리고 단단한 것 몇 가지만 챙기자고, 첫 노를 젓기에 오늘만큼 좋은 날은 없다고. 가볍게 꾸리라는 말에 책 무게까지 맞춘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들고 다니기 참 가볍습니다. 좋은 문장 여럿 건진 거 같아서 기분 좋은 하루였어요.


호메로스의 바다를 오늘 아침 출근길 위에 겹쳐 놓은 책, 가볍게 들고 다니며 무겁게 읽게 되는 한 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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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윤서 지음 / 더블:엔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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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시작부터 좀 뻔뻔한 데가 있어요. 그림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정작 그림이 한 장도 안 실려 있거든요. 표지에 '그림 없는 그림 에세이'라고 적혀 있는데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 대신 본문 여백에 QR 코드가 하나씩 박혀 있어요. 글을 먼저 읽고 궁금해지면 그때 찍어서 보라는 뜻인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잘 먹힙니다.

프롤로그 제목이 "살다 보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이 있다"예요. 그림 앞에 서면 감정이 먼저 도착하고 이야기는 그 뒤에 남는다는 문장으로 열립니다. 우리는 그림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정작 오래 남는 건 이미지보다 그 그림을 둘러싼 한 사람의 선택과 태도인 경우가 많다고요. 그래서 설명 대신 삶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대신 여백을 남겨두려 했다는 뜻을 밝혀 둡니다. 읽으면서 아 이 사람 진심이구나 했어요.


책은 희·노·애·락 네 파트에 화가 스물네 명을 나눠 담았습니다. 이 분류가 저는 꽤 마음에 들었는데, 저자가 감정을 사전적으로 다루지 않거든요. 희喜를 들뜬 기쁨 쪽에 두지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 쪽에 놓습니다. 노怒는 부정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말해지지 못했던 생의 에너지로 봅니다. 애哀는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태, 락樂은 도착점이 아니라 다시 하루로 돌아가기 위한 숨. 마흔 넘게 살아보니 이 네 가지가 순서대로 오지도 않고 깔끔하게 끝나지도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그 감각이랑 맞아떨어지더군요.


표지 그림이 칼 라르손인데, 본문에도 한 꼭지가 잡혀 있습니다. "이케아의 모든 디자인은 칼 라르손에게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따뜻한 집을 그린 스웨덴 화가예요. 아내 카린과 여덟 아이가 살던 집을 평생 그렸고, 그 집은 순드보른에 지금도 보존돼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어린 시절 집은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둘렀고 가정은 자주 흔들렸다고 합니다.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에서 일하며 그림을 배웠고요. 훗날 그는 "내가 그린 집과 가족의 풍경은 내가 바랐던 진짜 삶이다"라고 말했다는군요. 이 대목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봤습니다. 노란 모자 쓴 아이, 창가의 수선화, 도자기 주전자. 화가가 가져본 적 없어서 끝내 직접 만들어낸 방이었던 거죠. 겨울이 길어도 창을 닫지 않았고 해가 짧아도 꽃을 들여놓았다는 문장이 오래 걸렸습니다.


바로 다음 파트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노怒의 첫 자리가 바스키아예요.

거리의 낙서에서 출발해 뉴욕 미술계 한복판까지 간 사람. '검은 피카소'라는 별칭이 문을 열어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하나의 틀에 가두기도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이 양면을 짚는 방식이 좋았어요. 워홀과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림을 들고 작업실로 달려가 완성했다는 (도스 카베사스), 워홀이 일기에 "아주 특별한 아이"라고 적었다는 대목. 두 얼굴이 나란히 있지만 워홀 쪽은 단단하고 바스키아 쪽은 어딘가 미완처럼 열려 있다는 감상에 "당신 옆에 서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라는 문장이 붙습니다.


이후 "워홀 덕분에 성공했다"는 식의 평가가 따라붙었고, 그게 실은 그의 자격을 의심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는 서술도 나와요. 세상이 자기를 하나의 이미지 안에 가두려 할수록 그는 더 많은 단어를 덧씌우고 더 거칠게 화면을 긁어냈다고. 직장 생활 오래 한 사람이면 이 감각 조금은 알 거예요. 내가 아니라 누구 밑에서, 어느 라인으로 설명될 때의 그 기분. 저자는 그의 분노를 파괴라기보다 호출에 가깝다고 읽습니다. 여기 있다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방식이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모란디 꼭지였습니다.

평생 병과 상자만 그린 이탈리아 화가예요. 동네 벼룩시장에서 낡은 물건을 사다가 상표를 떼고 표면에 페인트를 칠했다고 합니다. 브랜드도 용도도 지워진 물건들. 인공조명은 안 쓰고 자연광만 썼고, 병 위에 내려앉은 먼지조차 색과 밀도의 일부로 뒀대요. 사물을 닦아내지 않았다는 건 시간을 지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문장에서 저도 모르게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병의 위치를 1밀리미터씩 옮기고 다시 바라보는 것이었다고 해요.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그린 병들이 전부 다르답니다. 병이 달라진 게 아니라 병을 바라보는 시간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어요. "많이 보기보다 오래 보기를 선택했다"는 문장, 그리고 모란디 본인의 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시간, 눈에 띄는 성과도 변화도 없는 것 같은 날들. 우리는 그런 시간을 의미 없는 공백으로 여기기 쉽지만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은 우리 안에서 조용히 형태를 바꾸고 있다고 하더군요. 요 몇 년 제가 딱 그런 구간을 지나온 거 같아서, 이 부분은 두 번 읽었습니다.


구성에서 마음에 든 장치가 하나 더 있어요. 꼭지마다 끝에 '한국에서 만난 ○○○' 코너가 붙습니다. 라르손은 2024년 서울 마이아트뮤지엄 <새벽부터 황혼까지>, 바스키아는 2020년 롯데뮤지엄 회고전과 2025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 모란디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모란디와의 대화>. 먼 나라 화가 이야기가 갑자기 내가 지나다닌 동네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라 반가웠습니다. 그 아래 writer's note 한두 줄도 좋아요. 라르손 편에는 지금 내가 소중히 지키고 싶은 공간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고, 바스키아 편에는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건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솔직히 걸린 것도 있어요. QR 방식이요. 취지는 알겠는데 결국 궁금해서 휴대폰을 집게 되고, 한번 집으면 알림이 어쩌고 하다가 흐름이 끊기더라고요. 책만 보자니 궁금하고 폰을 켜자니 산만하고. 저는 몇 꼭지는 그냥 글로만 읽고 그림은 나중에 몰아서 확인하는 쪽으로 타협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오히려 문장이 더 선명하게 들어오긴 했어요.


책 자체도 얘기해야겠네요. 양장인데 손에 드니 의외로 가볍습니다. 요즘 제 어깨가 감당 못 하는 게 한둘이 아닌데 이 녀석은 봐주더군요. 표지 질감도 좋고 소장하기 괜찮은 만듦새예요. 안에 명화 엽서도 들어 있었는데 프랑수아 부셰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화)랑 에드가 드가의 (발레 수업)이었습니다. 저자의 전작 <하루 10분 100일의 명화>에 실린 그림들이라고 표기돼 있고요. 그림 없는 책에 그림 엽서를 끼워주는 센스가 재밌었어요.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미술 지식이 없어도 전혀 부담이 없고, 화가 한 명당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마음 가는 데부터 펼쳐도 되겠더군요. 저자가 미술치료학 박사과정에서 예술과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던데, 글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지는 게 그래서인가 싶기도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선선해졌어요. 라르손이 겨울에도 창을 닫지 않았다는 그 문장을 생각하면서, 저도 올가을엔 집 어딘가를 조금 더 환하게 만들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드네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마음이 따뜻해진 저녁입니다.


그림 한 장 없이도 화가 스물네 명의 삶이 또렷하게 도착하는, 희·노·애·락으로 읽는 조용하고 다정한 그림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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