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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초역 오디세이 -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원작 대서사!!
호메로스 원작, 손길영 편저 / 스타북스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30년 넘게 품고 있다가 차기작으로 골랐다는 그 (오디세이아)를, 오늘의 우리말로 한 권에 눌러 담은 책이에요.
프롤로그 제목이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오늘의 그대에게)인데, 여기서 이 책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가 먼저 드러납니다. 놀란 감독이 그 오래된 이야기에 끌린 이유를 두고, 화려한 신화나 몬스터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승리의 고양감 뒤에 찾아오는 죄의식과 회한, 결국 집으로 돌아가려 몸부림치는 '인간 본연의 고투'였다고 짚어두거든요. 이 문장을 읽고 나니 뒤에 나올 거인이나 마녀 이야기가 괴물 구경거리로만 보이지는 않더군요.
세상이라는 바다는 늘 또 다른 폭풍우와 외눈박이 거인, 영혼을 마비시키는 유혹의 섬을 던져놓는다는 대목이 있어요. 인생을 바쳐 정성껏 쌓아 올린 뗏목이 가장 안심했던 순간 어이없이 산산조각 난다는 문장도요. 사십 대 후반쯤 되면 이런 비유가 좀 다르게 읽힙니다. 뗏목 산산조각 나 본 사람들, 주변에 꽤 있잖아요.

이 책의 생김새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편집 방식이었습니다. 권마다 앞에 그 권 전체 줄거리를 한 문단으로 압축해 놓고, 그다음에 (통찰의 초역)이라는 상자 글이 붙고, 그러고 나서 본문이 시작돼요. 24권을 한 권으로 줄이면서 길을 잃지 않게 손잡이를 달아둔 느낌입니다.
제1권 (신들의 결정, 그리고 남겨진 청년)의 상자 글이 이런 식이에요. 위대한 여정은 거창한 도약이나 완벽한 준비에서 시작되지 않고, 자신이 남겨진 초라한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서는 아주 작은 용기에서 출발한다고. 구원자는 외부에서 오지 않으며, 무력감의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는 한 인생의 어떤 비극도 해결되지 않는다고요.
다른 데보다 속도를 늦춰서 정독했던 건 텔레마코스가 나오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날 때 포대기에 싸여 있던 갓난아기가 이제 건장한 청년이 됐는데, 구혼자들 기세에 눌려 기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해요. 궁전 구석 기둥에 힘없이 기대서서 집안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고, 어깨는 늘 무겁게 굽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환상처럼 홀연히 나타나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 주기만 바라는 유약한 소년의 틀에 머물러 있었다는 문장에서 잠깐 멈칫했어요.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아서요. 회사에서도 누가 나타나서 이 상황 정리해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 하면서 하루를 넘기는 날이 있거든요.
거기에 아테나가 멘테스의 모습으로 찾아와 던지는 말이 이렇습니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어린아이가 아니다. 언제까지 아버지만 그리워하며 주저앉아 슬퍼할 수는 없다. 스스로 무기를 쥐고 세상 밖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야 할 때다!"
그런데 이 여신이 말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민회를 열어라, 배 한 척과 노잡이 스무 명을 구해라,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찾아가라 하고 할 일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갑니다. 그러고는 청년의 처진 어깨를 강하게 짚어주죠. 신이 내려와서 해주는 일이 결국 등 떠밀어 주는 거라는 게, 읽으면서 좀 웃기고 좀 뭉클했습니다.
제9권 제목은 아예 대놓고 (외눈박이 거인 외길 인생, 외나무다리 승부)예요. 편역자분이 여기서 한번 웃기고 가겠다고 작정하신 것 같더라고요. 저도 제목만 보고 피식했으니 성공하신 셈입니다.

내용은 다들 아시는 그 장면입니다.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독한 포도주를 먹이고 자기 이름을 '아무도 아닌 자'라고 속인 뒤, 불에 달군 올리브 통나무로 외눈을 찌르고 양 배 밑에 매달려 빠져나오는 대목이요. 재미는 재미대로 살아 있는데, 이 권의 상자 글이 재미로만 끝나게 두질 않아요. 위기의 순간일수록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감을 내려놓는 철저한 겸손함이 목숨을 구하는 무기가 된다고 해놓고, 바로 이어서 지혜로 승리를 거둔 순간에 찾아오는 오만과 자만이 더 거대한 저주를 부른다고 못을 박습니다. 실제로 오디세우스가 바다로 빠져나온 뒤에 참지 못하고 진짜 이름을 외치며 도발하다가 일이 커지거든요.
이긴 다음이 더 위험하다.
이건 뭐, 직장 생활 좀 해보신 분들은 설명 안 해도 아실 거예요.
맛보기로 한 대목 옮겨보면 세이렌 장면이 좋았습니다. 자기를 돛대에 묶으라고 명령하면서 "내가 만약 저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홀려 너희에게 밧줄을 풀라고 애원하거나 눈짓을 하거든, 너희는 절대로 내 말을 듣지 말고 오히려 더 굵은 밧줄로 나를 돛대에 사정없이 바짝 묶어야 한다!" 하고 미리 못을 박아두죠. 그리고 정말로 대장이 눈을 부라리며 풀어달라고 몸부림칠 때, 귀를 막은 부하들이 더 굵은 밧줄을 들고 달려옵니다. 미래의 나를 못 믿어서 현재의 내가 손을 써두는 이야기라, 결심이 사흘 못 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남 일 같지 않은 장면이었어요.
솔직하게 걸렸던 부분도 있습니다. 권마다 교훈을 먼저 정리해 주는 그 상자 글이 장점이면서 동시에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내가 느끼기 전에 느낄 방향을 알려주는 셈이라, 고전을 천천히 헤매는 재미를 기대하고 오신 분은 답을 미리 받아 든 기분이 들 수도 있겠더라고요. 24권을 한 권으로 압축하다 보니 인물들이 지나가는 속도가 빠른 것도 사실이고요. 요약 문단과 본문이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하는 구간에서는 눈이 좀 미끄러졌습니다. 다만 이건 이 책이 원래 겨냥한 자리를 생각하면 흠이라기보다 성격에 가깝다고 봅니다.
책 자체는 보통 크기에 보통 두께예요. 고전이라고 해서 각오하고 들 필요는 없습니다. 팔뚝 운동은 다른 걸로 하셔야 해요. 뒤에 명언 100선이 주제별로 묶여 있고 (오디세이아)의 신들을 정리한 부록도 붙어 있어서, 다 읽고 나서도 뒤적일 구석이 남아 있는 구성입니다. 원전 완역본으로 가기 전에 지도 한 장 손에 쥐는 용도로도 괜찮을 것 같고요.
프롤로그 끝자락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그대가 나락으로 떨어져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라도, 내면의 자부심과 품위를 잃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미 승리자다."

평소 같으면 좀 세다 싶었을 말인데, 누더기를 걸치고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그 사람 이야기를 따라 읽고 나서 만나니 다르게 들리더군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여름 내내 지쳐 있다가 이제 좀 숨 돌리는 시기에, 3천 년 묵은 아저씨가 바다에서 고생하는 이야기 읽으면서 묘하게 기운을 얻었어요. 나만의 이타카가 어디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분리수거는 해냈으니 한 걸음은 뗀 걸로 치겠습니다.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3천 년 된 귀향 이야기를 오늘의 말로 압축하고 권마다 삶의 해설을 붙인, 고전 앞에서 자꾸 미끄러졌던 사람에게 손잡이가 되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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