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각자의 오디세이아를 쓴다 ㅣ 서양철학전집 하이엔드 고전 2
호메로스 지음 / 클래시카 / 202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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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핸드북 사이즈라 얇고 가볍습니다. 가방 옆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 들고 다니기 좋겠다 싶었어요.


제목만 봤을 땐 <오디세이아> 번역본인 줄 알았습니다.

펼쳐보니 결이 좀 다르더군요. 원전을 그대로 옮긴 책은 아니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서 장면을 하나씩 꺼내 와 지금 우리 하루 위에 겹쳐 놓는 구성입니다. 표지에는 서양철학전집 하이엔드 고전 시리즈 02라고 적혀 있고요.


프롤로그 첫 문장부터 사람을 붙잡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오디세이아>를 오해했다." 어릴 땐 외눈박이 거인이며 마녀의 섬이며 화려한 삽화에 눈이 가려져서 그 아래 흐르는 검고 무거운 물줄기를 오래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이야기를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냉혹한 생존의 기록"으로 다시 읽는다고 해요. 삶을 항해에 빗대는 비유가 너무 낭만적이라는 지적도 이어집니다. 잔잔한 바다, 시원한 바람, 별 보며 방향 잡는 밤. 그런 그림은 사후의 회상 속에만 있고 실제 그의 바다는 배가 부서지고 동료가 익사하는 쪽이었다는 거죠.


이 책에서 신을 자주 부르는 이유도 미리 밝혀둡니다. 포세이돈, 아테나, 제우스, 헤르메스는 결국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의 이름이라고. 태어난 땅의 척박함, 혈통의 굴레, 시대의 격랑, 예고 없이 무너지는 운명의 장난. 그래서 인간의 위대함은 신을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이길 수 없는 폭풍 속에서도 자기 손으로 노를 잡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하더군요. 신은 이길 수 없다고 못 박아두고 시작하는 책이라니, 서문부터 기운이 셉니다.


1장 첫 꼭지가 '신의 변덕에 분노하기보다 묵묵히 돛을 올려라'인데, 솔직히 저는 소제목만 보고 좀 삐딱해졌어요. 힘든 사람한테 그냥 참으라는 소리 같아서요. 그런데 저자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자기도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참으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실용적인 조언이더라고요. 바람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 바뀌는 순간 곧장 나갈 수 있게 지금부터 돛을 손질해 두라는 것. "준비된 자에게만 순풍은 의미가 있다"는 문장 앞에서 괜히 제 책상 서랍을 떠올렸습니다.


태어난 나라, 태어난 시대, 태어난 집안,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지금'을 얼마나 자주 삼키며 살아왔냐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이 나이쯤 되면 저 질문 한두 번쯤은 다들 목구멍에 걸어보지 않았나 싶어요. 분노 자체를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분노는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인정해 주거든요. 다만 "노를 젓는 것은 근육이지 감정이 아니다"라며 선을 긋고, 그 원망이 하루에서 몇 시간을 가져가는지 한 번 계산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1장 끝 문장이 좋았습니다. 돛은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고 손으로 올리는 것이며, 손이 있는 한 우리는 아직 항해자라고.


다른 페이지보다 속도를 늦춰 정독하듯 읽었던 건 2장의 몰리 이야기였어요. 키르케의 마법에 걸린 부하들을 구하러 가는 오디세우스에게 헤르메스가 건넨 약초. 검은 뿌리에 우윳빛 꽃이 피고 인간의 손으로는 뽑기 어렵다는 풀입니다. 저자가 붙든 지점은 그게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해독제였다는 사실이에요. 마녀를 이기는 도구가 아니라, 마녀의 세계 안에서도 내가 나로 남아 있게 해주는 것.


여기서 좀 뜨끔했습니다. 우리는 이기는 훈련만 받아왔다고 하거든요. 시험에서 이기고, 면접에서 이기고, 연봉에서 이기고, 결혼에서 이기고, 육아에서 이기는 훈련. 정작 이기는 동안 내가 나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확인하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요. 저자 본인도 오래 그쪽에 포함되어 있었을 거라고 덧붙이는데, 그 문장에서 저도 슬쩍 손을 들었습니다.


키르케의 마법이 무서운 이유가 폭력적이지 않아서라는 해석도 인상 깊었어요. 때리지 않고 오히려 정성껏 대접한다는 거죠. 좋은 자리에 앉히고, 향기로운 음식을 내오고, 부드럽게 말을 걸고. 저항할 이유가 없는 대접 앞에서 사람이 가장 무방비해진다는 말. 그렇게 술잔이 건네지고 돼지의 몸을 얻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짐승의 몸에 갇혀 통제권만 빼앗긴 상태라는 풀이가 꽤 서늘했습니다.


세상은 매일 새로운 술잔을 건넨다고 해요. 어떤 잔에는 성공, 어떤 잔에는 안정, 어떤 잔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요. 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게 나한테 정말 필요한 건지 남들이 다 들고 있어서 나도 들어야 할 것 같은 건지, 그 구분이 흐려지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 표정을 살피고, 그 표정에 맞춰 톤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하는 순간에 대한 관찰도 있습니다. 처음엔 조심스러운 조율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어느 날 "나는 오늘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없구나" 하고 알게 된다는 것. 며칠째, 몇 달째, 어쩌면 몇 년째.


상대 말이 옳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상대 표정이 무서워서 끄덕이는 것은 겉으로 같아 보여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완전히 다르다고, 전자는 대화이고 후자는 이미 마법이라고 쓰더군요. 회의실 풍경 하나가 자동으로 떠올랐습니다.


4장에서는 파이아케스 해변에 떠밀려 온 오디세우스를 오래 들여다봅니다. 배도 부하도 옷 한 벌도 없고,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이라는 이름조차 파도에 씻겨 나간 상태. 짠물에 부푼 살갗과 며칠 굶어 흐릿해진 눈. 나뭇잎을 긁어모아 몸을 덮고 잠든 그가 다음 날 나우시카 공주 앞에 서는데, 무기도 지위도 없이 자신에게 남은 언어와 태도만으로 상대를 설득해 낸다는 대목입니다.


인간의 뼈대는 잘 살 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 나와요. 명예와 재물과 타인의 환호가 뼈를 두껍게 감싸고 있어서 정작 나를 지탱하는 중심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른 채 살아간다고. 그러다 그 껍데기가 한꺼번에 휩쓸려 가는 순간에야 처음으로 자기 뼈를 만져 본다는 겁니다.


이 장이 미더웠던 건 밑바닥을 미화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곳은 아프고 외롭고 가끔은 사람을 완전히 부수기도 하며, 모든 사람이 그 경험을 자산으로 바꿔내는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적어둡니다. 성급한 위로를 건네지 않겠다는 말도 하고요. 곧 좋아질 거라거나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이 지금 이 순간엔 아무 힘이 없다는 걸 자기도 안다고. 다시 올라올 때는 속도가 훨씬 느리지만 제 손가락 끝으로 바위를 짚으며 올라가기 때문에 그 자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밑바닥을 겪은 사람 특유의 눈빛 이야기도 있어요. 화려하지 않고 낮게 가라앉아 있고 목소리도 크지 않은데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든든한 사람. 소리 지르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에 저도 조용히 동의했습니다.


또 하나. 저는 이 책을 읽고 나니 원전이 다시 궁금해졌는데, 반대로 오디세이아 자체의 이야기 맛을 기대하고 집으면 갈증이 남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장면은 재료로 쓰이는 쪽이라서요.


소장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두툼한 고전 완역본은 책장에서 위엄만 뽐내다 끝나기 쉬운데, 이 정도 크기면 아무 데나 펴서 한 꼭지씩 다시 읽기 좋아요. 밑줄 그을 문장도 넉넉하고요. 다섯 겹의 항해라는 틀이 있어서 오늘 내 상태에 맞는 장을 골라 펼치는 식으로 써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여름 내내 버텨낸 것만으로 용하다 싶은 시기인데, 이 책은 그 버팀을 낭비가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쪽이라 읽는 내내 든든했어요. 프롤로그 끝 문장이 계속 남습니다. 짐은 가볍게 꾸리고 단단한 것 몇 가지만 챙기자고, 첫 노를 젓기에 오늘만큼 좋은 날은 없다고. 가볍게 꾸리라는 말에 책 무게까지 맞춘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들고 다니기 참 가볍습니다. 좋은 문장 여럿 건진 거 같아서 기분 좋은 하루였어요.


호메로스의 바다를 오늘 아침 출근길 위에 겹쳐 놓은 책, 가볍게 들고 다니며 무겁게 읽게 되는 한 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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