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윤서 지음 / 더블:엔 / 2026년 8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시작부터 좀 뻔뻔한 데가 있어요. 그림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정작 그림이 한 장도 안 실려 있거든요. 표지에 '그림 없는 그림 에세이'라고 적혀 있는데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 대신 본문 여백에 QR 코드가 하나씩 박혀 있어요. 글을 먼저 읽고 궁금해지면 그때 찍어서 보라는 뜻인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잘 먹힙니다.
프롤로그 제목이 "살다 보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이 있다"예요. 그림 앞에 서면 감정이 먼저 도착하고 이야기는 그 뒤에 남는다는 문장으로 열립니다. 우리는 그림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정작 오래 남는 건 이미지보다 그 그림을 둘러싼 한 사람의 선택과 태도인 경우가 많다고요. 그래서 설명 대신 삶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대신 여백을 남겨두려 했다는 뜻을 밝혀 둡니다. 읽으면서 아 이 사람 진심이구나 했어요.
책은 희·노·애·락 네 파트에 화가 스물네 명을 나눠 담았습니다. 이 분류가 저는 꽤 마음에 들었는데, 저자가 감정을 사전적으로 다루지 않거든요. 희喜를 들뜬 기쁨 쪽에 두지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 쪽에 놓습니다. 노怒는 부정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말해지지 못했던 생의 에너지로 봅니다. 애哀는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태, 락樂은 도착점이 아니라 다시 하루로 돌아가기 위한 숨. 마흔 넘게 살아보니 이 네 가지가 순서대로 오지도 않고 깔끔하게 끝나지도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그 감각이랑 맞아떨어지더군요.
표지 그림이 칼 라르손인데, 본문에도 한 꼭지가 잡혀 있습니다. "이케아의 모든 디자인은 칼 라르손에게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따뜻한 집을 그린 스웨덴 화가예요. 아내 카린과 여덟 아이가 살던 집을 평생 그렸고, 그 집은 순드보른에 지금도 보존돼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어린 시절 집은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둘렀고 가정은 자주 흔들렸다고 합니다.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에서 일하며 그림을 배웠고요. 훗날 그는 "내가 그린 집과 가족의 풍경은 내가 바랐던 진짜 삶이다"라고 말했다는군요. 이 대목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봤습니다. 노란 모자 쓴 아이, 창가의 수선화, 도자기 주전자. 화가가 가져본 적 없어서 끝내 직접 만들어낸 방이었던 거죠. 겨울이 길어도 창을 닫지 않았고 해가 짧아도 꽃을 들여놓았다는 문장이 오래 걸렸습니다.

바로 다음 파트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노怒의 첫 자리가 바스키아예요.
거리의 낙서에서 출발해 뉴욕 미술계 한복판까지 간 사람. '검은 피카소'라는 별칭이 문을 열어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하나의 틀에 가두기도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이 양면을 짚는 방식이 좋았어요. 워홀과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림을 들고 작업실로 달려가 완성했다는 (도스 카베사스), 워홀이 일기에 "아주 특별한 아이"라고 적었다는 대목. 두 얼굴이 나란히 있지만 워홀 쪽은 단단하고 바스키아 쪽은 어딘가 미완처럼 열려 있다는 감상에 "당신 옆에 서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라는 문장이 붙습니다.
이후 "워홀 덕분에 성공했다"는 식의 평가가 따라붙었고, 그게 실은 그의 자격을 의심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는 서술도 나와요. 세상이 자기를 하나의 이미지 안에 가두려 할수록 그는 더 많은 단어를 덧씌우고 더 거칠게 화면을 긁어냈다고. 직장 생활 오래 한 사람이면 이 감각 조금은 알 거예요. 내가 아니라 누구 밑에서, 어느 라인으로 설명될 때의 그 기분. 저자는 그의 분노를 파괴라기보다 호출에 가깝다고 읽습니다. 여기 있다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방식이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모란디 꼭지였습니다.
평생 병과 상자만 그린 이탈리아 화가예요. 동네 벼룩시장에서 낡은 물건을 사다가 상표를 떼고 표면에 페인트를 칠했다고 합니다. 브랜드도 용도도 지워진 물건들. 인공조명은 안 쓰고 자연광만 썼고, 병 위에 내려앉은 먼지조차 색과 밀도의 일부로 뒀대요. 사물을 닦아내지 않았다는 건 시간을 지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문장에서 저도 모르게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병의 위치를 1밀리미터씩 옮기고 다시 바라보는 것이었다고 해요.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그린 병들이 전부 다르답니다. 병이 달라진 게 아니라 병을 바라보는 시간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어요. "많이 보기보다 오래 보기를 선택했다"는 문장, 그리고 모란디 본인의 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시간, 눈에 띄는 성과도 변화도 없는 것 같은 날들. 우리는 그런 시간을 의미 없는 공백으로 여기기 쉽지만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은 우리 안에서 조용히 형태를 바꾸고 있다고 하더군요. 요 몇 년 제가 딱 그런 구간을 지나온 거 같아서, 이 부분은 두 번 읽었습니다.

구성에서 마음에 든 장치가 하나 더 있어요. 꼭지마다 끝에 '한국에서 만난 ○○○' 코너가 붙습니다. 라르손은 2024년 서울 마이아트뮤지엄 <새벽부터 황혼까지>, 바스키아는 2020년 롯데뮤지엄 회고전과 2025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 모란디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모란디와의 대화>. 먼 나라 화가 이야기가 갑자기 내가 지나다닌 동네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라 반가웠습니다. 그 아래 writer's note 한두 줄도 좋아요. 라르손 편에는 지금 내가 소중히 지키고 싶은 공간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고, 바스키아 편에는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건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솔직히 걸린 것도 있어요. QR 방식이요. 취지는 알겠는데 결국 궁금해서 휴대폰을 집게 되고, 한번 집으면 알림이 어쩌고 하다가 흐름이 끊기더라고요. 책만 보자니 궁금하고 폰을 켜자니 산만하고. 저는 몇 꼭지는 그냥 글로만 읽고 그림은 나중에 몰아서 확인하는 쪽으로 타협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오히려 문장이 더 선명하게 들어오긴 했어요.

책 자체도 얘기해야겠네요. 양장인데 손에 드니 의외로 가볍습니다. 요즘 제 어깨가 감당 못 하는 게 한둘이 아닌데 이 녀석은 봐주더군요. 표지 질감도 좋고 소장하기 괜찮은 만듦새예요. 안에 명화 엽서도 들어 있었는데 프랑수아 부셰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화)랑 에드가 드가의 (발레 수업)이었습니다. 저자의 전작 <하루 10분 100일의 명화>에 실린 그림들이라고 표기돼 있고요. 그림 없는 책에 그림 엽서를 끼워주는 센스가 재밌었어요.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미술 지식이 없어도 전혀 부담이 없고, 화가 한 명당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마음 가는 데부터 펼쳐도 되겠더군요. 저자가 미술치료학 박사과정에서 예술과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던데, 글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지는 게 그래서인가 싶기도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선선해졌어요. 라르손이 겨울에도 창을 닫지 않았다는 그 문장을 생각하면서, 저도 올가을엔 집 어딘가를 조금 더 환하게 만들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드네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마음이 따뜻해진 저녁입니다.
그림 한 장 없이도 화가 스물네 명의 삶이 또렷하게 도착하는, 희·노·애·락으로 읽는 조용하고 다정한 그림 에세이.
#그림은설명되지않는다 #이윤서 #더블엔 #그림에세이 #명화에세이 #그림없는그림에세이 #명화인문학 #미술교양 #예술교양 #미술에세이 #칼라르손 #바스키아 #모란디 #희노애락 #독서기록 #서평 #신간추천 #에세이추천 #가을에읽기좋은책 #BOOKU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