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달라지는 수면 과학 - 도쿄대학교 대학원 수면생리학 교수가 최신 연구를 총정리한 잠의 모든 것
하야시 유 감수, 홍성민 옮김 / 레몬한스푼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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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수면 부족은 늘 있는 일이니까." "익숙해지면 별것 아니에요."


넥타이 맨 아저씨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이렇게 말하는 그림이 있어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가만 보니 딱 우리 또래 직장인 얼굴이더라고요. 그 그림 위에 붙은 제목은 "'난 괜찮아'는 자기 생각일 뿐, 전혀 괜찮지 않다"입니다. 첫 장부터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어요.

추석 연휴도 오늘로 끝자락에 와 있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선선해져서 이불 속이 부쩍 좋아지는 계절인데, 마침 이맘때 잠에 관한 책을 만났습니다. <내일이 달라지는 수면 과학>은 도쿄대학교 대학원 수면생리학연구실의 하야시 유 교수가 감수하고 홍성민 님이 옮긴 책이에요. 레몬한스푼에서 이번 9월에 나왔고요. 잠을 다루는 책이니 읽다가 졸면 그것도 실습이라고 우기면 되겠다 싶었는데, 그럴 틈을 잘 안 주는 책이더군요.


이 책의 재미는 그림에서 먼저 오는 거 같아요. 그래프와 실험 그림이 쉴 새 없이 이어져서 논문 이야기를 만화 넘기듯 따라가게 됩니다. 숨겨진 규칙을 찾는 문자열 실험이 대표적이었어요. 과제를 푼 뒤 낮 동안 깨어 있던 그룹, 밤에도 깨어 있던 그룹, 밤에 푹 잔 그룹에게 비슷한 문제를 다시 풀게 했더니 푹 잔 그룹만 통찰력이 올라갔대요. 참가자가 18~31세, 한창 체력 좋은 나이인데도 그랬다니 아재 입장에서는 더 할 말이 없어지죠.


여백마다 고양이 한 마리.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동그랗게 말려 자기도 하고요.

선생님 캐릭터와 독자가 주고받는 말풍선도 좋았어요. "술을 마시면 졸리긴 해요. 마시면 안 되나요?"처럼 딱 제 입에서 나올 법한 질문을 먼저 꺼내주니까, 혼나는 느낌보다는 동네 병원에서 상담받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원리를 다루는 앞부분과 생활 습관을 다루는 뒷부분이 서로 맞물린다는 점도 이 책만의 맛인 것 같아요. 앞쪽에서는 아데노신이 깨어 있는 시간만큼 쌓여서 졸음을 부르는 물질이라고 설명해요. 오렉신은 각성 스위치를 누르는 쪽이 아니라, 켜진 스위치가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 두는 쪽이라고 알려주고요. 수면과 각성을 시소 양쪽에 올려놓은 일러스트로 한 번 더 보여주기도 해요. 그러다 뒤쪽 아침 루틴에 가면 커피가 아데노신을 막아서 잠을 깨운다는 이야기와, 아침 햇빛을 쐬면 오렉신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앞에서 배운 게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머리가 좋아진 것 같은 착각도 들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프레젠티즘 이야기 뒤에 붙은 짧은 문단이었어요. 일에 진심이라 오래 일하면서 늘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이 불면에 빠지기 쉽고, 회사에 기여하려던 마음이 결국 생산성 저하라는 손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잠 줄여 가며 버틴 걸 은근히 자랑처럼 여기는 분위기는 우리 또래라면 다들 아실 거예요. 40대 이상은 수면 시간이 지금도 줄어드는 추세라는 문장에도 밑줄이 쳐져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쇼트 슬리퍼 이야기도 이어서 읽게 되더군요. 적게 자고도 쌩쌩한 체질은 예전엔 모든 직장인의 꿈이었지만, 인구의 1% 미만이고 유전적인 '행운 체질'이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래요. 그 꼭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수면 시간으로 적절히 일하며 개인생활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훨씬 멋진 시대다." 스무 살 때 들었으면 흘려들었을 말인데, 지금은 어깨를 토닥여주는 말처럼 다가와요.


옮긴이가 챙겨 넣은 숫자 하나도 반가웠어요. 일본인 평균 수면 시간 옆에 한국인 평균은 7시간 51분이라는 주석을 달아둔 거예요.

맛보기로 제일 웃으면서 읽은 대목을 옮겨볼게요. "커피를 매일 마시고 있는데, 저는 체질상 괜찮은 것 같아요." "개인차가 큰 것은 확실합니다. 단, 수면 부채가 클 뿐일지도 몰라요." 24개 연구를 메타분석했더니 커피 한 잔 기준으로 이 시각 이후에 마시면 수면에 영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13시 12분.

본문이 "오후 1시를 조금 넘은 시간까지라니, 너무 이른 거 아냐?" 하는 독자 속마음을 먼저 꺼내놓는데, 그게 딱 제 속마음이라 웃음이 났어요. 커피를 안 마시면 머리가 개운하지 않은 것도 엄연한 금단증상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더군요.

솔직히 뜨끔했던 건 음주 대목이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술을 안 마셔"라는 말로 시작해서, 중장년 남성일수록 비즈니스 술자리와 회식을 많이 겪어왔다고 짚는데 첫 문장부터 우리 얘기예요. 술을 마시면 금방 잠들어도 얕은 비렘수면이 길어지고 렘수면은 짧게 끊긴대요. 매일 마시면 내성이 생겨서 잠드는 효과마저 사라지고요. 선생님 대답은 짧고 단호합니다. "뇌 내 물질의 리듬이 흐트러졌을 뿐이라서 깨기 쉬워요." 뜨거운 탕을 좋아하는 중장년 남성에게도 한마디 하는데, 나이 들면서 온도 감수성이 떨어지는 탓도 있으니 푹 자고 싶으면 40℃ 전후가 좋다고 하네요. 5분 간격 알람에 스누즈까지 걸어두는 게 가장 좋지 않다는 문장 앞에서도 괜히 휴대폰 알람 목록이 떠올랐어요.


소장 가치는 충분한 편이라고 봐요. 알람 없이 원하는 만큼 자본 뒤 평소 수면 시간을 빼고, 거기서 다시 1.5시간을 빼면 내 수면 부채가 나온다는 계산법이 그림으로 정리돼 있어요. 그 아래에 수면 부채와 이상적인 수면 시간을 직접 적어 넣는 빈칸까지 있어서 워크북처럼 쓸 수 있고요. 그래프마다 참고한 논문이 달려 있어서 궁금한 건 더 찾아볼 수도 있어요. 크기는 보통 교양서 정도이고 무게도 가벼운 편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 부담 없습니다. 잠 줄여 버티는 게 당연해진 직장인이라면 <내일이 달라지는 수면 과학>에서 한 꼭지쯤은 자기 얘기를 찾게 될 거 같아요.


가을밤이 하루하루 길어지는 계절이라 잠 공부하기에는 이만한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알람 끄고 원하는 만큼 자보는 실험은 연휴 마지막 일요일에 한번 해볼 생각이에요. 오후에 커피 생각나시면 시계부터 한번 보세요. 13시 12분이 넘었으면 오늘부터 우리는 디카페인 아재입니다. 좋은 잠 이야기를 그림으로 편하게 배운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잠 줄여 번 시간은 이자까지 붙어 돌아온다는 걸, 넥타이 아저씨와 고양이 그림으로 알려주는 친절한 수면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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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박용남 편역 / 리미트리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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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명함이 안 통하는 동굴에서 칼을 거둔 사내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박용남 편역


목마 뱃속은 캄캄했을 거예요. 그 어둠 밖에서 누군가 이름을 부릅니다. 십 년 동안 듣지 못한 아내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요.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다들 안다고 생각하는데,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는 바로 그 목마 속의 밤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더군요.

헬레네가 목마를 세 바퀴 돌면서 안에 든 수령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메넬라오스와 디오메데스는 뛰쳐나가려 하고, 안티클로스는 대답하려 해요. 오디세우스는 그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습니다. "그 손 하나가 그 안의 모두를 살렸다"는 문장까지 오면, 읽는 쪽도 괜히 따라서 숨을 고르게 되는 거 같아요.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9월 끝자락의 토요일이네요. 긴 항해 이야기를 꺼내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외눈박이 거인이나 세이렌 같은 장면은 조각조각 알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이어서 따라가 본 적은 없었어요.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가 특이한 건 바로 이 순서 때문이에요. 원래 (오디세이아)는 이야기 한가운데서 시작하고, 유명한 장면들은 주인공이 남의 궁정에서 들려주는 회상으로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편역자 박용남 님은 그걸 목마의 밤부터 시간 순서대로 다시 늘어놓았습니다. 회상도 액자도 없이, 한 방향으로.


그렇다고 줄거리만 추려 놓은 느낌은 아니었어요. 장마다 첫머리에 "원전 제9권 105~566행" 같은 표기가 붙어 있어서, 지금 읽는 장면이 호메로스의 어느 대목에서 왔는지 바로 보이거든요. 부록 원전 대조표를 펼쳐 보면 A.T. Murray의 산문역을 저본으로 행 번호를 맞췄고, 원전의 1인칭 회상은 3인칭으로 다시 풀었다고 밝혀 두었더라고요. 이런 걸 보고 나니 마음 놓고 따라가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순서를 바꿔 놓으니 생기는 재미도 있어요. 1장에서 허리 굽은 노인 아이깁티오스가 "오디세우스가 떠난 뒤로 우리는 회의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소"라고 묻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몇 장 뒤에 나오는 키클롭스들은 회의도 법도 없이, 각자 제 동굴에서 제 처자식에게만 법이 되는 족속으로 그려지거든요. 서로를 찾지 않는 족속이요. 주인 없는 섬과 법 없는 동굴이 나란히 놓이니까 두 장면이 자꾸 겹쳐 보이더라고요.

인물 이야기를 하자면 페넬로페가 먼저 떠오릅니다. 구혼자 백여 명이 날마다 홀에 눌러앉아 남의 소와 양을 잡고 포도주를 퍼마셔요. 거절하면 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승낙하면 남편을 제 손으로 장사 지내는 셈이 되죠.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길을 찾아냈어요.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 놓고, 낮에 짠 베를 밤마다 횃불 곁에서 풀었습니다. 삼 년을요.


"한 사람의 평생 살림이 남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살림을 꾸려 온 중년의 가장 입장에서는 이 문장이 좀 서늘하게 읽혔어요.

텔레마코스도 눈에 밟힙니다. 아버지가 떠날 때 갓난아이였으니 이제 갓 스물이에요. 문간에 손님이 서 있는데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홀에서, 이 청년 혼자 일어나 손님의 오른손을 잡고 창을 받아 들어요. 먼저 드시고 용건은 그다음에 말씀하시라면서요. 그런데 그 손님 앞에서 털어놓는 말이 이렇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그분의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릅니다." 제 또래 아버지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괜히 마음이 쓰일 것 같더라고요.


그 청년이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이 집의 권한은 제게 있으니까요"라고 말하고, 구혼자들의 조롱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아요. 아까 온 손님이 누구였느냐는 물음에는 타포스의 멘테스라고만 대답하고요. 책은 그 모습을 두고 "그는 하루 만에 감추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고 적어 두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가는 첫걸음을 이 한 줄로 보여 주는 게 좋았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키클롭스의 동굴이었습니다. 너희는 누구냐는 물음에 오디세우스가 아가멤논의 이름을 대고, 탄원자라는 처지를 말하고, 제우스를 들먹여요. 사람의 도시였다면 그중 어느 하나로도 문이 열렸을 텐데, 책은 이렇게 적습니다. "이 동굴에서는 셋 다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회사 명함이 한 장도 통하지 않는 자리에 앉아 본 사람이라면 남 얘기로 들리지 않을 문장이에요.

영웅이라고 늘 현명한 것도 아니더군요. 주인 없는 동굴에서 부하들은 치즈랑 새끼 양만 챙겨서 당장 배로 가자고 매달리는데, 오디세우스는 그 주인을 직접 보고 싶었고 손님의 선물도 받아 보고 싶었답니다. "호기심과 욕심이 절반씩이었다." 훗날의 오디세우스가 그편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인정하는 대목도 있어요. 이런 빈틈이 있어야 저 같은 보통 사람도 정이 가는 법이죠.


그 뒤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솔직히 저한테는 좀 셌습니다. 묘사가 꽤 생생한 편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 칼을 잡았다가 도로 거두는 장면이 있어요. 괴물을 죽이면 문을 막은 바위를 치울 자가 없으니까요. "문제는 힘이 아니었다. 문이었다."


프롤로그 해설에서 읽은 "좋은 계략은 머리에서 나오고, 계략의 완성은 참는 데서 온다"는 문장이 여기서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목마 속에서 남의 입을 막던 그 손이, 동굴에서는 제 칼을 거두는 손이 되는 셈이라서요.

맛보기로 한 장면만 살짝 꺼내 볼게요. 눈먼 괴물이 문간에 버티고 앉아서 나가는 양들의 등을 손으로 더듬어요. 사람들은 숫양 세 마리를 한 묶음으로 엮어서 가운데 양의 배 밑에 하나씩 매달려 있고요. "등만 더듬었다. 배 밑은 만지지 않았다. 눈을 잃은 자의 손은 보이던 시절의 버릇대로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나가는 으뜸 숫양에게 괴물이 말을 겁니다. 착한 숫양아, 어째서 오늘은 네가 맨 뒤냐. 그 배 밑에 누가 매달려 있는지 아는 독자로서는 한 줄 한 줄이 조마조마하더라고요.


숨소리 하나가 목숨이었다는 말 그대로.

오디세우스가 댄 "아무도아니"라는 이상한 이름이 이 동굴에서 어떤 쓸모를 갖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는 게 훨씬 재밌을 거예요.

장마다 끝에 붙은 해설도 이 책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부분이었어요. 프롤로그 해설의 첫 줄은 "트로이아는 함락당하지 않았다. 스스로 열었다."입니다. 목마를 도끼로 쪼개자던 사람들의 손을 멈추게 한 건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러니까 그들의 미덕이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져요. "경계는 위협 앞에서 일어서고 호의 앞에서 눕는다"는 문장을 읽는데, 거절하기 아까웠던 제안 몇 개가 머릿속을 스쳐 가더라고요. 직장 생활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제일 정이 간 인물은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였어요. 주인이 떠난 사이에 여주인도 모르게 농장을 손수 지어 놓았고, 구혼자들의 잔치에 날마다 가장 좋은 놈을 골라 보내면서도 남은 수퇘지가 삼백육십 마리라는 걸 정확히 세고 있어요. "줄어드는 쪽의 장부는 이렇게 정확했다." 월말에 숫자 맞춰 본 적 있는 직장인이라면 웃프게 고개를 끄덕일 문장 같습니다.

그는 거지 차림으로 찾아온 낯선 노인에게 자기가 덮고 자던 염소 가죽을 깔아 줘요. 폭풍 칠 때 입으려고 아껴 둔 두꺼운 겉옷까지 덮어 주고, 자기는 투창을 들고 바위 아래로 나가 수퇘지들 곁에 눕습니다. "짐이 되겠다는 사람을 붙드는 데에 조건이 하나도 붙지 않았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저까지 조금은 착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두 사람이 긴 밤마다 서로의 고난을 이야기하는 장면도 좋았고요. "요즘 밤은 놀랍도록 길다오" 하는 돼지치기의 말이, 해가 부쩍 짧아진 요즘과 겹쳐서 들리더군요. 거지가 오디세우스는 꼭 돌아온다고 맹세하는 대목에 붙은 "이보다 참된 맹세도 이보다 새빨간 시치미도 없었다"는 문장은 참 얄밉게 잘 쓴 것 같아요.


굳이 걸렸던 걸 하나 꼽자면 낯선 이름들이에요. 안티노오스, 에우리마코스, 아이깁티오스, 할리테르세스까지 나오니까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좀 헷갈렸어요. 그래도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흐르다 보니 금방 자리가 잡히더라고요.

두께는 보통 책 한 권 정도라서, 스무 해 항해를 통째로 담았는데도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어요. 오디세우스가 짊어진 짐에 비하면 이 정도는 깃털이죠.


소장 가치로 보면 부록의 원전 대조표가 든든합니다. 나중에 완역본에 도전해 볼 마음이 생기면 옆에 펼쳐 두고 길잡이로 쓰기에 딱 좋을 것 같거든요.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덕분에 이제 누가 (오디세이아) 읽어 봤냐고 물으면 쭈뼛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선한 가을 토요일, 목마 이야기로 시작했더니 저도 말(馬)이 많아졌네요. 이십 년 걸려 집에 돌아가는 사람을 따라가고 나니, 오늘 저녁은 식구들이랑 밥 한 끼 제대로 먹고 싶어집니다. 좋은 책 만나서 기분 좋은 주말이에요.


스무 해 귀향길을 목마의 밤부터 차례대로 따라가니, 참고 버티는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내 얘기처럼 읽히는 편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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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 - 세계 6개 미술관에서 처음 시작하는 그림 여행
박혜성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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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직장인의 30분에도 미술관은 열려 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 서평



"미술을 애호하고 더 깊이 알고자 하지만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온종일이 아닌 30분이나 한 시간의 여가를 이용해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857년, 내셔널 갤러리를 공해가 덜한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영국의 존 듀크 콜리지 대법관이 이렇게 말하며 지금 자리를 지켰다고 하더라고요.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계층이라니, 딱 제 얘기 같았어요.


네, 여기 한 명 있습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에는 이렇게 백 년도 더 된 누군가의 말이 지금의 직장인한테 불쑥 말을 거는 순간이 곳곳에 숨어 있어요. 화가이자 아트 스토리텔러인 박혜성 작가가 2018년에 낸 <어쨌든 미술은 재밌다>의 후속작이고, 8년 만의 신작이라고 합니다. 전작이 그림과 화가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 그림을 품은 공간, 미술관 자체를 파고드는데요. 작가님이 프롤로그에서 이 책을 "미술관 사용 설명서라고 할까"라고 소개하시는데, 다 읽고 나니 그보다 잘 맞는 이름도 없는 거 같아요. 전작을 안 읽었어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내셔널 갤러리, 우피치, 프라도, 뉴욕 현대 미술관. 이름만 들어도 항공권 검색창을 열고 싶어지는 여섯 곳이 한 권에 다 들어 있어요. 재미있는 건 순서입니다. 장마다 [entrance]라는 이름으로 그 미술관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부터 들려주고, 그다음에 작품 이야기가 이어지고, 끝에는 [미술관 플러스]에서 미술관 바깥 이야기까지 챙겨 줘요. 입구로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나오는 동선을 책이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작가님이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사연도 좋았어요. 오래전 단체 여행으로 해외 미술관을 몇 번 찾았는데, 작품을 급하게 훑고 지나가는 관람이라 늘 갈증만 남았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다 막내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양화를 전공한 남편분과 함께 2014년부터 해마다 한 달씩 미술관 여행을 떠나게 됐대요. 막내를 대학 보내고 나서야 묵혀 둔 꿈을 꺼내는 그 순서가, 이 나이쯤 되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작가님이 옛 단체 관람을 두고 쓴 이 표현 하나로 패키지 여행의 추억이 다 정리되는 거 같았어요.

루브르 장에서는 이 유명한 건물이 처음엔 요새였다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12세기 말 노르만인의 공격을 막으려고 지은 요새가 감옥, 병기창, 왕실 금고 보관소를 거쳐 왕궁이 됐대요.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떠난 뒤로는 작업장이나 숙소로 밀려났다가, 프랑스 대혁명을 지나 1793년에야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한자리에서 직업을 이렇게 여러 번 바꾼 건물이라니, 이직 이력서로 치면 꽤 화려한 편이죠. 연표에 약한 편이라 왕 이름과 연도가 줄줄이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잠깐 헤맸어요. 그래도 옆에 실린 1380년 무렵 왕궁 그림과 그랑 갤러리 사진을 따라가다 보니 금방 길이 잡혔습니다.


제가 유난히 천천히 읽었던 대목은 유리 피라미드 이야기예요. 1989년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이 피라미드는 당시 여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예산이 동결돼 무산될 뻔했대요. 그런데 미테랑 대통령이 10년에 걸쳐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고, 지금은 에펠탑에 버금가는 파리의 랜드마크가 됐다고 하더군요. 회사에서도 처음 올렸을 때 온갖 소리를 듣던 기획이 몇 년 지나면 간판 사업이 돼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 기획을 끝까지 붙들고 있던 사람들 얼굴이 괜히 떠올랐어요.


이 책이 설명서라는 말을 들을 만한 건 이런 대목 덕분인 거 같아요. 2026년 기준으로 비유럽권 성인 입장료는 32유로이고, 한국어를 지원하는 오디오 가이드는 6유로래요. 회화 위주로 보려면 드농관 2층에서 시작하고, (모나리자)를 본 다음에는 다빈치가 프랑스로 가져온 (성 안나와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도 놓치지 말라고 챙겨 주십니다. 그중에 제일 반가웠던 팁은 따로 있어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들어가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우고 간식도 챙기라는 조언이요. 이런 걸 알려 주는 미술책은 흔치 않아서 웃음이 났습니다.

내셔널 갤러리 장으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또 달라져요. 런던 시민이 가장 많이 모이는 트라팔가 광장에 국립 미술관이 있고, 1824년에 문을 연 뒤로 지금까지 무료입장 원칙을 지켜 왔다고 하더군요. 해마다 한 달씩 해외에 머무는 작가님에게 런던은 경비 부담을 덜어 준 "감사한 도시"였대요. 그 표현에서 여행 경비를 꼼꼼히 따져 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유럽의 다른 미술관보다 늦게 출발했다는 사연도 흥미로웠어요. 우피치는 1769년, 루브르는 1793년, 프라도는 1819년에 대중에게 문을 열었는데, 영국에는 제대로 된 미술관이 없어서 컨스터블이 한탄했대요. 그 뒤로 기증이 모였고, 정부가 수집가 앵거스테인의 소장품 38점을 사들였어요. 그의 집을 임시 미술관으로 쓰다가 트라팔가 광장으로 옮겼다고 하고요.


영국 국회 위원회는 "그림의 존재 가치는 수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고귀한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는데요. 앞의 대법관이 말한 30분과 나란히 놓고 보니, 이 미술관이 누구를 위해 문을 열어 두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붉은 벽 전시실에서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앞에 사람들이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는데, 그 뒷모습들이 유난히 편안해 보였어요.

맛보기로 하나 꼽자면 프라도 장 끝에 실린 [미술관 플러스 5]예요. 제목부터 "넌 슈퍼 터니? 난 아트숍 턴다"라서 보자마자 피식했습니다. 작가님은 시카고 미술관에서 무라카미 다카시의 판화를,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데이미언 허스트의 판화를 샀는데, 작품은 그 자리에서 들고 오지 않고 몇 달 뒤 집으로 배송된다고 하네요. 미술관에서 파는 거라 작품도 확실히 보증받는다고요.

도록도 값이 오른다니요.

2017년 베네치아에서 본 허스트의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들> 전시 도록을, 여행 중에 끌고 다니기 무거워서 포기하셨대요. 그런데 나중에 인터넷에 뜬 가격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뒤로는 웬만하면 도록을 사신다고 합니다. 짐 줄이려다 두고두고 아쉬워해 본 사람이라면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일 거 같아요. 책장에 형형색색 꽂힌 도록을 보면 부자가 된 기분이고 인테리어 효과도 꽤 있다는 말이 참 솔직해서 좋았어요.


같은 코너에 나오는 관람 요령도 오래 남을 거 같아요. 기대하던 작품 앞에 사람이 몰려 있으면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공간 전체를 보거나, 캔버스 옆면과 액자, 기법, 사인 같은 걸 차분하게 보라는 거예요. 작품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들도 10분 넘게 보는 경우는 드물다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됐고요. 관람을 마치고 빛이 잘 드는 곳에 앉아 일행과 그날의 베스트 작품을 하나씩 뽑아 본다는 방법은, 당장 가까운 미술관에서도 따라 해 볼 수 있겠더라고요.


에필로그에서 작가님은 작품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서, 관람을 마치고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작품이 없을 때가 있다고 털어놓으세요. 그래도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문득 그때 본 그림이 떠오르기도 한대요. 역풍을 만나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에 오히려 뜻밖의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사십 대 후반 직장인한테 괜히 따뜻하게 들렸습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는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미술관 전경과 전시실 사진, 명화 도판이 넉넉하게 실려 있어서 넘기는 맛이 있습니다. 장마다 첫머리에 위치와 개관 시간, 휴관일까지 정리돼 있어서, 언젠가 정말 항공권을 끊게 되면 가방에 넣어 가고 싶은 책이에요. 당장 떠날 계획이 없어도 책장에 꽂아 두고 한 장씩 펼쳐 보는 것만으로 미술관을 한 바퀴 돈 기분이 들고요. 미술 지식이 없어도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추석 연휴 마지막 토요일이라 송편으로 채운 배가 아직 든든하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조건은 이미 갖춘 셈이에요. 볕 좋은 가을날에 가까운 미술관 한 곳 골라서 30분만이라도 천천히 걸어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길잡이 한 권 만나서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어요.


직장인의 30분에도 문을 열어 주는 세계 여섯 미술관의 탄생 이야기부터 아트숍 쇼핑까지, 미술관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다정하게 알려 주는 미술관 사용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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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2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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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반 고흐 그림에는 산이 잘 안 보인다는 거, 혹시 알고 계셨어요?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도 연애소설 속 두 연인이 유럽 기차 창밖을 내다보다가 퀴즈 풀듯 맞혀낸 답으로요. 조정래 작가의 <서리꽃 2> 이야기예요.


1권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라 앞 권 서평 먼저 보고 오시면 편해요. 두 권짜리 소설을 1권만 읽고 멈추면 남의 연애를 절반만 엿들은 기분이잖아요. 제 오지랖이 그걸 못 참더라고요.

대학 동아리 '글밭'에서 이재이의 시에 윤소인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바꿔 그린 그림을 붙이면서 시작된 인연이죠. 그 두 사람이 5년 만에 다시 만난 게 1권이었다면, 2권은 윤소인의 요양을 위해 남도 장흥으로 내려가는 데서 열려요. '어머니 품 장흥'이라는 표지판을 먼저 알아본 건 윤소인이었어요. 이재이가 왜 하필 장흥을 골랐는지 떠올리며 '별이 있고, 바다가 있고, 숲이 있는 곳'이라고 되뇌는 대목이 있어요. 별이 제일 앞에 오는 게 저는 좋았어요. 1권의 그 별밤이 여기까지 따라온 느낌이 들어서요.


이재이라는 남자, 공부를 해도 너무 했더군요.

키조개 점심 한 끼를 먹이려고 책이며 인터넷이며 유튜브까지 뒤졌다고 하니까요. 편백숲 통나무집에 짐을 풀고, 바다를 '장흥이 준 첫 번째 선물'이라 부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연애를 이렇게 성실하게 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보림사 장면은 풍경이 먼저 들어와요. 연꽃 봉우리 같은 산들이 절을 빙 둘러싸고, 철조 비로자나불은 반쯤 뜬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다고 해요. 무슨 말을 건네려다 만 얼굴이라니, 그 앞에 서면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줄줄이 나올 거 같아요. 이재이는 기도를 빌어서 얻는 일로 여기지 않더군요. 자기 의지와 결의를 다지는 일이라고 하는데, 월요일 아침마다 이번 주도 한번 버텨보자고 마음먹는 직장인한테는 꽤 가깝게 들렸어요.


보림사 가는 길에 밤새 벚꽃이 피어 있어요. 윤소인은 벚꽃이 활짝 폈을 때보다 바람에 흩날릴 때가 더 좋다고 해요. 흐느낌 같고, 서러움 같대요. 이재이가 시로 써 보라고 하자 그 느낌을 통째로 오빠한테 선물할 테니 오빠가 쓰라며 건네요.

<서리꽃 2>에서 제일 특이하게 다가온 건 반 고흐가 자꾸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는 점이었어요. 보림사 찻집에는 스님이 사들였다는 모작이 걸려 있어요.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는 (해바라기)가 돈 벌어 주는 그림으로 붙어 있고요. 그걸 본 윤소인이 "수난일까요, 영광일까요?" 하고 묻는데, 웃음이 나면서도 대답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기념품 상점 앞에서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못 봐 아쉬워했던 (론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이 실물 크기 인쇄본으로 걸려 있어요. 그 크기가 보림사에 있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는 한 줄에서 장흥과 암스테르담이 한 줄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 현지 미술관을 직접 취재했다고 하던데, 기차 안에서 오가는 반 고흐 이야기가 유난히 촘촘한 게 그 덕인가 싶기도 해요.


제가 유독 천천히, 정독하듯 읽은 곳은 동백 숲이었어요. 땅바닥이 떨어진 꽃으로 온통 새빨갛게 덮인 걸 보고 이재이가 풀어놓는 말이 있어요. 동백은 꽃잎이 흩어지지 않고 송이째 뚝 떨어지는데, 떨어지면서 뒤집혀 하늘을 본다는 거예요.

"나무에서는 땅을 보고 피고, 땅에서는 하늘을 보고 피는 거야."

그래서 동백은 두 번 피는 꽃처럼 느껴진대요. 나무에서는 높낮이가 제각각이던 꽃들이 땅에서는 전부 똑같이 깔린다는 말도 덧붙여요. 1권부터 돈과 집안 이야기가 줄곧 두 사람을 따라다닌 걸 생각하면, 저한테는 그 말이 꽃 얘기로만 읽히지 않더라고요. 윤소인은 오빠가 동백을 '남도의 서러움이 서린 처연한 꽃'이라고 했던 말을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합니다.


두 번 피는 꽃이라니요.

그 서러운 꽃밭에서 두 사람이 벌이는 일은 또 의외로 명랑해요. 윤소인이 막대기로 빈터에 사람 키만 한 하트를 그리고, 이재이는 점퍼를 벗어 동백꽃을 쓸어 담아 옵니다. 동백 꽃말이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래요. 꽃이 모자라서 소인이는 가만히 있으라고 막는 이재이한테 윤소인이 그 꽃말을 고스란히 돌려줘요.

"어허, 동백꽃 꽃말이 뭔지 몰라?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허, 나 참. 알았어, 살살해."

이 두 줄에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더군요. 완성한 하트에서 서로 상대가 만든 쪽에 누워 손을 잡고 (그 겨울의 찻집)을 부르는 장면도 있어요. 제 나이쯤 되면 쑥스러워서 엄두도 못 낼 일인데 이상하게 부럽기만 했어요.


시인의 숲 산책길에는 (어머니)라는 시비가 서 있어요. 윤소인은 아침마다 그 앞에서 법당의 비로자나불께 기도할 때처럼 두 손을 모은다고 해요. 시에 '쓴 것만 알아 / 쓴 줄 모르는 어머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제 또래라면 이 구절에서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이 하나씩 있을 거 같아요. 그 옆의 이재이는 조금 다른 마음이에요. 시를 쓰던 사람이라서 자기는 그런 시를 써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깊어진다고 하거든요. 사랑하는 사람 옆에 서면 제 모자람부터 보이는 그 마음, 저는 알 것 같더라고요.


2권에서 가장 달라 보인 사람은 윤소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부터 보이던 사람이 뒤로 갈수록 판을 짜는 사람이 되더라고요. 유로스타 안에서 반 고흐가 첫 유화 습작에 물감을 끈적할 만큼 두껍게 발라 놓고 자신만만해했다는 편지 얘기를 꺼내요. 그러고는 형의 그림이 백 점 넘게 쌓였을 때 동생 테오가 한숨처럼 했을 말이 뭐였겠느냐고 두 남자한테 퀴즈를 내요. 이재이가 "형 정말 너무한다"라고 답하고 가이드가 "정답입니다" 하는 대목에서는 기차 한 칸이 통째로 웃는 것 같았어요. "빈 캔버스는 열정적인 화가를 두려워한다"는 편지를 꺼낼 때는 평생 반 고흐를 흠모해 온 화가 지망생다운 목소리가 나고요. 미술관이 한 해에 벌어들이는 돈 얘기가 나오자 "생전에 네덜란드가 도와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라고 차갑게 툭 던지는 모습도 좋았어요.


암스테르담 중앙역 인파 속에서 윤소인이 잠깐 안 보이는 소동도 있어요. 정작 본인은 그 별밤 그림 앞에 태평하게 서 있었고, 진땀을 닦은 두 남자는 윤 선생한테는 없던 일로 하자고 입을 맞춥니다. 짠하면서도 웃기더라고요. 좌석을 미리 잡아 두고 두툼한 화집까지 선물하는 가이드도 정이 가는 인물이었어요.

기차 안의 반 고흐와 테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꾸 1권이 겹쳐 보여요. 형은 그리고, 동생은 돈을 대고. 동생이 어떻게 해서든 돈을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형의 편지를 두고 '참 아름다운 조화'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그 위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이재이 얼굴이 슬쩍 포개지더라고요. 테오가 보낸 돈이 지금 돈으로 얼마냐는 질문에 가이드가 당황하자, 이재이가 휴대폰 속 '만능 해결사 이놈'한테 시켜 AI한테 물어보는 장면도 나와요. 억 단위 금액이 나오고요. 등단 56년 차 작가의 소설에서 AI가 튀어나오니 괜히 반갑더군요.


솔직히 읽는 내내 걸렸던 건 제 안의 월급쟁이 계산기였어요. 김이며 감태며 제일 좋은 걸로 달라는 이재이가 나와요. 불전함에 조용히 봉투를 넣는 이재이, 선물로 받은 화집 값을 헤어질 때 얹어 주겠다고 마음먹는 이재이도 나오고요. 그때마다 계산기가 저 혼자 돌아가더라고요. 그러다 "죄송하게는 생각하지 말어. 내가 좋아서 신나게 하는 일이니까"라는 말 앞에서 그 계산기가 슬그머니 꺼졌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에 영수증을 들이미는 건 촌스러운 일이니까요.

<서리꽃 2>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그래도 동백꽃 한 아름 쓸어 담은 이재이 점퍼만큼 무겁지는 않으니 걱정 마세요. 두 권을 나란히 꽂아 두면 반 고흐 그림 몇 점과 시비 몇 개, 남도 동백숲을 한꺼번에 들여놓는 셈이라 소장할 맛이 납니다. 작가가 아직도 원고지에 손으로 쓴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문장들이 서두르지 않는 느낌이 있어요. 소설에 나오는 그림을 옆에 띄워 놓고 읽으면 재미가 두 배일 거 같아요.


소설 속 장흥은 꽃 피는 봄이에요. 그런데 이재이는 보림사 가는 그 길을 두고 "봄보다는 가을이 훨씬 더 아름다울 거야"라고 해요. 9월 마지막 토요일, 막 가을 문턱을 넘은 지금 들으니 딱 맞춰 도착한 편지 같더라고요. 가을 타는 남자라는 말이 있던데 저는 요즘 가을보다 책을 더 타는 중인 거 같아요. 두 사람을 따라 장흥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다녀오고 나니 좋은 사랑 이야기 하나 만난 거 같아서 참 좋았습니다.


동백처럼 땅에서 한 번 더 피는 사랑, 장흥 동백숲에서 암스테르담의 별밤까지 이어지는 조정래의 첫 연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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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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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5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재이가 눈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장면으로 <서리꽃> 1권이 시작돼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열린 시화전에서 미대생 윤소인은 이재이의 시를 곱씹어 외웠어요. 그리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바꿔 그린 그림을 그 시에 붙여 주었죠. 그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유학을 떠났던 남자가 다시 그 사람 앞에 서게 되는 이야기예요. 조정래 작가가 등단 56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정면에 내세운 소설이라 더 궁금했는데, 첫 장면부터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어요.


시화전의 기억처럼 맑게 흘러가겠거니 했던 이야기는 (빨간 장미꽃 백 송이)에 이르러 무게가 확 달라집니다. 그림 그리는 일조차 이제는 사치가 되어 버렸다는 윤소인의 고백이 유난히 오래 남았어요. 집안이 무너지며 떠안은 5억 원가량의 빚을 5년 동안 갚았는데도 아직 절반이 남았다는 사정을 알고 나니, 그 고백이 투정이 아니라 체념처럼 들렸거든요. 물감보다 빚이 먼저인 하루하루가 어떤 무게일지, 숫자 몇 개만으로도 짐작이 가는 것 같아요. 서로 좋아하면 간단한 거라는 민태석의 말은 부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월급날마다 잔고부터 확인하는 입장이라, 사랑 앞에 돈이 먼저 막아서는 장면이 남 일 같지 않았어요.


읽는 내내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건 이재이의 가족이었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돈을 떠받들고 가난한 사람을 깔봐요. 그런 가족 앞에서 이재이가 "산도 높고 높은 산이었고, 바다도 깊고 깊은 바다였다"고 느끼는 대목에서는 읽는 저까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딸만 셋을 둔 탓에 후계자 자리가 흔들리는 형은 무엇이든 몇 배의 보상으로 계산해 내는 사람입니다. 얄밉다가도 회사에서 한 번쯤 마주쳤던 유능한 사람의 말투가 겹쳐서,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어요. 이재이가 하필 그런 형을 협상 상대로 고르는 이유도 수긍이 갔어요. 돈 앞에서 누구보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니까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은 부분은 (형과의 밀약) 첫머리였어요. "이 결의는 쉬웠다. 혼자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실행이 문제였다. 그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기획안은 밤새 혼자 쓸 수 있어도 결재는 혼자 받을 수 없는 직장 생활이 겹쳐 보였어요. 그래서 이 문장 앞에서 한참 머물렀습니다.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하다가 찬물을 들이켜는 이재이의 모습에서도 그 막막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어요.


아침에 <현대문명과 철학>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장면에도 공감이 갔어요. 인공지능과 철학을 두고 펼쳐지는 거창한 이야기들이 당장의 고민 앞에서는 한가한 잠꼬대처럼 느껴졌다고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한 날 서류가 한 줄도 안 읽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 활자 사이로 자꾸 윤소인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면, 사랑은 철학보다 힘이 센가 봅니다.


이어서 민태석과 통화하던 중에 '청춘사업'이라는 말이 오가는 대목에서는 잠깐 웃음이 났어요. 제 나이에 청춘사업이라면 건강검진 결과표의 빨간 글씨를 줄이는 일 정도일 텐데 말이죠. 그러다 친구에게 전해 들은 윤소인의 밭은기침 소식이 가슴에 바위처럼 얹히고, 이재이는 남편이라는 자리를 서둘러야겠다고 마음먹어요. 형과 어떤 약속을 주고받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작가의 말 (직업병의 행렬 속에서)도 그냥 넘기기 어려웠어요. 반 고흐의 그림을 취재수첩에 그려 가며 준비하다가 "지옥문 앞까지 갔다 온" 일을 겪었고, 지난해 9월 복부대동맥 수술대에 올랐다는 고백이 담겨 있어요. 팔순을 넘기고도 여전히 원고지에 손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이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가더군요. "소설에서 주제 찾기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라는 문장 덕분에 저도 읽는 내내 나름의 답을 찾아보게 됐어요. 출간 간담회에서 장편은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고 나니, <서리꽃> 두 권을 책장에 나란히 꽂아 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9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요즘 읽기에 잘 어울리는 책이에요. 사랑 이야기 앞에서 괜히 쑥스러워지는 나이가 됐지만,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걸어 보겠다는 이재이의 결심 앞에서는 오랜만에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더군요. 주말 저녁에는 찬물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2권을 이어서 펼쳐 볼까 합니다.


결심은 혼자 할 수 있어도 사랑을 지키는 일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눈 내리는 재회로 조용히 건네는 <서리꽃> 1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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