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5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재이가 눈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장면으로 <서리꽃> 1권이 시작돼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열린 시화전에서 미대생 윤소인은 이재이의 시를 곱씹어 외웠어요. 그리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바꿔 그린 그림을 그 시에 붙여 주었죠. 그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유학을 떠났던 남자가 다시 그 사람 앞에 서게 되는 이야기예요. 조정래 작가가 등단 56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정면에 내세운 소설이라 더 궁금했는데, 첫 장면부터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어요.


시화전의 기억처럼 맑게 흘러가겠거니 했던 이야기는 (빨간 장미꽃 백 송이)에 이르러 무게가 확 달라집니다. 그림 그리는 일조차 이제는 사치가 되어 버렸다는 윤소인의 고백이 유난히 오래 남았어요. 집안이 무너지며 떠안은 5억 원가량의 빚을 5년 동안 갚았는데도 아직 절반이 남았다는 사정을 알고 나니, 그 고백이 투정이 아니라 체념처럼 들렸거든요. 물감보다 빚이 먼저인 하루하루가 어떤 무게일지, 숫자 몇 개만으로도 짐작이 가는 것 같아요. 서로 좋아하면 간단한 거라는 민태석의 말은 부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월급날마다 잔고부터 확인하는 입장이라, 사랑 앞에 돈이 먼저 막아서는 장면이 남 일 같지 않았어요.


읽는 내내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건 이재이의 가족이었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돈을 떠받들고 가난한 사람을 깔봐요. 그런 가족 앞에서 이재이가 "산도 높고 높은 산이었고, 바다도 깊고 깊은 바다였다"고 느끼는 대목에서는 읽는 저까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딸만 셋을 둔 탓에 후계자 자리가 흔들리는 형은 무엇이든 몇 배의 보상으로 계산해 내는 사람입니다. 얄밉다가도 회사에서 한 번쯤 마주쳤던 유능한 사람의 말투가 겹쳐서,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어요. 이재이가 하필 그런 형을 협상 상대로 고르는 이유도 수긍이 갔어요. 돈 앞에서 누구보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니까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은 부분은 (형과의 밀약) 첫머리였어요. "이 결의는 쉬웠다. 혼자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실행이 문제였다. 그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기획안은 밤새 혼자 쓸 수 있어도 결재는 혼자 받을 수 없는 직장 생활이 겹쳐 보였어요. 그래서 이 문장 앞에서 한참 머물렀습니다.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하다가 찬물을 들이켜는 이재이의 모습에서도 그 막막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어요.


아침에 <현대문명과 철학>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장면에도 공감이 갔어요. 인공지능과 철학을 두고 펼쳐지는 거창한 이야기들이 당장의 고민 앞에서는 한가한 잠꼬대처럼 느껴졌다고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한 날 서류가 한 줄도 안 읽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 활자 사이로 자꾸 윤소인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면, 사랑은 철학보다 힘이 센가 봅니다.


이어서 민태석과 통화하던 중에 '청춘사업'이라는 말이 오가는 대목에서는 잠깐 웃음이 났어요. 제 나이에 청춘사업이라면 건강검진 결과표의 빨간 글씨를 줄이는 일 정도일 텐데 말이죠. 그러다 친구에게 전해 들은 윤소인의 밭은기침 소식이 가슴에 바위처럼 얹히고, 이재이는 남편이라는 자리를 서둘러야겠다고 마음먹어요. 형과 어떤 약속을 주고받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작가의 말 (직업병의 행렬 속에서)도 그냥 넘기기 어려웠어요. 반 고흐의 그림을 취재수첩에 그려 가며 준비하다가 "지옥문 앞까지 갔다 온" 일을 겪었고, 지난해 9월 복부대동맥 수술대에 올랐다는 고백이 담겨 있어요. 팔순을 넘기고도 여전히 원고지에 손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이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가더군요. "소설에서 주제 찾기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라는 문장 덕분에 저도 읽는 내내 나름의 답을 찾아보게 됐어요. 출간 간담회에서 장편은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고 나니, <서리꽃> 두 권을 책장에 나란히 꽂아 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9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요즘 읽기에 잘 어울리는 책이에요. 사랑 이야기 앞에서 괜히 쑥스러워지는 나이가 됐지만,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걸어 보겠다는 이재이의 결심 앞에서는 오랜만에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더군요. 주말 저녁에는 찬물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2권을 이어서 펼쳐 볼까 합니다.


결심은 혼자 할 수 있어도 사랑을 지키는 일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눈 내리는 재회로 조용히 건네는 <서리꽃> 1권이었어요.


#서리꽃 #서리꽃1권 #조정래 #조정래신작 #조정래장편소설 #해냄출판사 #한국소설 #장편소설 #사랑소설 #신간소설 #소설추천 #책추천 #가을책추천 #서평 #북리뷰 #독서기록 #책읽는직장인 #BOOKU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