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박용남 편역 / 리미트리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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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명함이 안 통하는 동굴에서 칼을 거둔 사내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박용남 편역


목마 뱃속은 캄캄했을 거예요. 그 어둠 밖에서 누군가 이름을 부릅니다. 십 년 동안 듣지 못한 아내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요.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다들 안다고 생각하는데,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는 바로 그 목마 속의 밤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더군요.

헬레네가 목마를 세 바퀴 돌면서 안에 든 수령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메넬라오스와 디오메데스는 뛰쳐나가려 하고, 안티클로스는 대답하려 해요. 오디세우스는 그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습니다. "그 손 하나가 그 안의 모두를 살렸다"는 문장까지 오면, 읽는 쪽도 괜히 따라서 숨을 고르게 되는 거 같아요.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9월 끝자락의 토요일이네요. 긴 항해 이야기를 꺼내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외눈박이 거인이나 세이렌 같은 장면은 조각조각 알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이어서 따라가 본 적은 없었어요.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가 특이한 건 바로 이 순서 때문이에요. 원래 (오디세이아)는 이야기 한가운데서 시작하고, 유명한 장면들은 주인공이 남의 궁정에서 들려주는 회상으로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편역자 박용남 님은 그걸 목마의 밤부터 시간 순서대로 다시 늘어놓았습니다. 회상도 액자도 없이, 한 방향으로.


그렇다고 줄거리만 추려 놓은 느낌은 아니었어요. 장마다 첫머리에 "원전 제9권 105~566행" 같은 표기가 붙어 있어서, 지금 읽는 장면이 호메로스의 어느 대목에서 왔는지 바로 보이거든요. 부록 원전 대조표를 펼쳐 보면 A.T. Murray의 산문역을 저본으로 행 번호를 맞췄고, 원전의 1인칭 회상은 3인칭으로 다시 풀었다고 밝혀 두었더라고요. 이런 걸 보고 나니 마음 놓고 따라가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순서를 바꿔 놓으니 생기는 재미도 있어요. 1장에서 허리 굽은 노인 아이깁티오스가 "오디세우스가 떠난 뒤로 우리는 회의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소"라고 묻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몇 장 뒤에 나오는 키클롭스들은 회의도 법도 없이, 각자 제 동굴에서 제 처자식에게만 법이 되는 족속으로 그려지거든요. 서로를 찾지 않는 족속이요. 주인 없는 섬과 법 없는 동굴이 나란히 놓이니까 두 장면이 자꾸 겹쳐 보이더라고요.

인물 이야기를 하자면 페넬로페가 먼저 떠오릅니다. 구혼자 백여 명이 날마다 홀에 눌러앉아 남의 소와 양을 잡고 포도주를 퍼마셔요. 거절하면 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승낙하면 남편을 제 손으로 장사 지내는 셈이 되죠.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길을 찾아냈어요.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 놓고, 낮에 짠 베를 밤마다 횃불 곁에서 풀었습니다. 삼 년을요.


"한 사람의 평생 살림이 남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살림을 꾸려 온 중년의 가장 입장에서는 이 문장이 좀 서늘하게 읽혔어요.

텔레마코스도 눈에 밟힙니다. 아버지가 떠날 때 갓난아이였으니 이제 갓 스물이에요. 문간에 손님이 서 있는데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홀에서, 이 청년 혼자 일어나 손님의 오른손을 잡고 창을 받아 들어요. 먼저 드시고 용건은 그다음에 말씀하시라면서요. 그런데 그 손님 앞에서 털어놓는 말이 이렇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그분의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릅니다." 제 또래 아버지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괜히 마음이 쓰일 것 같더라고요.


그 청년이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이 집의 권한은 제게 있으니까요"라고 말하고, 구혼자들의 조롱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아요. 아까 온 손님이 누구였느냐는 물음에는 타포스의 멘테스라고만 대답하고요. 책은 그 모습을 두고 "그는 하루 만에 감추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고 적어 두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가는 첫걸음을 이 한 줄로 보여 주는 게 좋았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키클롭스의 동굴이었습니다. 너희는 누구냐는 물음에 오디세우스가 아가멤논의 이름을 대고, 탄원자라는 처지를 말하고, 제우스를 들먹여요. 사람의 도시였다면 그중 어느 하나로도 문이 열렸을 텐데, 책은 이렇게 적습니다. "이 동굴에서는 셋 다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회사 명함이 한 장도 통하지 않는 자리에 앉아 본 사람이라면 남 얘기로 들리지 않을 문장이에요.

영웅이라고 늘 현명한 것도 아니더군요. 주인 없는 동굴에서 부하들은 치즈랑 새끼 양만 챙겨서 당장 배로 가자고 매달리는데, 오디세우스는 그 주인을 직접 보고 싶었고 손님의 선물도 받아 보고 싶었답니다. "호기심과 욕심이 절반씩이었다." 훗날의 오디세우스가 그편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인정하는 대목도 있어요. 이런 빈틈이 있어야 저 같은 보통 사람도 정이 가는 법이죠.


그 뒤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솔직히 저한테는 좀 셌습니다. 묘사가 꽤 생생한 편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 칼을 잡았다가 도로 거두는 장면이 있어요. 괴물을 죽이면 문을 막은 바위를 치울 자가 없으니까요. "문제는 힘이 아니었다. 문이었다."


프롤로그 해설에서 읽은 "좋은 계략은 머리에서 나오고, 계략의 완성은 참는 데서 온다"는 문장이 여기서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목마 속에서 남의 입을 막던 그 손이, 동굴에서는 제 칼을 거두는 손이 되는 셈이라서요.

맛보기로 한 장면만 살짝 꺼내 볼게요. 눈먼 괴물이 문간에 버티고 앉아서 나가는 양들의 등을 손으로 더듬어요. 사람들은 숫양 세 마리를 한 묶음으로 엮어서 가운데 양의 배 밑에 하나씩 매달려 있고요. "등만 더듬었다. 배 밑은 만지지 않았다. 눈을 잃은 자의 손은 보이던 시절의 버릇대로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나가는 으뜸 숫양에게 괴물이 말을 겁니다. 착한 숫양아, 어째서 오늘은 네가 맨 뒤냐. 그 배 밑에 누가 매달려 있는지 아는 독자로서는 한 줄 한 줄이 조마조마하더라고요.


숨소리 하나가 목숨이었다는 말 그대로.

오디세우스가 댄 "아무도아니"라는 이상한 이름이 이 동굴에서 어떤 쓸모를 갖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는 게 훨씬 재밌을 거예요.

장마다 끝에 붙은 해설도 이 책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부분이었어요. 프롤로그 해설의 첫 줄은 "트로이아는 함락당하지 않았다. 스스로 열었다."입니다. 목마를 도끼로 쪼개자던 사람들의 손을 멈추게 한 건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러니까 그들의 미덕이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져요. "경계는 위협 앞에서 일어서고 호의 앞에서 눕는다"는 문장을 읽는데, 거절하기 아까웠던 제안 몇 개가 머릿속을 스쳐 가더라고요. 직장 생활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제일 정이 간 인물은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였어요. 주인이 떠난 사이에 여주인도 모르게 농장을 손수 지어 놓았고, 구혼자들의 잔치에 날마다 가장 좋은 놈을 골라 보내면서도 남은 수퇘지가 삼백육십 마리라는 걸 정확히 세고 있어요. "줄어드는 쪽의 장부는 이렇게 정확했다." 월말에 숫자 맞춰 본 적 있는 직장인이라면 웃프게 고개를 끄덕일 문장 같습니다.

그는 거지 차림으로 찾아온 낯선 노인에게 자기가 덮고 자던 염소 가죽을 깔아 줘요. 폭풍 칠 때 입으려고 아껴 둔 두꺼운 겉옷까지 덮어 주고, 자기는 투창을 들고 바위 아래로 나가 수퇘지들 곁에 눕습니다. "짐이 되겠다는 사람을 붙드는 데에 조건이 하나도 붙지 않았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저까지 조금은 착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두 사람이 긴 밤마다 서로의 고난을 이야기하는 장면도 좋았고요. "요즘 밤은 놀랍도록 길다오" 하는 돼지치기의 말이, 해가 부쩍 짧아진 요즘과 겹쳐서 들리더군요. 거지가 오디세우스는 꼭 돌아온다고 맹세하는 대목에 붙은 "이보다 참된 맹세도 이보다 새빨간 시치미도 없었다"는 문장은 참 얄밉게 잘 쓴 것 같아요.


굳이 걸렸던 걸 하나 꼽자면 낯선 이름들이에요. 안티노오스, 에우리마코스, 아이깁티오스, 할리테르세스까지 나오니까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좀 헷갈렸어요. 그래도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흐르다 보니 금방 자리가 잡히더라고요.

두께는 보통 책 한 권 정도라서, 스무 해 항해를 통째로 담았는데도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어요. 오디세우스가 짊어진 짐에 비하면 이 정도는 깃털이죠.


소장 가치로 보면 부록의 원전 대조표가 든든합니다. 나중에 완역본에 도전해 볼 마음이 생기면 옆에 펼쳐 두고 길잡이로 쓰기에 딱 좋을 것 같거든요.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덕분에 이제 누가 (오디세이아) 읽어 봤냐고 물으면 쭈뼛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선한 가을 토요일, 목마 이야기로 시작했더니 저도 말(馬)이 많아졌네요. 이십 년 걸려 집에 돌아가는 사람을 따라가고 나니, 오늘 저녁은 식구들이랑 밥 한 끼 제대로 먹고 싶어집니다. 좋은 책 만나서 기분 좋은 주말이에요.


스무 해 귀향길을 목마의 밤부터 차례대로 따라가니, 참고 버티는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내 얘기처럼 읽히는 편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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