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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 - 세계 6개 미술관에서 처음 시작하는 그림 여행
박혜성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직장인의 30분에도 미술관은 열려 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 서평

"미술을 애호하고 더 깊이 알고자 하지만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온종일이 아닌 30분이나 한 시간의 여가를 이용해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857년, 내셔널 갤러리를 공해가 덜한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영국의 존 듀크 콜리지 대법관이 이렇게 말하며 지금 자리를 지켰다고 하더라고요.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계층이라니, 딱 제 얘기 같았어요.
네, 여기 한 명 있습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에는 이렇게 백 년도 더 된 누군가의 말이 지금의 직장인한테 불쑥 말을 거는 순간이 곳곳에 숨어 있어요. 화가이자 아트 스토리텔러인 박혜성 작가가 2018년에 낸 <어쨌든 미술은 재밌다>의 후속작이고, 8년 만의 신작이라고 합니다. 전작이 그림과 화가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 그림을 품은 공간, 미술관 자체를 파고드는데요. 작가님이 프롤로그에서 이 책을 "미술관 사용 설명서라고 할까"라고 소개하시는데, 다 읽고 나니 그보다 잘 맞는 이름도 없는 거 같아요. 전작을 안 읽었어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내셔널 갤러리, 우피치, 프라도, 뉴욕 현대 미술관. 이름만 들어도 항공권 검색창을 열고 싶어지는 여섯 곳이 한 권에 다 들어 있어요. 재미있는 건 순서입니다. 장마다 [entrance]라는 이름으로 그 미술관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부터 들려주고, 그다음에 작품 이야기가 이어지고, 끝에는 [미술관 플러스]에서 미술관 바깥 이야기까지 챙겨 줘요. 입구로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나오는 동선을 책이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작가님이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사연도 좋았어요. 오래전 단체 여행으로 해외 미술관을 몇 번 찾았는데, 작품을 급하게 훑고 지나가는 관람이라 늘 갈증만 남았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다 막내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양화를 전공한 남편분과 함께 2014년부터 해마다 한 달씩 미술관 여행을 떠나게 됐대요. 막내를 대학 보내고 나서야 묵혀 둔 꿈을 꺼내는 그 순서가, 이 나이쯤 되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작가님이 옛 단체 관람을 두고 쓴 이 표현 하나로 패키지 여행의 추억이 다 정리되는 거 같았어요.
루브르 장에서는 이 유명한 건물이 처음엔 요새였다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12세기 말 노르만인의 공격을 막으려고 지은 요새가 감옥, 병기창, 왕실 금고 보관소를 거쳐 왕궁이 됐대요.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떠난 뒤로는 작업장이나 숙소로 밀려났다가, 프랑스 대혁명을 지나 1793년에야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한자리에서 직업을 이렇게 여러 번 바꾼 건물이라니, 이직 이력서로 치면 꽤 화려한 편이죠. 연표에 약한 편이라 왕 이름과 연도가 줄줄이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잠깐 헤맸어요. 그래도 옆에 실린 1380년 무렵 왕궁 그림과 그랑 갤러리 사진을 따라가다 보니 금방 길이 잡혔습니다.

제가 유난히 천천히 읽었던 대목은 유리 피라미드 이야기예요. 1989년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이 피라미드는 당시 여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예산이 동결돼 무산될 뻔했대요. 그런데 미테랑 대통령이 10년에 걸쳐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고, 지금은 에펠탑에 버금가는 파리의 랜드마크가 됐다고 하더군요. 회사에서도 처음 올렸을 때 온갖 소리를 듣던 기획이 몇 년 지나면 간판 사업이 돼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 기획을 끝까지 붙들고 있던 사람들 얼굴이 괜히 떠올랐어요.
이 책이 설명서라는 말을 들을 만한 건 이런 대목 덕분인 거 같아요. 2026년 기준으로 비유럽권 성인 입장료는 32유로이고, 한국어를 지원하는 오디오 가이드는 6유로래요. 회화 위주로 보려면 드농관 2층에서 시작하고, (모나리자)를 본 다음에는 다빈치가 프랑스로 가져온 (성 안나와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도 놓치지 말라고 챙겨 주십니다. 그중에 제일 반가웠던 팁은 따로 있어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들어가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우고 간식도 챙기라는 조언이요. 이런 걸 알려 주는 미술책은 흔치 않아서 웃음이 났습니다.
내셔널 갤러리 장으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또 달라져요. 런던 시민이 가장 많이 모이는 트라팔가 광장에 국립 미술관이 있고, 1824년에 문을 연 뒤로 지금까지 무료입장 원칙을 지켜 왔다고 하더군요. 해마다 한 달씩 해외에 머무는 작가님에게 런던은 경비 부담을 덜어 준 "감사한 도시"였대요. 그 표현에서 여행 경비를 꼼꼼히 따져 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유럽의 다른 미술관보다 늦게 출발했다는 사연도 흥미로웠어요. 우피치는 1769년, 루브르는 1793년, 프라도는 1819년에 대중에게 문을 열었는데, 영국에는 제대로 된 미술관이 없어서 컨스터블이 한탄했대요. 그 뒤로 기증이 모였고, 정부가 수집가 앵거스테인의 소장품 38점을 사들였어요. 그의 집을 임시 미술관으로 쓰다가 트라팔가 광장으로 옮겼다고 하고요.

영국 국회 위원회는 "그림의 존재 가치는 수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고귀한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는데요. 앞의 대법관이 말한 30분과 나란히 놓고 보니, 이 미술관이 누구를 위해 문을 열어 두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붉은 벽 전시실에서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앞에 사람들이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는데, 그 뒷모습들이 유난히 편안해 보였어요.
맛보기로 하나 꼽자면 프라도 장 끝에 실린 [미술관 플러스 5]예요. 제목부터 "넌 슈퍼 터니? 난 아트숍 턴다"라서 보자마자 피식했습니다. 작가님은 시카고 미술관에서 무라카미 다카시의 판화를,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데이미언 허스트의 판화를 샀는데, 작품은 그 자리에서 들고 오지 않고 몇 달 뒤 집으로 배송된다고 하네요. 미술관에서 파는 거라 작품도 확실히 보증받는다고요.
도록도 값이 오른다니요.
2017년 베네치아에서 본 허스트의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들> 전시 도록을, 여행 중에 끌고 다니기 무거워서 포기하셨대요. 그런데 나중에 인터넷에 뜬 가격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뒤로는 웬만하면 도록을 사신다고 합니다. 짐 줄이려다 두고두고 아쉬워해 본 사람이라면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일 거 같아요. 책장에 형형색색 꽂힌 도록을 보면 부자가 된 기분이고 인테리어 효과도 꽤 있다는 말이 참 솔직해서 좋았어요.

같은 코너에 나오는 관람 요령도 오래 남을 거 같아요. 기대하던 작품 앞에 사람이 몰려 있으면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공간 전체를 보거나, 캔버스 옆면과 액자, 기법, 사인 같은 걸 차분하게 보라는 거예요. 작품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들도 10분 넘게 보는 경우는 드물다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됐고요. 관람을 마치고 빛이 잘 드는 곳에 앉아 일행과 그날의 베스트 작품을 하나씩 뽑아 본다는 방법은, 당장 가까운 미술관에서도 따라 해 볼 수 있겠더라고요.
에필로그에서 작가님은 작품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서, 관람을 마치고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작품이 없을 때가 있다고 털어놓으세요. 그래도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문득 그때 본 그림이 떠오르기도 한대요. 역풍을 만나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에 오히려 뜻밖의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사십 대 후반 직장인한테 괜히 따뜻하게 들렸습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는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미술관 전경과 전시실 사진, 명화 도판이 넉넉하게 실려 있어서 넘기는 맛이 있습니다. 장마다 첫머리에 위치와 개관 시간, 휴관일까지 정리돼 있어서, 언젠가 정말 항공권을 끊게 되면 가방에 넣어 가고 싶은 책이에요. 당장 떠날 계획이 없어도 책장에 꽂아 두고 한 장씩 펼쳐 보는 것만으로 미술관을 한 바퀴 돈 기분이 들고요. 미술 지식이 없어도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추석 연휴 마지막 토요일이라 송편으로 채운 배가 아직 든든하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조건은 이미 갖춘 셈이에요. 볕 좋은 가을날에 가까운 미술관 한 곳 골라서 30분만이라도 천천히 걸어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길잡이 한 권 만나서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어요.
직장인의 30분에도 문을 열어 주는 세계 여섯 미술관의 탄생 이야기부터 아트숍 쇼핑까지, 미술관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다정하게 알려 주는 미술관 사용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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