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2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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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반 고흐 그림에는 산이 잘 안 보인다는 거, 혹시 알고 계셨어요?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도 연애소설 속 두 연인이 유럽 기차 창밖을 내다보다가 퀴즈 풀듯 맞혀낸 답으로요. 조정래 작가의 <서리꽃 2> 이야기예요.


1권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라 앞 권 서평 먼저 보고 오시면 편해요. 두 권짜리 소설을 1권만 읽고 멈추면 남의 연애를 절반만 엿들은 기분이잖아요. 제 오지랖이 그걸 못 참더라고요.

대학 동아리 '글밭'에서 이재이의 시에 윤소인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바꿔 그린 그림을 붙이면서 시작된 인연이죠. 그 두 사람이 5년 만에 다시 만난 게 1권이었다면, 2권은 윤소인의 요양을 위해 남도 장흥으로 내려가는 데서 열려요. '어머니 품 장흥'이라는 표지판을 먼저 알아본 건 윤소인이었어요. 이재이가 왜 하필 장흥을 골랐는지 떠올리며 '별이 있고, 바다가 있고, 숲이 있는 곳'이라고 되뇌는 대목이 있어요. 별이 제일 앞에 오는 게 저는 좋았어요. 1권의 그 별밤이 여기까지 따라온 느낌이 들어서요.


이재이라는 남자, 공부를 해도 너무 했더군요.

키조개 점심 한 끼를 먹이려고 책이며 인터넷이며 유튜브까지 뒤졌다고 하니까요. 편백숲 통나무집에 짐을 풀고, 바다를 '장흥이 준 첫 번째 선물'이라 부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연애를 이렇게 성실하게 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보림사 장면은 풍경이 먼저 들어와요. 연꽃 봉우리 같은 산들이 절을 빙 둘러싸고, 철조 비로자나불은 반쯤 뜬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다고 해요. 무슨 말을 건네려다 만 얼굴이라니, 그 앞에 서면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줄줄이 나올 거 같아요. 이재이는 기도를 빌어서 얻는 일로 여기지 않더군요. 자기 의지와 결의를 다지는 일이라고 하는데, 월요일 아침마다 이번 주도 한번 버텨보자고 마음먹는 직장인한테는 꽤 가깝게 들렸어요.


보림사 가는 길에 밤새 벚꽃이 피어 있어요. 윤소인은 벚꽃이 활짝 폈을 때보다 바람에 흩날릴 때가 더 좋다고 해요. 흐느낌 같고, 서러움 같대요. 이재이가 시로 써 보라고 하자 그 느낌을 통째로 오빠한테 선물할 테니 오빠가 쓰라며 건네요.

<서리꽃 2>에서 제일 특이하게 다가온 건 반 고흐가 자꾸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는 점이었어요. 보림사 찻집에는 스님이 사들였다는 모작이 걸려 있어요.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는 (해바라기)가 돈 벌어 주는 그림으로 붙어 있고요. 그걸 본 윤소인이 "수난일까요, 영광일까요?" 하고 묻는데, 웃음이 나면서도 대답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기념품 상점 앞에서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못 봐 아쉬워했던 (론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이 실물 크기 인쇄본으로 걸려 있어요. 그 크기가 보림사에 있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는 한 줄에서 장흥과 암스테르담이 한 줄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 현지 미술관을 직접 취재했다고 하던데, 기차 안에서 오가는 반 고흐 이야기가 유난히 촘촘한 게 그 덕인가 싶기도 해요.


제가 유독 천천히, 정독하듯 읽은 곳은 동백 숲이었어요. 땅바닥이 떨어진 꽃으로 온통 새빨갛게 덮인 걸 보고 이재이가 풀어놓는 말이 있어요. 동백은 꽃잎이 흩어지지 않고 송이째 뚝 떨어지는데, 떨어지면서 뒤집혀 하늘을 본다는 거예요.

"나무에서는 땅을 보고 피고, 땅에서는 하늘을 보고 피는 거야."

그래서 동백은 두 번 피는 꽃처럼 느껴진대요. 나무에서는 높낮이가 제각각이던 꽃들이 땅에서는 전부 똑같이 깔린다는 말도 덧붙여요. 1권부터 돈과 집안 이야기가 줄곧 두 사람을 따라다닌 걸 생각하면, 저한테는 그 말이 꽃 얘기로만 읽히지 않더라고요. 윤소인은 오빠가 동백을 '남도의 서러움이 서린 처연한 꽃'이라고 했던 말을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합니다.


두 번 피는 꽃이라니요.

그 서러운 꽃밭에서 두 사람이 벌이는 일은 또 의외로 명랑해요. 윤소인이 막대기로 빈터에 사람 키만 한 하트를 그리고, 이재이는 점퍼를 벗어 동백꽃을 쓸어 담아 옵니다. 동백 꽃말이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래요. 꽃이 모자라서 소인이는 가만히 있으라고 막는 이재이한테 윤소인이 그 꽃말을 고스란히 돌려줘요.

"어허, 동백꽃 꽃말이 뭔지 몰라?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허, 나 참. 알았어, 살살해."

이 두 줄에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더군요. 완성한 하트에서 서로 상대가 만든 쪽에 누워 손을 잡고 (그 겨울의 찻집)을 부르는 장면도 있어요. 제 나이쯤 되면 쑥스러워서 엄두도 못 낼 일인데 이상하게 부럽기만 했어요.


시인의 숲 산책길에는 (어머니)라는 시비가 서 있어요. 윤소인은 아침마다 그 앞에서 법당의 비로자나불께 기도할 때처럼 두 손을 모은다고 해요. 시에 '쓴 것만 알아 / 쓴 줄 모르는 어머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제 또래라면 이 구절에서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이 하나씩 있을 거 같아요. 그 옆의 이재이는 조금 다른 마음이에요. 시를 쓰던 사람이라서 자기는 그런 시를 써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깊어진다고 하거든요. 사랑하는 사람 옆에 서면 제 모자람부터 보이는 그 마음, 저는 알 것 같더라고요.


2권에서 가장 달라 보인 사람은 윤소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부터 보이던 사람이 뒤로 갈수록 판을 짜는 사람이 되더라고요. 유로스타 안에서 반 고흐가 첫 유화 습작에 물감을 끈적할 만큼 두껍게 발라 놓고 자신만만해했다는 편지 얘기를 꺼내요. 그러고는 형의 그림이 백 점 넘게 쌓였을 때 동생 테오가 한숨처럼 했을 말이 뭐였겠느냐고 두 남자한테 퀴즈를 내요. 이재이가 "형 정말 너무한다"라고 답하고 가이드가 "정답입니다" 하는 대목에서는 기차 한 칸이 통째로 웃는 것 같았어요. "빈 캔버스는 열정적인 화가를 두려워한다"는 편지를 꺼낼 때는 평생 반 고흐를 흠모해 온 화가 지망생다운 목소리가 나고요. 미술관이 한 해에 벌어들이는 돈 얘기가 나오자 "생전에 네덜란드가 도와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라고 차갑게 툭 던지는 모습도 좋았어요.


암스테르담 중앙역 인파 속에서 윤소인이 잠깐 안 보이는 소동도 있어요. 정작 본인은 그 별밤 그림 앞에 태평하게 서 있었고, 진땀을 닦은 두 남자는 윤 선생한테는 없던 일로 하자고 입을 맞춥니다. 짠하면서도 웃기더라고요. 좌석을 미리 잡아 두고 두툼한 화집까지 선물하는 가이드도 정이 가는 인물이었어요.

기차 안의 반 고흐와 테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꾸 1권이 겹쳐 보여요. 형은 그리고, 동생은 돈을 대고. 동생이 어떻게 해서든 돈을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형의 편지를 두고 '참 아름다운 조화'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그 위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이재이 얼굴이 슬쩍 포개지더라고요. 테오가 보낸 돈이 지금 돈으로 얼마냐는 질문에 가이드가 당황하자, 이재이가 휴대폰 속 '만능 해결사 이놈'한테 시켜 AI한테 물어보는 장면도 나와요. 억 단위 금액이 나오고요. 등단 56년 차 작가의 소설에서 AI가 튀어나오니 괜히 반갑더군요.


솔직히 읽는 내내 걸렸던 건 제 안의 월급쟁이 계산기였어요. 김이며 감태며 제일 좋은 걸로 달라는 이재이가 나와요. 불전함에 조용히 봉투를 넣는 이재이, 선물로 받은 화집 값을 헤어질 때 얹어 주겠다고 마음먹는 이재이도 나오고요. 그때마다 계산기가 저 혼자 돌아가더라고요. 그러다 "죄송하게는 생각하지 말어. 내가 좋아서 신나게 하는 일이니까"라는 말 앞에서 그 계산기가 슬그머니 꺼졌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에 영수증을 들이미는 건 촌스러운 일이니까요.

<서리꽃 2>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그래도 동백꽃 한 아름 쓸어 담은 이재이 점퍼만큼 무겁지는 않으니 걱정 마세요. 두 권을 나란히 꽂아 두면 반 고흐 그림 몇 점과 시비 몇 개, 남도 동백숲을 한꺼번에 들여놓는 셈이라 소장할 맛이 납니다. 작가가 아직도 원고지에 손으로 쓴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문장들이 서두르지 않는 느낌이 있어요. 소설에 나오는 그림을 옆에 띄워 놓고 읽으면 재미가 두 배일 거 같아요.


소설 속 장흥은 꽃 피는 봄이에요. 그런데 이재이는 보림사 가는 그 길을 두고 "봄보다는 가을이 훨씬 더 아름다울 거야"라고 해요. 9월 마지막 토요일, 막 가을 문턱을 넘은 지금 들으니 딱 맞춰 도착한 편지 같더라고요. 가을 타는 남자라는 말이 있던데 저는 요즘 가을보다 책을 더 타는 중인 거 같아요. 두 사람을 따라 장흥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다녀오고 나니 좋은 사랑 이야기 하나 만난 거 같아서 참 좋았습니다.


동백처럼 땅에서 한 번 더 피는 사랑, 장흥 동백숲에서 암스테르담의 별밤까지 이어지는 조정래의 첫 연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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