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맛
손미주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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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카레 한 솥에 첫 출근이, 갈치 한 토막에 할머니가 담긴 음식 에세이 <기억의 맛>


노란 표지 위에 한 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카레라이스, 함박스테이크, 떡볶이, 주먹밥, 아이스크림 파르페에 거품 소복한 맥주 한 잔까지요. 표지만 보고 배가 고파지는 책은 참 오랜만인 거 같아요.

제목은 <기억의 맛>입니다. 요즘 제 기억력이 좀 맛이 간 상태라 제목부터 살짝 찔리더라고요.

막상 펼쳐 보면 맛집 안내서나 레시피 모음과는 결이 꽤 다릅니다. 한 사람이 살면서 삼켜 온 끼니를 하나씩 꺼내 놓고, 그 음식이 언제부터 어떤 사연으로 우리 식탁까지 왔는지를 쫓아가는 책이더군요.


재미있는 건 꼭지마다 이야기가 두 겹으로 들어 있다는 점이에요. 앞쪽에는 손미주 작가의 아주 사적인 기억이 있고, 뒤쪽에는 '메뉴판 비하인드'라는 코너가 붙어서 그 음식이 걸어온 내력을 풀어 줍니다. 할머니 부엌 얘기에 푹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일본 해군 급식이나 조선시대 문헌 얘기를 듣고 있는 식이죠. 처음엔 넘어가는 게 조금 낯설었는데, 몇 꼭지 지나고 나니 이 리듬이 은근히 기다려졌습니다.


에세이 한 편에 역사 한 토막이 덤으로 따라오는 셈이에요.

첫 꼭지 (시작의 맛, 카레)는 발령을 받고 자취를 시작한 첫날 밤에서 출발해요. 부모님이 사 주신 살림살이를 들여놨는데도 원룸은 텅 비어 보이고, 그토록 바라던 자유인데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리고 어깨가 무거웠다고 합니다. 전세금은 매달 나눠서 엄마에게 부치기로 하고, 관리비랑 생활비를 떼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남는 돈이 생각보다 적었다는 대목에서는 제 신입 시절 통장이 겹쳐 보였어요. 월급날 계산기 한 번 안 두드려 본 직장인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어요.


할 줄 아는 요리는 라면, 계란 후라이, 된장찌개 정도. 그래도 첫 끼만큼은 제 손으로 해 먹겠다며 마트로 가는데,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그래야만 하니까." 이 짧은 문장이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어요. 감자 세 개, 당근 한 개, 큰 양파 한 개를 썰어 넣었더니 혼자 사는 이십 대 여자가 먹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이 돼 버렸고, 결국 점심도 저녁도 다음 날 아침도 카레였다고 해요. 그렇게 꾸역꾸역 삼킨 카레만큼 통장 잔고가 불어나는 게 안심이 됐다는 고백에서는 웃다가도 마음 한쪽이 찡하더라고요.


"내게 카레는 시작의 맛이다. 초년생의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맛.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던 어리숙한 신규 교사의 눈물 맛."

교사가 아니어도 첫 출근을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아들을 말 같아요. 지금은 워킹맘이 되어 아이들 입맛에 맞춰 고기 반, 채소 반으로 끓인다는데, 둘째가 "엄마, 또 카레야?" 하고 투정 부리는 장면까지 이어지니 한 사람의 세월이 카레 한 솥에 다 담긴 느낌이 들더군요.

메뉴판 비하인드로 넘어가면 맛이 확 달라집니다. 일본에서 카레라이스가 국민 음식이 된 데는 흰쌀밥만 먹던 병사들이 각기병에 시달린 사정이 있었고, 커리 분말에 밀가루를 더해 걸쭉하게 만든 게 지금의 일본식 카레가 됐다는 얘기까지는 흥미롭게 읽었어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 병사들이 먹은 쌀이 어디서 왔는지 따라가 보면 한반도가 나와요. 1939년 조선미곡통제령으로 수확한 쌀의 3분의 2가량을 빼앗겼고, 흔히 아는 보릿고개 풀뿌리 이야기도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긴 일이라고 하니 한동안 멍했어요. 저자는 이 대목에서 "입맛이 절로 씁쓸해진다"고 썼는데, 제 마음도 딱 그랬습니다.


앞으로 카레를 예전처럼 마냥 편하게만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른 꼭지보다 속도를 늦춰 가며 읽은 건 3부의 (갈치를 발라주는 시간)이었어요.

저자는 스스로를 '갈치 발골사'라고 부릅니다. 가시를 유독 겁내는 첫째를 위해 가장자리에 뼈가 남았는지 한 번 더 훑고 나서 아이 수저 위에 살을 올려 주는데, 발라내는 속도보다 아이들이 먹어 치우는 속도가 빨라서 마음이 급해진대요. 아이들이 다 먹고 나서야 남은 한 토막을 천천히 자기 입에 넣는다는 문장이 참 좋았습니다. 남편은 옆에서 "지들이 발라먹게 내버려둬"라고 한마디 한다는데, 영 틀린 말도 아니라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런데도 성가시고 귀찮아도 발라 주고 싶은 그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는 곧바로 나와요.


부산의 할머니는 기름에 튀기듯 바싹 구운 갈치를 접시에 탑처럼 쌓아 내오셨대요. 손녀가 뒤늦게 "할머니도 드세요" 하고 내밀면 "니 많이 묵으라" 하며 고개를 저으셨고, 이미 식사하셨다며 먹는 모습만 오래도록 바라보셨다고 해요.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더 갖다 줄꾸마" 하며 기어이 살을 발라 입에 넣어 주던 분이었죠. 엄마와 얼굴을 맞대고 나눴다는 대화도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내가 구우면 이렇게 안 되는데, 할머니가 구우면 이래 바삭하게 잘 구워진다. 이상하재."

이상한 게 아니라 할머니니까 그런 거겠죠.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제일 먹고 싶던 음식도 갈치구이였대요. 그런데 생선구이 식당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조금만 더 구우면 과자가 될 것처럼 바싹 구운 그 맛은 없었다고 해요. 참다 못해 한달음에 부산으로 내려가니 할머니가 만삭의 손녀를 꼭 안아 주셨고,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몰라요" 하며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거 같았어요.


할머니에게서 저자에게로, 다시 저자에게서 아이들에게로 넘어가는 게 거창한 말씀이 아니라 가시 발라 주는 손길이라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갈치 편의 메뉴판 비하인드도 알차요. 갈치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지느러미만 살랑거리며 서서 헤엄친다는 것도, 칼을 닮은 생김새처럼 성질도 사나워서 먹이가 모자라면 동료까지 잡아먹는다는 것도, 1960년대까지는 동네 아이들이 말린 갈치를 껌처럼 씹고 다녔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서민 생선이 어쩌다 '금갈치'가 됐는지 유통 구조와 남획 얘기로 이어지는 부분도 흥미로웠고요. 조상들이 오늘날 갈치 가격을 보시면 놀라 자빠지실지도 모른다는 문장에는 마트 생선 코너 가격표 앞에서 멈칫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거 같습니다.


4부 (시간을 삶아낸 한 그릇, 수제비)는 반갑게 시작했다가 조용히 가라앉는 꼭지였어요. 주 6일제로 수업받던 시절, 토요일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멸치 다시 국물 냄새가 솔솔 나고 할머니가 "내 강아지 어서 온나. 퍼뜩 끓여줄게" 하며 맞아 주셨대요. 어린 저자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TV를 켜고 (출발, 비디오 여행)부터 봤고요. 토요일 오전 수업 마치고 집으로 뛰어가던 그 공기는 저희 또래라면 다들 아는 풍경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단정하게 빗은 뽀글 머리, 은은한 로션 냄새, 반짝이 장식 티셔츠에 몸빼바지. 할머니 모습이 어찌나 또렷하게 그려지는지 우리 동네 어느 집 할머니를 보는 거 같았어요.


어른이 되어 고향을 떠난 뒤로 저자는 그 맛을 찾아 다녔다고 해요. 들깨 수제비, 된장 수제비, 메밀수제비, 감자수제비, 해물 수제비까지 먹어 봤지만 심심한 듯하면서 계속 국물을 들이켜게 만드는 할머니 손맛은 어디에도 없었대요. 어쩌면 자기가 찾던 건 그 맛을 건네주던 할머니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고백이 이어지고, 살아 계시는 동안 제대로 된 밥 한 끼 대접해 드리지 못한 철없는 마음이 자꾸 수제비 한 그릇을 불러냈는지도 모르겠다는 문장이 그 뒤를 따라요.


이 꼭지의 메뉴판 비하인드에는 전쟁 뒤 원조 밀가루 얘기가 나오고, 음식점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한 '쌀 없는 날'과 선생님이 도시락에 잡곡을 섞었는지 검사하던 시절 얘기도 나옵니다. 할머니 수제비에 들어간 멸치 국물이 전국으로 퍼진 것도 1960년대 후반보다 더 뒤의 일이라니 신기하더군요. 저자는 수제비를 "우리가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조용히 기억하는 음식"이라고 불러요. 2부에 실린 (특별하진 않지만 충분한 한 잔, 믹스커피)에서 "완벽하지 않지만 충분한 것들로 버텨나가는 것"이라는 문장을 봤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탕비실 믹스커피 한 봉지로 오후를 버텨 본 직장인한테는 남 얘기 같지 않은 문장이에요.


에필로그를 보면 이 책은 아주 개인적인 그리움에서 시작됐다고 해요. 쓰다 보니 오래 열고 싶지 않던 기억까지 마주하게 됐고, 어떤 장면은 차마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지웠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하고요. 목차에 (에이스, 수치심의 맛) 같은 제목이 끼어 있는 걸 보면 예쁜 추억만 골라 담지는 않았다는 게 느껴집니다. 친구들이 뒤에서 수군거린 날에도,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은 날에도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밥상을 차려 주셨다고 해요.


"많이 묵어라." 그 한마디 뒤에 얼마나 많은 말이 숨어 있었는지 이제는 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저자는 할머니가 음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자신은 음식에 대해 쓰는 것으로 그 사랑에 답하고 싶었다고 해요. <기억의 맛>을 다 읽고 나니 이 책 전체가 "많이 묵어라"에 대한 긴 답장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솔직히 걸렸던 건 딱 하나예요. 읽는 내내 배가 고픕니다. 카레 꼭지에서는 카레가, 갈치 꼭지에서는 바삭한 갈치 껍질이, 수제비 꼭지에서는 멸치 국물 냄새가 계속 아른거려서 꽤 곤란했어요.

판형이 아담하고 두께도 보통 에세이만 해서 들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어요. 그런데 뒤쪽에는 백여 건이 넘는 참고 문헌이 붙어 있고, 각주도 백이십 개가 넘는다고 하더라고요. 책장에 꽂아 두고 그날 먹은 음식 꼭지만 골라 다시 펼쳐 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할머니 밥상이든 엄마 밥상이든, 누군가 차려 준 밥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면 어느 꼭지에선가 자기 얘기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9월 끝자락,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화요일이에요. 이런 날엔 뜨끈한 국물이 당기는데, <기억의 맛> 덕분에 오늘 저녁 메뉴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말보다 제가 먼저 살찌게 생겼어요. 누가 차려 준 밥 한 끼 든든하게 얻어먹은 것처럼 속이 따뜻해진 기분입니다.


카레 한 솥, 갈치 한 토막, 수제비 한 그릇 뒤에 숨은 할머니의 사랑과 우리 식탁의 역사를 함께 떠먹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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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7급 - 한자의 기초를 쫀득하게 붙잡다 ㅣ 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문해력한자연구회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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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재가 펼쳐 본 초등 한자책, 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7급 서평


표지를 처음 받아 들었을 때는 떡집 신메뉴 안내문인 줄 알았어요. '쫀득'이라는 글자가 워낙 큼지막하게 박혀 있어서요. 노란 제목 위에 토끼와 곰돌이가 앉아 있고 연필을 타고 날아오르는 아이까지 있으니, 누가 봐도 초등학생 책입니다. 그런데 오십을 코앞에 둔 아재가 이 책을 펼쳐 놓고 입 구, 눈 목을 따라 읽다가 제법 재미를 봤다면 조금 궁금해지지 않으세요?


<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7급>은 시원스쿨닷컴에서 나온 초등 한자 급수 대비서예요. 7급 50자를 다룹니다. 먼저 8급 한자 30자를 복습하며 몸을 풀고, 이어서 7급 신출한자 20자를 하루 한 글자씩 5주에 걸쳐 익히는 흐름이더라고요. 1주는 신체, 3주는 위치처럼 주마다 주제가 묶여 있어서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헷갈릴 일은 없을 거 같아요.


하루치 구성도 단정한 편입니다. 한자의 생김새를 이야기와 그림으로 이해하고, 따라 쓰고, 한자어를 문장 속에서 읽고, 빈칸을 채워 문장을 완성하는 네 단계예요.


이 책만의 맛은 첫 단계에 몰려 있는 느낌이 들어요. 口는 "'아' 하고 크게 벌린 입 모양을 보고" 만든 글자라고 설명하고, 目은 동그란 눈동자와 위아래 눈꺼풀을 본떴다고 보여 줍니다. 手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편 손 모양이고요. 실제 입과 눈 모양이 한자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화살표로 차근차근 이어 놓아서, 설명을 다 읽기도 전에 그림만 보고 먼저 알겠더군요. 한복 입은 도령과 아씨 캐릭터가 손가락을 치켜들고 설명해 주는 모습도 귀여웠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10일 차 外, 바깥 외였습니다.


달이 뜬 밤, 등불을 든 아이들 옆에서 어른 한 분이 점을 치는 그림이 나와요. 설명은 이렇습니다. "아침에 치던 점(卜)을 원칙과 다르게 저녁(夕)에 친다고 해서 '밖, 바깥'이라는 의미가 생겼어요." 외출, 외식, 해외를 그렇게 쓰고 살면서도 이 글자 안에 저녁 점 이야기가 들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원칙에서 벗어난 일이 곧 바깥이라는 발상이 오래된 글자치고 꽤 사람 냄새가 나는 거 같더라고요.


예외가 곧 바깥이라니.


회사에 다니다 보면 원칙대로 안 되는 일이 매일같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조금씩 바깥으로 나가 있는 셈인가 싶기도 하고요. 바로 앞 9일 차 內는 테두리 안으로 사람이 쏙 들어가는 모습이고, 11일 차 出은 땅을 뚫고 새싹이 고개를 쑥 내민 모습입니다. 세 글자를 이어서 보면 들어가고, 나가고, 싹이 트는 작은 이야기 한 편 같기도 했어요.


한자어 예문에서는 어른 눈이 자꾸 멈추는 곳이 있었습니다. 內外를 설명하는 예문이 "발표는 3분 내외로 준비하면 돼요"인데, 회의실에서 3분 내외라던 발표가 정말 3분 안에 끝나는 건 거의 못 봤거든요. 手下 예문 "이순신 장군은 수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에서는 팀원들 말을 끝까지 들었었나 싶어 괜히 뜨끔했고요.


솔직히 걸렸던 단어는 名目이에요. 뜻풀이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이고, 예문은 달리기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운동장을 뛰어다녔다는 문장입니다. 어른 세계에서 명목이라고 하면 어쩐지 속사정이 따로 있는 말처럼 들리잖아요. 그런데 아이 문장 속 명목은 그저 신나게 뛰어놀 핑계라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같은 단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온도가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싶더군요.


중간중간 나오는 동그란 얼굴 캐릭터들도 정이 갑니다. 안경 쓴 친구가 "이렇게 '口'는 '입'을 뜻하고, '구'라고 읽어요!" 하고 한 번 더 정리해 주고, 페이지 구석에서는 다람쥐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어요. 문제를 끝낼 때마다 별을 색칠하는데, 별 네 개면 "야호! 오늘 한자 공부 완료!"라는 칭찬이 기다립니다. 세 개면 몰랐던 문제만 복습하고, 두 개 이하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식이고요. 아이가 오늘 공부를 어디까지 했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짜 놓은 거 같아요.


"아하 이거구나!"라는 작은 코너도 좋았습니다. 첫날 口를 배우면서 耳目口鼻를 살짝 보여 주는데, 이 이목구비가 뒤쪽 사자성어 쓰기 연습에서 다시 나와요. 앞에서 한 번 스쳐 본 말을 뒤에서 또 만나게 해 놓은 배치가 은근히 친절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자성어 연습 쪽에는 산전수전, 우왕좌왕, 소탐대실 같은 말들이 줄지어 있어요. 산전수전의 뜻풀이가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모두 겪었음을 이르는 말"인데, 초등학생이 이 말을 또박또박 따라 쓰는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더라고요. 따라 쓰는 건 아이인데 뜻이 몸으로 와닿는 쪽은 아무래도 중년이니까요. 우왕좌왕 풀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이라니, 월요일 아침 사무실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줄 알았습니다.


그 바로 뒤에는 溫故而知新 한 구절만 크게 넣은 페이지가 있어요. "배운 것을 다시 익히면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어요." 8급 복습으로 시작해 7급으로 넘어가는 이 책의 흐름과 딱 맞는 문장이라, 일부러 이 자리에 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마지막 셋째 도전은 출제 예상문제입니다. 한 회에 25문항씩 15회분이 들어 있고, 그림을 보고 한자를 고르는 문제부터 밑줄 친 어휘를 한자로 바르게 쓴 것을 고르는 문제까지 유형이 다양해요. 재미있었던 건 본문에서 익힌 문장이 문제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이에요. 2일 차에 배운 五目의 뜻을 묻는 문제가 나오고, 3일 차에 나온 목수는 "목수가 나무를 다듬어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다"는 문장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공부한 게 시험장까지 이어진다는 걸 아이도 금방 알아챌 거 같아요.


소장 가치로 보면 챙겨 주는 게 꽤 많습니다. 날마다 QR로 들을 수 있는 한자 챈트송이 있고, 선정한자와 빈출 한자어를 모은 브로마이드도 있어요. 많은 부모님이 막막해하신다는 OMR 답안 작성법은 가이드 영상과 연습용 답안지로 익힐 수 있고, 교사·학부모용 지도 가이드 PDF도 따로 제공한다고 해요. 한자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와 그 옆에 앉아 봐 줄 어른 모두에게 <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7급>은 든든한 짝이 될 것 같습니다. 저처럼 한자를 대충 눈치로 읽어 온 어른이 들여다봐도 얻어 가는 게 쏠쏠했고요.


책장을 넘기다 보면 평소 무심히 쓰던 출구, 입구, 외식 같은 말들이 달리 보여요. 저마다 벌린 입 모양이나 새싹, 저녁 점 이야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흔한 단어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9월의 마지막 화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出 자 속 새싹은 봄 이야기지만, 가을에 새로 뭔가를 시작해도 늦지 않겠다는 기분이 드는 걸 보면 이 책 덕분에 제 마음에도 싹 하나가 쏙 올라온 거 같아요. 좋은 책 만나서 기분 좋은 한 주의 시작입니다.


예상문제 끝마다 적혀 있던 인사를 빌려 볼게요. 오늘 하루도 다들 手고하셨습니다.


입 모양, 눈꺼풀, 저녁에 치던 점까지 한자마다 담긴 생김새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7급 50자가 쫀득하게 붙어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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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자의 시대 - 사건에 휩쓸리지 않고 구조를 읽는 법
김준현 지음 / 어깨위망원경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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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사람이 바뀐 걸까, 판이 바뀐 걸까? 김준현 <해석자의 시대> 서평


9월도 마지막 주에 들어섰네요. 화요일이면 한 주가 겨우 시동이 걸리는 날인데,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서 긴팔부터 찾게 됩니다.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지기 쉬운 환절기에 결이 참 좋은 책을 만난 거 같아요.


표지를 펼치기도 전에 커다란 카메라 렌즈 하나가 정면에서 이쪽을 빤히 쳐다봅니다. 그 위로 "왜 세상은 이토록 어지러운가?"라는 문구가 떡하니 얹혀 있고요. 뉴스 몇 꼭지만 넘겨 봐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요즘이라, 이 질문에 대답해 보겠다는 책이면 손이 먼저 가더라고요. 렌즈가 워낙 커서 들고 있으면 제가 찍히는 기분인데, 다행히 초상권 청구서는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해석자의 시대>는 세상을 11개의 층으로 잘라서 들여다보는 책이에요.


세계, 감각, 지식, 과학, 기술, 경제, 문화, 법, 정치, 권력, 판단.


아래층이 위층의 가능성을 먼저 깔아 주고, 그 위로 차곡차곡 올라가는 단면도입니다. 층마다 붙은 한 줄 설명이 꽤 맛깔나요. 감각은 "오감이라는 좁은 창문"이고, 문화는 "우리는 원래 이렇게 산다"는 기본값이고, 권력은 "누가 케이크를 자를 것인가"라는 분배의 룰이라고 하죠. 케이크가 나오니 딱딱한 권력 얘기가 괜히 동네 생일잔치처럼 들리기도 하고요.


정치는 평론가가, 경제는 경제학자가, 문화는 비평가가 따로따로 말하는 세상이 있죠. 저자는 이걸 "각자의 방송국이 각자의 주파수만 송출하는 셈"이라고 표현합니다. 정보가 산더미처럼 쌓여도 지도가 없으면 길을 찾을 수 없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그래서 독자에게 '구조적 렌즈'를 건네고 싶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표지의 커다란 렌즈가 이해되더군요. 멋 부리려고 박아 둔 그림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오래 관찰하고, 책을 읽고, 여러 개념을 연결해 보고, 추론하기를 즐기는 사람일 뿐이라고 소개해요. 거창한 직함을 늘어놓지 않으니 오히려 귀가 솔깃해집니다. 이런 시선이 생긴 계기도 책 세 권이었대요. 리처드 탈러의 <넛지>는 인간이 정말 자유롭게 선택하는지를 물었고, 로렌 슬레이터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인간이 자기 마음의 주연인지를 물었대요. 유현준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도시가 왜 하필 이런 모양인지를 물었고요. 식당 메뉴판의 순서, 스마트폰의 기본값, 골목의 너비 같은 이야기는 결국 한 문장으로 모입니다. "배치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요즘 서평단을 하면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 책 저 책 받아 읽는 입장이라, 이 대목이 은근히 부럽고 반가웠어요. 따로따로 읽은 책들이 어느 날 한 줄로 꿰어진다니, 책 읽는 사람한테 이만한 보상이 또 있을까 싶더라고요.


프롤로그 한쪽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장소에서 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하루가 그려져요. 거대한 톱니바퀴 속 부품,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흘러가는 제품.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한테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죠.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저자의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맴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 어떤 변화는 세상을 통째로 뒤집고, 어떤 변화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는가.


맛보기로 하나 꺼내 보면, 이 책의 첫 사례는 동네 놀이터의 깍두기예요. 세발뛰기를 하다가 어린 동생이 끼워 달라고 하면 네 발까지 봐주던 그 규칙 말입니다. 이기는 게 목적이었다면 할 수 없는 선택인데, 그 시절엔 다 같이 노는 게 먼저였다고 하죠. 저자는 그때의 놀이 문화를 이렇게 요약해요. "완벽히 공정하진 않아도, 같이 놀 수 있으면 된다." 이 문장 하나로 골목 어귀 흙바닥이 눈앞에 그려지는 거 같았어요.


놀이가 온라인으로 옮겨 가면서 판이 바뀝니다. 판정은 시스템이 하고, 전적과 랭킹은 영구히 남고, 초보자는 팀의 승리를 갉아먹는 걸림돌이자 민폐가 돼요. 취업 이야기로도 이어지는데, 예전엔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전화 한 통으로 끝났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났어요. 지금은 합격자 스펙이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나와 그 사람의 차이가 숫자로 비교되죠. 저자는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커진 까닭을 세상이 더 잘 보이게 된 데서 찾더라고요.


저자도 처음엔 사람을 의심했다가 곧 세대를 의심했다고 털어놓아요. 요즘 MZ세대들은 이기적이야, 우리랑 달라. 회식 자리에서 한 번쯤 들어 봤을, 어쩌면 제 입에서도 나왔을 말이라 뜨끔했습니다. 사람이 바뀐 걸까, 판이 바뀐 걸까. 이 질문 앞에서 괜히 뒤통수를 긁적이게 되는 사람이 저 하나는 아닐 거 같아요.


<해석자의 시대>가 한 번 크게 방향을 트는 곳은 2부의 '역류' 장입니다. 앞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흐름이었다면, 여기서는 꼭대기의 정치와 권력이 물길을 거슬러 내려와요. 저자는 이걸 하류로 흐르면서도 곳곳에 소용돌이를 만드는 강물에 빗대더라고요. 규제를 두고는 브레이크이면서 핸들이고 도로공사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내면 책임을 누가 지는지, AI가 그린 그림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같은 질문에 답이 서야 기술이 달릴 도로가 깔린다는 거죠.


"법은 언제나 상처가 난 자리에 붕대를 감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뉴스에서 뒷북 행정 소리가 나올 때마다 혀만 차던 사람으로서, 이 문장 앞에서는 잠깐 말을 아끼게 되더라고요. 누군가 피해를 입고 나서야 법이 움직이는 게 꼭 누가 게을러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청나라의 쇄국 정책과 20세기 후반 한국의 반도체·통신 투자를 나란히 놓은 대목도 있어요. 둘 다 위층에서 내려온 힘인데 결과는 정반대로 갈렸으니, 그 차이가 어디서 생겼는지 궁금해지고요.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곳은 3부의 AI 장이었어요. 저자는 AI의 출발점을 사람처럼 '생각'하는 데서 찾지 않고, 압도적인 확률로 '맞히기'를 하는 데서 찾습니다. 그렇게 분류하고 예측하고 결정하는 데 드는 '판단의 가격표'가 뚝 떨어지면, 노동이 짊어지던 두 가지 역할이 흔들린다고 해요. 하나는 소득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하며 사는가"라는 정체성이에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이 나이쯤 되면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하는 자기소개가 곧 회사 이름과 직함이잖아요. 일이 삶을 떠받치는 중심축이었다는 문장이 남 얘기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그 빈자리를 채울 후보로 이야기와 놀이를 꺼내 들어요. 이야기를 소비하는 인간 '호모 나랑스',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드라마, 게임, 스포츠, 스트리밍, 밈, 팬덤까지 전부 여기에 들어간다고 하니 범위가 생각보다 넓습니다.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만 켜 놓다 잠드는 게 일과였는데, 요새는 새 책부터 집어 드는 쪽으로 바뀌었거든요. 이것도 제 나름의 놀이 찾기였나 싶어서 혼자 슬며시 웃었습니다.


AI 판사 이야기에 이르면 앞에서 만난 깍두기가 불쑥 다시 떠오릅니다. 같은 규칙을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보편성'의 체제와, 상황과 서사를 따지는 '맥락'의 체제가 맞서는 대목이에요. 저자가 든 비유가 참 알아듣기 쉬웠어요. "어린아이와 어른에게 똑같은 양의 밥을 제공하면 어른은 배가 고플 것이다."


놀이터에서 시작한 질문이 법정 문턱까지 걸어온 셈.


손익이라는 오래된 기준이 AI 앞에서 흔들린 뒤 그 자리에 무엇이 올라서는지, 저자가 내놓는 답은 의외로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더라고요. 그 답은 책에서 직접 만나시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 같습니다.


솔직히 걸렸던 건 제 쪽 사정이에요. 개념어가 촘촘하게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읽는 속도가 저절로 느려지는 편이었거든요. 그래도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천장 위의 얇은 실, 나무의 나이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다 숲이 불타는 걸 놓친다는 비유 같은 게 틈틈이 손잡이가 돼 줬어요. 덕분에 어렵다는 기분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두께는 보통 인문서보다 날씬한 편이라 출퇴근 가방에 넣어도 부담이 없어요. 11개 층을 한 줄씩 풀어 둔 부분은 뉴스가 뒤죽박죽으로 느껴질 때 펼쳐 보는 약도로 쓰기 좋겠더군요. <해석자의 시대>는 책장에서 손이 제일 잘 닿는 칸에 꽂아 두고 싶어요.


선선한 바람이 드나드는 9월 끝자락에, 머릿속에 엉켜 있던 전선을 한 가닥씩 풀어 본 기분이에요. 11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온 셈인데 다리는 멀쩡하고 머리만 운동한 느낌이랄까요. 쓸 만한 렌즈 하나 챙긴 가을이라 든든합니다.


골목의 깍두기에서 AI 판사까지, 사건 아래 깔린 판을 11층 렌즈로 읽어 보게 해 주는 책.


#해석자의시대 #김준현 #어깨위망원경 #인문교양 #사회교양서 #구조를읽는법 #11층구조 #깍두기 #공정성 #AI시대 #기본소득 #호모루덴스 #규제 #세대갈등 #책추천 #신간도서 #직장인독서 #가을독서 #서평 #BOOKU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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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만드는 평생 연금 ETF 투자 혁명 - Ray Dalio’s The All Weather Portfolio
도세 도시로 지음, 김지선 옮김 / 북웨이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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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주식이 고작 26%? 갸웃하던 아재를 끝까지 붙잡은 올웨더 이야기


올웨더라는 말을 처음 봤을 때는 사계절용 등산 재킷 광고인 줄 알았어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끄떡없다는 그 올웨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올웨더는 사람 대신 계좌에 입히는 옷이더군요. 경기가 좋든 나쁘든, 물가가 뛰든 멈추든 버티는 계좌라니, 주식 좀 해 볼까 기웃거리던 아재 입장에서는 첫 장부터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만드는 평생 연금 ETF 투자 혁명>은 일본의 개인 투자자 도세 도시로가 쓰고 김지선 님이 옮긴 책이에요.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를 세운 레이 달리오의 올웨더 전략을 ETF 3개와 우량주 5개, 딱 8개 종목으로 풀어낸 게 핵심이라고 하더라고요. 1년에 한두 시간 리밸런싱만 해주면 된다는 말에 늘 피곤한 직장인 귀가 쫑긋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이 책만의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장마다 문을 여는 [주린이가 묻다] 코너일 거 같아요. 주인공 에미가 스마트폰에서 'ETF 투자 혁명'이라는 가상의 앱을 찾아내는데, 다운로드 5억 이상에 리뷰 2582만 건, 평점 4.9짜리 앱이에요. 앱을 켜면 저자 도세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나 "숨을 크게 들이쉬고 긴장을 풉시다" 하고 말을 건넵니다. 투자책에서 이런 설정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앱 리뷰들도 소소하게 재미있어요. "그야말로 갓투!"를 외치는 20대 리뷰어도 있고, "불황에도 이익이 나다니… 버그인가?" 하는 30대 리뷰어도 있거든요. 40대 남성 taro 님 리뷰에는 괜히 눈길이 한 번 더 가더군요.

에미가 털어놓는 고민은 남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회사 동료들한테 안 하면 손해라는 말을 매일 듣다 보니 뒤처질까 봐 초조하대요. 유튜브에서 주식으로 100억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부럽기도 하고요. 직장 다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라 그런지 에미가 꽤 가깝게 느껴졌어요. 도세의 대답은 차분한 편이더군요. "확실히 성공담은 매력적이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릅니다." 조급한 마음을 나무라지 않으면서 발걸음을 한 박자 늦춰주는 말투라 좋았어요.


1장은 저자가 "먼저 양해를 구한다"며 시작합니다. 폭락과 관련된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부터 꺼내겠다는 거예요. 희망부터 건네는 재테크 책에 익숙해서 그런지 이런 솔직함에 믿음이 가더라고요. 주가 대폭락, 주식시장의 장기 침체, 높은 변동성이라는 3대 리스크가 나오고, 남들 따라 쏠리는 FOMO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적립식 투자도 결국 주식이라는 한 자산군에만 투자하는 방식이라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뜨끔했어요. 적립식으로 인덱스만 사면 다 되는 줄 알았거든요.


머리말에 담긴 저자의 가족사는 조금 다른 결로 읽혔어요.

1980년대 후반 초등학생이던 저자는 버블 경제 속에서 부모님이 일본 주식을 사는 걸 지켜봤다고 해요. 버블이 무너진 뒤에도 부모님은 주가가 회복될 거라 믿고 팔지 않았대요. 그사이 아버지는 밤낮없이 일했고, 어머니는 무릎 통증을 참으며 매장에서 내내 서서 일했다고 적혀 있어요. 그러다 2008년 리먼 사태로 주가가 다시 폭락하자 결국 주식을 던졌고, 그 뒤 주가가 올랐을 때는 그 이익을 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올웨더 전략을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부모님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는 문장은 담담하게 쓰여 있어서 더 조심스럽게 읽혔습니다. 그 부모님 나이쯤 와 있는 입장이라 그런지, 한 가정의 계좌가 흔들린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그 뒤로 저자는 해외 자료를 찾아 읽으며 리스크 패리티 전략을 연구했다고 해요. 직접 투자하며 검증한 끝에 지금의 8개 종목 구성을 만들었고요. 일본적십자사 재무팀에서 인명과 직결된 자금을 다루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제일 반가웠던 건 "고액 연봉자가 아니었으므로 매월 꾸준히 적립식으로 투자"했다는 고백이었어요. 월급 받아 사는 사람한테는 이런 문장이 꽤 힘이 되는 느낌이 듭니다. 앞에서 뜨끔했던 적립식 얘기와 이어 보니, 결국 핵심은 여러 자산군에 나눠 담는 쪽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23년 45세에 경제적 자유를 이룬 뒤의 일상 이야기도 살짝 나오는데요. 발리의 아침 햇살 아래서 명상을 하고, 필리핀 팔라완 해변 풍경에 감탄하고, 시칠리아에서 지중해 요리를 즐긴다고 합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가 떠오르는 크로아티아 로비니 거리에서 석양을 보며 하루를 마친다는 대목에서는 부러움을 숨기기가 좀 어렵더군요. 지금 제 나이보다 어린 나이에 저기까지 갔다니.


기본 포트폴리오는 원형 그래프 하나로 정리돼 있어요. 미국 주식 VTI 26%, 미국 장기 국채 TLT 34%, 금 GLDM 20%이고, 원자재 20%는 엑슨모빌, 셰브론, BHP, 리오틴토, 디어 다섯 기업에 4%씩 나눠 담는 구성이에요. 솔직히 처음 볼 때는 주식이 고작 26%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저자가 이런 반응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독자의 속마음을 대신 꺼내 놓더군요. "원자재에 20%나 투자하다니 바보 아니야?" 제 머릿속 목소리랑 너무 똑같아서 웃음이 났어요. 이어서 1972년부터 2022년까지의 데이터를 가지고 차근차근 반박합니다. 미국 주식 60%, 국채 40% 포트폴리오와 비슷한 중간 정도 리스크로 미국 주식 100%를 웃도는 수익률이 나왔다는 거예요.

부동산과 비트코인, 명품 시계, 미술품, 우표, 보석, 고주화를 빼놓은 이유도 정리돼 있어요. 잘 모르는 투자 대상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에요. 명품 시계는 애초에 없으니 뺄 것도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2장의 설계 과정이었어요. 경제 환경을 고성장, 저성장, 고인플레이션, 저인플레이션 네 가지로 나누고, 환경마다 강한 자산을 두 개씩 배치하는 방식이에요. 미국 주식은 고성장과 저인플레이션에, 미국 국채는 저성장과 저인플레이션에, 금은 저성장과 고인플레이션에, 원자재는 고성장과 고인플레이션에 강하다고 해요. 이렇게 짝을 지어 놓으니 네 자산이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저자는 각 자산의 특성을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고 지금은 이 정도만 이해해도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은근히 위로가 됐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독자를 축구 감독 자리에 앉혀요. 선수마다 포지션이 다르고, 모두 공을 쫓지만 경기 흐름에 따라 공이 있는 곳이 달라진다는 거죠. 그러고는 농구 만화 (슬램덩크)에 나온 안 감독의 명대사를 꺼내 듭니다.


"너를 위해 팀이 있는 게 아니다. 팀을 위해 네가 있는 거다!"

그 만화를 보며 자란 세대라 이 대사를 투자책에서 만나니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어요. 한 명의 에이스에게 기대지 않고 팀 전체로 이긴다는 이야기가 머리말의 선수 비유에서 축구로, 다시 농구로 이어지는데, 이게 책 전체를 꿰는 줄 같은 느낌이 듭니다.

비율을 정하는 과정도 생각보다 단순했어요. 리스크를 1부터 5까지 점수로 매기면 미국 주식이 4, 초장기 미국 국채가 3, 금과 원자재가 5예요. 이걸 모두 1:1:1:1로 담으면 가격 변동이 큰 금과 원자재가 포트폴리오 전체를 흔들어 버린대요. 그래서 금과 원자재를 1로 두고 미국 주식은 1.25배, 국채는 1.67배로 늘립니다.


1.25, 1.67, 1, 1.

이걸 백분율로 바꾸면 26, 34, 20, 20이 돼요. 앞에서 본 원형 그래프의 숫자와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걸 보는 순간 퍼즐 조각이 딸깍 끼워지는 기분이었어요. 숫자라면 고개부터 젓는 사람도 이 대목은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거 같더라고요.

5장의 "그럼에도 현금은 왕이 될 수 없다"라는 제목은 처음엔 좀 세게 들렸습니다. 현금을 쥐고 있으면 일시적인 안도감은 들어도 장기적으로는 리스크 자산이 가져다줄 이익을 놓쳐 기회비용이 생긴다는 설명이 이어져요. 그러다 "현금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투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는 문장까지 나오거든요. 그렇다고 올웨더를 만능처럼 포장하지도 않더군요. 패닉 장세나 예상치 못한 급격한 금리 인상 같은 분산할 수 없는 리스크 앞에서는 올웨더 포트폴리오도 하락을 피할 수 없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금이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20년 동안 부진했던 시기도 숨기지 않고요. 좋은 얘기만 늘어놓는 책이 아니라서 오히려 더 믿고 읽게 되는 거 같아요.


올웨더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어려운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대목도 좋았어요. 투자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너무 단순해서 싱겁다고 느낄 수 있대요. 오히려 이 책으로 투자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선입견이 없어서 유리할 수도 있다고 하니, 초보 아재 입장에서는 괜히 어깨가 펴지더라고요. 5장 끝자락에는 이런 비유가 나와요.


"투자는 씨앗을 뿌려 식물을 키우는 것과 같다.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매일 흙을 파헤치면 식물은 절대 제대로 자랄 수 없다. 필요한 관리(리밸런싱)를 해주면서 성장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증권 앱을 들락거리는 사람이라면 뜨끔할 만한 비유 같아요.

솔직히 걸렸던 부분도 있어요. VTI, TLT, GLDM 같은 영어 티커와 원자재 기업 이름이 한꺼번에 나오는 대목에서는 처음에 좀 버벅거렸거든요. 다행히 종목마다 어떤 상품인지 표에 짧은 설명이 붙어 있어서 한두 번 앞뒤로 오가다 보니 금방 익숙해지더군요. 저자도 더 낮은 비용의 ETF가 새로 나올 수 있으니 상품을 고를 때 최신 정보를 확인하라고 당부합니다. 실제로 계좌를 꾸리기 전에는 각자 한 번 더 따져볼 일 같아요. 레버리지를 다루는 4장은 겁 많은 제 성향상 기본형부터 충분히 익힌 뒤에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누구나 만드는 평생 연금 ETF 투자 혁명>은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 1년에 한 번 리밸런싱할 때마다 다시 꺼내 볼 책 같아요. 자산군별로 강한 경제 환경을 정리한 표, 리스크 점수표, 비중 계산표가 한곳에 모여 있어서 참고서처럼 곁에 두기 좋겠더라고요.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라 손이 자주 갈 것 같고요.


9월 마지막 토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네요. 매일 흙을 파헤치지 말고 믿고 기다리라는 <누구나 만드는 평생 연금 ETF 투자 혁명>의 말처럼, 이번 가을에는 증권 앱을 좀 덜 열어보고 제 계좌에도 사계절 우산 하나 씌워 줄 궁리를 해 보려고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 한쪽이 든든해진 주말입니다.


에이스 한 명에게 기대지 않고 네 자산의 팀워크로, 어떤 경제 날씨에도 버티는 계좌를 만드는 법을 친절하게 풀어낸 올웨더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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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 애덤 스미스부터 프리드먼까지 200년 경제사상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경식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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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하버드 교수가 교수직을 아예 때려치울까 고민하던 1973년 여름, BBC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고 합니다. 경제사상사를 다루는 텔레비전 시리즈에 나와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었대요. 이 교수는 별 망설임도 없이 덥석 받아들입니다.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전원 끄는 소리를 들을 일이 절대 없으니, 누가 졸든 커플이 자리를 뜨든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첫 장면부터 이렇게 능청을 떠는 사람이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예요. 그 방송과 함께 세상에 나온 책이 <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고요. 추석 연휴 끝자락 토요일이라 그런지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이 책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머리말에 제목을 정한 사연이 나오는데, 무엇보다 어감이 좋았다고 하더군요. 지난 100년 동안 자본주의자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가, 제국주의자는 제국주의가 번영할 거라고 저마다 확신했대요. 그런데 그 확신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인류가 맞닥뜨린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생각하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말이 덤덤하게 붙어 있고요.


반세기 전에 쓴 문장인데 오늘 경제면을 펼쳐 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책 앞머리에 실린 이강국 교수의 추천의 글도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요. 1970년대는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속에서, 정부가 경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케인스주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던 시절이었대요. 그런데 금융위기와 팬데믹, 보호무역과 인공지능, 기후위기까지 겹친 지금이 어쩌면 그때보다 더 불확실한 시대일지 모른다고 합니다. 방송이 나가자 대처 같은 영국 보수 정치인들이 반대했고, 밀턴 프리드먼은 1980년에 PBS 시리즈와 <선택할 자유>로 맞불을 놨다는 뒷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경제학자들은 한번 붙었다 하면 판을 크게 벌이는구나 싶더군요.


이 책만의 결이 가장 잘 느껴졌던 건 머리말에서 방송과 책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를 한 시간 다루면 지루하다는 시청자도 있겠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비하면 그 한 시간은 1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방송에서는 무엇을 다룰지 골라야 하는데, 그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니 절대적인 정답인 척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선을 긋습니다. 방송 대본을 두고는 "얼굴이 없는 어떤 것"이라고까지 해요. 그러고는 책을 쓰는 사람은 독자가 앞으로 돌아가 되짚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쓴다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책을 쓰는 저자든 간에 어떤 독자가 하나의 장을 한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도록 원고를 써야 한다는 제약은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 "아직까지는"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저도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만 넘기다 잠들던 사람이라, 반세기 전 경제학자한테 한 방 먹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적어도 아직까지는. 요즘은 책을 먼저 집는 쪽이라 조금은 떳떳합니다.

7장 관료 혁명으로 들어가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거의 주인공처럼 등장해요.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1883년에 태어났다는 소개부터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갤브레이스는 위대한 인간은 보통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다는 처칠의 말을 꺼내 놓고는, 괄호 안에서 이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슬쩍 털어놓습니다. 그러고는 케인스가 이튼에서든 케임브리지에서든 행복한 나날을 보냈고, 개인적인 불만 때문에 세상을 바꾸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써요. 그에게 세상은 정말이지 멋지기만 한 곳이었다고요.


세상에 별 불만 없던 사람이 세상을 크게 바꿔놓았다는 게 저한테는 꽤 신선했어요. 공무원 시험에서 경제학 점수가 나쁘게 나오자 "시험관들은 아마 경제학을 나보다 더 몰랐을 것이다"라고 해명했다는 일화도 웃겼습니다. 이런 배짱은 인사평가 시즌에 한 번쯤 빌려 쓰고 싶더군요. 인도 사무소에 배치돼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책을 두 권이나 썼다는 대목에서는, 지루한 부서에서 버티는 방법도 사람마다 참 다르구나 싶었고요. 스승 격인 알프레드 마셜의 <경제학 원리>가 소양이 부족한 학생들이 일찌감치 경제학을 포기하도록 기를 꺾는 데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는 문장도 좋았어요.


파리 강화회의에서 물러난 케인스가 두 달 만에 써낸 책이 <평화의 경제적 결과>인데, 그 안의 인물평이 아주 압권이더군요. 우드로 윌슨은 "눈이 멀고 귀가 먼 돈키호테"라고 했고, 클레망소를 두고는 "프랑스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인류라는 전망을 내팽개쳤다"고 했답니다. 로이드 조지에게는 훨씬 더 냉혹한 문장을 써두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원고에서 빼버렸대요. 여기에 갤브레이스가 붙인 말이 이렇습니다.


"완벽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케인스도 그랬다."

이 두 문장이 괜히 좋았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한결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케인스가 그 책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밀려난 뒤를 다룬 대목이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그 배제가 오히려 행운이었다며 이런 말을 해요.


"공인의 저주는 처음에는 말투를, 결국에는 생각까지 자신의 공적 지위에 맞추게 된다는 점이다. 곧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다. 바깥에 있으면 적어도 진실을 말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말하는 법이라니요.

이 나이까지 회사를 다니다 보면 누구나 하나쯤 몸에 붙이게 되는 기술 같아요. 말투가 먼저 바뀌고 생각이 뒤따라 바뀐다는 그 순서가 특히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같은 장의 처칠과 금 이야기도 비슷하게 읽혔어요. 1925년에 파운드화 가치를 전쟁 전 수준으로 되돌리려던 결정을 두고, 갤브레이스는 그런 결정이 극소수만 모인 자리에서 내려진다고 말해요. 가장 높은 사람이 한마디 하면 다른 참석자들은 그 발언이 지혜롭다며 칭송하게 마련이고, 케인스처럼 반대할 게 뻔한 사람은 애초에 그 자리에 앉지도 못한다는 거죠. 백 년 전 런던 이야기인데 요즘 어느 회사 임원 회의실 풍경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더라고요.


9장 거대한 법인기업에 가면 이 회의실 이야기가 한층 더 노골적으로 펼쳐집니다. 우리 삶을 가장 많이 바꿔놓는 제도를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말로 장이 열려요. 기업이 정치인이나 공무원에게 금품이나 이권을 제공하는데, 이것을 순수한 자선이나 사랑의 표시라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뿐이라는 문장도 나옵니다. 뉴요커에 실렸던 찰스 애덤스의 만화도 한 컷 들어가 있는데, 동상들 앞에서 어른이 아이에게 "얘야,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어. 위대한 위원회들만 있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그리고 등장하는 게 UGE, 통합글로벌기업입니다. 갤브레이스가 여러 실제 기업의 모습을 뽑아 합성해서 만든 가상의 회사예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기업이라 그 신화를 방어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안이든 밖이든 검열 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설정이죠. 경제사상사 책 한가운데에 가상 기업의 연대기를 통째로 써넣은 발상이 이 책에서 가장 기발했던 거 같아요.

맛보기로 조금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1871년 시카고로 건너온 제임스 B. 글로우가 정육점을 열고, 돼지의 비명만 빼고 모든 것에 값을 매긴다는 업계에서 누구보다 앞서 나가요. 덕분에 이 회사 소시지는 '글로우 벌레'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불렸는데, 회사는 소시지 모양을 보고 애정을 담아 지은 별명이라고 우겼대요. 2세 때는 약간의 중독성 덕에 인기가 좋던 음료 브랜드를 인수하는데, 그 비결이 소량 들어 있던 코카인이었고요. 1955년에는 회사 이름을 UGE로 바꾸면서, 사보를 통해 이 이름이 '거대하다(huge)'에서 h를 묵음으로 처리한 발음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사회 장면은 직장인이라면 웃다가 뜨끔해지는 대목이에요. UGE 이사회는 두 달에 한 번 모여 이미 내려진 결정을 승인하고, 몇몇은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안건에 손을 들어 찬성하며, 두 사람은 꾸벅꾸벅 존다고 해요. 어떤 이사도 경영진의 제안에 반대하지 못하는데, "적어도 화장이나 미용보다 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렇다"는 단서까지 붙어 있습니다. 이사를 뽑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경영 결정에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는 평판이었고요. 이 가상 인물들의 "동시대인이거나 친구이거나 동족"이라며 헨리 포드와 IBM의 토머스 J. 왓슨 같은 실존 경영자들 사진을 떡하니 붙여놓은 페이지에서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어요.


솔직히 발목이 잡힌 곳도 있긴 했어요. 처칠과 금 대목에서 1파운드당 금 123.27그레인, 4.86달러, 4.40달러 같은 숫자가 줄지어 나오니까, 저 같은 사람은 속도를 늦춰야 겨우 따라가지더군요. 그래도 갤브레이스가 머리말에서 말한 책의 장점, 그러니까 앞으로 돌아가 되짚을 수 있다는 그 장점 덕을 톡톡히 본 셈이라 싫지는 않았어요.


책 자체도 참 예뻐요. 7장과 9장 모두 검은 바탕에 애덤 스미스의 옆얼굴과 빌딩 숲이 메달처럼 들어간 표제지로 시작하는데, 표지의 액자 그림이 그대로 이어져서 장이 바뀔 때마다 반갑더라고요. 사진도 넉넉하게 들어 있습니다. 마셜의 초상화, 조약에 참석하러 걸어가는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와 윌슨, 발레리나 리디아 로포코바, 에설런연구소 광고 페이지까지 있어요. 뉴욕의 제너럴모터스 빌딩과 모스크바의 코메콘 빌딩을 한 면에 나란히 실어둔 사진도 있는데, 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주제는 그 시대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에 반영된다는 문장과 겹쳐 보니 체제는 달라도 빌딩은 닮은꼴이라 웃음이 나더군요.


두께는 보통 경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들 때마다 'huge'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요. UGE식으로 h를 묵음 처리하면 "유~" 하는 감탄사만 남습니다. 딱 그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알찬 두께예요.

경제학 공식은 거의 안 나오고 사람 이야기로 굴러가서, 경제학 용어를 잘 몰라도 읽는 데 큰 부담은 없을 것 같아요. 회사 다니는 분이라면 9장 하나만으로도 본전은 뽑았다는 기분이 드실 거 같고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달력은 벌써 9월 끝자락이고 추석 연휴도 막바지네요. 불확실성의 시대라지만 연휴 끝나고 체중계에 올라가 볼 숫자만큼은 확실성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덕분에 가을 초입에 머릿속 곳간을 든든하게 채운 기분이에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한 계절 잘 여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서 200년 경제사를 사람 이야기로 풀어낸, 회사원일수록 웃다가 뜨끔해지는 경제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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