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 애덤 스미스부터 프리드먼까지 200년 경제사상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경식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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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하버드 교수가 교수직을 아예 때려치울까 고민하던 1973년 여름, BBC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고 합니다. 경제사상사를 다루는 텔레비전 시리즈에 나와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었대요. 이 교수는 별 망설임도 없이 덥석 받아들입니다.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전원 끄는 소리를 들을 일이 절대 없으니, 누가 졸든 커플이 자리를 뜨든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첫 장면부터 이렇게 능청을 떠는 사람이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예요. 그 방송과 함께 세상에 나온 책이 <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고요. 추석 연휴 끝자락 토요일이라 그런지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이 책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머리말에 제목을 정한 사연이 나오는데, 무엇보다 어감이 좋았다고 하더군요. 지난 100년 동안 자본주의자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가, 제국주의자는 제국주의가 번영할 거라고 저마다 확신했대요. 그런데 그 확신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인류가 맞닥뜨린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생각하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말이 덤덤하게 붙어 있고요.


반세기 전에 쓴 문장인데 오늘 경제면을 펼쳐 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책 앞머리에 실린 이강국 교수의 추천의 글도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요. 1970년대는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속에서, 정부가 경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케인스주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던 시절이었대요. 그런데 금융위기와 팬데믹, 보호무역과 인공지능, 기후위기까지 겹친 지금이 어쩌면 그때보다 더 불확실한 시대일지 모른다고 합니다. 방송이 나가자 대처 같은 영국 보수 정치인들이 반대했고, 밀턴 프리드먼은 1980년에 PBS 시리즈와 <선택할 자유>로 맞불을 놨다는 뒷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경제학자들은 한번 붙었다 하면 판을 크게 벌이는구나 싶더군요.


이 책만의 결이 가장 잘 느껴졌던 건 머리말에서 방송과 책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를 한 시간 다루면 지루하다는 시청자도 있겠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비하면 그 한 시간은 1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방송에서는 무엇을 다룰지 골라야 하는데, 그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니 절대적인 정답인 척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선을 긋습니다. 방송 대본을 두고는 "얼굴이 없는 어떤 것"이라고까지 해요. 그러고는 책을 쓰는 사람은 독자가 앞으로 돌아가 되짚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쓴다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책을 쓰는 저자든 간에 어떤 독자가 하나의 장을 한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도록 원고를 써야 한다는 제약은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 "아직까지는"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저도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만 넘기다 잠들던 사람이라, 반세기 전 경제학자한테 한 방 먹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적어도 아직까지는. 요즘은 책을 먼저 집는 쪽이라 조금은 떳떳합니다.

7장 관료 혁명으로 들어가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거의 주인공처럼 등장해요.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1883년에 태어났다는 소개부터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갤브레이스는 위대한 인간은 보통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다는 처칠의 말을 꺼내 놓고는, 괄호 안에서 이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슬쩍 털어놓습니다. 그러고는 케인스가 이튼에서든 케임브리지에서든 행복한 나날을 보냈고, 개인적인 불만 때문에 세상을 바꾸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써요. 그에게 세상은 정말이지 멋지기만 한 곳이었다고요.


세상에 별 불만 없던 사람이 세상을 크게 바꿔놓았다는 게 저한테는 꽤 신선했어요. 공무원 시험에서 경제학 점수가 나쁘게 나오자 "시험관들은 아마 경제학을 나보다 더 몰랐을 것이다"라고 해명했다는 일화도 웃겼습니다. 이런 배짱은 인사평가 시즌에 한 번쯤 빌려 쓰고 싶더군요. 인도 사무소에 배치돼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책을 두 권이나 썼다는 대목에서는, 지루한 부서에서 버티는 방법도 사람마다 참 다르구나 싶었고요. 스승 격인 알프레드 마셜의 <경제학 원리>가 소양이 부족한 학생들이 일찌감치 경제학을 포기하도록 기를 꺾는 데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는 문장도 좋았어요.


파리 강화회의에서 물러난 케인스가 두 달 만에 써낸 책이 <평화의 경제적 결과>인데, 그 안의 인물평이 아주 압권이더군요. 우드로 윌슨은 "눈이 멀고 귀가 먼 돈키호테"라고 했고, 클레망소를 두고는 "프랑스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인류라는 전망을 내팽개쳤다"고 했답니다. 로이드 조지에게는 훨씬 더 냉혹한 문장을 써두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원고에서 빼버렸대요. 여기에 갤브레이스가 붙인 말이 이렇습니다.


"완벽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케인스도 그랬다."

이 두 문장이 괜히 좋았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한결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케인스가 그 책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밀려난 뒤를 다룬 대목이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그 배제가 오히려 행운이었다며 이런 말을 해요.


"공인의 저주는 처음에는 말투를, 결국에는 생각까지 자신의 공적 지위에 맞추게 된다는 점이다. 곧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다. 바깥에 있으면 적어도 진실을 말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말하는 법이라니요.

이 나이까지 회사를 다니다 보면 누구나 하나쯤 몸에 붙이게 되는 기술 같아요. 말투가 먼저 바뀌고 생각이 뒤따라 바뀐다는 그 순서가 특히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같은 장의 처칠과 금 이야기도 비슷하게 읽혔어요. 1925년에 파운드화 가치를 전쟁 전 수준으로 되돌리려던 결정을 두고, 갤브레이스는 그런 결정이 극소수만 모인 자리에서 내려진다고 말해요. 가장 높은 사람이 한마디 하면 다른 참석자들은 그 발언이 지혜롭다며 칭송하게 마련이고, 케인스처럼 반대할 게 뻔한 사람은 애초에 그 자리에 앉지도 못한다는 거죠. 백 년 전 런던 이야기인데 요즘 어느 회사 임원 회의실 풍경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더라고요.


9장 거대한 법인기업에 가면 이 회의실 이야기가 한층 더 노골적으로 펼쳐집니다. 우리 삶을 가장 많이 바꿔놓는 제도를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말로 장이 열려요. 기업이 정치인이나 공무원에게 금품이나 이권을 제공하는데, 이것을 순수한 자선이나 사랑의 표시라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뿐이라는 문장도 나옵니다. 뉴요커에 실렸던 찰스 애덤스의 만화도 한 컷 들어가 있는데, 동상들 앞에서 어른이 아이에게 "얘야,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어. 위대한 위원회들만 있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그리고 등장하는 게 UGE, 통합글로벌기업입니다. 갤브레이스가 여러 실제 기업의 모습을 뽑아 합성해서 만든 가상의 회사예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기업이라 그 신화를 방어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안이든 밖이든 검열 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설정이죠. 경제사상사 책 한가운데에 가상 기업의 연대기를 통째로 써넣은 발상이 이 책에서 가장 기발했던 거 같아요.

맛보기로 조금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1871년 시카고로 건너온 제임스 B. 글로우가 정육점을 열고, 돼지의 비명만 빼고 모든 것에 값을 매긴다는 업계에서 누구보다 앞서 나가요. 덕분에 이 회사 소시지는 '글로우 벌레'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불렸는데, 회사는 소시지 모양을 보고 애정을 담아 지은 별명이라고 우겼대요. 2세 때는 약간의 중독성 덕에 인기가 좋던 음료 브랜드를 인수하는데, 그 비결이 소량 들어 있던 코카인이었고요. 1955년에는 회사 이름을 UGE로 바꾸면서, 사보를 통해 이 이름이 '거대하다(huge)'에서 h를 묵음으로 처리한 발음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사회 장면은 직장인이라면 웃다가 뜨끔해지는 대목이에요. UGE 이사회는 두 달에 한 번 모여 이미 내려진 결정을 승인하고, 몇몇은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안건에 손을 들어 찬성하며, 두 사람은 꾸벅꾸벅 존다고 해요. 어떤 이사도 경영진의 제안에 반대하지 못하는데, "적어도 화장이나 미용보다 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렇다"는 단서까지 붙어 있습니다. 이사를 뽑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경영 결정에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는 평판이었고요. 이 가상 인물들의 "동시대인이거나 친구이거나 동족"이라며 헨리 포드와 IBM의 토머스 J. 왓슨 같은 실존 경영자들 사진을 떡하니 붙여놓은 페이지에서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어요.


솔직히 발목이 잡힌 곳도 있긴 했어요. 처칠과 금 대목에서 1파운드당 금 123.27그레인, 4.86달러, 4.40달러 같은 숫자가 줄지어 나오니까, 저 같은 사람은 속도를 늦춰야 겨우 따라가지더군요. 그래도 갤브레이스가 머리말에서 말한 책의 장점, 그러니까 앞으로 돌아가 되짚을 수 있다는 그 장점 덕을 톡톡히 본 셈이라 싫지는 않았어요.


책 자체도 참 예뻐요. 7장과 9장 모두 검은 바탕에 애덤 스미스의 옆얼굴과 빌딩 숲이 메달처럼 들어간 표제지로 시작하는데, 표지의 액자 그림이 그대로 이어져서 장이 바뀔 때마다 반갑더라고요. 사진도 넉넉하게 들어 있습니다. 마셜의 초상화, 조약에 참석하러 걸어가는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와 윌슨, 발레리나 리디아 로포코바, 에설런연구소 광고 페이지까지 있어요. 뉴욕의 제너럴모터스 빌딩과 모스크바의 코메콘 빌딩을 한 면에 나란히 실어둔 사진도 있는데, 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주제는 그 시대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에 반영된다는 문장과 겹쳐 보니 체제는 달라도 빌딩은 닮은꼴이라 웃음이 나더군요.


두께는 보통 경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들 때마다 'huge'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요. UGE식으로 h를 묵음 처리하면 "유~" 하는 감탄사만 남습니다. 딱 그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알찬 두께예요.

경제학 공식은 거의 안 나오고 사람 이야기로 굴러가서, 경제학 용어를 잘 몰라도 읽는 데 큰 부담은 없을 것 같아요. 회사 다니는 분이라면 9장 하나만으로도 본전은 뽑았다는 기분이 드실 거 같고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달력은 벌써 9월 끝자락이고 추석 연휴도 막바지네요. 불확실성의 시대라지만 연휴 끝나고 체중계에 올라가 볼 숫자만큼은 확실성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덕분에 가을 초입에 머릿속 곳간을 든든하게 채운 기분이에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한 계절 잘 여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서 200년 경제사를 사람 이야기로 풀어낸, 회사원일수록 웃다가 뜨끔해지는 경제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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