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맛
손미주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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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카레 한 솥에 첫 출근이, 갈치 한 토막에 할머니가 담긴 음식 에세이 <기억의 맛>


노란 표지 위에 한 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카레라이스, 함박스테이크, 떡볶이, 주먹밥, 아이스크림 파르페에 거품 소복한 맥주 한 잔까지요. 표지만 보고 배가 고파지는 책은 참 오랜만인 거 같아요.

제목은 <기억의 맛>입니다. 요즘 제 기억력이 좀 맛이 간 상태라 제목부터 살짝 찔리더라고요.

막상 펼쳐 보면 맛집 안내서나 레시피 모음과는 결이 꽤 다릅니다. 한 사람이 살면서 삼켜 온 끼니를 하나씩 꺼내 놓고, 그 음식이 언제부터 어떤 사연으로 우리 식탁까지 왔는지를 쫓아가는 책이더군요.


재미있는 건 꼭지마다 이야기가 두 겹으로 들어 있다는 점이에요. 앞쪽에는 손미주 작가의 아주 사적인 기억이 있고, 뒤쪽에는 '메뉴판 비하인드'라는 코너가 붙어서 그 음식이 걸어온 내력을 풀어 줍니다. 할머니 부엌 얘기에 푹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일본 해군 급식이나 조선시대 문헌 얘기를 듣고 있는 식이죠. 처음엔 넘어가는 게 조금 낯설었는데, 몇 꼭지 지나고 나니 이 리듬이 은근히 기다려졌습니다.


에세이 한 편에 역사 한 토막이 덤으로 따라오는 셈이에요.

첫 꼭지 (시작의 맛, 카레)는 발령을 받고 자취를 시작한 첫날 밤에서 출발해요. 부모님이 사 주신 살림살이를 들여놨는데도 원룸은 텅 비어 보이고, 그토록 바라던 자유인데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리고 어깨가 무거웠다고 합니다. 전세금은 매달 나눠서 엄마에게 부치기로 하고, 관리비랑 생활비를 떼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남는 돈이 생각보다 적었다는 대목에서는 제 신입 시절 통장이 겹쳐 보였어요. 월급날 계산기 한 번 안 두드려 본 직장인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어요.


할 줄 아는 요리는 라면, 계란 후라이, 된장찌개 정도. 그래도 첫 끼만큼은 제 손으로 해 먹겠다며 마트로 가는데,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그래야만 하니까." 이 짧은 문장이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어요. 감자 세 개, 당근 한 개, 큰 양파 한 개를 썰어 넣었더니 혼자 사는 이십 대 여자가 먹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이 돼 버렸고, 결국 점심도 저녁도 다음 날 아침도 카레였다고 해요. 그렇게 꾸역꾸역 삼킨 카레만큼 통장 잔고가 불어나는 게 안심이 됐다는 고백에서는 웃다가도 마음 한쪽이 찡하더라고요.


"내게 카레는 시작의 맛이다. 초년생의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맛.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던 어리숙한 신규 교사의 눈물 맛."

교사가 아니어도 첫 출근을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아들을 말 같아요. 지금은 워킹맘이 되어 아이들 입맛에 맞춰 고기 반, 채소 반으로 끓인다는데, 둘째가 "엄마, 또 카레야?" 하고 투정 부리는 장면까지 이어지니 한 사람의 세월이 카레 한 솥에 다 담긴 느낌이 들더군요.

메뉴판 비하인드로 넘어가면 맛이 확 달라집니다. 일본에서 카레라이스가 국민 음식이 된 데는 흰쌀밥만 먹던 병사들이 각기병에 시달린 사정이 있었고, 커리 분말에 밀가루를 더해 걸쭉하게 만든 게 지금의 일본식 카레가 됐다는 얘기까지는 흥미롭게 읽었어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 병사들이 먹은 쌀이 어디서 왔는지 따라가 보면 한반도가 나와요. 1939년 조선미곡통제령으로 수확한 쌀의 3분의 2가량을 빼앗겼고, 흔히 아는 보릿고개 풀뿌리 이야기도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긴 일이라고 하니 한동안 멍했어요. 저자는 이 대목에서 "입맛이 절로 씁쓸해진다"고 썼는데, 제 마음도 딱 그랬습니다.


앞으로 카레를 예전처럼 마냥 편하게만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른 꼭지보다 속도를 늦춰 가며 읽은 건 3부의 (갈치를 발라주는 시간)이었어요.

저자는 스스로를 '갈치 발골사'라고 부릅니다. 가시를 유독 겁내는 첫째를 위해 가장자리에 뼈가 남았는지 한 번 더 훑고 나서 아이 수저 위에 살을 올려 주는데, 발라내는 속도보다 아이들이 먹어 치우는 속도가 빨라서 마음이 급해진대요. 아이들이 다 먹고 나서야 남은 한 토막을 천천히 자기 입에 넣는다는 문장이 참 좋았습니다. 남편은 옆에서 "지들이 발라먹게 내버려둬"라고 한마디 한다는데, 영 틀린 말도 아니라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런데도 성가시고 귀찮아도 발라 주고 싶은 그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는 곧바로 나와요.


부산의 할머니는 기름에 튀기듯 바싹 구운 갈치를 접시에 탑처럼 쌓아 내오셨대요. 손녀가 뒤늦게 "할머니도 드세요" 하고 내밀면 "니 많이 묵으라" 하며 고개를 저으셨고, 이미 식사하셨다며 먹는 모습만 오래도록 바라보셨다고 해요.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더 갖다 줄꾸마" 하며 기어이 살을 발라 입에 넣어 주던 분이었죠. 엄마와 얼굴을 맞대고 나눴다는 대화도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내가 구우면 이렇게 안 되는데, 할머니가 구우면 이래 바삭하게 잘 구워진다. 이상하재."

이상한 게 아니라 할머니니까 그런 거겠죠.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제일 먹고 싶던 음식도 갈치구이였대요. 그런데 생선구이 식당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조금만 더 구우면 과자가 될 것처럼 바싹 구운 그 맛은 없었다고 해요. 참다 못해 한달음에 부산으로 내려가니 할머니가 만삭의 손녀를 꼭 안아 주셨고,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몰라요" 하며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거 같았어요.


할머니에게서 저자에게로, 다시 저자에게서 아이들에게로 넘어가는 게 거창한 말씀이 아니라 가시 발라 주는 손길이라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갈치 편의 메뉴판 비하인드도 알차요. 갈치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지느러미만 살랑거리며 서서 헤엄친다는 것도, 칼을 닮은 생김새처럼 성질도 사나워서 먹이가 모자라면 동료까지 잡아먹는다는 것도, 1960년대까지는 동네 아이들이 말린 갈치를 껌처럼 씹고 다녔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서민 생선이 어쩌다 '금갈치'가 됐는지 유통 구조와 남획 얘기로 이어지는 부분도 흥미로웠고요. 조상들이 오늘날 갈치 가격을 보시면 놀라 자빠지실지도 모른다는 문장에는 마트 생선 코너 가격표 앞에서 멈칫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거 같습니다.


4부 (시간을 삶아낸 한 그릇, 수제비)는 반갑게 시작했다가 조용히 가라앉는 꼭지였어요. 주 6일제로 수업받던 시절, 토요일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멸치 다시 국물 냄새가 솔솔 나고 할머니가 "내 강아지 어서 온나. 퍼뜩 끓여줄게" 하며 맞아 주셨대요. 어린 저자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TV를 켜고 (출발, 비디오 여행)부터 봤고요. 토요일 오전 수업 마치고 집으로 뛰어가던 그 공기는 저희 또래라면 다들 아는 풍경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단정하게 빗은 뽀글 머리, 은은한 로션 냄새, 반짝이 장식 티셔츠에 몸빼바지. 할머니 모습이 어찌나 또렷하게 그려지는지 우리 동네 어느 집 할머니를 보는 거 같았어요.


어른이 되어 고향을 떠난 뒤로 저자는 그 맛을 찾아 다녔다고 해요. 들깨 수제비, 된장 수제비, 메밀수제비, 감자수제비, 해물 수제비까지 먹어 봤지만 심심한 듯하면서 계속 국물을 들이켜게 만드는 할머니 손맛은 어디에도 없었대요. 어쩌면 자기가 찾던 건 그 맛을 건네주던 할머니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고백이 이어지고, 살아 계시는 동안 제대로 된 밥 한 끼 대접해 드리지 못한 철없는 마음이 자꾸 수제비 한 그릇을 불러냈는지도 모르겠다는 문장이 그 뒤를 따라요.


이 꼭지의 메뉴판 비하인드에는 전쟁 뒤 원조 밀가루 얘기가 나오고, 음식점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한 '쌀 없는 날'과 선생님이 도시락에 잡곡을 섞었는지 검사하던 시절 얘기도 나옵니다. 할머니 수제비에 들어간 멸치 국물이 전국으로 퍼진 것도 1960년대 후반보다 더 뒤의 일이라니 신기하더군요. 저자는 수제비를 "우리가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조용히 기억하는 음식"이라고 불러요. 2부에 실린 (특별하진 않지만 충분한 한 잔, 믹스커피)에서 "완벽하지 않지만 충분한 것들로 버텨나가는 것"이라는 문장을 봤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탕비실 믹스커피 한 봉지로 오후를 버텨 본 직장인한테는 남 얘기 같지 않은 문장이에요.


에필로그를 보면 이 책은 아주 개인적인 그리움에서 시작됐다고 해요. 쓰다 보니 오래 열고 싶지 않던 기억까지 마주하게 됐고, 어떤 장면은 차마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지웠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하고요. 목차에 (에이스, 수치심의 맛) 같은 제목이 끼어 있는 걸 보면 예쁜 추억만 골라 담지는 않았다는 게 느껴집니다. 친구들이 뒤에서 수군거린 날에도,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은 날에도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밥상을 차려 주셨다고 해요.


"많이 묵어라." 그 한마디 뒤에 얼마나 많은 말이 숨어 있었는지 이제는 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저자는 할머니가 음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자신은 음식에 대해 쓰는 것으로 그 사랑에 답하고 싶었다고 해요. <기억의 맛>을 다 읽고 나니 이 책 전체가 "많이 묵어라"에 대한 긴 답장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솔직히 걸렸던 건 딱 하나예요. 읽는 내내 배가 고픕니다. 카레 꼭지에서는 카레가, 갈치 꼭지에서는 바삭한 갈치 껍질이, 수제비 꼭지에서는 멸치 국물 냄새가 계속 아른거려서 꽤 곤란했어요.

판형이 아담하고 두께도 보통 에세이만 해서 들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어요. 그런데 뒤쪽에는 백여 건이 넘는 참고 문헌이 붙어 있고, 각주도 백이십 개가 넘는다고 하더라고요. 책장에 꽂아 두고 그날 먹은 음식 꼭지만 골라 다시 펼쳐 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할머니 밥상이든 엄마 밥상이든, 누군가 차려 준 밥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면 어느 꼭지에선가 자기 얘기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9월 끝자락,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화요일이에요. 이런 날엔 뜨끈한 국물이 당기는데, <기억의 맛> 덕분에 오늘 저녁 메뉴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말보다 제가 먼저 살찌게 생겼어요. 누가 차려 준 밥 한 끼 든든하게 얻어먹은 것처럼 속이 따뜻해진 기분입니다.


카레 한 솥, 갈치 한 토막, 수제비 한 그릇 뒤에 숨은 할머니의 사랑과 우리 식탁의 역사를 함께 떠먹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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