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었습니다 - 27개의 단서로 복원한 27권의 책 이야기
요시타케 신스케.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지연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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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도넛이 C가 되는 순간까지 복원해 주는 책방, <책이었습니다> 서평


"어떤 책이든 복원해 드립니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허름한 빈집 앞에 이런 입간판이 서 있다면 저는 아마 그냥 지나치지 못할 거 같아요. 너덜너덜한 책은 물론이고, 한 줄만 남았거나 제목만 기억나는 책도 원래대로 되살려 준다니까요. 9월 마지막 날인데 마침 수요일이에요. 한 주 체력이 딱 반 남은 날이라 제 체력도 같이 복원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책이었습니다>는 그림책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와 <불꽃>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개그맨 출신 소설가 마타요시 나오키가 함께 만든 책입니다. 두 사람은 앞서 <그 책은>으로 한 번 호흡을 맞춘 적이 있어요. 그래도 이번 권부터 펼쳐도 따라가는 데 전혀 걸리는 게 없는 거 같아요. 앞 권을 읽으셨다면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만나는 기분일 테고요.


시작은 동화처럼 열립니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빨간 지붕 집, 덩굴이 타고 오른 책장, 그 앞에 놓인 빨간 의자가 나와요. 이 집이 옛날엔 작은 책방이었다는데 "조금 이상한 책방이었죠"라는 말이 슬쩍 붙어 있어요. 첫 장부터 뭔가 숨겨 둔 집 같은 느낌이 듭니다. 거기 들어와 사는 두 남자는 '전 세계 모든 책의 데이터가 들어 있는 기계'와 '어떤 책이라도 버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기계'를 갖고 있다고 해요. 파이프와 계기판이 얽히고설킨 그 기계 그림은 구석구석 뜯어보는 맛이 있더군요.

사례 이야기도 좋았어요. 두 남자는 음식이든 옷이든 뭐든 좋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수상하게 여기다가 별일이 없자 하나둘 의뢰서를 넣고, 남은 채소와 소소한 음식을 건네요. 가난한 마을이었고,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던 때라서 일상을 바꿔 줄 작은 재미가 필요했다고 하더군요. 사는 게 팍팍할수록 사람한테 필요한 건 생각보다 작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퇴근하면 유튜브만 켜던 제가 요즘 책부터 집어 드는 것도 비슷한 이유 아닐까 하고요.


구성이 참 재미있는 책이에요. 이야기마다 '책 복원 의뢰서' 카드가 먼저 한 장 나옵니다. "그 책은 제목이 (불쌍한 고릴라)이었습니다. 이건 어떤 책이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제목이나 첫 문장, 마지막 문장 같은 단서가 딱 하나만 적혀 있어요. 다음 장을 넘기면 줄 그어진 편지지 위에 "손님께. 그 책은 이런 내용의 책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복원본이 펼쳐지고요. 빨간 카드는 곱슬머리 캐릭터가, 파란 카드는 동그란 민머리 캐릭터가 복원을 맡습니다. 그래서 카드 색만 봐도 이번엔 누구 차례인지 알 수 있어요.


카드 앞에서 한 번씩 멈춰 먼저 맞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제목이 '불쌍한 고릴라'면 뭐가 불쌍할까, 마지막 문장이 '2천 년은 의외로 짧다'면 대체 누가 2천 년을 버텼을까 하면서요.

그리고 대부분 빗나갑니다. 시원하게요.

(불쌍한 고릴라)는 고릴라 셋이 모인 밴드 이야기예요. 기타와 베이스는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데, 드럼 맡은 고릴라는 자기 가슴을 양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냅니다. 데뷔를 앞두고 동료들은 드럼을 제대로 칠 줄 아는 고릴라를 찾았다며 그에게 나가 달라고 해요. "생각해 보면 가슴을 두드리는 일은 고릴라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드러머였던 고릴라는 그냥 고릴라가 됐다."

이 한 문장 앞에서 웃어야 할지 좀 헷갈렸습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이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닐까 싶은 날이 오거든요. 알았다고 대답하고 조용히 밴드를 떠나는 고릴라가 남 일 같지 않았어요. 이야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가는데, 그 한 걸음은 직접 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빨간 카드의 두 번째 이야기에는 2천 년 뒤 미래가 보고 싶었던 소년이 나와요. 2천 년을 살 수는 없으니 타임머신을 만들기로 하고, 거기 매달리는 사이 어른이 되어 박사라고 불리게 됩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겠다 싶어서 타임머신보다 먼저 '수명을 늘려 주는 사과'부터 개발하는데, 피식 웃다가 조금 뜨끔했어요. 일 하나 끝내려고 그 일을 위한 준비를 또 벌이는 모습은 회사에서 늘 보는 풍경이잖아요. 그 사과를 몇 개나 먹었는지, 단서가 왜 '2천 년은 의외로 짧다.'인지는 몇 줄 안 되는 이야기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파란 카드로 넘어가면 결이 확 바뀌는 느낌이 들어요. (정리 번호 17)은 첫 문장부터 엉뚱합니다. 우유를 마신 뒤 커피를 마시면 뱃속에서 커피 우유가 완성되고, 같은 식으로 경제·경영서를 읽고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면 머릿속에 '연봉 10억인 당신'이 완성된다는 거예요. 선글라스 낀 남자가 차 앞에 서 있는 말풍선 아래 노트북 앞에 멀뚱히 앉은 사람이 그려져 있어요. 그게 딱 저 같아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러다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맛을 본 기억은 없지만 커피 우유는 당신을 알고 있다. 돈을 출금할 순 없지만 10억은 당신을 알고 있다."

말장난 같은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거 같아요. 원소 단위까지 쪼개 보면 마음속엔 이미 성공과 좌절, 흥분과 후회, 다정함과 질투, 현명함과 용기와 냉정함이 다 들어 있는 셈이라는 문장도 이어집니다. 복원된 책이 원래 무슨 책이었는지는 끝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그 한 방이 제법 시원했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정리 번호 20)입니다. 안경 쓴 남자가 카페에서 커피와 도넛을 주문하고 "일을 해야지." 하며 작게 한숨을 쉬어요. 오른쪽 남자는 키보드를 시끄럽게 두드리고 왼쪽 여자는 향수 냄새가 진해서 도무지 집중이 안 되니, 기분이나 바꿔 보자며 도넛을 베어 뭅니다. 세 입인가 네 입째에 도넛의 둥근 원이 더는 동그라미가 아니게 되는 한 입이 와요. O가 C가 되는 그 순간엔 뭔가를 이룬 듯한 성취감과 뭔가를 무너뜨린 허탈함이 뒤섞인다고 하더군요. 동그랗지 않게 된 도넛을 계속 먹다 보면 "마치 본선 진출이 확정된 뒤 치르는 잔여 경기처럼 열정이 사그라든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잔여 경기라니.

마감을 앞둔 사람이 딴생각으로 슬금슬금 도망가는 모습을 이렇게 정확하게 그려 놓을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것보다 일을 해야 한다. 오늘 밤까지 기획안을 보내야 한다."로 겨우 정신을 차리는데, 이번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와요. 연체된 수도세 때문인가 싶어 받는 그 소심함까지 어찌나 사람 냄새가 나는지요. 단서가 '이런 이유로 나는 공룡입니다.'였다는 걸 떠올리면, 도넛 먹던 이 사람이 대체 어디까지 가게 될지 궁금해지실 거예요.


빨간 카드 쪽에서 오래 붙들고 있던 건 (정리 번호 13)이었어요. 첫 문장은 '저주의 말로만 채워졌지만 그건 러브레터였다.'입니다. "정말 못됐네. 너무 싫어."로 시작해서 남에게 상처 주고, 소문에 휘둘리고, 남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고,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일들이 쉴 새 없이 줄줄이 이어져요. 그러다 "당신을 괴롭히는 이런 모든 나쁜 감정을 저주하며 살 거야."로 닫히는 순간, 저주받는 쪽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괴롭히는 감정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런 러브레터를 받는 사람은 꽤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누구 편을 들어 준다는 게 이런 모양일지도 모르겠다 싶었어요.


만듦새도 소장 욕심이 나는 편입니다. 양장이라 손에 쥐는 맛이 단단하고, 갈색 바탕에 금빛 무늬 테두리를 두른 표지는 오래된 책방 서가에서 막 꺼낸 책 같아요. 초록색 가름끈이 달려 있어서 이야기 사이사이 끊어 읽기에도 좋고요. 그림도 정말 많아요. 기계 그림처럼 빽빽하게 채운 장면이 있는가 하면 펜 몇 줄로 툭툭 그린 장면도 있어서 넘기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표지 띠에 적힌 "나를 구해 준 건, 책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은 스물일곱 권의 복원본을 다 넘기고 나면 처음과는 조금 다르게 읽힐 거 같아요.


9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바람 끝이 제법 가을 같네요. 한 줄에서 책 한 권이 태어나는 걸 스물일곱 번이나 지켜보고 나니, 제 머릿속에 굴러다니던 한 줄들도 괜히 아까워집니다. 도넛 구멍이 사라지면 세상의 균형이 흔들린다는데, 제 뱃살 균형은 진작에 무너졌으니 도넛 하나쯤은 괜찮겠죠. 선선한 가을 초입에 <책이었습니다> 같은 책을 만나 마음이 한결 넉넉해진 기분이에요.


한 줄의 단서가 한 권의 이야기가 되는, 웃다가 뜨끔하고 가끔은 서늘해지는 스물일곱 번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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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왕 ㅣ 폭스코너 청소년소설 8
너새니얼 레소어 지음, 신선해 옮김 / 폭스코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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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왕관은 썼는데 얼굴이 없는 왕, <아무것도 아닌 왕> 서평


제목만 보고는 추수철 들판에 낫 들고 선 왕부터 떠올렸습니다. 킹 오브 '낫'띵이라니까요. 가을이라 그런 걸로 해 주세요.

표지를 다시 보면 커다란 왕관 아래 곱슬머리만 잔뜩 부풀어 있고 얼굴 자리는 텅 비어 있어요. 왕관은 썼는데 표정이 없는 왕. <아무것도 아닌 왕>은 그 빈 얼굴 주인이 누구인지 조금씩 따라가 보는 이야기 같더라고요.


주인공 앤톤 찰스는 사우스런던 어느 학교 복도를 자기 왕국이라고 부르는 아이예요. 케힌데, 케일럽, 마커스와 무리 지어 다니고, 누가 무리 중 하나를 밟으면 모두를 밟은 셈이라는 규칙으로 버팁니다. 첫 장면부터 싸움 얘기로 시작하는데 말투가 워낙 능청스러워서, 웃다가 보면 이 녀석 독백을 벌써 몇 장째 따라가고 있어요.


"꿈이란 건 토트넘 팬들과 마틴 루터 킹을 위한 단어다."

이런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녀석이라 처음엔 솔직히 좀 얄밉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생활지도실에서 벤저민 선생이 5년 후 자기가 어디 있을지 적어 내라는 과제를 냅니다. 코웃음 치던 앤톤이 결국 적어 낸 건 언제나 정원사가 되고 싶었다는 문장이에요. 장미, 야자수, 알로에 베라. 평생 삽 한 번 들어 본 적 없다면서 식물 이름만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선생은 그 종이를 읽더니 인상을 쓰고 접어서 자기 주머니에 넣어요. 허세 가득한 독백 바로 뒤에 이런 문장이 슬쩍 끼어 있으니 저도 모르게 속도를 늦춰 읽게 되더군요. 이 아이가 감춰 둔 게 생각보다 많겠구나 싶었습니다.

5년 후 어디 있을 것 같냐는 질문은 회사에서도 면담 때마다 나오잖아요. 마흔 후반쯤 되면 그 칸 채우는 게 은근히 어렵습니다.


앤톤이 식물 이름으로 빈칸을 메우는 걸 보면서 웃기기도 하고 남 일 같지 않기도 하고.

집에 가면 이 왕은 그냥 철부지 아들이고 손자예요. 엄마는 노란 고무장갑을 끼고 앤톤이 크리스마스에 선물한 'Fry me to the moon' 앞치마를 두른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앤톤은 (이스트엔더스) 배우 뺨치는 발연기로 버티다가 인터넷 일주일 금지를 받고, 방문을 쾅 닫는 바람에 벌이 한 달로 늘어나요. 지난번 벌 받을 때 엄마가 바꿔 놓은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AntonLuvsMummyWummy123'이었다는 대목에서는 소리 내서 웃었습니다. 이 어머님, 보통 분이 아니세요.


인터넷을 되찾으려면 지역 봉사 동아리 '해피 캠퍼스'에 매주 나가야 하는데, 하필 거기서 학교 공인 찐따 매튜와 한 팀이 됩니다.

매튜라는 아이가 참 좋았어요. 과학 시간에 주기율표 유인물을 받아 들고는 자기가 아는 원소는 (제5원소) 하나뿐이라고 목소리를 낮추는 녀석이에요. 캠핑장에서 앤톤이 타란툴라를 손바닥에 올려 볼 때는 옆에서 "넌 할 수 있어", "그렇지, 잘하고 있어. 천천히 숨 쉬고" 하고 다독여 줍니다. 1장의 패거리가 서로 부추겨 싸움판으로 밀어 넣던 모습을 떠올리면, 친구라는 말이 한 책 안에서 이렇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캠핑에서 앤톤은 매튜에게 크게 빚을 지게 되는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빚을 갚겠다는 앤톤에게 매튜가 기대에 차서 묻습니다. "학교에서 내 베프 해 주면 안 돼?" 돌아온 대답은 이랬어요. "안 되지, 인마. 현실적인 걸로 해."

솔직히 이 대목은 읽으면서 좀 걸렸습니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는 매튜가 눈에 선한데, 앤톤 머릿속엔 케힌데와 애들 눈빛부터 떠오르는 거죠. 그 나이에 무리 밖으로 한 발 내딛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자꾸 매튜 편을 들고 싶어지더라고요. 결국 둘은 '비밀 친구'가 되고, 앤톤이 매튜에게 해 주는 첫 번째 코칭은 이겁니다. "걔한테 그렇게 눈 깜빡깜빡하지 마. 귀신 들린 인형 같으니까."


맛보기로 하나만 더 꺼내 볼게요. 둘이 공포증을 같이 이겨 보자며 암벽 하강에 나섰는데, 앤톤은 초대형 거미로 충분했다며 쏙 빠지고 매튜 혼자 내려옵니다. 내려오는 내내 비명이고 "오,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까지 튀어나와요. 땅에 발을 딛고 다리를 덜덜 떨면서 한다는 말이 "어. 진짜 짜릿했어." 바로 뒤에서 꼬마 여자애가 심드렁한 얼굴로 쓱 내려오는데, 이 대비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캠핑에서 돌아온 앤톤은 마중 나온 엄마와 할머니를 인생 통틀어 가장 진하게 끌어안아요.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그날 아침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앤톤이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는 건 예전에 그 사람이 자기한테 거미를 던졌다는 것 하나뿐이라고 해요. 캠핑장에서 매튜의 응원을 받으며 타란툴라를 버텨 내던 장면이 떠올라서, 우연인지는 몰라도 두 장면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다 읽고 나서 제일 오래 생각난 사람은 앤톤의 엄마예요. 앤톤이 그저 '엄마 프로젝트' 정도로 여겨 온 세인트 루크스가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뒤에서 조금씩 드러나요. 그래도 엄마는 아들에게 모든 걸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네가 아직 어른이 아닌 시절을 마음 편히 즐겼으면 좋겠다고 하면서요. 그 이야기를 듣고 앤톤이 속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강함이라는 건 정말 다양한 모습과 크기로 나타나는구나." 1장에서 복도를 왕국이라 부르던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오래 남았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얘기야. 네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엄마랑 할머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꼭 기억하라고."

어른 입장에서 읽으니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말 중에 이게 제일 어렵고 제일 필요한 말 같았어요.

버스에서 "남자끼리 안는 거 아니다"라며 몸을 뒤로 빼던 녀석이, 나중에는 매튜 앞에서 그 사람을 닮아 갈까 봐 무섭다고 털어놓습니다. 늘 물렁하던 매튜가 그때만큼은 딱 잘라 말해요. "네 미래는 네가 정하는 거야, 앤톤." 5년 후를 적으라는 질문에 식물 이름을 늘어놓던 장면이 그제야 다시 생각나더군요. 그리고 앤톤이 매튜를 위로하면서 할머니가 자주 하셨다는 말을 들려주는데, 이것도 웃기면서 맞는 말이었어요. 남의 다리에 깁스했다고 내 두통이 낫는 건 아니래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인데 페이지는 얇은 책처럼 넘어갑니다. 2025년 카네기 섀도어스 초이스상, 워터스톤즈 아동도서상 고학년 부문, 잘락상 아동·청소년 부문을 받은 작품이라는데, 청소년들이 직접 읽고 뽑는 상까지 받은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영국 드라마나 축구팀처럼 우리한테 낯선 이야기에는 신선해 번역가님의 옮긴이 주가 붙어 있어서 흐름이 끊기지 않았고요. 청소년소설로 분류되긴 해도 앤톤의 엄마와 할머니 쪽에 마음이 가는 어른이 읽어도 충분히 좋습니다. 왕관 쓴 곱슬머리 표지도 책장에 꽂아 두면 괜히 한 번씩 눈이 가요.


이런 이야기는 읽고 나면 즐겁더라고요. 웃은 만큼 따뜻해지는 책이었습니다.

벌써 10월 첫날, 한 주의 한가운데인 목요일이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앤톤 엄마 따라 저희 집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바꿔 볼까 했는데, 그랬다간 제가 먼저 쫓겨날 것 같아서 참았어요. 가을 초입에 좋은 친구 둘을 새로 사귄 기분이라 마음이 넉넉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왕>, 이번 가을 책장에 한 권 들여 보셔도 좋겠어요.


학교의 왕 앤톤이 '공식 찐따' 매튜를 만나 왕관 아래 진짜 얼굴을 조금씩 들여다보는, 웃기고 따뜻한 성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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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의 법칙
김주환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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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제가 그걸 왜 해야 하는데요?"

회사에서 후배한테 이 말을 들으면 속으로 한 번 욱하는 게 저희 또래일 거 같아요. 이 문장을 영업 책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더 뜻밖이었던 건 저자가 이 질문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납득만 하면 누구보다 잘 해내는 세대라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판매의 법칙>은 강남에서 20년 가까이 빌딩 중개를 해 온 김주환 대표의 책이에요. 제목만 보면 고객 마음을 끌어오는 화술 모음집 같은데, 펼쳐 보니 사람이 버티는 법과 사람을 키우는 법이 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저자 이력은 숫자부터 셉니다. 2007년에 단돈 300만 원 들고 상경해서 입사 2년 만에 억대 연봉을 찍었고, 지금까지 중개 수수료로만 150억 원을 벌었다고 해요. 그런데 본인은 영업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대요. 거절당하고, 다시 시도하고, 실패하고, 일어서는 과정을 누구보다 빨리, 치열하게 반복했을 뿐이라고요.



결국은 반복.

표지는 흰 바탕에 금색 글자, 가운데 작은 열쇠 하나라서 단정하고 점잖은 인상이에요. 속은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법칙이 바뀔 때마다 짙은 회색 바탕에 민트색 테두리를 두른 간지가 한 장씩 들어 있는데, 카드 게임에서 카드를 한 장씩 뒤집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두께도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한 손으로 오래 들고 있으면 판매의 법칙보다 '팔'매의 법칙이 먼저 느껴지는 책이에요.


유독 속도를 늦춰 읽게 된 건 3장 맷집의 법칙이었어요. 초보 영업인일수록 거절을 당하면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린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저자가 그 속마음을 그대로 옮겨 놨더군요.


'내 설명이 부족했나?'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제안 하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인데, 자기라는 사람 전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거절당하면 그 감정이 더 커진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회의에서 기획안이 퇴짜 맞아 본 사람이라면 영업을 안 해 봤어도 이 얼굴 화끈거림은 다 알 거 같아요. 평소 10번 들던 무게를 15번 들면 당연히 힘든데 그걸 실패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는 비유가 바로 뒤에 붙어 있고요.


그렇다고 무조건 밀어붙이라는 책은 아니더라고요. 상대가 통화를 끊어 버리거나 대화를 분명히 거부하면 그 뜻도 존중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선을 긋습니다. "한 번 더 묻는 것과 상대가 싫다고 하는데 계속 압박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영업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보니 오히려 믿음이 가더군요.


저자의 신입 시절 이야기는 읽는 내내 재미있었어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전화를 걸었는데, 막상 상대가 호의적으로 나오니 그다음에 뭘 물어야 할지 몰랐대요. 첫 문장만 준비해 뒀던 거죠. 그 뒤로는 통화가 끝날 때마다 질문과 답을 메모하고, 전화 잘하는 선배의 통화를 엿들으며 몰래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흉내 내는 수준이었는데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자기만의 화법이 생겼대요. 작고 위축된 목소리는 자신 없는 태도로 전달된다며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냈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책 안에 구호처럼 박혀 있는 문장이 하나 있어요. "NO=NEXT OPPORTUNITY". 계약 성사율이 10%라면 한 건을 위해 아홉 번의 거절은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는 계산입니다. 저는 그 뒤에 나오는 작은 성공의 목록이 참 좋았어요. '전화가 30초 만에 끊기지 않았다', '매도 희망 가격을 들었다', '다음 통화를 약속했다'. 이런 것까지 성공으로 쳐 준다는 게 은근히 위로가 되더라고요.


중년 직장인으로서 제일 크게 반응한 건 5장 리더십의 법칙이었어요. 사이먼 시넥의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미 해병대에서는 가장 계급이 낮은 병사들이 먼저 식사를 마친 뒤에야 지휘관이 마지막으로 먹는다고 합니다. 저자가 리더십 교육 때 자주 한다는 말도 옆에 나와요. "리더십의 본질은 '나는 네 편이다'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신입사원은 이미 성인이지만 이 회사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와 같다는 대목에서는 조금 뜨끔했습니다. 많은 팀장이 자기도 같은 시간을 거쳤다는 걸 잊고, 이미 익숙해진 자기 기준으로 신입을 평가한다고 하더군요. 그 팀장 자리에 제 얼굴을 넣어 보니 영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기까지 수천 번 넘어지듯, 신입 중개사가 첫 계약을 따내기까지는 리더의 인내심 있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비유도 오래 남을 거 같습니다.


맨 앞에 쓴 그 질문도 여기서 나와요. 저자는 권위로 사람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일을 시킬 때도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어떻게 설명해야 기꺼이 움직일까'를 고민해 보라고 합니다. 예전 영업은 선배들이 노하우를 잘 알려 주지 않는 개인전 분위기였대요. 그런데 요즘 저자의 회사에서는 직원끼리 SNS 마케팅이나 유튜브 운영 방법을 서로 묻고 배운다고 하더라고요.


직원 성향을 분석형, 실행형, 협상형으로 나눈 코칭 전략 박스도 있어요. 분석형은 수치와 근거에, 실행형은 명확한 목표와 행동 중심의 언어에, 협상형은 신뢰와 진심 어린 관심에 반응한다는 정리입니다. 주변 동료들 얼굴을 하나씩 대입해 보게 되는 페이지였어요. 3장에 있는 지그 지글러의 '판매의 5가지 장애물' 표와 함께 두고두고 다시 펼쳐 볼 만한 자료 같더군요.


솔직히 마음에 걸린 대목도 있어요. 직원 교육이 끝나고 받은 후기에 누군가 "빠르게 계약을 쓸 방법이나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적었는데, 저자는 순간 '밥을 차려주는 것도 모자라 숟가락으로 밥까지 떠먹여 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저자 쪽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후기를 쓴 직원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지치고 막막할 때 지름길 하나만 알려 달라고 하고 싶은 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시도를 많이 하라는 저자의 답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양쪽 마음이 다 이해돼서 한쪽 편만 들기는 어렵더라고요.


에필로그에는 저자의 출발점이 나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무단결석이 300일에 이르렀고, 100kg이 넘는 몸 때문에 아침 구보조차 제대로 뛰지 못했다고 해요. 월세를 내고 나면 주머니에 2만 원밖에 남지 않던 시절, 늘 비슷한 옷만 입던 단벌 신사 시절 이야기도 있고요. 그 끝에 저자가 꺼내 놓는 말은 이거였어요. "사람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 책이 모든 독자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바꾸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며칠 뒤면 대부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저자가 먼저 말하는 부분도 좋았어요. 그래도 책을 덮는 순간부터 하나라도 행동으로 옮겨 보라고 합니다. 전화를 한 통 더 걸어도 되고, 미뤄 둔 공부를 시작해도 되고, 오늘 실패한 계약을 다시 복기해도 된다고요.


저자는 이 책이 직원들 책상 한쪽에 꽂혀 있다가 막힐 때마다 펼쳐 보는 영업 교본이 되길 바란다고 했어요. 법칙이 카드 한 장씩 나뉘어 있어서 그날 막힌 부분만 골라 읽기 편하니, 그 바람이 괜한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 물건을 팔지 않더라도 기획안이든 의견이든 결국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파는 게 직장 생활이라, <판매의 법칙>은 영업하는 분들 책상만큼 일반 사무실 책상에도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에필로그 끝에서 저자는 언젠가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자기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며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라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해요. 그 문장 덕분인지 <판매의 법칙>은 먼저 걸어간 선배가 들려주는 긴 이야기처럼 읽혔습니다.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진 9월의 마지막 화요일이에요. 이번 주는 누가 "노"를 해도 '노 프라블럼' 하고 넘겨 볼 생각입니다. 마음 한쪽에 맷집 한 칸 늘려 둔 기분이라 든든하네요.


거절을 버티는 맷집과 사람을 키우는 리더십까지, 먼저 걸어간 선배가 건네는 18년 현장의 실전 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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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 ㅣ 한국철학전집 3
정도전 지음 / 결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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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정도전은 평생 기도하지 않았다, 설계했다.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 서평


표지부터 기운이 셉니다.

까만 바탕에 흰 갓을 쓴 얼굴 하나가 비스듬히 앉아 있고, 그 뒤로 뿌연 달이 걸려 있어요. 옆으로는 鄭道傳 세 글자가 세로로 큼직하게 서 있습니다. 판화 같은 흑백 질감이라 그런지 눈빛이 꽤 매섭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첫 장을 열면 고려 말 궁궐 대신 퇴근길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회의는 끝났고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내가 준비한 자료는 결정의 장식품에 가까웠다는 장면이에요. 조선 건국 이야기인 줄 알고 펼쳤는데 첫 문단부터 우리 사무실 얘기를 하고 있으니 괜히 뜨끔하더군요.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는 출판사 결에서 펴내고 있는 <한국철학전집>의 세 번째 책이에요. 앞서 이순신 편과 세종대왕 편이 나왔으니, 앞 권 서평 먼저 보고 오시면 편해요. 권마다 다루는 인물이 달라서 이 책부터 펼쳐도 전혀 문제는 없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이자 한 주의 허리쯤인 수요일이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반팔 위에 뭘 하나 걸칠까 고민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이런 날씨엔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지는데, 마침 생각할 거리가 잔뜩 든 책을 만났어요.


솔직히 정도전 하면 사극에서 이성계 옆을 지키던 책사 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은 그 이미지를 꽤 과감하게 흔드는 편이에요. 그를 이성계를 도운 참모로만 기억하면 그의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거든요. 책이 그리는 정도전은 왕 하나가 나라를 망칠 수 없게 나라의 구조를 짠 사람이에요. 왕좌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문장으로 못 박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듣고 보니 저는 그동안 정도전을 딱 정도껏만 알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게 폭군 한 사람보다 우연이었다는 대목이 재미있었어요. 다음 왕이 능력이 아닌 핏줄로 정해지는 건 나라의 운명을 제비뽑기에 맡기는 일이라는 거죠. 책은 이 생각을 곧장 사무실로 옮겨 옵니다. 팀장이 유능하면 팀이 살고 무능하면 팀이 죽는 조직은 한 사람에게 기대는 도박이라고요. 좋은 팀장 만나게 해달라고 비는 마음이 있고, 팀장이 바뀌어도 굴러가는 업무 구조를 만드는 마음이 있는데, 둘은 완전히 다른 종류라는 얘기가 이어져요. 그 끝에 이런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정도전은 평생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설계했다."

짧은데 세요, 이 두 문장.

인물로서의 정도전은 따뜻하게 그려지지 않아요. 책도 그를 위인으로 소개할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밝히는 편이고요. 오랜 벗이나 스승 격인 인물과도 갈라섰고, 잔혹한 처분들 곁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도 감추지 않습니다. 외가에 노비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평생 시비에 시달렸고, 그 시대의 룰로는 결코 왕좌에 오를 수 없는 사람이었대요. 이 대목에서는 마음이 좀 복잡해지더라고요.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는 원망하지도, 무작정 부딪치지도 않았다고 해요. 벽을 인정하고 꼭대기를 포기한 뒤 왕관의 규격을 정하는 자리로 옮겨 앉았다는 거예요. 책은 이 선택을 두고 "체념이 아니다. 훨씬 무서운 종류의 야심이다"라고 씁니다.


그는 결국 이방원 쪽의 기습으로 목숨을 잃었고, 역적으로 몰려 이름도 오래 지워졌어요. 그런데 그를 제거한 쪽조차 그가 설계한 법전과 행정 조직, 도시 구조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책에서는 사람은 지웠으나 설계도는 지우지 못했다고 표현하더군요. 싸움에서는 졌는데 구조에서는 이겼다는 평가를 듣고 나니, 한 사람의 생애를 어디까지 보고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중반쯤 군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결국 직장 이야기였어요. 조선이 섰다고 군대가 곧바로 하나가 된 건 아니었대요. 장수마다 병력도 신호도 대열 세우는 방식도 제각각이었다고 해요. 정도전은 병서를 지었고, 태조는 <진도>와 <수수도>를 펴내 모두 그 방식대로 훈련하게 했습니다. 장수 머릿속에 있던 판단을 종이 위로 끌어내린 셈이에요. 책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머릿속에 있으면 개인의 것이고, 종이에 있으면 국가의 것이다."

훈련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휘관 292명이 한꺼번에 탄핵된 일도 나와요. 왕자와 공신에게는 차마 손대지 못했지만, 그 휘하 지휘관들이 대신 매를 맞았다고 하고요. 책이 여기서 붙잡는 건 예외가 있느냐 없느냐예요. 예외가 하나 생기면 나머지 사람들은 규정보다 눈치를 먼저 보게 된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라고요. 어느 조직이든 늘 예외인 한 사람은 있으니까요.


"대부분의 기준은 첫 예외에서 죽는다."

인수인계 문서 이야기에서는 웃음이 좀 났어요. 퇴근 무렵 인수인계 문서를 열어 놓고 얼마나 자세히 쓸지 망설여 본 적이 있을 거라는데요. 다 쓰면 손해 같고 안 쓰면 옹졸한 것 같은 그 애매한 감정을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내는지요. 2주 동안 연락이 끊기면 무엇이 멈추는지 물어보라는 대목도 있어요. 멈추는 게 많을수록 조직 입장에서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니, 저도 모르게 저만 아는 파일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른 대목보다 천천히 눈으로 따라가며 읽었던 건 후반부 유배지 이야기였어요. 나주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이 이십 년 뒤 새 수도의 자리를 정하는 논쟁 한복판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한양의 주산을 두고 무학은 인왕산을, 정도전은 북악을 등져야 한다며 의견이 갈렸다고 해요. 책도 이 일화는 사료로 확정하기 어려운 전승이라고 밝혀 둡니다. 다만 두 사람이 실제로 다툰 건 무엇을 근거로 나라의 중심을 정할 것인가였다고 풀어내요.


그리고 이야기는 곧장 회의실로 넘어옵니다. 왜 이렇게 하냐고 물으면 원래 이렇게 해왔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순간이 있잖아요. 근거를 물을 수 없는 규칙은 권위로 유지되고, 그런 규칙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린다는 설명이 이어져요. 회사 밥을 오래 먹은 입장에서는 반박할 말이 하나도 없더군요.

회의에서 "왜요?" 하고 물으면 공기가 식는 걸 느껴봤을 거라는 문장도 있어요. 무례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고 예민한 사람으로 찍힐 것 같아서 결국 말을 삼키게 되죠. 그러고는 회의가 끝나고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아까 말할걸 후회한다는 장면이 나와요. 그 후회가 몇 년 쌓이면 조직에서 가장 성실하게 관행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누가 제 얘기를 받아 적은 줄 알았습니다.


책은 거기서 위로만 하고 끝내지 않아요. 의심 없이 따라온 규칙 세 개를 종이에 적어보라고 권합니다. 왜 하는지 모르지만 계속 하는 일, 왜 안 되는지 모르지만 안 된다고 믿는 일, 왜 그 순서인지 모르지만 늘 그 순서로 하는 일이요. 적고 나면 대개 불편해진대요. 그중 하나쯤은 십 년 넘게 지켜온 것이기 때문이라고요. 중년 직장인한테는 이 말이 좀 아프게 들리는 거 같아요. 그래도 옛것을 전부 버리라는 얘기는 아니어서 다행이었어요. 정도전 역시 옛 문헌을 근거로 삼았고, 판단 기준은 오래됐느냐보다 설명할 수 있느냐라고 하거든요.


맛보기로 한 대목만 옮겨볼게요.

"대안 없는 반대는 태클로 들린다. 대안이 있는 반대는 설계로 들린다. 같은 말을 해도 전자는 밀려나고 후자는 검토된다."

관행을 흔들고 싶다면 먼저 준비할 것은 용기가 아니라 대체안이라는 말이 뒤따르는데, 이 부분은 회사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 목차를 훑을 때는 솔직히 좀 긴장했어요. 세상의 목을 베고 새 판을 짜라, 무능한 리더를 허수아비로 세워라 같은 제목이 줄줄이 나오니까요.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센데, 목차까지 이러니 이거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런데 본문을 따라가 보면 문장이 의외로 차분합니다. 반론도 먼저 꺼내 놓고, 21세기에 왕조를 갈아엎으라는 조언은 무책임하다며 스스로 선을 긋기도 해요. 읽다가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게 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미리 말해 두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센 제목에 한 번 놀라고, 본문에서 한 번 더 찔리는 셈이랄까요.


판형은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크기이고, 두께도 보통 인문서보다 가뿐한 편이에요. 그래도 한 번 읽고 꽂아 두기엔 아까운 책입니다. 곳곳에 "당신은 지금 어느 쪽인가" 하고 묻는 질문이 박혀 있어서, 회사에서 일이 꼬일 때마다 다시 펼쳐 볼 만하거든요. <한국철학전집> 앞 권들과 나란히 꽂아 두면 책장이 제법 든든해질 것 같아요.


9월도 오늘로 끝이네요. 가을바람이 선선해지니 저도 뭔가 하나쯤은 바꿔 보고 싶어집니다. 책에서 권한 대로 책상 방향부터 슬쩍 돌려볼까 하는데, 돌렸다가 부장님 자리랑 정면으로 마주치면 판이 통째로 깨질 수도 있으니 방향은 좀 더 궁리해 보려고요.

좋은 책 한 권 덕분에 한 주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진 기분입니다.


좋은 사람 하나를 기다리지 않고, 좋은 사람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판을 짠 정도전의 방식을 오늘의 사무실로 옮겨 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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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머무는 마음 - 시가 피어나고 그림이 머무는 자리
나태주 지음, 나난 그림 / OTD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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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미운 건 없어? 그럼 됐어. 9월 끝자락에 만난 <오래 머무는 마음>


잘 잤어? 아침 햇빛은 눈부시고? 미운 건 없어?

시집을 열면 앞쪽에서 이런 안부가 먼저 기다리고 있더군요. 나태주 시인의 (아침 인사)는 몇 가지를 묻고 나서 "그럼 됐어 / 오늘도 / 잘 살기 바래"로 끝납니다. 미운 게 없으면 됐다는 기준이 소박해서 도리어 마음이 탁 풀리는 거 같아요. 부장님 결재보다 훨씬 통과하기 쉬운 기준이라 더 반갑기도 하고요.


오늘 이야기할 책은 <오래 머무는 마음>이에요. 풀꽃시인 나태주의 시와 윈도 페인팅 아티스트 나난의 그림을 한 권에 엮은 시화집이고, OTD에서 나왔습니다. 서평단을 하면서 새 책 오는 날이 기다려지게 됐는데, 이번 책은 표지부터 온통 분홍이더라고요.

결이 느껴지는 분홍 바탕 한가운데 큼직한 꽃 두 송이가 있고, 초록 잎과 노란 해, 구름 자락이 그 둘레를 채우고 있어요. 양장이라 손에 쥐면 단단하고, 판도 보통 시집보다 넉넉해서 그림 보는 맛이 있습니다. 아재가 들고 다니기엔 색이 좀 수줍긴 한데, 제목에 마음이 들어가 있으니 봐주기로 했어요.


그림이 놓이는 방식이 이 책만의 재미 같아요. (봄밤) 옆에서는 노란 새 두 마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나란히 앉아 있고, (꽃향기)에서는 나비 한 마리가 페이지 구석에 살짝 내려앉아 있어요. 시가 적힌 면 뒤로 그림 윤곽이 연하게 비치는 장도 많습니다. (꽃다발) 곁의 그림은 이름은 꽃다발인데 생긴 건 꼭 한 그루 나무 같았어요. 굵은 초록 줄기가 기둥처럼 올라가고, 분홍 데이지와 붉은 백합, 보라색 종 모양 꽃이 가지처럼 뻗어 있거든요. 나난 작가는 작업 노트에 "그림이 시보다 앞서거나 더 많은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라고 적었는데, 정말 그림이 시 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꽃다발)은 이렇게 짧아요.

"마음을 보여줄 수 없어 / 꽃을 보여주고 // 마음을 줄 수 없어 / 꽃다발을 드리니 // 부디 거절하지 /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두 줄이 참 사람 냄새 나더라고요. 꽃다발을 내밀면서 괜히 눈길을 피하는 얼굴이 그려지는 거 같고요. 이 나이쯤 되니 꽃 한 다발 사 들고 가는 게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압니다.


키 큰 애들 향기, 키 작은 애들 향기.

(꽃밭 옆)에서는 하얀 꽃들이 "반가워요", 붉은 꽃들이 "좋아요" 하고 인사를 건네요. 그러면 시인도 "그래 그래 / 그래"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저도 하루에 고개를 꽤 여러 번 끄덕이는 편인데, 이렇게 절로 나오는 끄덕임은 언제 해 봤는지 모르겠어요.

1장이 꽃 이야기라면 2장부터는 그 자리에 사람이 들어섭니다. (오랜 사랑)은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고 바다는 변하여 물이 되는데, 사람의 마음과 우리의 사랑은 무엇이 되느냐고 두 번 물어요. 두 질문 사이에는 밤새워 우는 새, 아침 이슬, 기와집 처마 끝에 걸린 초승달, 더러는 풍경소리 같은 장면만 놓여 있고요. 쉬운 답은 끝까지 내놓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그 풍경들이 답인가 싶다가도, 또 아닌 거 같기도 하고.


2장에서 읽는 속도를 일부러 늦춘 시는 (옆 사람)이었어요. 하늘길 가던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옆으로 왔나 보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네게서 하늘 냄새가 나겠느냐고 합니다. 사막에 핀 꽃송이가 바람 따라 왔나 보다고, 그래서 마른 모래 냄새가 나는 거라고도 하고요. 그러고는 옆 장에 "목이 마르다 / 졸음이 오려고 한다 / 어깨를 좀 빌려다오 / 기대어보자."가 이어집니다. 별과 꽃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목마르고 졸리니 어깨 좀 빌리자는 데까지 가니까, 오래 곁에 있어 온 사람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어요. 그림에는 주황 꽃과 노란 꽃 두 송이가 금빛 구름 무늬 위에서 서로 기대듯 겹쳐 있는데, 시랑 참 잘 맞아서 좋았습니다.


(우리가 마주 앉아)도 비슷한 결이에요. 마주 앉아 웃으며 이야기하던 나무에 둘의 숨결과 웃음소리가 스며서, 그 자리를 떠나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은 뒤에도, 해마다 봄이면 나무가 그 소리를 되받아 "싱싱하고 푸른 새잎으로 피울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시 끝에는 남색 가지 위에 분홍 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어요. 제가 잊어버린 웃음소리들도 어딘가에서 새잎이 되고 있을까요.

(마지막 기도)는 조용히 읽게 되는 시예요. 사랑하는 마음이 언젠가 미움으로 변할까 걱정되니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바로 이어서 그를 사랑했던 마음이 오래 후회될까 걱정되니 어떤 경우에도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빕니다. 두 부탁이 서로 반대쪽을 보는 것 같은데, 읽고 나면 결국 한 사람을 향한 같은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맞은편 그림에서는 붉은 분홍 붓질이 둥글게 감싸 도는 가운데 모은 두 손이 노란 꽃 한 송이를 받쳐 들고 있어요.


솔직히 뜨끔했던 줄도 있어요. (너무 외로워 마세요)에서 다른 사람들이 섭섭하게 대하면 "오히려 /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섭섭하게 / 대해주지 않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라고 하거든요. 회사에서 서운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오르는데, 그중 몇 개는 제가 먼저 서운하게 한 건 아니었나 싶어지더군요.

위로받으러 들어갔다가 한 대 맞고 나온 기분이랄까요.

그래도 같은 시에 "지금 당신의 일로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마세요"라는 줄이 바로 붙어 있어서, 찔린 데를 금방 다독여 줍니다. "모든 좋은 일에 끝이 있듯이 / 아무리 어려운 일 어두운 일에도 /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음을" 믿으라는 대목은 월요병을 달고 사는 직장인한테 꽤 쓸모 있는 문장이에요. 가끔은 발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과 바람을 느껴 보라는 권유도 이어지고요.


3장으로 넘어가면 계절이 가을 쪽으로 기웁니다. (낙엽처럼)은 이별 인사도 여러 번, 사랑 고백도 여러 번, 아픔과 아쉬움이 마음에 남지 않을 때까지 하고 나서, 끝내 헤어질 때는 가볍게 손을 흔들자는 시예요. "호숩게 호숩게 / 안녕 안녕 / 다만 사랑해서 좋았단다." 호숩게라는 말이 입에 착 붙어요. 끝면에는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 갈색 잎 세 장이 데굴데굴 굴러가듯 그려져 있습니다.

(시계 선물)은 시계를 드리고 싶다고, 그 시계를 보며 오래오래 나를 생각해 달라고 말을 꺼냈다가 "아닙니다 / 나 없는 세상에서도 / 오래오래 잘 살아달라고."로 말을 바꿔요. 선물에 담는 마음이 여기까지 갈 수 있구나 싶었어요. 그 옆의 (바람 부는 날)은 더 짧습니다. "당신이 곁을 / 지켜주시어 // 덜 흔들릴 수 / 있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그림이 시의 곁을 조용히 지키기를 바랐다는 나난 작가의 말과 이 시가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책 끝의 작업 노트도 그냥 넘기기 아까웠어요. 나난 작가는 "제게 꽃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건네는 방식이며, 말로 다 담지 못한 감정을 대신 전하는 또 하나의 언어입니다"라고 씁니다. 2년째 수련하고 있는 미술치료 현장에서 사람들이 말로 다 꺼내지 못한 마음을 꽃과 자연에 조용히 맡기곤 했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부업으로 비단 위에 꽃 자수를 놓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한 땀 한 땀 수놓인 꽃들이 자기 삶의 씨앗이 되었다고 적은 대목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니 책 속 꽃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거 같아요.


<오래 머무는 마음>은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해도 그 칸만 봄 같은 책이에요. 꽃다발 대신 누군가에게 건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꽃다발)의 마지막 두 줄을 쪽지에 적어 끼워 주면 딱일 거 같습니다. 시가 짧고 그림이 숨 돌릴 틈을 만들어 줘서, 퇴근하면 유튜브부터 켜던 예전의 저 같은 사람도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는 호흡이더라고요.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9월 마지막 주 수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어요. 이 책의 계절은 봄꽃에서 출발해 낙엽까지 한 바퀴를 도는데, 지금이 딱 그 끝자락이라 더 잘 맞는 거 같습니다.

수요일이 원래 이렇게 화사한 요일이었나 싶네요.


내일 아침엔 누구한테든 "잘 잤어?" 한마디 먼저 건네고 싶어지는, 다정한 책을 만나 흐뭇했습니다.


봄꽃에서 낙엽까지, 나태주의 시 곁을 나난의 그림이 조용히 지켜 주는 다정한 시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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