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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머무는 마음 - 시가 피어나고 그림이 머무는 자리
나태주 지음, 나난 그림 / OTD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미운 건 없어? 그럼 됐어. 9월 끝자락에 만난 <오래 머무는 마음>
잘 잤어? 아침 햇빛은 눈부시고? 미운 건 없어?
시집을 열면 앞쪽에서 이런 안부가 먼저 기다리고 있더군요. 나태주 시인의 (아침 인사)는 몇 가지를 묻고 나서 "그럼 됐어 / 오늘도 / 잘 살기 바래"로 끝납니다. 미운 게 없으면 됐다는 기준이 소박해서 도리어 마음이 탁 풀리는 거 같아요. 부장님 결재보다 훨씬 통과하기 쉬운 기준이라 더 반갑기도 하고요.
오늘 이야기할 책은 <오래 머무는 마음>이에요. 풀꽃시인 나태주의 시와 윈도 페인팅 아티스트 나난의 그림을 한 권에 엮은 시화집이고, OTD에서 나왔습니다. 서평단을 하면서 새 책 오는 날이 기다려지게 됐는데, 이번 책은 표지부터 온통 분홍이더라고요.
결이 느껴지는 분홍 바탕 한가운데 큼직한 꽃 두 송이가 있고, 초록 잎과 노란 해, 구름 자락이 그 둘레를 채우고 있어요. 양장이라 손에 쥐면 단단하고, 판도 보통 시집보다 넉넉해서 그림 보는 맛이 있습니다. 아재가 들고 다니기엔 색이 좀 수줍긴 한데, 제목에 마음이 들어가 있으니 봐주기로 했어요.

그림이 놓이는 방식이 이 책만의 재미 같아요. (봄밤) 옆에서는 노란 새 두 마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나란히 앉아 있고, (꽃향기)에서는 나비 한 마리가 페이지 구석에 살짝 내려앉아 있어요. 시가 적힌 면 뒤로 그림 윤곽이 연하게 비치는 장도 많습니다. (꽃다발) 곁의 그림은 이름은 꽃다발인데 생긴 건 꼭 한 그루 나무 같았어요. 굵은 초록 줄기가 기둥처럼 올라가고, 분홍 데이지와 붉은 백합, 보라색 종 모양 꽃이 가지처럼 뻗어 있거든요. 나난 작가는 작업 노트에 "그림이 시보다 앞서거나 더 많은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라고 적었는데, 정말 그림이 시 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꽃다발)은 이렇게 짧아요.
"마음을 보여줄 수 없어 / 꽃을 보여주고 // 마음을 줄 수 없어 / 꽃다발을 드리니 // 부디 거절하지 /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두 줄이 참 사람 냄새 나더라고요. 꽃다발을 내밀면서 괜히 눈길을 피하는 얼굴이 그려지는 거 같고요. 이 나이쯤 되니 꽃 한 다발 사 들고 가는 게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압니다.
키 큰 애들 향기, 키 작은 애들 향기.
(꽃밭 옆)에서는 하얀 꽃들이 "반가워요", 붉은 꽃들이 "좋아요" 하고 인사를 건네요. 그러면 시인도 "그래 그래 / 그래"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저도 하루에 고개를 꽤 여러 번 끄덕이는 편인데, 이렇게 절로 나오는 끄덕임은 언제 해 봤는지 모르겠어요.
1장이 꽃 이야기라면 2장부터는 그 자리에 사람이 들어섭니다. (오랜 사랑)은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고 바다는 변하여 물이 되는데, 사람의 마음과 우리의 사랑은 무엇이 되느냐고 두 번 물어요. 두 질문 사이에는 밤새워 우는 새, 아침 이슬, 기와집 처마 끝에 걸린 초승달, 더러는 풍경소리 같은 장면만 놓여 있고요. 쉬운 답은 끝까지 내놓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그 풍경들이 답인가 싶다가도, 또 아닌 거 같기도 하고.

2장에서 읽는 속도를 일부러 늦춘 시는 (옆 사람)이었어요. 하늘길 가던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옆으로 왔나 보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네게서 하늘 냄새가 나겠느냐고 합니다. 사막에 핀 꽃송이가 바람 따라 왔나 보다고, 그래서 마른 모래 냄새가 나는 거라고도 하고요. 그러고는 옆 장에 "목이 마르다 / 졸음이 오려고 한다 / 어깨를 좀 빌려다오 / 기대어보자."가 이어집니다. 별과 꽃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목마르고 졸리니 어깨 좀 빌리자는 데까지 가니까, 오래 곁에 있어 온 사람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어요. 그림에는 주황 꽃과 노란 꽃 두 송이가 금빛 구름 무늬 위에서 서로 기대듯 겹쳐 있는데, 시랑 참 잘 맞아서 좋았습니다.
(우리가 마주 앉아)도 비슷한 결이에요. 마주 앉아 웃으며 이야기하던 나무에 둘의 숨결과 웃음소리가 스며서, 그 자리를 떠나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은 뒤에도, 해마다 봄이면 나무가 그 소리를 되받아 "싱싱하고 푸른 새잎으로 피울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시 끝에는 남색 가지 위에 분홍 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어요. 제가 잊어버린 웃음소리들도 어딘가에서 새잎이 되고 있을까요.
(마지막 기도)는 조용히 읽게 되는 시예요. 사랑하는 마음이 언젠가 미움으로 변할까 걱정되니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바로 이어서 그를 사랑했던 마음이 오래 후회될까 걱정되니 어떤 경우에도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빕니다. 두 부탁이 서로 반대쪽을 보는 것 같은데, 읽고 나면 결국 한 사람을 향한 같은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맞은편 그림에서는 붉은 분홍 붓질이 둥글게 감싸 도는 가운데 모은 두 손이 노란 꽃 한 송이를 받쳐 들고 있어요.
솔직히 뜨끔했던 줄도 있어요. (너무 외로워 마세요)에서 다른 사람들이 섭섭하게 대하면 "오히려 /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섭섭하게 / 대해주지 않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라고 하거든요. 회사에서 서운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오르는데, 그중 몇 개는 제가 먼저 서운하게 한 건 아니었나 싶어지더군요.
위로받으러 들어갔다가 한 대 맞고 나온 기분이랄까요.
그래도 같은 시에 "지금 당신의 일로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마세요"라는 줄이 바로 붙어 있어서, 찔린 데를 금방 다독여 줍니다. "모든 좋은 일에 끝이 있듯이 / 아무리 어려운 일 어두운 일에도 /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음을" 믿으라는 대목은 월요병을 달고 사는 직장인한테 꽤 쓸모 있는 문장이에요. 가끔은 발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과 바람을 느껴 보라는 권유도 이어지고요.

3장으로 넘어가면 계절이 가을 쪽으로 기웁니다. (낙엽처럼)은 이별 인사도 여러 번, 사랑 고백도 여러 번, 아픔과 아쉬움이 마음에 남지 않을 때까지 하고 나서, 끝내 헤어질 때는 가볍게 손을 흔들자는 시예요. "호숩게 호숩게 / 안녕 안녕 / 다만 사랑해서 좋았단다." 호숩게라는 말이 입에 착 붙어요. 끝면에는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 갈색 잎 세 장이 데굴데굴 굴러가듯 그려져 있습니다.
(시계 선물)은 시계를 드리고 싶다고, 그 시계를 보며 오래오래 나를 생각해 달라고 말을 꺼냈다가 "아닙니다 / 나 없는 세상에서도 / 오래오래 잘 살아달라고."로 말을 바꿔요. 선물에 담는 마음이 여기까지 갈 수 있구나 싶었어요. 그 옆의 (바람 부는 날)은 더 짧습니다. "당신이 곁을 / 지켜주시어 // 덜 흔들릴 수 / 있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그림이 시의 곁을 조용히 지키기를 바랐다는 나난 작가의 말과 이 시가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책 끝의 작업 노트도 그냥 넘기기 아까웠어요. 나난 작가는 "제게 꽃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건네는 방식이며, 말로 다 담지 못한 감정을 대신 전하는 또 하나의 언어입니다"라고 씁니다. 2년째 수련하고 있는 미술치료 현장에서 사람들이 말로 다 꺼내지 못한 마음을 꽃과 자연에 조용히 맡기곤 했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부업으로 비단 위에 꽃 자수를 놓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한 땀 한 땀 수놓인 꽃들이 자기 삶의 씨앗이 되었다고 적은 대목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니 책 속 꽃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거 같아요.

<오래 머무는 마음>은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해도 그 칸만 봄 같은 책이에요. 꽃다발 대신 누군가에게 건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꽃다발)의 마지막 두 줄을 쪽지에 적어 끼워 주면 딱일 거 같습니다. 시가 짧고 그림이 숨 돌릴 틈을 만들어 줘서, 퇴근하면 유튜브부터 켜던 예전의 저 같은 사람도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는 호흡이더라고요.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9월 마지막 주 수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어요. 이 책의 계절은 봄꽃에서 출발해 낙엽까지 한 바퀴를 도는데, 지금이 딱 그 끝자락이라 더 잘 맞는 거 같습니다.
수요일이 원래 이렇게 화사한 요일이었나 싶네요.
내일 아침엔 누구한테든 "잘 잤어?" 한마디 먼저 건네고 싶어지는, 다정한 책을 만나 흐뭇했습니다.
봄꽃에서 낙엽까지, 나태주의 시 곁을 나난의 그림이 조용히 지켜 주는 다정한 시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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