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정도전은 평생 기도하지 않았다, 설계했다.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 서평
표지부터 기운이 셉니다.
까만 바탕에 흰 갓을 쓴 얼굴 하나가 비스듬히 앉아 있고, 그 뒤로 뿌연 달이 걸려 있어요. 옆으로는 鄭道傳 세 글자가 세로로 큼직하게 서 있습니다. 판화 같은 흑백 질감이라 그런지 눈빛이 꽤 매섭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첫 장을 열면 고려 말 궁궐 대신 퇴근길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회의는 끝났고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내가 준비한 자료는 결정의 장식품에 가까웠다는 장면이에요. 조선 건국 이야기인 줄 알고 펼쳤는데 첫 문단부터 우리 사무실 얘기를 하고 있으니 괜히 뜨끔하더군요.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는 출판사 결에서 펴내고 있는 <한국철학전집>의 세 번째 책이에요. 앞서 이순신 편과 세종대왕 편이 나왔으니, 앞 권 서평 먼저 보고 오시면 편해요. 권마다 다루는 인물이 달라서 이 책부터 펼쳐도 전혀 문제는 없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이자 한 주의 허리쯤인 수요일이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반팔 위에 뭘 하나 걸칠까 고민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이런 날씨엔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지는데, 마침 생각할 거리가 잔뜩 든 책을 만났어요.

솔직히 정도전 하면 사극에서 이성계 옆을 지키던 책사 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은 그 이미지를 꽤 과감하게 흔드는 편이에요. 그를 이성계를 도운 참모로만 기억하면 그의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거든요. 책이 그리는 정도전은 왕 하나가 나라를 망칠 수 없게 나라의 구조를 짠 사람이에요. 왕좌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문장으로 못 박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듣고 보니 저는 그동안 정도전을 딱 정도껏만 알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게 폭군 한 사람보다 우연이었다는 대목이 재미있었어요. 다음 왕이 능력이 아닌 핏줄로 정해지는 건 나라의 운명을 제비뽑기에 맡기는 일이라는 거죠. 책은 이 생각을 곧장 사무실로 옮겨 옵니다. 팀장이 유능하면 팀이 살고 무능하면 팀이 죽는 조직은 한 사람에게 기대는 도박이라고요. 좋은 팀장 만나게 해달라고 비는 마음이 있고, 팀장이 바뀌어도 굴러가는 업무 구조를 만드는 마음이 있는데, 둘은 완전히 다른 종류라는 얘기가 이어져요. 그 끝에 이런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정도전은 평생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설계했다."
짧은데 세요, 이 두 문장.
인물로서의 정도전은 따뜻하게 그려지지 않아요. 책도 그를 위인으로 소개할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밝히는 편이고요. 오랜 벗이나 스승 격인 인물과도 갈라섰고, 잔혹한 처분들 곁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도 감추지 않습니다. 외가에 노비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평생 시비에 시달렸고, 그 시대의 룰로는 결코 왕좌에 오를 수 없는 사람이었대요. 이 대목에서는 마음이 좀 복잡해지더라고요.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는 원망하지도, 무작정 부딪치지도 않았다고 해요. 벽을 인정하고 꼭대기를 포기한 뒤 왕관의 규격을 정하는 자리로 옮겨 앉았다는 거예요. 책은 이 선택을 두고 "체념이 아니다. 훨씬 무서운 종류의 야심이다"라고 씁니다.

그는 결국 이방원 쪽의 기습으로 목숨을 잃었고, 역적으로 몰려 이름도 오래 지워졌어요. 그런데 그를 제거한 쪽조차 그가 설계한 법전과 행정 조직, 도시 구조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책에서는 사람은 지웠으나 설계도는 지우지 못했다고 표현하더군요. 싸움에서는 졌는데 구조에서는 이겼다는 평가를 듣고 나니, 한 사람의 생애를 어디까지 보고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중반쯤 군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결국 직장 이야기였어요. 조선이 섰다고 군대가 곧바로 하나가 된 건 아니었대요. 장수마다 병력도 신호도 대열 세우는 방식도 제각각이었다고 해요. 정도전은 병서를 지었고, 태조는 <진도>와 <수수도>를 펴내 모두 그 방식대로 훈련하게 했습니다. 장수 머릿속에 있던 판단을 종이 위로 끌어내린 셈이에요. 책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머릿속에 있으면 개인의 것이고, 종이에 있으면 국가의 것이다."
훈련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휘관 292명이 한꺼번에 탄핵된 일도 나와요. 왕자와 공신에게는 차마 손대지 못했지만, 그 휘하 지휘관들이 대신 매를 맞았다고 하고요. 책이 여기서 붙잡는 건 예외가 있느냐 없느냐예요. 예외가 하나 생기면 나머지 사람들은 규정보다 눈치를 먼저 보게 된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라고요. 어느 조직이든 늘 예외인 한 사람은 있으니까요.
"대부분의 기준은 첫 예외에서 죽는다."
인수인계 문서 이야기에서는 웃음이 좀 났어요. 퇴근 무렵 인수인계 문서를 열어 놓고 얼마나 자세히 쓸지 망설여 본 적이 있을 거라는데요. 다 쓰면 손해 같고 안 쓰면 옹졸한 것 같은 그 애매한 감정을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내는지요. 2주 동안 연락이 끊기면 무엇이 멈추는지 물어보라는 대목도 있어요. 멈추는 게 많을수록 조직 입장에서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니, 저도 모르게 저만 아는 파일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른 대목보다 천천히 눈으로 따라가며 읽었던 건 후반부 유배지 이야기였어요. 나주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이 이십 년 뒤 새 수도의 자리를 정하는 논쟁 한복판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한양의 주산을 두고 무학은 인왕산을, 정도전은 북악을 등져야 한다며 의견이 갈렸다고 해요. 책도 이 일화는 사료로 확정하기 어려운 전승이라고 밝혀 둡니다. 다만 두 사람이 실제로 다툰 건 무엇을 근거로 나라의 중심을 정할 것인가였다고 풀어내요.

그리고 이야기는 곧장 회의실로 넘어옵니다. 왜 이렇게 하냐고 물으면 원래 이렇게 해왔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순간이 있잖아요. 근거를 물을 수 없는 규칙은 권위로 유지되고, 그런 규칙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린다는 설명이 이어져요. 회사 밥을 오래 먹은 입장에서는 반박할 말이 하나도 없더군요.
회의에서 "왜요?" 하고 물으면 공기가 식는 걸 느껴봤을 거라는 문장도 있어요. 무례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고 예민한 사람으로 찍힐 것 같아서 결국 말을 삼키게 되죠. 그러고는 회의가 끝나고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아까 말할걸 후회한다는 장면이 나와요. 그 후회가 몇 년 쌓이면 조직에서 가장 성실하게 관행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누가 제 얘기를 받아 적은 줄 알았습니다.
책은 거기서 위로만 하고 끝내지 않아요. 의심 없이 따라온 규칙 세 개를 종이에 적어보라고 권합니다. 왜 하는지 모르지만 계속 하는 일, 왜 안 되는지 모르지만 안 된다고 믿는 일, 왜 그 순서인지 모르지만 늘 그 순서로 하는 일이요. 적고 나면 대개 불편해진대요. 그중 하나쯤은 십 년 넘게 지켜온 것이기 때문이라고요. 중년 직장인한테는 이 말이 좀 아프게 들리는 거 같아요. 그래도 옛것을 전부 버리라는 얘기는 아니어서 다행이었어요. 정도전 역시 옛 문헌을 근거로 삼았고, 판단 기준은 오래됐느냐보다 설명할 수 있느냐라고 하거든요.
맛보기로 한 대목만 옮겨볼게요.
"대안 없는 반대는 태클로 들린다. 대안이 있는 반대는 설계로 들린다. 같은 말을 해도 전자는 밀려나고 후자는 검토된다."
관행을 흔들고 싶다면 먼저 준비할 것은 용기가 아니라 대체안이라는 말이 뒤따르는데, 이 부분은 회사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 목차를 훑을 때는 솔직히 좀 긴장했어요. 세상의 목을 베고 새 판을 짜라, 무능한 리더를 허수아비로 세워라 같은 제목이 줄줄이 나오니까요.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센데, 목차까지 이러니 이거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런데 본문을 따라가 보면 문장이 의외로 차분합니다. 반론도 먼저 꺼내 놓고, 21세기에 왕조를 갈아엎으라는 조언은 무책임하다며 스스로 선을 긋기도 해요. 읽다가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게 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미리 말해 두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센 제목에 한 번 놀라고, 본문에서 한 번 더 찔리는 셈이랄까요.

판형은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크기이고, 두께도 보통 인문서보다 가뿐한 편이에요. 그래도 한 번 읽고 꽂아 두기엔 아까운 책입니다. 곳곳에 "당신은 지금 어느 쪽인가" 하고 묻는 질문이 박혀 있어서, 회사에서 일이 꼬일 때마다 다시 펼쳐 볼 만하거든요. <한국철학전집> 앞 권들과 나란히 꽂아 두면 책장이 제법 든든해질 것 같아요.
9월도 오늘로 끝이네요. 가을바람이 선선해지니 저도 뭔가 하나쯤은 바꿔 보고 싶어집니다. 책에서 권한 대로 책상 방향부터 슬쩍 돌려볼까 하는데, 돌렸다가 부장님 자리랑 정면으로 마주치면 판이 통째로 깨질 수도 있으니 방향은 좀 더 궁리해 보려고요.
좋은 책 한 권 덕분에 한 주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진 기분입니다.
좋은 사람 하나를 기다리지 않고, 좋은 사람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판을 짠 정도전의 방식을 오늘의 사무실로 옮겨 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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