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었습니다 - 27개의 단서로 복원한 27권의 책 이야기
요시타케 신스케.마타요시 나오키 지음, 양지연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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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도넛이 C가 되는 순간까지 복원해 주는 책방, <책이었습니다> 서평


"어떤 책이든 복원해 드립니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허름한 빈집 앞에 이런 입간판이 서 있다면 저는 아마 그냥 지나치지 못할 거 같아요. 너덜너덜한 책은 물론이고, 한 줄만 남았거나 제목만 기억나는 책도 원래대로 되살려 준다니까요. 9월 마지막 날인데 마침 수요일이에요. 한 주 체력이 딱 반 남은 날이라 제 체력도 같이 복원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책이었습니다>는 그림책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와 <불꽃>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개그맨 출신 소설가 마타요시 나오키가 함께 만든 책입니다. 두 사람은 앞서 <그 책은>으로 한 번 호흡을 맞춘 적이 있어요. 그래도 이번 권부터 펼쳐도 따라가는 데 전혀 걸리는 게 없는 거 같아요. 앞 권을 읽으셨다면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만나는 기분일 테고요.


시작은 동화처럼 열립니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빨간 지붕 집, 덩굴이 타고 오른 책장, 그 앞에 놓인 빨간 의자가 나와요. 이 집이 옛날엔 작은 책방이었다는데 "조금 이상한 책방이었죠"라는 말이 슬쩍 붙어 있어요. 첫 장부터 뭔가 숨겨 둔 집 같은 느낌이 듭니다. 거기 들어와 사는 두 남자는 '전 세계 모든 책의 데이터가 들어 있는 기계'와 '어떤 책이라도 버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기계'를 갖고 있다고 해요. 파이프와 계기판이 얽히고설킨 그 기계 그림은 구석구석 뜯어보는 맛이 있더군요.

사례 이야기도 좋았어요. 두 남자는 음식이든 옷이든 뭐든 좋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수상하게 여기다가 별일이 없자 하나둘 의뢰서를 넣고, 남은 채소와 소소한 음식을 건네요. 가난한 마을이었고,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던 때라서 일상을 바꿔 줄 작은 재미가 필요했다고 하더군요. 사는 게 팍팍할수록 사람한테 필요한 건 생각보다 작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퇴근하면 유튜브만 켜던 제가 요즘 책부터 집어 드는 것도 비슷한 이유 아닐까 하고요.


구성이 참 재미있는 책이에요. 이야기마다 '책 복원 의뢰서' 카드가 먼저 한 장 나옵니다. "그 책은 제목이 (불쌍한 고릴라)이었습니다. 이건 어떤 책이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제목이나 첫 문장, 마지막 문장 같은 단서가 딱 하나만 적혀 있어요. 다음 장을 넘기면 줄 그어진 편지지 위에 "손님께. 그 책은 이런 내용의 책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복원본이 펼쳐지고요. 빨간 카드는 곱슬머리 캐릭터가, 파란 카드는 동그란 민머리 캐릭터가 복원을 맡습니다. 그래서 카드 색만 봐도 이번엔 누구 차례인지 알 수 있어요.


카드 앞에서 한 번씩 멈춰 먼저 맞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제목이 '불쌍한 고릴라'면 뭐가 불쌍할까, 마지막 문장이 '2천 년은 의외로 짧다'면 대체 누가 2천 년을 버텼을까 하면서요.

그리고 대부분 빗나갑니다. 시원하게요.

(불쌍한 고릴라)는 고릴라 셋이 모인 밴드 이야기예요. 기타와 베이스는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데, 드럼 맡은 고릴라는 자기 가슴을 양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냅니다. 데뷔를 앞두고 동료들은 드럼을 제대로 칠 줄 아는 고릴라를 찾았다며 그에게 나가 달라고 해요. "생각해 보면 가슴을 두드리는 일은 고릴라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드러머였던 고릴라는 그냥 고릴라가 됐다."

이 한 문장 앞에서 웃어야 할지 좀 헷갈렸습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이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닐까 싶은 날이 오거든요. 알았다고 대답하고 조용히 밴드를 떠나는 고릴라가 남 일 같지 않았어요. 이야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가는데, 그 한 걸음은 직접 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빨간 카드의 두 번째 이야기에는 2천 년 뒤 미래가 보고 싶었던 소년이 나와요. 2천 년을 살 수는 없으니 타임머신을 만들기로 하고, 거기 매달리는 사이 어른이 되어 박사라고 불리게 됩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겠다 싶어서 타임머신보다 먼저 '수명을 늘려 주는 사과'부터 개발하는데, 피식 웃다가 조금 뜨끔했어요. 일 하나 끝내려고 그 일을 위한 준비를 또 벌이는 모습은 회사에서 늘 보는 풍경이잖아요. 그 사과를 몇 개나 먹었는지, 단서가 왜 '2천 년은 의외로 짧다.'인지는 몇 줄 안 되는 이야기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파란 카드로 넘어가면 결이 확 바뀌는 느낌이 들어요. (정리 번호 17)은 첫 문장부터 엉뚱합니다. 우유를 마신 뒤 커피를 마시면 뱃속에서 커피 우유가 완성되고, 같은 식으로 경제·경영서를 읽고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면 머릿속에 '연봉 10억인 당신'이 완성된다는 거예요. 선글라스 낀 남자가 차 앞에 서 있는 말풍선 아래 노트북 앞에 멀뚱히 앉은 사람이 그려져 있어요. 그게 딱 저 같아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러다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맛을 본 기억은 없지만 커피 우유는 당신을 알고 있다. 돈을 출금할 순 없지만 10억은 당신을 알고 있다."

말장난 같은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거 같아요. 원소 단위까지 쪼개 보면 마음속엔 이미 성공과 좌절, 흥분과 후회, 다정함과 질투, 현명함과 용기와 냉정함이 다 들어 있는 셈이라는 문장도 이어집니다. 복원된 책이 원래 무슨 책이었는지는 끝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그 한 방이 제법 시원했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정리 번호 20)입니다. 안경 쓴 남자가 카페에서 커피와 도넛을 주문하고 "일을 해야지." 하며 작게 한숨을 쉬어요. 오른쪽 남자는 키보드를 시끄럽게 두드리고 왼쪽 여자는 향수 냄새가 진해서 도무지 집중이 안 되니, 기분이나 바꿔 보자며 도넛을 베어 뭅니다. 세 입인가 네 입째에 도넛의 둥근 원이 더는 동그라미가 아니게 되는 한 입이 와요. O가 C가 되는 그 순간엔 뭔가를 이룬 듯한 성취감과 뭔가를 무너뜨린 허탈함이 뒤섞인다고 하더군요. 동그랗지 않게 된 도넛을 계속 먹다 보면 "마치 본선 진출이 확정된 뒤 치르는 잔여 경기처럼 열정이 사그라든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잔여 경기라니.

마감을 앞둔 사람이 딴생각으로 슬금슬금 도망가는 모습을 이렇게 정확하게 그려 놓을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것보다 일을 해야 한다. 오늘 밤까지 기획안을 보내야 한다."로 겨우 정신을 차리는데, 이번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와요. 연체된 수도세 때문인가 싶어 받는 그 소심함까지 어찌나 사람 냄새가 나는지요. 단서가 '이런 이유로 나는 공룡입니다.'였다는 걸 떠올리면, 도넛 먹던 이 사람이 대체 어디까지 가게 될지 궁금해지실 거예요.


빨간 카드 쪽에서 오래 붙들고 있던 건 (정리 번호 13)이었어요. 첫 문장은 '저주의 말로만 채워졌지만 그건 러브레터였다.'입니다. "정말 못됐네. 너무 싫어."로 시작해서 남에게 상처 주고, 소문에 휘둘리고, 남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고,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일들이 쉴 새 없이 줄줄이 이어져요. 그러다 "당신을 괴롭히는 이런 모든 나쁜 감정을 저주하며 살 거야."로 닫히는 순간, 저주받는 쪽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괴롭히는 감정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런 러브레터를 받는 사람은 꽤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누구 편을 들어 준다는 게 이런 모양일지도 모르겠다 싶었어요.


만듦새도 소장 욕심이 나는 편입니다. 양장이라 손에 쥐는 맛이 단단하고, 갈색 바탕에 금빛 무늬 테두리를 두른 표지는 오래된 책방 서가에서 막 꺼낸 책 같아요. 초록색 가름끈이 달려 있어서 이야기 사이사이 끊어 읽기에도 좋고요. 그림도 정말 많아요. 기계 그림처럼 빽빽하게 채운 장면이 있는가 하면 펜 몇 줄로 툭툭 그린 장면도 있어서 넘기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표지 띠에 적힌 "나를 구해 준 건, 책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은 스물일곱 권의 복원본을 다 넘기고 나면 처음과는 조금 다르게 읽힐 거 같아요.


9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바람 끝이 제법 가을 같네요. 한 줄에서 책 한 권이 태어나는 걸 스물일곱 번이나 지켜보고 나니, 제 머릿속에 굴러다니던 한 줄들도 괜히 아까워집니다. 도넛 구멍이 사라지면 세상의 균형이 흔들린다는데, 제 뱃살 균형은 진작에 무너졌으니 도넛 하나쯤은 괜찮겠죠. 선선한 가을 초입에 <책이었습니다> 같은 책을 만나 마음이 한결 넉넉해진 기분이에요.


한 줄의 단서가 한 권의 이야기가 되는, 웃다가 뜨끔하고 가끔은 서늘해지는 스물일곱 번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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