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왕 ㅣ 폭스코너 청소년소설 8
너새니얼 레소어 지음, 신선해 옮김 / 폭스코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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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왕관은 썼는데 얼굴이 없는 왕, <아무것도 아닌 왕> 서평


제목만 보고는 추수철 들판에 낫 들고 선 왕부터 떠올렸습니다. 킹 오브 '낫'띵이라니까요. 가을이라 그런 걸로 해 주세요.

표지를 다시 보면 커다란 왕관 아래 곱슬머리만 잔뜩 부풀어 있고 얼굴 자리는 텅 비어 있어요. 왕관은 썼는데 표정이 없는 왕. <아무것도 아닌 왕>은 그 빈 얼굴 주인이 누구인지 조금씩 따라가 보는 이야기 같더라고요.


주인공 앤톤 찰스는 사우스런던 어느 학교 복도를 자기 왕국이라고 부르는 아이예요. 케힌데, 케일럽, 마커스와 무리 지어 다니고, 누가 무리 중 하나를 밟으면 모두를 밟은 셈이라는 규칙으로 버팁니다. 첫 장면부터 싸움 얘기로 시작하는데 말투가 워낙 능청스러워서, 웃다가 보면 이 녀석 독백을 벌써 몇 장째 따라가고 있어요.


"꿈이란 건 토트넘 팬들과 마틴 루터 킹을 위한 단어다."

이런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녀석이라 처음엔 솔직히 좀 얄밉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생활지도실에서 벤저민 선생이 5년 후 자기가 어디 있을지 적어 내라는 과제를 냅니다. 코웃음 치던 앤톤이 결국 적어 낸 건 언제나 정원사가 되고 싶었다는 문장이에요. 장미, 야자수, 알로에 베라. 평생 삽 한 번 들어 본 적 없다면서 식물 이름만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선생은 그 종이를 읽더니 인상을 쓰고 접어서 자기 주머니에 넣어요. 허세 가득한 독백 바로 뒤에 이런 문장이 슬쩍 끼어 있으니 저도 모르게 속도를 늦춰 읽게 되더군요. 이 아이가 감춰 둔 게 생각보다 많겠구나 싶었습니다.

5년 후 어디 있을 것 같냐는 질문은 회사에서도 면담 때마다 나오잖아요. 마흔 후반쯤 되면 그 칸 채우는 게 은근히 어렵습니다.


앤톤이 식물 이름으로 빈칸을 메우는 걸 보면서 웃기기도 하고 남 일 같지 않기도 하고.

집에 가면 이 왕은 그냥 철부지 아들이고 손자예요. 엄마는 노란 고무장갑을 끼고 앤톤이 크리스마스에 선물한 'Fry me to the moon' 앞치마를 두른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앤톤은 (이스트엔더스) 배우 뺨치는 발연기로 버티다가 인터넷 일주일 금지를 받고, 방문을 쾅 닫는 바람에 벌이 한 달로 늘어나요. 지난번 벌 받을 때 엄마가 바꿔 놓은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AntonLuvsMummyWummy123'이었다는 대목에서는 소리 내서 웃었습니다. 이 어머님, 보통 분이 아니세요.


인터넷을 되찾으려면 지역 봉사 동아리 '해피 캠퍼스'에 매주 나가야 하는데, 하필 거기서 학교 공인 찐따 매튜와 한 팀이 됩니다.

매튜라는 아이가 참 좋았어요. 과학 시간에 주기율표 유인물을 받아 들고는 자기가 아는 원소는 (제5원소) 하나뿐이라고 목소리를 낮추는 녀석이에요. 캠핑장에서 앤톤이 타란툴라를 손바닥에 올려 볼 때는 옆에서 "넌 할 수 있어", "그렇지, 잘하고 있어. 천천히 숨 쉬고" 하고 다독여 줍니다. 1장의 패거리가 서로 부추겨 싸움판으로 밀어 넣던 모습을 떠올리면, 친구라는 말이 한 책 안에서 이렇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캠핑에서 앤톤은 매튜에게 크게 빚을 지게 되는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빚을 갚겠다는 앤톤에게 매튜가 기대에 차서 묻습니다. "학교에서 내 베프 해 주면 안 돼?" 돌아온 대답은 이랬어요. "안 되지, 인마. 현실적인 걸로 해."

솔직히 이 대목은 읽으면서 좀 걸렸습니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는 매튜가 눈에 선한데, 앤톤 머릿속엔 케힌데와 애들 눈빛부터 떠오르는 거죠. 그 나이에 무리 밖으로 한 발 내딛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자꾸 매튜 편을 들고 싶어지더라고요. 결국 둘은 '비밀 친구'가 되고, 앤톤이 매튜에게 해 주는 첫 번째 코칭은 이겁니다. "걔한테 그렇게 눈 깜빡깜빡하지 마. 귀신 들린 인형 같으니까."


맛보기로 하나만 더 꺼내 볼게요. 둘이 공포증을 같이 이겨 보자며 암벽 하강에 나섰는데, 앤톤은 초대형 거미로 충분했다며 쏙 빠지고 매튜 혼자 내려옵니다. 내려오는 내내 비명이고 "오,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까지 튀어나와요. 땅에 발을 딛고 다리를 덜덜 떨면서 한다는 말이 "어. 진짜 짜릿했어." 바로 뒤에서 꼬마 여자애가 심드렁한 얼굴로 쓱 내려오는데, 이 대비에서 크게 웃었습니다.


캠핑에서 돌아온 앤톤은 마중 나온 엄마와 할머니를 인생 통틀어 가장 진하게 끌어안아요.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그날 아침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앤톤이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는 건 예전에 그 사람이 자기한테 거미를 던졌다는 것 하나뿐이라고 해요. 캠핑장에서 매튜의 응원을 받으며 타란툴라를 버텨 내던 장면이 떠올라서, 우연인지는 몰라도 두 장면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다 읽고 나서 제일 오래 생각난 사람은 앤톤의 엄마예요. 앤톤이 그저 '엄마 프로젝트' 정도로 여겨 온 세인트 루크스가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뒤에서 조금씩 드러나요. 그래도 엄마는 아들에게 모든 걸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네가 아직 어른이 아닌 시절을 마음 편히 즐겼으면 좋겠다고 하면서요. 그 이야기를 듣고 앤톤이 속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강함이라는 건 정말 다양한 모습과 크기로 나타나는구나." 1장에서 복도를 왕국이라 부르던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오래 남았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얘기야. 네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엄마랑 할머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꼭 기억하라고."

어른 입장에서 읽으니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말 중에 이게 제일 어렵고 제일 필요한 말 같았어요.

버스에서 "남자끼리 안는 거 아니다"라며 몸을 뒤로 빼던 녀석이, 나중에는 매튜 앞에서 그 사람을 닮아 갈까 봐 무섭다고 털어놓습니다. 늘 물렁하던 매튜가 그때만큼은 딱 잘라 말해요. "네 미래는 네가 정하는 거야, 앤톤." 5년 후를 적으라는 질문에 식물 이름을 늘어놓던 장면이 그제야 다시 생각나더군요. 그리고 앤톤이 매튜를 위로하면서 할머니가 자주 하셨다는 말을 들려주는데, 이것도 웃기면서 맞는 말이었어요. 남의 다리에 깁스했다고 내 두통이 낫는 건 아니래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인데 페이지는 얇은 책처럼 넘어갑니다. 2025년 카네기 섀도어스 초이스상, 워터스톤즈 아동도서상 고학년 부문, 잘락상 아동·청소년 부문을 받은 작품이라는데, 청소년들이 직접 읽고 뽑는 상까지 받은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영국 드라마나 축구팀처럼 우리한테 낯선 이야기에는 신선해 번역가님의 옮긴이 주가 붙어 있어서 흐름이 끊기지 않았고요. 청소년소설로 분류되긴 해도 앤톤의 엄마와 할머니 쪽에 마음이 가는 어른이 읽어도 충분히 좋습니다. 왕관 쓴 곱슬머리 표지도 책장에 꽂아 두면 괜히 한 번씩 눈이 가요.


이런 이야기는 읽고 나면 즐겁더라고요. 웃은 만큼 따뜻해지는 책이었습니다.

벌써 10월 첫날, 한 주의 한가운데인 목요일이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앤톤 엄마 따라 저희 집 와이파이 비밀번호도 바꿔 볼까 했는데, 그랬다간 제가 먼저 쫓겨날 것 같아서 참았어요. 가을 초입에 좋은 친구 둘을 새로 사귄 기분이라 마음이 넉넉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왕>, 이번 가을 책장에 한 권 들여 보셔도 좋겠어요.


학교의 왕 앤톤이 '공식 찐따' 매튜를 만나 왕관 아래 진짜 얼굴을 조금씩 들여다보는, 웃기고 따뜻한 성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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