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큰돈 없이 부동산 경매로 내집 마련한다
이주현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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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경매는 1등 하는 게임이 아니더라고요, 아재의 첫 경매 공부 <나는 큰돈 없이 부동산 경매로 내집 마련한다> 서평


전입신고를 하루 먼저 했느냐, 근저당이랑 같은 날 했느냐.

그 하루 차이로 낙찰자가 세입자 보증금을 떠안을지 말지가 갈린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저는 <나는 큰돈 없이 부동산 경매로 내집 마련한다>를 읽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등기소는 오전 9시 이후에야 접수를 받는다는 평범한 사실 하나가 권리 순서를 정해 버린다니, 경매라는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짜여 있는 거 같더라고요.


10월 첫날이자 목요일이에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겉옷 하나쯤은 챙기게 되는 때가 왔네요. 몸은 벌써 주말 쪽으로 반쯤 기울어 있는데, 이 책 얘기는 누구한테든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어요.

지은이는 지지옥션 전문위원 이주현 님이고, 메이트북스에서 나왔습니다. 저한테 경매는 늘 전문가들 영역이거나, 사연 있는 집을 싸게 사는 일 정도의 이미지였거든요. 그런데 첫 장부터 그런 막연한 인상을 조금씩 걷어내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느낌이 듭니다.


제일 먼저 반가웠던 건 1장 끝에 붙은 초보자 질문 코너였어요. 그중 "평일에는 바쁜데 직장인도 도전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은 거의 제 얘기 같았습니다. 공매는 온비드로 전자입찰이 되지만 법원 경매는 아직 전자입찰이 도입되지 않아서, 입찰 당일 법원에 직접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남은 연차부터 머릿속으로 세어 보려는데 바로 다음 문장에 수수료를 받고 입찰 절차만 대신해 주는 서비스가 점점 늘고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어요. 순서가 꼭 질문하는 사람 마음을 미리 읽어 둔 것 같아요.


혼자 할지 대행업체에 맡길지에 대한 답도 솔직해서 좋았어요. 아파트나 빌라 같은 주거용 부동산은 상업시설이나 공업시설에 비해 분석이 까다롭지 않고, 실제로 해결이 어려운 사례는 10%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대행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변호사, 법무사, 매수신청대리 등록을 마친 개업 공인중개사뿐이라고 분명하게 알려 주더라고요. 모르고 덤볐으면 엉뚱한 곳에 맡길 수도 있었겠다 싶은 대목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겁을 주는 책이 아니라서 마음이 편했어요.

4장 (권리 인수 여부를 가르는 기준, 말소기준권리)으로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맛이 납니다. 말소기준권리라는 단어를 처음 봤을 땐 말이랑 소가 왜 같이 나오나 싶었어요. 네, 아재는 이런 데서 못 참습니다.

이 책에서 특이하다고 느낀 건 표였어요. 순서 1, 2, 3 옆에 A 근저당, B 압류, C 가압류 하는 식으로 딱 세 줄짜리 표를 놓고, 어느 권리가 기준이 되고 어느 권리가 사라지는지 같이 따라가게 해 줍니다. 선순위 지상권, 후순위 지상권, 선순위 전세권으로 순서만 살짝살짝 바꾼 표가 이어지는데, 표가 단출하니 낯선 용어가 들어와도 머리가 덜 복잡해지는 거 같아요. 지상권은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용익물권이라 말소기준권리가 될 수 없다는 설명도 그 표 아래에서 슬쩍 들어오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선순위 전세권 사례였어요. 1순위 A 전세권, 2순위 B 근저당, 3순위 C 압류. 표 내용은 거의 똑같은데 맨 아래 '경매신청' 칸에 누구 이름이 들어가느냐로 결론이 달라지더군요. 전세권도 원래는 말소기준권리가 될 수 없지만, 전세권자가 스스로 경매를 신청했거나 배당요구신청을 했다면 말소기준권리로 탈바꿈한다고 해요. B가 신청한 사건은 "결국 이 사건은 전세권자 A의 배당요구 여부에 따라 낙찰자의 인수 여부가 달라지는 사례입니다"라고 정리돼 있습니다. A가 직접 임의경매를 신청한 사건에서는 뒤에 설정된 근저당과 압류가 모두 소멸해서 낙찰자가 인수할 권리가 없다고 하고요.


칸 하나 차이로요.

6장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유)은 제일 집중해서 따라간 장 같아요. 대항력은 실제로 입주하고 주민등록까지 마치면 다음 날 0시부터 생긴다고 합니다. 왜 굳이 다음 날일까 궁금했는데, 전입신고는 주민센터에서 처리하고 소유권이전등기는 등기소에서 접수하니 같은 날 일이 겹치면 누가 먼저인지 가리기 어려워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2월 12일에 전입하고 13일에 근저당이 잡힌 사례에서는 대항력이 13일 새벽 0시에 생기고, 근저당 등기는 오전 9시 이후에나 가능하니 임차인이 앞서게 됩니다. 둘 다 13일이면 대항력은 14일 0시가 되니까, 낙찰자 입장에선 보증금을 따로 물어줄 필요가 없는 안전한 물건이 되고요. 법이라는 게 책상에서만 만든 게 아니고 꽤 현실적인 고민 끝에 나온 거구나 싶었어요.


우선변제권으로 넘어가면 확정일자가 등장해요. 확정일자는 '내 보증금이 몇 번째로 배당받을 수 있는지'를 정하는 요소라고 합니다. 받는 방법도 친절하게 알려 줘요. 주민센터에 계약서 원본과 신분증을 들고 가거나, 인터넷등기소에 스캔본을 올리고 본인 인증을 하면 됩니다. 저자가 "세입자라면 확정일자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덧붙이는데요. 경매에 당장 뛰어들 생각이 없더라도 전세나 월세로 사는 분이라면 이 장만큼은 한 번 읽어 두시면 든든할 거 같아요. 요즘은 전세자금대출 때문에 전입신고보다 확정일자를 먼저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얘기도 있어서, 지금 현실이랑 바로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솔직하게 걸렸던 건 권리분석 연습에서 2025년 5월 1일, 2일, 3일, 4일이 줄줄이 나오는 표들이었어요. 전입신고, 확정일자, W은행 근저당이 자리를 바꿔 가며 네 번 나오니까 대항력은 있는데 우선변제권은 밀리는 경우와 둘 다 밀리는 경우가 제 머릿속에서 자꾸 엉키더라고요. 확정일자와 근저당이 같은 날이면 동순위로 보고 금액에 비례해 나누는 안분배당도 나와요. 보증금 2억 원, 채권 1억 원, 배당 총액 1억 5,000만 원으로 임차인 1억 원, W은행 5,000만 원까지 계산해 보여 주는데, 이 계산식은 몇 번이고 앞뒤로 다시 보게 됐습니다. 이런 건 원래 직접 표를 그려 가며 손에 익히는 영역 같기도 하고요.


이 장에서 가장 긴장하면서 읽은 건 실제 사례 하나입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임차인으로 올라 있고, 공사가 선정한 입주자가 2019년 5월 10일에 전입한 사건이었어요. 말소기준권리보다 먼저 대항요건을 갖췄고 확정일자도 받아 둔 임차인이었죠. 그런데 배당요구를 한 날이 2024년 10월 4일로, 배당요구종기일인 2023년 1월 31일이 이미 지난 뒤였습니다. 그 결과 낙찰자가 보증금 8,500만 원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해요. 날짜 하나를 놓친 대가가 고스란히 낙찰자 몫이 된다는 게 꽤 서늘하게 다가왔어요.


10장 (경매 입찰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실용서에서 이런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싶은 장이었어요. '분위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소제목 아래 첫 문장이 "경매 입찰의 목적은 1등이 아닙니다"거든요. 이어서 "경매는 경쟁이지만 승부의 개념은 아닙니다"라며, 본질은 '다른 사람보다 무조건 더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자금 범위에서 안전하게 낙찰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회사 생활을 이만큼 하다 보면 이기는 것만큼 지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되는데, 그 감각이랑 비슷한 결이라 반갑더라고요.


'혹시 아무도 안 들어오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든다면 권리분석이나 입찰가격에 확신이 부족하다는 뜻이래요. 분석에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경쟁자가 없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클 거라는 대목도 오래 생각하게 만들더군요. 그럴 땐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전략이라고 하고, 낙찰 후 2등과 가격 차이가 크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입찰표는 되도록 몸으로 가리고 쓰라는 대목에선 학창 시절 시험지 가리던 모습이 겹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패찰 이야기도 있어요.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단돈 얼마만 더 쓸걸 하는 아쉬움이 한동안 남기도 하지만, 새로운 경매 물건은 계속 나오니 아쉬움을 빠르게 털어내는 기술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경매에서 중요한 건 자신이 정한 적정 입찰가격을 지키면서 본인에게 맞는 물건을


기다리는 것.

책 전체에서 느껴지는 저자 목소리는 단호한데 다정한 편인 것 같아요. 소제목만 봐도 "자신이 없다면 포기해라", "패찰했더라도 실망하지 마라"처럼 짧게 끊어 말하는데, 막상 본문은 초보가 어디서 겁먹을지 알고 한 발 앞에서 기다려 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현장을 오래 지켜본 선배가 후배한테 요령을 하나씩 넘겨주는 말투랄까요.


<나는 큰돈 없이 부동산 경매로 내집 마련한다>는 보통 실용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한 번 읽고 꽂아 두기엔 아까운 책 같아요. 등기부등본 해석부터 권리분석, 입찰장에서 지킬 행동, 명도까지 표와 사례가 차곡차곡 들어 있으니까요. 언젠가 진짜 경매 물건을 들여다보게 되는 날, 옆에 펼쳐 두고 하나씩 대조해 보기 좋을 거 같거든요. 경매를 하지 않더라도 집 계약서 한 장 쓸 때 어디부터 봐야 하는지 감이 생기는 건 덤이고요.


10월이 시작되니 올해도 이제 석 달 남았네요. 가을은 거두는 계절이라는데, 저는 이번 가을에 공부 씨앗 하나를 제대로 얻어 간 기분입니다. <나는 큰돈 없이 부동산 경매로 내집 마련한다> 덕분에 좋은 선생님 한 분 만난 거 같아 든든해요. 제 지갑에도 말소기준권리가 있으면 좋겠어요. 월급날을 기준으로 그 뒤에 긁은 카드값은 싹 소멸되게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목요일도 힘내세요. 주말이 코앞입니다.


하루 차이, 날짜 한 칸 차이로 내 집의 운명이 갈린다는 걸 표와 사례로 차근차근 알려 주는 다정하고 단단한 경매 입문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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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의 지혜, 흔들려도 가라 -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건너는 53가지 인생 지혜
호메로스 지음, 강현규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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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집에 가는 데 10년 걸린 남자에게 배운 것, <오디세우스의 지혜, 흔들려도 가라> 서평


집에 가는 데 10년이 걸린 남자의 이야기예요.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출발했는데 폭풍을 만나고, 동료를 잃고, 낯선 섬에 갇히고, 고향이 코앞까지 보였다가 다시 먼 바다로 떠밀려 갑니다. 이쯤 되면 내비게이션 탓이라도 할 법한데,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이타케라는 목적지 하나를 놓지 않더군요. 퇴근길이 한 시간만 막혀도 투덜대는 저로서는 일단 고개부터 숙이고 들어가게 되는 주인공이었어요.


<오디세우스의 지혜, 흔들려도 가라>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따라가면서 그 긴 여정에서 53가지 인생 지혜를 길어 올린 책이에요. 강현규 님이 엮고 이선미 님이 옮겼고, 메이트북스에서 9월 1일에 나왔습니다. 요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던데, 스크린으로 모험을 봤다면 이 책으로는 그 모험 속 선택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아요.


10월 첫날이고 목요일이에요. 주말이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몸은 한 주 중에 제일 무거운 요일이죠. 그래도 요즘은 이런 날에도 손이 책 쪽으로 먼저 갑니다. 서평단 하면서 생긴 버릇인데 이게 꽤 마음에 들어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오디세이> 전체 줄거리를 한 번 쭉 훑어주는 대목이 있어요. 칼립소의 섬,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키르케, 세이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까지 이름은 들어봤는데 순서는 가물가물하던 장면들이 한 줄로 꿰어지니 좋더라고요. 원전을 안 읽은 사람도 지도 한 장 쥐고 출발하는 기분일 것 같습니다.


이 책만의 말하는 방식도 있어요. 꼭지마다 오디세우스가 직접 "나는"으로 그때 장면을 들려줍니다. 그러다 "나는 그때 ~을 배웠다"로 한 번 숨을 고르고, 곧이어 "당신도"로 고개를 돌려 독자한테 말을 걸어요. 마지막에는 "그렇다고 ~라는 뜻은 아니다"로 균형을 한 번 잡아주고요. 3천 년 전 영웅이 맞은편에 앉아 자기 고생담을 털어놓다가 "자네도 그럴 때 있지?" 하고 묻는 느낌이랄까요.


엮은이의 말에서 이 부분을 분명히 밝혀둔 것도 좋았어요. 53가지 지혜는 호메로스가 직접 남긴 교훈이 아니고 원전 이야기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은 해석이라고 해요. 대신 사건의 순서와 주요 장면, 인물의 행동은 원전에서 벗어나지 않게 살폈다고 하고요. 고전을 핑계로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는 책은 아니겠구나 하는 믿음이 거기서 생기더라고요.


다른 꼭지보다 유난히 천천히 읽게 된 건 10번, 부서진 뗏목 이야기였어요.

포세이돈이 일으킨 폭풍 속에서 바다의 여신 레우코테아가 나타나, 뗏목을 버리고 자기가 건넨 베일을 두른 채 헤엄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바로 따르지 않아요. 또 다른 신의 속임수일 수도 있으니 뗏목이 버티는 동안은 버티겠다는 거죠. 거대한 파도가 뗏목을 산산이 흩어놓고 나서야 그는 베일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저는 이 순서가 좋았어요. 처음부터 냉큼 버리지도 않고, 다 부서진 널빤지를 끝까지 끌어안고 있지도 않거든요. 바로 뒤에 "방법에도 수명이 있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회사에서 십몇 년째 써먹고 있는 보고서 양식이며 일하는 순서 같은 게 줄줄이 떠오르더군요. 틀린 방법들은 아니었어요. 다만 그게 지금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따져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오디세우스가 생각보다 훨씬 사람 냄새 나는 인물이라 좋았습니다. 세이렌 꼭지가 특히 그랬어요. 그 노래를 들은 사람은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경고를 듣고도 그는 노래가 듣고 싶었대요. 그래서 동료들 귀는 밀랍으로 막고 자기 몸은 돛대에 단단히 묶게 한 다음, 풀어달라고 명령해도 밧줄을 더 조이라고 미리 일러둡니다. 막상 노래가 들리자 몸부림치며 풀어달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페리메데스와 에우릴로코스가 밧줄을 오히려 더 단단히 조이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좀 나더라고요. "위험을 만나기 전에 정한 약속이 그 순간의 욕망보다 강했다"는 문장이 그 뒤에 조용히 붙어 있어요.


의지가 강철 같은 영웅이라기보다 자기가 어디에 약한지 정확히 아는 사람에 가까운 것 같아요. 책은 이 이야기를 휴대전화로 끌고 옵니다. 이번엔 참겠다고 다짐만 하지 말고 알림을 끄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라고요. 퇴근하면 유튜브만 틀어놓다 잠들던 시절의 제가 들었으면 뜨끔했을 소리입니다.


17번 꼭지의 이름 이야기도 그냥 넘기기 아까워요. 폴리페모스가 이름을 묻자 오디세우스는 "아무도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나중에 눈을 찔린 거인이 "아무도 아니다가 나를 해치고 있다"고 외치니까 다른 키클롭스들이 도울 일이 없다며 그냥 돌아가 버리고요. 3천 년 된 말장난인데 지금 들어도 재밌더라고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 버린 것이 아니다. 드러낼 때를 미루었을 뿐이다."

이 문장 뒤에 오는 "당신도" 대목이 직장인한테는 꽤 아프게 들어와요. 내 직책을 알리고 싶고, 내가 한 일이라고 밝히고 싶고, 내가 옳았다는 것까지 인정받고 싶은 마음. 회의실에서 한 번쯤은 다들 겪어봤을 마음 아닌가 싶습니다. 책은 그게 문제 해결엔 도움이 안 되고 갈등만 키운다면 잠시 자신을 뒤로 물리라고 해요. 책임져야 할 순간에는 자기 행동에 이름을 걸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이고요.


뒤로 갈수록 결이 조금 달라집니다.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거지로 변장한 채 궁전으로 향하는데, 가는 길에 염소지기 멜란티오스한테 모욕을 듣고 걷어차이기까지 해요. 지팡이로 내리칠까 생각했지만 참습니다. 그 자리에서 힘을 드러내면 정체가 탄로 나고 지금까지의 계획이 흔들릴 수 있으니까요. 그 뒤에 이어지는 "반응하지 않는 것과 반응할 때를 스스로 고르는 것은 다르다"는 문장은, 이 나이쯤 되면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겪어서 알게 되는 이야기 같았어요. 상대의 도발이 대응할 시점까지 정하게 두지 말라는 말도 함께 붙어 있었고요.


42번 꼭지는 좀 더 깊은 데를 건드립니다. 잠들지 못하던 밤, 구혼자들에게 웃으며 가는 여종들을 보고 분노가 치미는 장면이에요. 오디세우스는 들끓는 자기 마음을 새끼를 지키며 낯선 이에게 으르렁거리는 개에 빗대요. 그러고는 동료들을 잃었던 키클롭스의 동굴을 떠올리면서, 그때도 버텼으니 이번에도 견디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더군요.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대목이라 더 믿음이 갔습니다. 견뎌낸 기억이 감정과 행동 사이에 잠깐 멈출 시간을 만들어준다는 문장은, 쉰 가까이 살면서 버텨온 날들도 쓸 데가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어요.


꼭지마다 장면, 배움, "당신도", "그렇다고"로 이어지는 흐름이 같아서 한자리에서 여러 꼭지를 내리 읽으면 문장 결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긴 했어요. 그래서 하루에 몇 꼭지씩 끊어 읽는 쪽이 이 책과 더 잘 맞는 것 같더라고요. 한 꼭지가 짧으니 그날 마음에 걸리는 제목 하나만 골라 읽어도 충분합니다.


두께도 부담 없는 편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 좋아요. 차례가 제목만 봐도 문장이라 "부서진 뗏목은 놓고 헤엄쳐라", "모욕에 반응하기 전에 목적부터 보라" 같은 제목만 훑어봐도 그날 필요한 말 하나는 건지게 되고요. 보라색 표지에 흉상 그림이 들어가 있어서 책장에 꽂아두면 제법 근사합니다. <오디세우스의 지혜, 흔들려도 가라>는 뜻대로 안 풀리는 날 아무 데나 펼쳐보기 좋은 책이라 오래 곁에 두게 될 것 같아요. 읽는 내내 남 얘기 같지 않아서 재미있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해진 10월, 나한테 이타케는 어디인지 한 번쯤 물어보기 좋은 계절인 것 같아요. 세이렌 노래 들을 일이야 없겠지만, 퇴근 후 쏟아지는 알림 정도는 저도 돛대에 꽁꽁 묶어볼 생각입니다.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든든해졌어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흔들려도 가시길요.


항로는 몇 번을 바꿔도 괜찮으니 돌아갈 곳만은 잊지 말라고, 3천 년 전 영웅이 마흔 줄 직장인에게 건네는 53가지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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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읽는 스페인
백인필 지음 / 디이니셔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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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예술로 읽는 스페인> 10월 첫날, 비행기표 없이 알람브라에서 프라도까지

고급 주택 60채를 분양했는데 계약은 딱 한 건.

회사였으면 담당자들이 줄줄이 회의실로 불려 갔을 숫자예요. 그런데 이 망한 분양 계획이 지금은 누구나 이름 한 번쯤 들어본 바르셀로나의 구엘 공원이라고 하더군요. 이 대목 하나로 책에 확 빠져들었습니다.


10월 첫날이에요. 목요일이라 내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이고,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셔츠 위에 뭘 하나 걸칠까 고민하게 되는 날이죠. 이런 날 소개하고 싶은 책은 <예술로 읽는 스페인>입니다. 안달루시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세 지역을 따라가면서 건축과 그림 이야기를 풀어 주는 예술 교양서예요. 출판사 소개를 보니 저자 백인필 씨는 어릴 적 (시녀들)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겼고,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뒤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내다 스페인으로 건너가 8년을 살았다고 해요. 지금은 미술사 강연자이자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고요.


솔직히 이 이력에서 먼저 마음이 움직였어요. 저도 회사 다니면서 "언젠가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데, 그 언젠가를 진짜 해낸 사람의 첫 책이니까요. 남의 일인데도 괜히 응원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책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에서 시작합니다. 말발굽 모양 아치와 와인 문을 지나 나스르 궁전으로 들어가는 순서 그대로 따라가니까, 깃발 든 도슨트 뒤를 졸졸 따라 걷는 기분이 들어요. 술탄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멕수아르 홀, 회반죽을 바른 뒤 한 땀씩 새겨 넣은 아라베스크, 신성함을 식물 무늬로 표현하는 이슬람 문화 이야기가 이어지고요.


벽을 가득 채운 명문이 약 만 개쯤 된다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새겨진 문장이 "알라 외에 승리자는 없다."라고 하더군요. 사진으로만 봤을 땐 그저 화려한 무늬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벽 전체가 하나의 기도문이었던 셈이라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아술레호 타일의 초록색에는 천국과 생명, 자연이 담겨 있다고 해요.

사자 정원 쪽은 또 다른 이야기예요. 빽빽하게 늘어선 기둥, 레이스처럼 얇게 뚫린 아치, 그리고 열두 마리 사자가 받치고 있는 분수가 사실은 물시계였다니요. 이 사자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두고 11세기 유대인 재상의 저택에서 가져왔다는 설과 14세기 무함마드 5세 때 마카엘산 대리석으로 만들었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렘이라는 말도 원래는 '불가침'이라는 뜻이었고, 그 앞 전실은 햇빛을 막아 주면서 여성들이 상인과 거래를 하던 곳이었대요. 머릿속에 막연히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결이 꽤 다르더라고요.


그 아름다운 정원에는 슬픈 전설도 하나 얽혀 있어요. 술탄의 여인을 사랑한 젊은이 때문에 한 가문 전체가 비극을 맞았고, 그 피가 사자 정원까지 흘러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레이스 같은 아치 아래에 그런 기억이 겹쳐 있는 곳.

바르셀로나로 넘어가면 가우디 세상이 펼쳐집니다. 색이 화려한 카사 바트요와 거칠고 날것 같은 매력의 카사 밀라를 나란히 놓고 보여 주는데, 독창성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는 가우디의 말이 그 사이에 놓여 있어요. 두 건물이 그 한마디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구엘 공원은 원래 고급 주택 60채가 들어설 단지였는데, 팔린 건 트리아스라는 변호사의 집 한 채뿐이었대요. 그런데 가우디가 자기 재산을 털어 모델하우스를 사들였다고 합니다. 프로젝트가 기울면 다들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게 보통인데, 만든 사람이 직접 들어가 살았다니요. 직장 생활 이십 년 넘게 한 사람한테는 이 대목이 꽤 오래 남아요. 빗물을 모아 용처럼 생긴 입으로 흘려보내는 장치 이야기까지 읽고 나니 이 사람은 처음부터 집보다 큰 걸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공원 곳곳을 덮은 트렌카디스는 깨진 접시, 커피잔, 병 조각으로 만든 모자이크래요. 저희 집에선 커피잔 하나 깨면 잔소리부터 날아오는데, 가우디 손에 들어가면 깨진 잔도 잔소리 대신 작품이 되더군요. 버섯 모양 관리실 지붕 꼭대기에는 머그잔과 컵을 거꾸로 엎어 올려 두었다고 하고요.


유독 천천히 읽은 건 열주실 대목이었어요. 원래 시장으로 지었지만 끝내 문을 열지 못한 공간인데, 천장은 구름이고 기둥은 쏟아지는 비를 닮았다고 해요. 도리아식 기둥이 위쪽 광장의 무게를 받치고, 바깥쪽 기둥은 안쪽으로 살짝 기울어서 하중을 나눠 진다고 하더군요. 기둥마다 높이를 조금씩 달리해서 타일 선이 수평으로 맞아 보이게 했고, 천장의 둥근 장식 네 개는 봄은 초록, 여름은 노랑과 빨강, 가을은 금색과 초록, 겨울은 흰색으로 사계절의 태양을 표현했대요. 태양마다 달이 열세 개씩 둘러싸고 있다는 얘기에서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 가며 세어 봤습니다. 저자는 이걸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 건축가의 고집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1926년 시의회가 이곳을 시립 공원으로 열었고,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것도 같은 해였다고 합니다. 올해가 꼭 그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하네요.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돌로 새긴 성경'이라고 불린대요. 이름 자체가 성가족이라는 뜻이고요. 계획된 높이는 172.5미터인데, 약 177미터인 몬주익 언덕보다 일부러 조금 낮게 잡았다고 해요. 사람이 만든 것은 자연을 넘어설 수 없다는 가우디의 믿음 때문이라고요. 늘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는 게 목표인 줄 알고 살아온 나이라서 그런지, 몇 미터 아래에서 멈추기로 한 설계가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속 A.KIM이라는 글자. 김대건 신부의 이름이 그 유리창에 들어가 있다는 건 이 책으로 처음 알았어요. 저자도 그 앞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고 썼더군요. 르코르뷔지에가 건축가들이 사랑한 건축가라면 가우디는 대중이 사랑한 건축가라는 비교도 나오고,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성당 앞에서 겸손해졌다는 고백도 이어져요. 사진 속 빛깔이 참 고왔습니다.

티비다보 산 아래 부촌에 있는 벨레스구아르드 이야기에서는 저자 문장에서 장난기도 슬쩍 보여요. '좋은 전망을 가진 곳'이라는 이름 뜻, 꼭대기의 네 방향 십자가를 설명하다가 그곳까지 가는 길을 운동화 끈 꽉 조이는 소년에 빗대고, 건물은 중세 마녀가 사는 요새 같다고 하거든요.


마드리드에서는 드디어 (시녀들)을 만납니다. 프라도 미술관 12번 전시실에 걸린 높이 3미터가 넘는 그림이고, 1656년 작품이에요. 1794년 왕실 목록에는 펠리페 4세 가족 초상으로 올라 있다가 1843년에 지금 이름을 얻었다고 해요. 한가운데 마르가리타 공주가 서 있고, 양옆에는 백작 가문 딸인 시녀 둘이 공주를 챙기고 있습니다. 시녀가 공주에게 건네는 붉은 그릇 이야기는 마음이 무거웠어요. 당시 귀족 여성들이 창백해 보이려고 그 흙을 씹었고, 그 때문에 납 성분으로 빈혈을 앓았다고 하니까요. 오른쪽의 두 왜소증 인물을 차별 없이 그려 냈다는 점, 앞에 엎드린 개가 왕국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는 해석도 함께 나와요.


붓과 팔레트를 든 벨라스케스 자신, 뒤쪽 거울에 희미하게 비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 그리고 그림 밖을 바라보는 공주의 눈길. 그 시선 때문에 그림 앞에 선 사람은 공주의 부모, 그러니까 왕과 왕비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합니다. 왕의 자리가 수백 년 뒤의 관람자에게 넘어온다는 해석이 '관람자를 왕으로 만든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어요. 회사에선 늘 보고하는 쪽에 서 있는데, 이 그림 앞에서는 저도 왕 대접을 받는다니 기분이 괜찮더라고요.


(브레다의 항복)도 좋았어요. 창이 숲처럼 빽빽하게 서 있는데 피는 한 방울도 보이지 않습니다. 패장이 몸을 숙이자 승장이 그 어깨를 감싸 안는 장면이에요. 그림 구석에는 귀족이 아닌 남자가 하나 서 있는데, 그게 벨라스케스 자신이라고 하더군요. 평민 출신으로 궁정화가가 됐지만 평생 인정받고 싶어 했던 사람이라고요. 구석 자리에 슬그머니 자기 얼굴을 넣어 둔 그 마음, 왠지 알 것 같았습니다.


소로야 편은 발렌시아의 눈부신 빛으로 시작해요. 그러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초상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920년 6월 17일 그림을 그리던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923년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장례식에는 정치인부터 시민들까지 많은 사람이 찾아왔고요. 작업실을 그대로 재현해 둔 방 사진을 보고 있으니 붓을 잠깐 내려놓고 나간 사람의 자리 같았어요. 그림을 본다는 건 화가가 살던 시대와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그의 말이 이 책 전체와 겹쳐 보였습니다.


딱 하나 애먹은 건 이름이었어요. 스페인 이름이 길고 낯설어서 그림 속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앞쪽으로 몇 번씩 되돌아가야 했거든요. 이건 책보다는 제 머리 사정에 가깝습니다.


<예술로 읽는 스페인>은 사진이 넉넉하게 실려 있어서 설명을 읽다가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편했어요. 스페인 여행을 앞두고 있다면 가이드북 옆에 꽂아 두고 싶을 책이고, 당장 떠날 계획이 없어도 도시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그 자체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어요. 알람브라 벽에 새겨진 한 문장부터 (시녀들) 속 공주의 눈길까지,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10월 첫날, 하늘은 높아지고 바람은 선선해졌어요. 내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인데, 이번 주말에는 그림 한 점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지네요. <예술로 읽는 스페인> 덕분에 비행기표 없이 스페인 한 바퀴 잘 돌고 왔습니다.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어요.


벽에 새긴 기도문부터 그림 밖을 보는 공주의 눈길까지, 스페인에서 8년을 산 도슨트와 함께 세 도시를 예술로 걷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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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원래 좀 유치한 거야!
땃꾸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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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모기가 왜 졸린지 아세요? 땃꾸 <사랑은 원래 좀 유치한 거야!> 서평

모기가 왜 항상 졸려하는지 아세요?

피로 가득해서랍니다. 저 같은 아재가 회식 자리에서나 던질 개그인 줄 알았는데, 한창 연애 중인 커플이 서로 주고받는 개그더라고요. 오늘이 10월 첫날인 데다 목요일이에요. 주말은 코앞인데 몸은 딱 피로로 가득한 모기 신세라 그런지 더 크게 웃었던 것 같아요.


이번에 만난 책은 인스타툰 작가 땃꾸의 <사랑은 원래 좀 유치한 거야!>입니다. 제목부터 대놓고 유치해지겠다고 선언하는 책이라, 펼치기 전부터 웃음이 났어요. 그냥 읽고 덮는 그림 에세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인 둘이 마주 앉아 빈칸을 채워 가는 커플 사랑 기록장이더군요.


구성부터 재미있어요. 짧은 인스타툰 한 꼭지가 지나가면 둘이 함께 채우는 페이지가 사이사이에 끼어 있어요. 그중 하나가 서로가 선호하는 스킨십을 확인하는 페이지예요. 손잡기, 포옹, 쓰다듬기, 뽀뽀를 싫음부터 완전 좋음까지 다섯 칸으로 나눠 두고, 한 사람은 주황색 동그라미에, 한 사람은 파란색 동그라미에 표시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빈칸 페이지들이 매번 같은 틀로 나오지도 않더라고요. 좀비 이야기 뒤에는 "만약 세상이 끝난다면, 우린 어디서 만날까?"라는 페이지가 나와요. 각자 가장 먼저 갈 장소, 엇갈렸을 때의 최종 재회 장소, 도착했는데 네가 없다면 남길 쪽지까지 채우게 되어 있어요. 점수표였다가 메모지였다가 넘길 때마다 모양이 바뀌니까, 다음엔 또 뭐가 나올지 기다려지는 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 바뀝니다.

(밥)과 (배려)는 여자친구 목소리로 흘러가고, (예뻐하기)에 오면 남자친구 쪽으로 마이크가 넘어가요. 남자친구 까깨꾸는 오늘 뭐 먹었는지, 물은 얼마나 마셨는지를 꼬치꼬치 챙기는 사람이에요. 여자친구 대답은 "시리얼하구.. 또 과자랑.."이고요. 그래도 그 잔소리가 싫지 않아서 괜히 행복해진다고 하니, 읽는 제 입꼬리도 같이 올라가더군요. 싸울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대목에서는 회사 생각이 났어요. 이런 동료가 한 명만 있어도 목요일 오후쯤 바닥나는 체력이 좀 버틸 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땃꾸 쪽은 반대로 애정 표현이 꽤 화끈한 편인 거 같아요. "온도니가 참 탐스럽뇨" 하면서 철~썩. 남자친구가 "나도.. 예뻐해줄 거양!!" 하고 덤벼 보지만,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또 예쁨받는 쪽이 되어 있어요. 표현 방식이 좀 달라도 이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남자친구의 속말을 보니, 두 사람이 왜 잘 맞는지 살짝 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극 안정형과 극 장난형.


다른 꼭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첫 만남)과 (계기)예요. 대학교 동아리에서 "저 혹시 펜 하나만 빌려주실 수 있나요?"라는 한마디로 시작된 인연이에요. 남자친구는 전역하고 복학한 참이었고, 여자친구는 2학년이었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던 동아리 회식 날, 두 사람은 우연히 맞은편에 앉게 돼요. 쭈뼛거리던 여자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이것도 드세요" 하며 그릇을 먼저 내밀고요. 그 쑥스러운 미소에 마음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반해 버렸대요. 그때 여자친구 속마음이 "...선녀인가?"인데, 옆에서 큐피드가 "오늘도 한 건 했구만~" 하고 날아다녀요.


앞에서 밥을 챙기던 그 남자친구가 사랑의 시작도 그릇 하나로 열었다는 게 좋았어요. 이 사람의 다정함은 처음부터 밥으로 말하는 쪽이었구나 싶어서요. 그 뒤로 연락은 역시 여자친구가 먼저 했어요. "아 몰라 보내 이씌" 하고 전송을 누르고, 양치하다 문자를 받은 남자친구는 "잠깐만 대박"을 외쳐요. 이야기는 거기서 한 해의 마지막 날로 이어지는데, 그 장면은 직접 보시는 편이 훨씬 달달할 것 같아요.


사십 대 후반 아재 입장에서 이 대목이 좋았던 건, 시작이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고 펜 한 자루와 그릇 하나였다는 점이에요.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뭐든 크고 확실해야 움직인다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 마음은 이렇게 작은 데서 먼저 기울어지는구나 싶더라고요.


(좀비)도 좋았습니다. 두 사람에게 요즘 가장 뜨거운 대화 주제가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래요. 물부터 확보해야 한다, 무기랑 방어구도 챙겨야 한다며 한참 떠들어요. 그런데 결국 제일 먼저 정해 둔 건 세상이 무너져도 다시 만날 장소였어요. 그리고 이런 문장이 나와요. "사실 정말 두려운 건 좀비가 아니라, 살아남은 세상에 네가 없다는 사실일 테니까." 유치하게 시작했다가 한 줄로 쑥 들어오는 게 이 책의 특기인 것 같아요. 그러고는 바로 "녜암..! 만약을 대비하는 거예오!"로 다시 유치해지고요.


맛보기로 하나 더 소개하면 (이상형)이에요.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예전엔 못 하던 질문도 하게 됐대요. 그래서 여자친구가 "자기 진짜 이상형이 뭐야? 거짓말 없이!" 하고 물어요. 막상 물어 놓고 보니 자기와 정반대인 대답이 나오면 괜히 슬플 것 같았나 봐요. 무서운 얼굴로 "대답.. 잘하는 게 좋을 거야.." 하고 살짝 위협을 가해 줍니다. 결국 나온 대답은 "자기가 내 이상형이 됐오..!"이고, 돌아온 평가는 "좋은 대답이군"이에요. 협박 끝에 나온 모범답안인데도 돌고 돌아 서로의 곁에 있는 우리가 진짜라는 말로 닫혀요. 웃다가 괜히 흐뭇해지더군요.


(통화)에서는 남자친구가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걸어요. "자기 목소리 듣고 싶었어." 옆에서 친구들이 "쟤 누구랑 전화 함?", "여친", "아" 하고 넘어가는 컷이 은근히 웃겨요. 그걸 또 땃꾸는 "왜 사랑해가 안 나오지~?" 하며 실컷 놀리고, 남자친구는 "아앙 사, 사랑행..!" 하고 항복하죠. "놀려서 미안해. 그런데 네가 먼저 나한테 예쁜 짓 했잖아." 이 문장 하나에 두 사람의 연애가 다 들어 있는 느낌이었어요.


솔직히 걸렸던 건 딱 하나, 말투예요. "먹었오", "고맙뇨", "거양" 같은 혀 짧은 말투가 처음 몇 꼭지까지는 아재 눈에 좀 간지럽더라고요. 그런데 희한하게 금방 적응이 됩니다. 중반쯤 가니까 이 말투가 빠지면 이 두 사람이 아닐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어요. 제목에서 유치하다고 미리 경고해 줬으니 따ㅁ질 것도 없고요.


소장 가치는 뒤쪽 특별 부록에서 확실해지는 것 같아요. "연애 기억력 테스트"에는 바로 적지 말고 동시에 답을 외친 다음 적으라는 규칙이 붙어 있어요. 처음 만난 장소, 첫 데이트에서 먹은 음식, 먼저 고백한 사람, 첫 연락처 이름, 서로의 첫인상 같은 항목이 쭉 이어지고요. 아래쪽에는 첫 데이트 메뉴를 두고 팟타이냐 떡볶이냐로 엇갈리는 두 사람 그림이 있어요. 어느 집에서든 벌어질 법한 장면이라 한참 웃었어요. 오래 만난 사이일수록 이 테스트는 꽤 치열해질 것 같더라고요. "서로에게 바라는 편지"에는 평소 말하지 못했던 소소한 것들을 적어 보라는데, 예시가 "양말 잘 벗어놓거라"와 "온도니 조금만 살살 뜯어줘.."예요. 세상에서 제일 사소하고 제일 현실적인 부탁이라 정겨웠어요.


<사랑은 원래 좀 유치한 거야!>는 빈칸이 하나씩 채워질수록 값이 올라가는 책 같아요. 손에 쏙 들어오는 판형에 보통 에세이보다 살짝 도톰한 편이라, 둘이 번갈아 펜을 쥐기에도 부담이 없어 보였고요. 기념일에 편지 한 장 대신 이 책을 건네면 받는 사람도 같이 쓸 거리가 생기니, 선물로도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느새 달력이 10월로 넘어갔네요. 하루만 더 버티면 금요일인 목요일,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가을다워진 날에 유치한 연애 이야기로 실컷 웃고 나니 마음이 한결 말랑해진 기분이에요. 저도 모기 개그 하나 써먹어 볼까 싶은데, 수컷 모기 질문이 들어오면 -500점이라니 답부터 단단히 준비해 두고 도전해 보렵니다.


펜 한 자루로 시작해 좀비 재회 장소까지 정해 두는 두 사람의 유치하고 다정한 연애를 들여다보며, 둘이 함께 채워 가는 커플 사랑 기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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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때지타로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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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5년 버틴 것도 재능이랍니다. 10월의 첫 책, 모범생 말고 모방생으로 살아보기 <모두가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10월 첫날이 목요일이네요. 금요일을 하루 앞둔 목요일은 직장인한테 거의 다 왔다 싶은 요일인데, 달력까지 새 장으로 넘어가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입니다. 아침 공기도 제법 서늘해져서 겉옷 하나 챙기게 되는 계절이 왔고요. 이런 날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어요. 짙은 남색 네모 안에서 촛불 하나가 휘청 흔들리는 표지, <모두가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갑니다>입니다.


표지 아래쪽의 한 문장이 먼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실패는 있어도, 추락은 없습니다."

처음엔 촛불이 딱 하나라서 생일 케이크는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제 나이만큼 꽂았으면 표지가 모자랐을 테니까요.


그런데 저자가 타로 상담가라니.

솔직히 처음엔 살짝 갸웃했습니다. 타로라고 하면 카드 몇 장 뒤집어 운세 봐주는 장면부터 떠오르니까, 제 또래 아재한테는 괜히 거리감이 있는 단어잖아요. 그런데 프롤로그를 펼치자마자 그 경계가 좀 풀리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스스로를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고 소개해요. 명문대는 못 갔고 대기업 문턱도 못 넘어서 중견기업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요. 타로도 추가 수입이 필요해서 고른 "지극히 현실적인 부업"이었다고 하니, 신비로운 이야기보다 월급쟁이의 사정이 먼저 보여서 친근하더군요. 운명론을 설파하거나 절대적인 정답을 말하지 않겠다고 미리 선을 긋고 들어가는 점도 좋았어요.


저자는 유튜브 채널 때지타로를 8.5만 구독자와 함께 운영하고 있대요. 수천 명의 속마음을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좀 뜻밖이었는데, 이미 충분히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느끼며 괴로워하더라는 거예요. 저자는 이걸 유튜브 알고리즘에 빗대요. 세상이 끊임없이 추천해 주는 정답, 그러니까 명문대, 대기업, 높은 연봉, 완벽한 스펙만 맹목적으로 시청하며 산다는 표현이 참 절묘한 거 같아요.

재미있는 건 그다음 대목입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 또한 하나의 알고리즘일지 모르니, 무조건 정답이라 여기며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더군요. 자기 책을 너무 믿지는 말라는 저자라니, 이런 솔직함은 쉽게 만나기 힘든 것 같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읽게 된 건 저자가 떠올린 몇 가지 장면이었어요. 십수 년 전 아버지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가 겨우 살아나셨던 날, 전날까지 함께 식사하며 장난치던 거래처 분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자신을 참 잘 챙겨주던 지인의 사망 소식이에요. "생각보다 인생은 짧기도 하고 예고도 없었다"는 문장 앞에서는 저도 조용해지더라고요.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비슷한 부고 한두 개씩은 품고 사니까요. 우리가 진짜 갖고 있는 건 오늘,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말은 흔한 문장인데도 여기서는 가볍게 넘어가지지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몇 번이고 밑줄 긋고 싶어지는 단어는 단연 '모방생'이에요.

Part 2의 한 장 제목이 '모범생 말고 모방생이 되자'인데, 설명은 이래요.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해 내려는 '모범생'의 태도를 버리고, 이미 잘되고 있는 판에서 내 색깔만 더해보는 '모방생'의 태도를 갖자는 거예요. 말장난 같은 단어 하나에 어깨에 들어간 힘이 스르르 빠지는 느낌이 들어요.


이 장에는 대기업 회계팀 15년 차 E 씨가 나옵니다. AI를 활용해 뭔가 만들어 보는 공부도 하고 있고 나중엔 유튜브도 하고 싶다는데, 말끝이 이렇게 흐려져요. "퇴근하면 지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일단 계획 중입니다." 여기서 좀 찔렸습니다. 일단 계획 중이라는 말은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입에 올려봤을 문장 같아서요.

저자가 회계팀 경력으로 후배들의 자소서나 면접을 도와보라고 권하자 E 씨가 머뭇거리며 대답해요. "제가 차라리 인사팀 출신이면 모를까…. 전 나이도 많고요…." 이 "전 나이도 많고요"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40대 후반쯤 되면 새로운 걸 떠올릴 때마다 이 말이 거의 자동완성처럼 따라붙거든요.


저자는 E 씨에게 이미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끈기예요. "당신이 회사를 5년, 10년 동안 버텨왔던 것 자체가 이미 특출난 끈기라는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제법 위로가 되더군요. 버텨온 세월을 재능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흔치는 않잖아요.

다만 그 끈기에 '유통기한'을 두라고 해요. 한 달이나 두 달로 기한을 정해두고 하루 1시간 정도 가볍게 해보다가, 안 되면 바로 접고 다른 걸 해보라는 거예요. 1년에 10번쯤 바꿔 보다 보면 나랑 딱 맞아떨어지는 한 가지를 발견할 확률이 꽤 높다고요. 영업사원이 거래처를 공략하듯 빠르게 치고 빠지라는 표현에서는 영업사원 출신다운 말맛도 느껴지고요.


사실 저를 제일 뜨끔하게 만든 문장은 따로 있었어요. "어차피 시간은 흐른다. 남는 시간을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하듯 버린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사용해 보자." 예전의 저는 퇴근하고 유튜브 보다가 그대로 잠드는 게 일상이었거든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분이 유튜브 보듯 가볍게 써보라고 하니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요즘 퇴근하면 책부터 집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저 나름의 모방생 연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 끝에는 타로 8번 '힘' 카드 이야기가 나와요. 한 여인이 거대한 사자의 입을 맨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길들이는 그림이고, 그 사자가 우리 안의 두려움과 욕망이래요. 두려움은 노력해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는 "디폴트 값"이라는 말이 반갑더군요. 타로를 이렇게 풀어주니 처음 가졌던 거리감도 한결 줄어드는 거 같아요.


딱 걱정할 그 시간만큼만, 가볍게 행동으로.

<모두가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갑니다>의 뒤쪽 Part 4 '때지의 상담실'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또 달라집니다. 질문과 답이 오가는 형식이라 말투가 "~것 같습니다", "~어떨까 합니다"로 한결 순해져서, 상담 의자에 마주 앉은 기분이 들어요. 하고 싶은 일과 돈 되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이라면 돈이 안 돼도 이미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답해요. 뼈 있는 말인데도 말투가 부드러워서 아프진 않았어요.


운이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의 답도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건 내가 해볼 수 있겠는데?' 하다가도 "외모가 별로다", "학력이 별로다", "난 글을 못 쓴다" 같은 조건을 따지며 미룬대요. 마지막 조건은 블로그에 글 올리는 입장에서 괜히 뜨끔했습니다. 운을 바꾸는 작은 방법으로 읽어보지 않았던 책과 가보지 않았던 장소를 꼽는 대목에서는, 매번 낯선 책을 받아 드는 서평단 생활이 조금 뿌듯해지기도 하고요.


퇴사 고민에 대한 답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연료가 아예 바닥났는데 계속 운전할 수는 없으니까요." 몸도 마음도 벼랑 끝이라면 멈춰도 괜찮다는 이야기라, 이 나이 직장인에게는 은근히 필요한 허락 같은 문장이었습니다. 지금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하는 이직인지, 나 자신을 위해 나아가려는 이직인지 구분해 보라는 조언도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볼 만한 질문 같더라고요.


제일 편하게 웃으며 읽은 건 돈 이야기였어요. "제가 부자도 아니지만"으로 시작해서 1,000만 원 정도에 산 중고차로 20만 km를 탔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20만 km면 지구를 다섯 바퀴쯤 도는 거리라던데, 이쯤 되면 차가 아니라 동업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차를 바꾸고 싶을 때마다 그 차와 함께한 날들을 떠올리고, 세차를 하거나 차 안 디퓨저를 바꿔서 새 기분을 낸다는 대목은 너무 현실적이라 정이 갑니다. "그냥 스스로 그런 담백한 생활을 좋아한다고 여겨보세요"라는 말도 중년의 지갑 사정에 꼭 맞는 처방 같고요.


판형이 아담하고 두께도 보통 책보다 얇은 편이라 가방에 넣어 다니기 부담이 없어요. 앞쪽은 한 번 쭉 읽어두고, 뒤쪽 상담실은 고민이 생길 때마다 해당 질문만 찾아 펼쳐보기 좋은 구성이에요. 그래서 <모두가 그렇게 흔들리며 살아갑니다>는 책장 깊숙한 곳보다는 손 닿는 책상 위에 두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흔들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네요.

10월이 시작됐어요. 서늘해진 바람에 표지 속 촛불처럼 조금씩 흔들리더라도 꺼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깊어지는 가을을 걸어가 보려 합니다. 좋은 상담 한 번 제대로 받고 나온 기분이라 이번 책은 참 잘 만났다 싶어요. 내일이 금요일이라는 사실 하나로 버틸 힘이 나는 목요일, 다들 한 주 마무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버텨온 세월은 끈기라는 재능이니, 완벽한 모범생 말고 가벼운 모방생으로 다시 시작해 보라고 다정하게 등을 두드려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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