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읽는 스페인
백인필 지음 / 디이니셔티브 / 202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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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예술로 읽는 스페인> 10월 첫날, 비행기표 없이 알람브라에서 프라도까지

고급 주택 60채를 분양했는데 계약은 딱 한 건.

회사였으면 담당자들이 줄줄이 회의실로 불려 갔을 숫자예요. 그런데 이 망한 분양 계획이 지금은 누구나 이름 한 번쯤 들어본 바르셀로나의 구엘 공원이라고 하더군요. 이 대목 하나로 책에 확 빠져들었습니다.


10월 첫날이에요. 목요일이라 내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이고,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셔츠 위에 뭘 하나 걸칠까 고민하게 되는 날이죠. 이런 날 소개하고 싶은 책은 <예술로 읽는 스페인>입니다. 안달루시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세 지역을 따라가면서 건축과 그림 이야기를 풀어 주는 예술 교양서예요. 출판사 소개를 보니 저자 백인필 씨는 어릴 적 (시녀들)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겼고,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뒤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내다 스페인으로 건너가 8년을 살았다고 해요. 지금은 미술사 강연자이자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고요.


솔직히 이 이력에서 먼저 마음이 움직였어요. 저도 회사 다니면서 "언젠가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데, 그 언젠가를 진짜 해낸 사람의 첫 책이니까요. 남의 일인데도 괜히 응원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책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에서 시작합니다. 말발굽 모양 아치와 와인 문을 지나 나스르 궁전으로 들어가는 순서 그대로 따라가니까, 깃발 든 도슨트 뒤를 졸졸 따라 걷는 기분이 들어요. 술탄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멕수아르 홀, 회반죽을 바른 뒤 한 땀씩 새겨 넣은 아라베스크, 신성함을 식물 무늬로 표현하는 이슬람 문화 이야기가 이어지고요.


벽을 가득 채운 명문이 약 만 개쯤 된다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새겨진 문장이 "알라 외에 승리자는 없다."라고 하더군요. 사진으로만 봤을 땐 그저 화려한 무늬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벽 전체가 하나의 기도문이었던 셈이라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아술레호 타일의 초록색에는 천국과 생명, 자연이 담겨 있다고 해요.

사자 정원 쪽은 또 다른 이야기예요. 빽빽하게 늘어선 기둥, 레이스처럼 얇게 뚫린 아치, 그리고 열두 마리 사자가 받치고 있는 분수가 사실은 물시계였다니요. 이 사자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두고 11세기 유대인 재상의 저택에서 가져왔다는 설과 14세기 무함마드 5세 때 마카엘산 대리석으로 만들었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렘이라는 말도 원래는 '불가침'이라는 뜻이었고, 그 앞 전실은 햇빛을 막아 주면서 여성들이 상인과 거래를 하던 곳이었대요. 머릿속에 막연히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결이 꽤 다르더라고요.


그 아름다운 정원에는 슬픈 전설도 하나 얽혀 있어요. 술탄의 여인을 사랑한 젊은이 때문에 한 가문 전체가 비극을 맞았고, 그 피가 사자 정원까지 흘러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레이스 같은 아치 아래에 그런 기억이 겹쳐 있는 곳.

바르셀로나로 넘어가면 가우디 세상이 펼쳐집니다. 색이 화려한 카사 바트요와 거칠고 날것 같은 매력의 카사 밀라를 나란히 놓고 보여 주는데, 독창성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는 가우디의 말이 그 사이에 놓여 있어요. 두 건물이 그 한마디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구엘 공원은 원래 고급 주택 60채가 들어설 단지였는데, 팔린 건 트리아스라는 변호사의 집 한 채뿐이었대요. 그런데 가우디가 자기 재산을 털어 모델하우스를 사들였다고 합니다. 프로젝트가 기울면 다들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게 보통인데, 만든 사람이 직접 들어가 살았다니요. 직장 생활 이십 년 넘게 한 사람한테는 이 대목이 꽤 오래 남아요. 빗물을 모아 용처럼 생긴 입으로 흘려보내는 장치 이야기까지 읽고 나니 이 사람은 처음부터 집보다 큰 걸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공원 곳곳을 덮은 트렌카디스는 깨진 접시, 커피잔, 병 조각으로 만든 모자이크래요. 저희 집에선 커피잔 하나 깨면 잔소리부터 날아오는데, 가우디 손에 들어가면 깨진 잔도 잔소리 대신 작품이 되더군요. 버섯 모양 관리실 지붕 꼭대기에는 머그잔과 컵을 거꾸로 엎어 올려 두었다고 하고요.


유독 천천히 읽은 건 열주실 대목이었어요. 원래 시장으로 지었지만 끝내 문을 열지 못한 공간인데, 천장은 구름이고 기둥은 쏟아지는 비를 닮았다고 해요. 도리아식 기둥이 위쪽 광장의 무게를 받치고, 바깥쪽 기둥은 안쪽으로 살짝 기울어서 하중을 나눠 진다고 하더군요. 기둥마다 높이를 조금씩 달리해서 타일 선이 수평으로 맞아 보이게 했고, 천장의 둥근 장식 네 개는 봄은 초록, 여름은 노랑과 빨강, 가을은 금색과 초록, 겨울은 흰색으로 사계절의 태양을 표현했대요. 태양마다 달이 열세 개씩 둘러싸고 있다는 얘기에서는 사진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 가며 세어 봤습니다. 저자는 이걸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 건축가의 고집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1926년 시의회가 이곳을 시립 공원으로 열었고,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것도 같은 해였다고 합니다. 올해가 꼭 그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하네요.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돌로 새긴 성경'이라고 불린대요. 이름 자체가 성가족이라는 뜻이고요. 계획된 높이는 172.5미터인데, 약 177미터인 몬주익 언덕보다 일부러 조금 낮게 잡았다고 해요. 사람이 만든 것은 자연을 넘어설 수 없다는 가우디의 믿음 때문이라고요. 늘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는 게 목표인 줄 알고 살아온 나이라서 그런지, 몇 미터 아래에서 멈추기로 한 설계가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속 A.KIM이라는 글자. 김대건 신부의 이름이 그 유리창에 들어가 있다는 건 이 책으로 처음 알았어요. 저자도 그 앞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고 썼더군요. 르코르뷔지에가 건축가들이 사랑한 건축가라면 가우디는 대중이 사랑한 건축가라는 비교도 나오고,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성당 앞에서 겸손해졌다는 고백도 이어져요. 사진 속 빛깔이 참 고왔습니다.

티비다보 산 아래 부촌에 있는 벨레스구아르드 이야기에서는 저자 문장에서 장난기도 슬쩍 보여요. '좋은 전망을 가진 곳'이라는 이름 뜻, 꼭대기의 네 방향 십자가를 설명하다가 그곳까지 가는 길을 운동화 끈 꽉 조이는 소년에 빗대고, 건물은 중세 마녀가 사는 요새 같다고 하거든요.


마드리드에서는 드디어 (시녀들)을 만납니다. 프라도 미술관 12번 전시실에 걸린 높이 3미터가 넘는 그림이고, 1656년 작품이에요. 1794년 왕실 목록에는 펠리페 4세 가족 초상으로 올라 있다가 1843년에 지금 이름을 얻었다고 해요. 한가운데 마르가리타 공주가 서 있고, 양옆에는 백작 가문 딸인 시녀 둘이 공주를 챙기고 있습니다. 시녀가 공주에게 건네는 붉은 그릇 이야기는 마음이 무거웠어요. 당시 귀족 여성들이 창백해 보이려고 그 흙을 씹었고, 그 때문에 납 성분으로 빈혈을 앓았다고 하니까요. 오른쪽의 두 왜소증 인물을 차별 없이 그려 냈다는 점, 앞에 엎드린 개가 왕국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는 해석도 함께 나와요.


붓과 팔레트를 든 벨라스케스 자신, 뒤쪽 거울에 희미하게 비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 그리고 그림 밖을 바라보는 공주의 눈길. 그 시선 때문에 그림 앞에 선 사람은 공주의 부모, 그러니까 왕과 왕비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합니다. 왕의 자리가 수백 년 뒤의 관람자에게 넘어온다는 해석이 '관람자를 왕으로 만든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어요. 회사에선 늘 보고하는 쪽에 서 있는데, 이 그림 앞에서는 저도 왕 대접을 받는다니 기분이 괜찮더라고요.


(브레다의 항복)도 좋았어요. 창이 숲처럼 빽빽하게 서 있는데 피는 한 방울도 보이지 않습니다. 패장이 몸을 숙이자 승장이 그 어깨를 감싸 안는 장면이에요. 그림 구석에는 귀족이 아닌 남자가 하나 서 있는데, 그게 벨라스케스 자신이라고 하더군요. 평민 출신으로 궁정화가가 됐지만 평생 인정받고 싶어 했던 사람이라고요. 구석 자리에 슬그머니 자기 얼굴을 넣어 둔 그 마음, 왠지 알 것 같았습니다.


소로야 편은 발렌시아의 눈부신 빛으로 시작해요. 그러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초상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920년 6월 17일 그림을 그리던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923년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장례식에는 정치인부터 시민들까지 많은 사람이 찾아왔고요. 작업실을 그대로 재현해 둔 방 사진을 보고 있으니 붓을 잠깐 내려놓고 나간 사람의 자리 같았어요. 그림을 본다는 건 화가가 살던 시대와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그의 말이 이 책 전체와 겹쳐 보였습니다.


딱 하나 애먹은 건 이름이었어요. 스페인 이름이 길고 낯설어서 그림 속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앞쪽으로 몇 번씩 되돌아가야 했거든요. 이건 책보다는 제 머리 사정에 가깝습니다.


<예술로 읽는 스페인>은 사진이 넉넉하게 실려 있어서 설명을 읽다가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편했어요. 스페인 여행을 앞두고 있다면 가이드북 옆에 꽂아 두고 싶을 책이고, 당장 떠날 계획이 없어도 도시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그 자체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어요. 알람브라 벽에 새겨진 한 문장부터 (시녀들) 속 공주의 눈길까지,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10월 첫날, 하늘은 높아지고 바람은 선선해졌어요. 내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인데, 이번 주말에는 그림 한 점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지네요. <예술로 읽는 스페인> 덕분에 비행기표 없이 스페인 한 바퀴 잘 돌고 왔습니다.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어요.


벽에 새긴 기도문부터 그림 밖을 보는 공주의 눈길까지, 스페인에서 8년을 산 도슨트와 함께 세 도시를 예술로 걷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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