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 마인드셋 - 인생을 바꾸는 10분의 기적
윤수정 지음 / 바이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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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한 사람의 성공담을 기대하고 펼쳤다가, 무언가를 접어버린 시간을 먼저 읽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27년 차 초등교사이자 세 아이를 키워온 저자 윤수정의 <모닝 마인드셋>은 새벽 기상을 다루면서도 출발점을 바닥에 두고 있어요. 제자리걸음만 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해서, 어렵게 딴 박사학위마저 휴짓조각 같았다고 씁니다. 결국 계획했던 일을 다 접었고, 그 상태를 저자는 이렇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적당히'를 외치며 '편안함'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포기를 게으름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문장입니다. 더 다칠 여지를 없애려고 기대를 내려놓는 일이 어떤 시기에는 생존에 가깝다는 것을, 저자는 굳이 변명하지 않고 적어 놓았어요. 그 뒤로 6년이 흐르고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든 생각도 담담합니다. 특별히 불행한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 마흔을 넘긴 독자라면 이 서술에서 걸음을 늦추게 될 겁니다.


책의 처방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정한 시각에 못 일어나면 하루를 망친 기분이었다는 저자가 찾아낸 방법은 미라클 모닝을 미라클 데이로 옮기는 것이었어요. 힘들고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냥 뭐라도 하는 겁니다. 글쓰기라면 메모장에 끄적이고, 독서라면 타이머 맞춰 10분 읽고, 청소라면 청소기부터 꺼내는 식이죠.


"그냥 하다 보면 그다음 할 일이 떠오른다."


기분이 나아진 다음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이고 나서 기분이 따라온다는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새벽 기상이 몇 시냐의 경쟁으로 흐르지 않도록 저자가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어 둔 대목이라 신뢰가 갔어요.


중반부에서 루틴과 리추얼을 갈라 설명하는 부분은 이 도서에서 가장 실용적인 자리였습니다. 두 개념을 나누는 기준은 목적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요. 효율을 위해 지켜내려 애쓰는 것이 루틴이라면, 리추얼의 핵심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데 있습니다. 조건도 구체적입니다. 1~2분 안에 끝나는 간단한 일이어야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치우는 쪽도 포함됩니다. 아침 커피를 그냥 마시면 습관이지만 그 시간을 마음 정리하는 자리로 삼으면 성격이 달라진다는 예시 하나로 설명이 끝나요. 저자 자신은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어 바깥 공기를 마시고 풍경을 사진에 담는 일을 그 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뒷부분의 아티스트 데이트는 이 책에서 가장 낯설고, 동시에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개념이었습니다. 줄리아 카메론의 책에서 가져온 말로, 내면의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고 소개됩니다. 저자가 이걸 붙잡은 이유가 솔직해요. 두 권의 책을 낸 뒤에 오히려 글쓰기가 두려워졌고, 자기 경험을 박박 긁어모아 이미 써버렸다고 느꼈다는 겁니다. 자판을 두들기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노트북을 접어버렸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해법은 더 읽거나 더 짜내는 쪽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정해 무조건 밖으로 나갔고, 5년째 사는 동네인데도 어떤 곳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고 해요. 카페 한 곳을 점찍어 사장님과 인사하는 사이가 되고, 유리창 너머 사람과 불빛을 바라보다 잊고 지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고 씁니다. 맨발로 공원을 걷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촉촉한 흙과 거칠거칠한 모래알, 물기를 잔뜩 머금은 질퍽한 땅을 하나하나 구분해 적어 둔 대목이 좋았습니다.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조심조심 걸으면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그날은 잠도 깊었다고 해요. 새벽에 가뿐히 일어난 것이 의지 덕이라기보다 전날 저녁의 결과였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이 챕터의 결론은 커피 종류와 음악을 바꿔 보는 정도의 작은 변수로 하루의 질감이 달라졌다는 관찰이고, 저자는 그 이유를 자기 쪽에서 찾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린 지점도 있습니다. 아티스트 데이트의 조건을 저자는 분명히 '혼자'로 못 박아 두었는데, 맨발 걷기를 지속하다 보니 오가며 인사하는 사람이 생기고 건강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고 적어요. 혼자 하는 탐험이 관계로 번지는 흐름인데, 앞서 세운 정의와는 어긋납니다. 실천이 개념을 밀고 나간 결과라 오히려 미덥게 읽히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이 시간이 왜 꼭 혼자여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조금 더 있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곳곳에 인용이 촘촘한 것도 취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대목입니다. 저는 인용된 유명인의 일화보다 저자가 자기 실패를 적어 놓은 자리가 훨씬 힘이 있었어요.


표지를 다시 봅니다. 짙은 보라 속에 방 하나가 있고, 블라인드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번져 있고, 책상 위에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어요. 시계 눈금이 그 방을 둥글게 감싸는데 스탠드 목과 책상 선이 그대로 시곗바늘처럼 읽힙니다. 아래쪽 문장은 "우리 함께 새벽 기상을 시작해 볼까요?"입니다. 해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청유형인 게 이 책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판형과 두께도 평범해서 들고 다니며 읽기에 부담이 없었고, 문장도 막히는 데 없이 넘어갔습니다.


여러 책을 받아 읽어오지만, 읽는 동안 지난 한 주에서 저를 위해 쓴 시간이 몇 분이었는지 세어 보게 만드는 경우는 드물었어요. 자신을 위한 시간이 단 몇 분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 새해 계획을 크게 세웠다가 며칠 만에 접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안내서에서 가져갈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9월 중순으로 들어서니 낮의 열기는 남아 있는데 동트기 전 공기는 먼저 서늘해졌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신호를 가장 이른 시각에 먼저 알아채게 되는 때예요. 길이로 재지 않는 시간, 저자가 카이로스라 부르는 것도 아마 이런 결일 겁니다. 올해가 아직 넉 달 가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이 계절에 확인해 두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새벽형 인간이 되라고 몰아세우지 않고, 1~2분과 10분이라는 가장 낮은 문턱을 내주는 조용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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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주역은 60대
우메즈 유키에 지음, 신현암 옮김 / 세이코리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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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정 바탕에 흰 글자로 눌러 쓴 제목을 보면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표지에서 이미 끝납니다. 설득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부터 박아두는 방식이고, 위쪽에는 마지막 블루오션이라는 문구가, 아래쪽에는 경영자와 마케터의 필독서라는 띠지 문구가 자리를 잡았어요. 양옆을 받친 황토빛 세로 띠 덕분에 인상은 꽤 단단한데, 막상 손에 들면 판형도 두께도 부담이 없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아 며칠에 나눠 편하게 읽었습니다.


지은이 우메즈 유키에는 일본 시니어 여성 매체 하루메쿠의 '생활 방식 연구소' 소장입니다. 매달 도착하는 독자 엽서와 해마다 900명 가까운 인터뷰에서 건져 올린 자료를 다섯 장에 나눠 담았고, 번역은 신현암이 맡았습니다. 앞머리에 나오는 일본 60대 여성의 1년 지출 순위부터 통념을 흔듭니다. 1위가 손주에게 쓰는 돈, 2위가 덕질이고, 의약품과 의료용품은 그 다섯 분의 일에도 못 미칩니다. 덕질 지출은 50대보다 60대가, 60대보다 70대 이상이 더 크다는 숫자까지 나오면 시니어 소비를 병원비와 건강기능식품으로 그려온 머릿속 그림이 한 번 지워집니다.


이 책이 진짜 붙들고 있는 주제는 소비가 아니라 어긋남입니다. 마음은 젊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 저자는 이것을 인생 전환기의 특징이라고 부릅니다. 60대 여성들의 목소리가 네 개 실려 있는데 구조가 똑같아요. 손주는 귀엽지만 온종일 돌보는 일은 솔직히 힘들다는 말,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간병은 체력적으로 버겁다는 말,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잊어버리니 끝이 없다는 말. 그중 저를 오래 붙든 건 이 문장이었습니다.


"계속 일하고 싶지만 쉽게 피로해져서 예전만큼의 활력이 나지 않아요."


돌봄, 간병, 노동, 학습. 일본 이야기라고 밀어두기에는 한국의 50대와 60대가 놓인 자리와 너무 닮았습니다. 아직 역할이 남아 있는 세대라서 그 어긋남이 더 크게 벌어진다는 설명도 수긍이 갔고요.


기업이 이 간극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주는 세 가지 사례가 2장의 중심입니다. 백발 관리 제품을 소개할 때 백발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플래티넘 그레이라고 부릅니다. 백발을 숨기며 염색하는 것이 아니라 백발을 살린다는 발상이죠. 청력을 보완하는 기기로는 보청기 대신 넥밴드형 집음기를 고릅니다. 이어폰처럼 생겨서, 청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세상 소리가 작을 뿐이라고 둘러댈 여지를 남겨준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고객에게는 보행 보조기 대신 여행 가방처럼 생긴 캐리어를 권하는데, 이유가 분명합니다. 연배 있는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손잡이를 잡고 걷는 모습 자체가 노인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것.


읽으면서 걸린 지점도 여기입니다. 하루메쿠는 보행 보조기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걸 알면서도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미지가 걸린다는 이유로요. 그 판단이 배려인지, 필요한 사람에게서 선택지를 하나 치워버리는 일인지 책은 끝까지 정리해주지 않습니다. 4장에 나오는 '인생의 카운트다운 소비'도 비슷하게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저자는 세일 종료 타이머 같은 광고 기법을 설명한 뒤, 그 시간의 잣대를 체력의 한계로 치환한 것이 이 세대를 움직인다고 짚습니다. 논리는 정확한데, 남은 시간을 세어보는 사람의 마음이 판매 기법과 나란히 놓이는 순간 어딘가 서늘해집니다. 저자도 그걸 아는지 곧바로 일일일생이라는 격언을 끌어와 기업이 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톤을 정돈하는데, 배치가 남긴 인상까지 지워지지는 않더군요. 시니어 비즈니스 실무서라는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책이 오래 남는 건 숫자 사이사이에 사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2024년에 시작하고 싶은 일을 물은 조사에서 50대와 60대, 70대 이상 모두 1위가 정리정돈이었습니다. 절약이나 저축은 상위 스무 개 안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고, 투자와 자산 운용은 올라왔어요. 일과 투자가 나이에 따라 쑥 빠지는 자리를 스마트폰과 SNS 공부, 수공예와 나홀로 여행이 채우는 흐름도 눈에 들어옵니다. 응답을 관통하는 조건은 하나였습니다. 건강할 때, 체력이 있을 때, 갈 수 있을 때. 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고 답한 61세 여성의 셈법이 특히 그랬습니다.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15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요. 요즘은 자연재해가 많아 좋은 계절을 따지다 보니 먼 곳은 매년 한 번 정도밖에 기회가 없더라고요."


앞으로 몇 년이 아니라 앞으로 몇 번이라는 단위로 계산하는 마음. 마흔 후반이면 아직 먼 이야기일 법한데, 읽는 동안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책의 끝자락은 뜻밖에 개인적입니다. 저자는 환갑을 맞은 남편이 자신을 신인류 시니어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야기로 마지막 글을 엽니다. 오키나와 여행에서 배운 어떻게든 될 거라는 뜻의 방언, 라이온 킹에서 따온 문제없다는 뜻의 노랫말을 남편이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고 적어두었어요. 워크숍에서 그 말을 닉네임으로 삼은 60대 초반 여성 이야기도 함께 나옵니다. 그러고는 노후의 불안과 불편도 그 정신으로 건너가기를 바란다고 씁니다. 마케팅서로 출발한 책이 세대를 이해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로 닫히는데, 60대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 질문과 시선은 어느 연령대에나 공통된다는 마지막 문장이 이 책을 비즈니스 서가 바깥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실무 지침서는 읽는 동안만 유용하고 덮으면 흐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도서는 조금 달랐습니다. 시니어를 대상으로 기획하는 사람에게 쓸모 있는 자료인 건 분명하지만, 부모 세대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고 싶은 마음으로 펼쳐도 충분히 값을 합니다. 저처럼 곧 그 나이대에 진입할 사람이라면, 마케팅 사례집이라기보다 몇 년 앞을 미리 읽는 안내서에 가깝게 읽힐 거예요.


9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아침저녁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계절이 넘어가는 자리에서 이런 한 권을 읽으면, 나이 드는 일을 대비의 대상으로만 두었던 시선이 조금 느슨해집니다.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괜찮다는 마지막 인사가,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60대의 지갑을 분석한 책인데, 읽고 나면 나이 드는 마음을 이해하는 쪽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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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나에게, 고전이 말했다 - 하루 한 문장, 읽고 쓰는 동양 고전 수업
오평선 지음 / 이너북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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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책입니다. 화면의 절반 가까이가 옅은 하늘빛으로 비어 있고, 오른쪽 위에 주황 해가 크게 걸려 있습니다. 흩어져 날아가는 새떼 아래, 물가 끝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아주 작게 앉아 있고요. 그 작은 형상이 오히려 그림 전체의 무게를 잡습니다. 흔들린다는 제목과 가만히 앉아 있는 자세가 한 화면에 같이 놓여 있는 셈인데,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보니 이 구도가 우연이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오평선 작가의 <흔들리는 나에게, 고전이 말했다>는 주역과 논어, 맹자, 도덕경, 장자 같은 동양 고전에서 문장을 골라 오늘의 질문 앞에 놓아 둔 책입니다. 특이한 점은 목차입니다. 고전 원문이 아니라 "비교하지 않고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일은 많은데 내 삶은 사라진 것 같을 때"처럼 생활의 말로 꼭지 제목이 붙어 있어요. 읽는 사람 쪽에서 먼저 질문을 꺼내 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오래된 문장을 데려오는 방식입니다. 판형도 보통 크기에 보통 두께라 손에 편하게 잡히고요.


구성은 꼭지마다 일정합니다. 제목이 나오고, 우리말로 풀어 쓴 문장이 먼저 놓이고, 그 아래 한자 원문과 독음, 출처가 따라옵니다. 해설이 서너 쪽 이어진 뒤에는 질문 하나와 필사 라인이 기다립니다. 매일 한 꼭지씩 천천히 가져가라는 설계로 읽혔어요.


첫 장에 실린 주역의 문장이 이 책 전체의 뼈대 같았습니다. 한 번은 음이었다 한 번은 양이었다 하는 것을 도라 이른다는 대목인데, 저자는 도를 멈춤이 아닌 흐름으로 읽습니다. 밝고 드러나고 인정받는 시기만 값지게 여기는 습관을 조용히 건드리면서, 반대편의 시간도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요.


"우리들의 인생은 결코 앞으로 나아가는 시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내놓는 해석이 꽤 단단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리막을 실패로 옮겨 적어 버리는데, 도의 관점에서 보면 내리막은 방향을 바꾸는 순간일 뿐이라는 것이죠. 오르막이 길어지면 숨이 가빠지니 내리막이 호흡을 고르게 해 준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성과로 스스로를 증명해 온 사람일수록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일 텐데, 그래서 더 필요한 말이기도 합니다. 장을 닫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지금 당신이 인생의 어떠한 명암의 순간에 서 있든 괜찮다, 다 괜찮다." 쉼표 하나를 두고 같은 말을 한 번 더 얹은 그 자리에서 저자의 온도가 느껴집니다.


책 곳곳에 텃밭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씨 뿌리고 싹 틔우는 일만 농사가 아니고, 흙을 고르고 거름을 만들고 땅을 쉬게 하는 오랜 시간이 쌓여야 다음 계절의 생명이 자란다는 서술이 나옵니다. 저자가 실제로 작은 밭을 가꾸는 사람이라 그런지 비유가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 같지 않고요.


자연과 순리를 다룬 장에서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기에 배추와 무를 모두 뽑고 밭을 비우는 장면으로 글이 시작됩니다. 밭이 비었으니 이제 흙이 쉴 차례라는 것이죠. 여기서 저자는 자신을 돌보는 일을 지혜로운 행동 쪽으로 옮겨 놓습니다. 근거로 삼는 문장이 담백해요. "충전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을 위로할 힘이 없다." 누군가를 챙기는 자리에 오래 서 있던 사람이라면 이 문장 앞에서 마음이 조금 풀릴 겁니다. 이 꼭지의 마지막 줄이 특히 좋았습니다. "하늘이 그랬고, 땅이 그랬고, 바람이 그러했다." 설명을 더 붙이지 않고 거기서 멈추는 감각이 고전을 다루는 책답습니다. 이어지는 필사면의 질문은 "나는 나에게 맞는 일과 쉼을 조화롭게 실천하고 있을까?"인데, 답을 적기 전에 펜을 든 채 가만히 있게 되더군요.


뒤쪽 도전과 용기를 다룬 장에서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쁨보다 어려움이 많았던 긴 회사 생활을 마치고 새 길로 옮겼지만 그 길이 과거와 무관하지 않았고, 그때 쌓은 경험이 지금 하는 일을 떠받치는 기반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그 흔적은 짐이 아니라 자산이다"라고 적어요. 인생 후반을 두고 망설이는 마음의 정체를 저자는 처음부터 전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진단하는데, 저는 이 진단이 정확하다고 봤습니다. 삶은 새로 시작되는 것이라기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쓰며 더 깊어지는 쪽으로 이어진다는 것, 마흔 후반쯤 되면 이 말이 위로이면서 동시에 숙제처럼 들립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빠르게 읽고 빠르게 정리하는 습관이 붙는데, 이 한 권은 그 속도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한 꼭지가 짧은데도 다음 장으로 바로 넘어가지지 않아서, 결국 하루에 한두 꼭지씩만 떼어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라고 만든 책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고요.


고전 해설서로서의 깊이를 기대한다면 다소 얕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원문의 맥락이나 주석을 파고드는 책은 아니니까요. 대신 하루가 잘 풀리지 않은 저녁에 아무 데나 펼쳐도 문장 하나쯤은 건져 올릴 수 있는 종류의 책입니다. 방향을 잃은 것 같은 시기를 지나는 분, 회사 안에서 소진되어 가는 느낌을 오래 안고 있는 분이라면 특히요. 쉰을 앞두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헤아려 보는 자리에서도 꺼내 볼 만합니다.


9월도 중순으로 들어섰습니다. 아침저녁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고, 낮의 열기도 한 겹씩 물러나고 있어요. 이 책 여섯 번째 장에는 내 인생에도 가을이 와주기를 바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밭을 비우고 흙을 쉬게 하는 계절이 책 속에서는 조금 앞서 와 있는데, 창밖의 계절이 그쪽으로 가는 중이라 읽는 감각이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올여름 어지간히 지쳐 계셨다면, 이 가을에는 스스로를 조금 쉬게 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빛나지 않는 시간까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해 주는, 천천히 읽고 따라 쓰는 동양 고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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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빈틈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혁 지음 / 새벽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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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제목을 한동안 눈으로 따라 읽었습니다. '빈틈없이'라는 말은 보통 일 처리나 계획에 붙는 단어인데, 이 책에서는 행복 앞에 놓여 있어요. 빠짐없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도 읽히고, 틈이 생기더라도 그 틈까지 챙기라는 당부로도 읽힙니다. 이혁 작가의 첫 에세이 <나는 당신이 빈틈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는 그 제목이 품은 마음을 백 편 가까운 짧은 글로 나눠 담았습니다.


판형이 손바닥에 들어오는 정도라 두께에 부담이 없습니다. 한 편이 두세 쪽에서 끝나니 목차 순서를 지키지 않고 그날 눈에 걸리는 제목부터 펼쳐도 흐름이 끊기지 않아요. 표지도 잠깐 이야기해두고 싶습니다. 분홍과 노랑, 옅은 파랑이 서로 번지듯 섞인 둥근 덩이들이 위아래로 놓여 있는데, 색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고 스며듭니다. 딱 떨어지는 결론을 내주는 책은 아니겠다는 예감이 들었고, 읽어보니 실제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1부의 첫 글은 '사랑하는 사람과 낭비한 시간'입니다. 주말에 만나 침대에서 뒹굴며 예능을 보고, 졸음이 오면 잠깐 눈을 붙이고, 배가 고파지면 배달을 시켜 먹었던 하루를 적어둔 글이에요. 계획도 없었고 남에게 보여줄 결과물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정으로 꽉 채웠던 주말보다 그 나른한 오후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고 해요. 발가락으로 서로를 툭 건드리던 순간, 늦잠을 자고 시계를 보며 함께 허탈하게 웃던 시간 같은 장면들이 근거로 놓입니다. 진짜 행복은 "별일 없는 하루를 별 탈 없이 보내는 순간에 깃들어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이 책 전체의 방향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2부에서 걸음이 늦어진 글은 '웃는 얼굴 뒤에 숨겨 둔 각자의 사정'이었어요. 이별을 예감한 날, 눈물을 참으며 할 일을 하러 나갔더니 주변 사람들은 한가롭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 부럽고 외로웠다는 대목이 솔직합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 웃음 뒤편에도 저마다의 상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지인은 부모님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누군가는 오래된 연인과 파혼한 상태였다는 이야기가 이어져요. 작가는 사람을 빙산에 견줍니다. 물 위로 드러난 부분보다 잠긴 쪽이 훨씬 크다는 그 비유가,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서로 묻지 않고 넘어가게 되는 사정들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글은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 뒤에 숨겨 둔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습니다"로 닫힙니다.


3부의 '관계는 생활이고 행복은 그 안에 있다'는 산문이 아니라 행을 끊은 시 형태입니다. 매일 보는 편의점 직원의 인사, 단골 커피집 직원이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봐 주는 미소, 별것 아닌 말에도 크게 웃어주는 동료가 차례로 놓여요. 우리는 누구나 대단한 관계를 바라지만 정작 일상을 채우는 것은 주고받는 짧은 인사와 서툴지만 진심 어린 배려, 같이 울지는 못해도 가만히 옆에 있어 주는 사람들이라고 작가는 적습니다. 앞의 빙산 이야기와 나란히 놓고 보면 이 대목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서로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으니, 알지 못한 채 건네는 짧은 인사가 오히려 값진 것이 되겠지요.


책의 뒤쪽으로 갈수록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조금 더 단단해집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에서는 궁금해하는 마음이나 이해하려는 태도만으로는 모자라고, 상대가 살아온 방식과 지금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닿아야 한다고 말해요. "말로는 쉽게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실체로는 썩 복잡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다"라는 문장이 특히 그렇습니다. 미워지는 순간과 실망까지 인정한 다음에야 나오는 이야기라서 위로가 헐겁지 않습니다. 오래된 안 좋은 습관까지 포함해서 사랑하는 일에 가깝다는 정의는, 결혼 생활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표현만 다르게 알고 있을 내용일 겁니다.


물론 아쉬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글마다 어투가 갈립니다. 존댓말로 쓴 산문이 있고, 반말로 편지처럼 쓴 글이 있고, 행을 끊은 시가 섞여 있어요. '당신을 사랑했던 내가 참 예뻤다'처럼 반말로 쓰인 글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데("네가 몰라 줘도 괜찮아. 네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앞뒤 글과 목소리가 달라 한 권으로 묶였을 때 결이 조금 흔들립니다. 비유가 물의 이미지에 몰려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빙산, 파도, 모래성, 노을 내려앉는 바닷가, 등대까지 이어지니 인상이 겹치는 순간이 생겨요. 다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종류가 아니라 아무 데나 펼치는 쓰임에 가깝고, 그렇게 읽으면 단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서평단으로 만나는 책은 대개 정보나 주장을 담고 있어서 읽고 정리하는 일이 먼저인데, 이번 한 권은 그런 순서가 잘 맞지 않았어요. 밑줄을 긋고 요약하려 들면 남는 게 적고, 그냥 문장을 지나가게 두면 남는 게 있습니다. 미뤄둔 안부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정도가 이 책의 실제 크기이고, 그만큼이 필요한 시기가 살면서 몇 번은 오는 것 같습니다.


9월로 들어서니 낮의 열기는 아직 남았는데 아침 공기가 하루하루 가벼워집니다. 여름을 어떻게든 통과했다는 안도가 옅게 도는 계절이고요. 이런 무렵에 잘 어울리는 책입니다. 무언가를 해내라고 요구하지 않고, 잘 버텼으니 이제 조금 웃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쪽이니까요. 오늘 안부를 묻고 싶은 이름이 떠올랐다면, 그 사람에게 한 권 건네도 좋을 것 같습니다.


행복을 다음으로 미루는 습관에 조용히 제동을 걸어주는, 짧고 다정한 문장들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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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언어 - 평범한 생각을 비범한 기획으로 바꾸는 말의 힘
편은지 지음 / 빌리버튼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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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뇌 정지, 호흡 곤란, 혈압 상승, 식폭행. 예능 화면을 지나가는 자막으로 익숙한 말들입니다. 짧고 세고, 시선을 붙잡는 힘도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기획자의 언어>를 쓴 13년 차 PD는 자신이 연출하는 프로그램에서 저 자막들을 쓰지 않는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대단한 신념 선언처럼 굴지 않고 그저 이유만 담백하게 붙여 놓았어요. 저 문구 앞에서 웃을 수 없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고, 그럴 때는 시선을 잡을 수 있더라도 기꺼이 포기한다고요. 자막 한 줄을 두고 이런 셈을 하는 사람이 방송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책을 쓴 편은지 PD는 <살림하는 남자들2>의 메인 연출을 맡아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상을 받은 분입니다. 표지 띠지에는 나영석 PD의 "자기만의 언어를 찾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라는 문구가 실려 있고, 홍진경, 박서진, 지상렬의 추천도 함께 적혀 있어요.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판형과 두께가 부담 없는 편이라 며칠에 걸쳐 천천히 넘겨도 흐름이 끊기지 않았습니다.


표지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어요. 노랑과 파랑이 서로에게 스며든 동그라미가 위아래로 여섯 개 놓여 있는데, 어느 것도 경계가 또렷하지 않습니다. 같은 물감으로 그렸는데 번진 모양은 다 다른 셈이죠. 표지에 적힌 부제는 평범한 생각을 비범한 기획으로 바꾸는 말의 힘인데, 그 문장보다 흐릿한 원들이 책의 내용을 더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앞쪽에서 저자는 <살림남>이 섭외가 힘든 프로그램이라고 털어놓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서, 그 자리에서는 자랑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집이나 차나 소비를 보여 주는 자리가 아니고 그 사람이 감추려는 결핍과 불안을 들여다보는 자리라서, 기대를 안고 미팅에 온 사람 열 명 중 아홉 명이 기획 의도를 듣고 크게 실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개 자기는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강조한다는 관찰이 뒤따르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없는 쪽으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저자는 여기서 방향을 틉니다. 행복은 천편일률적이지만 결핍은 독창적이며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라고요.


뒤이어 나오는 사례 하나가 오래 남았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카톡 대화 내역은 공개해도 챗GPT 대화 내역은 절대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는 이야기예요. 그 안에 든 것은 기밀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의 하소연이고, 강해 보이고 싶은 의도와 정반대인 연약한 언어라는 해석이 붙습니다. 암 투병 중인 친구가 AI와 밤새 대화하며 위로를 받았다는 일화도 함께 실려 있는데, 저자는 그 풍경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친구인 자신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불안을 기계가 가만히 들어주었다고만 적어 두었어요.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그 태도가 이 책 전체의 결을 만든다고 봅니다. 결핍은 숨겨 둘 때만 약점으로 남고, 알맞게 꺼내 놓는 순간 그 사람만의 이야기로 바뀐다는 문장도 이 흐름 위에 놓여 있습니다.


중반부에서는 화술과 독심술을 갈라 놓습니다. 기획은 아무 말 안 해도 이것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상대를 꿰뚫어 보는 영역인데, 사람들은 기획자가 외향적인 사람에게 맞는 일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획이라는 두 글자가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들을 좌절하게 한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회의실에서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장면을 오래 봐 온 사람에게는 이 문장이 다르게 읽힐 겁니다. 저자는 화술이 전달의 기술이라면 독심술은 발견의 기술이다라고 정리하고, 중요한 것은 말을 많이 하는 능력이 아니라 남들이 지나치는 마음을 발견하는 능력이라고 못 박습니다. 어르신들이 곧잘 하시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곧 가야지라는 말이 실은 나를 더 잘 챙겨달라는 뜻이라는 예시도 여기에 붙어 있어요. 이 한 줄 앞에서 생각이 길어졌습니다.


같은 장에 가수 박서진 섭외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디어로 접한 그는 분명 효자였지만, 직접 만난 그의 말은 세상이 정해 둔 효자의 언어와 상반됐다고 해요. 편찮으신 부모님이 아프다는 사실을 숨긴 채 몰래 큰 수술을 하신 일에 격앙되어, 나중에 영정 사진 앞에서 만나라는 거냐는 말까지 가감 없이 내뱉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거기서 나약한 인간이자 아들로서의 피로감을 발견했다고 씁니다. 효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깊이 사랑해왔기에 생긴 정서적 피로라고요. 효자도 지친다, 지치면 짜증 나고 화가 난다는 문장이 담담하게 이어지는데, 부모님 연세가 있는 세대라면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방송에서 그 거친 말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저자가 적어 둔 점이 좋았어요.


책의 끝자락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안쪽을 향합니다. 기획한다는 것은 소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배제한다는 말과도 같아서, 기획자는 태생적으로 가슴 한쪽에 부채감을 안고 산다는 것이죠. 잘될 일보다 안 될 일, 타인에게 불편을 끼칠지도 모르는 일, 그로 인해 비방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먼저 와야 한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한국 예능에 자막을 처음 들여왔을 때 우리가 청각 장애인이냐는 항의가 폭주했다는 일화도 저자가 여기에 소개해 두었어요. 새로운 시도가 곧 환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 주는 예가 드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한 번 더 시선을 낮춥니다. 질타라도 받는 결과물은 운이 좋은 편이고, 환호도 불만도 받지 못한 채 사장된 무색무취형 기획이 세상에는 훨씬 많다고요. 성공담을 앞세우는 기획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문장이었습니다.


물론 읽으면서 걸리는 데도 있었습니다. 조용한 관찰자가 기획에 강하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수긍하는데, 그 근거를 MBTI의 내향과 외향에 기대는 방식은 조금 헐거워 보였어요. 유형 하나를 빌리지 않아도 책 안에 이미 사례가 넉넉하니까요. 다른 하나는 더 현실적인 물음입니다. 뜨거운 자막을 접고 미지근한 쪽을 골랐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시청률로 평가받는 조직 안에서 그 선택을 어떻게 지켜냈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개인의 양심 문제로만 남겨 두면 같은 갈등을 겪는 독자에게는 답이 되기 어렵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래도 이 책이 오래 붙잡아 두는 자리는 분명합니다. 정리 지면에 놓인 문장을 옮겨 보면, 기획은 곧 선택이다. 그 선택으로 누군가를 비춘 만큼, 더 많은 이들을 그림자로 밀어낸다. 빛을 볼 사람보다 끝내 호명되지 못할 이들을 먼저 떠올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뒤에 붙어 있습니다. 실은 기획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자리에 잠깐이라도 앉아 본 사람이라면, 그 결정 밖으로 밀려난 얼굴을 떠올려 본 적이 있을 테니까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받아 읽어 왔지만, 일하는 사람의 태도를 이렇게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세워 주는 도서는 흔치 않았습니다. 말 잘하는 재주가 없어서 기획 쪽은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접어 둔 분이 있다면 이 한 권이 꽤 든든한 편이 되어 줄 것 같고, 유튜브나 블로그로 자기 콘텐츠를 만드는 분에게도 얻어 갈 대목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말 뒤편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됐어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온도가 눅어지는 요즘, 이런 두께의 책이 손에 잡히면 며칠이 편안해집니다. 여름 내내 시끄러웠던 말들을 조금 걷어내고 조용한 언어 쪽으로 마음을 옮겨 보기에 좋은 계절이기도 하고요. 창밖으로 잎 그림자가 흔들리는 오후에, 표지의 번진 원들을 한 번 더 들여다봤습니다.


화려한 말솜씨보다 남들이 지나친 마음을 알아보는 눈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을, 예능 현장의 언어로 조용히 증명해 보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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