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언어 - 평범한 생각을 비범한 기획으로 바꾸는 말의 힘
편은지 지음 / 빌리버튼 / 202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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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뇌 정지, 호흡 곤란, 혈압 상승, 식폭행. 예능 화면을 지나가는 자막으로 익숙한 말들입니다. 짧고 세고, 시선을 붙잡는 힘도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기획자의 언어>를 쓴 13년 차 PD는 자신이 연출하는 프로그램에서 저 자막들을 쓰지 않는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대단한 신념 선언처럼 굴지 않고 그저 이유만 담백하게 붙여 놓았어요. 저 문구 앞에서 웃을 수 없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고, 그럴 때는 시선을 잡을 수 있더라도 기꺼이 포기한다고요. 자막 한 줄을 두고 이런 셈을 하는 사람이 방송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책을 쓴 편은지 PD는 <살림하는 남자들2>의 메인 연출을 맡아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상을 받은 분입니다. 표지 띠지에는 나영석 PD의 "자기만의 언어를 찾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라는 문구가 실려 있고, 홍진경, 박서진, 지상렬의 추천도 함께 적혀 있어요.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판형과 두께가 부담 없는 편이라 며칠에 걸쳐 천천히 넘겨도 흐름이 끊기지 않았습니다.


표지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어요. 노랑과 파랑이 서로에게 스며든 동그라미가 위아래로 여섯 개 놓여 있는데, 어느 것도 경계가 또렷하지 않습니다. 같은 물감으로 그렸는데 번진 모양은 다 다른 셈이죠. 표지에 적힌 부제는 평범한 생각을 비범한 기획으로 바꾸는 말의 힘인데, 그 문장보다 흐릿한 원들이 책의 내용을 더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앞쪽에서 저자는 <살림남>이 섭외가 힘든 프로그램이라고 털어놓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서, 그 자리에서는 자랑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집이나 차나 소비를 보여 주는 자리가 아니고 그 사람이 감추려는 결핍과 불안을 들여다보는 자리라서, 기대를 안고 미팅에 온 사람 열 명 중 아홉 명이 기획 의도를 듣고 크게 실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개 자기는 화목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강조한다는 관찰이 뒤따르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없는 쪽으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저자는 여기서 방향을 틉니다. 행복은 천편일률적이지만 결핍은 독창적이며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라고요.


뒤이어 나오는 사례 하나가 오래 남았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카톡 대화 내역은 공개해도 챗GPT 대화 내역은 절대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는 이야기예요. 그 안에 든 것은 기밀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의 하소연이고, 강해 보이고 싶은 의도와 정반대인 연약한 언어라는 해석이 붙습니다. 암 투병 중인 친구가 AI와 밤새 대화하며 위로를 받았다는 일화도 함께 실려 있는데, 저자는 그 풍경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친구인 자신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불안을 기계가 가만히 들어주었다고만 적어 두었어요.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그 태도가 이 책 전체의 결을 만든다고 봅니다. 결핍은 숨겨 둘 때만 약점으로 남고, 알맞게 꺼내 놓는 순간 그 사람만의 이야기로 바뀐다는 문장도 이 흐름 위에 놓여 있습니다.


중반부에서는 화술과 독심술을 갈라 놓습니다. 기획은 아무 말 안 해도 이것이 필요하겠구나 하고 상대를 꿰뚫어 보는 영역인데, 사람들은 기획자가 외향적인 사람에게 맞는 일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획이라는 두 글자가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들을 좌절하게 한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회의실에서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장면을 오래 봐 온 사람에게는 이 문장이 다르게 읽힐 겁니다. 저자는 화술이 전달의 기술이라면 독심술은 발견의 기술이다라고 정리하고, 중요한 것은 말을 많이 하는 능력이 아니라 남들이 지나치는 마음을 발견하는 능력이라고 못 박습니다. 어르신들이 곧잘 하시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곧 가야지라는 말이 실은 나를 더 잘 챙겨달라는 뜻이라는 예시도 여기에 붙어 있어요. 이 한 줄 앞에서 생각이 길어졌습니다.


같은 장에 가수 박서진 섭외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디어로 접한 그는 분명 효자였지만, 직접 만난 그의 말은 세상이 정해 둔 효자의 언어와 상반됐다고 해요. 편찮으신 부모님이 아프다는 사실을 숨긴 채 몰래 큰 수술을 하신 일에 격앙되어, 나중에 영정 사진 앞에서 만나라는 거냐는 말까지 가감 없이 내뱉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거기서 나약한 인간이자 아들로서의 피로감을 발견했다고 씁니다. 효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깊이 사랑해왔기에 생긴 정서적 피로라고요. 효자도 지친다, 지치면 짜증 나고 화가 난다는 문장이 담담하게 이어지는데, 부모님 연세가 있는 세대라면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방송에서 그 거친 말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저자가 적어 둔 점이 좋았어요.


책의 끝자락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안쪽을 향합니다. 기획한다는 것은 소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배제한다는 말과도 같아서, 기획자는 태생적으로 가슴 한쪽에 부채감을 안고 산다는 것이죠. 잘될 일보다 안 될 일, 타인에게 불편을 끼칠지도 모르는 일, 그로 인해 비방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먼저 와야 한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한국 예능에 자막을 처음 들여왔을 때 우리가 청각 장애인이냐는 항의가 폭주했다는 일화도 저자가 여기에 소개해 두었어요. 새로운 시도가 곧 환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 주는 예가 드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한 번 더 시선을 낮춥니다. 질타라도 받는 결과물은 운이 좋은 편이고, 환호도 불만도 받지 못한 채 사장된 무색무취형 기획이 세상에는 훨씬 많다고요. 성공담을 앞세우는 기획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문장이었습니다.


물론 읽으면서 걸리는 데도 있었습니다. 조용한 관찰자가 기획에 강하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수긍하는데, 그 근거를 MBTI의 내향과 외향에 기대는 방식은 조금 헐거워 보였어요. 유형 하나를 빌리지 않아도 책 안에 이미 사례가 넉넉하니까요. 다른 하나는 더 현실적인 물음입니다. 뜨거운 자막을 접고 미지근한 쪽을 골랐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시청률로 평가받는 조직 안에서 그 선택을 어떻게 지켜냈는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개인의 양심 문제로만 남겨 두면 같은 갈등을 겪는 독자에게는 답이 되기 어렵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래도 이 책이 오래 붙잡아 두는 자리는 분명합니다. 정리 지면에 놓인 문장을 옮겨 보면, 기획은 곧 선택이다. 그 선택으로 누군가를 비춘 만큼, 더 많은 이들을 그림자로 밀어낸다. 빛을 볼 사람보다 끝내 호명되지 못할 이들을 먼저 떠올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뒤에 붙어 있습니다. 실은 기획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자리에 잠깐이라도 앉아 본 사람이라면, 그 결정 밖으로 밀려난 얼굴을 떠올려 본 적이 있을 테니까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받아 읽어 왔지만, 일하는 사람의 태도를 이렇게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세워 주는 도서는 흔치 않았습니다. 말 잘하는 재주가 없어서 기획 쪽은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접어 둔 분이 있다면 이 한 권이 꽤 든든한 편이 되어 줄 것 같고, 유튜브나 블로그로 자기 콘텐츠를 만드는 분에게도 얻어 갈 대목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말 뒤편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됐어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온도가 눅어지는 요즘, 이런 두께의 책이 손에 잡히면 며칠이 편안해집니다. 여름 내내 시끄러웠던 말들을 조금 걷어내고 조용한 언어 쪽으로 마음을 옮겨 보기에 좋은 계절이기도 하고요. 창밖으로 잎 그림자가 흔들리는 오후에, 표지의 번진 원들을 한 번 더 들여다봤습니다.


화려한 말솜씨보다 남들이 지나친 마음을 알아보는 눈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을, 예능 현장의 언어로 조용히 증명해 보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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