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각자의 오디세이아를 쓴다 ㅣ 서양철학전집 하이엔드 고전 2
호메로스 지음 / 클래시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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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핸드북 사이즈라 얇고 가볍습니다. 가방 옆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라 들고 다니기 좋겠다 싶었어요.


제목만 봤을 땐 <오디세이아> 번역본인 줄 알았습니다.

펼쳐보니 결이 좀 다르더군요. 원전을 그대로 옮긴 책은 아니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서 장면을 하나씩 꺼내 와 지금 우리 하루 위에 겹쳐 놓는 구성입니다. 표지에는 서양철학전집 하이엔드 고전 시리즈 02라고 적혀 있고요.


프롤로그 첫 문장부터 사람을 붙잡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오디세이아>를 오해했다." 어릴 땐 외눈박이 거인이며 마녀의 섬이며 화려한 삽화에 눈이 가려져서 그 아래 흐르는 검고 무거운 물줄기를 오래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이야기를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냉혹한 생존의 기록"으로 다시 읽는다고 해요. 삶을 항해에 빗대는 비유가 너무 낭만적이라는 지적도 이어집니다. 잔잔한 바다, 시원한 바람, 별 보며 방향 잡는 밤. 그런 그림은 사후의 회상 속에만 있고 실제 그의 바다는 배가 부서지고 동료가 익사하는 쪽이었다는 거죠.


이 책에서 신을 자주 부르는 이유도 미리 밝혀둡니다. 포세이돈, 아테나, 제우스, 헤르메스는 결국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의 이름이라고. 태어난 땅의 척박함, 혈통의 굴레, 시대의 격랑, 예고 없이 무너지는 운명의 장난. 그래서 인간의 위대함은 신을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이길 수 없는 폭풍 속에서도 자기 손으로 노를 잡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하더군요. 신은 이길 수 없다고 못 박아두고 시작하는 책이라니, 서문부터 기운이 셉니다.


1장 첫 꼭지가 '신의 변덕에 분노하기보다 묵묵히 돛을 올려라'인데, 솔직히 저는 소제목만 보고 좀 삐딱해졌어요. 힘든 사람한테 그냥 참으라는 소리 같아서요. 그런데 저자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자기도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참으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실용적인 조언이더라고요. 바람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 바뀌는 순간 곧장 나갈 수 있게 지금부터 돛을 손질해 두라는 것. "준비된 자에게만 순풍은 의미가 있다"는 문장 앞에서 괜히 제 책상 서랍을 떠올렸습니다.


태어난 나라, 태어난 시대, 태어난 집안,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지금'을 얼마나 자주 삼키며 살아왔냐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이 나이쯤 되면 저 질문 한두 번쯤은 다들 목구멍에 걸어보지 않았나 싶어요. 분노 자체를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분노는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인정해 주거든요. 다만 "노를 젓는 것은 근육이지 감정이 아니다"라며 선을 긋고, 그 원망이 하루에서 몇 시간을 가져가는지 한 번 계산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1장 끝 문장이 좋았습니다. 돛은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고 손으로 올리는 것이며, 손이 있는 한 우리는 아직 항해자라고.


다른 페이지보다 속도를 늦춰 정독하듯 읽었던 건 2장의 몰리 이야기였어요. 키르케의 마법에 걸린 부하들을 구하러 가는 오디세우스에게 헤르메스가 건넨 약초. 검은 뿌리에 우윳빛 꽃이 피고 인간의 손으로는 뽑기 어렵다는 풀입니다. 저자가 붙든 지점은 그게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해독제였다는 사실이에요. 마녀를 이기는 도구가 아니라, 마녀의 세계 안에서도 내가 나로 남아 있게 해주는 것.


여기서 좀 뜨끔했습니다. 우리는 이기는 훈련만 받아왔다고 하거든요. 시험에서 이기고, 면접에서 이기고, 연봉에서 이기고, 결혼에서 이기고, 육아에서 이기는 훈련. 정작 이기는 동안 내가 나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확인하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요. 저자 본인도 오래 그쪽에 포함되어 있었을 거라고 덧붙이는데, 그 문장에서 저도 슬쩍 손을 들었습니다.


키르케의 마법이 무서운 이유가 폭력적이지 않아서라는 해석도 인상 깊었어요. 때리지 않고 오히려 정성껏 대접한다는 거죠. 좋은 자리에 앉히고, 향기로운 음식을 내오고, 부드럽게 말을 걸고. 저항할 이유가 없는 대접 앞에서 사람이 가장 무방비해진다는 말. 그렇게 술잔이 건네지고 돼지의 몸을 얻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짐승의 몸에 갇혀 통제권만 빼앗긴 상태라는 풀이가 꽤 서늘했습니다.


세상은 매일 새로운 술잔을 건넨다고 해요. 어떤 잔에는 성공, 어떤 잔에는 안정, 어떤 잔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요. 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게 나한테 정말 필요한 건지 남들이 다 들고 있어서 나도 들어야 할 것 같은 건지, 그 구분이 흐려지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 표정을 살피고, 그 표정에 맞춰 톤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하는 순간에 대한 관찰도 있습니다. 처음엔 조심스러운 조율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어느 날 "나는 오늘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없구나" 하고 알게 된다는 것. 며칠째, 몇 달째, 어쩌면 몇 년째.


상대 말이 옳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상대 표정이 무서워서 끄덕이는 것은 겉으로 같아 보여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완전히 다르다고, 전자는 대화이고 후자는 이미 마법이라고 쓰더군요. 회의실 풍경 하나가 자동으로 떠올랐습니다.


4장에서는 파이아케스 해변에 떠밀려 온 오디세우스를 오래 들여다봅니다. 배도 부하도 옷 한 벌도 없고,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이라는 이름조차 파도에 씻겨 나간 상태. 짠물에 부푼 살갗과 며칠 굶어 흐릿해진 눈. 나뭇잎을 긁어모아 몸을 덮고 잠든 그가 다음 날 나우시카 공주 앞에 서는데, 무기도 지위도 없이 자신에게 남은 언어와 태도만으로 상대를 설득해 낸다는 대목입니다.


인간의 뼈대는 잘 살 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 나와요. 명예와 재물과 타인의 환호가 뼈를 두껍게 감싸고 있어서 정작 나를 지탱하는 중심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른 채 살아간다고. 그러다 그 껍데기가 한꺼번에 휩쓸려 가는 순간에야 처음으로 자기 뼈를 만져 본다는 겁니다.


이 장이 미더웠던 건 밑바닥을 미화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곳은 아프고 외롭고 가끔은 사람을 완전히 부수기도 하며, 모든 사람이 그 경험을 자산으로 바꿔내는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적어둡니다. 성급한 위로를 건네지 않겠다는 말도 하고요. 곧 좋아질 거라거나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이 지금 이 순간엔 아무 힘이 없다는 걸 자기도 안다고. 다시 올라올 때는 속도가 훨씬 느리지만 제 손가락 끝으로 바위를 짚으며 올라가기 때문에 그 자리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밑바닥을 겪은 사람 특유의 눈빛 이야기도 있어요. 화려하지 않고 낮게 가라앉아 있고 목소리도 크지 않은데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든든한 사람. 소리 지르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에 저도 조용히 동의했습니다.


또 하나. 저는 이 책을 읽고 나니 원전이 다시 궁금해졌는데, 반대로 오디세이아 자체의 이야기 맛을 기대하고 집으면 갈증이 남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장면은 재료로 쓰이는 쪽이라서요.


소장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두툼한 고전 완역본은 책장에서 위엄만 뽐내다 끝나기 쉬운데, 이 정도 크기면 아무 데나 펴서 한 꼭지씩 다시 읽기 좋아요. 밑줄 그을 문장도 넉넉하고요. 다섯 겹의 항해라는 틀이 있어서 오늘 내 상태에 맞는 장을 골라 펼치는 식으로 써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여름 내내 버텨낸 것만으로 용하다 싶은 시기인데, 이 책은 그 버팀을 낭비가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쪽이라 읽는 내내 든든했어요. 프롤로그 끝 문장이 계속 남습니다. 짐은 가볍게 꾸리고 단단한 것 몇 가지만 챙기자고, 첫 노를 젓기에 오늘만큼 좋은 날은 없다고. 가볍게 꾸리라는 말에 책 무게까지 맞춘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책은 들고 다니기 참 가볍습니다. 좋은 문장 여럿 건진 거 같아서 기분 좋은 하루였어요.


호메로스의 바다를 오늘 아침 출근길 위에 겹쳐 놓은 책, 가볍게 들고 다니며 무겁게 읽게 되는 한 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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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윤서 지음 / 더블:엔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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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시작부터 좀 뻔뻔한 데가 있어요. 그림 이야기를 하겠다면서 정작 그림이 한 장도 안 실려 있거든요. 표지에 '그림 없는 그림 에세이'라고 적혀 있는데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 대신 본문 여백에 QR 코드가 하나씩 박혀 있어요. 글을 먼저 읽고 궁금해지면 그때 찍어서 보라는 뜻인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잘 먹힙니다.

프롤로그 제목이 "살다 보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이 있다"예요. 그림 앞에 서면 감정이 먼저 도착하고 이야기는 그 뒤에 남는다는 문장으로 열립니다. 우리는 그림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정작 오래 남는 건 이미지보다 그 그림을 둘러싼 한 사람의 선택과 태도인 경우가 많다고요. 그래서 설명 대신 삶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대신 여백을 남겨두려 했다는 뜻을 밝혀 둡니다. 읽으면서 아 이 사람 진심이구나 했어요.


책은 희·노·애·락 네 파트에 화가 스물네 명을 나눠 담았습니다. 이 분류가 저는 꽤 마음에 들었는데, 저자가 감정을 사전적으로 다루지 않거든요. 희喜를 들뜬 기쁨 쪽에 두지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 쪽에 놓습니다. 노怒는 부정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말해지지 못했던 생의 에너지로 봅니다. 애哀는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태, 락樂은 도착점이 아니라 다시 하루로 돌아가기 위한 숨. 마흔 넘게 살아보니 이 네 가지가 순서대로 오지도 않고 깔끔하게 끝나지도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그 감각이랑 맞아떨어지더군요.


표지 그림이 칼 라르손인데, 본문에도 한 꼭지가 잡혀 있습니다. "이케아의 모든 디자인은 칼 라르손에게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따뜻한 집을 그린 스웨덴 화가예요. 아내 카린과 여덟 아이가 살던 집을 평생 그렸고, 그 집은 순드보른에 지금도 보존돼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어린 시절 집은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둘렀고 가정은 자주 흔들렸다고 합니다.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에서 일하며 그림을 배웠고요. 훗날 그는 "내가 그린 집과 가족의 풍경은 내가 바랐던 진짜 삶이다"라고 말했다는군요. 이 대목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봤습니다. 노란 모자 쓴 아이, 창가의 수선화, 도자기 주전자. 화가가 가져본 적 없어서 끝내 직접 만들어낸 방이었던 거죠. 겨울이 길어도 창을 닫지 않았고 해가 짧아도 꽃을 들여놓았다는 문장이 오래 걸렸습니다.


바로 다음 파트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노怒의 첫 자리가 바스키아예요.

거리의 낙서에서 출발해 뉴욕 미술계 한복판까지 간 사람. '검은 피카소'라는 별칭이 문을 열어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하나의 틀에 가두기도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이 양면을 짚는 방식이 좋았어요. 워홀과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림을 들고 작업실로 달려가 완성했다는 (도스 카베사스), 워홀이 일기에 "아주 특별한 아이"라고 적었다는 대목. 두 얼굴이 나란히 있지만 워홀 쪽은 단단하고 바스키아 쪽은 어딘가 미완처럼 열려 있다는 감상에 "당신 옆에 서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라는 문장이 붙습니다.


이후 "워홀 덕분에 성공했다"는 식의 평가가 따라붙었고, 그게 실은 그의 자격을 의심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는 서술도 나와요. 세상이 자기를 하나의 이미지 안에 가두려 할수록 그는 더 많은 단어를 덧씌우고 더 거칠게 화면을 긁어냈다고. 직장 생활 오래 한 사람이면 이 감각 조금은 알 거예요. 내가 아니라 누구 밑에서, 어느 라인으로 설명될 때의 그 기분. 저자는 그의 분노를 파괴라기보다 호출에 가깝다고 읽습니다. 여기 있다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방식이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모란디 꼭지였습니다.

평생 병과 상자만 그린 이탈리아 화가예요. 동네 벼룩시장에서 낡은 물건을 사다가 상표를 떼고 표면에 페인트를 칠했다고 합니다. 브랜드도 용도도 지워진 물건들. 인공조명은 안 쓰고 자연광만 썼고, 병 위에 내려앉은 먼지조차 색과 밀도의 일부로 뒀대요. 사물을 닦아내지 않았다는 건 시간을 지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문장에서 저도 모르게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병의 위치를 1밀리미터씩 옮기고 다시 바라보는 것이었다고 해요.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그린 병들이 전부 다르답니다. 병이 달라진 게 아니라 병을 바라보는 시간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어요. "많이 보기보다 오래 보기를 선택했다"는 문장, 그리고 모란디 본인의 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시간, 눈에 띄는 성과도 변화도 없는 것 같은 날들. 우리는 그런 시간을 의미 없는 공백으로 여기기 쉽지만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은 우리 안에서 조용히 형태를 바꾸고 있다고 하더군요. 요 몇 년 제가 딱 그런 구간을 지나온 거 같아서, 이 부분은 두 번 읽었습니다.


구성에서 마음에 든 장치가 하나 더 있어요. 꼭지마다 끝에 '한국에서 만난 ○○○' 코너가 붙습니다. 라르손은 2024년 서울 마이아트뮤지엄 <새벽부터 황혼까지>, 바스키아는 2020년 롯데뮤지엄 회고전과 2025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시, 모란디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모란디와의 대화>. 먼 나라 화가 이야기가 갑자기 내가 지나다닌 동네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라 반가웠습니다. 그 아래 writer's note 한두 줄도 좋아요. 라르손 편에는 지금 내가 소중히 지키고 싶은 공간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고, 바스키아 편에는 인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건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솔직히 걸린 것도 있어요. QR 방식이요. 취지는 알겠는데 결국 궁금해서 휴대폰을 집게 되고, 한번 집으면 알림이 어쩌고 하다가 흐름이 끊기더라고요. 책만 보자니 궁금하고 폰을 켜자니 산만하고. 저는 몇 꼭지는 그냥 글로만 읽고 그림은 나중에 몰아서 확인하는 쪽으로 타협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오히려 문장이 더 선명하게 들어오긴 했어요.


책 자체도 얘기해야겠네요. 양장인데 손에 드니 의외로 가볍습니다. 요즘 제 어깨가 감당 못 하는 게 한둘이 아닌데 이 녀석은 봐주더군요. 표지 질감도 좋고 소장하기 괜찮은 만듦새예요. 안에 명화 엽서도 들어 있었는데 프랑수아 부셰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화)랑 에드가 드가의 (발레 수업)이었습니다. 저자의 전작 <하루 10분 100일의 명화>에 실린 그림들이라고 표기돼 있고요. 그림 없는 책에 그림 엽서를 끼워주는 센스가 재밌었어요.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미술 지식이 없어도 전혀 부담이 없고, 화가 한 명당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마음 가는 데부터 펼쳐도 되겠더군요. 저자가 미술치료학 박사과정에서 예술과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던데, 글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지는 게 그래서인가 싶기도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선선해졌어요. 라르손이 겨울에도 창을 닫지 않았다는 그 문장을 생각하면서, 저도 올가을엔 집 어딘가를 조금 더 환하게 만들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드네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마음이 따뜻해진 저녁입니다.


그림 한 장 없이도 화가 스물네 명의 삶이 또렷하게 도착하는, 희·노·애·락으로 읽는 조용하고 다정한 그림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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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인데 왜 피곤할까 - 혈당 리듬을 되찾는 4주 실전 프로그램
양혁용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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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오늘은 수요일, 분리수거 날이라 플라스틱이랑 종이를 각각 다른 자루에 나눠 담고 왔습니다. 캔은 캔대로, 유리는 유리대로 꼼꼼히 갈라놓으면서 좀 웃겼어요. 밖에 내놓는 쓰레기는 이렇게 열심히 분류하면서, 정작 내 입으로 들어가는 건 순서도 시간도 없이 그냥 던져 넣고 살았구나 싶더라고요.


손 씻고 꺼내 든 책이 하필 이겁니다. <정상인데 왜 피곤할까>.

제목 앞에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건강검진표에 '정상' 두 글자 찍혀 나오는데 오후 두세 시만 되면 눈꺼풀이 천근이고, 점심 먹고 두 시간이면 또 뭔가 단 게 당기는 그 상태. 저만 그런 줄 알았거든요.


책은 핸드북 사이즈로 얇고 가볍습니다. 가방에 넣어도 어깨에 티가 안 나는 정도예요. 요즘 벽돌 같은 책들 들고 다니느라 팔뚝만 단련되던 차에, 이런 책 만나면 반갑습니다. 근데 얇다고 만만한 건 아니고, 본문에 컬러 인포그래픽이 중간중간 들어가 있어서 눈으로 넘기는 속도가 생각보다 안 붙어요.

저자는 구독자 11만 명의 의학 유튜브 '양닥터'를 운영하는 의사이자, CGM 기반 혈당관리 서비스 글루코핏 대표인 양혁용 님입니다. 작가의집에서 올해 9월에 나왔고요.


이 책이 다른 혈당책이랑 갈라지는 지점은 1장에서 바로 나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당화혈색소라는 숫자가 사실은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걸 가려준다는 얘기예요. 혈당이 70과 130 사이를 안정적으로 오가는 사람과, 50까지 떨어졌다가 200까지 치솟는 사람의 당화혈색소가 비슷하게 나올 수 있다는 대목.

여기서 연평균 기온이 같은 두 도시 비유가 나오는데, 이 부분을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습니다. 한 도시는 사계절 내내 온화하고, 다른 도시는 여름에 40도 겨울에 영하 20도를 오갑니다. 평균은 같은데 그 안에 사는 사람 경험은 완전히 다르다는 거죠. 우리 몸의 세포도 똑같다는 설명입니다.


평균으로 퉁쳐서 '정상'이라 불렸을 뿐, 몸은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 그러니까 필요한 건 병명이 아니라 리듬의 회복이라는 문장이 책 초반에 박혀 있어요.


읽으면서 좀 놀랐던 건 근거를 다는 태도였습니다. 각주가 꽤 촘촘하게 붙어 있어요. 식후 혈당이 공복 혈당보다 심혈관 질환 발생을 더 강하게 예측한다는 논문, Time-in-Range를 핵심 지표로 제시한 국제 전문가 합의 같은 것들이 본문 아래에 정직하게 달려 있습니다.


그 TIR이라는 개념도 저는 이 책에서 처음 제대로 봤어요. 하루 중 혈당이 70~180mg/dL 범위 안에 머무는 시간 비율인데, 목표가 70% 이상입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약 17시간을 건강한 범위 안에서 보낸다는 뜻이라고 풀어주는데, 이렇게 시간으로 환산해주니까 감이 확 오더군요. 점수가 아니라 출석률 같은 느낌이랄까.


실전 파트로 넘어가면 얘기가 더 현실적으로 바뀝니다.

제일 써먹을 만하다 싶었던 건 2주차 챕터였어요. 식후 15분에서 30분 사이에 가볍게 움직이면 포도당이 인슐린 도움 없이도 근육 세포로 흡수된다는 설명. 홍수 나기 직전에 댐 수문을 여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비유해놨는데, 그림까지 같이 보니까 이해가 쉽습니다. 핵심은 강도가 아니라 타이밍이라고 못을 박아요.


식후 가벼운 걷기가 혈당 피크를 약 12~22% 낮추는 경향이 보고됐고, 이게 고강도 운동을 식전에 하는 것보다 클 수도 있다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좀 반가웠습니다. 헬스장 끊어놓고 안 가는 중년에게 이만한 복음이 없거든요.

운동 종류별로 표가 정리돼 있는데, 가벼운 산책 10~15분, 계단 5층, 제자리 스쿼트, 제자리 걷기, 스트레칭. 그리고 설거지와 청소도 당당하게 한 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운동이 어려운 상황이면 집안일도 충분한 효과가 있다는 문장 보고 살짝 웃었어요. 아내한테 이 페이지 보여주면 제 저녁 담당 구역이 늘어날 것 같아서 조용히 넘겼습니다.


회식에서 피자랑 파스타 먹었으면 식당에서 나와 한 정거장만 걸어도 차이가 난다는 말. 이게 참 우리 세대 얘기죠.

4주차 챕터는 결이 좀 다릅니다. 4주 동안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고 대놓고 시작해요. 회식, 야식, 스트레스 폭식. 리듬이 깨지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고. 그래서 4주차의 목표는 회복 탄력성을 기르는 거라고 말합니다. 혈당 관리의 고수는 한 번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져도 빠르게 돌아오는 사람이라는 문장.


무너진 다음의 회복 루틴이 다섯 가지로 나오는데, 즉시 움직이기, 다음 끼니는 가볍게, 물 충분히, 식초 활용, 그리고 마지막이 자책하지 않기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가 직접 꼽아뒀어요. 한 번의 실패가 전체의 실패는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주라는 말.

건강서에서 이런 문장 만나면 마음이 좀 놓입니다. 다이어트든 운동이든 몇 번씩 시작하고 접어본 사람 입장에서는, 완벽하게 하라는 말보다 이쪽이 훨씬 오래 갈 것 같거든요.


수면 파트도 제 나이대엔 남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룻밤만 못 자도 다음 날 인슐린 민감성이 약 25% 떨어질 수 있다는 연구가 인용돼 있고, 6시간 미만 잔 다음 날엔 식후 피크가 평소보다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회원 데이터에서도 관찰됐다고 합니다. 늦게까지 유튜브 보다 자는 습관이 그냥 피곤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던 거예요.


외식 가이드랑 음주 표는 아주 실용적입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카페별로 추천 메뉴와 피할 메뉴가 갈라져 있고, 술은 맥주가 높음, 와인이 보통, 소주가 낮음, 칵테일이 매우 높음으로 정리돼 있어요. 소주가 낮음으로 나와서 잠깐 기뻤는데 바로 옆 칸에 안주와 함께 먹는 게 문제라고 적혀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네요.


솔직하게 걸렸던 부분도 있습니다.

저자가 CGM 기반 혈당관리 서비스 대표이다 보니, 본문에 등장하는 일부 제품이나 서비스와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점. 이건 책이 저작권 고지면에 스스로 밝혀둔 내용이긴 해요. 밝혀뒀다는 게 오히려 신뢰가 가는 쪽이긴 한데,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CGM 관련 파트를 볼 때 한 번씩 그 사실을 떠올리게 되긴 합니다.


그리고 분량이 얇다 보니, 항목별로 깊게 파고들기보다 넓게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 대목이 있어요. 표로 정리된 수치들도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는 단서가 달려 있어서, 그대로 내 몸에 적용된다고 기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어차피 이 책 자체가 정답을 주는 대신 각자 실험해보라고 설계된 책이라 이건 성격에 가깝긴 하지만요.


소장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두툼한 건강서는 한 번 읽고 꽂아두면 끝인데, 이건 얇고 가벼워서 사무실 서랍에 넣어두기 좋아요. 뒤쪽에 4주 루틴 기록표랑 혈당 안정 레시피가 붙어 있어서 실제로 펴놓고 쓰라고 만든 책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읽는 책보다 쓰는 책 쪽에 가깝겠다는 생각.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꽤 서늘해졌습니다. 이맘때가 식욕 올라오는 계절이라 더 위험한데, 마침 이런 책을 만났네요.


당장 오늘 저녁부터 밥 먹고 십오 분만 걸어보려고요. 분리수거하러 나가는 김에 한 바퀴 더 돌면 되겠다 싶습니다. 어차피 쓰레기도 나누는 김에 내 하루 리듬도 좀 나눠보자는 마음으로요.

읽고 나니 몸에 미안해지는 책이었습니다. 좋은 책 만난 거 같아 기분이 괜찮네요.


검진 결과는 정상인데 늘 피곤한 사람에게, 평균 수치 뒤에 숨은 하루치 혈당의 오르내림을 보여주고 4주 동안 직접 실험해보게 만드는 얇고 실용적인 안내서입니다.


#정상인데왜피곤할까 #양혁용 #양닥터 #작가의집 #혈당관리 #혈당스파이크 #혈당리듬 #당화혈색소 #TimeInRange #식후졸음 #만성피로 #인슐린저항성 #CGM #연속혈당측정기 #건강도서 #4주프로그램 #중년건강 #직장인건강 #대사건강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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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세미녀가 알려주는 우리 아이 부자 세팅법 - 내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자산은 ‘돈’이 아니라 ‘세금을 다루는 지식’이다.
김희연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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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세금 설계에서 가장 비싼 단어는 '나중에'였습니다 절세미녀 김희연 신간 읽고


수요일이라 분리수거부터 하고 왔습니다. 박스 접어 내놓고 손 씻고 들어와서 책상 위에 놓인 놈을 집었는데, 들자마자 손목이 먼저 알아채더군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이거 다 읽기 전에는 종이류로 나갈 일이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절세미녀가 알려주는 우리 아이 부자 세팅법》, 김희연 회계사가 쓰고 모티브에서 이번 달 초에 나온 신간이에요.


첫 장부터 숫자 하나가 훅 들어옵니다.


프롤로그에 저자 사무실을 찾아온 제조업 사장님 이야기가 나와요. 맨손으로 시작해서 100억 원짜리 회사를 일군 분. IMF도, 금융위기도, 코로나도 다 버텨낸 분이 어느 날 자식 이야기를 꺼내면서 묻습니다. 평생 일군 거 애들한테 온전히 물려주고 싶은데 얼마나 들겠냐고요. 저자가 계산기를 두드려 보여준 숫자가 상속세 약 45억이었다고 합니다. 평생 모은 것의 절반이 단 한 번에 사라지는 셈이죠. 한참 말이 없던 그분이 천천히 되물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럼… 내가 더 열심히 일할수록 자식한테 줄 게 줄어든다는 얘기네요?"


책의 첫 페이지가 이 질문으로 열립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자세를 고쳐 앉았어요.


책 제목만 보고는 솔직히 좀 삐딱했습니다. 부자 세팅법이라니, 있는 집 얘기겠구나 했거든요. 그런데 1장에 붙은 문답 하나가 그 생각을 슬쩍 건드립니다. 자산이 많지 않은데도 미리 알아야 하냐는 질문에, 설계의 효과는 시간에서 나오기 때문에 자산이 적을 때 시작할수록 유리하다고, 자산이 적다는 건 오히려 옮기는 비용이 가장 쌀 때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답하더라고요. 뒤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작은 집은 작은 대로, 큰 집은 큰 대로 같은 원칙 위에서 설계가 이뤄진다고요.


물려받는 쪽도 당사자라는 대목도 걸리더군요. 주는 입장만 생각했지, 받는 입장에서 세금이랑 자금 출처를 알아야 손해를 안 본다는 건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다른 데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건 2장 끝의 네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일찍, 나눠, 기록, 점검. 복잡한 세법 조문은 잊어도 이 네 단어만 기억하면 큰 방향은 안 잃는다고 저자가 정리해두는데요, 저처럼 세금 문외한한테는 이 네 글자가 지도 노릇을 합니다. 일찍은 옮기는 비용이 싸고 자녀 명의에서 불어난 상승분에는 세금이 안 따라붙는다는 얘기. 나눠는 한 번에 큰 덩어리로 옮기면 높은 세율 구간으로 직행하니 시점과 대상을 쪼개라는 얘기.


그중에 기록 파트가 제일 실용적으로 읽혔어요. 증여는 신고로, 차용은 차용증과 이자 이체로, 자금의 흐름은 이체 메모로 남기라고 합니다. 기록 없는 자산은 결정적인 순간에 출처 불명이라는 약점이 되고, 절세의 절반은 기록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입증 책임이 납세자한테 있다는 설명이 붙으니까 수긍이 가더라고요. 억울해도 증명은 내가 해야 한다는 거죠.


"세금 설계에서 가장 비싼 단어는 '나중에'이고, 가장 값진 단어는 '지금'이다."


이 문장 앞에서 좀 찔렸습니다. 프롤로그에서도 저자가 14년간 배운 가장 비싼 단어로 '나중에'를 꼽거든요. 나중에 하자, 아직 정정하시니 천천히, 애가 좀 더 크면, 지금은 너무 바쁘니까. 제가 딱 그 말들로 살아온 사람이라서요.


제 나이대에 제일 아프게 읽힌 건 중장년기 챕터였습니다. 40~60대를 긴 세대, 샌드위치 세대라고 부르면서 세 개의 시계 이야기를 꺼내는데요. 위로는 부모 부양, 아래로는 자녀, 가운데는 내 노후. 이 세 시계가 서로 다른 속도로, 그런데 같은 통장에서 돌아간다는 표현이 나와요. 문제는 세 시계가 모두 '지금' 돈을 요구한다는 것.


읽으면서 저희 집 통장을 떠올렸습니다. 순서가 늘 헷갈렸거든요. 부모님 병원비, 아이 학비, 내 노후 적립. 이 책은 정답은 없다고 하면서도 원칙 하나는 분명히 합니다. 부모의 자산은 부모를 위해 먼저 쓴다는 것.


거기 붙은 현장 사례가 남 얘기 같지 않았어요. 50대 초반의 한 분이 부모님 요양 비용, 두 자녀 등록금, 본인 노후 적립을 각각의 통장으로 따로 관리하다가 늘 현금이 빠듯했다는 이야기. 정작 부모님 자산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는 한 번도 정리해본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세 시계를 하나의 큰 시계로 놓고 보니 그제서야 어디에 돈을 먼저 써야 할지 순서가 보이기 시작했다고요.


저희 부모님 자산 구성, 저도 모릅니다. 여쭤본 적도 없고요.


부모에게 받을 상속과 내가 자녀에게 줄 상속을 따로 보지 말고 세 세대의 호흡으로 보라는 대목이 이 책에서 제일 시야를 넓혀준 부분이었습니다. 같은 재산에 상속세가 두 번, 세 번 매겨지는 구조라는 설명을 들으니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걸렸던 부분도 있어요. 뒤로 갈수록 규모가 훌쩍 커집니다. 꼬마빌딩, 가족법인, 패밀리오피스, 지주회사 같은 단어가 줄줄이 나오는데 저 같은 월급쟁이한테는 딴 세상 얘기처럼 느껴지는 구간이 분명 있습니다. 목차만 봐도 기가 좀 죽어요. 그리고 세법은 매년 바뀐다고 저자 스스로 점검 파트에서 말하고 있으니, 여기 나온 한도나 숫자들을 몇 년 뒤에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실제로 한 꼭지에서는 예전에 가장 강력했던 특례의 문이 지금 닫히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두께도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앉은자리에서 쭉 읽는 책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단점만은 아닌 게, 목차가 0세부터 60세까지 나이순으로 짜여 있어서 내 위치를 찾아 펼치기가 편합니다. 저는 중장년기 챕터를 먼저 봤고, 아이 계좌 얘기가 나오는 앞쪽으로 되돌아갔어요. 저자도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라오기를 권하긴 하는데, 급한 사람은 자기 나이부터 펴도 길을 잃진 않을 거 같아요. 이건 소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는 쪽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톤이에요. 세금 피하는 요령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고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못을 박습니다. 정확하게 신고하고, 떳떳하게 기록을 남기고, 법이 열어둔 길을 제대로 밟는 합법적인 절세만 이야기하겠다고요. 편법은 잠깐의 이득처럼 보여도 결국 더 큰 대가로 돌아온다는 문장이 있는데, 회계사가 이렇게 쓰는 게 반가웠습니다.


14년간 수많은 가족의 희로애락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 의외로 단순하다고 해요. 가장 완벽한 절세는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가족 간의 신뢰와 '미리 준비하는 사랑'이라는 것. 돈은 빼앗길 수 있어도 부모가 물려준 '세금을 보는 눈'은 평생 아이를 지켜준다는 말로 프롤로그를 닫습니다.


이 대목에서 잠깐 멍해졌어요. 저는 아이한테 물려줄 게 별로 없다는 생각으로 이 주제를 아예 안 쳐다보고 살았거든요. 근데 물려줄 게 통장 잔고만은 아니라는 거죠.


책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는 거였습니다. 자산 얘기를 대뜸 꺼내긴 어색하겠지만, 기억 또렷하실 때 여쭤보는 게 맞다는 걸 이 책이 계속 말하고 있어서요.


9월도 끝자락이라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는데, 이런 책은 딱 이맘때 읽기 좋은 거 같습니다. 한 해 정리하는 기분도 들고, 내년엔 뭐부터 해볼까 셈도 서고요. 세금 책 읽고 기분이 좋아질 줄은 몰랐는데, 모르고 지나갈 뻔한 걸 알게 돼서 든든한 쪽에 가깝습니다. 저는 일단 기록부터 해보려고요. 지금부터.


물려줄 돈이 많든 적든, 부의 이전을 가르는 건 액수가 아니라 시작한 시점이라는 걸 알려주는 생애주기 절세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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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의 아이 : 하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더픽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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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괜찮다는 말이 무기가 될 때. <몽환의 아이> 하권 서평

앞서 상권 서평을 먼저 올리고 이어서 하권을 쓰고 있어요. 상권 서평을 못 보신 분들은 그거 먼저 보고 오시면 이해하시기 편하실 거예요. 드라마도 막장 아닌 이상 재미있는 건 정주행하듯이요.



네 명의 환자,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발병한 이레스, 도쿄 서부의 연쇄살인. 상권을 덮을 때만 해도 선이 다 보인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하권 막바지에서 그 선들이 한 점으로 모이는 순간, 앞에서 읽은 장면들의 의미가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영화도 쉬었다가 다시 보면 앞부분이 잘 이해 안 돼서 두 번 보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 소설도 연속으로 읽지 않는 이상 다시 읽거나 찾아보고 싶은 부분이 생기는 구간이 있습니다.

하권은 제3장 '몽환의 연주회'로 시작합니다. 조종석과 법정을 지나온 독자 앞에 이번엔 연주회장이 열려요. 잠든 사람의 내면이 만든 세계가 왜 하필 그 모양인지, 그가 살면서 무엇을 가장 붙들고 있었는지가 공간의 형태로 드러나는 설정인데, 세 번째에 이르면 이 규칙이 장난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집니다. 작가는 무대를 지어놓고 그 무대의 문턱과 막힌 문을 전부 감정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조종석, 법정, 연주회장. 세 곳을 차례로 지나고 나면 자기 안에는 어떤 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저는 그게 좀 궁금했습니다.

제4장 '몽환의 부식'은 제목 그대로입니다. 앞 장들이 한 사람씩 구해내는 이야기였다면 여기서는 지켜온 게 조금씩 갉아먹혀요. 병원 안의 긴장, 특별 병실에 숨겨진 정체불명의 환자, 학대당한 채 실려 온 소년. 세 갈래가 동시에 조여드는 구간이라 읽는 속도가 저절로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막간 4.

이 소설에서 막간은 장식이 아닙니다. 분량은 짧은데, 다 읽고 나서 저는 앞으로 되돌아가 병실 장면들을 다시 확인했어요. 누가 말하고 있었는지, 왜 이 대목이 하필 여기 놓였는지가 드러나는 순간 앞의 이야기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잠이 달아났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두꺼운 소설을 못 놓는 것 같아요.

제5장 '그리고, 몽환의 끝으로'는 해답의 장입니다. 독립된 사건처럼 굴러가던 환자들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고, 소설이 앞에서 세워둔 규칙을 하나도 어기지 않은 채 끝까지 밀고 갑니다. 저는 판타지가 섞인 미스터리를 읽을 때 늘 이 지점을 봅니다. 초자연적 설정을 깔아놓고 결말에서 편의대로 비틀어버리면 앞의 긴장이 전부 헛것이 되니까요. 치넨 미키토는 그러지 않습니다. 쿠쿠루, 마부이, 마부이구미가 마지막까지 자기 법칙대로 작동해요.



책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나를 살린 사람과 나를 부순 사람이 같은 사람일 때, 그다음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쉬운 답을 내놓지는 않는 거 같더라고요. 은인이면서 가해자인 존재를 끝까지 한 사람으로 그려낼 뿐이에요. 나이를 먹을수록 이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나를 키운 방식과 나를 상하게 한 방식이 사실 같은 것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는 일이 있잖아요. 미워하자니 내가 지워지고, 감사하자니 상처가 억울해지고. 그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쉽게 기울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상권에서 누군가를 안심시키던 "괜찮아"라는 말이, 하권에서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어 돌아옵니다. 같은 말이 위로도 되고 무기도 된다는 걸 두 권을 들여 보여줘요.



에필로그의 마지막 풍경은 꼭 천천히 보세요. 인물의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작가가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는데, 하늘 색이랑 바다 색만 보고 있으면 그게 전해집니다. 설명 없이 색으로만 마무리하는 방식이 저는 참 좋았어요.

옮긴이의 말도 빼놓지 마시고요. 민경욱 번역가는 원제 '무겐노아이(ムゲンのi)'를 처음 봤을 때 몽환의 세계에서 활약하는 주인공 아이의 이야기라서 '몽환의 아이'로 읽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다른 의미를 발견했다고 밝혀둡니다. 무겐노아이는 무한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제목이 두 번 읽히는 셈이에요. 이걸 본문 다 읽고 마주하면 감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정주행하듯이 상권부터 하권까지 이어서 보시면 몰입감도 있고 재밌습니다.

감정을 아끼는 편은 아닌 거 같아요. 후반부로 갈수록 눈물의 밀도가 높아지고, 인물들이 자기 상처를 말로 풀어내는 장면이 꽤 깁니다. 절제된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면 과하다 느끼실 수 있어요. 상권을 안 읽고 하권부터 집으면 거의 아무것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도요. 두 권을 한 작품으로 보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두께도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있는데, 저는 이 분량이 낭비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앞을 그만큼 쌓아뒀기 때문에 마지막이 성립하는 구조라서요.

저 같은 경우는 며칠 연속으로 틈틈이 시간 날 때 읽었는데, 그게 맞았던 것 같아요. 띄엄띄엄 읽으면 하권의 회수 장면들이 힘을 잃거든요. 주말 하나 끼워서 계획 잡으시면 리듬이 안 끊깁니다.

2020년 일본 서점대상 후보작이고 국내에는 이번에 처음 소개됐습니다. 상하권 표지가 이어지는 한 장의 하늘 그림이라 나란히 꽂아두면 그 자체로 그림이 되고요.

트릭이 어떻게 짜였나보다 저 사람은 왜 저럴 수밖에 없었을까가 더 궁금해지는 소설이었어요. 오래 붙들고 읽을 한 질이 필요하신 분한테도 좋을 것 같고요. 상권만 집어 들까 망설이고 계시면 두 권 같이 데려오시는 게 낫습니다. 상권 덮고 하권 사러 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괴롭더라고요.

다 읽고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제목이 처음과 다르게 읽히는 경험, 오랜만이었어요. 두 권 나란히 꽂아두고 나니 좋은 책을 만난 거 같아서 좋았습니다.

마지막 몇 장이 앞의 이야기를 통째로 다시 읽게 만듭니다. 제목까지 다시 읽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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