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 - MBC 라디오 <여성시대>>가 전하는 인생의 한마디
여성시대 지음 / 김영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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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51년 동안 라디오에 도착한 편지 60통, 한가위에 읽는 <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서평


"사람이 밥 처먹는다고 사람인 줄 알어? 밥값을 해야 사람이지."


책 속 어느 할머니가 사고뭉치 손주한테 던진 호통인데요, 월급 받고 사는 아재 입장에서는 괜히 뜨끔하더라고요. 나는 회사에서 밥값은 하고 있나 싶은 날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오늘이 추석 연휴 첫날이라 다들 전 부치느라 바쁘실 텐데, 저는 전 대신 편지 이야기를 부쳐 봅니다.

<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는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도착한 편지들을 모은 책이에요. 1979년부터 해마다 봄이면 열린다는 글 잔치 '신춘편지쇼'의 당선작 가운데,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삶을 붙들어 준 순간을 담은 편지 60편을 골라 다섯 장으로 나눴다고 합니다. 1975년에 시작한 방송이 올해로 51년째라니, 그동안 방송국에 쌓였을 편지 더미를 떠올리기만 해도 아득해져요.


펼쳐 보면 사연마다 붙은 편지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줄이 그어진 종이 위에 제목이 크게 적혀 있고, 맨 아래에는 보낸 사람이 붙인 별칭과 이름, 보낸 해가 있어요. '담배 가게 호랑이 할머니 손주', '행복은 내가 선택하는 것', '첫 소풍' 같은 식으로요. 편지지 색도 연초록이었다가 분홍이었다가 살구빛으로 바뀌어서, 사연 하나 넘어갈 때마다 새 봉투를 뜯는 기분이 들더군요. 본문 중간중간 좋은 말은 표지 제목을 감싼 것과 같은 보랏빛 곡선 안에 따로 크게 실려 있는데, 누가 밑줄을 대신 그어 준 것 같아서 좋았어요.

차례만 훑어봐도 재미가 있습니다. "혹시 난닝구 입고 댕기나?", "네찌 주라", "천금가튼 내 세끼 바라". 맞춤법도 사투리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살려 둔 것 같은 제목들이라, 누군가의 손글씨를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 나요.


프롤로그부터가 한 통의 편지예요. 어른이 되고부터 "사는 게 대체 뭔가", "지금 닥친 이 고비는 어떻게 넘어가나" 같은 물음표를 수시로 만나게 됐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그 물음표가 남의 얘기 같지 않더라고요. 답이 없는 게 아니라 '정해진 답이 없다', '답이 무한히 많다'고 고쳐 말하는 대목에서는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고요. 마지막에는 여성시대 드림이라는 서명까지 붙어 있어요. 그 앞쪽에 이런 문장도 있었습니다.


"그냥 그저 에세이 읽듯, 소설 보듯 페이지를 넘기셔도 좋습니다.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이야기들이니까요."

읽어 보니 빈말이 아니었어요.

처음에 나온 호랑이 할머니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편지를 쓴 사람은 대리기사인데, 지난겨울 태운 손님이 고향 얘기를 하다가 담배 가게 호랑이 할머니를 아느냐고 묻는 데서 사연이 시작돼요. 근 30여 년 만에 듣는 그 호칭을 화자가 반가워하는 장면부터 벌써 마음이 들썩이더라고요. 할머니는 작은 쪽방에서 담배를 파셨는데, 고등학생이 담배를 사러 오면 "머리에 새똥도 안 떨어진 놈이 어디서 댐배질이여?" 하면서 빗자루부터 드셨다고 해요. 담배 파는 분이 담배 사러 온 학생을 쫓아내는 가게라니, 읽으면서 웃음이 났습니다.


사춘기에 방황하던 손주한테는 앞의 그 밥값 호통이 떨어지는데, 스무 살에 지금의 아내를 데려갔을 때는 또 결이 달라요. 아내의 손을 잡고 "저놈이 하는 짓은 깡패여도 본심은 착한 놈이다"라며 손주 편을 들어 주시고, 손주한테는 이렇게 당부하시거든요. "니놈이 귀하게 여겨야 남도 귀하게 여겨주는 거여. 이쁜 거 만났으니 귀하게 여기고 아껴주어야 혀." 호통과 당부가 한 입에서 나오는 분이라 그런지, 이런 어른 한 분 곁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편지를 쓴 분이 오십 반백의 나이에도 할머니 가르침을 되새기며 산다는데, 저랑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3장의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데, 그러니까 우리 딸이 좀 봐줘)였어요. 30대 중반에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게 된 딸이,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말에 아무것도 꺼내지 못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기억 한가운데에는 엄마 '경옥 씨'가 있고요. 딸이 기억하는 엄마의 말은 '안 돼', '하지 마', '입 다물어', '보기 싫어' 같은 것들이었다고 해요.

그러다 아빠가 경옥 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외할머니 병간호를 하면서 한 시간 넘는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고, 동생들 도시락과 온갖 집안일까지 떠안고 자랐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아빠가 한마디를 보태죠. "잘 몰라서 그래.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데, 그러니까 우리 딸이 좀 봐줘."


부모라는 자리도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것.

이 나이쯤 되니 처음 맡아 본 자리에서 서툴렀던 기억이 저한테도 적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이 말이 남의 집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연 속에는 경옥 씨의 다른 얼굴도 조금씩 드러나요. 첫 직장에서 상사가 볼펜으로 딸의 머리를 때린 적이 있는데, 전화로 사정을 들은 엄마가 딸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거친 말로 그 상사를 욕해 줬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해 본 사람이라면 그 전화 한 통이 얼마나 든든했을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편지가 어디에 닿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면 좋겠어요. 보낸 사람의 별칭이 '행복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게 다 읽고 나니 다시 눈에 들어오더군요.


5장의 (인생이 소풍 같다)에는 이런 장면이 나와요. 대장암 수술 뒤로 외출이 어려워진 아버지를 모시고 봄 소풍을 간 날, 여섯 살 딸아이가 할아버지 손이 차갑다며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아요. 할아버지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그 머리 위로 벚꽃잎 한 장이 떨어지자 아이가 소리칩니다. "와, 할아버지 머리 위에 꽃이 폈어!"

아버지는 병에 걸리기 전에는 "'인생이 소풍 같다'는 놈은 대체 어떤 호사를 누리고 갔냐"고 빈정거렸는데, 지금은 건강했던 지난 시절이 모두 소풍 같다고 하신대요. 손녀가 할아버지는 소풍을 엄청 많이 다녔겠다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이거였어요. "할아버지 소풍은 이제부터야." 반백의 머리에 벚꽃잎을 얹은 할아버지 모습이 그려져서, 이 장면은 오래 눈앞에 떠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연들도 결이 다 달라요. 두 번 실패하고 무너진 딸에게 엄마가 건넨 "실패는 있을 수 있어도, 실패한 인생은 없어"라는 말도 있고, 국숫집에서 처음 본 할머니가 사투리로 건넨 "살면 살아지고, 살아지면 잘 살았다 싶은 날 있제"라는 말도 있어요. 제목만 봐도 사연이 대강 짐작되는데, 막상 읽으면 짐작보다 훨씬 깊더라고요. 저는 수영을 배우는 엄마가 딸한테 던진 말에서 웃음이 터졌어요. "다 늙은 엄마도 이 나이에 배워서 수영하는데 너라고 못할 게 뭐 있겠어! 내가 너 나이면 날아다녔다!" 뭐든 늦었다고 생각하기 쉬운 나이라서 그런지, 청춘이 꼭 젊은 나이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편지 속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어졌습니다.


양희은 님 추천사에 "40대 끝자락부터 지금까지 나를 사람답게 키워준 터전은 (여성시대) 편지들이었다"는 문장이 있어요. 40대 끝자락이면 딱 제 나이라 괜히 더 믿음이 갑니다.


솔직히 걸렸던 건 읽는 속도였어요. 한 편 한 편은 길지 않은데, 편지 한 통에 한 사람의 몇십 년이 들어 있다 보니 연달아 넘기기가 쉽지 않더군요. 한 통 읽고 숨 고르고, 또 한 통 읽고 숨 고르게 되는 책이라 몰아서 읽는 재미를 기대하면 조금 다를 수 있어요. 대신 아무 데나 펼쳐도 거기서 바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니, 곁에 두고 오래 꺼내 읽기에는 이만한 책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는 고급스러운 양장 커버에 두께는 보통 에세이만 해서 손에 쥐기 딱 좋아요. 표지에는 꽃이 가득한 정원 벤치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뒷모습이 색연필 느낌으로 그려져 있는데, 제목이랑 참 잘 어울립니다. 들고 있으면 명절 선물세트처럼 든든한데, 햄 대신 사람 냄새가 꽉 차 있더라고요. 추석에 부모님 댁 가실 때 과일 상자 옆에 한 권 끼워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서로의 말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고, 내일이면 한가위 보름달이 뜨겠네요.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전화 걸어서 "밥은 먹었니?" 한마디 건네 보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 덕분에 좋은 말을 한 보따리 두둑하게 챙겨 받은 기분이라, 명절을 앞두고 마음이 든든해요. 다들 배도 마음도 넉넉한 한가위 보내세요.


평범한 사람들이 51년 동안 보내온 편지 속에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 한마디들을 모은 따뜻한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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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바로 써먹는 사회심리학 - 최신 연구가 밝혀낸 인간 행동에 숨겨진 심리 법칙 69
나이토 요시히토 지음, 명다인 옮김 / 더페이지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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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연차보다 배우는 태도가 실력을 만든다더군요, <일상에서 바로 써먹는 사회심리학> 서평



투우장의 소는 빨간색을 구별하지 못한대요.


소가 달려드는 건 눈앞에서 천이 펄럭이기 때문이고, 빨간 천은 원래 관중석의 흥분을 끌어올리려고 쓰는 장치라고 합니다. 그럼 도로 위의 빨간 차는 어떨까 싶어서 궁금해지더라고요. <일상에서 바로 써먹는 사회심리학>은 이렇게 "어, 진짜 그러네?" 싶은 질문을 하나 던지고 나서 연구 결과로 차근차근 답을 풀어주는 책이에요.


실제로 책에는 운전면허를 갓 딴 초보 운전자라면 빨간 차는 한 번쯤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는 조언이 나와요. 저는 초보보다는 초로에 가까운 나이라 해당 사항은 없는 걸로 치기로 했습니다.

지은이는 <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를 쓴 나이토 요시히토예요. 200권 넘게 책을 쓴 일본 대중 심리학 저자라는데, 그렇게 많이 쓴 사람의 문장은 역시 힘이 빠져 있고 편안하더군요. 명다인 님이 옮겼고 더페이지에서 나왔습니다. 크기도 두께도 딱 보통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 부담 없는 책 같아요. 심리 법칙 69가지가 사회·문화부터 건강·행복까지 여섯 갈래로 나뉘어 있고, 한 꼭지가 길지 않아서 어디부터 펼쳐도 금방 이야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프롤로그부터 마음에 들었어요. 이름이 비슷한 학문은 뒤에 붙은 말이 중심이라고 기억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심리경제학은 경제학이 중심이고, 경제심리학은 심리학이 중심이라는 식이에요. 사회심리학도 사회학과 심리학이 만나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중심에는 심리학이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런 건 누가 한 번만 정리해 주면 평생 안 헷갈리는데, 그동안 아무도 안 알려줬던 거 같아요.


저자는 이 책이 전문 연구자를 위한 학술서가 아니라고 먼저 밝혀둡니다. 난해한 수식이나 통계 기호도 없으니 부담 내려놓고 편하게 읽으라고요. 읽다 보면 "때로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지적 즐거움"을 만나게 될 거라는 말도 있었는데, 그 약속은 첫 장부터 꽤 잘 지키는 편인 것 같았어요.

다시 빨간 차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프랑스 남브르타뉴대학교의 니콜라 게갱 연구팀이 교차로에서 실험을 했답니다.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어도 앞차가 일부러 출발하지 않고 버티면, 뒤차 운전자가 경적을 울리는지 관찰한 거예요. 같은 차종으로 빨강, 파랑, 초록, 검정, 흰색 차를 준비했고 운전자 422명의 반응을 지켜봤다고 하더라고요. 결과표를 보니 빨간 차 뒤에서 경적을 울린 비율이 남성 운전자는 46.8%, 여성 운전자는 32.4%였어요. 흰색 차는 각각 20.8%, 14.7%로 가장 낮았고요.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었어요. 저자는 차 색깔만으로 난폭 운전이나 보복 운전이 일어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선을 긋습니다. 흰 차를 몬다고 남들이 더 양보해 주는 것도 아니라고 덧붙이고요. 흥미로운 결과를 들고 와서도 쉬운 답으로 몰아가지는 않는 거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한마디는 잊지 않습니다. "빨간색 차량에는 그만의 강렬한 매력이 있습니다." 빨간 차 타는 분들 서운하지 않게 챙겨주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났어요.


그리고 다른 꼭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곳이 있어요. (경력이 많은 사람보다, 배우는 사람이 성장한다)라는 꼭지입니다.


하버드 의과대학의 니티시 K. 초우드리가 1996년부터 2004년까지 발표된 연구 62편을 종합해서 분석했대요. 그중 32편, 그러니까 52%에서 의사의 진료 수준이 젊었을 때보다 나아지지 않았거나 경력이 쌓일수록 오히려 떨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13편에서는 경력과 진료 수준 사이에 뚜렷한 관련성을 찾지 못했고요. 앤더스 에릭슨이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경력 많은 간호사와 신규 간호사의 업무 능력에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직장 생활 20년 넘게 한 사람한테는 좀 따끔한 숫자예요.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과 더 잘하기 위해 반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정입니다."

이 문장 앞에서 제 연차를 한번 세어보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그 꼭지가 겁만 주고 끝나지는 않아서 좋았어요. 경력은 소중한 자산이라고 인정해 주면서도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가 아니라 배우고 개선하려는 태도입니다"라고 방향을 짚어줍니다. 처음 간 병원 의사가 젊어 보여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최신 지식을 부지런히 익히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회사에서 후배들을 볼 때도 비슷한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퇴근하면 유튜브만 보던 사람이 요즘은 책부터 집어 드는데, 이것도 나름 배우는 쪽으로 한 발 옮긴 거라고 믿어보고 싶어요.


저자라는 사람 자체도 꽤 정이 가요. 에필로그에서 자기도 대학 시절 처음 사회심리학 수업을 들었을 때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 학문일까?' 싶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한때는 스스로를 사회심리학자라고 소개했는데, 그게 어떤 학문이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답하기가 어려워서 지금은 그냥 심리학자라고 한대요. 요즘은 비즈니스 책을 많이 쓰다 보니 비즈니스심리학자라고 할 때도 있다고요. 이 분야의 대가가 이렇게 멋쩍게 웃는 듯한 얘기를 하니까 괜히 동네 형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맛보기로 하나 더 옮겨볼게요.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의 심리)라는 꼭지에서 저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있지 않나요?" "나 어제 이런 일이 있었어." "우리 회사가 정말 이상해."

바로 몇 명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그런데 이 꼭지는 그런 사람을 흉보는 데서 멈추지 않더군요.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관심이 자연스럽게 자기 쪽으로만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요하네스 C. 아이히슈테트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 114명의 페이스북 게시글 6개월 치를 분석했는데, '나는', '내가' 같은 표현을 자주 쓸수록 우울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게 나왔다고 해요. 물론 자기 얘기를 많이 한다고 다 우울한 건 아니라고 저자가 분명히 덧붙입니다. 상대가 힘든 얘기를 꺼내면 따뜻하게 들어주되, 나한테도 부담이 되면 "미안하지만 이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하고 자연스럽게 마무리해도 괜찮다고요.


"좋은 인간관계는 한 사람이 계속 말하고 다른 사람이 계속 들어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솔직히 걸렸던 건 책이 아니라 제 쪽이었어요. 요즘 책 한 권 읽고 나면 누구한테든 얘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데, 그러다 대화를 온통 '내가 읽은 책'으로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살짝 뜨끔하더라고요. 듣는 쪽도 좀 챙겨 가면서 떠들어야겠다 싶었습니다.


<일상에서 바로 써먹는 사회심리학>은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 옆에 두고 아무 데나 펼쳐 보기 좋은 책 같아요. 목차에 (식탁에도 심리학이 있다), (휴식은 집중력을 지키는 기술), (틀렸다는 말보다 '맞다'는 말을 먼저 하라) 같은 제목이 줄줄이 있어서 제목만 봐도 궁금해지거든요. 사람 때문에 지치는 날에 한 꼭지씩 꺼내 읽으면 딱일 것 같습니다.


한 주가 거의 끝나가는 9월 넷째 주 목요일, 창밖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네요. 사람 마음 공부를 한 학기 제대로 들은 기분이라 좋은 책 만난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바로 써먹으라니까 내일 출근하면 '맞다'는 말부터 먼저 꺼내 보려고요. 금요일 하루뿐이라 써먹을 기회가 딱 한 번이긴 합니다만.

모두 선선한 가을 저녁 보내세요.


빨간 차에 경적이 더 많이 울리는 이유부터 연차와 실력의 관계까지, 사람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동네 형처럼 편하게 풀어주는 사회심리학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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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다 하지 않습니다
온선(온라인선생님)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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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할 수 있다고 다 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다 하지 않습니다> 서평


주황색 표지 한가운데에서 사람 하나가 책상에 팔을 늘어뜨린 채 엎드려 있어요. 머리 위에는 딱 한 칸 남은 배터리가 떠 있고요. 제목이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다 하지 않습니다>인데, 그림과 제목을 같이 보자마자 이건 내 얘기다 싶더라고요.


오늘이 추석 연휴 첫날이에요. 목요일인데 출근을 안 한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반은 쉰 기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 목표도 이 책 제목에서 빌려왔어요. 송편, 더 많이 먹을 수 있지만 다 먹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해봐야 알겠지만요.

저자 온선(온라인선생님)은 혼자 일한 지 8년, 유튜브 구독자 24만 명과 함께해 온 분이에요. 스마트폰이며 AI며 어려운 걸 가장 쉽게 알려주던 분이 AI 덕분에 일은 빨라졌는데 하루는 오히려 좁아졌다고 털어놓는 책입니다.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써본 사람의 고백이라 그런지 첫 장부터 귀가 솔깃하더군요.


시작은 가벼운 질문 하나예요. "AI랑 같이 쓰면, 하루에 몇 개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응이 올 만한 유튜브 대본 하나에 하루가 꼬박 걸리던 시절이었는데, 저자는 "하루에 세 개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물론 해봐야 알겠지만요"라고 조심스럽게 답합니다. 정해진 목표도 아니었고, 어디까지 되는지 가늠해 보자고 나눈 대화였대요.

그런데 그 숫자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고 해요.

"가능할 수도 있다"던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능하다"로 줄어들고, "주제마다 다르다"는 조건은 흐려지고, 결국 "이제 세 개는 할 수 있잖아요"라는 말이 되어 돌아온다는 거죠. 직장 생활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이 흐름이 너무 익숙할 거 같아요. 회의 때 "한번 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던진 말이 어느새 다음 분기 목표 칸에 들어가 있는 그런 일이요. "숫자는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면 힘을 갖는다"는 문장에서 괜히 뜨끔했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바로 다음 꼭지 '아무도 몰아붙이지 않는데, 속도는 올라가 있다'였어요. 처음에는 보안 문제로 회사 자료를 넣지 말라는 공지가 먼저 나와요. 시간이 지나면 조심하라는 말 옆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말이 붙고, 개인의 실험이던 일이 어느새 팀의 역량으로 평가받게 되는데요. 이 과정이 차근차근 그려지는데 요즘 사무실 공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나를 몰아붙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속도는 올라가 있다."

회사는 더 빠른 보고서를, 발주자는 더 빠른 초안을 기대하고, 주변 동료들은 더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요. "어제의 속도는 성실함이었는데, 오늘의 속도는 느림처럼 보일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중년 직장인으로서 살짝 서운한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성실함 하나로 버텨온 세대한테는 꽤 아픈 말이라서요.


책 중반으로 가면 저자 개인의 이야기가 더 진하게 나와요. 유튜브를 오래 하다 보니 책을 쓰자는 제안, 사업을 하자는 제안, 강의 요청, 콘텐츠 협업, 해외 진출이나 마케팅 제안까지 계속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좋은 제안일수록 거절이 더 어려웠다면서 속마음을 그대로 꺼내 놓습니다. "이걸 거절해도 되나.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올까. 너무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거의 제 속마음 받아쓰기 수준.


저자가 좋았던 건 거절을 멋있게 포장하는 편이 아닌 거 같다는 점이에요. 돈이 괜찮으면 고민했고, 이름 있는 곳이면 더 고민했고, 규모가 커 보이면 한 번 더 흔들렸다고 솔직하게 말하거든요. 그렇게 거절을 반복하고 나서야 남은 일들의 공통점이 보였고, 그게 다섯 개의 질문으로 정리됩니다. 다시 고를 수 있는가, 내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한 번 만든 것이 오래 남는가, 깊이 들어갈 여지가 있는가, 지금 내 삶의 시기와 맞는가. 처음부터 세워둔 원칙이 아니고 부딪히면서 뒤늦게 보인 기준이라는 설명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웠어요.


그중 '한 번 만든 것이 오래 남는가'를 설명하면서 저자가 일할 때 종종 일타쌍피를 생각한다고 하는 대목이 있어요. 명절이면 화투판 옆을 서성이게 되는 아재로서 이 단어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군요. 영상이든 강의든 한 번 만들어두면 직접 설명하지 않는 시간에도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뜻인데, 들인 시간이 한자리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회사 일에도 그대로 통하는 거 같아요.


마지막 질문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나는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한 줄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글의 온도가 조금 달라집니다. 어떤 날은 아이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했고, 어떤 날은 촬영이나 강의보다 집안일이 먼저였다는 이야기예요. 같은 일도 어떤 시기에는 가능하고 어떤 시기에는 어렵다는 말은 나이가 들수록 더 와닿아서, 이 부분은 한 줄 한 줄 따라가듯 읽게 되더라고요.


요즘은 들어온 제안을 AI로 표를 만들어 단가, 일정, 수정 범위, 2차 활용 여부, 필요한 에너지까지 나란히 놓고 볼 수도 있대요. 그런데 저자는 "표가 일을 골라주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제일 찔렸던 건 12장이었습니다. 네 살 아이 치약 하나 고르려고 GPT에 물었다가, 다른 AI에도 묻고, 검색을 다시 하고, 후기까지 찾아보다 보니 선택지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는 이야기예요. 얘한테도 물어보고 쟤한테도 물어보면 더 좋은 답이 나올 것 같은 그 마음. 결국 동네 엄마들 단톡방에서 누군가 추천해 준 치약을 샀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졌어요.


웃고 나니 좀 따끔하더라고요. 뭐 하나 고르려다 비교하고 또 비교하다 지치는 게 남 얘기 같지 않아서요. 저자는 그 시간이 전부 헛수고는 아니었다고, 덕분에 불소 함량이나 성분표에서 뭘 먼저 봐야 하는지는 알게 됐다고 공정하게 짚어요. 그래도 끝내 필요했던 건 이 정도면 괜찮다고 넘어갈 수 있는 감각이었다는 거죠.


"AI가 줄여준 시간은 자동으로 내 시간이 되지 않았다."

에필로그는 아이가 "엄마, 이걸로 책 만들어줘"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열려요. 동물이 나왔다가 친구가 나왔다가 주인공이 갑자기 다른 곳에 가 있는, 앞뒤가 딱 맞지 않는 이야기인데도요. 예전 같으면 '나중에 해보자', '엄마가 시간이 되면 해줄게' 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는 고백 뒤에 저자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다시 해보고 싶었을까.' 바쁘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이유로, 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접어두었던 것들을 다시 꺼내보고 싶어졌다는 대목에서는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AI 덕분에 무엇을 더 해낼지보다 무엇을 다시 해볼 수 있을지를 묻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게 참 좋았습니다.


AI를 누구보다 먼저 써온 사람이 속도를 줄이고 선을 긋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흔한 AI 책들하고는 결이 좀 다른 거 같아요. 회사를 그만두라고도, 더 버티라고도 하지 않고, 회사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내 일의 크기와 속도는 내가 정해보자는 쪽이라 월급쟁이가 읽어도 부담이 없더라고요. 크기도 두께도 보통이라 손에 들기 편하고, 꼭지가 짧게 나뉘어 있어서 한 꼭지씩 끊어 읽기도 좋습니다. 표지에는 내 일의 기준을 직접 정해보는 5단계 워크시트 '나의 일 기준 키트'가 QR로 들어 있다고 소개돼 있는데, 읽고 나서 내 기준을 직접 써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장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 느낌이에요.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추석 연휴 첫날,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다 하지 않습니다>를 떠올리며 이번 연휴에는 할 수 있는 걸 다 하겠다고 욕심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표지 속 그 사람처럼 방전되기 전에 저도 배터리 칸 좀 넉넉히 채워둘 생각이에요. 좋은 책을 만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다들 보름달처럼 넉넉한 한가위 보내세요.


할 수 있는 게 많아진 시대에 어디까지 할지는 내가 정해도 된다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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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워진 세계
아사쿠라 히로카게 지음, 이구름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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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버려진 페트병 같은 우리에게, <우리가 주워진 세계> 서평


손바닥에 올려 보면 핸드북 사이즈라 아담한데, 옆으로 돌려 보면 두께가 제법 됩니다. 들고 다니기 좋은 크기에 이만한 두께면 작은 체구에 근육을 숨긴 셈이라, 가방에 넣으니 어깨가 먼저 알아채더라고요. 책 사이에는 담당 편집자의 편지가 한 장 들어 있었어요. 스스로 '버려진 페트병'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느냐고 묻는 편지였는데, 그 질문을 품고 이야기로 들어가게 되는 구조가 꽤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펼친 <우리가 주워진 세계>는 크리스마스 아침, 쓰레기봉투가 터지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주인공 아사히는 도쿄의 민간 청소업체 모리야마산업에서 일하는 계약직 청소부예요. 12월 25일, 봉투 네 개를 한꺼번에 들어 올린 순간 손가락 끝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압축 버튼을 누르자 파열음이 연달아 터집니다. 아사히는 수류탄을 몸으로 막는 병사처럼 한 발짝 앞으로 나서요.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던 외제 SUV에 국물이 튀지 않게 하려고요. 누런 액체가 작업복을 흠뻑 적시고, 옆에 있던 동료는 한숨처럼 "끔찍한 크리스마스 선물이군." 하고 중얼거립니다.


그런데 그 SUV는 사거리에서 가속 페달을 세차게 밟고 떠나 버려요. 이 대목의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저 여성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청소부가 몸을 바쳐 걸쭉하고 누런 액체로부터 차를 보호했다는 사실을."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누군가 몸으로 막아 낸 일은 티가 안 나고, 불편했던 몇 초만 기억되는 순간들이요. 아사히는 일한 지 겨우 1년인데 파견 지역이 바뀌어도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것 같다며, 어릴 적 보던 타임루프물을 떠올립니다. 1년 차가 벌써 이러면 20년 넘게 출근 도장 찍은 사람은 뭐라고 해야 하나 싶어 피식 웃다가도, 그 막막함만큼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웃음이 금방 가라앉더군요.


지나가던 중학생들이 "웩, 역겨워!" 하고 코를 싸쥐는 장면도 있어요. 추운 아침인데 몸속에서는 수치심이 확 달아오르고, 아사히는 그런 처량한 마음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이미 오래전에 익혔다고 해요. 그저 눈앞의 쓰레기산에 집중하는 것. 그 요령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한동안 그 문장에 눈이 붙어 있었습니다.


퇴근한 아사히의 방은 거의 비어 있어요. TV도 없고, 소품이나 장식도 없고, 소설과 만화는 전부 전자책으로 봅니다. 로봇청소기를 돌려 두고도 직접 청소기를 밀고 밀대질까지 해요. 쓸데없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방을 보면 속이 뻥 뚫린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장을 보러 나가려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옆집 여자와 눈이 딱 마주칩니다.


"아……."


그 옆집 여자가 도모에예요. 청소부 앞에서 쓰레기를 집 안으로 들고 들어가려는 사람입니다. "쓰레기……군요." "네, 쓰레기예요." 하고 이어지는 대화를 보고 웃음이 터졌어요. 당황한 아사히 앞에서 전기포트를 집어 들고 "이거, 굉장하죠?" 하며 태연하게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습니다. 뒤로 가면 도모에가 엄청난 대식가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아사히와 동료 민토가 100엔짜리 회전초밥을 먹는 도모에를 흉내 내며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하고 웃는 장면도 나와요. 도모에라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윤곽이 잡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다고 가볍기만 한 인물은 아닙니다. 도모에가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버려진 쓸모없는 쓰레기를 모아 그걸 성벽 삼아 우리만의 왕국을 만들었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동화 속 왕국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는 듯한 말투였다고 하는데, 그 다정함 때문에 더 아프게 읽혔습니다.


<우리가 주워진 세계>만의 재미는 이 '왕국'이라는 말에 있는 것 같아요. 원제가 (ゴミの王国), 우리말로 '쓰레기의 왕국'이거든요. 도모에 모녀에게 쓰레기 더미로 만든 왕국이 있었다면, 아사히네 집에는 가족 말고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청결의 왕국'이 있어요. 한쪽은 너무 채워서, 한쪽은 너무 비워서 자기를 지켜 온 사람들이에요. 장마다 첫머리에 같은 그림이 실려 있는 것도 좋았어요. 페트병 안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매번 나와서, 장이 바뀔 때마다 이 둘을 다시 떠올리게 되더군요. (무미 스파게티), (파르페 민트), (중간부터 본 드라마) 같은 장 제목도 하나같이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하게 만듭니다.


가장 천천히 읽었던 부분은 4장 (파르페 민트)에서 아사히가 2년 반 만에 본가에 가는 장면이에요. 아버지가 계단에서 넘어져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내려갔는데, 알고 보니 단순 골절이었어요. 어머니는 "미안해!" 하면서, 졸업하고 한 번도 안 와서 궁금했다고 합니다. 눈가 주름이 전보다 조금 더 깊어진 것 같다는 한 줄에서 저는 오래 멈춰 있었어요.


부모님은 아사히가 교육 출판사에 다니는 줄 알아요.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는데 붙었다고 거짓말을 해 버렸거든요. 그래서 집에 오기 전에 유난히 꼼꼼하게 몸을 씻고, 식탁에서는 어머니 눈을 피합니다.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컵에 맥주를 받아 들고 아사히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요?" 하고 말을 꺼내요. 청소 말이에요. 둘뿐인 집을 왜 그렇게까지 치우냐고요. 그런데 그 말을 뱉어 놓고 스스로도 어이없어합니다. 정작 자기는 방에 티끌 하나만 있어도 못 견디는 사람이니까요.


어머니와 자신을 "아버지가 프로그래밍한 로봇청소기"에 빗대는 문장에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뒤로 어머니가 아사히도 몰랐던 옛이야기를 꺼내는데, 그걸 듣고 나면 이 집의 청소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아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새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결국 누군가를 집에 묶어 두는 족쇄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예요. 저도 부모 노릇을 하는 입장이라 이 대목이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걱정에서 시작한 습관이 가족의 규칙으로 굳어 버리는 일은 어느 집에나 하나쯤 있지 않을까 싶어요.


1장에서 곰팡이 핀 찹쌀떡을 보고 문득 어머니를 떠올리던 장면이 이 식탁 장면과 이어지는 것도 좋았어요. 앞에서 무심히 지나간 문장이 뒤에서 다시 돌아오는 재미가 있습니다.


5장 (깨끗한 쓰레기 저택)에서는 동료 민토와 도는 수거 현장이 나와요. 재활용품 수거 날인데, 민토는 맥주캔 브랜드만 봐도 세상 형편을 알 수 있다고 해요. 작년보다 맥주캔이 줄었고, 발포주나 싼 캔 칵테일이 부쩍 늘었어요. 역을 사이에 두고 북쪽 서민 동네와 재개발된 남쪽 동네의 쓰레기가 달라지는 풍경도 나옵니다. "평소에는 그다지 의식하지 못하는 그 경계를 말없는 쓰레기가 알려준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어요. 분리수거장에 뭐가 쌓이는지로 동네를 읽는 시선이라니, 이 작가는 쓰레기를 참 오래 들여다본 사람 같습니다.


같은 날, 일용직 운전기사 사와키 씨가 자전거 탄 청년의 길을 막는 일이 생겨요. 청년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사회에 적응 못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런 일이나 하는 거겠지" 하고 내뱉습니다. 아사히가 민토에게 들은 대로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만은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하자, 사와키 씨가 소리를 높여요. 20년을 버틴 동네 술집은 망하고 빚만 남았고, 연금도 얼마 안 된다고요. 그리고 "나를 포기해야 이렇게라도 일하며 버틸 수 있는 거라고!" 하고 외칩니다.


그 말에 아사히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요. 몇 번이고 재활용되는 자원처럼 사람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은 조금씩 닳고 깎여 나간다는 생각이 이어집니다. 쉰 가까운 나이가 되고 보니 '포기하지 마'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소설이 그 말을 쉽게 편들지도, 쉽게 버리지도 않는 게 좋았어요.


민토는 그 반대편에서 균형을 잡아 주는 인물 같아요. 끝까지 정중한 말투로 사와키 씨를 대하고, 아사히가 어깨를 떨 때는 "괜찮을 거야" 하고 손을 얹어 주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라는 민토의 말은 이 책에서 제일 오래 붙들고 싶었던 문장이었습니다. 도모에에게도 마주해야 할 과거가 있고, 아사히는 그 길에 함께 나서요. 그 길이 어디에 닿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솔직히 걸렸던 부분을 하나 꼽자면, 초반의 쓰레기 묘사가 너무 생생하다는 거예요. 곰팡이 핀 찹쌀떡, 누런 국물, 치킨 뼈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져서 비위가 약한 분이라면 첫 장은 조금 각오하고 들어가시면 좋겠어요. 다만 그 냄새를 한 번 통과하고 나면, 뒤에 이어지는 따뜻함이 훨씬 크게 다가옵니다.


소장 욕심도 나는 책이에요. 페트병 사이로 별이 흩어진 표지가 예쁘고, 장마다 같은 그림이 들어가 있어 책 자체가 하나의 작은 전시처럼 느껴졌어요. 핸드북 판형이라 손에 쥐는 맛도 좋고, 편집자 편지까지 끼워 두면 오래 보관하고 싶은 한 권이 됩니다.


오늘이 마침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목요일이네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해져서 소설 속 한겨울 수거 현장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고향 가시는 분들은 부모님 눈가 주름을 한 번쯤 찬찬히 보게 되실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주워진 세계>를 덮고 나니, 버린 것과 남긴 것 사이에서 마음 한 칸이 정리된 기분이에요. 명절 끝나고 분리수거장이 산처럼 쌓일 게 벌써 눈에 선한데, 올해는 페트병 라벨만큼은 깔끔하게 떼서 내놓을 생각입니다. 책 한 권이 분리수거 교육까지 시켜 주네요. 좋은 책 만나서 연휴 시작이 든든합니다.


모든 걸 비우는 남자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여자가 서로의 왕국 문을 두드리는, 쓰레기 냄새 끝에 따뜻함이 남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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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초역 오디세이 -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원작 대서사!!
호메로스 원작, 손길영 편저 / 스타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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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30년 넘게 품고 있다가 차기작으로 골랐다는 그 (오디세이아)를, 오늘의 우리말로 한 권에 눌러 담은 책이에요.


프롤로그 제목이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오늘의 그대에게)인데, 여기서 이 책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가 먼저 드러납니다. 놀란 감독이 그 오래된 이야기에 끌린 이유를 두고, 화려한 신화나 몬스터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승리의 고양감 뒤에 찾아오는 죄의식과 회한, 결국 집으로 돌아가려 몸부림치는 '인간 본연의 고투'였다고 짚어두거든요. 이 문장을 읽고 나니 뒤에 나올 거인이나 마녀 이야기가 괴물 구경거리로만 보이지는 않더군요.


세상이라는 바다는 늘 또 다른 폭풍우와 외눈박이 거인, 영혼을 마비시키는 유혹의 섬을 던져놓는다는 대목이 있어요. 인생을 바쳐 정성껏 쌓아 올린 뗏목이 가장 안심했던 순간 어이없이 산산조각 난다는 문장도요. 사십 대 후반쯤 되면 이런 비유가 좀 다르게 읽힙니다. 뗏목 산산조각 나 본 사람들, 주변에 꽤 있잖아요.


이 책의 생김새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편집 방식이었습니다. 권마다 앞에 그 권 전체 줄거리를 한 문단으로 압축해 놓고, 그다음에 (통찰의 초역)이라는 상자 글이 붙고, 그러고 나서 본문이 시작돼요. 24권을 한 권으로 줄이면서 길을 잃지 않게 손잡이를 달아둔 느낌입니다.


제1권 (신들의 결정, 그리고 남겨진 청년)의 상자 글이 이런 식이에요. 위대한 여정은 거창한 도약이나 완벽한 준비에서 시작되지 않고, 자신이 남겨진 초라한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서는 아주 작은 용기에서 출발한다고. 구원자는 외부에서 오지 않으며, 무력감의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는 한 인생의 어떤 비극도 해결되지 않는다고요.

다른 데보다 속도를 늦춰서 정독했던 건 텔레마코스가 나오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날 때 포대기에 싸여 있던 갓난아기가 이제 건장한 청년이 됐는데, 구혼자들 기세에 눌려 기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해요. 궁전 구석 기둥에 힘없이 기대서서 집안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고, 어깨는 늘 무겁게 굽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환상처럼 홀연히 나타나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 주기만 바라는 유약한 소년의 틀에 머물러 있었다는 문장에서 잠깐 멈칫했어요.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아서요. 회사에서도 누가 나타나서 이 상황 정리해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 하면서 하루를 넘기는 날이 있거든요.


거기에 아테나가 멘테스의 모습으로 찾아와 던지는 말이 이렇습니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어린아이가 아니다. 언제까지 아버지만 그리워하며 주저앉아 슬퍼할 수는 없다. 스스로 무기를 쥐고 세상 밖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야 할 때다!"


그런데 이 여신이 말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민회를 열어라, 배 한 척과 노잡이 스무 명을 구해라,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찾아가라 하고 할 일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갑니다. 그러고는 청년의 처진 어깨를 강하게 짚어주죠. 신이 내려와서 해주는 일이 결국 등 떠밀어 주는 거라는 게, 읽으면서 좀 웃기고 좀 뭉클했습니다.


제9권 제목은 아예 대놓고 (외눈박이 거인 외길 인생, 외나무다리 승부)예요. 편역자분이 여기서 한번 웃기고 가겠다고 작정하신 것 같더라고요. 저도 제목만 보고 피식했으니 성공하신 셈입니다.


내용은 다들 아시는 그 장면입니다.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독한 포도주를 먹이고 자기 이름을 '아무도 아닌 자'라고 속인 뒤, 불에 달군 올리브 통나무로 외눈을 찌르고 양 배 밑에 매달려 빠져나오는 대목이요. 재미는 재미대로 살아 있는데, 이 권의 상자 글이 재미로만 끝나게 두질 않아요. 위기의 순간일수록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감을 내려놓는 철저한 겸손함이 목숨을 구하는 무기가 된다고 해놓고, 바로 이어서 지혜로 승리를 거둔 순간에 찾아오는 오만과 자만이 더 거대한 저주를 부른다고 못을 박습니다. 실제로 오디세우스가 바다로 빠져나온 뒤에 참지 못하고 진짜 이름을 외치며 도발하다가 일이 커지거든요.


이긴 다음이 더 위험하다.

이건 뭐, 직장 생활 좀 해보신 분들은 설명 안 해도 아실 거예요.


맛보기로 한 대목 옮겨보면 세이렌 장면이 좋았습니다. 자기를 돛대에 묶으라고 명령하면서 "내가 만약 저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홀려 너희에게 밧줄을 풀라고 애원하거나 눈짓을 하거든, 너희는 절대로 내 말을 듣지 말고 오히려 더 굵은 밧줄로 나를 돛대에 사정없이 바짝 묶어야 한다!" 하고 미리 못을 박아두죠. 그리고 정말로 대장이 눈을 부라리며 풀어달라고 몸부림칠 때, 귀를 막은 부하들이 더 굵은 밧줄을 들고 달려옵니다. 미래의 나를 못 믿어서 현재의 내가 손을 써두는 이야기라, 결심이 사흘 못 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남 일 같지 않은 장면이었어요.


솔직하게 걸렸던 부분도 있습니다. 권마다 교훈을 먼저 정리해 주는 그 상자 글이 장점이면서 동시에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내가 느끼기 전에 느낄 방향을 알려주는 셈이라, 고전을 천천히 헤매는 재미를 기대하고 오신 분은 답을 미리 받아 든 기분이 들 수도 있겠더라고요. 24권을 한 권으로 압축하다 보니 인물들이 지나가는 속도가 빠른 것도 사실이고요. 요약 문단과 본문이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하는 구간에서는 눈이 좀 미끄러졌습니다. 다만 이건 이 책이 원래 겨냥한 자리를 생각하면 흠이라기보다 성격에 가깝다고 봅니다.


책 자체는 보통 크기에 보통 두께예요. 고전이라고 해서 각오하고 들 필요는 없습니다. 팔뚝 운동은 다른 걸로 하셔야 해요. 뒤에 명언 100선이 주제별로 묶여 있고 (오디세이아)의 신들을 정리한 부록도 붙어 있어서, 다 읽고 나서도 뒤적일 구석이 남아 있는 구성입니다. 원전 완역본으로 가기 전에 지도 한 장 손에 쥐는 용도로도 괜찮을 것 같고요.


프롤로그 끝자락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그대가 나락으로 떨어져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라도, 내면의 자부심과 품위를 잃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미 승리자다."


평소 같으면 좀 세다 싶었을 말인데, 누더기를 걸치고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는 그 사람 이야기를 따라 읽고 나서 만나니 다르게 들리더군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여름 내내 지쳐 있다가 이제 좀 숨 돌리는 시기에, 3천 년 묵은 아저씨가 바다에서 고생하는 이야기 읽으면서 묘하게 기운을 얻었어요. 나만의 이타카가 어디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분리수거는 해냈으니 한 걸음은 뗀 걸로 치겠습니다.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3천 년 된 귀향 이야기를 오늘의 말로 압축하고 권마다 삶의 해설을 붙인, 고전 앞에서 자꾸 미끄러졌던 사람에게 손잡이가 되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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