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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 - MBC 라디오 <여성시대>>가 전하는 인생의 한마디
여성시대 지음 / 김영사 / 2026년 8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51년 동안 라디오에 도착한 편지 60통, 한가위에 읽는 <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서평

"사람이 밥 처먹는다고 사람인 줄 알어? 밥값을 해야 사람이지."
책 속 어느 할머니가 사고뭉치 손주한테 던진 호통인데요, 월급 받고 사는 아재 입장에서는 괜히 뜨끔하더라고요. 나는 회사에서 밥값은 하고 있나 싶은 날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오늘이 추석 연휴 첫날이라 다들 전 부치느라 바쁘실 텐데, 저는 전 대신 편지 이야기를 부쳐 봅니다.
<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는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도착한 편지들을 모은 책이에요. 1979년부터 해마다 봄이면 열린다는 글 잔치 '신춘편지쇼'의 당선작 가운데,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삶을 붙들어 준 순간을 담은 편지 60편을 골라 다섯 장으로 나눴다고 합니다. 1975년에 시작한 방송이 올해로 51년째라니, 그동안 방송국에 쌓였을 편지 더미를 떠올리기만 해도 아득해져요.
펼쳐 보면 사연마다 붙은 편지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줄이 그어진 종이 위에 제목이 크게 적혀 있고, 맨 아래에는 보낸 사람이 붙인 별칭과 이름, 보낸 해가 있어요. '담배 가게 호랑이 할머니 손주', '행복은 내가 선택하는 것', '첫 소풍' 같은 식으로요. 편지지 색도 연초록이었다가 분홍이었다가 살구빛으로 바뀌어서, 사연 하나 넘어갈 때마다 새 봉투를 뜯는 기분이 들더군요. 본문 중간중간 좋은 말은 표지 제목을 감싼 것과 같은 보랏빛 곡선 안에 따로 크게 실려 있는데, 누가 밑줄을 대신 그어 준 것 같아서 좋았어요.
차례만 훑어봐도 재미가 있습니다. "혹시 난닝구 입고 댕기나?", "네찌 주라", "천금가튼 내 세끼 바라". 맞춤법도 사투리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살려 둔 것 같은 제목들이라, 누군가의 손글씨를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 나요.

프롤로그부터가 한 통의 편지예요. 어른이 되고부터 "사는 게 대체 뭔가", "지금 닥친 이 고비는 어떻게 넘어가나" 같은 물음표를 수시로 만나게 됐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그 물음표가 남의 얘기 같지 않더라고요. 답이 없는 게 아니라 '정해진 답이 없다', '답이 무한히 많다'고 고쳐 말하는 대목에서는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고요. 마지막에는 여성시대 드림이라는 서명까지 붙어 있어요. 그 앞쪽에 이런 문장도 있었습니다.
"그냥 그저 에세이 읽듯, 소설 보듯 페이지를 넘기셔도 좋습니다.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이야기들이니까요."
읽어 보니 빈말이 아니었어요.
처음에 나온 호랑이 할머니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편지를 쓴 사람은 대리기사인데, 지난겨울 태운 손님이 고향 얘기를 하다가 담배 가게 호랑이 할머니를 아느냐고 묻는 데서 사연이 시작돼요. 근 30여 년 만에 듣는 그 호칭을 화자가 반가워하는 장면부터 벌써 마음이 들썩이더라고요. 할머니는 작은 쪽방에서 담배를 파셨는데, 고등학생이 담배를 사러 오면 "머리에 새똥도 안 떨어진 놈이 어디서 댐배질이여?" 하면서 빗자루부터 드셨다고 해요. 담배 파는 분이 담배 사러 온 학생을 쫓아내는 가게라니, 읽으면서 웃음이 났습니다.

사춘기에 방황하던 손주한테는 앞의 그 밥값 호통이 떨어지는데, 스무 살에 지금의 아내를 데려갔을 때는 또 결이 달라요. 아내의 손을 잡고 "저놈이 하는 짓은 깡패여도 본심은 착한 놈이다"라며 손주 편을 들어 주시고, 손주한테는 이렇게 당부하시거든요. "니놈이 귀하게 여겨야 남도 귀하게 여겨주는 거여. 이쁜 거 만났으니 귀하게 여기고 아껴주어야 혀." 호통과 당부가 한 입에서 나오는 분이라 그런지, 이런 어른 한 분 곁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편지를 쓴 분이 오십 반백의 나이에도 할머니 가르침을 되새기며 산다는데, 저랑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3장의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데, 그러니까 우리 딸이 좀 봐줘)였어요. 30대 중반에 우울증으로 상담을 받게 된 딸이,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말에 아무것도 꺼내지 못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기억 한가운데에는 엄마 '경옥 씨'가 있고요. 딸이 기억하는 엄마의 말은 '안 돼', '하지 마', '입 다물어', '보기 싫어' 같은 것들이었다고 해요.
그러다 아빠가 경옥 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외할머니 병간호를 하면서 한 시간 넘는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고, 동생들 도시락과 온갖 집안일까지 떠안고 자랐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아빠가 한마디를 보태죠. "잘 몰라서 그래.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데, 그러니까 우리 딸이 좀 봐줘."

부모라는 자리도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것.
이 나이쯤 되니 처음 맡아 본 자리에서 서툴렀던 기억이 저한테도 적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이 말이 남의 집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연 속에는 경옥 씨의 다른 얼굴도 조금씩 드러나요. 첫 직장에서 상사가 볼펜으로 딸의 머리를 때린 적이 있는데, 전화로 사정을 들은 엄마가 딸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거친 말로 그 상사를 욕해 줬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해 본 사람이라면 그 전화 한 통이 얼마나 든든했을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편지가 어디에 닿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면 좋겠어요. 보낸 사람의 별칭이 '행복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게 다 읽고 나니 다시 눈에 들어오더군요.
5장의 (인생이 소풍 같다)에는 이런 장면이 나와요. 대장암 수술 뒤로 외출이 어려워진 아버지를 모시고 봄 소풍을 간 날, 여섯 살 딸아이가 할아버지 손이 차갑다며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아요. 할아버지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그 머리 위로 벚꽃잎 한 장이 떨어지자 아이가 소리칩니다. "와, 할아버지 머리 위에 꽃이 폈어!"
아버지는 병에 걸리기 전에는 "'인생이 소풍 같다'는 놈은 대체 어떤 호사를 누리고 갔냐"고 빈정거렸는데, 지금은 건강했던 지난 시절이 모두 소풍 같다고 하신대요. 손녀가 할아버지는 소풍을 엄청 많이 다녔겠다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이거였어요. "할아버지 소풍은 이제부터야." 반백의 머리에 벚꽃잎을 얹은 할아버지 모습이 그려져서, 이 장면은 오래 눈앞에 떠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연들도 결이 다 달라요. 두 번 실패하고 무너진 딸에게 엄마가 건넨 "실패는 있을 수 있어도, 실패한 인생은 없어"라는 말도 있고, 국숫집에서 처음 본 할머니가 사투리로 건넨 "살면 살아지고, 살아지면 잘 살았다 싶은 날 있제"라는 말도 있어요. 제목만 봐도 사연이 대강 짐작되는데, 막상 읽으면 짐작보다 훨씬 깊더라고요. 저는 수영을 배우는 엄마가 딸한테 던진 말에서 웃음이 터졌어요. "다 늙은 엄마도 이 나이에 배워서 수영하는데 너라고 못할 게 뭐 있겠어! 내가 너 나이면 날아다녔다!" 뭐든 늦었다고 생각하기 쉬운 나이라서 그런지, 청춘이 꼭 젊은 나이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편지 속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어졌습니다.
양희은 님 추천사에 "40대 끝자락부터 지금까지 나를 사람답게 키워준 터전은 (여성시대) 편지들이었다"는 문장이 있어요. 40대 끝자락이면 딱 제 나이라 괜히 더 믿음이 갑니다.

솔직히 걸렸던 건 읽는 속도였어요. 한 편 한 편은 길지 않은데, 편지 한 통에 한 사람의 몇십 년이 들어 있다 보니 연달아 넘기기가 쉽지 않더군요. 한 통 읽고 숨 고르고, 또 한 통 읽고 숨 고르게 되는 책이라 몰아서 읽는 재미를 기대하면 조금 다를 수 있어요. 대신 아무 데나 펼쳐도 거기서 바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니, 곁에 두고 오래 꺼내 읽기에는 이만한 책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는 고급스러운 양장 커버에 두께는 보통 에세이만 해서 손에 쥐기 딱 좋아요. 표지에는 꽃이 가득한 정원 벤치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뒷모습이 색연필 느낌으로 그려져 있는데, 제목이랑 참 잘 어울립니다. 들고 있으면 명절 선물세트처럼 든든한데, 햄 대신 사람 냄새가 꽉 차 있더라고요. 추석에 부모님 댁 가실 때 과일 상자 옆에 한 권 끼워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서로의 말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고, 내일이면 한가위 보름달이 뜨겠네요.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전화 걸어서 "밥은 먹었니?" 한마디 건네 보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말로 살아간다> 덕분에 좋은 말을 한 보따리 두둑하게 챙겨 받은 기분이라, 명절을 앞두고 마음이 든든해요. 다들 배도 마음도 넉넉한 한가위 보내세요.
평범한 사람들이 51년 동안 보내온 편지 속에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 한마디들을 모은 따뜻한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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