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2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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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반 고흐 그림에는 산이 잘 안 보인다는 거, 혹시 알고 계셨어요?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도 연애소설 속 두 연인이 유럽 기차 창밖을 내다보다가 퀴즈 풀듯 맞혀낸 답으로요. 조정래 작가의 <서리꽃 2> 이야기예요.


1권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라 앞 권 서평 먼저 보고 오시면 편해요. 두 권짜리 소설을 1권만 읽고 멈추면 남의 연애를 절반만 엿들은 기분이잖아요. 제 오지랖이 그걸 못 참더라고요.

대학 동아리 '글밭'에서 이재이의 시에 윤소인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바꿔 그린 그림을 붙이면서 시작된 인연이죠. 그 두 사람이 5년 만에 다시 만난 게 1권이었다면, 2권은 윤소인의 요양을 위해 남도 장흥으로 내려가는 데서 열려요. '어머니 품 장흥'이라는 표지판을 먼저 알아본 건 윤소인이었어요. 이재이가 왜 하필 장흥을 골랐는지 떠올리며 '별이 있고, 바다가 있고, 숲이 있는 곳'이라고 되뇌는 대목이 있어요. 별이 제일 앞에 오는 게 저는 좋았어요. 1권의 그 별밤이 여기까지 따라온 느낌이 들어서요.


이재이라는 남자, 공부를 해도 너무 했더군요.

키조개 점심 한 끼를 먹이려고 책이며 인터넷이며 유튜브까지 뒤졌다고 하니까요. 편백숲 통나무집에 짐을 풀고, 바다를 '장흥이 준 첫 번째 선물'이라 부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연애를 이렇게 성실하게 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보림사 장면은 풍경이 먼저 들어와요. 연꽃 봉우리 같은 산들이 절을 빙 둘러싸고, 철조 비로자나불은 반쯤 뜬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다고 해요. 무슨 말을 건네려다 만 얼굴이라니, 그 앞에 서면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줄줄이 나올 거 같아요. 이재이는 기도를 빌어서 얻는 일로 여기지 않더군요. 자기 의지와 결의를 다지는 일이라고 하는데, 월요일 아침마다 이번 주도 한번 버텨보자고 마음먹는 직장인한테는 꽤 가깝게 들렸어요.


보림사 가는 길에 밤새 벚꽃이 피어 있어요. 윤소인은 벚꽃이 활짝 폈을 때보다 바람에 흩날릴 때가 더 좋다고 해요. 흐느낌 같고, 서러움 같대요. 이재이가 시로 써 보라고 하자 그 느낌을 통째로 오빠한테 선물할 테니 오빠가 쓰라며 건네요.

<서리꽃 2>에서 제일 특이하게 다가온 건 반 고흐가 자꾸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는 점이었어요. 보림사 찻집에는 스님이 사들였다는 모작이 걸려 있어요.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는 (해바라기)가 돈 벌어 주는 그림으로 붙어 있고요. 그걸 본 윤소인이 "수난일까요, 영광일까요?" 하고 묻는데, 웃음이 나면서도 대답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기념품 상점 앞에서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못 봐 아쉬워했던 (론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이 실물 크기 인쇄본으로 걸려 있어요. 그 크기가 보림사에 있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는 한 줄에서 장흥과 암스테르담이 한 줄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 현지 미술관을 직접 취재했다고 하던데, 기차 안에서 오가는 반 고흐 이야기가 유난히 촘촘한 게 그 덕인가 싶기도 해요.


제가 유독 천천히, 정독하듯 읽은 곳은 동백 숲이었어요. 땅바닥이 떨어진 꽃으로 온통 새빨갛게 덮인 걸 보고 이재이가 풀어놓는 말이 있어요. 동백은 꽃잎이 흩어지지 않고 송이째 뚝 떨어지는데, 떨어지면서 뒤집혀 하늘을 본다는 거예요.

"나무에서는 땅을 보고 피고, 땅에서는 하늘을 보고 피는 거야."

그래서 동백은 두 번 피는 꽃처럼 느껴진대요. 나무에서는 높낮이가 제각각이던 꽃들이 땅에서는 전부 똑같이 깔린다는 말도 덧붙여요. 1권부터 돈과 집안 이야기가 줄곧 두 사람을 따라다닌 걸 생각하면, 저한테는 그 말이 꽃 얘기로만 읽히지 않더라고요. 윤소인은 오빠가 동백을 '남도의 서러움이 서린 처연한 꽃'이라고 했던 말을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합니다.


두 번 피는 꽃이라니요.

그 서러운 꽃밭에서 두 사람이 벌이는 일은 또 의외로 명랑해요. 윤소인이 막대기로 빈터에 사람 키만 한 하트를 그리고, 이재이는 점퍼를 벗어 동백꽃을 쓸어 담아 옵니다. 동백 꽃말이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래요. 꽃이 모자라서 소인이는 가만히 있으라고 막는 이재이한테 윤소인이 그 꽃말을 고스란히 돌려줘요.

"어허, 동백꽃 꽃말이 뭔지 몰라?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허, 나 참. 알았어, 살살해."

이 두 줄에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더군요. 완성한 하트에서 서로 상대가 만든 쪽에 누워 손을 잡고 (그 겨울의 찻집)을 부르는 장면도 있어요. 제 나이쯤 되면 쑥스러워서 엄두도 못 낼 일인데 이상하게 부럽기만 했어요.


시인의 숲 산책길에는 (어머니)라는 시비가 서 있어요. 윤소인은 아침마다 그 앞에서 법당의 비로자나불께 기도할 때처럼 두 손을 모은다고 해요. 시에 '쓴 것만 알아 / 쓴 줄 모르는 어머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제 또래라면 이 구절에서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이 하나씩 있을 거 같아요. 그 옆의 이재이는 조금 다른 마음이에요. 시를 쓰던 사람이라서 자기는 그런 시를 써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깊어진다고 하거든요. 사랑하는 사람 옆에 서면 제 모자람부터 보이는 그 마음, 저는 알 것 같더라고요.


2권에서 가장 달라 보인 사람은 윤소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부터 보이던 사람이 뒤로 갈수록 판을 짜는 사람이 되더라고요. 유로스타 안에서 반 고흐가 첫 유화 습작에 물감을 끈적할 만큼 두껍게 발라 놓고 자신만만해했다는 편지 얘기를 꺼내요. 그러고는 형의 그림이 백 점 넘게 쌓였을 때 동생 테오가 한숨처럼 했을 말이 뭐였겠느냐고 두 남자한테 퀴즈를 내요. 이재이가 "형 정말 너무한다"라고 답하고 가이드가 "정답입니다" 하는 대목에서는 기차 한 칸이 통째로 웃는 것 같았어요. "빈 캔버스는 열정적인 화가를 두려워한다"는 편지를 꺼낼 때는 평생 반 고흐를 흠모해 온 화가 지망생다운 목소리가 나고요. 미술관이 한 해에 벌어들이는 돈 얘기가 나오자 "생전에 네덜란드가 도와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라고 차갑게 툭 던지는 모습도 좋았어요.


암스테르담 중앙역 인파 속에서 윤소인이 잠깐 안 보이는 소동도 있어요. 정작 본인은 그 별밤 그림 앞에 태평하게 서 있었고, 진땀을 닦은 두 남자는 윤 선생한테는 없던 일로 하자고 입을 맞춥니다. 짠하면서도 웃기더라고요. 좌석을 미리 잡아 두고 두툼한 화집까지 선물하는 가이드도 정이 가는 인물이었어요.

기차 안의 반 고흐와 테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꾸 1권이 겹쳐 보여요. 형은 그리고, 동생은 돈을 대고. 동생이 어떻게 해서든 돈을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형의 편지를 두고 '참 아름다운 조화'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그 위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이재이 얼굴이 슬쩍 포개지더라고요. 테오가 보낸 돈이 지금 돈으로 얼마냐는 질문에 가이드가 당황하자, 이재이가 휴대폰 속 '만능 해결사 이놈'한테 시켜 AI한테 물어보는 장면도 나와요. 억 단위 금액이 나오고요. 등단 56년 차 작가의 소설에서 AI가 튀어나오니 괜히 반갑더군요.


솔직히 읽는 내내 걸렸던 건 제 안의 월급쟁이 계산기였어요. 김이며 감태며 제일 좋은 걸로 달라는 이재이가 나와요. 불전함에 조용히 봉투를 넣는 이재이, 선물로 받은 화집 값을 헤어질 때 얹어 주겠다고 마음먹는 이재이도 나오고요. 그때마다 계산기가 저 혼자 돌아가더라고요. 그러다 "죄송하게는 생각하지 말어. 내가 좋아서 신나게 하는 일이니까"라는 말 앞에서 그 계산기가 슬그머니 꺼졌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에 영수증을 들이미는 건 촌스러운 일이니까요.

<서리꽃 2>는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그래도 동백꽃 한 아름 쓸어 담은 이재이 점퍼만큼 무겁지는 않으니 걱정 마세요. 두 권을 나란히 꽂아 두면 반 고흐 그림 몇 점과 시비 몇 개, 남도 동백숲을 한꺼번에 들여놓는 셈이라 소장할 맛이 납니다. 작가가 아직도 원고지에 손으로 쓴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문장들이 서두르지 않는 느낌이 있어요. 소설에 나오는 그림을 옆에 띄워 놓고 읽으면 재미가 두 배일 거 같아요.


소설 속 장흥은 꽃 피는 봄이에요. 그런데 이재이는 보림사 가는 그 길을 두고 "봄보다는 가을이 훨씬 더 아름다울 거야"라고 해요. 9월 마지막 토요일, 막 가을 문턱을 넘은 지금 들으니 딱 맞춰 도착한 편지 같더라고요. 가을 타는 남자라는 말이 있던데 저는 요즘 가을보다 책을 더 타는 중인 거 같아요. 두 사람을 따라 장흥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다녀오고 나니 좋은 사랑 이야기 하나 만난 거 같아서 참 좋았습니다.


동백처럼 땅에서 한 번 더 피는 사랑, 장흥 동백숲에서 암스테르담의 별밤까지 이어지는 조정래의 첫 연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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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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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5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재이가 눈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장면으로 <서리꽃> 1권이 시작돼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열린 시화전에서 미대생 윤소인은 이재이의 시를 곱씹어 외웠어요. 그리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바꿔 그린 그림을 그 시에 붙여 주었죠. 그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유학을 떠났던 남자가 다시 그 사람 앞에 서게 되는 이야기예요. 조정래 작가가 등단 56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정면에 내세운 소설이라 더 궁금했는데, 첫 장면부터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어요.


시화전의 기억처럼 맑게 흘러가겠거니 했던 이야기는 (빨간 장미꽃 백 송이)에 이르러 무게가 확 달라집니다. 그림 그리는 일조차 이제는 사치가 되어 버렸다는 윤소인의 고백이 유난히 오래 남았어요. 집안이 무너지며 떠안은 5억 원가량의 빚을 5년 동안 갚았는데도 아직 절반이 남았다는 사정을 알고 나니, 그 고백이 투정이 아니라 체념처럼 들렸거든요. 물감보다 빚이 먼저인 하루하루가 어떤 무게일지, 숫자 몇 개만으로도 짐작이 가는 것 같아요. 서로 좋아하면 간단한 거라는 민태석의 말은 부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월급날마다 잔고부터 확인하는 입장이라, 사랑 앞에 돈이 먼저 막아서는 장면이 남 일 같지 않았어요.


읽는 내내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건 이재이의 가족이었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돈을 떠받들고 가난한 사람을 깔봐요. 그런 가족 앞에서 이재이가 "산도 높고 높은 산이었고, 바다도 깊고 깊은 바다였다"고 느끼는 대목에서는 읽는 저까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딸만 셋을 둔 탓에 후계자 자리가 흔들리는 형은 무엇이든 몇 배의 보상으로 계산해 내는 사람입니다. 얄밉다가도 회사에서 한 번쯤 마주쳤던 유능한 사람의 말투가 겹쳐서,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어요. 이재이가 하필 그런 형을 협상 상대로 고르는 이유도 수긍이 갔어요. 돈 앞에서 누구보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니까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은 부분은 (형과의 밀약) 첫머리였어요. "이 결의는 쉬웠다. 혼자 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실행이 문제였다. 그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기획안은 밤새 혼자 쓸 수 있어도 결재는 혼자 받을 수 없는 직장 생활이 겹쳐 보였어요. 그래서 이 문장 앞에서 한참 머물렀습니다.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하다가 찬물을 들이켜는 이재이의 모습에서도 그 막막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어요.


아침에 <현대문명과 철학>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장면에도 공감이 갔어요. 인공지능과 철학을 두고 펼쳐지는 거창한 이야기들이 당장의 고민 앞에서는 한가한 잠꼬대처럼 느껴졌다고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한 날 서류가 한 줄도 안 읽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 활자 사이로 자꾸 윤소인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면, 사랑은 철학보다 힘이 센가 봅니다.


이어서 민태석과 통화하던 중에 '청춘사업'이라는 말이 오가는 대목에서는 잠깐 웃음이 났어요. 제 나이에 청춘사업이라면 건강검진 결과표의 빨간 글씨를 줄이는 일 정도일 텐데 말이죠. 그러다 친구에게 전해 들은 윤소인의 밭은기침 소식이 가슴에 바위처럼 얹히고, 이재이는 남편이라는 자리를 서둘러야겠다고 마음먹어요. 형과 어떤 약속을 주고받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작가의 말 (직업병의 행렬 속에서)도 그냥 넘기기 어려웠어요. 반 고흐의 그림을 취재수첩에 그려 가며 준비하다가 "지옥문 앞까지 갔다 온" 일을 겪었고, 지난해 9월 복부대동맥 수술대에 올랐다는 고백이 담겨 있어요. 팔순을 넘기고도 여전히 원고지에 손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이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가더군요. "소설에서 주제 찾기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라는 문장 덕분에 저도 읽는 내내 나름의 답을 찾아보게 됐어요. 출간 간담회에서 장편은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고 나니, <서리꽃> 두 권을 책장에 나란히 꽂아 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9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요즘 읽기에 잘 어울리는 책이에요. 사랑 이야기 앞에서 괜히 쑥스러워지는 나이가 됐지만,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걸어 보겠다는 이재이의 결심 앞에서는 오랜만에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더군요. 주말 저녁에는 찬물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2권을 이어서 펼쳐 볼까 합니다.


결심은 혼자 할 수 있어도 사랑을 지키는 일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눈 내리는 재회로 조용히 건네는 <서리꽃> 1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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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약초산나물 50
이상각 지음 / 아마존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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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오늘이 추석이네요. 금요일에 한가위가 딱 걸려 있으니 달력만 봐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거 같아요. 차례상에 나물 한 접시씩은 꼭 올라가는 날인데, 마침 산나물 책 이야기를 풀게 됐습니다.


<한국의 약초산나물 50>은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판형이에요. 두께도 보통 소설책보다 얇은 편이라 가방에 넣어도 표가 잘 안 납니다.


산나물 책이라 그런지 무게마저 나물나물해요.

표지부터가 봄이에요. 솜털을 뒤집어쓴 새순이 불쑥불쑥 올라와 있고, 아래쪽에는 노란 꽃대가 환하게 서 있고요. 가을 한복판에서 이 표지를 보고 있으니 내년 봄을 미리 당겨 받은 느낌이 들었어요.

책의 뼈대는 꽤 단단한 편입니다. 산나물 마흔두 가지와 나무나물 여덟 가지가 차례로 나오는데, 나물마다 식물별명, 생약명, 식물생태 및 나물특성, 효능, 채취 및 요리법이 같은 순서로 정리돼 있어요. 읽다 보면 도감을 넘기는 기분도 들고, 동네 어르신이 나물을 하나씩 들고 와서 "이건 이렇게 먹는 거여" 하고 알려주시는 기분도 들더라고요.


첫 장은 질문으로 시작해요. 우리는 왜 산나물을 먹어야 하는가. 그 아래로 "산나물은 몸을 건강하게 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같은 문장이 줄지어 있는데, 저자가 산나물을 얼마나 믿고 아끼는지가 첫 장부터 전해지는 거 같았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서문 쪽입니다. 저자는 산나물이 자라는 곳은 자연의 산이고, 도시는 콘크리트와 강철로 뒤덮인 인공의 산이라고 써요. 매일 빌딩 숲으로 출근하는 입장이라 이 대목에서 좀 찔렸습니다. 저도 그 인공의 산을 날마다 오르내리는 사람이니까요.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도 좋았어요. 봄의 산나물은 향기롭고 맛깔나고 부드러운데, 봄이 지나면 식물이 살아남으려고 억세지고 쓰게 되고 독성까지 갖게 된대요. 그런데 그 쓰고 독한 성분이 바로 약성을 가진 물질이라고 하더군요.


버티느라 단단해진 것이 결국 약이 된다는 얘기.

나이 들면서 여기저기 억세진 제 모습이 겹쳐 보여서 이 문단은 몇 번 다시 읽었어요.

나물들을 등장인물처럼 읽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산마늘은 별명 부자예요. 명이나물, 맹이풀, 명이, 명부추, 망부추, 행자마늘, 서수레까지 이름이 줄줄이 나와요. 울릉도에서는 낮은 낙엽수림부터 성인봉 정상까지 자라고, 내륙에서는 가리왕산, 오대산, 점봉산처럼 해발 1000m가 넘는 산의 정상 부근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오대산 산마늘은 잎이 좁고 가늘지만 향이 강하고, 울릉도 산마늘은 잎이 크고 넓어 수확량이 많은 대신 향은 약하다는 비교가 재밌었어요. 같은 집안인데 성격이 다른 형제 같달까요.


산마늘 대목에서 마음이 간 문장이 하나 더 있어요. 한번 잎을 따면 그해에는 잎이 다시 돋아나지 않으니 비늘줄기와 잎 하나는 남기고 채취하라는 당부예요. 전부 가져가지 말고 하나는 남겨두라는 말이 나물 얘기인데도 사람 사는 얘기처럼 들리더라고요.


삽주는 이름에 사연이 붙어 있어요. 한방에서는 수염이 많아서 늙은 뿌리라는 뜻으로 창출이라고 부른대요. 새싹은 온통 하얀 솜털로 덮여 있고, 줄기를 꺾으면 하얀 유액이 나온다고 하고요. 저자는 삽주싹을 가장 값진 산나물 중 하나로 꼽는데, 어린순에 특별한 향이 없어서 여러 요리에 두루 쓸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튀지 않고 어느 자리에나 잘 어울리는 사람, 회사마다 꼭 한 명씩 있잖아요. 삽주가 딱 그런 느낌이에요.

산부추는 정구지라는 별명이 정겨웠어요. 강원도와 경기도에 많이 자생하고, 이 지역 산부추를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먹는 법 가운데 생즙을 요구르트와 같이 갈아 먹는다는 대목이 있는데, 책에서는 그 맛을 매콤하고도 향긋하다고 해요. 부추 요구르트라니, 상상은 잘 안 되는데 한번 맛보고 싶은 조합이긴 합니다.


쇠고기 맛이 난다고 울릉도에서 고기나물이라 부른다는 눈개승마, 맛 좋은 보약나물이라고 소개된 밀나물처럼 이름만 들어도 궁금해지는 나물들도 줄줄이 나와요.


산마늘 먹는 법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줄기를 잎째 따서 생으로 쌈을 싸서 먹는다. 보드라우면서 연한 마늘 향이 난다."

글자만 봐도 고기 한 점 올려서 싸 먹고 싶어지는 문장이에요.

요리 쪽 조언도 꼼꼼해요. 부드럽거나 향이 있는 산나물에는 강한 양념을 쓰지 않는 게 좋고, 향이 된장이나 고추장과 어울리지 않는 나물에는 장 양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들기름을 넉넉히 둘러 살짝 볶고 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기본 방법도 친절하게 나와 있고요. 결국 산나물은 그 향을 지켜주는 게 핵심인가 싶더라고요.


읽으면서 조심스러워진 대목도 있었어요. 산마늘은 꽃이 피면 맛이 쓰고 독성이 생겨서 5월 말 이후에는 먹지 않는 게 좋다고 하고, 일월비비추는 너무 큰 잎에 독성이 있어 먹지 않는다고 해요. 독성 있는 나물은 데친 뒤 찬물을 갈아가며 몇 시간씩 우려내라는 설명도 있고요. 산에서 아무 잎이나 뜯어 먹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효능 이야기도 꽤 넓게 펼쳐지는데, 저는 밥상을 좀 더 푸르게 채워보라는 응원으로 받아들였어요. 지병이 있거나 드시는 약이 있다면 의사 선생님과 먼저 상의해 보시는 게 마음 편할 거 같아요.


<한국의 약초산나물 50>은 한 번 읽고 꽂아두는 책이라기보다 봄마다 꺼내 보게 될 책에 가까운 거 같아요. 마트 산나물 코너에서 처음 보는 나물을 만났을 때, 주말 산행길에 낯익은 잎을 봤을 때 펼쳐 보기 좋은 구성이거든요. 사진도 큼직하게 들어가 있어서 눈으로 익히기도 편하고요. 산나물 좋아하시는 부모님께 명절 선물로 드려도 반가워하실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가위 보름달이 뜨는 날, <한국의 약초산나물 50> 덕분에 선선한 가을바람 속에서 봄을 한 입 미리 맛본 기분이라 좋았습니다.

명이나물 이름처럼 다들 명은 길게, 배는 송편으로 두둑하게 채우는 추석 보내세요.


빌딩 숲에서 사는 중년에게 봄 산의 향과 먹는 법을 한 권에 담아 건네는 산나물 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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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이 지음 / 밥북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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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월 3,000원.

한 달 애드포스트 수익이 딱 그 정도였던 블로그가 6개월 만에 월 2천만 원을 찍었다고 하면, 솔직히 먼저 드는 건 의심이에요. 그런데 이 책은 잘나가던 순간부터 자랑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더라고요. 안 되던 시절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꺼내 놓는데, 그 첫 단추가 너무 소박해서 오히려 끝까지 따라가게 됩니다.


추석 당일 금요일, 연휴 한복판에 소개할 책은 <퇴근 후 1시간, 블로그로 월 2천만원 벌기>입니다. 초록 바탕에 큼직한 글씨만 꽉 채운 표지라 첫인상부터 "나 실용서요" 하고 말을 거는 느낌이에요. 두께는 여느 실용서 정도라 손에 쥐기 편한데, 담긴 숫자만큼은 꽤 무겁습니다. 2천만 원이 가벼울 리가 없잖아요.


저자 이서이 님은 공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에요. 잦은 야근에 퇴근 시간은 들쭉날쭉하고,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는 처지. 부수입이 절실했다는 고백이 남 얘기 같지 않았어요. 월급날 하나 바라보고 사는 중년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다 해봤을 고민이니까요.


첫 장은 2014년 10월 14일에 올린 첫 게시글에서 시작합니다. 제목은 (사랑하는 우리 아들^^).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만든 작품을 찍어 올린 사진이었고, 그때 저자는 '나중에 우리 아들 보여줘야지' 하는 마음이 전부였다고 해요. 누가 봐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댓글이 안 달려도 괜찮았다고요. 그 시절 글들은 지금 모두 비공개로 돌려놨다는데, 그 대목이 짠하면서도 따뜻하게 읽혔어요.


그다음이 체험단 맛집 후기 이야기예요.


"무료로 밥을 먹으려면 후기를 써야 했으니까."


이 문장에서 살짝 뜨끔했습니다. 서평단으로 책을 받아 읽고 후기를 쓰는 입장에선 남 얘기가 아니거든요. 저자는 그때 반응이 없었던 이유를 꽤 냉정하게 짚어요. "역삼역 맛집" 같은 제목은 그날 하루에만 수십, 수백 명이 올렸을 테니 묻힐 수밖에 없었고, 가격대나 주차 여부, 데이트하기 좋은지 회식하기 적당한지 같은 정보는 빠져 있었다고요. 그러고는 이렇게 정리하더군요.


"내가 쓴 건 '내가 다녀온 후기'였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읽다 보니 제 서평들도 슬쩍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누군가 검색해서 찾아와 알고 싶은 말 사이의 거리 같은 거요.


자전거 얘기도 반가웠어요. 2020년 무렵 사이클을 시작하면서 라파 저지, 휴대용 펌프, 헬멧 후기 같은 글을 올렸는데, 천호동 자전거 거리 후기는 누적 조회수가 13,367회까지 쌓였대요. 숫자만 보면 제법 궤도에 오른 거 같은데 함정이 있었습니다. 4년 넘게 천천히 쌓인 숫자였고, 자전거는 광고 단가가 낮은 분야라 애드포스트 수익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조회수와 수익은 다른 문제다.


짧은데 뼈가 있는 한 줄이에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1부 5장 "AI는 직원처럼 대할 때 제대로 일했다"입니다. 7월에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면서 챗GPT를 썼는데, 처음엔 "다이어트 글 하나 써줘"라고만 했대요. 그랬더니 "안녕하세요 여러분~"으로 시작해서 "마치며"로 끝나는 매뉴얼 같은 글이 뚝딱 나왔고, 그걸 다듬는 시간이 직접 쓰는 시간보다 더 걸렸다고요. 여기서 저자가 떠올린 게 자기 본업이었다는 게 참 흥미로웠어요.


클라이언트가 "예쁘게 해주세요"라고만 하면 디자이너는 자기 방식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에서는 하이주얼리 전시공간이고 컨셉은 클래식 모던, 가구는 젠 스타일로 가달라는 식으로 콕 집어 지시했고, AI도 똑같았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회사 다니면서 "알아서 잘 좀 해봐" 소리 한 번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지시가 흐릿하면 결과도 흐릿하다는 건 사무실이나 AI나 매한가지인 거 같습니다.


"AI는 직원이다. 명령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는다."


<퇴근 후 1시간, 블로그로 월 2천만원 벌기>에는 저자가 실제로 쓴 지시문도 그대로 나와요. 독자는 40대 워킹맘이고, 출퇴근길에 5분 안에 읽을 글이며, 다이어트를 여러 번 시도했다가 실패해 본 사람이라는 식으로 타깃을 구체적으로 정해 줍니다. 문단마다 할 일을 나눠 주고, 톤은 "친구한테 카톡으로 알려주는 것처럼 편하게" 하라는 주문까지 붙이고요. 그렇게 AI가 뼈대를 잡고 저자가 경험과 감정으로 살을 붙이자, 두세 시간 걸리던 글 한 편이 한 시간 안에 끝나기 시작했다고 해요.


제목에 붙은 '퇴근 후 1시간'이 이렇게 나온 거였구나 싶더라고요.


AI가 못하는 일을 분명히 짚어 주는 것도 좋았어요. 사이클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처음 10km를 달렸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같은 건 AI가 모른다는 거죠. 결국 내 이야기가 들어가야 내 글이 된다는 말이라, 글 쓰는 사람한테는 은근히 힘이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2천만 원이라는 숫자가 조금 부담스러웠어요. 이런 책은 결국 잘된 얘기만 늘어놓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3부로 넘어가니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2026년 1월, 일일 방문자 70만.


7월만 해도 8천 원이던 수익이 2,000만 원을 넘기고, 글만 올리면 홈피드에 뜨던 때였대요. 그러다 1월 6일에 올린 글 한 편 이후로 통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어제는 만 명이 들어오던 글에 오늘은 천 명도 안 들어오고요.


"점심시간에 통계를 봤고, 퇴근길에 또 봤고, 자기 전에도 봤다."


직장인이라면 모른 척하기 어려운 풍경 같아요. 주식 창이든 실적표든, 숫자 하나에 하루 기분이 오르내리는 그 마음 말이에요.


맛보기로 한 줄만 옮겨 볼게요.


"'떡상'은 운일 수 있어도, '떡락'은 이유가 명확하다."


저자는 무너진 이유를 하나씩 뜯어봅니다. 의료 쪽에 걸리는 표현, 출처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쓴 이미지 한 장, 수명이 짧은 이슈 글에 너무 기댄 습관까지요. 감추고 싶었을 법한 장면을 이렇게 다 꺼내 놓은 덕분에 <퇴근 후 1시간, 블로그로 월 2천만원 벌기>가 흔한 성공담 책과 다르게 느껴졌어요. 바닥에서 어떻게 다시 움직이는지는 책에서 직접 따라가 보시면 훨씬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잘될 때 너무 들뜨지 않고, 안 될 때 너무 무너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말도 나오는데, 블로그 얘기로만 읽히진 않더라고요.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좋은 해도 있고 영 안 풀리는 해도 있잖아요.



이 책은 한 번 읽고 꽂아 두기보다 책상 옆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펼쳐 볼 쪽에 가까워요. 뒤쪽에 6가지 AI 프롬프트, 12개 제목 공식, 8가지 심리 패턴, 위험 단어 대체 가이드, 7단계 본문 구조 같은 자료가 부록으로 따로 모여 있거든요. 블로그를 막 시작하려는 분이든, 꾸준히 쓰는데 숫자가 제자리라 답답한 분이든, 옆에 두면 든든한 선배 한 명 곁에 둔 기분일 거 같습니다.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초가을, 오늘 밤 뜨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제 블로그 통계 그래프도 둥글게 좀 차올랐으면 하는 욕심이 슬쩍 생기네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고, 실력 좋은 선배한테 노하우를 한 보따리 얻어 온 것 같아 든든했습니다. 다들 넉넉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월 3,000원 블로그가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AI를 직원처럼 부리는 법과 숫자 앞에서 버티는 법을 같이 알려주는 블로그 실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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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를 위한 한입 일본어 초급 1 - 배운 문법으로 내 문장을 말하게 되는 일본어 ㅣ 왕초보를 위한 한입 일본어 1
오겡끼홈스쿨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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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와타시 와 가쿠세이 데스."


우리말로는 "나는 학생입니다"예요. <왕초보를 위한 한입 일본어 초급 1>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만나는 문장이 이거예요. 명함에 직함 새기고 산 지 한참 된 아재가 학생이라고 말하려니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같은 강의 단어 목록에 '카이샤인'(회사원, 직장인)이 들어 있어서, "와타시 와 카이샤인 데스"가 제 입에는 더 잘 붙을 거 같습니다.


추석 연휴 한가운데 토요일이네요. 한가위 인사부터 드립니다. 제목에 있는 '한입'을 보자마자 송편 한입부터 떠오른 건 명절 탓으로 돌릴게요. 이 책은 유튜브와 온라인 강의로 일본어를 가르쳐 온 오겡끼홈스쿨이 처음 낸 종이책이에요. 부제가 '배운 문법으로 내 문장을 말하게 되는 일본어'인데, 넘겨 보니 그 부제가 빈말은 아닌 거 같더라고요.


한 강은 이해하기, 외우기, 만들어 보기, 혼자 만들어 보기 순서로 흘러가고, 끝에 깨알지식이라는 작은 코너가 붙어요. 문법 하나를 배우면 그걸로 문장을 쉰 개쯤 만들어 보게 되는데, 이게 이 책에서 제일 두드러지는 점 같아요. 설명 몇 줄 읽고 다음 과로 넘어가던 교재들하고는 손이 가는 양부터 다르더군요.


첫 강의 '형태 파헤치기'가 특히 친절했어요. '나는 학생입니다' 한 문장을 '나', '는', '학생', '입니다'에 해당하는 색깔 블록으로 하나씩 잘라 놓고, 일본어와 우리말을 짝지어 붙여 두거든요. 두 말의 어순이 같다는 게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오니까 시작부터 겁먹을 일이 줄어드는 느낌이 듭니다. 일본어는 물음표를 잘 쓰지 않으니 문장이 '카'로 끝나면 "질문일 가능성이 높겠구나~" 하고 생각하라는 설명도 있어요. 교과서 말투라기보다 옆자리 선배가 귀띔해 주는 말투라서 편하더라고요.



머리말에는 저자 코니 선생님이 열아홉 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이야기가 나와요. 일본어를 한 문장씩 이해하고 한마디씩 말하게 되면서 자기 세상이 조금씩 넓어졌다고 하시더군요. 많은 사람이 일본어는 쉽다며 시작했다가 동사 활용이나 미묘한 뉘앙스에서 고비를 만난다는 대목에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이 책이 여러분을 단번에 고수로 만들어 준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문장도 솔직해서 믿음이 가더라고요.


틀려도 괜찮습니다. 천천히 가도 괜찮습니다.


머리말 끝자락에 놓인 이 두 문장은 마흔 넘어 뭔가를 새로 배워 보려는 사람한테 유난히 반가운 말인 거 같아요. 오겡끼홈스쿨은 늘 "진심으로 당신을 응원합니다"라는 마음으로 학생들을 만나 왔다고 해요. 책 곳곳에서 머리에 새싹을 달고 "하이!" 하며 손을 번쩍 든 병아리도 그 응원단 한 자리를 맡은 것 같고요.


제일 천천히, 한 줄씩 따라가며 읽은 건 제15강이었어요. 주고받는 표현을 다루는데, 인물을 동그라미 안에 넣고 화살표로 방향을 보여 줍니다. '아게마스'는 내가 남에게, 혹은 남이 남에게 줄 때. '모라이마스'는 화살표가 거꾸로 돌아와 받을 때. 주는 쪽이 회사나 학교처럼 사람이 아니면 '~로부터 받는다'는 뜻의 '카라 모라이마스'만 쓸 수 있다는 설명까지 그림 옆에 차곡차곡 붙어 있어요.



재미있는 건 '쿠레마스'였습니다. 아게마스도 '줍니다', 쿠레마스도 '줍니다'인데 받는 사람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림 속 '나' 둘레에 노란 동그라미가 하나 더 그려져 있고, 그 안에 든 가족이나 친구 같은 '내 편'이 받을 때도 쿠레마스를 쓴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여기서는 잠깐 머리를 긁었어요. 설명 끝에 "나와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기준은 주관적이에요…"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그럼 우리 팀 사람들은 노란 동그라미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잠깐 헤아려 보게 되더군요. 설명 몇 줄로 딱 떨어지는 문법은 아닌 거 같고, 예문을 여러 번 만나면서 감을 잡아 가야 할 부분이다 싶었습니다. 다행히 이 책이 바로 그 '여러 번'을 넉넉하게 준비해 둔 책이라 걱정은 덜하더라고요.


만들어 보기도 제1강과는 모양이 달라요. 이번에는 "카페에서 친구가 저에게 커피를 줬어요" 같은 상황을 하나 주고, 그걸 '받았다' 문장과 '줬다' 문장 두 가지로 바꿔 보게 합니다. 혼자 만들어 보기로 넘어가면 동사 이름이 적혀 있던 자리가 빈칸으로 바뀌어서, 어떤 동사를 쓸지부터 스스로 골라야 하고요. 강의 내용에 맞춰 연습 틀까지 바꿔 주는 게 세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형은 회사에서 차를 받았어요"라는 문장에서는 그 차가 자동차인지 녹차인지 괜히 궁금해지더라고요. 직장인 마음으로는 자동차였으면 좋겠지만요.


외우기에 나오는 가족 호칭도 흥미로웠습니다. '하하', '치치'는 남에게 내 가족을 이야기할 때 쓰고, '오카아상', '오토우상'은 가족을 직접 부르거나 남의 가족을 말할 때 쓴다고 나눠 놨어요. 우리말에서 "저희 어머니"와 "어머님"을 가려 쓰는 감각이랑 닮은 데가 있는 거 같아요. 호칭 앞에서 한 번씩 멈칫하게 되는 건 한국어나 일본어나 비슷한가 봅니다.


제15강 깨알지식에 나오는 '아나타'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교재에는 '당신'이라는 뜻으로 많이 나오지만 현지에서는 그만큼 자주 쓰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당신은 학생이에요?" 대신 그냥 "학생이세요?"라고 묻듯이, 일본에서도 아나타를 빼고 "가쿠세이 데스카"라고 묻는 사람이 많대요. 상대는 보통 성으로 부르고 편한 사이면 이름이나 별명으로 부른다면서, '이시키 카즈야'라는 이름을 예로 들어 '카즈야'나 '이시키상'으로 부른다고 알려 줍니다. 이시키가 실제로 있는 성이라는 작은 각주까지 달려 있고요.



회사에서 누구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고 다들 이름이나 직함으로 부르니까, 이 대목은 직장인한테 오히려 쉽게 들어오는 거 같습니다. 제1강 깨알지식에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남녀 모두 '와타시'를 쓰는 편이 좋다고 한 것도 같은 결로 읽혔어요. 그러다 "한 가지 더!" 하면서, 한국에서 부부끼리 '여보', '당신' 하듯 일본에서도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아나타를 쓰기도 한다고 덧붙이는데, 이게 또 드라마 한 장면처럼 그려지더군요.


제30강 전체 복습은 한국어 문장이 번호를 달고 쭉 이어지는 구성이에요. 처음엔 "선생님입니까?", "학생입니다."처럼 짧게 시작하는데, 뒤로 갈수록 "여기부터 거기까지는 내 겁니다. 친구 것은 저쪽에 있습니다."처럼 두 문장이 이어 붙기 시작합니다. 첫 강의 '데스' 한 단어에서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서, 목록만 훑어봐도 한 칸씩 쌓아 올린 계단이 보이는 기분이었어요.


"그 의사는 금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쉬었습니다"라는 문장은 부러워서 한 번 더 보게 되더군요.


판형이 보통 소설책보다 시원하게 큰 편이라 펼쳐 놓고 쓰기 편해 보여요. 문장마다 아래 여백이 넉넉해서 바로 답을 써 넣으면 되고, 강의 중간중간 QR코드를 찍으면 한국어 문장을 듣고 일본어로 만들어 보면서 원어민 선생님 발음까지 들을 수 있어요. 뒤쪽에는 코니 메모 단어장과 형용사 활용표, 스티커 부록이 들어 있고, 구매자 전용 공부방과 연계 강의도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왕초보를 위한 한입 일본어 초급 1>은 한 번 풀고 꽂아 두는 책보다는 곁에 두고 여러 번 펼치는 쪽에 가까운 거 같아요.


일본어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몇 번 시작했다가 중간에 손을 놓았던 사람도 처음부터 다시 걸어 들어가기 좋게 짜여 있더라고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고, 짧은 문장이 조금씩 길어지면서 '내 말'로 바뀌어 가는 흐름을 따라가는 게 즐거웠습니다.


어젯밤 보름달이 아직 눈에 선한 연휴 토요일, 선선한 가을바람 맞으며 일본어 교재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연휴 끝나고 출근하면 "와타시 와 카이샤인 데스" 한 줄부터 입에 붙여 보고 싶어집니다. <왕초보를 위한 한입 일본어 초급 1> 덕분에 좋은 선생님 한 분 새로 모신 거 같아 든든합니다. 남은 연휴도 넉넉하게 보내세요.


문법 하나로 문장 쉰 개를 만들다 보면, 외운 일본어가 어느새 '내 말'이 되는 초급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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