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만드는 평생 연금 ETF 투자 혁명 - Ray Dalio’s The All Weather Portfolio
도세 도시로 지음, 김지선 옮김 / 북웨이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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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주식이 고작 26%? 갸웃하던 아재를 끝까지 붙잡은 올웨더 이야기


올웨더라는 말을 처음 봤을 때는 사계절용 등산 재킷 광고인 줄 알았어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끄떡없다는 그 올웨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올웨더는 사람 대신 계좌에 입히는 옷이더군요. 경기가 좋든 나쁘든, 물가가 뛰든 멈추든 버티는 계좌라니, 주식 좀 해 볼까 기웃거리던 아재 입장에서는 첫 장부터 솔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만드는 평생 연금 ETF 투자 혁명>은 일본의 개인 투자자 도세 도시로가 쓰고 김지선 님이 옮긴 책이에요.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를 세운 레이 달리오의 올웨더 전략을 ETF 3개와 우량주 5개, 딱 8개 종목으로 풀어낸 게 핵심이라고 하더라고요. 1년에 한두 시간 리밸런싱만 해주면 된다는 말에 늘 피곤한 직장인 귀가 쫑긋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이 책만의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장마다 문을 여는 [주린이가 묻다] 코너일 거 같아요. 주인공 에미가 스마트폰에서 'ETF 투자 혁명'이라는 가상의 앱을 찾아내는데, 다운로드 5억 이상에 리뷰 2582만 건, 평점 4.9짜리 앱이에요. 앱을 켜면 저자 도세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나 "숨을 크게 들이쉬고 긴장을 풉시다" 하고 말을 건넵니다. 투자책에서 이런 설정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앱 리뷰들도 소소하게 재미있어요. "그야말로 갓투!"를 외치는 20대 리뷰어도 있고, "불황에도 이익이 나다니… 버그인가?" 하는 30대 리뷰어도 있거든요. 40대 남성 taro 님 리뷰에는 괜히 눈길이 한 번 더 가더군요.

에미가 털어놓는 고민은 남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회사 동료들한테 안 하면 손해라는 말을 매일 듣다 보니 뒤처질까 봐 초조하대요. 유튜브에서 주식으로 100억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부럽기도 하고요. 직장 다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라 그런지 에미가 꽤 가깝게 느껴졌어요. 도세의 대답은 차분한 편이더군요. "확실히 성공담은 매력적이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릅니다." 조급한 마음을 나무라지 않으면서 발걸음을 한 박자 늦춰주는 말투라 좋았어요.


1장은 저자가 "먼저 양해를 구한다"며 시작합니다. 폭락과 관련된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부터 꺼내겠다는 거예요. 희망부터 건네는 재테크 책에 익숙해서 그런지 이런 솔직함에 믿음이 가더라고요. 주가 대폭락, 주식시장의 장기 침체, 높은 변동성이라는 3대 리스크가 나오고, 남들 따라 쏠리는 FOMO 이야기도 이어집니다. 적립식 투자도 결국 주식이라는 한 자산군에만 투자하는 방식이라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뜨끔했어요. 적립식으로 인덱스만 사면 다 되는 줄 알았거든요.


머리말에 담긴 저자의 가족사는 조금 다른 결로 읽혔어요.

1980년대 후반 초등학생이던 저자는 버블 경제 속에서 부모님이 일본 주식을 사는 걸 지켜봤다고 해요. 버블이 무너진 뒤에도 부모님은 주가가 회복될 거라 믿고 팔지 않았대요. 그사이 아버지는 밤낮없이 일했고, 어머니는 무릎 통증을 참으며 매장에서 내내 서서 일했다고 적혀 있어요. 그러다 2008년 리먼 사태로 주가가 다시 폭락하자 결국 주식을 던졌고, 그 뒤 주가가 올랐을 때는 그 이익을 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올웨더 전략을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부모님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는 문장은 담담하게 쓰여 있어서 더 조심스럽게 읽혔습니다. 그 부모님 나이쯤 와 있는 입장이라 그런지, 한 가정의 계좌가 흔들린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그 뒤로 저자는 해외 자료를 찾아 읽으며 리스크 패리티 전략을 연구했다고 해요. 직접 투자하며 검증한 끝에 지금의 8개 종목 구성을 만들었고요. 일본적십자사 재무팀에서 인명과 직결된 자금을 다루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제일 반가웠던 건 "고액 연봉자가 아니었으므로 매월 꾸준히 적립식으로 투자"했다는 고백이었어요. 월급 받아 사는 사람한테는 이런 문장이 꽤 힘이 되는 느낌이 듭니다. 앞에서 뜨끔했던 적립식 얘기와 이어 보니, 결국 핵심은 여러 자산군에 나눠 담는 쪽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23년 45세에 경제적 자유를 이룬 뒤의 일상 이야기도 살짝 나오는데요. 발리의 아침 햇살 아래서 명상을 하고, 필리핀 팔라완 해변 풍경에 감탄하고, 시칠리아에서 지중해 요리를 즐긴다고 합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가 떠오르는 크로아티아 로비니 거리에서 석양을 보며 하루를 마친다는 대목에서는 부러움을 숨기기가 좀 어렵더군요. 지금 제 나이보다 어린 나이에 저기까지 갔다니.


기본 포트폴리오는 원형 그래프 하나로 정리돼 있어요. 미국 주식 VTI 26%, 미국 장기 국채 TLT 34%, 금 GLDM 20%이고, 원자재 20%는 엑슨모빌, 셰브론, BHP, 리오틴토, 디어 다섯 기업에 4%씩 나눠 담는 구성이에요. 솔직히 처음 볼 때는 주식이 고작 26%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저자가 이런 반응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독자의 속마음을 대신 꺼내 놓더군요. "원자재에 20%나 투자하다니 바보 아니야?" 제 머릿속 목소리랑 너무 똑같아서 웃음이 났어요. 이어서 1972년부터 2022년까지의 데이터를 가지고 차근차근 반박합니다. 미국 주식 60%, 국채 40% 포트폴리오와 비슷한 중간 정도 리스크로 미국 주식 100%를 웃도는 수익률이 나왔다는 거예요.

부동산과 비트코인, 명품 시계, 미술품, 우표, 보석, 고주화를 빼놓은 이유도 정리돼 있어요. 잘 모르는 투자 대상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이에요. 명품 시계는 애초에 없으니 뺄 것도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2장의 설계 과정이었어요. 경제 환경을 고성장, 저성장, 고인플레이션, 저인플레이션 네 가지로 나누고, 환경마다 강한 자산을 두 개씩 배치하는 방식이에요. 미국 주식은 고성장과 저인플레이션에, 미국 국채는 저성장과 저인플레이션에, 금은 저성장과 고인플레이션에, 원자재는 고성장과 고인플레이션에 강하다고 해요. 이렇게 짝을 지어 놓으니 네 자산이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저자는 각 자산의 특성을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고 지금은 이 정도만 이해해도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은근히 위로가 됐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독자를 축구 감독 자리에 앉혀요. 선수마다 포지션이 다르고, 모두 공을 쫓지만 경기 흐름에 따라 공이 있는 곳이 달라진다는 거죠. 그러고는 농구 만화 (슬램덩크)에 나온 안 감독의 명대사를 꺼내 듭니다.


"너를 위해 팀이 있는 게 아니다. 팀을 위해 네가 있는 거다!"

그 만화를 보며 자란 세대라 이 대사를 투자책에서 만나니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어요. 한 명의 에이스에게 기대지 않고 팀 전체로 이긴다는 이야기가 머리말의 선수 비유에서 축구로, 다시 농구로 이어지는데, 이게 책 전체를 꿰는 줄 같은 느낌이 듭니다.

비율을 정하는 과정도 생각보다 단순했어요. 리스크를 1부터 5까지 점수로 매기면 미국 주식이 4, 초장기 미국 국채가 3, 금과 원자재가 5예요. 이걸 모두 1:1:1:1로 담으면 가격 변동이 큰 금과 원자재가 포트폴리오 전체를 흔들어 버린대요. 그래서 금과 원자재를 1로 두고 미국 주식은 1.25배, 국채는 1.67배로 늘립니다.


1.25, 1.67, 1, 1.

이걸 백분율로 바꾸면 26, 34, 20, 20이 돼요. 앞에서 본 원형 그래프의 숫자와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걸 보는 순간 퍼즐 조각이 딸깍 끼워지는 기분이었어요. 숫자라면 고개부터 젓는 사람도 이 대목은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거 같더라고요.

5장의 "그럼에도 현금은 왕이 될 수 없다"라는 제목은 처음엔 좀 세게 들렸습니다. 현금을 쥐고 있으면 일시적인 안도감은 들어도 장기적으로는 리스크 자산이 가져다줄 이익을 놓쳐 기회비용이 생긴다는 설명이 이어져요. 그러다 "현금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투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는 문장까지 나오거든요. 그렇다고 올웨더를 만능처럼 포장하지도 않더군요. 패닉 장세나 예상치 못한 급격한 금리 인상 같은 분산할 수 없는 리스크 앞에서는 올웨더 포트폴리오도 하락을 피할 수 없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금이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20년 동안 부진했던 시기도 숨기지 않고요. 좋은 얘기만 늘어놓는 책이 아니라서 오히려 더 믿고 읽게 되는 거 같아요.


올웨더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어려운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대목도 좋았어요. 투자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너무 단순해서 싱겁다고 느낄 수 있대요. 오히려 이 책으로 투자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선입견이 없어서 유리할 수도 있다고 하니, 초보 아재 입장에서는 괜히 어깨가 펴지더라고요. 5장 끝자락에는 이런 비유가 나와요.


"투자는 씨앗을 뿌려 식물을 키우는 것과 같다.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매일 흙을 파헤치면 식물은 절대 제대로 자랄 수 없다. 필요한 관리(리밸런싱)를 해주면서 성장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증권 앱을 들락거리는 사람이라면 뜨끔할 만한 비유 같아요.

솔직히 걸렸던 부분도 있어요. VTI, TLT, GLDM 같은 영어 티커와 원자재 기업 이름이 한꺼번에 나오는 대목에서는 처음에 좀 버벅거렸거든요. 다행히 종목마다 어떤 상품인지 표에 짧은 설명이 붙어 있어서 한두 번 앞뒤로 오가다 보니 금방 익숙해지더군요. 저자도 더 낮은 비용의 ETF가 새로 나올 수 있으니 상품을 고를 때 최신 정보를 확인하라고 당부합니다. 실제로 계좌를 꾸리기 전에는 각자 한 번 더 따져볼 일 같아요. 레버리지를 다루는 4장은 겁 많은 제 성향상 기본형부터 충분히 익힌 뒤에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누구나 만드는 평생 연금 ETF 투자 혁명>은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 1년에 한 번 리밸런싱할 때마다 다시 꺼내 볼 책 같아요. 자산군별로 강한 경제 환경을 정리한 표, 리스크 점수표, 비중 계산표가 한곳에 모여 있어서 참고서처럼 곁에 두기 좋겠더라고요.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라 손이 자주 갈 것 같고요.


9월 마지막 토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네요. 매일 흙을 파헤치지 말고 믿고 기다리라는 <누구나 만드는 평생 연금 ETF 투자 혁명>의 말처럼, 이번 가을에는 증권 앱을 좀 덜 열어보고 제 계좌에도 사계절 우산 하나 씌워 줄 궁리를 해 보려고요. 좋은 책 만나서 마음 한쪽이 든든해진 주말입니다.


에이스 한 명에게 기대지 않고 네 자산의 팀워크로, 어떤 경제 날씨에도 버티는 계좌를 만드는 법을 친절하게 풀어낸 올웨더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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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 애덤 스미스부터 프리드먼까지 200년 경제사상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경식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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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하버드 교수가 교수직을 아예 때려치울까 고민하던 1973년 여름, BBC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고 합니다. 경제사상사를 다루는 텔레비전 시리즈에 나와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었대요. 이 교수는 별 망설임도 없이 덥석 받아들입니다.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전원 끄는 소리를 들을 일이 절대 없으니, 누가 졸든 커플이 자리를 뜨든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첫 장면부터 이렇게 능청을 떠는 사람이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예요. 그 방송과 함께 세상에 나온 책이 <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고요. 추석 연휴 끝자락 토요일이라 그런지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이 책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머리말에 제목을 정한 사연이 나오는데, 무엇보다 어감이 좋았다고 하더군요. 지난 100년 동안 자본주의자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가, 제국주의자는 제국주의가 번영할 거라고 저마다 확신했대요. 그런데 그 확신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인류가 맞닥뜨린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생각하면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말이 덤덤하게 붙어 있고요.


반세기 전에 쓴 문장인데 오늘 경제면을 펼쳐 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책 앞머리에 실린 이강국 교수의 추천의 글도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요. 1970년대는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속에서, 정부가 경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케인스주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던 시절이었대요. 그런데 금융위기와 팬데믹, 보호무역과 인공지능, 기후위기까지 겹친 지금이 어쩌면 그때보다 더 불확실한 시대일지 모른다고 합니다. 방송이 나가자 대처 같은 영국 보수 정치인들이 반대했고, 밀턴 프리드먼은 1980년에 PBS 시리즈와 <선택할 자유>로 맞불을 놨다는 뒷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경제학자들은 한번 붙었다 하면 판을 크게 벌이는구나 싶더군요.


이 책만의 결이 가장 잘 느껴졌던 건 머리말에서 방송과 책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를 한 시간 다루면 지루하다는 시청자도 있겠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비하면 그 한 시간은 1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방송에서는 무엇을 다룰지 골라야 하는데, 그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니 절대적인 정답인 척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선을 긋습니다. 방송 대본을 두고는 "얼굴이 없는 어떤 것"이라고까지 해요. 그러고는 책을 쓰는 사람은 독자가 앞으로 돌아가 되짚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쓴다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책을 쓰는 저자든 간에 어떤 독자가 하나의 장을 한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도록 원고를 써야 한다는 제약은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 "아직까지는"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저도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만 넘기다 잠들던 사람이라, 반세기 전 경제학자한테 한 방 먹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적어도 아직까지는. 요즘은 책을 먼저 집는 쪽이라 조금은 떳떳합니다.

7장 관료 혁명으로 들어가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거의 주인공처럼 등장해요.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1883년에 태어났다는 소개부터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갤브레이스는 위대한 인간은 보통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다는 처칠의 말을 꺼내 놓고는, 괄호 안에서 이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슬쩍 털어놓습니다. 그러고는 케인스가 이튼에서든 케임브리지에서든 행복한 나날을 보냈고, 개인적인 불만 때문에 세상을 바꾸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써요. 그에게 세상은 정말이지 멋지기만 한 곳이었다고요.


세상에 별 불만 없던 사람이 세상을 크게 바꿔놓았다는 게 저한테는 꽤 신선했어요. 공무원 시험에서 경제학 점수가 나쁘게 나오자 "시험관들은 아마 경제학을 나보다 더 몰랐을 것이다"라고 해명했다는 일화도 웃겼습니다. 이런 배짱은 인사평가 시즌에 한 번쯤 빌려 쓰고 싶더군요. 인도 사무소에 배치돼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책을 두 권이나 썼다는 대목에서는, 지루한 부서에서 버티는 방법도 사람마다 참 다르구나 싶었고요. 스승 격인 알프레드 마셜의 <경제학 원리>가 소양이 부족한 학생들이 일찌감치 경제학을 포기하도록 기를 꺾는 데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는 문장도 좋았어요.


파리 강화회의에서 물러난 케인스가 두 달 만에 써낸 책이 <평화의 경제적 결과>인데, 그 안의 인물평이 아주 압권이더군요. 우드로 윌슨은 "눈이 멀고 귀가 먼 돈키호테"라고 했고, 클레망소를 두고는 "프랑스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인류라는 전망을 내팽개쳤다"고 했답니다. 로이드 조지에게는 훨씬 더 냉혹한 문장을 써두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원고에서 빼버렸대요. 여기에 갤브레이스가 붙인 말이 이렇습니다.


"완벽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케인스도 그랬다."

이 두 문장이 괜히 좋았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한결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케인스가 그 책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밀려난 뒤를 다룬 대목이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그 배제가 오히려 행운이었다며 이런 말을 해요.


"공인의 저주는 처음에는 말투를, 결국에는 생각까지 자신의 공적 지위에 맞추게 된다는 점이다. 곧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다. 바깥에 있으면 적어도 진실을 말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말하는 법이라니요.

이 나이까지 회사를 다니다 보면 누구나 하나쯤 몸에 붙이게 되는 기술 같아요. 말투가 먼저 바뀌고 생각이 뒤따라 바뀐다는 그 순서가 특히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같은 장의 처칠과 금 이야기도 비슷하게 읽혔어요. 1925년에 파운드화 가치를 전쟁 전 수준으로 되돌리려던 결정을 두고, 갤브레이스는 그런 결정이 극소수만 모인 자리에서 내려진다고 말해요. 가장 높은 사람이 한마디 하면 다른 참석자들은 그 발언이 지혜롭다며 칭송하게 마련이고, 케인스처럼 반대할 게 뻔한 사람은 애초에 그 자리에 앉지도 못한다는 거죠. 백 년 전 런던 이야기인데 요즘 어느 회사 임원 회의실 풍경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더라고요.


9장 거대한 법인기업에 가면 이 회의실 이야기가 한층 더 노골적으로 펼쳐집니다. 우리 삶을 가장 많이 바꿔놓는 제도를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말로 장이 열려요. 기업이 정치인이나 공무원에게 금품이나 이권을 제공하는데, 이것을 순수한 자선이나 사랑의 표시라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뿐이라는 문장도 나옵니다. 뉴요커에 실렸던 찰스 애덤스의 만화도 한 컷 들어가 있는데, 동상들 앞에서 어른이 아이에게 "얘야,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어. 위대한 위원회들만 있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그리고 등장하는 게 UGE, 통합글로벌기업입니다. 갤브레이스가 여러 실제 기업의 모습을 뽑아 합성해서 만든 가상의 회사예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기업이라 그 신화를 방어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안이든 밖이든 검열 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설정이죠. 경제사상사 책 한가운데에 가상 기업의 연대기를 통째로 써넣은 발상이 이 책에서 가장 기발했던 거 같아요.

맛보기로 조금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1871년 시카고로 건너온 제임스 B. 글로우가 정육점을 열고, 돼지의 비명만 빼고 모든 것에 값을 매긴다는 업계에서 누구보다 앞서 나가요. 덕분에 이 회사 소시지는 '글로우 벌레'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불렸는데, 회사는 소시지 모양을 보고 애정을 담아 지은 별명이라고 우겼대요. 2세 때는 약간의 중독성 덕에 인기가 좋던 음료 브랜드를 인수하는데, 그 비결이 소량 들어 있던 코카인이었고요. 1955년에는 회사 이름을 UGE로 바꾸면서, 사보를 통해 이 이름이 '거대하다(huge)'에서 h를 묵음으로 처리한 발음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사회 장면은 직장인이라면 웃다가 뜨끔해지는 대목이에요. UGE 이사회는 두 달에 한 번 모여 이미 내려진 결정을 승인하고, 몇몇은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안건에 손을 들어 찬성하며, 두 사람은 꾸벅꾸벅 존다고 해요. 어떤 이사도 경영진의 제안에 반대하지 못하는데, "적어도 화장이나 미용보다 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렇다"는 단서까지 붙어 있습니다. 이사를 뽑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경영 결정에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는 평판이었고요. 이 가상 인물들의 "동시대인이거나 친구이거나 동족"이라며 헨리 포드와 IBM의 토머스 J. 왓슨 같은 실존 경영자들 사진을 떡하니 붙여놓은 페이지에서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어요.


솔직히 발목이 잡힌 곳도 있긴 했어요. 처칠과 금 대목에서 1파운드당 금 123.27그레인, 4.86달러, 4.40달러 같은 숫자가 줄지어 나오니까, 저 같은 사람은 속도를 늦춰야 겨우 따라가지더군요. 그래도 갤브레이스가 머리말에서 말한 책의 장점, 그러니까 앞으로 돌아가 되짚을 수 있다는 그 장점 덕을 톡톡히 본 셈이라 싫지는 않았어요.


책 자체도 참 예뻐요. 7장과 9장 모두 검은 바탕에 애덤 스미스의 옆얼굴과 빌딩 숲이 메달처럼 들어간 표제지로 시작하는데, 표지의 액자 그림이 그대로 이어져서 장이 바뀔 때마다 반갑더라고요. 사진도 넉넉하게 들어 있습니다. 마셜의 초상화, 조약에 참석하러 걸어가는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와 윌슨, 발레리나 리디아 로포코바, 에설런연구소 광고 페이지까지 있어요. 뉴욕의 제너럴모터스 빌딩과 모스크바의 코메콘 빌딩을 한 면에 나란히 실어둔 사진도 있는데, 모든 시대의 지배적인 주제는 그 시대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에 반영된다는 문장과 겹쳐 보니 체제는 달라도 빌딩은 닮은꼴이라 웃음이 나더군요.


두께는 보통 경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들 때마다 'huge'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요. UGE식으로 h를 묵음 처리하면 "유~" 하는 감탄사만 남습니다. 딱 그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알찬 두께예요.

경제학 공식은 거의 안 나오고 사람 이야기로 굴러가서, 경제학 용어를 잘 몰라도 읽는 데 큰 부담은 없을 것 같아요. 회사 다니는 분이라면 9장 하나만으로도 본전은 뽑았다는 기분이 드실 거 같고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달력은 벌써 9월 끝자락이고 추석 연휴도 막바지네요. 불확실성의 시대라지만 연휴 끝나고 체중계에 올라가 볼 숫자만큼은 확실성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존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덕분에 가을 초입에 머릿속 곳간을 든든하게 채운 기분이에요. 좋은 책 한 권 만나서 한 계절 잘 여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서 200년 경제사를 사람 이야기로 풀어낸, 회사원일수록 웃다가 뜨끔해지는 경제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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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수면 부족은 늘 있는 일이니까." "익숙해지면 별것 아니에요."


넥타이 맨 아저씨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이렇게 말하는 그림이 있어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가만 보니 딱 우리 또래 직장인 얼굴이더라고요. 그 그림 위에 붙은 제목은 "'난 괜찮아'는 자기 생각일 뿐, 전혀 괜찮지 않다"입니다. 첫 장부터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어요.

추석 연휴도 오늘로 끝자락에 와 있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선선해져서 이불 속이 부쩍 좋아지는 계절인데, 마침 이맘때 잠에 관한 책을 만났습니다. <내일이 달라지는 수면 과학>은 도쿄대학교 대학원 수면생리학연구실의 하야시 유 교수가 감수하고 홍성민 님이 옮긴 책이에요. 레몬한스푼에서 이번 9월에 나왔고요. 잠을 다루는 책이니 읽다가 졸면 그것도 실습이라고 우기면 되겠다 싶었는데, 그럴 틈을 잘 안 주는 책이더군요.


이 책의 재미는 그림에서 먼저 오는 거 같아요. 그래프와 실험 그림이 쉴 새 없이 이어져서 논문 이야기를 만화 넘기듯 따라가게 됩니다. 숨겨진 규칙을 찾는 문자열 실험이 대표적이었어요. 과제를 푼 뒤 낮 동안 깨어 있던 그룹, 밤에도 깨어 있던 그룹, 밤에 푹 잔 그룹에게 비슷한 문제를 다시 풀게 했더니 푹 잔 그룹만 통찰력이 올라갔대요. 참가자가 18~31세, 한창 체력 좋은 나이인데도 그랬다니 아재 입장에서는 더 할 말이 없어지죠.


여백마다 고양이 한 마리.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동그랗게 말려 자기도 하고요.

선생님 캐릭터와 독자가 주고받는 말풍선도 좋았어요. "술을 마시면 졸리긴 해요. 마시면 안 되나요?"처럼 딱 제 입에서 나올 법한 질문을 먼저 꺼내주니까, 혼나는 느낌보다는 동네 병원에서 상담받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원리를 다루는 앞부분과 생활 습관을 다루는 뒷부분이 서로 맞물린다는 점도 이 책만의 맛인 것 같아요. 앞쪽에서는 아데노신이 깨어 있는 시간만큼 쌓여서 졸음을 부르는 물질이라고 설명해요. 오렉신은 각성 스위치를 누르는 쪽이 아니라, 켜진 스위치가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 두는 쪽이라고 알려주고요. 수면과 각성을 시소 양쪽에 올려놓은 일러스트로 한 번 더 보여주기도 해요. 그러다 뒤쪽 아침 루틴에 가면 커피가 아데노신을 막아서 잠을 깨운다는 이야기와, 아침 햇빛을 쐬면 오렉신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앞에서 배운 게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머리가 좋아진 것 같은 착각도 들더라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프레젠티즘 이야기 뒤에 붙은 짧은 문단이었어요. 일에 진심이라 오래 일하면서 늘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이 불면에 빠지기 쉽고, 회사에 기여하려던 마음이 결국 생산성 저하라는 손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잠 줄여 가며 버틴 걸 은근히 자랑처럼 여기는 분위기는 우리 또래라면 다들 아실 거예요. 40대 이상은 수면 시간이 지금도 줄어드는 추세라는 문장에도 밑줄이 쳐져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쇼트 슬리퍼 이야기도 이어서 읽게 되더군요. 적게 자고도 쌩쌩한 체질은 예전엔 모든 직장인의 꿈이었지만, 인구의 1% 미만이고 유전적인 '행운 체질'이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래요. 그 꼭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수면 시간으로 적절히 일하며 개인생활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훨씬 멋진 시대다." 스무 살 때 들었으면 흘려들었을 말인데, 지금은 어깨를 토닥여주는 말처럼 다가와요.


옮긴이가 챙겨 넣은 숫자 하나도 반가웠어요. 일본인 평균 수면 시간 옆에 한국인 평균은 7시간 51분이라는 주석을 달아둔 거예요.

맛보기로 제일 웃으면서 읽은 대목을 옮겨볼게요. "커피를 매일 마시고 있는데, 저는 체질상 괜찮은 것 같아요." "개인차가 큰 것은 확실합니다. 단, 수면 부채가 클 뿐일지도 몰라요." 24개 연구를 메타분석했더니 커피 한 잔 기준으로 이 시각 이후에 마시면 수면에 영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13시 12분.

본문이 "오후 1시를 조금 넘은 시간까지라니, 너무 이른 거 아냐?" 하는 독자 속마음을 먼저 꺼내놓는데, 그게 딱 제 속마음이라 웃음이 났어요. 커피를 안 마시면 머리가 개운하지 않은 것도 엄연한 금단증상이라는 말까지 나오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더군요.

솔직히 뜨끔했던 건 음주 대목이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술을 안 마셔"라는 말로 시작해서, 중장년 남성일수록 비즈니스 술자리와 회식을 많이 겪어왔다고 짚는데 첫 문장부터 우리 얘기예요. 술을 마시면 금방 잠들어도 얕은 비렘수면이 길어지고 렘수면은 짧게 끊긴대요. 매일 마시면 내성이 생겨서 잠드는 효과마저 사라지고요. 선생님 대답은 짧고 단호합니다. "뇌 내 물질의 리듬이 흐트러졌을 뿐이라서 깨기 쉬워요." 뜨거운 탕을 좋아하는 중장년 남성에게도 한마디 하는데, 나이 들면서 온도 감수성이 떨어지는 탓도 있으니 푹 자고 싶으면 40℃ 전후가 좋다고 하네요. 5분 간격 알람에 스누즈까지 걸어두는 게 가장 좋지 않다는 문장 앞에서도 괜히 휴대폰 알람 목록이 떠올랐어요.


소장 가치는 충분한 편이라고 봐요. 알람 없이 원하는 만큼 자본 뒤 평소 수면 시간을 빼고, 거기서 다시 1.5시간을 빼면 내 수면 부채가 나온다는 계산법이 그림으로 정리돼 있어요. 그 아래에 수면 부채와 이상적인 수면 시간을 직접 적어 넣는 빈칸까지 있어서 워크북처럼 쓸 수 있고요. 그래프마다 참고한 논문이 달려 있어서 궁금한 건 더 찾아볼 수도 있어요. 크기는 보통 교양서 정도이고 무게도 가벼운 편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 부담 없습니다. 잠 줄여 버티는 게 당연해진 직장인이라면 <내일이 달라지는 수면 과학>에서 한 꼭지쯤은 자기 얘기를 찾게 될 거 같아요.


가을밤이 하루하루 길어지는 계절이라 잠 공부하기에는 이만한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알람 끄고 원하는 만큼 자보는 실험은 연휴 마지막 일요일에 한번 해볼 생각이에요. 오후에 커피 생각나시면 시계부터 한번 보세요. 13시 12분이 넘었으면 오늘부터 우리는 디카페인 아재입니다. 좋은 잠 이야기를 그림으로 편하게 배운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잠 줄여 번 시간은 이자까지 붙어 돌아온다는 걸, 넥타이 아저씨와 고양이 그림으로 알려주는 친절한 수면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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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박용남 편역 / 리미트리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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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명함이 안 통하는 동굴에서 칼을 거둔 사내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박용남 편역


목마 뱃속은 캄캄했을 거예요. 그 어둠 밖에서 누군가 이름을 부릅니다. 십 년 동안 듣지 못한 아내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요.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다들 안다고 생각하는데,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는 바로 그 목마 속의 밤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더군요.

헬레네가 목마를 세 바퀴 돌면서 안에 든 수령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메넬라오스와 디오메데스는 뛰쳐나가려 하고, 안티클로스는 대답하려 해요. 오디세우스는 그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습니다. "그 손 하나가 그 안의 모두를 살렸다"는 문장까지 오면, 읽는 쪽도 괜히 따라서 숨을 고르게 되는 거 같아요.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9월 끝자락의 토요일이네요. 긴 항해 이야기를 꺼내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외눈박이 거인이나 세이렌 같은 장면은 조각조각 알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이어서 따라가 본 적은 없었어요.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가 특이한 건 바로 이 순서 때문이에요. 원래 (오디세이아)는 이야기 한가운데서 시작하고, 유명한 장면들은 주인공이 남의 궁정에서 들려주는 회상으로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편역자 박용남 님은 그걸 목마의 밤부터 시간 순서대로 다시 늘어놓았습니다. 회상도 액자도 없이, 한 방향으로.


그렇다고 줄거리만 추려 놓은 느낌은 아니었어요. 장마다 첫머리에 "원전 제9권 105~566행" 같은 표기가 붙어 있어서, 지금 읽는 장면이 호메로스의 어느 대목에서 왔는지 바로 보이거든요. 부록 원전 대조표를 펼쳐 보면 A.T. Murray의 산문역을 저본으로 행 번호를 맞췄고, 원전의 1인칭 회상은 3인칭으로 다시 풀었다고 밝혀 두었더라고요. 이런 걸 보고 나니 마음 놓고 따라가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순서를 바꿔 놓으니 생기는 재미도 있어요. 1장에서 허리 굽은 노인 아이깁티오스가 "오디세우스가 떠난 뒤로 우리는 회의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소"라고 묻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몇 장 뒤에 나오는 키클롭스들은 회의도 법도 없이, 각자 제 동굴에서 제 처자식에게만 법이 되는 족속으로 그려지거든요. 서로를 찾지 않는 족속이요. 주인 없는 섬과 법 없는 동굴이 나란히 놓이니까 두 장면이 자꾸 겹쳐 보이더라고요.

인물 이야기를 하자면 페넬로페가 먼저 떠오릅니다. 구혼자 백여 명이 날마다 홀에 눌러앉아 남의 소와 양을 잡고 포도주를 퍼마셔요. 거절하면 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승낙하면 남편을 제 손으로 장사 지내는 셈이 되죠.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길을 찾아냈어요.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 놓고, 낮에 짠 베를 밤마다 횃불 곁에서 풀었습니다. 삼 년을요.


"한 사람의 평생 살림이 남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살림을 꾸려 온 중년의 가장 입장에서는 이 문장이 좀 서늘하게 읽혔어요.

텔레마코스도 눈에 밟힙니다. 아버지가 떠날 때 갓난아이였으니 이제 갓 스물이에요. 문간에 손님이 서 있는데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홀에서, 이 청년 혼자 일어나 손님의 오른손을 잡고 창을 받아 들어요. 먼저 드시고 용건은 그다음에 말씀하시라면서요. 그런데 그 손님 앞에서 털어놓는 말이 이렇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그분의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릅니다." 제 또래 아버지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괜히 마음이 쓰일 것 같더라고요.


그 청년이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이 집의 권한은 제게 있으니까요"라고 말하고, 구혼자들의 조롱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아요. 아까 온 손님이 누구였느냐는 물음에는 타포스의 멘테스라고만 대답하고요. 책은 그 모습을 두고 "그는 하루 만에 감추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고 적어 두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가는 첫걸음을 이 한 줄로 보여 주는 게 좋았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키클롭스의 동굴이었습니다. 너희는 누구냐는 물음에 오디세우스가 아가멤논의 이름을 대고, 탄원자라는 처지를 말하고, 제우스를 들먹여요. 사람의 도시였다면 그중 어느 하나로도 문이 열렸을 텐데, 책은 이렇게 적습니다. "이 동굴에서는 셋 다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회사 명함이 한 장도 통하지 않는 자리에 앉아 본 사람이라면 남 얘기로 들리지 않을 문장이에요.

영웅이라고 늘 현명한 것도 아니더군요. 주인 없는 동굴에서 부하들은 치즈랑 새끼 양만 챙겨서 당장 배로 가자고 매달리는데, 오디세우스는 그 주인을 직접 보고 싶었고 손님의 선물도 받아 보고 싶었답니다. "호기심과 욕심이 절반씩이었다." 훗날의 오디세우스가 그편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인정하는 대목도 있어요. 이런 빈틈이 있어야 저 같은 보통 사람도 정이 가는 법이죠.


그 뒤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솔직히 저한테는 좀 셌습니다. 묘사가 꽤 생생한 편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 칼을 잡았다가 도로 거두는 장면이 있어요. 괴물을 죽이면 문을 막은 바위를 치울 자가 없으니까요. "문제는 힘이 아니었다. 문이었다."


프롤로그 해설에서 읽은 "좋은 계략은 머리에서 나오고, 계략의 완성은 참는 데서 온다"는 문장이 여기서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목마 속에서 남의 입을 막던 그 손이, 동굴에서는 제 칼을 거두는 손이 되는 셈이라서요.

맛보기로 한 장면만 살짝 꺼내 볼게요. 눈먼 괴물이 문간에 버티고 앉아서 나가는 양들의 등을 손으로 더듬어요. 사람들은 숫양 세 마리를 한 묶음으로 엮어서 가운데 양의 배 밑에 하나씩 매달려 있고요. "등만 더듬었다. 배 밑은 만지지 않았다. 눈을 잃은 자의 손은 보이던 시절의 버릇대로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나가는 으뜸 숫양에게 괴물이 말을 겁니다. 착한 숫양아, 어째서 오늘은 네가 맨 뒤냐. 그 배 밑에 누가 매달려 있는지 아는 독자로서는 한 줄 한 줄이 조마조마하더라고요.


숨소리 하나가 목숨이었다는 말 그대로.

오디세우스가 댄 "아무도아니"라는 이상한 이름이 이 동굴에서 어떤 쓸모를 갖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는 게 훨씬 재밌을 거예요.

장마다 끝에 붙은 해설도 이 책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부분이었어요. 프롤로그 해설의 첫 줄은 "트로이아는 함락당하지 않았다. 스스로 열었다."입니다. 목마를 도끼로 쪼개자던 사람들의 손을 멈추게 한 건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러니까 그들의 미덕이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져요. "경계는 위협 앞에서 일어서고 호의 앞에서 눕는다"는 문장을 읽는데, 거절하기 아까웠던 제안 몇 개가 머릿속을 스쳐 가더라고요. 직장 생활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제일 정이 간 인물은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였어요. 주인이 떠난 사이에 여주인도 모르게 농장을 손수 지어 놓았고, 구혼자들의 잔치에 날마다 가장 좋은 놈을 골라 보내면서도 남은 수퇘지가 삼백육십 마리라는 걸 정확히 세고 있어요. "줄어드는 쪽의 장부는 이렇게 정확했다." 월말에 숫자 맞춰 본 적 있는 직장인이라면 웃프게 고개를 끄덕일 문장 같습니다.

그는 거지 차림으로 찾아온 낯선 노인에게 자기가 덮고 자던 염소 가죽을 깔아 줘요. 폭풍 칠 때 입으려고 아껴 둔 두꺼운 겉옷까지 덮어 주고, 자기는 투창을 들고 바위 아래로 나가 수퇘지들 곁에 눕습니다. "짐이 되겠다는 사람을 붙드는 데에 조건이 하나도 붙지 않았다."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저까지 조금은 착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두 사람이 긴 밤마다 서로의 고난을 이야기하는 장면도 좋았고요. "요즘 밤은 놀랍도록 길다오" 하는 돼지치기의 말이, 해가 부쩍 짧아진 요즘과 겹쳐서 들리더군요. 거지가 오디세우스는 꼭 돌아온다고 맹세하는 대목에 붙은 "이보다 참된 맹세도 이보다 새빨간 시치미도 없었다"는 문장은 참 얄밉게 잘 쓴 것 같아요.


굳이 걸렸던 걸 하나 꼽자면 낯선 이름들이에요. 안티노오스, 에우리마코스, 아이깁티오스, 할리테르세스까지 나오니까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좀 헷갈렸어요. 그래도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흐르다 보니 금방 자리가 잡히더라고요.

두께는 보통 책 한 권 정도라서, 스무 해 항해를 통째로 담았는데도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어요. 오디세우스가 짊어진 짐에 비하면 이 정도는 깃털이죠.


소장 가치로 보면 부록의 원전 대조표가 든든합니다. 나중에 완역본에 도전해 볼 마음이 생기면 옆에 펼쳐 두고 길잡이로 쓰기에 딱 좋을 것 같거든요. <한 권으로 끝내는 오디세이아> 덕분에 이제 누가 (오디세이아) 읽어 봤냐고 물으면 쭈뼛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선한 가을 토요일, 목마 이야기로 시작했더니 저도 말(馬)이 많아졌네요. 이십 년 걸려 집에 돌아가는 사람을 따라가고 나니, 오늘 저녁은 식구들이랑 밥 한 끼 제대로 먹고 싶어집니다. 좋은 책 만나서 기분 좋은 주말이에요.


스무 해 귀향길을 목마의 밤부터 차례대로 따라가니, 참고 버티는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내 얘기처럼 읽히는 편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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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 - 세계 6개 미술관에서 처음 시작하는 그림 여행
박혜성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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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직장인의 30분에도 미술관은 열려 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 서평



"미술을 애호하고 더 깊이 알고자 하지만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온종일이 아닌 30분이나 한 시간의 여가를 이용해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857년, 내셔널 갤러리를 공해가 덜한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영국의 존 듀크 콜리지 대법관이 이렇게 말하며 지금 자리를 지켰다고 하더라고요.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계층이라니, 딱 제 얘기 같았어요.


네, 여기 한 명 있습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에는 이렇게 백 년도 더 된 누군가의 말이 지금의 직장인한테 불쑥 말을 거는 순간이 곳곳에 숨어 있어요. 화가이자 아트 스토리텔러인 박혜성 작가가 2018년에 낸 <어쨌든 미술은 재밌다>의 후속작이고, 8년 만의 신작이라고 합니다. 전작이 그림과 화가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 그림을 품은 공간, 미술관 자체를 파고드는데요. 작가님이 프롤로그에서 이 책을 "미술관 사용 설명서라고 할까"라고 소개하시는데, 다 읽고 나니 그보다 잘 맞는 이름도 없는 거 같아요. 전작을 안 읽었어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내셔널 갤러리, 우피치, 프라도, 뉴욕 현대 미술관. 이름만 들어도 항공권 검색창을 열고 싶어지는 여섯 곳이 한 권에 다 들어 있어요. 재미있는 건 순서입니다. 장마다 [entrance]라는 이름으로 그 미술관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부터 들려주고, 그다음에 작품 이야기가 이어지고, 끝에는 [미술관 플러스]에서 미술관 바깥 이야기까지 챙겨 줘요. 입구로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나오는 동선을 책이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작가님이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사연도 좋았어요. 오래전 단체 여행으로 해외 미술관을 몇 번 찾았는데, 작품을 급하게 훑고 지나가는 관람이라 늘 갈증만 남았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다 막내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양화를 전공한 남편분과 함께 2014년부터 해마다 한 달씩 미술관 여행을 떠나게 됐대요. 막내를 대학 보내고 나서야 묵혀 둔 꿈을 꺼내는 그 순서가, 이 나이쯤 되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작가님이 옛 단체 관람을 두고 쓴 이 표현 하나로 패키지 여행의 추억이 다 정리되는 거 같았어요.

루브르 장에서는 이 유명한 건물이 처음엔 요새였다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12세기 말 노르만인의 공격을 막으려고 지은 요새가 감옥, 병기창, 왕실 금고 보관소를 거쳐 왕궁이 됐대요.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떠난 뒤로는 작업장이나 숙소로 밀려났다가, 프랑스 대혁명을 지나 1793년에야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한자리에서 직업을 이렇게 여러 번 바꾼 건물이라니, 이직 이력서로 치면 꽤 화려한 편이죠. 연표에 약한 편이라 왕 이름과 연도가 줄줄이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잠깐 헤맸어요. 그래도 옆에 실린 1380년 무렵 왕궁 그림과 그랑 갤러리 사진을 따라가다 보니 금방 길이 잡혔습니다.


제가 유난히 천천히 읽었던 대목은 유리 피라미드 이야기예요. 1989년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이 피라미드는 당시 여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예산이 동결돼 무산될 뻔했대요. 그런데 미테랑 대통령이 10년에 걸쳐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고, 지금은 에펠탑에 버금가는 파리의 랜드마크가 됐다고 하더군요. 회사에서도 처음 올렸을 때 온갖 소리를 듣던 기획이 몇 년 지나면 간판 사업이 돼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 기획을 끝까지 붙들고 있던 사람들 얼굴이 괜히 떠올랐어요.


이 책이 설명서라는 말을 들을 만한 건 이런 대목 덕분인 거 같아요. 2026년 기준으로 비유럽권 성인 입장료는 32유로이고, 한국어를 지원하는 오디오 가이드는 6유로래요. 회화 위주로 보려면 드농관 2층에서 시작하고, (모나리자)를 본 다음에는 다빈치가 프랑스로 가져온 (성 안나와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도 놓치지 말라고 챙겨 주십니다. 그중에 제일 반가웠던 팁은 따로 있어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들어가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우고 간식도 챙기라는 조언이요. 이런 걸 알려 주는 미술책은 흔치 않아서 웃음이 났습니다.

내셔널 갤러리 장으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또 달라져요. 런던 시민이 가장 많이 모이는 트라팔가 광장에 국립 미술관이 있고, 1824년에 문을 연 뒤로 지금까지 무료입장 원칙을 지켜 왔다고 하더군요. 해마다 한 달씩 해외에 머무는 작가님에게 런던은 경비 부담을 덜어 준 "감사한 도시"였대요. 그 표현에서 여행 경비를 꼼꼼히 따져 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유럽의 다른 미술관보다 늦게 출발했다는 사연도 흥미로웠어요. 우피치는 1769년, 루브르는 1793년, 프라도는 1819년에 대중에게 문을 열었는데, 영국에는 제대로 된 미술관이 없어서 컨스터블이 한탄했대요. 그 뒤로 기증이 모였고, 정부가 수집가 앵거스테인의 소장품 38점을 사들였어요. 그의 집을 임시 미술관으로 쓰다가 트라팔가 광장으로 옮겼다고 하고요.


영국 국회 위원회는 "그림의 존재 가치는 수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고귀한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는데요. 앞의 대법관이 말한 30분과 나란히 놓고 보니, 이 미술관이 누구를 위해 문을 열어 두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붉은 벽 전시실에서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앞에 사람들이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는데, 그 뒷모습들이 유난히 편안해 보였어요.

맛보기로 하나 꼽자면 프라도 장 끝에 실린 [미술관 플러스 5]예요. 제목부터 "넌 슈퍼 터니? 난 아트숍 턴다"라서 보자마자 피식했습니다. 작가님은 시카고 미술관에서 무라카미 다카시의 판화를,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데이미언 허스트의 판화를 샀는데, 작품은 그 자리에서 들고 오지 않고 몇 달 뒤 집으로 배송된다고 하네요. 미술관에서 파는 거라 작품도 확실히 보증받는다고요.

도록도 값이 오른다니요.

2017년 베네치아에서 본 허스트의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들> 전시 도록을, 여행 중에 끌고 다니기 무거워서 포기하셨대요. 그런데 나중에 인터넷에 뜬 가격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 뒤로는 웬만하면 도록을 사신다고 합니다. 짐 줄이려다 두고두고 아쉬워해 본 사람이라면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일 거 같아요. 책장에 형형색색 꽂힌 도록을 보면 부자가 된 기분이고 인테리어 효과도 꽤 있다는 말이 참 솔직해서 좋았어요.


같은 코너에 나오는 관람 요령도 오래 남을 거 같아요. 기대하던 작품 앞에 사람이 몰려 있으면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공간 전체를 보거나, 캔버스 옆면과 액자, 기법, 사인 같은 걸 차분하게 보라는 거예요. 작품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들도 10분 넘게 보는 경우는 드물다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됐고요. 관람을 마치고 빛이 잘 드는 곳에 앉아 일행과 그날의 베스트 작품을 하나씩 뽑아 본다는 방법은, 당장 가까운 미술관에서도 따라 해 볼 수 있겠더라고요.


에필로그에서 작가님은 작품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서, 관람을 마치고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작품이 없을 때가 있다고 털어놓으세요. 그래도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 문득 그때 본 그림이 떠오르기도 한대요. 역풍을 만나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에 오히려 뜻밖의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사십 대 후반 직장인한테 괜히 따뜻하게 들렸습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는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미술관 전경과 전시실 사진, 명화 도판이 넉넉하게 실려 있어서 넘기는 맛이 있습니다. 장마다 첫머리에 위치와 개관 시간, 휴관일까지 정리돼 있어서, 언젠가 정말 항공권을 끊게 되면 가방에 넣어 가고 싶은 책이에요. 당장 떠날 계획이 없어도 책장에 꽂아 두고 한 장씩 펼쳐 보는 것만으로 미술관을 한 바퀴 돈 기분이 들고요. 미술 지식이 없어도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추석 연휴 마지막 토요일이라 송편으로 채운 배가 아직 든든하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조건은 이미 갖춘 셈이에요. 볕 좋은 가을날에 가까운 미술관 한 곳 골라서 30분만이라도 천천히 걸어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길잡이 한 권 만나서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어요.


직장인의 30분에도 문을 열어 주는 세계 여섯 미술관의 탄생 이야기부터 아트숍 쇼핑까지, 미술관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다정하게 알려 주는 미술관 사용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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