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 ㅣ 한국철학전집 3
정도전 지음 / 결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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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정도전은 평생 기도하지 않았다, 설계했다.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 서평


표지부터 기운이 셉니다.

까만 바탕에 흰 갓을 쓴 얼굴 하나가 비스듬히 앉아 있고, 그 뒤로 뿌연 달이 걸려 있어요. 옆으로는 鄭道傳 세 글자가 세로로 큼직하게 서 있습니다. 판화 같은 흑백 질감이라 그런지 눈빛이 꽤 매섭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첫 장을 열면 고려 말 궁궐 대신 퇴근길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회의는 끝났고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내가 준비한 자료는 결정의 장식품에 가까웠다는 장면이에요. 조선 건국 이야기인 줄 알고 펼쳤는데 첫 문단부터 우리 사무실 얘기를 하고 있으니 괜히 뜨끔하더군요.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는 출판사 결에서 펴내고 있는 <한국철학전집>의 세 번째 책이에요. 앞서 이순신 편과 세종대왕 편이 나왔으니, 앞 권 서평 먼저 보고 오시면 편해요. 권마다 다루는 인물이 달라서 이 책부터 펼쳐도 전혀 문제는 없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이자 한 주의 허리쯤인 수요일이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반팔 위에 뭘 하나 걸칠까 고민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이런 날씨엔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지는데, 마침 생각할 거리가 잔뜩 든 책을 만났어요.


솔직히 정도전 하면 사극에서 이성계 옆을 지키던 책사 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은 그 이미지를 꽤 과감하게 흔드는 편이에요. 그를 이성계를 도운 참모로만 기억하면 그의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거든요. 책이 그리는 정도전은 왕 하나가 나라를 망칠 수 없게 나라의 구조를 짠 사람이에요. 왕좌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문장으로 못 박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듣고 보니 저는 그동안 정도전을 딱 정도껏만 알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게 폭군 한 사람보다 우연이었다는 대목이 재미있었어요. 다음 왕이 능력이 아닌 핏줄로 정해지는 건 나라의 운명을 제비뽑기에 맡기는 일이라는 거죠. 책은 이 생각을 곧장 사무실로 옮겨 옵니다. 팀장이 유능하면 팀이 살고 무능하면 팀이 죽는 조직은 한 사람에게 기대는 도박이라고요. 좋은 팀장 만나게 해달라고 비는 마음이 있고, 팀장이 바뀌어도 굴러가는 업무 구조를 만드는 마음이 있는데, 둘은 완전히 다른 종류라는 얘기가 이어져요. 그 끝에 이런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정도전은 평생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설계했다."

짧은데 세요, 이 두 문장.

인물로서의 정도전은 따뜻하게 그려지지 않아요. 책도 그를 위인으로 소개할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밝히는 편이고요. 오랜 벗이나 스승 격인 인물과도 갈라섰고, 잔혹한 처분들 곁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도 감추지 않습니다. 외가에 노비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평생 시비에 시달렸고, 그 시대의 룰로는 결코 왕좌에 오를 수 없는 사람이었대요. 이 대목에서는 마음이 좀 복잡해지더라고요.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그는 원망하지도, 무작정 부딪치지도 않았다고 해요. 벽을 인정하고 꼭대기를 포기한 뒤 왕관의 규격을 정하는 자리로 옮겨 앉았다는 거예요. 책은 이 선택을 두고 "체념이 아니다. 훨씬 무서운 종류의 야심이다"라고 씁니다.


그는 결국 이방원 쪽의 기습으로 목숨을 잃었고, 역적으로 몰려 이름도 오래 지워졌어요. 그런데 그를 제거한 쪽조차 그가 설계한 법전과 행정 조직, 도시 구조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책에서는 사람은 지웠으나 설계도는 지우지 못했다고 표현하더군요. 싸움에서는 졌는데 구조에서는 이겼다는 평가를 듣고 나니, 한 사람의 생애를 어디까지 보고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어요.


중반쯤 군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결국 직장 이야기였어요. 조선이 섰다고 군대가 곧바로 하나가 된 건 아니었대요. 장수마다 병력도 신호도 대열 세우는 방식도 제각각이었다고 해요. 정도전은 병서를 지었고, 태조는 <진도>와 <수수도>를 펴내 모두 그 방식대로 훈련하게 했습니다. 장수 머릿속에 있던 판단을 종이 위로 끌어내린 셈이에요. 책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머릿속에 있으면 개인의 것이고, 종이에 있으면 국가의 것이다."

훈련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휘관 292명이 한꺼번에 탄핵된 일도 나와요. 왕자와 공신에게는 차마 손대지 못했지만, 그 휘하 지휘관들이 대신 매를 맞았다고 하고요. 책이 여기서 붙잡는 건 예외가 있느냐 없느냐예요. 예외가 하나 생기면 나머지 사람들은 규정보다 눈치를 먼저 보게 된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더라고요. 어느 조직이든 늘 예외인 한 사람은 있으니까요.


"대부분의 기준은 첫 예외에서 죽는다."

인수인계 문서 이야기에서는 웃음이 좀 났어요. 퇴근 무렵 인수인계 문서를 열어 놓고 얼마나 자세히 쓸지 망설여 본 적이 있을 거라는데요. 다 쓰면 손해 같고 안 쓰면 옹졸한 것 같은 그 애매한 감정을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내는지요. 2주 동안 연락이 끊기면 무엇이 멈추는지 물어보라는 대목도 있어요. 멈추는 게 많을수록 조직 입장에서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니, 저도 모르게 저만 아는 파일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른 대목보다 천천히 눈으로 따라가며 읽었던 건 후반부 유배지 이야기였어요. 나주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이 이십 년 뒤 새 수도의 자리를 정하는 논쟁 한복판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한양의 주산을 두고 무학은 인왕산을, 정도전은 북악을 등져야 한다며 의견이 갈렸다고 해요. 책도 이 일화는 사료로 확정하기 어려운 전승이라고 밝혀 둡니다. 다만 두 사람이 실제로 다툰 건 무엇을 근거로 나라의 중심을 정할 것인가였다고 풀어내요.


그리고 이야기는 곧장 회의실로 넘어옵니다. 왜 이렇게 하냐고 물으면 원래 이렇게 해왔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순간이 있잖아요. 근거를 물을 수 없는 규칙은 권위로 유지되고, 그런 규칙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린다는 설명이 이어져요. 회사 밥을 오래 먹은 입장에서는 반박할 말이 하나도 없더군요.

회의에서 "왜요?" 하고 물으면 공기가 식는 걸 느껴봤을 거라는 문장도 있어요. 무례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고 예민한 사람으로 찍힐 것 같아서 결국 말을 삼키게 되죠. 그러고는 회의가 끝나고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아까 말할걸 후회한다는 장면이 나와요. 그 후회가 몇 년 쌓이면 조직에서 가장 성실하게 관행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누가 제 얘기를 받아 적은 줄 알았습니다.


책은 거기서 위로만 하고 끝내지 않아요. 의심 없이 따라온 규칙 세 개를 종이에 적어보라고 권합니다. 왜 하는지 모르지만 계속 하는 일, 왜 안 되는지 모르지만 안 된다고 믿는 일, 왜 그 순서인지 모르지만 늘 그 순서로 하는 일이요. 적고 나면 대개 불편해진대요. 그중 하나쯤은 십 년 넘게 지켜온 것이기 때문이라고요. 중년 직장인한테는 이 말이 좀 아프게 들리는 거 같아요. 그래도 옛것을 전부 버리라는 얘기는 아니어서 다행이었어요. 정도전 역시 옛 문헌을 근거로 삼았고, 판단 기준은 오래됐느냐보다 설명할 수 있느냐라고 하거든요.


맛보기로 한 대목만 옮겨볼게요.

"대안 없는 반대는 태클로 들린다. 대안이 있는 반대는 설계로 들린다. 같은 말을 해도 전자는 밀려나고 후자는 검토된다."

관행을 흔들고 싶다면 먼저 준비할 것은 용기가 아니라 대체안이라는 말이 뒤따르는데, 이 부분은 회사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 목차를 훑을 때는 솔직히 좀 긴장했어요. 세상의 목을 베고 새 판을 짜라, 무능한 리더를 허수아비로 세워라 같은 제목이 줄줄이 나오니까요.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센데, 목차까지 이러니 이거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런데 본문을 따라가 보면 문장이 의외로 차분합니다. 반론도 먼저 꺼내 놓고, 21세기에 왕조를 갈아엎으라는 조언은 무책임하다며 스스로 선을 긋기도 해요. 읽다가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게 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미리 말해 두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센 제목에 한 번 놀라고, 본문에서 한 번 더 찔리는 셈이랄까요.


판형은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크기이고, 두께도 보통 인문서보다 가뿐한 편이에요. 그래도 한 번 읽고 꽂아 두기엔 아까운 책입니다. 곳곳에 "당신은 지금 어느 쪽인가" 하고 묻는 질문이 박혀 있어서, 회사에서 일이 꼬일 때마다 다시 펼쳐 볼 만하거든요. <한국철학전집> 앞 권들과 나란히 꽂아 두면 책장이 제법 든든해질 것 같아요.


9월도 오늘로 끝이네요. 가을바람이 선선해지니 저도 뭔가 하나쯤은 바꿔 보고 싶어집니다. 책에서 권한 대로 책상 방향부터 슬쩍 돌려볼까 하는데, 돌렸다가 부장님 자리랑 정면으로 마주치면 판이 통째로 깨질 수도 있으니 방향은 좀 더 궁리해 보려고요.

좋은 책 한 권 덕분에 한 주의 허리가 꼿꼿하게 펴진 기분입니다.


좋은 사람 하나를 기다리지 않고, 좋은 사람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판을 짠 정도전의 방식을 오늘의 사무실로 옮겨 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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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머무는 마음 - 시가 피어나고 그림이 머무는 자리
나태주 지음, 나난 그림 / OTD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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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미운 건 없어? 그럼 됐어. 9월 끝자락에 만난 <오래 머무는 마음>


잘 잤어? 아침 햇빛은 눈부시고? 미운 건 없어?

시집을 열면 앞쪽에서 이런 안부가 먼저 기다리고 있더군요. 나태주 시인의 (아침 인사)는 몇 가지를 묻고 나서 "그럼 됐어 / 오늘도 / 잘 살기 바래"로 끝납니다. 미운 게 없으면 됐다는 기준이 소박해서 도리어 마음이 탁 풀리는 거 같아요. 부장님 결재보다 훨씬 통과하기 쉬운 기준이라 더 반갑기도 하고요.


오늘 이야기할 책은 <오래 머무는 마음>이에요. 풀꽃시인 나태주의 시와 윈도 페인팅 아티스트 나난의 그림을 한 권에 엮은 시화집이고, OTD에서 나왔습니다. 서평단을 하면서 새 책 오는 날이 기다려지게 됐는데, 이번 책은 표지부터 온통 분홍이더라고요.

결이 느껴지는 분홍 바탕 한가운데 큼직한 꽃 두 송이가 있고, 초록 잎과 노란 해, 구름 자락이 그 둘레를 채우고 있어요. 양장이라 손에 쥐면 단단하고, 판도 보통 시집보다 넉넉해서 그림 보는 맛이 있습니다. 아재가 들고 다니기엔 색이 좀 수줍긴 한데, 제목에 마음이 들어가 있으니 봐주기로 했어요.


그림이 놓이는 방식이 이 책만의 재미 같아요. (봄밤) 옆에서는 노란 새 두 마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나란히 앉아 있고, (꽃향기)에서는 나비 한 마리가 페이지 구석에 살짝 내려앉아 있어요. 시가 적힌 면 뒤로 그림 윤곽이 연하게 비치는 장도 많습니다. (꽃다발) 곁의 그림은 이름은 꽃다발인데 생긴 건 꼭 한 그루 나무 같았어요. 굵은 초록 줄기가 기둥처럼 올라가고, 분홍 데이지와 붉은 백합, 보라색 종 모양 꽃이 가지처럼 뻗어 있거든요. 나난 작가는 작업 노트에 "그림이 시보다 앞서거나 더 많은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라고 적었는데, 정말 그림이 시 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꽃다발)은 이렇게 짧아요.

"마음을 보여줄 수 없어 / 꽃을 보여주고 // 마음을 줄 수 없어 / 꽃다발을 드리니 // 부디 거절하지 /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두 줄이 참 사람 냄새 나더라고요. 꽃다발을 내밀면서 괜히 눈길을 피하는 얼굴이 그려지는 거 같고요. 이 나이쯤 되니 꽃 한 다발 사 들고 가는 게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압니다.


키 큰 애들 향기, 키 작은 애들 향기.

(꽃밭 옆)에서는 하얀 꽃들이 "반가워요", 붉은 꽃들이 "좋아요" 하고 인사를 건네요. 그러면 시인도 "그래 그래 / 그래"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저도 하루에 고개를 꽤 여러 번 끄덕이는 편인데, 이렇게 절로 나오는 끄덕임은 언제 해 봤는지 모르겠어요.

1장이 꽃 이야기라면 2장부터는 그 자리에 사람이 들어섭니다. (오랜 사랑)은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고 바다는 변하여 물이 되는데, 사람의 마음과 우리의 사랑은 무엇이 되느냐고 두 번 물어요. 두 질문 사이에는 밤새워 우는 새, 아침 이슬, 기와집 처마 끝에 걸린 초승달, 더러는 풍경소리 같은 장면만 놓여 있고요. 쉬운 답은 끝까지 내놓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그 풍경들이 답인가 싶다가도, 또 아닌 거 같기도 하고.


2장에서 읽는 속도를 일부러 늦춘 시는 (옆 사람)이었어요. 하늘길 가던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옆으로 왔나 보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네게서 하늘 냄새가 나겠느냐고 합니다. 사막에 핀 꽃송이가 바람 따라 왔나 보다고, 그래서 마른 모래 냄새가 나는 거라고도 하고요. 그러고는 옆 장에 "목이 마르다 / 졸음이 오려고 한다 / 어깨를 좀 빌려다오 / 기대어보자."가 이어집니다. 별과 꽃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목마르고 졸리니 어깨 좀 빌리자는 데까지 가니까, 오래 곁에 있어 온 사람한테 하는 말처럼 들렸어요. 그림에는 주황 꽃과 노란 꽃 두 송이가 금빛 구름 무늬 위에서 서로 기대듯 겹쳐 있는데, 시랑 참 잘 맞아서 좋았습니다.


(우리가 마주 앉아)도 비슷한 결이에요. 마주 앉아 웃으며 이야기하던 나무에 둘의 숨결과 웃음소리가 스며서, 그 자리를 떠나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은 뒤에도, 해마다 봄이면 나무가 그 소리를 되받아 "싱싱하고 푸른 새잎으로 피울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시 끝에는 남색 가지 위에 분홍 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어요. 제가 잊어버린 웃음소리들도 어딘가에서 새잎이 되고 있을까요.

(마지막 기도)는 조용히 읽게 되는 시예요. 사랑하는 마음이 언젠가 미움으로 변할까 걱정되니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바로 이어서 그를 사랑했던 마음이 오래 후회될까 걱정되니 어떤 경우에도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빕니다. 두 부탁이 서로 반대쪽을 보는 것 같은데, 읽고 나면 결국 한 사람을 향한 같은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맞은편 그림에서는 붉은 분홍 붓질이 둥글게 감싸 도는 가운데 모은 두 손이 노란 꽃 한 송이를 받쳐 들고 있어요.


솔직히 뜨끔했던 줄도 있어요. (너무 외로워 마세요)에서 다른 사람들이 섭섭하게 대하면 "오히려 /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섭섭하게 / 대해주지 않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라고 하거든요. 회사에서 서운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오르는데, 그중 몇 개는 제가 먼저 서운하게 한 건 아니었나 싶어지더군요.

위로받으러 들어갔다가 한 대 맞고 나온 기분이랄까요.

그래도 같은 시에 "지금 당신의 일로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마세요"라는 줄이 바로 붙어 있어서, 찔린 데를 금방 다독여 줍니다. "모든 좋은 일에 끝이 있듯이 / 아무리 어려운 일 어두운 일에도 /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음을" 믿으라는 대목은 월요병을 달고 사는 직장인한테 꽤 쓸모 있는 문장이에요. 가끔은 발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과 바람을 느껴 보라는 권유도 이어지고요.


3장으로 넘어가면 계절이 가을 쪽으로 기웁니다. (낙엽처럼)은 이별 인사도 여러 번, 사랑 고백도 여러 번, 아픔과 아쉬움이 마음에 남지 않을 때까지 하고 나서, 끝내 헤어질 때는 가볍게 손을 흔들자는 시예요. "호숩게 호숩게 / 안녕 안녕 / 다만 사랑해서 좋았단다." 호숩게라는 말이 입에 착 붙어요. 끝면에는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 갈색 잎 세 장이 데굴데굴 굴러가듯 그려져 있습니다.

(시계 선물)은 시계를 드리고 싶다고, 그 시계를 보며 오래오래 나를 생각해 달라고 말을 꺼냈다가 "아닙니다 / 나 없는 세상에서도 / 오래오래 잘 살아달라고."로 말을 바꿔요. 선물에 담는 마음이 여기까지 갈 수 있구나 싶었어요. 그 옆의 (바람 부는 날)은 더 짧습니다. "당신이 곁을 / 지켜주시어 // 덜 흔들릴 수 / 있었습니다 // 고맙습니다." 그림이 시의 곁을 조용히 지키기를 바랐다는 나난 작가의 말과 이 시가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책 끝의 작업 노트도 그냥 넘기기 아까웠어요. 나난 작가는 "제게 꽃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건네는 방식이며, 말로 다 담지 못한 감정을 대신 전하는 또 하나의 언어입니다"라고 씁니다. 2년째 수련하고 있는 미술치료 현장에서 사람들이 말로 다 꺼내지 못한 마음을 꽃과 자연에 조용히 맡기곤 했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부업으로 비단 위에 꽃 자수를 놓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한 땀 한 땀 수놓인 꽃들이 자기 삶의 씨앗이 되었다고 적은 대목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니 책 속 꽃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거 같아요.


<오래 머무는 마음>은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해도 그 칸만 봄 같은 책이에요. 꽃다발 대신 누군가에게 건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꽃다발)의 마지막 두 줄을 쪽지에 적어 끼워 주면 딱일 거 같습니다. 시가 짧고 그림이 숨 돌릴 틈을 만들어 줘서, 퇴근하면 유튜브부터 켜던 예전의 저 같은 사람도 부담 없이 따라갈 수 있는 호흡이더라고요.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9월 마지막 주 수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어요. 이 책의 계절은 봄꽃에서 출발해 낙엽까지 한 바퀴를 도는데, 지금이 딱 그 끝자락이라 더 잘 맞는 거 같습니다.

수요일이 원래 이렇게 화사한 요일이었나 싶네요.


내일 아침엔 누구한테든 "잘 잤어?" 한마디 먼저 건네고 싶어지는, 다정한 책을 만나 흐뭇했습니다.


봄꽃에서 낙엽까지, 나태주의 시 곁을 나난의 그림이 조용히 지켜 주는 다정한 시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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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맛
손미주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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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카레 한 솥에 첫 출근이, 갈치 한 토막에 할머니가 담긴 음식 에세이 <기억의 맛>


노란 표지 위에 한 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카레라이스, 함박스테이크, 떡볶이, 주먹밥, 아이스크림 파르페에 거품 소복한 맥주 한 잔까지요. 표지만 보고 배가 고파지는 책은 참 오랜만인 거 같아요.

제목은 <기억의 맛>입니다. 요즘 제 기억력이 좀 맛이 간 상태라 제목부터 살짝 찔리더라고요.

막상 펼쳐 보면 맛집 안내서나 레시피 모음과는 결이 꽤 다릅니다. 한 사람이 살면서 삼켜 온 끼니를 하나씩 꺼내 놓고, 그 음식이 언제부터 어떤 사연으로 우리 식탁까지 왔는지를 쫓아가는 책이더군요.


재미있는 건 꼭지마다 이야기가 두 겹으로 들어 있다는 점이에요. 앞쪽에는 손미주 작가의 아주 사적인 기억이 있고, 뒤쪽에는 '메뉴판 비하인드'라는 코너가 붙어서 그 음식이 걸어온 내력을 풀어 줍니다. 할머니 부엌 얘기에 푹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일본 해군 급식이나 조선시대 문헌 얘기를 듣고 있는 식이죠. 처음엔 넘어가는 게 조금 낯설었는데, 몇 꼭지 지나고 나니 이 리듬이 은근히 기다려졌습니다.


에세이 한 편에 역사 한 토막이 덤으로 따라오는 셈이에요.

첫 꼭지 (시작의 맛, 카레)는 발령을 받고 자취를 시작한 첫날 밤에서 출발해요. 부모님이 사 주신 살림살이를 들여놨는데도 원룸은 텅 비어 보이고, 그토록 바라던 자유인데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리고 어깨가 무거웠다고 합니다. 전세금은 매달 나눠서 엄마에게 부치기로 하고, 관리비랑 생활비를 떼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남는 돈이 생각보다 적었다는 대목에서는 제 신입 시절 통장이 겹쳐 보였어요. 월급날 계산기 한 번 안 두드려 본 직장인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어요.


할 줄 아는 요리는 라면, 계란 후라이, 된장찌개 정도. 그래도 첫 끼만큼은 제 손으로 해 먹겠다며 마트로 가는데,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그래야만 하니까." 이 짧은 문장이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어요. 감자 세 개, 당근 한 개, 큰 양파 한 개를 썰어 넣었더니 혼자 사는 이십 대 여자가 먹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이 돼 버렸고, 결국 점심도 저녁도 다음 날 아침도 카레였다고 해요. 그렇게 꾸역꾸역 삼킨 카레만큼 통장 잔고가 불어나는 게 안심이 됐다는 고백에서는 웃다가도 마음 한쪽이 찡하더라고요.


"내게 카레는 시작의 맛이다. 초년생의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맛.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 같던 어리숙한 신규 교사의 눈물 맛."

교사가 아니어도 첫 출근을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아들을 말 같아요. 지금은 워킹맘이 되어 아이들 입맛에 맞춰 고기 반, 채소 반으로 끓인다는데, 둘째가 "엄마, 또 카레야?" 하고 투정 부리는 장면까지 이어지니 한 사람의 세월이 카레 한 솥에 다 담긴 느낌이 들더군요.

메뉴판 비하인드로 넘어가면 맛이 확 달라집니다. 일본에서 카레라이스가 국민 음식이 된 데는 흰쌀밥만 먹던 병사들이 각기병에 시달린 사정이 있었고, 커리 분말에 밀가루를 더해 걸쭉하게 만든 게 지금의 일본식 카레가 됐다는 얘기까지는 흥미롭게 읽었어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 병사들이 먹은 쌀이 어디서 왔는지 따라가 보면 한반도가 나와요. 1939년 조선미곡통제령으로 수확한 쌀의 3분의 2가량을 빼앗겼고, 흔히 아는 보릿고개 풀뿌리 이야기도 일제강점기 이후에 생긴 일이라고 하니 한동안 멍했어요. 저자는 이 대목에서 "입맛이 절로 씁쓸해진다"고 썼는데, 제 마음도 딱 그랬습니다.


앞으로 카레를 예전처럼 마냥 편하게만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른 꼭지보다 속도를 늦춰 가며 읽은 건 3부의 (갈치를 발라주는 시간)이었어요.

저자는 스스로를 '갈치 발골사'라고 부릅니다. 가시를 유독 겁내는 첫째를 위해 가장자리에 뼈가 남았는지 한 번 더 훑고 나서 아이 수저 위에 살을 올려 주는데, 발라내는 속도보다 아이들이 먹어 치우는 속도가 빨라서 마음이 급해진대요. 아이들이 다 먹고 나서야 남은 한 토막을 천천히 자기 입에 넣는다는 문장이 참 좋았습니다. 남편은 옆에서 "지들이 발라먹게 내버려둬"라고 한마디 한다는데, 영 틀린 말도 아니라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그런데도 성가시고 귀찮아도 발라 주고 싶은 그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는 곧바로 나와요.


부산의 할머니는 기름에 튀기듯 바싹 구운 갈치를 접시에 탑처럼 쌓아 내오셨대요. 손녀가 뒤늦게 "할머니도 드세요" 하고 내밀면 "니 많이 묵으라" 하며 고개를 저으셨고, 이미 식사하셨다며 먹는 모습만 오래도록 바라보셨다고 해요.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더 갖다 줄꾸마" 하며 기어이 살을 발라 입에 넣어 주던 분이었죠. 엄마와 얼굴을 맞대고 나눴다는 대화도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내가 구우면 이렇게 안 되는데, 할머니가 구우면 이래 바삭하게 잘 구워진다. 이상하재."

이상한 게 아니라 할머니니까 그런 거겠죠.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제일 먹고 싶던 음식도 갈치구이였대요. 그런데 생선구이 식당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조금만 더 구우면 과자가 될 것처럼 바싹 구운 그 맛은 없었다고 해요. 참다 못해 한달음에 부산으로 내려가니 할머니가 만삭의 손녀를 꼭 안아 주셨고,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몰라요" 하며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거 같았어요.


할머니에게서 저자에게로, 다시 저자에게서 아이들에게로 넘어가는 게 거창한 말씀이 아니라 가시 발라 주는 손길이라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갈치 편의 메뉴판 비하인드도 알차요. 갈치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지느러미만 살랑거리며 서서 헤엄친다는 것도, 칼을 닮은 생김새처럼 성질도 사나워서 먹이가 모자라면 동료까지 잡아먹는다는 것도, 1960년대까지는 동네 아이들이 말린 갈치를 껌처럼 씹고 다녔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서민 생선이 어쩌다 '금갈치'가 됐는지 유통 구조와 남획 얘기로 이어지는 부분도 흥미로웠고요. 조상들이 오늘날 갈치 가격을 보시면 놀라 자빠지실지도 모른다는 문장에는 마트 생선 코너 가격표 앞에서 멈칫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거 같습니다.


4부 (시간을 삶아낸 한 그릇, 수제비)는 반갑게 시작했다가 조용히 가라앉는 꼭지였어요. 주 6일제로 수업받던 시절, 토요일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멸치 다시 국물 냄새가 솔솔 나고 할머니가 "내 강아지 어서 온나. 퍼뜩 끓여줄게" 하며 맞아 주셨대요. 어린 저자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TV를 켜고 (출발, 비디오 여행)부터 봤고요. 토요일 오전 수업 마치고 집으로 뛰어가던 그 공기는 저희 또래라면 다들 아는 풍경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단정하게 빗은 뽀글 머리, 은은한 로션 냄새, 반짝이 장식 티셔츠에 몸빼바지. 할머니 모습이 어찌나 또렷하게 그려지는지 우리 동네 어느 집 할머니를 보는 거 같았어요.


어른이 되어 고향을 떠난 뒤로 저자는 그 맛을 찾아 다녔다고 해요. 들깨 수제비, 된장 수제비, 메밀수제비, 감자수제비, 해물 수제비까지 먹어 봤지만 심심한 듯하면서 계속 국물을 들이켜게 만드는 할머니 손맛은 어디에도 없었대요. 어쩌면 자기가 찾던 건 그 맛을 건네주던 할머니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고백이 이어지고, 살아 계시는 동안 제대로 된 밥 한 끼 대접해 드리지 못한 철없는 마음이 자꾸 수제비 한 그릇을 불러냈는지도 모르겠다는 문장이 그 뒤를 따라요.


이 꼭지의 메뉴판 비하인드에는 전쟁 뒤 원조 밀가루 얘기가 나오고, 음식점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한 '쌀 없는 날'과 선생님이 도시락에 잡곡을 섞었는지 검사하던 시절 얘기도 나옵니다. 할머니 수제비에 들어간 멸치 국물이 전국으로 퍼진 것도 1960년대 후반보다 더 뒤의 일이라니 신기하더군요. 저자는 수제비를 "우리가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조용히 기억하는 음식"이라고 불러요. 2부에 실린 (특별하진 않지만 충분한 한 잔, 믹스커피)에서 "완벽하지 않지만 충분한 것들로 버텨나가는 것"이라는 문장을 봤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탕비실 믹스커피 한 봉지로 오후를 버텨 본 직장인한테는 남 얘기 같지 않은 문장이에요.


에필로그를 보면 이 책은 아주 개인적인 그리움에서 시작됐다고 해요. 쓰다 보니 오래 열고 싶지 않던 기억까지 마주하게 됐고, 어떤 장면은 차마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지웠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하고요. 목차에 (에이스, 수치심의 맛) 같은 제목이 끼어 있는 걸 보면 예쁜 추억만 골라 담지는 않았다는 게 느껴집니다. 친구들이 뒤에서 수군거린 날에도,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은 날에도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밥상을 차려 주셨다고 해요.


"많이 묵어라." 그 한마디 뒤에 얼마나 많은 말이 숨어 있었는지 이제는 안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저자는 할머니가 음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자신은 음식에 대해 쓰는 것으로 그 사랑에 답하고 싶었다고 해요. <기억의 맛>을 다 읽고 나니 이 책 전체가 "많이 묵어라"에 대한 긴 답장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솔직히 걸렸던 건 딱 하나예요. 읽는 내내 배가 고픕니다. 카레 꼭지에서는 카레가, 갈치 꼭지에서는 바삭한 갈치 껍질이, 수제비 꼭지에서는 멸치 국물 냄새가 계속 아른거려서 꽤 곤란했어요.

판형이 아담하고 두께도 보통 에세이만 해서 들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어요. 그런데 뒤쪽에는 백여 건이 넘는 참고 문헌이 붙어 있고, 각주도 백이십 개가 넘는다고 하더라고요. 책장에 꽂아 두고 그날 먹은 음식 꼭지만 골라 다시 펼쳐 봐도 좋을 거 같습니다. 할머니 밥상이든 엄마 밥상이든, 누군가 차려 준 밥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면 어느 꼭지에선가 자기 얘기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9월 끝자락,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화요일이에요. 이런 날엔 뜨끈한 국물이 당기는데, <기억의 맛> 덕분에 오늘 저녁 메뉴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말보다 제가 먼저 살찌게 생겼어요. 누가 차려 준 밥 한 끼 든든하게 얻어먹은 것처럼 속이 따뜻해진 기분입니다.


카레 한 솥, 갈치 한 토막, 수제비 한 그릇 뒤에 숨은 할머니의 사랑과 우리 식탁의 역사를 함께 떠먹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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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7급 - 한자의 기초를 쫀득하게 붙잡다 ㅣ 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문해력한자연구회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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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재가 펼쳐 본 초등 한자책, 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7급 서평


표지를 처음 받아 들었을 때는 떡집 신메뉴 안내문인 줄 알았어요. '쫀득'이라는 글자가 워낙 큼지막하게 박혀 있어서요. 노란 제목 위에 토끼와 곰돌이가 앉아 있고 연필을 타고 날아오르는 아이까지 있으니, 누가 봐도 초등학생 책입니다. 그런데 오십을 코앞에 둔 아재가 이 책을 펼쳐 놓고 입 구, 눈 목을 따라 읽다가 제법 재미를 봤다면 조금 궁금해지지 않으세요?


<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7급>은 시원스쿨닷컴에서 나온 초등 한자 급수 대비서예요. 7급 50자를 다룹니다. 먼저 8급 한자 30자를 복습하며 몸을 풀고, 이어서 7급 신출한자 20자를 하루 한 글자씩 5주에 걸쳐 익히는 흐름이더라고요. 1주는 신체, 3주는 위치처럼 주마다 주제가 묶여 있어서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헷갈릴 일은 없을 거 같아요.


하루치 구성도 단정한 편입니다. 한자의 생김새를 이야기와 그림으로 이해하고, 따라 쓰고, 한자어를 문장 속에서 읽고, 빈칸을 채워 문장을 완성하는 네 단계예요.


이 책만의 맛은 첫 단계에 몰려 있는 느낌이 들어요. 口는 "'아' 하고 크게 벌린 입 모양을 보고" 만든 글자라고 설명하고, 目은 동그란 눈동자와 위아래 눈꺼풀을 본떴다고 보여 줍니다. 手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편 손 모양이고요. 실제 입과 눈 모양이 한자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화살표로 차근차근 이어 놓아서, 설명을 다 읽기도 전에 그림만 보고 먼저 알겠더군요. 한복 입은 도령과 아씨 캐릭터가 손가락을 치켜들고 설명해 주는 모습도 귀여웠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10일 차 外, 바깥 외였습니다.


달이 뜬 밤, 등불을 든 아이들 옆에서 어른 한 분이 점을 치는 그림이 나와요. 설명은 이렇습니다. "아침에 치던 점(卜)을 원칙과 다르게 저녁(夕)에 친다고 해서 '밖, 바깥'이라는 의미가 생겼어요." 외출, 외식, 해외를 그렇게 쓰고 살면서도 이 글자 안에 저녁 점 이야기가 들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원칙에서 벗어난 일이 곧 바깥이라는 발상이 오래된 글자치고 꽤 사람 냄새가 나는 거 같더라고요.


예외가 곧 바깥이라니.


회사에 다니다 보면 원칙대로 안 되는 일이 매일같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조금씩 바깥으로 나가 있는 셈인가 싶기도 하고요. 바로 앞 9일 차 內는 테두리 안으로 사람이 쏙 들어가는 모습이고, 11일 차 出은 땅을 뚫고 새싹이 고개를 쑥 내민 모습입니다. 세 글자를 이어서 보면 들어가고, 나가고, 싹이 트는 작은 이야기 한 편 같기도 했어요.


한자어 예문에서는 어른 눈이 자꾸 멈추는 곳이 있었습니다. 內外를 설명하는 예문이 "발표는 3분 내외로 준비하면 돼요"인데, 회의실에서 3분 내외라던 발표가 정말 3분 안에 끝나는 건 거의 못 봤거든요. 手下 예문 "이순신 장군은 수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에서는 팀원들 말을 끝까지 들었었나 싶어 괜히 뜨끔했고요.


솔직히 걸렸던 단어는 名目이에요. 뜻풀이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이고, 예문은 달리기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운동장을 뛰어다녔다는 문장입니다. 어른 세계에서 명목이라고 하면 어쩐지 속사정이 따로 있는 말처럼 들리잖아요. 그런데 아이 문장 속 명목은 그저 신나게 뛰어놀 핑계라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같은 단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온도가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싶더군요.


중간중간 나오는 동그란 얼굴 캐릭터들도 정이 갑니다. 안경 쓴 친구가 "이렇게 '口'는 '입'을 뜻하고, '구'라고 읽어요!" 하고 한 번 더 정리해 주고, 페이지 구석에서는 다람쥐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어요. 문제를 끝낼 때마다 별을 색칠하는데, 별 네 개면 "야호! 오늘 한자 공부 완료!"라는 칭찬이 기다립니다. 세 개면 몰랐던 문제만 복습하고, 두 개 이하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식이고요. 아이가 오늘 공부를 어디까지 했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짜 놓은 거 같아요.


"아하 이거구나!"라는 작은 코너도 좋았습니다. 첫날 口를 배우면서 耳目口鼻를 살짝 보여 주는데, 이 이목구비가 뒤쪽 사자성어 쓰기 연습에서 다시 나와요. 앞에서 한 번 스쳐 본 말을 뒤에서 또 만나게 해 놓은 배치가 은근히 친절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자성어 연습 쪽에는 산전수전, 우왕좌왕, 소탐대실 같은 말들이 줄지어 있어요. 산전수전의 뜻풀이가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모두 겪었음을 이르는 말"인데, 초등학생이 이 말을 또박또박 따라 쓰는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더라고요. 따라 쓰는 건 아이인데 뜻이 몸으로 와닿는 쪽은 아무래도 중년이니까요. 우왕좌왕 풀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이라니, 월요일 아침 사무실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줄 알았습니다.


그 바로 뒤에는 溫故而知新 한 구절만 크게 넣은 페이지가 있어요. "배운 것을 다시 익히면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어요." 8급 복습으로 시작해 7급으로 넘어가는 이 책의 흐름과 딱 맞는 문장이라, 일부러 이 자리에 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마지막 셋째 도전은 출제 예상문제입니다. 한 회에 25문항씩 15회분이 들어 있고, 그림을 보고 한자를 고르는 문제부터 밑줄 친 어휘를 한자로 바르게 쓴 것을 고르는 문제까지 유형이 다양해요. 재미있었던 건 본문에서 익힌 문장이 문제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이에요. 2일 차에 배운 五目의 뜻을 묻는 문제가 나오고, 3일 차에 나온 목수는 "목수가 나무를 다듬어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다"는 문장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공부한 게 시험장까지 이어진다는 걸 아이도 금방 알아챌 거 같아요.


소장 가치로 보면 챙겨 주는 게 꽤 많습니다. 날마다 QR로 들을 수 있는 한자 챈트송이 있고, 선정한자와 빈출 한자어를 모은 브로마이드도 있어요. 많은 부모님이 막막해하신다는 OMR 답안 작성법은 가이드 영상과 연습용 답안지로 익힐 수 있고, 교사·학부모용 지도 가이드 PDF도 따로 제공한다고 해요. 한자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와 그 옆에 앉아 봐 줄 어른 모두에게 <쫀득 대한검정회 한자 7급>은 든든한 짝이 될 것 같습니다. 저처럼 한자를 대충 눈치로 읽어 온 어른이 들여다봐도 얻어 가는 게 쏠쏠했고요.


책장을 넘기다 보면 평소 무심히 쓰던 출구, 입구, 외식 같은 말들이 달리 보여요. 저마다 벌린 입 모양이나 새싹, 저녁 점 이야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흔한 단어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9월의 마지막 화요일,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出 자 속 새싹은 봄 이야기지만, 가을에 새로 뭔가를 시작해도 늦지 않겠다는 기분이 드는 걸 보면 이 책 덕분에 제 마음에도 싹 하나가 쏙 올라온 거 같아요. 좋은 책 만나서 기분 좋은 한 주의 시작입니다.


예상문제 끝마다 적혀 있던 인사를 빌려 볼게요. 오늘 하루도 다들 手고하셨습니다.


입 모양, 눈꺼풀, 저녁에 치던 점까지 한자마다 담긴 생김새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7급 50자가 쫀득하게 붙어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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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자의 시대 - 사건에 휩쓸리지 않고 구조를 읽는 법
김준현 지음 / 어깨위망원경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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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사람이 바뀐 걸까, 판이 바뀐 걸까? 김준현 <해석자의 시대> 서평


9월도 마지막 주에 들어섰네요. 화요일이면 한 주가 겨우 시동이 걸리는 날인데,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서 긴팔부터 찾게 됩니다.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지기 쉬운 환절기에 결이 참 좋은 책을 만난 거 같아요.


표지를 펼치기도 전에 커다란 카메라 렌즈 하나가 정면에서 이쪽을 빤히 쳐다봅니다. 그 위로 "왜 세상은 이토록 어지러운가?"라는 문구가 떡하니 얹혀 있고요. 뉴스 몇 꼭지만 넘겨 봐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요즘이라, 이 질문에 대답해 보겠다는 책이면 손이 먼저 가더라고요. 렌즈가 워낙 커서 들고 있으면 제가 찍히는 기분인데, 다행히 초상권 청구서는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해석자의 시대>는 세상을 11개의 층으로 잘라서 들여다보는 책이에요.


세계, 감각, 지식, 과학, 기술, 경제, 문화, 법, 정치, 권력, 판단.


아래층이 위층의 가능성을 먼저 깔아 주고, 그 위로 차곡차곡 올라가는 단면도입니다. 층마다 붙은 한 줄 설명이 꽤 맛깔나요. 감각은 "오감이라는 좁은 창문"이고, 문화는 "우리는 원래 이렇게 산다"는 기본값이고, 권력은 "누가 케이크를 자를 것인가"라는 분배의 룰이라고 하죠. 케이크가 나오니 딱딱한 권력 얘기가 괜히 동네 생일잔치처럼 들리기도 하고요.


정치는 평론가가, 경제는 경제학자가, 문화는 비평가가 따로따로 말하는 세상이 있죠. 저자는 이걸 "각자의 방송국이 각자의 주파수만 송출하는 셈"이라고 표현합니다. 정보가 산더미처럼 쌓여도 지도가 없으면 길을 찾을 수 없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그래서 독자에게 '구조적 렌즈'를 건네고 싶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표지의 커다란 렌즈가 이해되더군요. 멋 부리려고 박아 둔 그림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오래 관찰하고, 책을 읽고, 여러 개념을 연결해 보고, 추론하기를 즐기는 사람일 뿐이라고 소개해요. 거창한 직함을 늘어놓지 않으니 오히려 귀가 솔깃해집니다. 이런 시선이 생긴 계기도 책 세 권이었대요. 리처드 탈러의 <넛지>는 인간이 정말 자유롭게 선택하는지를 물었고, 로렌 슬레이터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인간이 자기 마음의 주연인지를 물었대요. 유현준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도시가 왜 하필 이런 모양인지를 물었고요. 식당 메뉴판의 순서, 스마트폰의 기본값, 골목의 너비 같은 이야기는 결국 한 문장으로 모입니다. "배치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요즘 서평단을 하면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 책 저 책 받아 읽는 입장이라, 이 대목이 은근히 부럽고 반가웠어요. 따로따로 읽은 책들이 어느 날 한 줄로 꿰어진다니, 책 읽는 사람한테 이만한 보상이 또 있을까 싶더라고요.


프롤로그 한쪽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장소에서 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하루가 그려져요. 거대한 톱니바퀴 속 부품,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흘러가는 제품.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한테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죠.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저자의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맴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 어떤 변화는 세상을 통째로 뒤집고, 어떤 변화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는가.


맛보기로 하나 꺼내 보면, 이 책의 첫 사례는 동네 놀이터의 깍두기예요. 세발뛰기를 하다가 어린 동생이 끼워 달라고 하면 네 발까지 봐주던 그 규칙 말입니다. 이기는 게 목적이었다면 할 수 없는 선택인데, 그 시절엔 다 같이 노는 게 먼저였다고 하죠. 저자는 그때의 놀이 문화를 이렇게 요약해요. "완벽히 공정하진 않아도, 같이 놀 수 있으면 된다." 이 문장 하나로 골목 어귀 흙바닥이 눈앞에 그려지는 거 같았어요.


놀이가 온라인으로 옮겨 가면서 판이 바뀝니다. 판정은 시스템이 하고, 전적과 랭킹은 영구히 남고, 초보자는 팀의 승리를 갉아먹는 걸림돌이자 민폐가 돼요. 취업 이야기로도 이어지는데, 예전엔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전화 한 통으로 끝났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났어요. 지금은 합격자 스펙이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나와 그 사람의 차이가 숫자로 비교되죠. 저자는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커진 까닭을 세상이 더 잘 보이게 된 데서 찾더라고요.


저자도 처음엔 사람을 의심했다가 곧 세대를 의심했다고 털어놓아요. 요즘 MZ세대들은 이기적이야, 우리랑 달라. 회식 자리에서 한 번쯤 들어 봤을, 어쩌면 제 입에서도 나왔을 말이라 뜨끔했습니다. 사람이 바뀐 걸까, 판이 바뀐 걸까. 이 질문 앞에서 괜히 뒤통수를 긁적이게 되는 사람이 저 하나는 아닐 거 같아요.


<해석자의 시대>가 한 번 크게 방향을 트는 곳은 2부의 '역류' 장입니다. 앞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흐름이었다면, 여기서는 꼭대기의 정치와 권력이 물길을 거슬러 내려와요. 저자는 이걸 하류로 흐르면서도 곳곳에 소용돌이를 만드는 강물에 빗대더라고요. 규제를 두고는 브레이크이면서 핸들이고 도로공사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내면 책임을 누가 지는지, AI가 그린 그림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같은 질문에 답이 서야 기술이 달릴 도로가 깔린다는 거죠.


"법은 언제나 상처가 난 자리에 붕대를 감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뉴스에서 뒷북 행정 소리가 나올 때마다 혀만 차던 사람으로서, 이 문장 앞에서는 잠깐 말을 아끼게 되더라고요. 누군가 피해를 입고 나서야 법이 움직이는 게 꼭 누가 게을러서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청나라의 쇄국 정책과 20세기 후반 한국의 반도체·통신 투자를 나란히 놓은 대목도 있어요. 둘 다 위층에서 내려온 힘인데 결과는 정반대로 갈렸으니, 그 차이가 어디서 생겼는지 궁금해지고요.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곳은 3부의 AI 장이었어요. 저자는 AI의 출발점을 사람처럼 '생각'하는 데서 찾지 않고, 압도적인 확률로 '맞히기'를 하는 데서 찾습니다. 그렇게 분류하고 예측하고 결정하는 데 드는 '판단의 가격표'가 뚝 떨어지면, 노동이 짊어지던 두 가지 역할이 흔들린다고 해요. 하나는 소득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하며 사는가"라는 정체성이에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이 나이쯤 되면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하는 자기소개가 곧 회사 이름과 직함이잖아요. 일이 삶을 떠받치는 중심축이었다는 문장이 남 얘기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그 빈자리를 채울 후보로 이야기와 놀이를 꺼내 들어요. 이야기를 소비하는 인간 '호모 나랑스',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 드라마, 게임, 스포츠, 스트리밍, 밈, 팬덤까지 전부 여기에 들어간다고 하니 범위가 생각보다 넓습니다.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만 켜 놓다 잠드는 게 일과였는데, 요새는 새 책부터 집어 드는 쪽으로 바뀌었거든요. 이것도 제 나름의 놀이 찾기였나 싶어서 혼자 슬며시 웃었습니다.


AI 판사 이야기에 이르면 앞에서 만난 깍두기가 불쑥 다시 떠오릅니다. 같은 규칙을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보편성'의 체제와, 상황과 서사를 따지는 '맥락'의 체제가 맞서는 대목이에요. 저자가 든 비유가 참 알아듣기 쉬웠어요. "어린아이와 어른에게 똑같은 양의 밥을 제공하면 어른은 배가 고플 것이다."


놀이터에서 시작한 질문이 법정 문턱까지 걸어온 셈.


손익이라는 오래된 기준이 AI 앞에서 흔들린 뒤 그 자리에 무엇이 올라서는지, 저자가 내놓는 답은 의외로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더라고요. 그 답은 책에서 직접 만나시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 같습니다.


솔직히 걸렸던 건 제 쪽 사정이에요. 개념어가 촘촘하게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읽는 속도가 저절로 느려지는 편이었거든요. 그래도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천장 위의 얇은 실, 나무의 나이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다 숲이 불타는 걸 놓친다는 비유 같은 게 틈틈이 손잡이가 돼 줬어요. 덕분에 어렵다는 기분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두께는 보통 인문서보다 날씬한 편이라 출퇴근 가방에 넣어도 부담이 없어요. 11개 층을 한 줄씩 풀어 둔 부분은 뉴스가 뒤죽박죽으로 느껴질 때 펼쳐 보는 약도로 쓰기 좋겠더군요. <해석자의 시대>는 책장에서 손이 제일 잘 닿는 칸에 꽂아 두고 싶어요.


선선한 바람이 드나드는 9월 끝자락에, 머릿속에 엉켜 있던 전선을 한 가닥씩 풀어 본 기분이에요. 11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온 셈인데 다리는 멀쩡하고 머리만 운동한 느낌이랄까요. 쓸 만한 렌즈 하나 챙긴 가을이라 든든합니다.


골목의 깍두기에서 AI 판사까지, 사건 아래 깔린 판을 11층 렌즈로 읽어 보게 해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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