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기술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김옥림 지음 / 미래북(MiraeBook)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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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말솜씨는 목록에 없었다, 책사 15인에게 배우는 <설득의 기술>


회의실에서 "예스"를 말하는 쪽은 대개 직급이 낮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자기 참모 앞에서 무조건 "예스!"라고 하는 게 상책이었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책사 루이 하우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득의 기술>은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책이 되어버렸어요.


<설득의 기술>은 김옥림 작가가 동서고금의 책사 15인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책이에요. 중국에서는 제갈량, 순욱, 장량, 위징이 나와요. 서양에서는 루이 하우부터 조르주 퐁피두까지 다섯 사람, 우리나라에서는 을파소부터 박문수까지 여섯 사람이 등장합니다. 목차만 보면 역사 인물 열전 같은데, 장을 열면 흐름이 조금 달라요. 한 사람의 생애를 먼저 들려주고, 그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 방식을 첫째, 둘째, 셋째 하고 꼽아요. 그 사이사이에 어울리는 명언을 한 줄씩 끼워 넣는 식이거든요. 역사책과 자기계발서 사이 어디쯤에 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보통 자기계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라, 손에 들면 팔뚝이 먼저 설득당하는 거 같아요. 책장을 열기도 전에 이미 "예스"입니다. 그래도 열다섯 사람이 장별로 나뉘어 있어서, 마음 가는 인물부터 골라 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훌륭한 책사가 갖춰야 할 조건을 일곱 가지로 꼽아요. 지혜, 예지력, 판단력, 분석력, 논리력, 통찰력, 그리고 품격 있는 인품.

말솜씨는 그 목록에 없더라고요.

설득이라고 하면 저도 늘 말 잘하는 사람부터 떠올렸던 터라 이 목록이 꽤 신선했어요. 작가가 인용한 아이젠하워의 말도 한 번 더 읽게 되더라고요. "설득은 그를 계속 자리에 남게 하지만, 위협은 겁먹은 동안에만 머무르게 할 뿐이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 두 가지를 다 겪어 보게 되잖아요. 목소리 큰 사람 앞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나온 회의가 몇 번이었는지, 그렇게 정해진 일이 얼마나 갔는지.


서양 편 첫 장 (상대의 마음을 꿰뚫고 대응하는 소울 설득법)의 주인공 루이 하우는 처음부터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어요. 작은 키에 허약한 몸인데, 한번 마음먹은 일은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악바리였다고 해요. <뉴욕 헤럴드> 기자 시절에는 두 달밖에 못 산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현장을 뛰어다녔다고 하고요. 루스벨트가 주 상원의원 선거를 앞두고 장티푸스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자, 후보 없는 선거판에 뛰어들어 농민과 노동자를 공략해 당선시켜 버립니다. 선거 참모 드라마를 한 편 보는 거 같아서 이 부분은 읽는 내내 재미있었습니다.


마음에 남은 건 그다음 설명이었어요. 루이 하우는 감을 타고난 사람인데도 감에만 기대지 않았다고 해요. 자료와 사례를 모아 철저히 분석하고, 잘된 것은 더 잘되게, 잘못된 것은 왜 잘못됐는지 따져서 대안을 내놓았다는 거죠. 회의 자료 만드는 사람으로선 괜히 찔리더라고요.


다른 장보다 속도를 늦춰 읽게 된 건 루스벨트가 소아마비로 쓰러진 뒤의 이야기였어요. 루이 하우는 7년 동안 곁에서 그를 보살폈고, 루스벨트는 다리를 절면서도 다시 정계로 돌아옵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고 1년 뒤, 루이 하우는 병으로 눈을 감아요. 66년을 사는 동안 20년 넘게 한 사람을 위해 살았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더군요.

책은 이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설득을 '보디 설득법'이라고 불러요. 이름은 좀 낯선데 뜻은 금방 들어왔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행동은 말보다 강하다"를 7년이라는 세월로 증명한 사람이 있었던 셈이니까요. <설득의 기술>이 처세서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거 같아요.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루이 하우는 41세, 루스벨트는 30세였다고 해요. 작가는 11살 차이 나는 두 사람을 조선의 이항복과 이덕형에 빗대는데, 그 비유가 꽤 잘 맞는 거 같아요. 루스벨트는 루이 하우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다고 하니까요. 마흔 넘어 만난 사람과도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게, 중년 직장인 입장에서는 은근히 든든하게 읽혔습니다.


솔직히 걸렸던 대목도 있었어요. 루이 하우는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루스벨트에게도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다고 해요. 그럴 때 루스벨트는 무조건 "예스!"라고 하는 게 상책이었다는 거고요. 처음엔 이걸 설득법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었습니다. 회사에서 그대로 따라 했다간 곤란해질 게 뻔하니까요.


그런데 작가가 바로 뒤에 붙여 놓은 한 문장.

"사실 대개의 직설적인 표현은 사심이 없는 충언일 때가 많다."

7년의 보살핌과 20년의 헌신이 먼저 쌓여 있었으니, 루스벨트도 그 거친 말을 받아낼 수 있었겠구나 싶더라고요. 결국 순서의 문제 같아요. 신뢰가 먼저고, 직언은 그다음.

우리나라 편으로 넘어오면 분위기가 또 달라집니다. (문무를 겸비한 지략과 믿음의 설득법)의 주인공은 신라 진흥왕의 책사 거칠부예요. 내물마립간의 5대손인 왕족인데, 어려서 큰 뜻을 품고 승려가 되어 백제와 고구려를 다니며 그곳 사람들의 삶과 나라 구석구석을 살폈다고 해요. 승려가 된 이유도 다니기 수월해서였다는 설명이 붙어 있어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고구려에 잠입해 혜량법사의 설법을 듣던 거칠부에게, 어느 날 법사가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어요.


"그대는 어디서 왔는고?"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도는 가련한 인생일 뿐입니다." "사실대로 말해보거라."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끝내 신라에서 왔다고 털어놓자, 혜량법사는 밤에 그를 선방으로 불러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어서 신라로 떠나라고 일러줍니다. 관상을 보니 크게 될 사람이니, 훗날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오거든 자기를 해치지 말아 달라는 약조와 함께요. 짧은 문답인데 사극 한 장면 같더라고요. 이 약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는 쪽이 훨씬 재미있을 거 같아요.

작가가 꼽은 거칠부의 첫 번째 설득법은 발로 뛰며 쌓은 정보예요.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 주면 상대는 그 고마움에 함께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먼저 교류를 청하게 된다는 설명이 이어지는데요. 회사에서도 결국 사람이 모이는 쪽은 뭔가 아는 사람 쪽이더라고요. 묻기도 전에 필요한 걸 먼저 챙겨 주는 선배가 어디든 한 명쯤은 꼭 있잖아요.


세 번째로 꼽은 문무 겸비 대목에서는 실력을 '그 사람만의 라이선스'라고 표현해요. 실력을 갖춘 사람은 훈장 노릇을 해서라도 밥은 먹고 살았다는 대목에선 괜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명함에 박힌 직함은 언젠가 내려놓아야 하지만, 몸에 붙은 실력은 끝까지 따라온다는 얘기로 들렸거든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런 문장은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두 장에 똑같이 컴퓨터가 나온다는 점이었어요. 루이 하우 장에서는 그의 머리가 컴퓨터처럼 작동했다고 하고, 거칠부 장에서는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 작동되지 않는 컴퓨터와 같다고 하거든요.


한 대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한 대는 전원도 안 켜진 채.

그 사이에 끼워 둔 조 카를로조의 말이 요즘 제 처지랑 딱 맞아서 반가웠어요. "날마다 한 가지씩 새로운 것을 배우면 경쟁자의 99퍼센트를 극복할 수 있다." 퇴근하면 유튜브만 틀던 사람이 서평단 하면서 새 책 오는 날을 기다리게 됐으니까요. 99퍼센트까진 몰라도 어제의 저 정도는 이기고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전원 안 켜진 컴퓨터로 남지 않으려면, 읽은 걸 써먹는 데까지 가 보고 싶고요.

<설득의 기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어도 좋지만, 손 닿는 데 꽂아 두고 필요할 때 한 사람씩 꺼내 보기 좋은 책 같아요. 중요한 보고를 앞두고 말이 자꾸 겉도는 거 같을 땐 루이 하우 장을, 뭘 알아야 할지 막막할 땐 거칠부 장을 펴 보는 식으로요. 장마다 명언이 촘촘히 박혀 있어서 밑줄 칠 곳도 넉넉하고, 양장이라 오래 두고 봐도 끄떡없겠더라고요.


10월도 중순을 넘기면서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어요. 가을이 깊어 가는 토요일, 프롤로그의 한 문장이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인생의 책사가 되어야 한다." 제 인생 책사 자리는 일단 제가 맡아 보기로 했습니다. 월급은 안 나오지만요.


좋은 사람 열다섯 명을 한꺼번에 소개받은 기분이라 이번 주말은 꽤 든든합니다. 단풍 구경 가시기 전에, 옆 사람 마음 한번 읽어 주는 연습부터 같이 해 보시죠.


말솜씨보다 마음을 읽는 눈, 그리고 행동으로 쌓은 신뢰가 사람을 움직인다는 걸 책사 15인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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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ADHD가 뭐길래 - 뇌 구조부터 인간관계 팁까지, 딱 한 권으로 이해하는 성인 ADHD 가이드북
알렉스 코너 외 지음, 성세희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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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대체 ADHD가 뭐길래>는 표지부터 귀여운 책이에요. 하늘색 볼펜으로 마구 휘갈긴 실뭉치 속에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팔다리만 삐죽 내민 채 파묻혀 있거든요. 줄무늬 꼬리는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있고요. 그 위에 "나는 왜 늘 인생을 벼락치기로 살까?"라는 질문까지 붙어 있으니, 마감 앞에서만 사람 구실 하는 직장인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조합입니다.


10월도 중순을 넘긴 토요일이네요.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져서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계절인데, 이런 주말에 새 책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즐겁습니다.


원서 제목은 예요. 꽁꽁 싸맨 짐을 풀어헤친다는 느낌이라 엉킨 실뭉치 표지와 짝이 잘 맞는 거 같더라고요. 쓴 사람은 알렉스 코너와 제임스 브라운입니다. 둘 다 생의학과 신경생리학을 공부한 과학자이고, 서른이 넘어서야 ADHD 진단을 받았대요. 지금은 팟캐스트 (성인 ADHD인들)을 함께 진행하면서 'ADHDadultUK'라는 자선단체도 꾸려가고 있습니다. 번역은 성세희 님이 맡았고, 미래의창에서 이번 10월에 나왔어요.


두께는 보통 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처음엔 냄비 받침으로 써도 손색없겠다 싶었는데, 펼쳐보니 냄비보다 제 머리가 먼저 데워지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만의 특이한 점은 괄호예요. 과학 이야기를 하다가도 괄호만 열리면 꼭 농담이 하나씩 튀어나옵니다. 감정표현불능증의 영어 이름 Alexithymia를 소개하면서 "아쉽게도 알렉스의 이름을 따서 붙은 말은 아닙니다"라고 덧붙이고, 모닥불 비유 끝에서는 "고슴도치가 진짜 사람을 무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하며 슬쩍 발을 빼요. 뇌과학 용어가 줄줄이 나오는데도 <대체 ADHD가 뭐길래>가 가볍게 읽히는 건 아마 이 괄호들 덕분인 거 같아요.


프롤로그는 두 저자의 자기소개인데, 여기서부터 벌써 정이 들어버렸어요.


제임스는 어릴 때 주치의에게 "크면 괜찮아질 겁니다"라는 말을 들었대요. 본인 말로는 헛소리였다고요. 지금도 통화할 때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하고, 본가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도 내내 서서 돌아다니며 이야기한다니까요. 일곱 살에 열두 살 수준으로 책을 읽었다면서 "마흔아홉이 된 지금도 독서 수준은 열두 살에 머물러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라고 자기를 놀리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마흔아홉이면 거의 제 또래거든요. 생활기록부에 '진득하게만 노력하면 성공할 아이'라고 적혔던 사람이 박사가 되고 강단에 선 뒤에도 남들과 다르다는 감각을 내내 안고 살았다는 얘기는 남 일 같지가 않았어요.


제임스가 스스로를 요약한 문장도 있습니다. "타인은 돕지만, 자신은 돕지 않음." 동료에게는 진단을 받아보라고 권하면서 정작 자기 검사 결과는 몇 년을 묵혀뒀다는 거예요. 승진도 했으니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고백이 이어지는데, 중년 직장인이라면 이 착각이 어떤 건지 대충 감이 오실 것 같아요.


팬데믹 시기에 크게 무너졌던 이야기도 나와요. 저자는 그 시간을 꾸밈없이 털어놓고, 2021년 2월 2일 진단받은 날을 생일이나 졸업식, 결혼식만큼 중요한 날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한 줄 한 줄 천천히 따라가게 되더군요. "단 한 사람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 책이 왜 쓰였는지가 이 문장 하나에 다 담겨 있는 느낌이었어요.


알렉스 쪽은 조금 더 경쾌해요. 진단을 받은 뒤 어머니에게 티가 났었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아니?" 하셨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음,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어"라고 하셨대요. 알렉스가 제일 좋아하는 어머니 어록이라는데 저도 이 대답이 참 좋았습니다. 집에서만큼은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고백한 바로 뒤에 "이 문장은 갑자기 낯간지러운 말을 한다며 가족이 제가 어디 아픈 건지 걱정할까 봐 적었습니다"라는 괄호가 붙어 있는 것도 딱 이 사람답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10장 (도파민 도둑)이에요. 어떤 일을 하려면 먼저 그 일이 할 만하다고 뇌를 설득해야 하는데, ADHD인의 뇌에는 그 설득이 잘 먹히지 않는대요. 그래서 남들 눈에는 게을러 보여도 본인에게는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일종의 마비 상태가 찾아온다는 거예요. 여기서 나온 비유가 기가 막힙니다. '의지력만 있으면 다 된다'는 말을 들을 때의 기분이, 열심히 1km를 달렸더니 "의지력만 있으면 100km 더 뛸 수 있어"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대요.



1km 뛰고 나서 듣는 100km 소리.

회사 다니는 사람이면 이 기분은 다들 한 번쯤 맛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스마트폰 이야기도 나옵니다. 도파민이 가장 많이 나오는 건 성패가 불확실한 바로 그 상태래요. 그래서 알림을 확인하려고 화면을 아래로 쭉 당기는 동작이 카지노 기계를 닮았다는 거고요. 저자들이 거대 기업들을 향해 "참 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하고 한소리 하는데, 읽는 사람도 괜히 뜨끔해지는 대목이었어요.


맛보기로 이런 대목이 있어요.


"지금 당장 아주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을 얻는다고 칩시다. 그런데 1년을 기다리면 더 큰 케이크 한 판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당연히…… 지금 당장 먹는 케이크겠죠!"


그러고는 만족 지연은 "우리 전공이 아니란 뜻이죠"라고 쿨하게 정리해요. 그래놓고 불가능한 건 아니고 덜 효과적일 뿐이라고 다독이는 데까지가 이 책의 화법인 거 같습니다.


11장 (ADHD의 유리 멘탈과 거절의 두려움)에는 '제임스와 버거 분노' 사건이 나와요.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에서 뽑은 주문 번호가 89번이었는데, 얌전한 주머니곰처럼 기다리던 제임스 앞에서 91번 손님이 먼저 음식을 받아 간 거예요. 제임스는 죄 없는 직원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했대요. 그 가게엔 다시는 못 가게 됐다는데, 그 뒤에 "다른 이유로 못 가는 가게들도 몇 군데 더 있고요"라는 한 줄이 붙어 있어서 또 웃었습니다.


그렇다고 웃고만 넘어갈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욱하고 돌아서서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순간은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오잖아요. 저자들은 그 순간의 정체를 설명해주면서도 선은 분명히 긋습니다. "ADHD는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변명이 될 수는 없어요." 감싸주기만 하는 책이었다면 이만큼 믿음이 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비-ADHD인이 상대의 감정 반응에 화내는 것도 정당하고 ADHD인이 감정을 완벽히 다스리지 못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대목처럼, 어느 한쪽 편만 들지 않는 시선이 좋았습니다.


14장 (ADHD의 4대 적)은 읽는 내내 피식피식 웃게 되는 장이에요. 직장에서 단골로 듣는 "플래너 써봤어? 할 일 목록은?"이라는 질문에 저자들은 "어휴, 네, 그럼요, 당연하죠"라고 대답합니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몰입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 걸 '쌍곡선으로' 일한다고 표현하고, 처음에 처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늘 불을 끄러 다니는 소방관 신세가 된다고도 해요. 마감 전날 밤의 초인적인 집중력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흔한 자기계발 조언인 '개구리부터 먹기'에도 할 말이 많더라고요. 어려운 일부터 해치우라는 그 전략 대신 따기 쉬운 열매로 작은 승리를 맛보고 '도파민 한 방'을 얻으라고 권해요. "남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꼭 개구리부터 먹진 마세요"라는 말이 유독 시원했습니다. 제임스의 이 말도 빼놓을 수 없고요.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싶다면, ADHD인에게 다른 일을 시켜라!" 물론 반쯤 농담이래요.


솔직하게 걸렸던 대목은 따로 있어요. 찔린 쪽이 오히려 저였거든요.


16장 (신경전형인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에서 저자들이 코치로서 가장 자주 듣는다는 말이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닌 것 같다"래요. 괄호 안에는 '그리고 우리도 생각했던'이라고 덧붙여 놓았고요. 마흔 줄 후반에 들어서도 이 문장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요. 움직이면 안 되는 회의실에서 들썩이는 몸을 붙들어 매고 버텼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기대되는 방식'대로 반응하려고 애쓰는 일이 무척 피곤하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진단과 상관없이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남 얘기로만 들리지 않을 대목이에요.


그래서인지 이 장의 비유가 더 크게 들렸어요. 성인 ADHD인은 네모난 못 같아서 사회가 기대하는 동그란 구멍에 잘 맞지 않는대요. 그러니 억지로 자기를 깎지 말고, "사회가 네모난 구멍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만들어봅시다!"라고 말해요.


직장 이야기도 꽤 구체적이에요. 유연 근무, 헤드폰, 자율 좌석제가 어떤 사람에게 맞고 어떤 사람에게 안 맞는지까지 나옵니다. '인정의 대화' 대목에서는 "매주 3시간씩 미팅을 하거나 뜨거운 포옹을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라면서 짧은 '엄지척' 하나면 충분하다고 해요. ADHD가 있든 없든 회사 다니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 같았어요.


소장 가치는 넉넉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ADHD가 유행'이라는 말을 쉽게들 하는데, 이 책에는 성인 약 40명 중 1명꼴이고 1형 당뇨병보다 적어도 5배는 흔하다는 이야기부터 원인, 진단, 약물, 공존 질환까지 차근차근 담겨 있어요. <대체 ADHD가 뭐길래>는 책상 가까이 두고 그때그때 필요한 장을 다시 펴보기 좋은 구성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옆자리 동료나 가족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든든한 참고서가 될 것 같아요.


창밖 은행잎이 하나둘 노랗게 물드는 걸 보니 가을이 제대로 왔나 봅니다. <대체 ADHD가 뭐길래> 덕분에 올가을엔 '정리하기'처럼 막연한 목표 말고 '식기세척기 비우기'처럼 눈에 보이는 일부터 하나씩 해볼 생각이에요. 개구리는 당분간 연못에 그대로 두고, 저는 따기 쉬운 군고구마부터 먹으러 가볼게요. 웃으면서 배운 게 많아서 주말이 든든한 기분입니다. 다들 선선한 가을 주말 잘 보내세요.


게으름 탓만 하던 산만한 뇌에게, 같은 고민을 먼저 겪은 과학자들이 웃으며 건네는 친절한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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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살 때와 팔 때 - 세계 최정상 펀드매니저 12인의 압도적 매매 전략
리 프리먼 쇼어 외 지음, 이주영 옮김 / 토네이도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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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주식 살 때와 팔 때> 승률 45퍼센트로도 이기는 거장들, 문제는 사고 난 다음이었어요


승률 45퍼센트.


세계적인 펀드매니저 73명을 최종 후보로 추려서 매매 내역을 분석했더니 승률 중간값이 이 정도였다고 하더라고요. 운에만 맡겨도 50퍼센트는 나온다는데 그보다 낮은 숫자라서 처음엔 눈을 한 번 더 비볐어요. 그런데 이 중에서 다시 걸러낸 거장들은 시장을 웃도는 성과를 냅니다. 리 프리먼 쇼어와 클레어 플린 레비가 함께 쓰고 이주영 님이 옮긴 <주식 살 때와 팔 때>는 이 이상한 계산서를 한 장씩 펼쳐 보이는 책 같아요.


10월 중순에 맞는 금요일이라 그런지 이 책 얘기를 꺼내는 마음이 한결 가볍네요. 사실 제 계좌에는 그동안 살 때와 팔 때보다 '물릴 때'가 더 자주 찾아왔던 거 같은데요. 그래서인지 제목부터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더군요.

표지는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반을 딱 갈라놓고, 화살표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꽂아둔 모양이에요. 사고파는 두 순간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긴 느낌이 듭니다. 원제는 Stock Market Maestros이고, 두께는 보통 경제서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주식 살 때와 팔 때>를 펼치면 인터뷰가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숫자가 앞장서서 마중을 나옵니다. 펀드매니저의 의사결정을 데이터로 분석하는 에센시아 애널리틱스가 73개 펀드의 최대 15년치 일별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봤대요. 종목 선정, 투자 규모, 진입 시점, 분할 매수, 보유 비중 조정, 분할 매도, 최종 매도 시점까지 7가지 결정을 하나하나 따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남은 사람이 열두 명입니다. 명단을 뽑는 과정부터 꼼꼼해서 우선 믿음이 가더라고요.


솔직히 이 선정 기준 대목은 저한테 언덕 하나 넘는 구간이었어요. 샤프 지수, 소티노 지수, 상승·하락 포착 비율 같은 말이 연달아 나오니까 한 줄씩 천천히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모닝스타나 리퍼 같은 이름 옆에 각주로 설명이 붙어 있어서 길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피식 웃음이 난 문장이 있었어요.

"결국, 투자자의 의사결정이 가져온 결과가 우연에 의한 결과보다 더 나을 게 없다면 차라리 그 돈을 수수료가 낮은 인덱스 펀드에 투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펀드매니저도 자신의 지적 능력과 에너지를 보다 생산적인 곳에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세계 최고 펀드매니저들 앞에 이렇게 써도 되나 싶을 만큼 시원한 말이에요.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만큼 정직한 잣대도 드문 거 같아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행동 알파 점수를 왜 지난 3년치로만 매기느냐는 설명이었어요. 10년 전에 좋은(또는 나쁜)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왕년의 성과 하나로 버티는 사람도, 예전 실수 하나 때문에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사람도 보게 되잖아요.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는 책인데, 그 숫자가 사람을 지금 모습 그대로 봐주려는 거 같아서 좋았습니다.


거장들도 절반쯤은 틀린다는 얘기, 몇 번을 들어도 이상하게 위로가 돼요.

앞쪽에서 만나는 조시 골드버그는 뉴욕의 헤지펀드 매니저예요. 저자는 조시를 떠올리면 머릿속에서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배경음악이 재생된다고 해요. 다만 주인공이 톰 크루즈 대신 검은 수염을 기르고 야물커와 안경을 쓴 남자라는 거죠. 시작부터 장난기가 있어서 술술 넘어갔습니다.

첫 번째 불가능한 임무는 2009년에 세운 회사 G2였어요. 운용 자산이 1천만 달러도 안 됐고, 1억 달러 이상으로 클 확률은 500분의 1도 안 된다는 말을 들었대요. 첫 고객은 첫해에 20퍼센트를 못 내면 돈을 빼겠다고 했는데, 결국 기준치를 넘겼는데도 자금을 회수해 갔다고 합니다. 그 일이 고객에게 손해가 됐다는 문장이 담담하게 따라붙어요.


두 번째 임무는 훨씬 무거웠어요. 2016년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생존 확률이 2퍼센트라는 말을 들었고, 3년 동안 수십 차례 항암 치료와 수술을 견뎌 5년 뒤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사정을 알고도 1억 달러를 맡긴 가족이 있었고,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맙다며 절대 돈을 빼지 않겠다고 약속한 고객도 있었대요. 사무실 벽에는 NFL 선수 레이 루이스가 선물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글귀 끝에 "조시, 아이들에게 입을 맞춰주고 이긴 싸움을 끝까지 해낼 거라고 말해주세요."라는 문장이 있더군요. 투자 이야기를 들으러 들어간 장에서 사람 이야기를 먼저 듣게 되니, 뒤에 나오는 원칙들도 조금 다르게 읽혔어요.


조시의 투자 방식에서 저를 뜨끔하게 한 건 멘토 필 헴플먼의 한마디였어요. 70달러짜리 주식이 25달러까지 떨어졌으니 싸게 사자는 조시에게 필이 이렇게 말했대요.

"조시, 기업이 실적 전망을 하향 조정하면, 아무리 주가가 싸더라도 보유해서는 안 돼."

조시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고 하던데, 저는 망치까진 아니어도 꿀밤 한 대쯤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싸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마음이 기울던 순간들이 줄줄이 생각나더라고요. 장 첫머리에 걸린 "패자만이 손실 중인 종목에 물타기를 한다."라는 문장도 같은 결로 읽혀요.


조시가 기업을 방문하면 꼭 구내식당에 들른다는 대목도 재미있었어요. 직원들한테 회사와 경영진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라는데, 한번은 어떤 직원이 CEO를 석 달 동안 못 봤다고 하더래요. 소형주에서 CEO가 눈에 안 띈다면 좋은 신호로 보기 어렵다고요. 직장인으로서 이 대목은 웃으면서 읽었습니다. 회사 분위기는 회의실보다 점심 줄에서 더 솔직하게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애널리스트가 5명도 안 붙는 기업을 좋아하고, 어느 회사에서는 10년 만에 처음 찾아온 투자자라는 말까지 들었다니 정말 발로 뛰는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고른 종목도 첫 어닝 서프라이즈가 나온 때부터 시간을 재서 보고서 첫 페이지에 기재해 두고, 15개월을 넘기면 매도 타이밍을 놓칠 위험이 커진다는 '15개월 규칙'을 지킨다고 합니다.

유럽 쪽 고름 토마센 장은 시작부터 공기가 확 바뀌어요. 독자를 어느 방에 앉혀두고, 노르웨이 정보기관 출신에 러시아어를 하고 고도의 심문 기술을 아는 거구의 남자가 내려다보며 묻는 장면을 그려놓거든요.


"애송이 녀석, 운이 좋다고 생각하나?"

책 속의 '당신'은 식은땀을 흘리는데, 저자가 곧이어 이 시나리오는 부분적으로 지어낸 거라고 털어놔요. 실제 고름은 친근한 사람이고, 저 말은 AKO 캐피털 애널리스트 모니터에 뜨는 알림이래요. 속뜻은 "잘했어요. 우리가 수익을 좀 냈는데 이익을 실현해야 할까요?"라고 하네요.

고름이라는 사람 자체에도 정이 갔어요. 오슬로에서 자라 북극권 북쪽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제빵사이자 철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게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웠대요. 210억 달러를 총괄하는 최고투자책임자인데 대중교통을 타거나 걸어서 출근하고, 아이들과 테니스를 치고, 삼림욕을 하고 정원을 가꾼다고 하더라고요. 롤렉스 차고 고급차 모으는 문화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니, 출근길 지하철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볼 것 같습니다.


AKO에는 '미완성 아이디어' 회의라는 게 있다고 해요. 누가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마음껏 비평하는데, 고름은 이 단계에서는 아이디어에 자존심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기획안마다 자존심이 잔뜩 묻어 있는 회의를 숱하게 겪어본 입장에서는 부럽기까지 하더군요. 비중 얘기도 단단합니다.


"비중 20퍼센트짜리 포지션이 실패하면 살아남기 힘들겠지만, 비중 10퍼센트짜리 포지션은 실패해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확신이 생겨도 25bp, 50bp씩 조금씩 늘려간다는 걸 보면, 이 사람한테 투자는 무엇보다 살아남는 기술인 거 같아요.

조시가 발로 뛰는 사냥꾼이라면, 고름은 문단속 꼼꼼한 집주인쯤.

<주식 살 때와 팔 때> 끝자락의 '주식 거장들의 성공 비결'로 가면 앞에서 만난 사람들이 한 줄로 꿰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거장들은 잘 나가는 종목 앞에서 스스로에게 "너 지금 단지 운이 좋아서 기분에 취해있는 거 아니야?"라고 묻는대요. 고름의 모니터에 뜨던 '애송이' 알림을 여기서 다시 만나는 것 같아서 반가웠습니다. 손실 중인 종목 앞에서는 질문이 바뀌어요.


"만약 이 주식을 지금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오늘 새롭게 매수하겠는가?"

이 질문 하나는 증권 앱 첫 화면에 붙여두고 싶을 정도였어요. 본전 생각에 붙들고 있는 종목이 하나라도 있다면, 누구든 대답하기 전에 잠깐 머뭇거리게 될 거 같거든요.


저자들은 리스크를 가격 변동성이 아니라 틀릴 확률로 본다고 하고, 결국 투자의 기술이란 의사결정의 기술이라고 마무리합니다. 언제 사고, 얼마나 담고, 언제 팔고,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할지, 수백 번의 소소한 순간마다 조금 더 현명하게 고르는 일이라고요. 그 능력은 측정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다고 하니, 타고난 감이 없는 사람한테도 문이 열려 있는 셈이에요.


<주식 살 때와 팔 때>는 한 번 읽고 꽂아두기보다 계좌가 흔들릴 때마다 다시 꺼내 볼 책에 가까운 거 같아요. 열두 명의 방식이 저마다 달라서, 그때그때 내 상황에 맞는 거장 한 명을 골라 그 장만 다시 펼쳐도 충분하겠더라고요. 거장들 모두 투자 방식을 자기 성격에 맞춰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데, 그 말대로라면 이 책은 내 성격에 맞는 선생님을 찾아가는 명단이기도 합니다. 매수 버튼보다 매도 버튼 앞에서 더 오래 망설여 본 사람이라면 읽는 내내 재미있게 넘길 수 있을 거예요.


은행잎이 하나둘 노랗게 물드는 10월 중순이네요. 단풍처럼 제 계좌도 빨갛게 물들면 좋겠다는 욕심은 잠깐 접어두고, 이번 주말엔 손실 종목에 그 질문부터 던져볼 생각입니다. 금요일에 좋은 책 만나서 한 주 마무리가 든든해요. 다들 포근한 주말 보내세요.


절반을 틀리고도 크게 버는 거장 12인의 비밀은 종목을 고른 다음의 행동에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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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42가지
이택호 지음 / 미래북(MiraeBook)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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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42가지> | 한두 정거장 먼저 내리고 싶어지는 책


표지부터 얘기하고 싶어요. 초록과 노랑으로 몽글몽글 부풀어 오른 숲 사이로 강이 한 줄기 흐르고, 그 위에 밀짚모자를 쓴 사람이 탄 쪽배가 하나 떠 있습니다. 그런데 제목은 꽤 세게 들어오더라고요.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42가지>. 풍경은 이렇게 느긋한데 제목은 등을 툭 치는 것 같아서, 그 간격이 궁금해 첫 장을 열게 되는 책 같아요.


부제는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영혼의 버킷리스트'예요. 버킷리스트라길래 처음엔 양동이를 몇 개 챙기라는 얘긴가 했습니다. 네, 아재라서 그렇습니다.

책을 펼치면 꼭지마다 'Bucket List 03', 'Bucket List 05' 하는 식으로 번호가 붙어 있고, 작은 캐릭터 그림이 꼭지 첫머리를 지키고 서 있어요. 마흔두 가지 할 일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마음가짐에서 시작해 지켜야 할 가치, 노후, 가정, 성공의 원칙 순으로 걸어가는 구성이라 차례만 훑어봐도 인생을 한 바퀴 도는 기분이 듭니다. 경영학을 가르치는 이택호 교수가 쓴 책이라 그런지, 막연한 위로보다 "그래서 오늘 뭘 하면 되는데?"에 대한 대답이 먼저 나오는 편인 것 같아요. 올해 8월에 새 단장을 하고 나온 판이기도 하고요.


앞쪽 꼭지 중 '조급해 하지 말고 여유를 갖는다'는 "우리는 바쁘다"라는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쉴 틈 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새 1년이 지나가 있다는 얘기인데, 그냥 제 얘기 같더라고요.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사람, 걸으면서 휴대전화에 고함을 지르는 사람, 흡연 장소에서 초조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 저자가 그려 놓은 이 거리 풍경 어딘가에 저도 한 자리쯤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여기 소개된 우화 하나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게 용한 의사가 이런 처방을 내려요.

"당신의 병은 특이하여 3년 동안 말린 쑥을 달여 먹어야 나을 수 있소."

이 사람은 이미 3년 동안 말린 쑥을 구하려고 전국을 헤매다가, 쑥을 찾아다닌 지 6년째 되던 해에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아요. 쑥을 사다가 3년 말리면 됐을 텐데 조급한 마음에 그 생각을 못 한 거죠. 짧은 옛이야기인데 웃음이 쉽게 나오지는 않더군요. 조급함이 사람을 얼마나 엉뚱한 길로 끌고 가는지, 이보다 짧게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유를 갖는 방법도 손에 잡히게 나와 있어요. 퇴근 후 가까운 서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책을 잠깐 집어 보거나 백화점 잡화 매장을 둘러보라는 것, 노자의 '무위'에서 빌려 온 한눈파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 매일 15분씩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정해 두라는 것. 그중에 제일 솔깃했던 건 내려야 할 정거장보다 한두 정거장 먼저 내려서 걸어 보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어라? 여기에도 서점이 있네. 잠깐 들어가 볼까?"

매일 지나치던 길에서 이런 혼잣말이 나온다는 건데, 읽기만 해도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에요. 다만 저는 회사 두 정거장 전에 내리면 그대로 반대편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고 싶어질까 봐 그게 걱정입니다.


Part 3의 '직장은 당신의 인생이다'는 직장인이라면 제목부터 그냥 넘기기 어려운 꼭지예요. 하루의 3분의 2를 직장에서 보내면서 그 시간을 늘 불만 속에 지옥처럼 보내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는데, 반박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첫 번째 처방은 '여유를 두고 출근하라'입니다. 러시아워 만원 전철에 시달리다가 9시가 될까 말까 할 때 사무실에 들어서면 이미 녹초라는 거죠. 30분만 일찍 나서서 차 한 잔 마시며 하루를 준비하라는 말, 5분만 더 자고 싶어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라는 말은 40대 후반의 몸으로 듣기엔 살짝 얄밉기도 해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더 얄밉고요.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거의 다 잡무에서 온다는 대목에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그러니 잡무도 본업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라는 건데, 연차가 쌓일수록 더 와닿는 얘기 같아요. 인생 2막을 준비하라는 대목에서는 이해진 회장의 직장인 시절 이야기가 나와요. 삼성SDS연구소 말단 사원이던 시절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25%는 순수하게 자기계발을 위해 쓰자'는 원칙을 세우고, 여덟 시간 걸리는 업무를 여섯 시간에 끝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준비가 끝났으니 당장 사표를 내라는 얘기는 아니어서 오히려 현실적으로 들렸어요. 1~2년 임시직이든 아르바이트든 하고 싶은 일을 먼저 몸으로 겪어 보라는 거죠. 혼다 소이치로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도 같이 실려 있는데, 실수 하나에 며칠씩 끙끙 앓는 사람이라면 조금 숨통이 트일 만한 문장 같습니다.


솔직히 마음에 걸렸던 대목도 있어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노후대책이다'에 나오는 계산이요. 금융 컨설턴트들이 말하는 노후 자금이 대체로 10억 원인데, 월수입 350만 원인 직장인이 매달 100만 원씩 모아도 10억을 채우려면 77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77년.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제 통장 사정에 대 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숫자라, 읽는 내내 마음 한쪽이 따끔거렸어요. 그래도 저자가 내놓는 방향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노후 대책의 핵심은 결국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는 거예요. 장거리 선수가 100미터 달리기에 나가면 우승할 수 없듯이, 짧게 반짝이고 마는 단거리 직업보다 경험과 지식이 쌓일수록 빛나는 마라톤 직업을 고르라고 해요. 인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기준이 지금은 마흔이지만 곧 쉰으로 바뀔 거라는 문장도 있었는데, 40대 후반인 저한테는 아직 반환점을 안 돌았다는 소리로 들려서 조금 반가웠습니다.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42가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기만 한 책은 아니에요. '삶이 치열할수록 그 흔적도 깊고 넓다'는 시작이 재미있습니다. 누구든 앉았다 일어나면 흔적이 남는다면서, 폭신한 소파에는 그 사람의 몸무게와 엉덩이 크기만큼, 딱딱한 지하철 금속 의자에는 체위와 온도만큼 흔적이 남는다고 하거든요. 이렇게 생활감 있는 예시로 문을 열어 놓고 브루클린 다리 이야기로 넘어가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이 바로 이 다리 이야기예요. 다리를 놓자고 나선 존 뢰블링은 공사 중 발가락에 입은 작은 상처로 파상풍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은 아들 워싱턴 뢰블링마저 잠수병으로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이 됩니다. 아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대요. 다리 한쪽 끝에 집을 얻어 망원경으로 공사 현장을 지켜보면서, 정해 둔 규칙대로 손가락으로 아내에게 신호를 보냈다고 해요. 아내가 그 뜻을 기술자들에게 말로 옮겼고, 그렇게 해서 1883년에 다리가 완성됐다고 합니다.


손가락 하나로 13년.

그 문장 앞에서 회의 때마다 "이건 좀 어렵겠는데요" 하고 쉽게 꺼냈던 제 말들이 떠오르더라고요. 꼭지 끝에는 소중한 흔적을 남기려면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할 것,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붙어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과연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Part 4의 '더 늦기 전에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첫 문단부터 조용히 마음을 누르는 꼭지예요. 효도는 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어서 더 후회하게 된다는 말로 시작하고, 곧이어 어머니에 관한 짧은 일화가 하나 나와요. 이건 직접 읽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몇 줄로 옮기면 그 맛이 덜할 것 같아서요.

뒤에 이어지는 효도하는 여섯 가지 방법은 거창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고민이 생기면 부모님께 상의드리기, 가까운 곳부터 함께 여행 다니기, 부모님이 아끼던 물건 간직하기, 건강 자주 챙겨 드리기, 한 번쯤 발 씻겨 드리기, 그리고 지금 바로 전화나 문자 드리기. 상의를 드리라는 대목에는 아직 부모님의 지혜가 필요한 자식이라는 걸 느끼게 해 드리는 것도 효도라는 말이 나와요. 다 컸다고 혼자 끙끙 앓던 시간들이 조금 미안해지더라고요. 부모님은 자식에게 짐이 될까 봐 아파도 내색하지 않으신다는 대목도 그랬고요.


용돈이 든 두툼한 봉투, 바쁘다는 핑계로 어쩌다 거는 전화, 명절에 보내 드리는 선물 보따리가 효도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 다음에 딱 한 줄이 붙어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42가지>라는 제목의 뒷부분이 여기서 이렇게 돌아오니, 표지에서 등을 툭 치던 제목이 이번엔 어깨를 붙잡는 것 같았어요.


Part 5의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라'에서는 토끼와 거북이가 둘 다 자기 페이스를 알고 있었다는 해석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토끼는 낮잠 잘 시간까지 만들 수 있었고, 거북이는 쉬지 않고 걸어갔다는 거죠. 그 뒤에 나오는 해거리 이야기는 특히 오래 붙들고 있게 되더라고요. 과일나무가 한 해는 열매를 많이 맺고 다음 해는 적게 맺기를 되풀이하는데, 쉬는 해에 모은 기운을 다음 해 탐스러운 열매로 쏟아내기 위해서라고 해요. 쉬는 해가 있어야 열리는 해도 있다는 얘기. 앞에서 읽은 여유 이야기와 마라톤 직업 이야기가 여기서 한 줄로 꿰어지는 것 같아 흐뭇했어요. 최고 학부를 나온 신입이 학력 없는 동기와 똑같은 견습공 일을 맡은 게 억울하다고 항의했을 때 포드가 들려준 대답도 시원했고요.


맛보기로 하나만 옮겨 볼게요. 마지막 꼭지 '인생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에 나오는 하버드 대학 교수 이야기입니다. 교수가 걷어 간 과제물을 돌려주는데, 거기엔 붉은 글씨로 '이것이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한 줄만 적혀 있었대요. 학생들은 다시 쓰고, 또 돌려받고, 도서관으로 몰려가 또 고치고. 그렇게 열 번 넘게 새로 쓴 끝에 학생들이 자신 있게 "그렇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한 결과물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제 읽어보도록 하지요."

여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지금껏 안 읽고 있었다니요. 보고서에 빨간 펜 수정을 몇 번씩 받아 본 직장인이라면 이 학생들 심정이 남 일 같지 않을 거예요. 같은 꼭지에 나오는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 이야기도 좋았어요. 거대한 청새치를 잡고도 상어 떼를 만나 흔적만 끌고 돌아온 노인을 두고, 누가 봐도 패배한 사람이었지만 그걸로 끝난 건 아니었다고 읽어 내는 시선이 따뜻하더라고요.


꼭지 하나하나가 짧게 끊어져 있어서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되는 책이라, 책상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한 꼭지씩 꺼내 보기 좋을 것 같아요. 두께도 부담스러운 편이 아니고 판형도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라 가방에 넣어 다니기에도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는 꼭지는 마음이 무뎌질 때마다 다시 펼쳐 보고 싶어서, 저는 이 책을 오래 옆에 둘 것 같아요.


10월도 중순을 넘기면서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어요. 한 주를 버틴 금요일이라 몸은 무거운데, 이번 주말엔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 합니다.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42가지> 덕분에 올가을 할 일 목록이 조금 따뜻해진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바쁘게 달려온 중년 직장인에게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일 마흔두 가지를 건네는, 다정하고 현실적인 인생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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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 사용 설명서 - 나나와 찌돌이의 연애 일기
정오목 지음 / 모티브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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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정오목 <우리 사이 사용 설명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다시 관찰해 보는 커플 다이어리


사용 설명서라는 이름이 붙은 물건 중에 끝까지 읽어 본 게 몇 개나 될까 싶어요. 전자레인지도 공기청정기도 일단 눌러 보고, 안 되면 그제야 서랍을 뒤지는 게 아재들 국룰이잖아요. 그런데 사람 사이에도 설명서가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 거 같아요. 이쪽은 고장 나기 전에 미리 펼쳐 봐야 하는 설명서더라고요.


<우리 사이 사용 설명서>는 커플 이모티콘 (나나와 찌돌이)를 만든 정오목 작가의 책이에요. 부제는 '나나와 찌돌이의 연애 일기'예요. 펼쳐 보면 귀여운 연애 만화와 두 사람이 직접 채워 넣는 커플 다이어리가 번갈아 나와요. 만화 한 꼭지를 웃으며 보고 나면 빈칸이 기다리고 있는 식이라, 읽는 책이면서 쓰는 책이기도 합니다.


노란 하트가 둥둥 떠 있는 표지부터 마음이 말랑해지는 느낌이에요. 손에 쥐기 좋은 크기에 두께도 부담 없는 편이라, 가방에 넣어 다녀도 어깨가 항의하지 않을 것 같고요.

첫 꼭지 '내 눈엔 너만 보여'는 벚꽃 날리는 사람 많은 곳에서 시작해요. 찌돌이가 휴대폰을 들고 "올 때가 됐는데.."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자기야!!" 하고 나나를 찾아내요. 주변 사람들은 회색 동그라미로 뭉개 놓고 둘만 색을 입혀 놨는데, 거기에 "그 많은 사람 중에 너만 보여"라는 문장이 얹혀요. 제목이 그림으로 그대로 보이는 기분이었어요. 늦어서 미안하다는 나나한테 "괜찮아~" 하는 찌돌이 얼굴이 어찌나 해맑던지요.


연애 세포가 동면에 들어간 지 한참 된 아재도 그 회색 동그라미 장면에서는 피식 웃게 되네요.

찌돌이라는 인물이 재밌는 게, 이 친구는 늘 메모 중이에요. 마음속으로요. '더 알아가고 싶어' 꼭지에서 나나가 파스타를 먹으며 "완전 내 취향!" 하면 찌돌이는 속으로 "나나는 꾸덕한 파스타를 좋아하는군" 하고 적어 둬요. 둘 다 배가 터질 것 같다고 해 놓고 나나가 후식 얘기를 꺼내자, "나나는 배불러도 후식은 꼭 먹어줘야 하는군.." 하고 또 한 줄 추가하고요. 큰 이벤트보다 이런 사소한 기억이 연애를 굴러가게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회사에서도 비슷하잖아요. 내 커피 취향 기억해 주는 동료가 괜히 고마운 그런 거.

<우리 사이 사용 설명서>라는 제목이 가장 잘 살아나는 대목은 관찰일지 두 편 같아요. '나나 관찰일지'에서는 탐험가 모자를 쓴 찌돌이가 쌍안경을 들고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깔아요.

"앗! 야생의 나나가 나타났다!"

평소엔 온순한 편이지만 가끔 폭주할 때가 있다는 설명과 함께 '아르르 으르릉' 하는 나나가 등장해요. 찌돌이는 침착하게 가방을 뒤적여 도넛을 꺼내고요. 탄수화물을 먹이면 금세 진정되고, 달거나 매울수록 효과적이니 꼭 알아두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붙어요. 그러고는 "떡볶이도 먹을래?" "웅!!" 이 대목에서는 소리 내서 웃었습니다. 이건 진짜 실전용 매뉴얼이에요.


반대편 '찌돌이 관찰일지'에서는 나나가 안경에 흰 가운 차림의 연구원이 돼요. 관찰한 바에 따르면 찌돌이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득근'이고, 근손실에 매우 민감하며, 거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해요. "#오운완", "오늘 팔 잘 먹었다"까지 하고는 "자기야 만져봐!!" 하는데, 나나 손끝에서 나는 소리가 '말랑..'이에요. 그래도 "아무튼 운동은 좋은 거니까 응원해줍시다..!" 하며 작게 화이팅을 붙여 주는 나나가 참 다정하더군요. 불꽃을 두르고 헬짱이 되겠다는 찌돌이를 보니 남 일 같지가 않았어요. 찌돌이 팔이 말랑이면 제 팔은 거의 찹쌀떡일 테니까요.


만화 뒤에는 '짝꿍 관찰일지'라는 기록 페이지가 붙어 있어요. 오늘 내 짝꿍의 기분 점수, 착장 포인트, 먹고 싶어 한 음식, 얼굴의 점 개수,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잔소리 같은 항목이 쭉 이어지고, 마지막엔 하트 모양 칸에 '내 짝꿍 한 줄 정리'를 쓰게 돼 있어요. 재미있는 건 같은 질문지가 노란 판과 파란 판으로 두 벌 들어 있다는 점이에요. 노란 쪽엔 나나 사진이 붙어 있고 돋보기는 찌돌이가 들고 있어요. 파란 쪽엔 찌돌이 사진이 붙어 있고 돋보기는 나나 손에 있고요. 한 사람이 한 장씩 맡아 서로를 관찰하라는 구성인데, 이 책만의 재미는 아마 여기서 나오는 거 같아요.


점 개수 세는 칸은 좀 웃기긴 해요. 얼굴 들이밀고 세다 보면 다투던 것도 까먹을 듯.

물론 내내 깔깔거리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삐졌음'은 같은 상황을 남자친구 편과 여자친구 편으로 나란히 붙여 놨어요. 찌돌이가 "미워 진짜!" 하고 삐지면, 나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진짜 미워..?" 한마디 하는 걸로 상황 끝이에요. "으휴!!" 하면서 금세 옆에 붙거든요. 반대로 나나가 삐졌을 때 찌돌이가 똑같이 반짝이는 눈으로 "화 풀어~" 해 보면, 나나 뒤로 불길이 확 치솟고 찌돌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 해요. 같은 애교, 다른 결과. 두 장을 나란히 보면서 많이 웃었는데, 한편으로는 좀 뜨끔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꼭지보다 한 컷 한 컷 오래 들여다본 건 '솔직하지 못한 이유'였어요. 나나가 베개에 엎드려 휴대폰을 보다가 "분명 서운하긴 서운한데.." 하고, 이어서 "말하자니 별거 아닌 것 같고 내 자신이 치사하게 느껴져" 하며 얼굴을 묻어요. 이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다들 아는 거 같아요.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서운한 한마디가 마음에 남는 날이 있잖아요. 그런데 꺼내자니 쪼잔해 보일까 봐 그냥 삼키게 되고요.

그 뒤로 나나는 앞으로 솔직하게 말하려고 노력하겠다고 하고, 찌돌이는 더 잘 들어주고 서운한 점이 있으면 고치겠다고 해요. 두 손이 맞잡힌 컷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맞춰가는 과정이니까"라는 문장이 놓여 있고요. 거창한 해법을 내놓는 쪽은 아닌 거 같아요. 마음에 걸리면 대화로 풀자는 누구나 아는 말인데, 귀여운 그림 옆에 있으니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더라고요.


다툼 이야기 근처에는 '싸웠을 때 갈등 해결법' 페이지도 있어요. 생각할 시간을 갖고 대화할지 그 자리에서 바로 풀지 고르고, 화해할 때 꼭 할 행동을 악수, 포옹, 뽀뽀 중에서 하나 정해 두는 식이에요. '이것만은 하지 말아줘!' 페이지에는 남자친구가, 또 여자친구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적는 말풍선 칸이 있어요. 그 옆에서 캐릭터들이 옐로카드를 들고 서 있는 게 또 귀엽습니다. 싸우기 전에 규칙부터 정해 두는 셈이라 꽤 실용적이다 싶었어요.


'내 자존감 지킴이'도 좋았어요. 거울 앞에서 "나 요즘 못생겨진 거 같아", "살도 많이 쪘어.." 하며 울먹이는 나나한테 찌돌이가 "뭐가 살쪄!!!", "뭐가 못생겨!!!" 하고 버럭해요. 그러더니 귀엽고, 섹시하고, 예쁘고, 깜찍하고, 사랑스럽다는 말을 폭포처럼 쏟아내요. "아~! 그만해~~ ㅎㅎㅎ" 하는 나나 얼굴이 금세 풀리고요. 이어서 거울 앞에서 "진짜 예쁜가?" 하는 나나 옆에 "오늘도 잘생겼군" 하는 찌돌이가 나오는데, 이 둘의 온도 차가 또 웃음 포인트예요.

'네 꿈을 응원해!'에서는 나나가 머뭇거리며 "자기야 나 사실 이거 해볼까 하는데.." 하고 말을 꺼내요. 찌돌이는 "응!!" 하고 바로 받아요. 자기라면 분명 잘할 거라고, 옆에서 열심히 돕겠다고 펄쩍 뛰는데, 그 응원 뒤에 찌돌이 속마음이 살짝 숨어 있어요. 어떤 속마음인지는 직접 보셔야 더 재밌을 거예요.


<우리 사이 사용 설명서>는 둘이 펼쳐야 제맛인 책이라, 혼자 빈칸을 보고 있으면 살짝 머쓱한 기분이 들긴 해요. 그래서인지 선물로 건넸을 때 더 빛날 책 같습니다. 연애를 막 시작한 커플이 같이 채우면 서로 알아가는 교재가 되겠어요. 오래 함께한 사이라도 점 개수부터 다시 세 보는 재미가 쏠쏠할 거 같고요.


책 안에는 '무조건 잘 되는 부적'도 한 장 들어 있어요. 네잎클로버를 같이 든 나나와 찌돌이 그림이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요. 만화만 보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두 사람의 글씨가 채워지면서 세상에 한 권뿐인 기록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 사이 사용 설명서>는 책장에 오래 꽂아 두고 가끔 꺼내 보고 싶은 쪽이에요.


단풍 소식이 하나둘 들려오는 10월 중순의 금요일이에요. 바람이 제법 차가워져서 그런지 이렇게 몽글몽글한 책이 더 반갑더라고요. <우리 사이 사용 설명서> 덕분에 한 주 피로가 사르르 녹은 기분입니다. 이번 주말엔 옆 사람한테 떡볶이 먹을래 한마디 건네 보시고요, 점 개수 세다가 등짝 맞지 않게 조심하세요. 따뜻한 가을 주말 보내세요.


서로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둘만의 매뉴얼을 함께 써 내려가는, 귀엽고 다정한 커플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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